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이택경

최종수정일: 2013.5.22

작성자: 안정배

인터뷰 대상: 이택경

질문자: 안정배

일시: 2013.3.25 15:00~16:30

장소: 방배동 프라이머 사무실

daum communication의 창업

1993년, 연세대 대학원에서 처음 인터넷을 사용했다. KREONET에 가입된 대학내 망이었

다. 당시 대학원 멀티미디어 연구실에 있었는데, 연구실에 있던 Sun 워크스테이션으로 모자

이크를 사용했다. 학부 시절인 1989 년 천리안(PC-100망) 시기부터 PC통신을 이용하기 시작해 이후 천리안과 하이텔에 각각 연세대 사용자들이 모여 연세대 PC통신 동아리 '이글넷'을 만들었다. 학내 다른 동아리의 견제로 학내 공식동아리로 가입하지는 못했지만. '이글넷'은 연세대 전산과 학생들과 공대 학생들, 그리고 YCV(연세대학교 전산자원 봉사회) 멤버들이 주축이 되어 운영하였다. 또, Xenix 로 이용할 수 있었던 사설 BBS를 운영하기도 했다. 학부 당시에는 인터넷보다 주로 PC통신을 이용했다.

창업도 이재웅이 프랑스에서 유학중일 때, PC 통신을 통해 해외 채팅을 하면서 처음 논의를 시작했다. 프랑스에서 인터넷 붐을 예견한 이재웅이 귀국한 후, 같이 의기투합하여 창업에 이르게 된 것이다. 당시 이재웅은 "컴퓨터가 컴퓨팅하는 머신이라기 보다는 예전에 PC통신하듯이 사람 사이의 커뮤니케이션 역할을 하게 되지 않을까?"하는 얘기를 하곤 했다. 비록 인터넷 서비스나 인터넷 솔루션을 할 수 있는 구체적인 아이템은 당장 없지만 미래를 보고 일단 시작을 해보자고 준비를 시작했다. 그때 다음을 창업하면, 인터넷에 포커싱하고, 그 범위를 벗어나지 말자는 생각을 했다.

1993, 1994년이었으니까 Workstation 에서 돌아가던 Mosaic 브라우져가 막 나올 때였다. 1994년말에 넷스케이프도 나왔고. 이재웅과 만난게 94년이니까 넷스케이프가 나오기 직전이었다. 인트라넷 SI 같은 것도 없었던 시기였고. 이재웅, 나, 고 박건희가 의기투합해 시작했다. 박건희의 참여는 초기부터 우리가 컨텐츠 요소 측면도 중시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초기 daum의 서비스 및 비즈니스 모델

처음에는 Sun Sparc 에 데이콤 56Kbps 전용선을 연결해 시작했다. 사실 우리는 인터넷이 그렇게 빨리 뜰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는데, 생각보다 훨씬 더 빠른 속도로 뜬 것 같다. 적어도 1년 정도는 기다려야 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처음으로 시작한 인터넷 서비스는 "virtual gallery 서비스"였다. 박건희 실장의 사진 작품을 올려놓는 사이트였는데, 국내 최초의 가상 갤러리였다. 1995 년 6월에 창간한 <월간 인터넷>의 창간호에 실리기도 했다.

하지만, 당시 인터넷 컨텐츠로는 바로 비즈니스가 되지 않고, 인터넷이 확산되는데 1 년 정도는 걸릴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당시로서는 끝물이었던 CD-ROM 타이틀을 제작해 판매하려고 했으나 실제 매출은 못 올렸고 데이콤에 가서 인터넷에 대해 강의를 하는 것으로 매출을 올렸다. 강의 내용은 주로 모자이크 웹 브라우저 사용법, 이메일, 뉴스그룹, FTP 사용법 등이었다. 이후에는 툴이나 태깅, HTML 문서 작성법도 설명했다. 강의내용을 모아 ALT-X 시리즈 <HTML 문서만들기>라는 책도 1995년 하반기에 성안당에서 출간했다. 이후에는 당시 워낙 초창기라 개발할수 있는 회사가 적어서 공급이 부족했던 홈페이지 구축사업과 인트라넷 용역 개발도 했다. 첫 홈페이지 구축을 타사의 용역을 받아서 했다. 당시 보수가 발렌타인 18년산 10병이었다.

