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인터넷의 역사 (초안)

원문: A History of the Internet in Korea (2012.2.24+Kang revised)

작성: 전길남, 박현제, 허진호, 강경란

번역: 안정배 2012.3.26/강경란 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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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며

이 논문은 1970년대 후반컴퓨터 네트워킹 연구 및 개발로 시작된 대한민국의 인터넷 개발사를 간략하게 기술한 것이다. 한국은 1982년 세계 최초로 인터넷을 구축한 나라 중 하나이며, 1985년에는 최초의 국제 인터넷 학술대회를 개최했다.

1990년대, 한국은 1995년에 수립된 종합계획에 따라 초고속인터넷망의 개발에 주력했다. 한국은 유무선 초고속 네트워크를 선도하고 있으며, 온라인 게임, 검색엔진, SNS 등의 응용프로그램 개발을 주도해 왔다.

한편, 한국은 사이버보안, 인터넷 오용, 게임 중독과 같은 새로운 문제들에 취약했다. 한국은 다른 국가들, 특히 개발도상국들과 이 같은 경험을 공유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여왔다.

우리는 전 세계의 인터넷 개척자들과 함께 아시아 초기 인터넷 역사 및 초기 한국 인터넷 역사를 집필하고 있다.

TCP/IP 네트워크의 기원

네트워크 연구 그룹

한국의 TCP/IP 네트워크는 1979년, 전길남을 필두로 하는 컴퓨터 네트워크 연구 소그룹에서 시작되었다. 이 그룹은, 1970년대 후반 컴퓨터와 반도체를 연구하고 개발하기 위해 설립된 국립연구소이며 현재는 한국전자통신연구원(ETRI)의 일부가 된 한국전자기술연구소 (KIET)에서 구성되었다. 동시에, 서울대학교 대학원에 컴퓨터 네트워킹에 관련된 교과목이 개설되었다.

1980년한국 최초의 컴퓨터 네트워크 개발 제안서가 상공부에 제출되었으나 거절되었다. , 1981년, 같은 부처에 제출된 컴퓨터 연구 개발 관련 국책 과제 제안서의 일부로 컴퓨터 네트워크 개발 제안서 수정본이 포함되었다. 이 프로젝트가 승인되면서,이를 구현하기 위한 계획이 수립되었고, 여기서 구축된 네트워크를 ‘소프트웨어 개발 네트워크’라고 칭했다. 후에 ‘시스템 개발 네트워크’로 변경되었다.

컴퓨터 연구 개발 관련 국책 과제는 UNIX 운영체제를 비롯한 오픈소스를 이용한 개방형 시스템에 기반을 두고 있었다. KIET의 컴퓨터 네트워크 연구 그룹은 국책 과제의 컴퓨터 네트워크 부분의연구와 개발을 담당하였다. 기반 프로토콜로 TCP/IP 프로토콜을 선택하였는데, 이는 UNIX 운영체제와 조화를 잘 이루고, 여러 면에서 오픈소스의 개방형 시스템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UUCP나OSI 같은 다른 네트워크 프로토콜도 지원되었다.

주요 과제는 TCP/IP 라우터를 개발하는 일이었다. BBN의 ARPANET IMP(Interface Message Processor)는 미국과 노르웨이, 영국과 같은 NATO 국가 외에는 구할 수 없었다. 기초부터 TCP/IP 프로토콜을 개발하는 것은, 시간도 오래 걸리고 해당 업무를 담당할 인재가 부족하여 처음부터 고려 대상이 아니었다.

