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수 많은 학자들이 ‘권력’(power)의 본질을 이해하고 이론화하기 위해 노력해왔다. 현대 사회과학의 초창기 연구는 우리 사회가 권력을 가진 집단에 의해서 움직인다고 보고 ‘누가’ 권력을 가졌는가에 집중하였다. 예를 들면 밀스 (C. W. Mills) 라는 학자는 군산복합체가 (military-industry complex) 미국을 움직인다고 생각하였고, 이들은 자기들끼리 혼인까지 해가며 권력을 유지하고 확장시킨다고 보았다. 반면, 권력이 특정 그룹에 집중된 것은 아니라고 본 다원주의자 로버트 달(Dahl)과 같은 학자는 권력의 속성을 관계적(relational)이라고 보고, 권력이라는 것은 어떤 사람이 권력을 행사하여 다른 사람으로부터 순응을 이끌어내고 그들의 행동을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이끄는 것으로 이해하였다. 이처럼 자신의 선호하는 방향으로 남의 행동을 바꾸는 것이 바로 권력의 첫번째 얼굴(face)이다.
또다른 학자들은 어떤 결정을 내리는 과정 자체를 장악하고 자신의 선호에 맞지 않는 의제가 올라오지 못하도록 막는 것이 권력의 속성이라 보았다. 이를 테면, 기업 이익이 장악한 의회에 노동권, 환경관련 이슈가 의제로 채택되지 못하도록 체계적으로 움직인다는 것이다. 이것은 권력의 두번째 얼굴로 불려졌다. 이런 형태의 권력은 어떻게 보면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야누스(Janus)적 성격을 가진 것으로 우리가 짐작은 할 지언정, 그런 권력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것을 밝혀내기는 어렵다.
위에 언급한 권력의 두가지 얼굴이 어떤 행동이나 결정을 하도록 혹은 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으로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는 반면, 학자들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권력의 속성에 관한 후속연구를 계속 쏟아내었다. 예를 들면 루크스 (S. Lukes) 같은 학자는 어떤 권력의 경우, 파워를 가진 엘리트 집단이 피지배집단으로 하여금 자신들의 이해에 반하여 지배 엘리트의 이익을 위해 ‘자발적’으로 행동하도록 만드는 속성이 있다는 것을 주장하였다. 즉, 피지배자들이 이렇게 행동하는게 맞다는 인식을 하게끔 조작(manipulate)하고, ‘아무 불만없이’ 엘리트 집단의 이익에 맞도록 편향된 결정을 받아들이도록 하는 권력의 속성이 있다는 것이다. 이는 권력의 세번째 얼굴이다. 즉 없는 것을 있다고 믿도록, 있는 것을 없는 것으로 믿도록 조작하는 권력인 것이다.
초엘리트사회의 존재와 인지부조화
이 글을 읽는 독자 중 어떤 분은, “아니 바보도 아니고 요즘 세상에 그런 권력이 어디있다. 다 드러나지”라고 하실지도 모른다. 그렇다. 아무 정보도 없이 주류 세상에서 동떨어져 살던 아마존 주민, 아팔라치안 산맥에 있는 광산 주민 등의 사람들이 아니라면 요즘같이 인터넷이 있고, 정보홍수의 세상에서 자신의 권리 희생을 ‘원래 그런 것’으로 당연시여기며 지배엘리트 이익에 복종할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우리가 어쩌다 염전노예 생활을 한 사람, 섬에 갇혀 노예처럼 산 사람들 이야기를 들으면 경악하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만약 그런 형태의 정치 권력행사의 사례가 존재한다면, 현대 민주주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결코 받아들일 수 없으며, 우리의 가치관, 민주주의 정치관과 어긋나므로 필연적으로 인지부조화를 일으키고 사회적 갈등으로 발전할 수 밖에 없다.
