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최우형

Interviewee: 최우형

Interviewer: 안정배, 조동원

2012년 3월 19일(목) 13:00~15:00

via Google+ hangout

인터넷 사용과 통신료 500만원

초등학교 5학년부터 Apple II PC를 사용했다. 게임을 더 잘하기 위해 영어를 더 잘해야 했던 것이 영어공부를 하게 하는 구체적인 주요 동기 중 하나였다. 그러다보니 고교 입학 무렵에는 영어 텍스트를 읽는데 별 부담이 없을 정도가 되었다..

인터넷을 처음 사용한 것은 고교 1학년인 88년이었다. 당시 PC를 보급하던 ‘정보문화센터’에서 내가 다니던 수원소재 기숙학교였던 경기과학고등학교에 모뎀, 컴퓨터, 데이콤 X.25 네트웍 접속 계정을 지급했다. 학교에는 선배 중 한명의 학부형이 기부를 주선한 것으로 알려져있던 역시 수원소재 삼성반도체통신에서 제작한 최초의 16비트 국산 중형 컴퓨터인 SSM-16이 있었다. 덕분에 고등학교 1학년 때부터 UNIX[1]를 사용하기 시작할 수 있었다. UNIX에 대해서는 사전에도 알고 있었지만, 정보문화센터가 제공한 X.25 네트웍를 사용하게 되면서 UNIX기계들을 서로 연결하는 네트워크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이것이 인터넷이라 불린다는 것을 뒤늦게 알게 되었다.

이 때 정보문화센터가 지급한 데이콤 X.25 네트웍에 접속할 수 있는 계정은 당시에는 데이콤의 UNIX 중형컴퓨터에서 운영되는 이메일 시스템에 접속하게 하는 것을 목적으로 발급되었는데, 이 계정은 X.25로 상호연결된 전세계 어디에나 접속할 수 있다는 것을 우연히 알게 되었다. 이를 통해 미국의 컴퓨터에 X.25를 통해 접속한 후 거기에서 다시 인터넷을 통해 전세계 많은 시스템들에 접속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를 통해 당시에 접속 할 수 있었던 시스템 중에는 샌프란시스코에서 운영되었고 온라인 커뮤니티운동의 시작이었다고도 알려진 바 있는 The WELL도 있었으나 큰 흥미를 가지진 못했다.

이런 까닭에 고등학교 때까지만 해도 인터넷은 공짜라고 생각했다. 고교 때는 요금 문제 보다는 ‘전산반’의 일원으로 야간에 컴퓨터실을 자율적으로 운영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전산실의 야간개방시간이 끝나고 난 다음에도 계속 남아서 새벽까지 전산실을 계속 사용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주요 관건이었다. 그때 전산실을 밤늦게까지 지키던 친구들이 계속 컴퓨터 분야 일을 하고 있고, 현재 모두 실리콘밸리에 체류중이다. 당시의 경기과학고등학교는 아침에 일정시간에 깨우는 것을 제외하고는 특별히 학교에서 강제로 공부를 시키지는 않았고, 사실상 거의 떨어지는 경우를 찾아보기 힘들던 과기대 입시가 그렇게 큰 부담은 아니었다. 더구나 기숙학교였기에 재학생들은 매월 석차가 공개되는 성적표의 부담만 무시할 수 있는 경우에는 거의 무한대의 자유를 가질 수 있었다.

당시에 요금 걱정 없이 X.25 네트웍을 마음데로 쓸 수 있었던데는 두가지 이유가 있는데, 하나는 1989년 12월 31일까지는 시내전화가 통화당 정액요금이었다는 것이다. 모뎀을 사용해서 전화로 네트웍에 접속하면 몇시간씩 끊지 않고 계속 사용을 해도 한통화요금만 부과되었기에 새벽까지 사용해도 요금부담은 없었다. 또하나 중요한 것은 당시 발급된 X.25 계정에 대해서 과금이 일어나지 않은 것은 물론이고 정보문화센터나 데이콤에서 각 계정별 사용량을 전혀 확인하지 않았었다는데 있다. 따라서 고가의 국제통신요금에 대한 걱정 없이 마음껏 외국의 인터넷에 연결된 시스템까지 X.25를 타고 접속할 수 있었다.