TCP/IP 네트워크

TCP/IP 프로토콜 구현 사례로BSD (Berkeley Software Distribution) [??] 내의 TCP/IP 대신 3Com의 UNET을선택했다. UNET의 TCP/IP는 BSD, System-V 등과 같은 UNIX 운영체제에 쉽게 이식할 수있었다. 한편, BSD TCP/IP 프로토콜은 VAX와 PDP-11 컴퓨터 등과 같이 DEC 컴퓨터 등에 종속적이어서 해당 컴퓨터에서만 잘 동작하였다. 1982년, UNET TCP/IP 소프트웨어에 기반한 라우터 개발에 많은 노력을 들인 끝에 PDP-11 컴퓨터를 기반으로 한 라우터를 개발하였다. 이 덕분에 1982년 5월, KIET의 PDP-11 컴퓨터와 300Km 떨어진 서울대 의 컴퓨터를 연결하는 TCP/IP 네트워크가 구축되었다. 이것이 한국의 TCP/IP 네트워크의 효시이다. 1982년 말, UNET TCP/IP 프로토콜은 한국과학기술원(KAIST)의 VAX 미니컴퓨터에도 적용되었고, 이후 컴퓨터 연구 개발 국책 과제를 기반으로 한 상용 제품인 삼성의 SSM-16 UNIX 컴퓨터에도 적용되었다.

TCP/IP를 운영하기 위해서는 훨씬 더 많은 컴퓨터와 네트워크 자원을 필요로 했기 때문에TCP/IP를 보완하는 네트워크 프로토콜로UUCP 프로토콜이구현되었다. 게다가 당시에는 미국의ARPANET과의 연결과 같은 국제적 TCP/IP 연결을 사용할 수 없었다. 그래서 UUCP 연결이 여러 지역 간 연결은 물론 거의 대부분의 국제 네트워크를 구성하는 기술로 널리사용되었다. [10]

OSI 프로토콜이나 PC 통신과 같은 또 다른 형태의 네트워크 프로토콜을 개발하고 적용하는 것도 함께고려되었다. 캐나다 브리티쉬 컬럼비아 대학의 X.400 메시지 시스템인 EAN과 CSNET의 IP-to-X.25 등이 주목할 만한 사례이다.

연구망

한국의 연구망

1982년, 두 개의 노드를 가진 TCP/IP 네트워크의 성공적인 개발에 힘입어, SDN을 TCP/IP 기간망을 갖춘 전국적인 연구망으로 확장할 준비를 마쳤다. 1983년, KAIST가 SDN에 추가되었고, 네트워크 운용 관리 센터가KAIST로 옮겨졌으며, KAIST에서는 VAX 컴퓨터를 SDN 허브로 제공하였다. 1985년까지 20여 개 대학과, 국립연구소, 기업 연구소가 SDN에 참여하였다 [10].

SDN은 다음과 같은 네트워크를 포함하고 있었다;

- UUCP를 이용한 국제 전화망

- CSNET의 IP-to-X.25를 이용한 X.25 네트워크

- X.400과 기타 프로토콜을 이용한 OSI 네트워크

- TCP/IP로 구축된 국내 기간망

- UUCP를 이용한 국내 전화망

- TCP/IP를 이용한 대학 캠퍼스 네트워크

SDN의 국내 기간망은 1982년에 1200 bps 속도의 직렬 인터페이스로 구성되었다. 1980년대 후반, 기간망의 대역폭이 9600 bps 이상으로 향상되었다. 국제 네트워크는 UUCP를 이용한 전화망이나IP-to-X.25를 이용한 X.25로 연결되었다 [13].외국과의 IP 연결을 제한한 미국의 정책과 국제전화 전용선의 높은 사용료 때문에 미국과의 전용선망 구축은 1990년까지 현실화되지 못했다.

SDN은 개통 당시부터 국제적 연결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1983년, 전화 회선을 통해UUCPNET과 EUNET과연결되었다. 당시는 국제전화요금을 줄이기 위해 뉴스가 담긴 마그네틱 테이프를 우편으로 보내기도 했다. 1984년에는CSNET과 전화 회선을 이용하여연결되었고, 1985년 초에 X.25로 변경되었다 [10]. SDN에서 가장 많이 활용된 응용 프로그램은 한글 이메일을 포함한 이메일, 파일전송, 가상터미널과 USENET 뉴스였다. 그러나 1990년에 태평양 통신 네트워크 (PACCOM)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한국과 미국 사이의 TCP/IP 인터넷 연결을 이용한 전용선이 구축될 때까지는, 비싼해외 통신 비용으로 인해 해외 연결은 이메일과 일부 뉴스그룹 활용으로 제한되었다[14].