그런데 어느 전직 국회의원이 최근 한 방송에서 어떤 주제에 관해 토론하는 가운데, 대한민국에 일반 서민이 생각하기 어려운 ‘초(超)엘리트’ 집단이 존재한다고 밝혔다. 그분에 따르면 초엘리트만의 인간관계가 형성되어 있고, 이들에게 어떤 특혜가 있을 수 있으나 그것이 불법은 아니기 때문에, 도덕적으로는 일반 시민들이 이해하기는 어렵고 박탈감을 느낄 수는 있을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이는 마치 재벌가나 절대권력자들의 생활을 다룬 막장드라마에서 “당신들은 알지 못하는 우리들만의 사회가 있고, 그곳만의 질서가 있어. 불만은 있겠지만 그렇다고 불법은 아니야”라며 김치싸대기를 날리는 어떤 주인공의 외침같이 들리지 않는가?
좀 더 솔직해지자. 절대왕정이 무너지고 근대화가 진행되면서 우리는 모두 천부인권을 가진 존재로서 타고난 계급없이 평등해졌다고 믿어왔지만, 사실 우리 가운데 초엘리트 집단, 초엘리트 사회가 존재하는 것을 부인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분명 일반인들이 상상하기 힘든 삶을 영위하는 하는 사람들이 존재한다. 그것이 자본주의 부작용이건 아니건, 솔직히 대기업 회장님 가족의 생활과 일반 서민의 생활이 어떻게 같을 수가 있겠는가?
그런데 그런 초엘리트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과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것’은 분명 다른 문제다. 초엘리트가 우리와 다른 세상에 살고 있다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것을 우리는 소위 ‘적폐’라고 생각해오지 않았던가? 그 적폐를 없애고 사람 살만한 세상을 만들어보자고 그렇게 치열하게 살아온 것 아니었는가? 그 격차를 인정하되, 차이를 줄여나가는 것이 우리가 가진 민주주의와 시장에 대한 믿음이 아니겠는가? 그 차이를 극복하기 어려우면 국가가 개입해서라도 고치려고 하는 것이 우리의 기대아니었는가? 그것이 특혜이긴 하지만 불법은 아니라는 초엘리트의 외침은, 소위 ‘법꾸라지’일 뿐 당연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그 전직의원이 이야기 한 권력의 세번째 얼굴로서의 초엘리트 사회를 받아들일 수 없고, ‘그들만의 리그’가 존재하는 세상을 인정할 수 없기 때문에 갈등이 일어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The Other Korea’의 시대를 단호히 거부하자
세계2차대전 이후 1950년대 미국은 그 당시까지 존재했던 나라 중 물질적으로 가장 풍요로운 사회(‘Affluent Society’)가 되었고, 현재도 헐리웃 영화를 보면, 가끔 1940-50년대의 미국의 풍요와 영향력을 그리워하는 대사들이 나온다. 소득의 분배도 골고루 이루어졌고, 그야말로 없는 것이 없는 ‘갓 블레스 아메리카’(God bless America)였다. 그런 가운데 마이클 해링턴(Harrington)라는 학자가 세계대전과 한국전쟁 이후 미국인의 25%가 빈곤층에 해당하며, 그들은 말그대로 풍요로운 주류 미국사회와 ‘다른 아메리카’(The Other America)라고 명명한 1962년 출간 저서는 빈곤이라는 단어조차 생소하던 미국에 큰 충격을 가져다 주었다. 이 책이 가져온 충격은 케네디 대통령을 이은 존슨 대통령이 ‘위대한 사회’(Great Society) 프로그램으로 사회지출을 대폭 늘리는 정책적 변화를 가져오게 되었다.
우리나라는 지금의 시각으로 보면 매우 불평등한 사회로 보일지 몰라도 경제적 성장을 이룩한 국가 가운데 비교적 평등한 부의 분배를 이루어온 국가에 해당한다. 그러나 1990년대 말 외환위기 이후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이 늘어났고, 부의 양극화는 급속히 진행되었다. 이른바 초엘리트가 등장한 반면, 이 물질적 풍요의 시대에 먹을 것이 없어 일가족이 극단적 선택을 하는 경우가 심심찮게 보도되고 있다. ‘다른 코리아’(The Other Korea)가 현실적으로 존재한다는 이야기다.