과학고등학교에서 2년을 보내고 90년 봄 대전소재의 기숙학교인 과기대에 진학해서는 고교 때부더 훨씬 큰 자유를 누리며 인터넷을 이용했다. 한가지 다른 점은 모뎀으로 접속할 필요 없이 당시 학교의 중형컴퓨터들은 국내인터넷에 상시접속되어 있었다는 것과 이 컴퓨터들은 해외의 시스템들과 이메일을 직접 주고받을 수 있도록 설정되어 있덨다는 것이다. 과기대에서 이메일 계정을 받자마자 고등학교때 수집되어있던 정보를 활용해 각종 관심분야에 대한 USENET FAQ등을 이메일로 받아 다운로드해 읽었다. 당시에는 할당된 디스크 용량이 작어서 계속해서 이메일을 프린트하고 지워야 했는데 디스크 용량은 제한이 있었던데 반해 프린트 비용은 물론 종이도 공짜였다. 그해 봄의 어느날 기숙사 방에서 수업 빼먹고 이걸 읽고 있었는데 전산센터에서 전화가 왔다. 전산센터 담당직원이 “학생, 우리 학교의 국제이메일을 쓰는데, 이게 혹시 유료인 것을 알았나?"고 묻는 것이었다. “몰랐다"고 대답했더니 “그동안 사용량에 1바이트당 10원의 요금을 적용하니 거의500만원이 나왔다.”는 것이었다. 학비가 공짜인데, 첫학기에 500만원을 통신료로 써버린 것이다. 이 전화통화 이후에 학교를 자퇴하고 검정고시를 본 다음 일반 대입절차를 거쳐 다른 학교에 가야 고민하고 있었는데 이후에 돈을 내지 않으면 어떻게 된다는 이야기가 없었다. 나중에 알고보니 이때는 전길남교수님의 연구팀이 따로 연구비를 확보해 하와이로 가는 56Kbps 전용선을 통해 한국의 인터넷이 국제인터넷과 바로 연결되는 체제로 전환되는 시기였고, 덕분에 더이상 1바이트당 10원이라는 요금을 물지 않게 되었다.. 덕분에 무사히 계속 학교에 다닐 수 있었다.

웹의 등장

웹 등장 이전의 인터넷 사용은 주로 이메일과 원격 접속을 통한 원격 컴퓨터 자원/프로그램의 활용으로 나뉠 수 있다. 원격 접속을 통한 자원/프로그램의 활용 예 중에서도 전자게시판(BBS), 게임이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져있었다. 웹의 등장은 인터넷 사용의 폭을 넓히는 계기가 되었다. 다양한 방법으로 활용할 수 있게 되었다. 이전에도 Gopher나 도서관정보검색수준의 텍스트기반의 정보검색시스템이 있긴 했지만, 웹이 등장함으로써 더 다양하고 보기 편한 문서로 정보교류를 할 수 있었다.

웹이 처음 등장한 시기에는 컴퓨터 환경이 지금처럼 좋지 않았기 때문에 웹의 성공을 점칠 수 없었다. 하지만 컴퓨터의 성능이 향상되면서 웹도 점점 발전해왔다. 현재는 핸드폰으로도 이렇게 쉽게 인터뷰를 위한 다자간 영상화의를 할 수 있을 정도로 발전했다.

