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 한국 인터넷 略史 (1982년~2004년)

The e-Bridge, 제12호(2011년 10월), pp.1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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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 한국 인터넷 약사

(1982년~2004년)

전길남(일본 게이오 대학, KAIST 교수)

1. 국내 인터넷의 모형 탄생-System Development Network

1.1 SDN 개통

우리나라 전산망의 발전은 한국 컴퓨터의 발달사 만큼이나 연혁이 깊다. 1982년 5월 15일에 서울대학교 컴퓨터공학과의 중형 컴퓨터 PDP 11과 구미의 전자기술연구소 (현 한국전자통신연구원)의 중형컴퓨터 VAX 11/780 이 1200bps 전용선으로 연결됨으로써, 국내 인터넷의 시초가 되는 SDN (System Development Network)이 개통되었다. SDN이 만들어진 것은 컴퓨터 통신망과 관련된 여러 기술을 실험하여 통신망과 기술을 발전시키고, 과학 기술 전 분야의 발전에 필요한 정보 교환을 효율적으로 하기 위한 것이었다. 1983년 1월 KAIST의 중형 컴퓨터 VAX 11/780 이 SDN에 연결되어 네트워크로서의 구색을 갖추게 되었다. 이 SDN에 연결된 컴퓨터들 사이의 통신 프로토콜이 현재 인터넷에서 사용되는 TCP/IP가 사용되었기 때문에 국내 인터넷의 시초라고 하겠다.

그림 1. 1985년 SDN 구성도

1.2 UUCP와 USENET

SDN은 1983년 8월에 UUCP (Unix-to-Unix Copy)를 사용하여 네덜란드의 MCVAX 컴퓨터를 통해 유럽의 EUNET에 연결되었고, 같은 해 10월에 미국의 HPLABS 컴퓨터를 통해 UUCP Net에 연결되어 1200bps의 전화선을 통해 전자 우편을 교환할 수 있었다. UUCP는 UNIX에 설치되어 있는 프로토콜이므로 추가적인 설치 부담이 없다는 장점이 있어 해외뿐만 아니라 국내의 네트워크 노드를 확산하는데 있어서도 이점을 갖고 있었다.

이 시기에 미국 내에서는 ARPANET에 참여하지 않은 대학 및 연구소들을 연결하는 CSNET이 구성되어 있었다. SDN은 1984년 12월에 CSNET과 연결되었으며, 1990년 정식으로 미국의 인터넷에 연결될 때까지 CSNET을 구미 각국과의 기술 교류의 창구로 활용하였다. 다만, 미국 정부의 ARPANET 접속 제한 정책에 의해 FTP 서비스 등은 사용할 수 없었고, 전자 우편 서비스와 USENET의 뉴스 서비스만을 사용할 수 있었다. 그런데, 국제 전화 회선 사용료 부담으로 USENET 자료를 복사한 마그네틱 테이프를 우편으로 수신하여야만 했다.

1.3 한글 전자 우편

1983년 KAIST에서 4.1BSD에서 제공하는 메일 시스템의 확장판으로 한글 전자 우편에 관한 시험이 시작되었다. 1985년에 한글 전자 우편 프로그램과 한글 에디터인 hvi라는 프로그램이 개발되면서 SDN에서는 한글을 사용하여 전자 우편을 전송하고 수신하는 것이 가능하였다. 1984년 5월에 데이콤에서 DACOM-Net 상에서 상용 전자 우편 서비스를 시작하였는데, 이 서비스는 현재 인터넷에서 사용하고 있는 것과는 상이한 것으로, ITU-T에서 정의한 표준에 근거한 것이었다.

1.4. AsiaNet

1983년에 네덜란드, 미국, 그리고 한국 간에 구성된 네트워크를 시초로 하여, 이들 각각이 유럽, 미국, 아시아 지역의 컴퓨터 네트워크의 연결점으로서의 역할을 담당하게 되면서, 1985년에는 일본, 한국, 호주, 미국, 싱가포르, 인도네시아, 캐나다, 네덜란드 등을 아우르는 국제 네트워크인 'AsiaNet'가 구성될 수 있었다.