아시아네트

1983년, SDN은 북미(미국의 hplabs와 seismo, 캐나다의 CDNNET)과 유럽(네덜란드의 mcvax)과 연결되었다. 1984년 2월에 열린 UNESCO 워크샵에서는 아시아의 컴퓨터 네트워크 개발에 대해 논의되었다. 그 결과 호주, 인도네시아, 일본, 한국, 싱가포르 등의 다섯개 국가가 참여한 아시아네트가 UUCP 프로토콜을 사용하여 구축되었다. 첫번째 아시아네트 회의는 1985년 10월 태평양 컴퓨터통신 국제학술대회(PCCS)에서 열렸다. 이 자리에서, 일차적으로 미국을 거쳐 아시아네트의 국가들을 간접적으로 연결하자는데 합의하였다.(그림3.) 아시아네트를 위한 메일링 리스트와 뉴스 그룹도 만들어졌다. 1986년 9월, 5차 국제 학술 네트워크샵 기간에 제 2차 아시아네트 회의가 개최되었고, 이 자리에서 아시아네트 지역을 연결하는 직통 망 연결을 구성하는 것에 합의하였다. 1987년, 호주, 인도네시아, 일본, 한국,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홍콩 등이 아시아네트로 상호 연결되었다.

국제적 협력

1982년 USENIX 회의에서부터 국제적 협력에 대한 논의가 시작되었다[15]. 아시아, 유럽, 북미의 대표들이 이 자리에서 UUCPNET과 USENET에 대해 논의했다. 위에 설명된 것처럼, 이 논의는 유럽과 북미로 연결된 망 이외의 지역 네트워크인 아시아네트의 개발로 이어졌다.

1983년, 오슬로에서 열린 2차 국제 학술네트워크샵(IANW)에 참가했던 한국은 호주와 일본의 참여를 독려해, 이듬해인 1984년 파리에서 열린 IANW 기간 중 아시아-태평양의 3개국인 한국, 일본,호주가아시아-태평양 국제학술네트워크샵(IANW-AP)을 개최했다. 이것이 세계 최초의 아시아-태평양 네트워크 회의이다.

1984년 2월,싱가포르에서 개최된 UNESCO 워크샵에서, 한국은 컴퓨터 네트워크를 이용해 아시아의 대학들을 연결하는 아시아네트를 구축하자고 제안했다. 이 제안은 같은 해에 실현되었으며, UNESCO 워크샵에 참여하지 않았던 일본과 호주도 아시아네트에 초청되었다. UNESCO 워크샵에 참석했던 아시아 국가들은 이듬해 열린 PCCS에 초청되었으며, PCCS에서 제 1회 아시아네트 회의가 개최되었다.

인터넷 학술대회

1985년,전 세계적으로 인터넷 관련 학술대회로서 처음 시도되는 국제학술대회 중의 하나인 PCCS (Pacific Computer Communication Symposium)가 서울에서 개최되었다. 아시아와 유럽, 북미에서온 참가자의 규모가 300여 명에 달했다. 비슷한 성격의 컴퓨터 네트워크 관련 국제 학술대회가 1990년대 초가 되어서야 다시 개최되었을 정도로 획기적인 행사였다. 이는 당시의 국제 컴퓨터 네트워크 분야에서 한국의 적극적이고 주도적인 참여를 보여주는 사례이기도 했다. 이를 계기로 1986년부터 한국과 일본의 컴퓨터 통신 전문가들이 모이는 JWCC(Joint Workshop on Computer Communication)이 한국과 일본에서 교대로 개최되었고, JWCC의 참가국들이 지속적으로 확대되어 ICOIN(International Conference on Information Network)라는 국제학술대회로 발전되었다. 1987년부터는 국내 네트워크 전문가들이 참가하는 동계컴퓨터통신워크샵(WCCW;Winter Computer Communication Workshop)도 시작되었다.