‘다른 아메리카’의 충격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세계에서 가장 불평등한 국가가 되고 말았다. 블루칼라 노동자의 실질임금은 1970년대 후반 이후 전혀 증가하지 않았다. 초엘리트에 속하는 월스트리트 기업의 CEO는 수억달러의 연봉을 받는데 말이다. 지금 미국사회의 난맥상은 단순히 인종차별이 아니라 이런 ‘다른 아메리카’에 대한 저항일지 모른다.
우리는 저 너머 하이캐슬(high castle)에서 우리와 다른 질서속에 살아가는 초엘리트의 ‘다른 코리아’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는가? 우리는 21세기에 먹을 것이 없어 고민하는 빈곤계층이 사는 ‘다른 코리아’의 존재를 용인할 것인가? 우리의 대답은 단호히 ‘아니오’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필자는 적어도 그런 세상을 물려주고 싶지 않다.
권력의 세가지 얼굴은 정치인들이 빠지기 쉬운 부패의 유혹을 제대로 보여준다. 권력의 속성은 각기 다른 속성을 보여주지만, 한가지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바로 그 권력을 떠받치기 위해 일반 시민인 우리들의 희생을 강요한다는 것이다. 세가지 권력의 얼굴은 정치인들끼리 서로 봐주기, 생각과 가치가 달라도 서로 지역구에 이득이 되는 정책 통과시켜주기 등 그들만의 리그를 만들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정치인은 정치인대로 이러한 권력의 속성을 이해하고 권력행사에 있어서 항상 겸손해야 한다. 그러나 일반 시민들도 정치인이 그 자리에 있는 한 언제든지 변할 수 있는 존재로 인식해야 한다. 권력은 감시의 대상이지 선망의 대상이 아니라는 점을 명심하자.
[굿모닝베트남] 2020년 9월
조 바이든(Joe Biden)이 미국 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선출되기 전까지 유력 후보 중 한명이었던 버니 샌더스(Bernie Sanders)는 유럽 좌파정당보다도 더 급진적인 공약때문에 소속 정당에서조차 우려섞인 비판을 받았고, 결국은 대선후보로 선출되는데 실패하였다. 그 자신은 ‘북유럽식’ 사회주의를 추구한다고 해명해왔지만, 그의 무상교육, 보편적 의료보험, 월스트리트의 은행들에 대한 공격 등은 ‘북유럽식’ 실상과는 거리가 있었다. 그의 사회주의적 성향 때문에 몇몇 논란이 되는 국가에 대해 애매한 태도를 취하기도 했는데, 특히 그는 우고 차베스(Hugo Chavez, 1999-2013) 치하에서 많은 복지정책을 집행한 베네수엘라를 ‘민주적 사회주의 국가’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차베스-마두로(Maduro)로 이어지는 베네수엘라 정권의 실상은 ‘민주적’인 정치와는 매우 큰 간극이 있었고, 친위쿠데타, 야당에 대한 탄압, 언론 통제 등으로 나타난 비민주적 현실은 샌더스에게 책임있는 설명을 요구하는데 이르렀다. 그동안 베네수엘라는 샌더스 말고도 많은 호사가(好事家)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도대체 베네수엘라는 어떤 나라이길래 이런 논란이 일어나는 것일까?