그림 2. 1985년 PCCS에서 발표된 AsiaNet 구성도

2. 국제 인터넷과의 연결

2.1 .kr 도메인과 IP 주소 사용

1980년대 후반에 들어와서 본격적으로 국내 인터넷이 다국적 인터넷에 참여하게 되는 주요한 일련의 사건들이 진행되었다. 1986년 7월에 최초로 국내 컴퓨터 네트워크에 IP 주소가 할당되었으며, 1987년에는 .kr 산하의 2,3단계 도메인에 관한 규격이 설계되어 한국을 대표하는 국가 코드 도메인인 .kr이 공식으로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kr 도메인 네임 서버로 KAIST에 있는 컴퓨터 등이 등록되어 국내뿐만 아니라 국제적으로 .kr을 도메인 네임으로 사용하는 컴퓨터들에 자유롭게 접속할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되었다.

2.2 민간 기구 중심의 인터넷 정책 수립 활동

인터넷이 국내로 그리고 국제적으로 그 사용 범위가 확장되면서, 국내 인터넷이 체계적이고 효율적으로 운용될 수 있도록 관장하는 기구가 필요하게 되었다. 이러한 기능을 수행하기 위한 조직으로 1988년에 대학과 연구소를 주축으로 하는 '학술전산망협의회(Academic Network Council, ANC)'가 구성되었다. ANC는 학술전산망의 대표들과 필요한 위원들이 참여하는 '조정위원회 (ANC Steering Committee)'와 네트워크 운영 관련 실무자들이 참여하는 기술위원회인 TG-INET의 소위원회로 구성되었다.

ANC는 국내 인터넷 사회를 대표하는 위치를 차지하였으며, 국내 도메인 이름 및 IP 주소의 사용과 할당을 조정하고, 해외 전산망과의 연결을 조정하며 국제적인 네트워크 협의회의 국내 대표로서 활동하였다. 그 후 ANC는 1994년에 들어와서 'KNC'로, 1998년에 '인터넷주소위원회(NNC)'로 변화되면서, 인터넷 정책을 수립하고 제안하는 민간 기구로서의 활동이 계속되었다.

2.3 PC 통신

인터넷을 중심으로 한 통신 서비스를 위한 노력과 더불어, 1980년대에는 또 다른 형태의 통신 방식이 보급되기 시작했다. 'PC 통신'이 그것인데 1984년 데이콤의 ‘한글메일’로 시작된 서비스는 1986년부터 '천리안'이라는 이름으로 통합되었다.

1988년에 시작된 '케텔(KETEL)'은 이후 '하이텔'로 개편되면서 국내에서 가장 대표적인 PC 통신 서비스가 되었다. PC 통신이 인터넷과 병행하여 존재하는 독립된 서비스로 운용되어 오다가 1995년에 와서는 인터넷 상용망을 이용해 인터넷 접속 서비스를 제공하게 되었다. PC 통신이 갖는 가장 큰 의의는, 온라인상에서의 '동호회'라는 개념이 만들어지는 계기를 제공했다는 것이다.

2.4 PACCOM 프로젝트

1989년 미국에서 하와이대학을 중심으로 일본과 호주, 뉴질랜드를 연결하는 'PACCOM (Pacific Computer Communications network consortium)' 프로젝트가 기획되었다. 국내에서는, 당시 SDN에 참여한 여러 기관들이 하와이까지의 56Kbps 전용선의 1년 사용료를 공동 부담하기로 하고 이를 위해 ‘하나 (HANA)'라는 기구가 설립되었다. 1989년 3월에 'SDN/HANA' 망이 만들어졌으며, 1990년에 KAIST의 중형컴퓨터에서 청량리 전화국을 경유하여 인공위성 송수신 센터인 금산지국을 거쳐 인공위성을 통해 미국 하와이대학을 56Kbps로 전용선으로 연결되었다.