두번째로 1995년 여름에는 데이콤에서 "사이버월드"라는 수천만원짜리 SI 프로젝트를 맡아 강의가 아닌 제대로된 첫 매출 을 만들었다. 아마 이것이 거의 국내최초의 제대로 된 웹사이트 구축 개발용역이 아닐까 싶다. 홈페이지, 게시판, 이메일 등을 구축해주는 서비스였다. 데이콤에서 홍보를 위해 컴덱스에서 전시회를 하기도 했다. 웹서비스 개발 SI 업체가 그당시에 거의 없었기에 95 년 하반기에는 용역 프로젝트가 줄줄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ETRI 쪽의 프로젝트를 몇 개 했고, 삼성물산 홈페이지, LG증권, 삼성반도체 프로젝트를 맡았다. 삼성반도체 프로젝트는 소프트웨어 포함해서 수억대에 달하는 프로젝트였다. 덕분에 95 년 하반기에 캐쉬플로우가 좋았다. 초기기업치고는 운좋게 반년 좀넘어 바로 손익분기점을 넘었다.

인터넷을 이용한 비즈니스로 당시 전략은 B2B와 B2C 투 트랙으로 모두 가보는 것이었다. B2B 에서는 SI 프로젝트가 캐쉬카우 역할을 했다. 현대 중공업, 기아자동차 등 대기업의 프로젝트 들을 이후로도 계속 딸수있었기에 매출이 나쁘지 않았다. 또한 당시는 웹서비스 SI 분야의 경쟁업체도 별로 없는 상황이었다. iSoft 가 아이네트 자회사로 인트라넷 전문 개발업체였는데 95 년 하반기에야 등장했다. 그러다가 우리도 96년부터는 인트라넷 패키지를 만들었고 1.5버젼부터는 버츄얼아이오(현 버츄얼텍)와 "인트라웍스"진행하기도했다. 97년도 경부터는 국내에 인트라넷 관련 용역개발업체들의 난립에다 관련툴들도 해외에서 많이 출시되어 98년에는 인트라넷 패키지 사업은 중단하고 앞으로 B2C에만 전념하고 캐쉬카우를 위한 용역개발만하기로 바꾸었다.

B2C 분야에서는 1995 년 "버츄얼갤러리", "패션넷" 등을 운영했다. 96년에 "패션넷"을 접었고, 여행컨텐츠인 "투어월드", 영화 컨텐츠인 "Cynema" 등을 운영했다. 97년도에는 10대 커뮤니티서비스인 "Ch.10"을 운영했다. 하지만 시대를 너무 앞서간 탓에 이러한 서비스들로 수익을 내기는 힘들었다. 그래서 우리가 잘하는 것에 집중하자고 시작했던것이 무료 웹메일 서비스, 한메일이었다. 97 년 당시는 MS에 인수된 hotmail 이 앞서서 무료 웹메일 서비스를 시작하고 있었다. 98년에는 마침 IMF 가 와서 "투어월드", "Cynema", "Ch.10" 모두도 접고, 한메일에 집중한 것이다.

한메일의 등장

1997년 5월에 시작한 무료 웹메일 서비스의 반응은 선풍적이었다. 뒤이어 "깨비메일"이라는 경쟁사도 생겼다. 한메일은 급속도로 사용자가 늘었지만 사실 크게 홍보를 하지는 않았다. 97년 당시 회사 PR 담당자는 있었지만, 실제로는 바이럴 마케팅(peer to peer) 효과가 컸고, 98 년 등장한 초고속인터넷 서비스의 영향도 많이 받았다. 그전까지만 해도 학교연구실이나 기업에서 이용하는 인터넷 전용선을 빼면 모뎀을 통해 PPP로 인터넷에 접속하는 것이 대다수였다.

인트라넷 패키지에 들어가던 이메일 서비스를 떼내어 웹메일 애플리케이션으로 서비스했다고 보면 된다. 이 한메일 서비스가 폭발적인 호응을 받으면서 사용자 100만이 넘어가던 시기에는 세계에서 7번째로 사용자가 많은 서비스로 기록되기도 했다. 비슷한 규모의 웹서비스는 국내에는 전무한 시기였다.