기름 한방울 나지않는 우리의 관점에서 보자면 베네수엘라는 그야말로 배부른 원유부국이 아닐 수 없다. 세계 최대 매장량을 보유하고 있으며, 한때 라틴 아메리카에서 가장 1인당 GDP가 높은, 소위 잘나가는 국가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 현실은 어떤가? 유엔난민기구(UNHCR)나 여러 국제기구의 보고에 따르면, 베네수엘라는 정치적 불안정, 식료품 등 필수물품의 절대부족과 수급불안, 살인적인 인플레이션 때문에 340만명에 이르는 국민이 국경을 넘어 이웃나라로 탈출하고 있다고 한다. 이 나라의 총인구가 3천2백만 정도인 것을 감안하면 10%가 넘는 국민이 도주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들 국제기구들은 빈곤과 정치 불안정으로 국경을 넘는 모험을 강행한 난민 숫자가 최대 5백만에 이를 것으로 예측한다. 가히 모세가 이스라엘 민족을 이끌고 이집트 땅을 탈출한 엑소더스(Exodus)에 비견될 정도다.
그렇다고 성공적으로 탈출한 이들은 행복한 삶을 살고 있을까? 콜롬비아, 페루, 칠레 등 인근 국가에서는 합법적인 체류신분(이민, 난민 지위)을 취득한 베네수엘라 국민이 4분의 1에도 채 미치지 못하며, 불법체류를 하는 사람들은 성매매, 착취, 인신매매, 외국인 혐오범죄 등에 노출되어 있는 실정이다. 심지어 합법적 이민을 한 베네수엘라인에게도 현지인의 시선이 좋지 못하다. 더구나 코로나바이러스의 남미에서의 대유행은 상당수 국가들이 빗장을 더욱 철저히 걸어잠그고 통제하도록 하여 베네수엘라를 탈출한 이들의 삶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는 실정이다.
남아있는 자들에게도 희망이 없기는 마찬가지다. 치킨 배달료를 2-3천원 올려도 불매운동이 일어나는 우리나라에서 만약 한달 전 닭 한마리 가격이 1만원이었는데 지금 1만 7천원 이라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그리고 매달 치킨 가격표를 바꿔야 한다면? 사진이 보여주는 것처럼 베네수엘라에서 현재 닭 한마리를 사려면 엄청나게 많은 지폐를 지불해야한다. 살 수 있는 닭 자체도 부족하거니와 화폐가치가 휴지조각에 가깝다. 오히려 지폐를 모자란 화장지로 대체해야할 정도다. 이처럼 베네수엘라 경제는 말 그대로 파탄상태다. 베네수엘라는 하이퍼인플레이션(hyperinflation – 물가상승이 통제를 벗어난 상태)을 수년째 겪고 있으며, IMF의 예상에 따르면 2018년 물가상승이 백만퍼센트에 달한다고 할 정도다. 특히 먹을 것이 부족한 상황은 전 국민의 영양실조를 가져왔고, 음식물 쓰레기를 뒤지는 아이들을 쉽게 볼 수 있을 정도다.
베네수엘라의 흥망
왜 자원부국인 베네수엘라가 이렇게까지 몰락하게 되었을가? 자원부국이 경제적 침체와 민주주의의 후퇴를 겪게 된다는 ‘자원의 저주’(resource curse)의 전형적인 사례일까? 아니면, 차베스 이후 지속된 포퓰리즘적 퍼주기식 복지정책 때문인가? 아니면 어느 지방자치단체장의 이야기처럼 미국의 제제 때문일까? 우선, 1999년 집권한 반미성향의 차베스 정부는 석유, 철강 등 돈이 되는 기간산업을 국유화하고, 친위쿠데타 등을 통해 오랫동안 지배하였으며, 특히 미국의 버니 샌더스가 칭찬할 정도로 사회프로그램을 확장하였다. 2000년대 이후 유가의 이상 폭등현상은 차베스 정권에 오일머니를 가득히 안겨주면서 교육, 의료, 식량, 주택 등 사회복지 혜택을 3천만 국민에게 ‘사회적 형평’을 강조하며 무차별적으로 제공하였고, 실제로 빈곤을 줄이는 효과를 가져오게 되었다. 2000-2013년 사이에 사회복지에 쏟아부은 금액은 GDP의 40%에 달하며, 이는 OECD 평균 사회지출의 두배에 해당하는 수치였다. 당연히 정권에 대한 하층민들의 지지는 절대적이었다.