교육연구망

1981년 ARPANET과의 긴밀한 협조를 바탕으로CSNET[18]이미국의 대학들을 사이에 구축되었다. CSNET은 다른 대륙의 대학과 연구기관들에게 IP-to-X.25와 다이얼업을 이용해접속할 수 있는서비스를 제공했다. 1980년대 한국을 비롯한 많은 아시아 국가들은 이 CSNET에 연결되었으며, 이는 IANW와 같은 국제 컴퓨터 네트워크 공동체를 형성했다.

1981년 미국에서 IBM 메인프레임 컴퓨터를 설치한 대학들 사이에 BITNET이 구축되었고, 다른 대륙의 대학들에게 전용선으로 BITNET에 연결할 수 있는 서비스를 제공했다. IBM의 지원 덕분에1980년대 후반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의 많은 국가들이 BITNET에 참여할 수 있었다.

많은 국가들이 OSI 개발에도 참여했다. 전 세계적으로 다양한 실험들이 이루어졌고, .캐나다에서 EAN이라 불리는 OSI 프로토콜 기반의 메시지 시스템을 개발했다. 이 메시지 시스템은 캐나다의CDNNET을 비롯한 여러 나라에서 사용할 수 있었다. 일본과 한국도 X.400 메시지 시스템을 구입해각국의 네트워크인 JUNET과 SDN에서 서비스로 제공하였다.

PACCOM 프로젝트

1989년, 하와이 대학을 중심으로 호주, 하와이, 일본, 한국, 뉴질랜드를 연결하는 PACCOM 프로젝트가각 국가별 지원과 NASA와 NSF의 재정 지원으로 기획되었다. 국내에서는, 당시 SDN에 참여한 여러 기관들이 하나(HANA)라는 기구를 설립해 하와이까지의 56Kbps 전용선 비용을 분담했다. 1990년 3월, KAIST의 SUN 워크스테이션이 56Kbps의 위성을 통해 하와이 대학을 거쳐 NSFNET에연결됨으로써 하나망(HANANET)이 구축되었다.

1980년대 후반, UUCPNET과 CSNET은 X.25 데이터 패킷의 양을 기준으로 요금을 부과하고 있었기 때문에 통신 비용이 높았고, 이 까닭에 국제적인 인터넷 연결이 제한적이었다. 그러나 PACCOM프로젝트의 지원 아래 하와이 대학을 통해 NSFNET과의 전용선이 구축되면서, 이용자들이 상대적으로 저렴하게 국제 인터넷 연결을 사용할 수 있었다. 이 시기의 인터넷 응용 서비스 별 데이터 트래픽 사용량은 FTP가 가장 높았으며, 메일, 텔넷, 아키, DNS 순이었다. 1992년 8월, KAIST에 있던 하나망의 주 게이트웨이와 관리부서가 한국통신 연구센터로 이전되었다. 그 때부터 한국통신 연구센터의 하나망은 한국통신의 상업 인터넷 서비스인 KORNET을 지원하게 되었다.

하나망의 구축 이후, SDN은 국내 망을 지칭하고, 하나망은 국제 인터넷 망을 지칭하게 되면서 SDN은 서서히 이름을 잃어가게 되었으며, 1993년 ANC(학술전산망협의회)에서 더 이상 SDN이란 이름을 사용하지 않기로 결정하였다.