등장 초기의 한국 인터넷 사용환경

(팀 버너스 리가 만든 웹은) 중형 이상의 컴퓨터에서 돌아갔다. 처음 웹은 NEXT 컴퓨터를 기반으로 만들어졌는데, 당시 한국에서는 NEXT를 구할 수조차 없었다. 그래서 워크스테이션에서 돌려야 했다. PC에서 웹이 돌아가기 시작한 건 웹이 등장한지 1년 이상 지난 한 참 뒤의 일이다. 일리노이 대학교에서 만든 Mosaic이라는 웹 브라우저 소프트웨어가 92년 말에 처음 공개되었는데, 이 소프트웨어를 Sun 4 워크스테이션에서 실행했을때는 도저히 느려서 이 프로젝트는 실패할 것임에 틀림없다 생각할 정도였다.. 93년 가을에 더 가볍게 구현된PC용 브라우저도 나왔는데 이때까지만 해도 윈도우 3.1에 TCP/IP가 기본설치되지 않았던 시절이고 인터넷의 보급도 미미해 아주 광범위하게 사용되지는 않았다.

이메일을 주고받는 환경 중 한국에 알려진 대표적인 것으로 Bitnet과 인터넷이 있었다. 인터넷에 연결된 소수의 학교 중 워크스테이션이 있는 곳에서 웹을 사용할 수 있었다. 웹이 나오기 전이었던 91, 92년에도 이미 그래픽 등을 주고받을 수 있는 표준(MIME – Multipurpose Internet Mail Extensions)과 공개표준을 구현한 소프트웨어들이 막 등장하려는 상태였다.(이전에는 텍스트 기반 이메일 뿐) 이 표준은 이메일을 위해 만들어졌지만, 웹을 만드는 주요 으로도 쓰였다. 워크스테이션 기반으로 인터넷 표준기술을 이용한 비디오 컨퍼런스가 막 시작되는 시기이기도 했다. 물론 초기 개발자들 사이에서 이렇게 사용되었다는 것이다.

90년대 초반은 컴퓨터, PC 기술이 급속도로 발전하던 시기다. mp3가 보급되기 시작했던 시기이기도 하다. 당시가 전환기였던 것 같다. 지금 이런 환경(Google+ Hangout)이 고가의 장비로 정말 느리게 겨우 구현될 수 있는 시기였다. 정확히 20년 전에는 전산학 전공자임에도 불구하고, 웹은 너무 느려서 도저히 안될거라고 친구들과 얘기했던 기억이 난다..

국제 표준 형식을 따르는 한글 이메일 표준 개발

1학년 때부터 학교에서 인터넷으로 이메일을 사용하던 시기였고, 이 때는 다 더미 터미널을 통해 UNIX를 운영체제로 하는 중대형컴퓨터에 접속해 사용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인터넷을 통해 전세계와 연결되어 상호교류를 할 수 있다는 것은 너무나 신기한 일이었고, 이런 사실에 대해서 조금이라도 더 빨리 더 자세히 알아보기 위해서 2학년 가을학기에 4학년 과목이었던 컴퓨터 네트워크 과목과 전박사님의 개방형시스템이라는 과목 수업을 들었다. 이 중 전박사님 과목의 기말 프로젝트로 한글 이메일 교환 포멧 표준을 만들고 시험적 구현을 하기로 결심했다.

기존에도 한글 이메일에 대한 표준이 존재하긴 했었다. 국내 표준화 단체의 임의 표준이 존재했는데, 인터넷 표준은 아닌 상태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한국의 컴퓨터 문화가 이른 시기여서 한글 코드를 조합형, 완성형 코드 등 무엇으로 쓸 것인가, 조합형 중에서도 무엇을 쓸 것인가를 두고 진영이 갈려있던 시기였고, 하나의 실질 표준으로 통일되지 않은 상황이었다. UNIX에서는 당시 보급되어 있던 더미터미널의 규격에 따라N-byte 한글이라는 환경이 널리 쓰였고, PC통신과 PC소프트웨어 개발자 환경에서는 조합형한글이 가장 널리 쓰였고, Unix에서는 KS표준에 따른 완성형 한글이 조금씩 더 확산되어가고 있었다. ISO 표준체계를 따르는 Unix 환경에서는 이 체계하에서 정의된 KS 표준인 완성형한글을 통신용 표준으로 사용할 수 밖에 없는 환경이었다.