그러나 무상혜택 등 사회복지 프로그램을 위해서 국가화한 석유산업 등에 대한 과도한 의존은 결과적으로 패착을 가져오게 되었다. 물론 차베스 자신도 국가경제의 다양화를 원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과도한 복지지출은 결과적으로 원유수출에 대한 과도한 의존을 심화시켰고, 95%에 달하던 석유의존도는 2014년 이후 유가폭락과 미국의 셰일가스 혁명 등으로 된서리를 맞으면서 국가경제기반이 완전히 붕괴되었다. 복지에의 지출로 생산설비 재투자에 인색하게 되었고, 반미주의 성향때문에 기술력을 갖춘 메이져 석유회사들을 쫓아내는 바람에 생산성 자체도 매우 떨어졌다. 원유를 보관할 저장고조차 충분하지 않아 최대매장량을 가지고도 많은 생산을 할 수 없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주변 국가들에 대한 영향력을 강화하기 위해 시장가 이하로 원유를 판매해 온 것도 부메랑으로 돌아왔다. 결국 부족한 국고를 메우기 위해서 볼리바르 화폐를 더 찍어내는 결정을 하였고, 결과적으로 이것도 살인적인 인플레이션으로 되돌아오게 되었다.
석유에 대한 지나친 의존도와 과도한 사회복지 프로그램으로 결국 정부가 배급하는데 어려움을 겪게되자 민심은 바로 응답하기 시작하였다. 시장이 정상적으로 작동할 것이라는 기대는 져버린지 오래며, 약탈과 강도가 일상화되었다. 사회적 불만으로 정국이 불안정해지자 차베스의 후임인 마두로는 오히려 야당, 시민, 미디어를 탄압하고, 오히려 현 상황이 ‘21세기형 사회주의’를 내세운 자신들에 대한 미국의 제재때문이라며 책임을 돌렸다. 미국이 마두로와 부패한 정치인들이 불법적 금광채굴과, 국유화된 유전 및 기타 사업을 독점하여 불법적으로 이득을 취하여 인권유린과 범죄행위를 하는 것을 방지하려고 결정한 경제제재 탓을 한 것이다. 그러나 저명 브레인집단인 브루킹스연구소와 하버드대 연구진 등 여러 경제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베네수엘라의 경제적 붕괴는 이미 2017년 미국 독재정권에 대한 제재를 가하기 시작하기 훨씬 이전부터 심각했다는 것이 명확하게 드러나고 있다.
정치인들의 편견의 동원
베네수엘라의 몰락은 물론 단순히 포퓰리즘적 복지정책, 자원의 저주, 혹은 미국의 제재 때문이라고 단정짓기는 어렵다. 한 나라의 경제, 사회, 정치가 그렇게 간단하게 이해하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그러나 결과적으로는 국가경제개발을 위해 생산수단의 다양화와 현대화, 시장의 질서유지, 국가경제 수준을 뛰어넘는 과도한 복지지출이 결국은 정치적 불안정을 가중시키고 총제적인 위기를 불러왔다. 미국의 제재는 이미 활활 타오르는 불길에 기름을 부은 것이었다. 정치인의 선택은 그래서 책임이 막중한 것이다.