인터넷 조율

1980년대 중반, 한국이 국제 인터넷에 의미있게 참여하게 되는 일련의 중요한 사건들이 진행되었다. 1986년 7월, IANA(Internet Assigned Numbers Authority)에 의해 한국 최초의 IP 주소인128.134.0.0이 부여되었으며, 한국(남한)을 나타내는 국가코드인 .kr이 1986년부터 정식으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kr 아래의 2,3단계 도메인에 관한 규격과, 두 글자로 이루어진 2단계 도메인 네임(ac는 학술단체, co는 기업, go는 정부기관, re는 연구기관과 비영리단체)도 설계되었다. .kr 도메인 네임 서버로 KAIST의 컴퓨터들이 등록(예를 들면 sorak.kaist.ac.kr)되어 국내 뿐 아니라 국제적으로 .kr을 도메인 네임으로 사용하는 컴퓨터들에 자유롭게 접속할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되었고, 1993년에는 국가 코드인 .kr과 IP 주소, AS 숫자 등을 관리하기 위해 KRNIC이 구성되었다.

인터넷 자원 관리는 초기에는 SDN 내의 일부 그룹에 의해 이루어졌으나, 이후 공식적인 인터넷 조율 기구의 필요성이 제기되어 1991년 학술전산망협의회(ANC)가 구성되었다[20]. 상업 인터넷 서비스 사업자들이 등장하게 되면서, ANC는 1995년에 한국전산망협의회(KNC)로 발전하였다[21].

초고속인터넷

초고속정보통신망 구축 종합계획(National Broadband Project)??

한국 정부 역사상 가장 큰 국가 프로젝트인 초고속정보통신망 구축계획(KII)이 1995년 수립된 종합계획과 함께 착수되었다[3]. 1995년부터 1997년까지 첫 단계로 80개 도시에 비동기 전송방식(ATM) 시험 네트워크가 건설되었고, 두번째 단계로 1998년부터 2000년까지 전국적인 ATM 네트워크 서비스가 시작되었다. 전국적인 광 네트워크를 구축함으로써주요 도시에 위치해 있던 인터넷 기간망의 대역폭이622Mbps로 향상되었으며, 국제 회선도 290Mbps로 향상되었다. 2000년까지 국내 144개 지역에 대용량 고속 광통신망이 건설되었다[22].

정부가 KT와 함께 ATM 스위치에 기반한기간망을 건설하던 1998년, 국내 최초의 초고속 인터넷 서비스 사업자인 두루넷이 인터넷 라우터와 광 이더넷을 기반으로 한 기간망을 건설했고, KT와 두루넷을 포함한 정부와 ISP 사업자들 사이에서 ATM과 라우터를 둔 기간망에 대한 추가 논의가 이루어졌다. 그 결과, 정부와 KT는 2001년부터 2005년까지 ATM 스위치를 증축하고 ATM-MPLS 네트워크를 추가하는 형태의 3단계 국가기간전산망 구축 프로젝트를 시행하기로 결정했고, 다른 상업 ISP들은 인터넷 라우터를 이용해 기간망을 구축했다.

인터넷 서비스에 대한 수요가 증대되고 있었지만, 개별 가정에서 인터넷에 접속하기 쉽지 않았던 1990년대 후반, 한국에서는 "PC방"이라고 불리는 인터넷 카페가 일반인에게 인터넷 접속 환경을제공하기 시작했다. 1995년 넷스케이프라는 이름의 인터넷 카페가 최초로 개장한 이래, 급속도로 확산된 인터넷 카페는 1999년 15,150 곳에 달했다[24]. 인터넷 카페 사용자들이 1990년대 후반에 상용화된 초고속 의 초기 서비스 가입자들이 되었다 .

온라인 게임 이용자의 숫자도 증가했는데, 인터넷 카페가 이 현상의 중심에 있었다. 1998년, 온라인 전략 시뮬레이션 게임인 스타크래프트가 대중에게 널리 퍼졌는데, 이들이 주로 게임을 하던 곳이 바로 인터넷 카페였다. 온라인 게임을 즐기는 10대~20대의 빠른 인터넷에 대한 열망은 개별 가정의 인터넷 접속을 대중적인 풍토로 만들었다.