여러 시스템들이 연결된 인터넷에서의 상호통신을 위해서는 누군가 어떻게 하도록 한다라는 것을 정해야 했고, 실제 이를 구현하는 소프트웨어를 만들어 보급해야 했다. 당시에는 아무도 이를 먼저 정해서 구현한 사람이 없어서 과목 수료요건도 마칠 겸 한글 이메일 표준을 만들고 시험구현을 하기로 했다. 당시 일본의 Keio대학을 중심으로하는 WIDE라는 프로젝트 그룹에서는 국제 표준 규격의 틀을 따르는 일본어 이메일 표준을 마무리하는 단계였는데 이를 많이 차용했다 (일본어 이메일 표준은 RFC1468로 한국어 이메일 표준보다 6개월 빨리 마무리되었다)

91년 가을학기 과목의 수료요건을 충족하기 위해 시작해 1차구현과 보급을 완료했지만, 이를 당시 인터넷 표준화그룹이 거쳐야 하는 절차를 거쳐 문서화하여 발표하고 마무리짓는데는 2년의 시간이 더 결려 93년 말에 최종문서를 발행할 수 있었다. 이 과정에서 인터넷국제표준화그룹인 IETF의 MIME 워킹그룹과 국내 주요 인터넷 사용자들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초창기 인터넷 이용자들에게 표준 보급

인터넷 표준은 누가 주장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써야 한다. 그래서 보급을 했었다. 당시의 이메일 커뮤니티라는 게 다 알만한 작은 커뮤니티였기 때문에 기관들의 담당자들에게 제안했고, 과기대와 카이스트에 제안했다.

92년 당시, 인터넷 사용자는 대부분 카이스트 학생, 교수들이었지만, 이 시기에 대학들이 Bitnet을 버리고 인터넷으로 넘어왔기 때문에 포항공대 등의 대학원생들도 인터넷을 사용했다. 반면, 서울에 있는 대학에서는 전산학과 대학원을 제외하면 인터넷을 많이 사용하지 않았다. 당시 서울의 문화는 피씨통신이었고, 인터넷 사용자는 기본적으로 특화된 공대학생, 대학원생, 교수들이었다. 당시까지만 해도 인터넷의 주요용도는 이메일이었고.

94년부터 웹사이트라는 걸 만들어서 퍼블리쉬하는 문화가 시작됐다. Web-KR 등이 아마 94년부터 시작되었을 것이다.?? 96년 정보엑스포를 통해 인위적으로 인터넷 사용을 장려하기도 했다. daum은 당시 멋진 웹사이트(95.2 창업)를 만드는 곳으로 알려져 있었는데, 1997년 5월에 hanmail 서비스 시작하면서 대중화되었다.

WWW는 Hypertext로 연결해나가는 프로세스를 일컫는다. 따라서 초기에는 웹사이트 주인들이 주 이용자였다. 인터넷의 역사를 보더라도 처음에는 만든 사람이 사용자였다. 서로 써보니까 "이게 좋아” 하면서 진화한 것이다.

초기 인터넷 커뮤니티 KIDS

그 다음이 취미활동을 하는 사람들이 자신의 웹사이트를 뽐내는 시기로 97년 hanmail이 나오기 전까지가 이 시기다. 스티브 잡스가 있었던 Homebrew Computer Club과 같은 스타일의. 당시, 피씨통신에서 하이텔, 천리안이 있었다면, 인터넷 사용자에게는 KIDS(Korea ISDN Data Servece; KIDS소개글 http://zariski.egloos.com/1515267)라는 것이 있었다. 한국통신의 조산구 씨가 만든 시스템인데, 91년 9월에 등장했다. HANA망을 이용하는 사람들, 즉 대학, 연구소의 연구자들이 주 이용자들이었는데, 당시 인터넷 유저들 중 상당수가 이 전자게시판 시스템을 하이텔/천리한 처럼 즐겨 찾았다.

KIDS가 유지된 데에는 전교생이 기숙사 생활을 했던 과기대, 포항공대가 포함되어 있었다는 것도 한 몫 했다. 종일 접속할 수 있었으니까. 기숙사 건물마다 터미널 실이 있어서 FAST5 시스템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포항공대, 과기대의 모든 기숙사실과 강의실도 24시간 개방되어 있었다.