당시 daum 은 SGI, SUN 서버를 사용했는데, 사용자가 100 만 명을 돌파할 때 쯤이 되면, 기존의 세팅으로는 서버가 견디지 못한다. 서버 라지 스케일은 그당시엔 코드하나하나 다 손으로 짜야 했다. 그래서 사용자가 늘어나면 한편으로는 기쁘지만, daum 의 성공을 안겨준 서비스인 daum 과 cafe를'돈 먹는 하마'로 불렀다. 그래서 99 년에 베르테스만에서 500만불을 투자받기 전까지는 버벅거렸다. 나중에 2001년에 본격적인 서버로 쓸만한 Linux 2.4가 나온뒤에야 PC서버로 다운사이징을 하면서 많은 비용절감을 할수 있었다.

한메일을 통해 100 만 명 정도의 사용자가 이용할 수 있는 서비스를 해보았기 때문에 대용량 트래픽 을 버티는 것을 검증받은 셈이었다. 주 이용 시간대가 다른 점을 이용해 우리 서버에 스페인의 믹스메일(Mixmail)을 설치해 ASP(SaaS) 서비스하기도 했다. 이후 국내에서도 하니메일,SBS메일에 ASP 서비스를 제공했다. 워낙 기술이 뛰어났기 때문에 SK 의 Netsgo사업 관계자가 우리 기술이 좋으니까 프로젝트를 맡기고 싶지만, 경쟁자라서 할 수 없다는 얘기를 할 정도였다. 이재웅과 “SK가 우리를 경쟁사라고 하다니! 너무 오버아닌가?” 란 이야기도 했었다.결국 나중에는 경쟁사(SK컴즈)가 되었다. 결국 이들은 이후 lycos 코리아 서비스에 critical path 의 대용량 웹메일 패키지를 선택했다.

www-kr 활동과 참가자들

www-kr 활동은 daum 을 설립한 이후인 1995, 1996년 경에 참여했다. 그당시 김용운회장님이 열심히 활동하셨고, 나도, 이재웅, 네오위즈의 장병규, 이니텍의 권도균 등도 한때 참여했다. 강연 등의 행사에도 참여하고. 학교와 지역이 다양했기 때문에 www-kr 워크샵 이외의 다른 활동이 활발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런 교류가 국내 웹/인터넷 초창기에 꽤 큰 의미있었던 것 같다.

역시 모자이크와 넷스케이프가 나온 것이 www의 발달에 있어 혁명적 계기였다. 브라우져를 통해 개인들이 쉽게 사용할 수 있게 됐고 그 결과 대중화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인터넷 엑스포 '96

96 년 인터넷 엑스포에서 daum도 작은 부스 하나를 운영했다. (아마 인트라넷쪽으로 나갔던 것으로 기억한다) 인터넷 엑스포는 개인보다 기업들이 많이 오는 행사였다. IT쪽 사람들에게 인터넷과 웹을 소개하는 행사였다고 볼 수 있다.

웹에 커뮤니티를 구축하다: daum cafe

cafe 서비스는 '커뮤니티'라는 것을 만들어 보자고 해서 시작한 것이다. 97 년에 "Ch.10"을 운영해본 경험도 있었으니까. 한메일이나 cafe가 처음 나왔을 때는, 온라인과 오프라인의 혼동이 사회적 이슈였다. 인기 영화에서 메일 주소를 물었는데 집주소로 답변한다거나 온라인 카페를 얘기하는데, 실제 카페로 오인하거나 하는 유머가 유행이 되기도 했다.

cafe 가 폭발적으로 성장하면서 우여곡절도 있었다. 가출한 딸의 로그인 위치를 묻는 부모가

찾아오기도 했고, 여러가지 사건사고로 경찰도 개입되기 시작했다. 음란물과 잔인한 내용을 담은 불법 자료를 café에 배포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런 것을 모니터링하기 위해 아르바이트를 고용하기 시작했다. 병원 등을 험담해서 병원 측에서 항의하는 문제도 있었고, 오늘날처럼 표현의 자유 문제가 대두되는 경우도 있었다. 예를 들면 나치를 찬양하는 cafe를 제제해야 하느냐, 표현의 자유로 인정해야 하느냐를 두고 사원들이 토론하기도 했다. 우리는 분쟁이 있을때 일차적으로는 카페 주인장에게 자율적으로 관리하도록 하고 심각한 건들은 경찰이 중재할 수 있도록했다.