초고속 인터넷

1990년대 말엽까지 64Kbps(다이얼업)에 불과했던 개별 가정의 인터넷 접속 속도는 1998년 7월 두루넷이 초고속인터넷 서비스를 시작하면서 향상되었다. 두루넷은 양방향 케이블TV 망을 이용해약 1Mbps의 인터넷 연결 서비스를 제공했다[24]. 1999년, 하나로통신과 KT도ADSL(비대칭 디지털 가입자 회선) 서비스를 시작하면서 초고속 인터넷 서비스 사업자에 동참하였다. 케이블 모뎀과ADSL을 사용한 초고속 서비스 업체들은 가입자를 유치하기 위한 치열한 경쟁을 벌였고, 그 결과 인터넷과 부가서비스의 품질은 향상되고 요금은 저렴해지게 되어, 더 많은 사람들이 초고속 인터넷 서비스를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한국의 인터넷 서비스 이용료는 세계 최저 수준이었기 때문에, 초고속 인터넷 사용자는 아주 빠른 속도로 증가했다. 2001년 말, 초고속 인터넷이 연결된 가구수는 780만 가구를 초과해 전체 가구의 50%를 넘어섰다[22](그림4.). 인터넷 사용인구는 1999년 1천 만 명, 2002년에는 2천 6백만 명으로 인구의 절반을 넘어섰다[23]. 인터넷 뱅킹도 상당히 편리했기때문에 2001년 11월에는 인구의 30% 정도인 1천 1백만 명이 인터넷 뱅킹을 사용하게 되었다.

2006년, 100Mbps 이상의 속도를 내는 FTTH(Fiber-to-the-Home) 서비스가 시작됐다. FTTH, ADSL, 케이블 모뎀을 위시한 초고속 인터넷의 확산은 한국을 세계 최고의 인터넷 환경을 가진 국가가 되는데 주요한 계기를 제공했다[26]. 이와 같은 초고속 인터넷의 개발의 도약은 다양한 멀티미디어 서비스의 확장을 촉구했고, 인터넷과 방송, 통신을 접합한 유비쿼터스 네트워킹으로 진화할 수 있는 길을 닦았다. 이후, 초고속 무선 인터넷 서비스가 휴대전화 서비스와 와이브로(Mobile WiMax)를 비롯한 초고속 데이터 서비스를 통해 제공되었다.

초고속 무선 인터넷

한국은 2000년 10월 세계최초로CDMA 2000 1x 기술을 세계에 선보인 이후, 무선 인터넷 시장을 주도하고 있다. EV-DO는 2002년 1월에 서비스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데이터 속도가 낮고 접속 이용료가 비싸서 모바일 단말을 사용하는 무선 인터넷 서비스는 다양한 분야에 적용되지 못했다. 한국은 와이브로라고 불리는 모바일 와이맥스(Mobile WiMax)를 개발했고, 2002년 2월 한국 정부는2.3-2.4GHz 주파수의 100MHz 대역폭을 와이브로 서비스에 할당했다. 그리고 2005년, ITU는 와이브로를 IEEE 802.16e 표준[27]으로 공인했다. 한국의 와이브로 서비스는 2006년 6월에 시작되었다. 기기당 10Mbps의 데이터 속도를 제공하고, 반경 1-5Km 범위 내에서 무선 인터넷 사용이 가능했다(??). 와이브로는 또한 120Km/h 속도로 이동하는 중에도 사용이 가능했는데, 이는 WiFi보다 빠르지만, 250Km/h의 이동 속도에도 사용 가능한 휴대전화 서비스보다는 느린 것이었다.

2003년 12월, 3개의 이동통신 서비스 업체 중 두 곳이 휴대전화를 사용해 2Mbps의 속도로 음성, 비디오, 고속데이터를 전송할 수 있는 WCDMA 서비스를 시작했다. 하지만 이동통신 서비스 사업자가 데이터 전송료를 높게 유지하고, 2008년 스마트폰이 출시될 때까지 WiFi 모듈이 통용되지 않았기 때문에 데이터 전송량이 충분히 증가하지는 않았다. 스마트폰의 증가는 무선 인터넷 전송률을폭증시키는 결과를 낳았고, 이 병목현상을 극복하기 위해 2011년 7월 LTE 서비스가 출시되었다.