PACCOM에 연결되기 이전에는, UUCP, BITNET, CSNET로의 연결을 제공하는 국제 회선이 패킷 단위의 종량제로 과금이 이루어져서, 국제적인 인터넷을 사용하는 것이 상당히 제한적으로 이루어졌다. PACCOM에 연결된 이후로는 비교적 제한 없이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1992년에 보고된 자료를 참고하면, 당시 인터넷 응용의 트래픽 점유 순위가 FTP, Mail, Telnet, Archie, DNS 순으로 나타나고 있다.

1992년 8월에 주요 게이트웨이 장비 및 HANA망과 SDN의 네트워크 운영 기능이 KAIST에서 한국통신(KT)로 이전되었다. 이후에 KT로 이관된 이후로부터 SDN은 국내망을 지칭하고, 국제 인터넷에 연결된 망을 HANA망이라고 지칭하게 되면서 SDN은 서서히 이름을 잃어가게 되었다. 1993년 ANC의 기술위원회에서 더 이상 SDN이라는 이름을 사용하지 않기로 결정하였다.

2.5 PCCS'85- 국제 최초 컴퓨터 네트웍 관련 국제 학술 대회

1985년에 전 세계적으로 컴퓨터 네트워크 관련 학술대회로서 처음 시도되는 국제 학술대회 중의 하나인 PCCS (Pacific Computer Communication Symposium)이 KAIST와 전자통신연구원 주최로 서울 쉐라톤 워커힐에서 한국, 미국, 일본, 유럽 및 동남아의 컴퓨터통신 및 인터넷 전문가 3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개최되었다.

비슷한 성격의 컴퓨터 네트워크네트워크 관련 국제 학술대회가 1990년대 초에 가서야 다시 개최되었을 정도로, 기술적으로 상당히 선도적인 학술대회였다. 당시의 국제 컴퓨터 네트워크 분야에서의 한국의 적극적이고 주도적인 참여를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PCCS를 계기로 1986년부터 한국과 일본의 컴퓨터 통신 전문가들이 모이는 JWCC (Joint Workshop on Computer Communication)이 한국과 일본에서 교대로 매년 개최되게 되었고, 계속 참가국들이 확대되어 국제 학술대회인 ICOIN (International Conference on Information Networking)으로 발전되었다.

3. 교육계와 연구계를 중심으로 인터넷 확산

3.1 국가기간망 사업

1983년 7월, '행정전산망', '금융전산망', '교육·연구전산망', '국방전산망', '공안전산망'을 포함하는 '국가5대기간전산망사업' 계획안이 수립되었고, 이 사업을 추진하기 위한 법적 근거로서 1986년 5월 법률 제3848호 '전산망보급확장과 이용촉진에 관한 법률'이 제정되었다. 정부는 이 법에 의거하여 국가기간전산망사업 추진과 관련 정책의 심의·조정을 담당하는 '전산망조정위원회'를 설치하여 정부주도로 국가기간망을 구축하기 시작했다. 1988년 6월에 '교육·연구전산망'을 '연구전산망(KREONET)'과 '교육전산망 (KREN)'으로 분리하여 추진하기로 결정하였다. 연구전산망은 과학기술처 산하에 있는 시스템공학센터(현 한국과학기술정보연구원)을 중심으로, 그리고, 교육전산망은 교육부 산하에 있는 서울대학교를 중심으로 하여 각각 구축에 들어갔다.