연구전산망(시스템공학센터 SERI → KREONET)에서 다이얼업포트를 10개이상 운영했고, 하나망에서도 다이얼업 포트 운영했다. 연구실 이외의 장소에서도 연구를 계속할 수 있도록 다이얼업 포트를 열어두어서 다이얼업에 접속한 다음 UNIX 시스템에 로그인하는 형식이었다. UNIX 계정 받을 수 있는 사람들만 사용할 수 있었는데 대부분 관리자와 친분이 있는 사람이거나 잘 아는 해커를 통해 몰래 계정을 만들거나 부탁하는 형식이었다. 계정을 공유하기도 했고.

종합대학들 중에는 이화여대, 숙명여대, 서울여대, 성신여대 같이 초기 HANA망에 연결된 여대의 대학원 학생들도 많았다. 기본적으로 남초현상이 심한 커뮤니티였기 때문에 여대 게시판은 늘 인기를 끌었다.

KIDS에는 학교별 게시판과 주제별 게시판이 있어서 파벌싸움을 하기도 했다. 현재의 디씨인사이드의 원형이라고 볼수 있지만, 당시에는 인터넷 유저나 관심있는 사람들만 참여하는 작은 커뮤니티였다.

외국의 유학생들도 KIDS의 주요 사용자 계층 중 하나였다. 주로 미국에 있던 학생들이 많이 사용했는데, 24시간 컴퓨터를 쉽게 억세스할 수 있고, 집에서 다이얼업으로 접속할 수 있는 환경에 있는 학생들이었다.

웹이 널리 보급되지 전 까지 인터넷의 컨텐츠 중 하나는 USENET Newsgroup과 FAQ 였다. 나도 관심있는 모든 USENET FAQ을 프린트해서 읽기도 했다. 유즈넷 게시판의 컨텐츠는 삼라만상이 다 들어있었다. 과학적 컨텐츠부터 TV시리즈, 오덕(오타쿠)문화의 총집합이랄까.

SALab과의 만남

SALab에서는 공식적인 자리에서는 선후배 예외없이 ‘~씨’라고 불렀다. open-exchange 환경을 조성하기 위해서였다. 인터넷과 밀접한 모든 것을 하는 곳이었으므로 인터넷 엔지니어링 연구 커뮤니티가 자유롭고, 개방적인 분위기를 가지고 있었다. 그쪽 그룹과 자주 교류를 하다보면 학생들도 그 분위기에 자연스럽게 노출되어 그렇게 되었다.

전박사님과 만나게 된 이유는 대학 1학년 때, UNIX를 돌리고 싶어서였다. UNIX 소프트웨어 라이센스를 전박사님 랩에서 가지고 있었다. 당시 나는 Carnegie Mellon Univ.에서 만든 PC용 UNIX의 한 버젼인 Mach OS를 구하려고 했는데 CMU에서는 BSD UNIX 라이센스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증명해야만 Mach OS를 배포했다, 전박사님 랩에서 관리하던 라이센스를 확인해주고 CMU Mach을 구해서 PC에서 UNIX를 돌릴 수 있었다. 당시 수학과 컴퓨터실 조교를 하면서 1학년 겨울방학 때, 내 개인 PC를 인터넷에 연결했고, 2학년 때부터는 SALAB에서 자리도 받고, 가을에는 수업도 듣고 하면서 한글 인터넷 표준 RFC 프로젝트도 한 것이다. 2학년 가을학기가 끝나갈 무렵에는 당시 핀란드 공대생이었던 Linux Torvalds가 아무런 제약조건이 없는 Linux라는 UNIX 구현을 공개해서 더이상 Mach OS나 BSD Unix는 큰 매력을 가지지 못하게 되었다.