상용 인터넷

1986년의 국제 인터넷 박람회는 한국과 세계 각국의 인터넷 벤처와 함께 웹기반 서비스의 붐을 만드는 역할을 했다[29]. 1994년, 상용 인터넷 접속서비스의 출현[28]과 함께, 다양한 상용 서비스가등장했다.

초기에는 미국에서 성공한 사업모델을 복제한 단순한 서비스만이 제공되었는데, 예를 들면, 온라인 신문서비스[30, 31], 새로 생겨나는 웹 서비스를 안내하는 서비스[32], 온라인 쇼핑몰인 인터파크[33], 경매서비스인 옥션[34] 등이었다. 웹 기반 상용서비스는 야후! 코리아에 의해 최초로 주도되었는데, 이는 야후!와 트라이젬이 1995년 공동으로 설립한 회사였다.

최초의 웹 기반 서비스는 다음[35]의 한메일(Hanmail)로, 2000년 경 야후! 코리아를 뛰어넘는 최초의 국내 검색엔진이자 포털로 성장했다. 이렇게 미국이 시작한 웹서비스를 복제하고, 현지화하는경향은 1990년대 후반과 2000년대 초반의 닷컴 열풍 속에서 지속되고 촉진되었다.

하지만 한국의 웹 개발자들은 미국 사업모델의 단순한 복제에 만족하지 않고, 새로운 서비스모델과 사업모델을 창조하기 시작했다. 가장 주목할 만한 사건은 세이클럽이 가상의 물품을 판매하는사업모델을 발명한 것이다[36]. 이는 가장 중요한 수익모델로서 수많은 온라인 서비스와 게임의 기초적인 토대가 되었다. 또 알아두어야 할 것은 온라인 게임 시장의 출현과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의 등장이다.

세이클럽은 IRC 기반의 채팅이 웹 기반으로 부활한 것이었지만, 온라인 이용자들을 즉각적으로 실시간 채팅으로 모으는데 성공했다. 1997년, 세이클럽은 이용자의 온라인 정체성을 상징화하는개인 아바타와 이 아바타를 꾸밀 수 있는 의상을 포함한 가상 물품을 판매하기 시작했고, 즉시 상업적으로 성공을 거두었다. 이 모델은 현재까지도 보편적인 사업모델이 되고 있는 소위 프리미엄(freemium) 서비스로, 즉 "상용서비스를 무상으로 제공하고, 이 서비스를 더 잘 이용하기 위해 필요한 아이템을 판매하는" 서비스다. 프리미엄 서비스 모델은 아주 흔해서, 온라인 게임을 비롯해텐센트(Tencent)나 징가(Zynga)처럼 이제는 유명해진 수많은 인터넷 사업체들도 이 사업모델을 차용했다. 프리미엄 모델의 발명은 한국의 상용 인터넷 공동체가 국제 온라인 서비스 공동체에 기여한 가장 중요한 발명이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한국 인터넷 게임 업체들은 특히 MMORPG(대규모 다중 사용자 온라인 롤플레잉 게임) 분야를 중심으로 한 온라인 게임 시장을 만들기 시작했다. 한국 최초의 RPG 게임인 "단군의 땅"은 당시 대중적이었던 PC 온라인 서비스에서 큰 성공을 거두었다. 게임의 성공 이후로, "바람의 나라"[37]와 "리니지"[38]를 비롯한 웹 기반 온라인 RPG 게임들이 출시되었고, 이후 10년간 5조 이상의 온라인 게임 시장이 만들어지게 되었다. 이러한 경향은 동아시아 시장을 중심으로 세계로 이어져 20조 규모의 다중 사용자 온라인 게임 시장을 만들어냈다.