연구전산망은 한국과학기술전산망으로 이름을 변경하였으나, 지금까지도 초기의 설립 목적에 부합하게 주요 연구개발기관을 대상으로 인터넷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교육전산망 역시 초기의 설립 목적에 부합하게 현재까지도 국내 대학, 연구소, 교육 및 교육행정 기관에 전용회선을 통한 인터넷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3.2 실무자 중심의 자발적인 기술 연구 활동

1991년에 ANC 산하의 TG-INET을 재정비하여 SG-INET을 구성하였으며, SG-INET에서는 네이밍, 라우팅, 한글, 보안 워킹그룹 등의 분과위원회를 구성하여 기술을 개발하고 도입하며 운영하는 활동을 수행하였다. 이러한 결과 네이밍 워킹 그룹에서 KRNIC을 설립의 기초를 제공하였고, 한글 워킹그룹에서는 국내 최초로 IETF (Internet Engineering Task Force) RFC 문서를 등록하였으며, 보안 워킹그룹에서의 CERT Korea를 구성하는 등의 성과를 거두었다. SG-INET에는 교육망, 연구망, KAIST, 한국전자통신연구원(ETRI), 충남대, 전산원, 데이콤, KT 등의 망 운영 실무진들이 활발히 참여하였다.

3.3 한국망정보센터 (KRNIC)

1992년 국내의 인터넷을 대상으로 통합된 망 정보 관리 기능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 ANC 관할 하에 '한국망정보센터(KRNIC)'이라는 기구가 만들어졌다. 이전까지 개별 네트워크별로 망 정보 관리 기능을 수행하여 왔고, ANC의 기술위원회가 국내 IP 주소 할당을 위한 조정 기능과 도메인 네임 등록 기능 등을 수행하였다. 국내의 인터넷 규모가 커지고, 세계적으로도 대륙별, 국가별로 망 정보센터를 설치하는 추세에 따라 한국망정보센터를 설립하게 된 것이다.

1993년 1월부터 KAIST에서 한국망정보센터를 위탁 운영하다가 1994년 9월에 한국전산원으로 그 주요 기능이 이전되었고, 1999년 6월에 KRNIC이라는 독립된 법인이 만들어지면서 국내 망 정보 관리 기능을 전담하게 되었다. 그리고, 2004년에 '인터넷주소자원법'에 근거하여 '인터넷진흥원'이 만들어져서 국내 인터넷 주소 자원 관리 기능을 담당하게 되었다.

3.4 한글 인코딩 표준

전자 메일을 위한 기존의 프로그램들은 영문자와 숫자를 사용하는 경우에만 메일 내용에 아무런 손상이 없이 전달될 수 있었고, 한글을 사용하는 경우에는 메일 내용이 손상되어 수신자가 메일을 제대로 읽을 수 없는 한계를 갖고 있었다. 1991년 12월 KAIST에서 한글을 내용의 손상이 없이 영문자와 숫자의 조합으로 변환하는 '한글 인코딩 규격안(ISO2022-KR)'에 따라 한글 전자메일 프로그램 '한글elm'을 개발하였다. 이 때 사용된 한글 인코딩 방식을 발전시켜 ‘Korean Character Encoding for Internet Messages’라는 제목으로 1993년에 국내에서는 최초로 국제 인터넷 표준화 기구인 IETF의 RFC 문서를 등록하였다.

3.5 월드 와이드 웹의 시작

1990년대에 국제적으로 인터넷에 '월드 와이드 웹 (WWW)'으로 인한 인터넷 사용의 혁신적인 변화가 일어났다. 국내에서도 1994년에 KAIST의 인공지능 연구센터에서 국내 첫 웹 사이트인 cair.kaist.ac.kr를 구축하여 운영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WWW 기술을 국내에 소개하고 보급하는 연구자들의 모임인 www-kr이 만들어졌고 이를 통하여 국내에 WWW의 보급이 가속화될 수 있었다.

