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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설명하기는 어려워.”

"그럼 어디서는 말할 수 있는데?"

당장 대답하진 못한 채, 아스나는 어머니의 옆까지 다가가선 왼손으로 몸 뒤에 숨겨놓았던 것을 내밀었다. 대기 상태인 어뮤스피어였다.

‘VR 월드……,잠깐이면 되니까, 이걸 써서 가줬으면 하는데가 있어.”

은색 원관을 흘끔 쳐다보기만 했을 뿐인데도, 어머니는 징그러운 물건을 보듯이 눈살을 찌푸렸다. 논할 여지도 없다는 식으로 오른손을 휘저었다.

“싫다, 그런 건. 얼굴을 마주하고 못할 이야기는 들을 마음도 없어.”

"제발 부탁이야, 엄마. 꼭 보여주고 싶은 게 있어서 그래. 5분 이면 되니까……."

여느 때 같으면 미안하다는 한 마디와 함께 물러났을 상황이다. 하지만 아스나는 오히려 한 걸음 더 나아가,바로 앞에서 어머니의 눈을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

"제발. 내가 지금 무엇을 느끼고 무엇을 생각하는지, 그걸 이야기하려면 여기서는 안 돼. 한 번이면 되니까……,내 세계를 엄마가 봐줬으면 해.”

"……."

어머니는 더더욱 눈살을 찡그리며 입술을 꽉 다문채 가만히 아스나를 보고 있었으나, 몇 초 후 긴 한숨을 내쉬었다.

“ㅡㅡ5분 만이야. 그리고 무슨 말을 하건, 엄마는 널 내년에는 그 학교에 보낼 생각이니까. 이야기 끝나면 신청서 써야 해."

”……응.”

아스나는 고개를 숙이고 왼손의 어뮤스피어를 내밀었다. 어머니는 건드리는 것도 싫다는 듯이 얼굴을 찡그리면서도,그걸 받아들고 익숙지 않은 손길로 머리에 썼다.

“어떻게 하면 돼?"

아스나는 재빠르게 크기를 조절해주며 말했다.

"전원을 켜면 그대로 자동 접속되니까, 안에 들어가면 내가 갈 때까지 기다려줘."

어머니가 가볍게 끄덕이고 의자 등받이에 몸을 묻는 것을 확 인하며,아스나는 어뮤스피어의 오른쪽에 달린 전원 스위치를 눌렀다. 온라인 통신 인디케이터가 점등 상태에 들어가고,대뇌 접속 인디케이터가 불규칙한 점멸을 시작했다. 금세 어머니의 몸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아스나는 서둘러 서재를 뛰어나와, 복도와 계단을 힘껏 달려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 털씩 침대에 뛰어들어 손에 익은 어뮤스피어를 머리에 뒤집어썼다.

파워 스위치를 켜자 눈앞에 방사형의 빛이 뻗어나오고, 아스나의 의식을 현실에서 분리해주었다.

눈에 익은 원목 거실에 메인 캐릭터인 운디네의 모습으로 나타난 아스나는, 방안을 획 둘러보며 <에리카>의 모습을 찾았다. 식기 선반 옆에 걸린 전신거울 앞에서, 떡잎색 단발머리를 가진 실프 소녀가 서서 자신의 모습을 비춰보는 것을 금방 발견했다.

아스나가 다가가자 에리카/쿄코는 어깨 너머로 흘끔 돌아보더니 현실세계의 그녀와 완전히 똑같은 몸짓으로 눈살을 찡그 렸다.

"어쩐지 이상한걸. 모르는 얼굴이 내 마음대로 움직이다니. 게다가……."

발끝으로 몇 번인가 몸을 들썩들썩해 본다.

"어찐지 몸이 가벼워."

“그야 그렇지. 그 아바타의 체감 체중은 40킬로그램 정도인걸. 현실하고 한참 다를거야.”

미소를 지으며 아스나가 말하자, 어머니는 다시 불쾌한 듯이 눈살을 찌푸렸다.

"실례야. 난 그렇게 무겁지 않아. ㅡㅡ그러고 보니……, 넌 저쪽하고 얼굴이 똑같구나."

"응……,어쩌다 보니."

"하지만 실물이 좀 더 토실토실한 것 같은데.”

"엄마야말로 실례야. 현실하고 똑같다구."

대화를 나누며, 아스나는 전에 어머니와 이렇게 스스럼없는 대화를 한것이 대체 언제일까 문득 생각했다. 조금 더 이대로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어머니는 두 팔을 가슴 앞에서 팔짱을 끼더니 잡담은 그만두자는 의사를 표했다.

"자, 이젠 시간 없어. 보여주고 싶다는 게 뭐지?"

“……이쪽으로 와."

아스나는 한숨을 꾹 참으며 거실을 가로질러, 평소에는 아이템 창고로 쓰는 조그만 방의 문을 열었다. 어머니가 어정쩡한 걸음걸이로 따라오기를 기다렸다가 작은 방 안쪽의 조그만 창문으로 데려갔다.