4차산업혁명과 생산수단의 변화가 가까운 미래에 우리의 삶에 큰 변화를 가져올 것은 이미 많은 연구를 통해서 예측가능하다. 아마도 어느 순간, 기본소득과 같은 현금성 복지가 규칙적으로 지급되어야 할 때가 곧 올지도 모르기 때문에 작은 규모라도 실험해보는 것도 좋은 생각일 수 있다. 그 가능성을 두고 열린 마음으로 토론해야 한다. 스웨덴의 복지국가로의 길이 1930년대 말 ‘생산성 증대가 곧 효율과 과실의 공유’라는 사회적 대타협에서 시작되었듯이 어느 한 정파의 정치적 선택이 아니라 대대적인 사회적 토론과 공감이 필요한 시기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자신이 추구하는 아젠다를 위해 사실을 왜곡하거나 불리한 정보는 감추는 행태는 지양해야 한다. 정치인들은 흔히 자신이 추구하는 주장이나 정책을 관철하기 위해 자신에게 유리한 정보를 동원하고는 한다. 샤츠슈나이더(Schattschneider)라는 학자는 이를 ‘편견의 동원’(mobilization of bias)라고 부른다. 정치인은 실패를 인정하거나 자신의 입장에서 후퇴하는 것을 정치적 패배라고 흔히 생각하기 때문에 기를 쓰고 관철하려 하지만, 책임있는 국가의 리더라면 보다 신중해야하지 않을까. 기본소득이나 복지확대를 두고 매스미디어의 댓글을 보면 정신이 아득하다. 전문가들의 의견은 현실을 모르는 글쟁이들의 속좁은 태클이나 기득권자를 대변하는 것으로 치부되기 일쑤다. 돈이 없으면 더 찍어내라는 의견도 심심찮게 보인다. 그러나 정치인은 그러면 안된다. 그 자리에 앉혀준 국민은 정치인들에게 보다 엄중하고 책임있는 자세를 요구하며, 그들의 선택이 국가의 명운을 가를수도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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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가 미국을 유학을 간 첫해에 강의조교(teaching assistant)를 맡게된 과목이 하필이면 <미국 민주주의의 이론과 실제>이었고 채점과 출석체크는 물론이고 토론세션을 1시간씩 매주 해야했는데 영어가 매우 딸리던 시절이라 매주 전쟁을 치루었다. 아니, 강의실 가는 것이 공포 그 자체였다. 기본적으로 정치문제에 할말이 많은 미국인들인지라 질문이 매우 많았기 때문인데 특히 그 빠른 어투 혹은 낯선 발음들 때문에 질문을 한번에 알아듣지 못하고 두세번 물어봐야 할 상황에는 정말 필자나 질문한 학생이나 난감하기 그지 없었다. 싱가포르 대학에서 처음 교편을 잡고 몇년간은 낯선 싱가포르식 영어 (일명 ‘싱글리시’)에 적응하느라 또 고생을 해야했다. 어렸을 때부터 매우 경쟁적으로 살아온 싱가포르의 학생들 또한 수업참여도가 높을 뿐 아니라 질문도 매우 많이 하였고, 내용상 강의가 많았던 필자의 강의평가에는 항상 ‘more discussion’ (좀 더 많은 토론시간)을 요구하는 피드백이 2-3개씩은 있었다. 캐롤린 그레고이어 (Carolyn Gregoire)의 <매우 창의적인 사람들이 다르게 하는 18가지 것들>(18 Things Highly Creative People Do Differently)이라는 책에 보면, 창의적인 사람들이 보이는 특징 중의 하나가 ‘중요한 질문’을 하는 것이다. 창의적인 사람들은 현상에 대해서 관찰을 주의깊게 할 뿐만 아니라 늘 왜 (why) 혹은 어떻게 (how)라는 질문을 늘 한다는 것이다. 사실 많은 과학적, 사회과학적 발견은 바로 질문을 통해서 이루어졌다. 뉴턴이 사과가 떨어지는 것을 보며 왜 떨어지지 궁금해한 것을 생각해보라. 필자 뿐만 아니라 학문을 하는 사람들이 받는 가장 기본적인 훈련이 기존의 연구와 현상을 대조해가며 왜라는 질문을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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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모닝베트남] 변화의 갈림길에 놓인 우리사회 (2019년 11월 칼럼)
변화의 갈림길에 놓은 우리사회
[굿모닝베트남] 다가오는 현실: 기본소득의 시대 (2019년 10월 칼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