3.6 한국학술전산망워크숍

1990년대에는 국제적으로 그리고 국내적으로 인터넷의 기술이 비약적으로 발전하는 시기였다. 이를 반영하듯 1993년에 제1회 한국학술전산망워크숍 (KRNET)이 서울에서 개최되었다. 이 워크숍은 그 후 연 1회로 지속적으로 개최되고 있으며, 국내외 인터넷 관련 기술의 동향을 소개하고 기술 전문가들 간의 기술 교류 및 협력을 도모하는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4. 상용 인터넷

4.1 상용인터넷 서비스 개시

1990년대 중반에는 대학교와 연구소에서만 제한적으로 사용되던 인터넷이 일반 회사와 가정에까지 보급되는 계기들이 만들어졌다. 1994년 6월 한국통신이 'KORNET'을, 10월 데이콤이 'DACOM InterNet'을, 그리고 11월에 ㈜아이네트기술이 나우콤과 함께 '누리넷(nuri.net)' 서비스를 시작하였다. 이렇게 시작된 상용 인터넷 서비스는 2004년에 이르러 30여 개의 서비스 업체가 참여하는 국내 주요 산업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4.2 KIX - 상용 인터넷 연동 센터

상용 인터넷들이 연동될 수 있도록 한국전산원을 중심으로 연동센터 KIX가 구축되었다. 우선, 1995년 2월 교육망, 연구전산망 등이 연동되었고, 3월 이후 아이네트, 나우콤 등 상용 인터넷 서비스 사업자 (ISP) 11개 기관이 연동되었다.

같은 해 11월, 국내 인터넷 연동 및 운영을 한국전산원, 한국통신, 데이콤을 중심으로 하는 'IX 체계'에 협의하여 1996년 12월까지 상용 ISP들은 한국통신과 데이콤이 운영하는 상용 IX로 이관되었다. 그리고, 1999년 6월 국내 주요 ISP들이 참여하는 '한국인터넷연동협의회'에서 'KINX 연동센터'를 구축하였다.

4.3 인터넷 대중 매체

1995년 3월 중앙일보를 필두로 하여 10월에 조선일보가 '디지털조선일보' 서비스를 시작하였다. 1996년 9월 아이네트의 '이미지(im@ge)'의 창간을 시작으로, 종이 인쇄를 동반하지 않고 웹 사이트로만 운영되는 '웹진'(웹매거진의 약자)가 급격히 확산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1996년 '인터파크'와 '롯데인터넷백화점'이 개설되면서 상가에서 물건을 구매하는 것이 아니라 웹 사이트에서 물건을 검색하고 구매하는"e-commerce 시대가 열리게 되었다.

4.4 인터넷 엑스포

1990년대 후반은 국내외적으로 인터넷의 보급이 크게 증가하고 있던 시기였다. 이러한 인터넷의 보급을 더욱 독려하고 더불어 구축된 인터넷을 활용하는 이벤트로서 1996년에 국제적으로 ‘인터넷 엑스포 (Internet Expo)’가 인터넷 상에서 개최되었다. 이 행사는 물리적인 전시관을 구축하는 것이 아니라 인터넷에 웹 사이트가 전시관의 기능을 하도록 하여, 급격하게 발달하고 있는 월드 와이드 웹 기술과 인터넷 기술을 다양하게 시험해 볼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특히나, 국내에서는 웹 기반 서비스를 기획하는 벤쳐 기업들에게 자신들의 기술을 대외적으로 소개하고 발전시킬 수 있는 기회가 되었고, 대중 언론 매체들의 온라인 참여를 더욱 독려하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국내의 공공 기관이 웹 사이트를 구축하도록 촉진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림 3. 1996년에 개최된 인터넷 엑스포 로고

5. 초고속 인터넷

5.1 초고속 인터넷의 광범위한 보급

1990년대 말까지, 일반 가정의 인터넷 서비스 가입자들은 전화선을 이용하여 최고 56Kbps의 속도로 인터넷을 접속할 수 있었다. 1998년 7월 두루넷이 케이블 TV를 이용하여 1Mbps정도의 초고속 인터넷 서비스를 시작했고, 하나로 통신과 KT가 ADSL을 이용한 초고속 인터넷 서비스 경쟁에 뛰어들면서 2002년에 초고속 인터넷 가입 가구 수가 천 만을 돌파하였다. 초고속 인터넷의 광범위한 확산을 통해 전체 가구의 삼분의 이가 가입하여 명실공히 세계 수위의 인터넷 강국으로의 출발점을 마련했다. 이러한 초고속 인터넷의 비약적인 발전은 다양한 멀티미디어 서비스의 확산을 유발하고 방송과 통신의 융합, 휴대폰 전화의 인터넷 제공을 통한 유비쿼터스 사회로의 진화 기반을 마련하였다.