당시 카페 이후 아이러브스쿨, 다모임, 프리챌등의 커뮤니티 경쟁사들이 생겨나기도 했었다. 특히 프리챌은 마지막까지 강력한 경쟁사였다.아쉽게도 최근에는 추억의 서비스들이 되었지만 그때가 그립기도 하다. 어떻게 보면 한국정서상 세이클럽등의 채팅서비스까지 포함해 커뮤니티서비스가 해외대비 정말 잘되었던 문화인 것 같다.

그외 해외에서 블로그가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전에 비슷한 개념의 “칼럼서비스”도 다음에서 시작했었다. 나중에 블로그 서비스로 업그레이드 했지만. 1999쯤에 UCC라는 용어가 처음 다음에서 쓰지 않았나 싶다. 2000년도에서는 사내 회의록에서 일상적으로 쓰는 용어가 되었으니깐 .

한메일, cafe 등은 비즈니스 모델로서는 당장 수익은 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우리가 가지고 있었던 가설은 온라인이 미디어 역할을 할 거고, 광고는 결국 따라올 것이다. 그런데 다른 모든 것(인터넷시대, 각종 서비스등)은 우리 생각보다 빨랐던 반면, 광고 매출만은 늦게 일어나기 시작했다. 98년부터 영업했었지만 99년에도 단편적인 수준에 머물렀다. 2000 년 이후 포탈이 되고 나서야 이러한 수익 모델이 제대로 검증이 되었다.

다음서비스중 마지막까지 넘버원이었던 것은 cafe였다. 한메일은 '온라인 우표제' 때문에 주춤했다. 원래 수익모델보다는 스팸 방지 차원에서 시도한 것인데, 유료 개념이 되어 웹서비스 가입시 일부 사이트에서 사용을 못하게 되는 결과를 낳았다. 결국 '온라인 우표제'는 여러가지 오해들로 인해 이후에 종료했다.

포탈로의 전환

포탈 전환은 성공이었지만 그 이후 선택과 집중을 잘 못한 것이 아닌가 하는 아쉬움이 있다. 야후의 시대에서 구글의 시대로 넘어가듯이 메일/카페외에 검색같은 강한 몇몇 서비스 분야에 집중해야 했던 게 아니었나 생각된다. 현재의 시각으로 보면 검색이 헤게모니 아닌가?

초기 다음은 메일, 커뮤니티, 네이버는 검색 분야가 강했다. 하지만 둘다 포탈로 전환했고 성공했지만 초기의 No.1은 다음이었지만 지금의 No.1은 네이버이다.

20년의 회고

1993년 모자이크 브라우져가 나오고 나서, 인터넷 분야에서 1999년까지 엄청난 기술적 진화가 단기간에 있었다. 당시에 많은 컨셉이 쏟어져나왔고, 현재에도 구현되는 거의 모든 컨셉이 그 때다 나왔다. 95년~99 년이 빅뱅이 아니었나 싶다. 2000까지는 많은 기술, 컨셉이 나왔지만, 2000년대 이후에는 특히 국내는 많이 식었다. 포탈들이 시장을 잠식하면서 새로운 개별 서비스들이 등장하기 어려워지기도 했다. 그 당시엔 싸이월드의 미니홈피가 유일하게 포털외에 성공한 서비스인것 같다. 같은기간 해외에서는 SNS 서비스가 다시 돌풍을 일으키기 시작했지만 말이다.

현재의 추세는 글로벌하고, 스마트폰을 통해 95 년의 빅뱅 같은 것이 다시 나타나고 있다고 생각한다. 모바일 분야에서 역시 시작부터 5년 정도는 빅뱅의 시기일것이다. 95년에 개발자 구할때 후배들을 설득하면서 지금 우리가 역사의 중심에 있는 것이라고, 지금 아니면 언제 이런 경험 해보겠냐고 얘기하곤 했다. 모바일 빅뱅의 시기, 다시 온 역사의 순간에서 후배들에게 그런 비전을 주고 싶다.

2013.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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