여러 부류의 인터넷 이용자들

카이스트 시절, 인터넷을 이용하던 친구들은 약 네가지 부류로 나뉘었다. 첫번째는 보통 모범생 부류라고 해야 하나, 인터넷을 그냥 도구로 사용하던 그룹이다. 평범한 카이스트 학생들이고 전산학과도 있었지만 다른 학과 학생들도 많았다. 주로 추운 전산실습실에 있는 컴퓨터를 썼고 PC를 사용하는 경우도 있었다.

두번째 그룹은 게임파였다. 게임을 그냥 즐기기만 하는 그룹도 있었지만 게임을 만들기까지 했던 그룹도 있었다. 이 그룹이 당시 모든 기숙사 터미널 실의 자리를 잡고 있었다. 거의 24시간 자리를 지키고 붙어있을 수 있는 의지와 능력이 있는 학생들이었다. 꼭 전산과는 아니었고, 물리, 기계과 등 컴퓨터를 좀 사용하는 과인데, 과 공부를 다소 널널하게 할 수 있는 과의 학생들이 분포했다. 전자과는 타이트한 커리큘럼이 있어서인지 그리 많지 않았다.

또다른 그룹은 해킹을 했던 그룹이었다. 기존의 권위에 도전하고 허가되지 않은 것을 해보고자 하는 사람들이었다. 해커 친구들에게서 "슈퍼컴퓨터(시스템공학연구소)에 들어갔었다.", "관리자권한을 취득했다.", "미국의 어떤 시스템에 관리자권한을 취득했다.", "하이텔 공짜 계정을 획득했다"는 얘기를 들을 수 있었다. 컴퓨터 내부 구조를 잘 알아야 해서 아무래도 전산과가 유리했다. 이들은 자기가 했던 일을 자세히는 잘 알려주거나 설명하지 않는 특징이 있었다. 카이스트와 포항공대와의 해킹전쟁(참고: 인터넷에 떠돌던 <사과전쟁>이라는 텍스트) 루머를 사실 믿지는 않는다. 검찰 조사까지 받게 된 사정(1996년 5월 8일자 경향신문 기사 <대학간 "해커들의 전쟁">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6050800329123003&editNo=40&printCount=1&publishDate=1996-05-08&officeId=00032&pageNo=23&printNo=15760&publishType=00010)은 미스테리지만. 학교의 관리자가 신고했을 수는 있지만 대부분의 학생은 무관심했고, 학교 차원의 문제가 되지는 않았다. 누가 했는지도 모르는 것이 사실이었기 때문에 제재하려고 해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신문기사와 과거의 추억담은 어느 정도씩 과장되게 마련이다.

그리고 마지막 그룹은 인터넷 전자게시판을 기반으로 활발한 커뮤니티 활동을 했던 그룹이다. 한사람이 모든 그룹에 속하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이중 한 그룹에만 속했다 생각할 수도 있고, 실제 각 그룹의 구성은 천차만별일 것이다.

90년대 초반의 과기대 학생이 바라보는 지금의 20대

돌이켜보면, 대학에 입학했던 90년 당시가 그렇게 자유로운 시절이 아니었다. 첫 해에 가투에 많이 따라다녔다. 정권에 항거했던 91년 강경대 열사를 시작으로 연속적인 자살 사건이 있었다. 91년 5월에 가투에서 최루탄을 뒤집어쓰고 과외를 하고 학교로 돌아오면서, 가투로 내가 세상에 큰 변화를 가져올 것 같지는 않다 생각했다. 그때, 88년에 접했던 인터넷을 생각하며, 가투를 그만두고, 과외도 끊고, 인터넷을 가지고 어떻게 사회에 공헌할 수 있을지 생각해 보았다.

그래도 20년 전 과기대를 다녔다는 것은 졸업한 후에 뭐가 되었든 취직을 걱정해야 하는 수준은 아니었다. 하지만 현재의 카이스트 학부 학생을 인터뷰한다면, 20년 전과 다른 답을 얻을 것이다.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과 걱정이 그때보단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클 것 같다.