5.2 초고속 인터넷의 확산의 배경

1990년대 말, 인터넷에서 제공되는 서비스에 대한 요구가 증가하고 아직 개별 가정으로의 인터넷 보급이 보편화되지 못한 시기에 인터넷 사용 서비스를 제공하는 '인터넷 까페' 혹은 'PC방'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1995년 9월 15일, 서울 종로구에서 문을 연 '네트(NET)'가 국내 최초의 '인터넷 까페'이다. 점차적으로 그 수가 증가하면서 1999년 말에는 15,150개로 증가하였다.

PC방의 보급이 확대되면서 PC방을 중심으로 온라인 게임의 사용자가 증가하였다. 1998년 전략 시뮬레이션 게임인 '스타크래프트'가 PC 방을 중심으로 일반인들에게 애용되었다. 특히, 청소년 층을 중심으로 이러한 온라인 게임에 대한 수요가 높아지게 되었고, 결국 일반 가정에까지 인터넷이 보급되도록 하는데 크게 기여했다고 할 수 있다.

인터넷을 기반으로 한 온라인 주식 거래 서비스를 사용하면서 주식 거래장에 직접 방문하지 않아도 주식 거래를 손쉽게 할 수 있게 되었고, 인터넷 뱅킹 서비스를 통해 은행에 직접 가지 않아도 출금, 이체 등의 다양한 은행 업무를 편리하게 마칠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편리성으로 인터넷 뱅킹의 경우 2001년 11월 현재 전체 인구의 30%에 해당하는 1,131만 명의 사용자가 등록된 것으로 조사되었다.

6. 사회적인 영향

6.1 인터넷의 부정적인 영향

인터넷은 우리의 일상 생활에 편리함을 제공함과 동시에 사회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고 있다. 특히나 온라인게임이나 음성적인 정보에 중독되어 일상적인 생활이 불가능해지는 경우가 늘어나는가 하면, 자살을 기획하고 실행하는 웹 사이트가 만들어지고, 해킹 등의 방법으로 타인의 정보를 도용하는 범죄가 발생하고 있다. 부적절한 내용의 메일을 무제한적으로 살포하여 많은 사람들의 시간을 불필요하게 낭비하게 하는 스팸 메일, 그리고 메일을 통해 컴퓨터 바이러스를 살포하여 업무를 정지시키는 등의 부정적인 사건들이 인터넷을 중심으로 일어나고 있다.

6.2 정부의 대책과 노력

1995년에 정보통신부에서 통신의 부정적인 영향을 방지하고 심의하는 '정보통신윤리위원회'가 구성되었다. '인터넷 범죄 수사 센터', '인터넷 중독 예방 상담 센터', '불법 스팸 대응 센터', '인터넷 침해 사고 대응 지원 센터' 등의 기구들이 정부와 민간의 협력 하에 구성되어 인터넷의 사회적 부정적인 영향에 대처하기 위한 활동을 진행하고 있다.

6.3 개인의 자유와 부정적인 내용 간의 균형

부정적인 영향을 대처하기 위한 활동이 개인의 표현의 자유를 침해할 소지가 있어 이러한 활동을 견제하는 노력도 함께 진행되고 있다. 2000년에 정통부가 '정보통신망이용촉진을위한법률'을 개정하면서 '인터넷내용등급제'를 법제화하려다가 시민 단체들의 반대에 부딪쳐 무산되었다. 2002년에 전기통신사업자가 정통부장관의 명령에 의해 특정한 정보의 취급을 제한하는 것을 허용했던 전기통신사업법 제53조의 조항에 대하여 헌법재판소에서 일부 위헌판결을 내리기도 하였다.