남향 거실에서는 잔디가 깔린 넓은 정원과 오솔길, 야트막한 구릉과 그 너머의 호수를 아름다운 풍경화처럼 조망할 수 있지만,북향인 이 창고의 창문으로는 풀이 무성한 뒤뜰과 조그만 넷물, 코앞까지 뻗은 침엽수림만이 보였다. 이 계절에는 대부분 눈에 뒤덮여, 썰렁하다는 것 말고는 표현할 말이 없는 풍경이다.

하지만 그것이야말로 아스나가 어머니에게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다.

아스나는 창문을 열더니 깊은 숲을 바라보며 말했다.

“어때? 비슷하지 않아?"

어머니는 다시 눈살을 찌푸리며 살짝 고개를 가로저었다.

“뭐하고 비슷하다는 거니? 그냥 시시한 삼나무 숲이잖……."

말은 도중에 빨려들 듯이 사라졌다. 입을 반쯤 벌린 채, 어딘가 먼 곳을 보는 듯한 눈빛으로 창밖을 응시했다. 그 옆 얼굴에 대고 아스나가 가만히 속삭였다.

"그렇지? 생각나지……? 외할머니랑 외할아버지가 살던 집.”

아스나의 외조부, 다시 말해 어머니의 친부모는 미야기 현의 산간지역에서 농사를 지으며 살았다. 집이 있던 곳은 험준한 계곡 틈을 누비고 지나가면 나타나는 조그만 마을로, 논은 모두 산자락을 따라 층층이 만든 계단식 논이라 기계화 같은 것 은 생각도 할 수 없었다. 주로 경작한 것은 쌀이지만, 수확할 수 있는 것이라곤 한 가족이 1년 먹으면 없어질 만한 양이었 다.

그래도 어찌어찌 딸 쿄코를 대학까지 보낼 수 있었던 것은, 소소하나마 선조 대대로 내려온 삼나무 숲 덕이었다. 오랜 목조 주택은 산기슭에 파묻히듯이 세워놓았으며, 툇마루에 앉으면 보이는 것이라곤 조그만 마당과 시냇물, 그리고 그 너머의 삼나무 숲뿐이었다.

하지만 아스나는 어렸을 때부터 교토의 유우키 본가보다도, <미야기의 할머니 할아버지네>에 가는 것을 좋아했다. 매년 여름방학과 겨울방학이 되면 부모님을 졸라 다녀왔으며, 외할머니 외할아버지와 같은 이불에서 이런저런 옛날이야기를 듣곤 했다. 여름에는 툇마루에서 빙수를,가을에는 외할머니와 함께 곶감을 먹었던 기억 등 많은 추억이 있지만, 특히 좋았던 것은 한겨울에 호리고타츠에 들어앉아 귤을 먹으며 창밖의 삼나무 숲을 바라보는 것이었다.

외할머니와 외할아버지는 숲을 보는 게 뭐 그리 재미있느냐고 이상하게 여겼지만, 하얀 눈 속에 시커먼 삼나무 줄기가 한 없이 이어진 광경을 보고 있으면 마음이 빨려드는 것 같았다. 자신이 눈 밑의 굴에서 봄을 기다리는 생쥐가 된 것처럼 불안한 듯 따뜻한 듯 신비한 기분을 느끼며, 언제까지고 숲을 바라 보았다.

외할머니와 외할아버지는 아스나가 중학교 2학년 때 잇달아 타계했다. 논과 산은 모두 팔았으며, 살 사람이 없는 집도 허 물었다.

그래서 미야기의 산촌에서는 물리적으로도 관념적으로도 멀리 떨어진 아인크라드의 제22플로어에 이 집을 사고 북쪽 창으로 눈 쌓인 침엽수림을 보았을 때, 아스나의 가슴에는 눈물이 날 것 같은 향수가 솟아났다.

어머니가 가난한 농촌 생활을 최소한 그리워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은 잘 안다. 그러나, 그래도 아스나는 이 창문을 통해 보이는 광경을 어머니에게 꼭 보여주고 싶었다. 그녀가 과거에 매일같이 보았지만, 억지로 잊어버렸을 풍경을.

어느샌가 약속한 5분은 지나고 말았지만, 어머니는 여전히 말없이 삼나무 숲을 바라보았다. 그 옆으로 나아가, 아스나는 천천히 말을 시작했다.

"내가 중1 때, 여름방학에 있었던 일 기억나? 엄마랑 아빠랑 오빠는 교토에 갔지만, 나는 꼭 미야기에 가고 싶다고 고집을 부려서 정말 혼자서 가버렸잖아.”

“............기억해.”

"그때 있지, 내가 외할머니랑 외할아버지에게 사과했어. 엄마가 성묘를 못 와서 미안하다고.”

"그때는……,유우키 본가에 꼭 가야만 히는 불사가 있 어서……."

“아니, 뭐라고 하는 게 아니야. ……내가 사과하니까,할아버지는 찻장에서 두꺼운 앨범을 꺼내서 가져왔어. 안을 보고 엄청 놀랐어. ㅡㅡ엄마의 첫 논문에서 시작해, 여기저기 잡지에 기고했던 원고며 인터뷰 기사까지, 전부 철을 해놨던 거야. 온라인에 올린 것까지 프린트해 붙여놨던걸. 두 분 모두 PC는 하나도 모르셨는데 ……."

"……."

"그리고 나한테 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