자격증이 있는 분야의 직업은 (예: 의사/변호사) 자격증 보유 유무로 어느정도 수준을 가늠할 수 있고 직업에 대한 보호도 이루어지지만,, 특히 기술분야는 진입장벽도 없으며 특히 평가하는 입장에서 그 이상의 역량이 있지 않으면 그 수준을 쉽게 가늠하기 어렵다. 석사, 박사 학위가 있는지 유무가 큰 의미가 있지는 않다 하지만 소프트웨어분야에서는 뛰어난 개인이 의미있는 유용한 프로그램이나 서비스를 만들어 공개함으로써 스스로를 증명할 수 있는 것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80,90년대 한국의 인터넷 기술과 산업의 기초를 만들었던 분들이 현재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지 충분한 역할을 하고 있지 못하다면 왜 그런지 살펴 볼 필요가 있다. 3국에서 비슷한 역할을 했던 분들의 상당수는 인터넷분야에 계속 높은 영향력을 유지하면서 정책을 책임지는 위치를 거쳐갔거나 그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그런 관점에서 지금의 20대들에게 이런 사람들도 이만큼 밖에 못했는데, 법률가/의사가 될 것이냐, 테크놀로지 전공할 것이냐 물으면 누가 선뜻 후자를 선택할까. 누구에게 길이 있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물론 더 환경이 나쁜 분야와 비교해 보면 기술 분야는 그나마 낫다고 볼 수는 있겠지만.

그런 의미에서 20여년 전에 내가 선택한 길들을 지금 선택해야한다고 할때에, 얼마나 내 결정을 주위에서 응원해 줄지는 의문이다. 예를들면 박현제 박사님의 경우 자녀가 전산학과에 갔다며 한편으론 기뻐하시고 한편으론 걱정이 되기도 한다고 하셨다.

한국의 인터넷 커뮤니티와 미국으로 떠난 이유

2006년까지 한국에서 버티다가 미국으로 왔다. 내가 경험한 한국의 통신업계와 정책당국은 통신마피아라고 불릴 정도로 의사결정이 너무 위계적이었다. 정부의 정책자문회의같은데 가면 국가전체에 미치는 영향과 이익을 생각하는 것 보다는 무엇이 정통부와 KT등 통신사들에 이익을 가져다 주느냐를 중요하게 여긴다 느꼈다. 한국에서 계속 양심을 지키며 인터넷 인프라분야 전문가로 살아남을 방법이 없다 생각해서 한국을 떠나게 되었다. 대학교 2학년인 91년에 결심을 하고 인터넷 인프라분야 일을 시작해서 2006년에 도피를 한 셈이다..

인터넷 인프라와 응용이 어떻게 다른지 전기에 비유해서 설명해보겠다.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전기나 당연히 늘 공급되고 요금만 내면 되는 것이라 생각하지만 이 체제가 돌아가기 위해서는 국가단위의 전력생산, 송전, 배전과 관련 고도의 전문적 업무들이 빈틈없이 돌아가야 한다. 특정한 경우에는 사용자들도 이 인프라에 대해서 인지하고 잠깐 관심을 가지기도 한다. 예를 들면 작년의 전국규모 순환정전, 갑작스런 전기요금 인상, 발전소, 변전소, 송전탑, 폐기물처리장 등 기반시설의 설치과정에서 일어나는 갈등들. 인터넷도 마찬가지다. 인터넷 사이트를 운영하거나 사용자로서 접속하는데 인터넷 인프라와 관련된 일들은 대개 전기 인프라가 그러하듯 관심 밖의 일이다.

전기 인프라에 관해서는 주기적으로 갈등도 표출되고 오랫동안 전문적으로 일을 해온 당사자들이 존재하지만 인터넷 인프라에 그에 해당하는 인력풀은 매우 제한적이며 담당주무부처와 대형통신사의 입장에 편향되게 정책이 만들어지고 집행된다. 사실 인터넷은 통신사와 아무런 관계없이 만들어진 영역이고 전통적으로 전화를 중심으로 돌아갔던 통신사가 이후에 흡수한 영역이다.