7. 네티즌

인터넷을 통한 일반 시민들의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의견이 개진되게 된 것은 1990년대 초부터이다. 1994년 UN의 개발 도상국 지원 프로그램인 'SDNP (Sustainable Development Network Programme)'의 일환으로 한국 SDNP 호스트를 당시 한국 YMCA 전국연맹에 구축하였다. 1997년 8월 기존의 국가 대표 서포터스 클럽이 '붉은악마(Red Devil)'로 이름을 확정하고, 2000년 11월 붉은악마 홈페이지를 개설하여, 2002년 FIFA 한일 월드컵 응원의 주요동력이 되었다. 또한, 2002년 6월 미군장갑차에 여중생 2 명이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는데, 이에 대한 네티즌의 촛불시위 및 온라인에서의 추모 움직임이 전국적으로 이어졌다. 2002년 12월, 대통령선거에서 인터넷을 중심으로 구성된 정치인 팬클럽인 노사모를 비롯한 많은 네티즌 그룹이 온/오프라인에서 활발한 선거운동을 펼쳤다.

이러한 네티즌은 인터넷이라는 매체를 통해 갑작스럽게 등장한 것이라기보다 1990년대 초부터 PC통신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동호회'가 그 매체를 달리하면서 발전하여 형성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참고 자료

[1] Paul Baran, "The Beginnings of Packet Switching: Some Underlying Concepts," IEEE Communications Magazine, July 2002, pp42-48.

[2] Barry M. Leiner, et al., "A Brief History of the Internet," Internet Society, http://www.isoc.org/

[3] K. Chon, H. Park, and H. Cho, "SDN: A Computer Network for Korean Research Community," Proceeding of PCCS (Pacific Computer Communications Symposium), Seoul, Korea, 1985.10, pp.567-570.

[4] 손갑철, 한글 Mail System의 개발에 관한 연구 (A Study on the development of hangul mail system), 한국과학기술원 석사학위논문, 1984

[5] Kilnam Chon, “National and Regional Computer Networks for Academic and Research Committee in the Pacific Region,” Proceeding of PCCS (Pacific Computer Communications Symposium), Seoul, Korea, October 1985.

[6] 박현제, 세계속의 한국 인터넷: 한국 인터넷의 역사, 1995.5. http:// zooin.net/ceo/f_menu_l.htm

[7] 정보통신부, 정보통신 20세기사 사이버 역사관, http://20c.itfind.or.kr/

[8] U. Choi, K. Chon and H. Park, "Korean Character Encoding for Internet Messages", RFC1557, December 1993.

[9] 전길남, “인터넷의 기원과 전망”, 과학사상, 제18호, 1996년 8월, pp.77-92.

[10] Kilnam Chon1, Hyunje Park, Kyungran Kang, and Youngeum Lee, A Brief History of the Internet in Korea, 2005.

[11] 한국인터넷진흥원, 사이버 인터넷 역사 박물관, http://i-museum.kisa.or.kr

전길남(일본 게이오 대학, KAIST 교수)

일본 오사카출생으로 오사카대학 전자공학과를 졸업한 후 미국으로 건너가 UCLA에서 시스템 엔지니어링 박사 학위를 받고 미국 록웰 인터내셔널(Rockwell International)에서 컴퓨터 시스템 디자이너로 일하고, 제트추진연구소(Jet Propulsion Laboratory)에서 1970년대 후반까지 기술연구원으로 근무했다. 1979년 귀국 후 한국전자기술연구소 책임연구원으로 일하다 1982년부터 2008년까지 KAIST 전산학과 교수로 재직했다. 현재는 일본 게이오 대학에서 distinguished professor로서 재직하며 미래 인터넷 발전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2012.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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