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Diving Bell and the Butterfly

Post date: Jun 14, 2015 1:04:17 PM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을 비판적 현실주의에 두되 삶의 윤리는 개인주의에 기반해야합니다.

남과 다르게 생각하는 것, 남이 침범할 수 없는 내면을 구축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자기도 모르게 타인에게 동조될 때 경계심을 가져야 합니다.

이러한 개인주의를 저는 건강한 개인주의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건강한 개인주의란 타인의 삶을 침해하지 않는 범위에서 독립적 정신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 그 안에서 최대한의 즐거움을 추구하는 것이라고 정의하고 싶습니다.

이때의 즐거움은 소비에 의존하지 않는 즐거움이어야 합니다.

물건을 사서 얻을 수 있는 즐거움이 아니라 뭔가를 행함으로써 얻어지는 즐거움입니다.

(....)

세상에 대해서는 비판적 현실주의를 견지하면서도 윤리적으로 건강한 개인주의를 확고하게 담보하려면 단단한 내면이 필수적입니다.

남에게 침범당하지 않는 단단한 내면은 지식만으로는 구축되지 않습니다.

감각과 경험을 통해서 비로소 완성됩니다.

지식만 있고 자기 느낌은 없는 사람, 자기감정을 표현할 줄 모르는 사람은 어떤 의미에선 진정한 개인이라고 보기 힘들 겁니다.

우리 사회에는 자기 스스로 느끼기보다는 남이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더 관심이 많은 사람들이 대부분입니다.

내 감정은 감추고 다중의 의견을 살펴야 되는 분위기입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이 아니라 스스로에게 물을 필요가 있습니다.

나는 지금 느끼는가, 뭘, 어떻게 느끼고 있는가? 그것을 제대로 느끼고 있는가?

견고한 내면을 가진 개인들이 다채롭게 살아가는 세상이 될 때, 성공과 실패의 기준도 다양해질 겁니다.

자기해방의 글쓰기 中

남극점 정복에 나섰던 로버트 팰컨 스콧의 <남극일기>,

엘르의 편집장 장 도미니크 보비가 20만번 이상 눈을 깜빡여 15개월간 쓴 <The Diving Bell and the Butterfly>

혹한의 시베리아 수용소를 경험한 솔제니친도, 나치 치하의 아우슈비츠를 경험한 빅토어 프랑클도 그 경험을 기록합니다.

(...)

요컨대 사람들은 그 어떤 엄혹한 환경에서도, 그 어떤 끔찍한 상황에서도 그 어떤 절망의 순간에서도 글을 씁니다.

그것은 왜일까요?

글쓰기야말로 인간에게 남겨진 가장 마지막 자유, 최후의 권능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을 빼앗긴 인간도 글만은 쓸 수 있습니다.

글쓰기는 우리 자신으로부터도 우리를 해방시킵니다. 왜냐하면 글을 쓰는 동안 우리 자신이 변하기 때문입니다.

작가의 권능 中

아마도 칼 세이건의 말일 텐데, 정확하지는 않지만 이런 말이었어요.

아무리 노력한다 해도 내 생애에 우주를 전부 이해할 수 없다. 그러나 밤하늘의 별을 보는 것만으로도 기쁨을 느낀다.

저와 소설의 관계도 그와 비슷한 것 같아요. 전 세계의 소설에 역사가 있잖아요.

밤하늘의 별처럼 많은 소설들이 있고, 제가 쓰는 건 아주 작은 일부에 불과하죠.

앞으로 남은 생애 안에 제가 아무리 잘 쓴다고 해도 밤하늘의 어떤 흔적도 되지 못할 수도 있는데,

그러나 그 세계의 일부라는 것, 내가 그 작가들 중 한 명이라는 것, 그게 어떤 기쁨을 줄 때가 있어요.

내가 그 세계의 아주 작은 일부라는 사실이 말이에요.

소설이라는 세계는 너무 거대해서 저는 어떤 파문도 일으키지 못할거예요. 그게 기쁠 때가 있어요.

광대무변한 이 우주와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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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하의 <말하다>에서 발췌. 좋은 책이다. 거의 모든 부분에 공감하며 읽은 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