빠른 기술적 변화가 일어나고 국제적으로 경쟁력을 유지하며 따라가기도 힘든 분야에 기술적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한국의 주요정책결정과정에서 사실상 배제되는 한국적인 경향을 생각하면 이 분야가 얼마나 심각하게 방치되고 있는지 짐작가능하다. .

예를 들어 2003년, 1.25 대란(http://en.wikipedia.org/wiki/SQL_Slammer) 당시 전세계에서 한 전체 국가 단위로 인터넷이 완벽하게 마비된 곳은 한국밖에 없다. 정부차원의 대책위가 있었는데 불가항력에 의한 것이었다고 결론 나고 말았다. 2004년 말까지 참여연대의 피해자 배상 소송도 있었고, 나는 자원봉사로 이 소송의 기술자문을 맡았는데 안타깝게도 나는 재판변론과정에서 주요논점을 어떻게 가져가야하는지에 대한 법률적 의미이해가 부족했고 반면 상태방은 일방적 정보우위 속에 업계 2위 로펌인 태평양을 통해 많은 자원을 투자해 소송에서 이기지 못했다 . 1심 재판부의 판단은 당시 상황은 디도스 웜에 의한 불가항력 때문이라 ISP가 사전에 어떤 추가 장치를 취했어도 같은 결과가 초래되었을 것이기에 사용자에게 아무런 배상책임이 없다는 결과였다..

국가단위의 전면적 장애가 있었다는 3국에선 찾아보기 힘튼 최악의 상황이 한국에서만 있었던 최악의 결과에서 알 수 있듯, 적절한 전문인력이 없고 운영을 잘 못한 것 때문이었다. K등 통신사가 이런 일로 배상책임을 지게되면 앞으로는 사전에 이런 문제를 막을 수 있도록 적절한 투자를 하는데 경종을 울리게 될 것이라 믿고 참여했는데, 결국 무의미하게 끝나고 말았다. 작년 연말에 일어난 선관위 디도스 테러사건도 큰 맥락에서는 똑같은 일의 반복이라 생각한다.

아울러 한국에서 망중립성 문제가 3국과는 매우 다른 양상으로 소비자 후생과는 동떨어진 방향으로 다루어지고 있는 것도 이런 배경에 기초하고 있다.

현재의 활동

구글에서는 서비스가 잘 안되면 누가 죽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고 일하고 있다. 어쩌면 한국에서도 인터넷 관련 사고가 후쿠시마처럼 크게 벌어지면 바뀔 수 있을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아직은 인터넷이 잘 작동하지 않는다고 사람들이 생명이나 큰 재산상의 위협을 느끼진 않으니까 변하지 않는 것 같다.

현재는 구글의 아태지역 네트워크 계속 확장하고 및 지속가능하게 유지할 수 있도록 하게하는 재정적 문제를 해결하는 책임을 맡아 아태지역 전체를 대상으로 일하고 있다. 필요하면 기존과는 다른 방식으로 신규 해저통신케이블도 건설하고, 통신사들과의 협력을 통해 구글의 클라우드 인프라를 미국이나 유럽처럼 땅으로 연결된 지역뿐 아니라 모두 바다로 떨어져있는 아태지역에서도 비슷하게 고객들에게 제공할 수 있도록하는 것이 주 임무이다. 당분간은 한국 일을 잊어버리고, 아시아와 구글에 도움이 되는 일을 하면서 전문가로서의 양심을 버리지 않고 생존하며 더 경험과 전문성의 폭을 넓히는데 집중하고 있다.

[1] UNIX는 88년 당시에는 주로 중형컴퓨터 이상에서만 쓰이던 범용 컴퓨터 운영체제이며, 인터넷에 연결된 컴퓨터의 상당수는 UNIX 운영체제를 쓰고 있었다. 현재 사용되는 거의 대부분의 PC나 스마트폰, 혹은 정보가전기기(셋탑박스/네비게이션류 단말들)들은 UNIX로부터 갈라져나왔거나 그 영향을 크게 받은 운영체제를 사용하고 있다.

2012.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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