1999년, 서비스를 시작한 사이월드는 최초로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를 활용해 상업적 성공을 거둔 사례이다. 페이스북이 탄생하기 수 년 전에 이미 사이월드 이용자는 전국민의 70%에 달했다. 네이버도 국내 검색 서비스를 기반으로 한 지식-인이라는 온라인 Q&A 서비스로 최초의 상업적 성공을 거두었고, 이는 네이버가 10조의 가치를 지닌 국내 검색업체이자 세계 10위권의 유명 웹사이트로성장하게 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한국의 상용 인터넷 업계는 중요한 사업모델을 만들어냈고, 주요 인터넷 서비스 중 최초의 중요한 상업적 성공을 거두었다. 이러한 발명과 성공은 이후 세계 각국의 웹 서비스 업계에 중요한 사업모델을 제공했다.

한국에서 온라인 상용 서비스가 출현한 지 15년이 지난 지금, 상용서비스는 한국 경제에서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한국의 인터넷 기반 경제는 대략 63조 원에 달하며, 이는 GDP의 6%에 해당하는 규모다[39]. 최근(2012년) 온라인 서비스는 국가경제의 주요한 부문에서 1,2위의 위치를 점하고 있다. 예를 들어 온라인 쇼핑은 소매시장의 11%에 달하는 34조원의 거래규모를 보유하여 이분야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으며[40], 광고시장에서도 온라인 광고가 시장의 20%를 차지해 TV광고 다음의 점유율을 보유하고 있다[41]. 우리는 이 경향이 더욱 증가해 대부분의 경제부문이 온라인 기반의 상용 서비스에 의존하게 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회고

한국은 1980년대 초반 TCP/IP를 기반으로 한 컴퓨터 네트워크의 연구, 개발의 선구자였으며, 1982년 봄 최초의 TCP/IP 연구망을 구축한 나라 중 하나였다. 개발도상국이었던 한국은 선진국을 따라잡기 위해 근본적인 연구보다 컴퓨터 네트워크와 시스템 개발 및 설립에 더욱 집중했다. 한국은 검색엔진, 서비스, 온라인 게임,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 무선 통신 시스템을 비롯한 여러 분야의 인터넷 연구 개발을 선도하는 국가이며, 초고속인터넷망을 비롯한 정보인프라 개발과 전자정부와 같은 컨텐츠와 서비스 분야의 선진국이기도 하다.

응용프로그램들과 더불어 인터넷이 한국에서 성공할 수 있었던 요인은 연구자, 정책입안자, 산업, 첨단기술을 활용한 기업인들의 선견지명 덕분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반면, 한국은 적합한 사회 시스템의 부족으로 인해 적절한 경험을 결핍하고 있었기 때문에 차질을 겪기도 했다. 예를 들면, 2003년의 SQL 슬래머 웜 사건은 1988년 미국을 뒤흔든 모리스 웜처럼 한국 전역을 마비시켰지만, 다른 나라에서는 한국만큼 큰 피해를 입지 않았다. 이 인터넷 대란의 주요 원인은 동일한 운영체제의 사용과 비효율적인 위기관리 시스템이었다. 또한, 한국은 다른 나라에 비해 심각한 사생활 침해나개인에 대한 공격을 포함한 심각한 인터넷 오용 사례가 많다. 우리는 이러한 실패와 실책으로부터 교훈을 얻어야만 한다.

오늘날, 한국은 몇몇 분야에서 뒤떨어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또 다른 분야에서 세계 인터넷을 선도하는 국가의 하나가 되었다. 우리는 한국이 인터넷을 비롯한 정보기술과 개발 및 운영 과정에서얻은 경험을 다른 나라, 특히 개발도상국들과 공유하고, 우리가 살아가는 지구사회와 잘 어우러질 수 있는 미래의 정보 인프라를 구축하기 위해 세계와 협력하기를 바란다.

감사의 글

이 칼럼의 편지자들과 본 논문의 검토자들의 지적과 제안에 깊은 감사를 드린다.

2012.3.28

문의: Sec at InternetHistory.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