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박태하

Interviewee: 박태하

Interviewers: 고양우, 안정배, 조동원

2012.1.18

강남역 인근 중식당 ‘초선과 여포’

KAIST에서의 Hana/SDN 네트워크 매니저 시절

전박사님의 SDN 프로젝트에 참여하게 된 것은 박사과정에 진학한 1990년이다. 이 시기에 프로젝트를 관리하던 박현제 박사님은 KAIST를 졸업하고, 회사에서 사업을 하면서 프로젝트에 참여하였다. SDN의 네트워크 운영은 당시 홍릉의 KAIST에 있던 CSRC (Computer Science Research Center, 전자계산소)에서 전자계산소 스탭들에 의해 이루어졌고, 나는 네트워크 매니저로서 전자계산소의 스탭 들과 함께 네트워크 운영을 했다.

당시 네트워크는 과기처가 펀딩한 연구망, 문교부가 펀딩한 교육망, 그리고 전박사님 연구실에서 만든 SDN이 있었다. 연구망은 대전에만 있는 정도였고, 교육망은 여전히 IBM 기반의 BITnet을 고집하고 있었다. SDN은 전박사님이 ETRI, 데이콤 등 연구소를 설득해 펀딩을 받아 운영하고 있었다.

SDN은 1990년에 미국 하와이대학교에 최초의 국제 전용회선을 연결하면서, Hana망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는데, 인터넷 구동이 지금처럼 쉬운 것이 아니었다. 1990년에 하와이와 전용선이 연결되면서 상대적으로 저렴하게 인터넷을 이용할 수 있게 되었다. 전용선이라 함은, 사용 유무에 관계없이 24시간 연결되어 있는 회선을 말한다. 국제회선 가격이 비싼 1990년 당시에는 국가 간의 연결을 TCP/IP 전용선으로 한다는 것은 획기적인 일이었으며, 아시아에서는 물론 최초의 일이었다.

당시 Hana/SDN의 규모는 가입기관을 다 합쳐도 30개 정도에 불과했다. 대전 지역의 연구소와 서울의 기업 연구소, KAIST, ETRI 등이 포함되어 있었는데 각 네트워크 담당자들이 서로 다 알았다. 3개월 정도에 한번 씩 모여 돼지갈비에 소주를 마시는 모임도 했다. 당시로서는 지금처럼 인터넷이 붐일 거라는 생각은 못하고, 네트워크가 재미있어서 했던 거니까 자연스럽게 모일 수 있었다. 즉 네트워크 운영자, 엔지니어, 사용자 그룹이 어느정도 중첩되는 시기였다.

Hana/SDN 네트워크 매니저의 업무: 게이트웨이, DNS, USENET 뉴스, 이메일 관리

당시 내가 맡은 네트워크 매니저의 업무는 게이트웨이, DNS, USENET 뉴스, 이메일 관리 등이었다. 네트워크 매니저는 국제망을 마음대로 접속할 수 있고, 게이트웨이들을 관리할 수 있는 권한이 있으므로, 젊은 엔지니어에게는 신나는 일이었다. 당시에는 라우터가 없었기 때문에, 일반적인 워크스테이션의 시리얼 포트에 SLIP 또는 PPP 포트를 통하여 WAN 구간을 연결하는 용도로 사용하고, 이를 게이트웨이라고 불렀다. 예컨데 1990년에 미국과 교신할 때에는 Sun3 워크스테이션에서 SunOS 커널에 SLIP디바이스 드라이버를 설치하여 연결되었다.

DNS는 일반 사용자에게도 국제회선의 사용이 개방된 후에, 본격적으로 적용되기 시작하였다. 1990년 최초 국제회선이 개통된 후에도, 상당기간은 주기적으로hosts.txt 파일을 30여개 네트워크 관리자들에게 보내 각 기관에 업데이트하는 식이었다. DNS가 있긴 했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한 번도 사용해본 적이 없었다.

USENET 뉴스는 지금은 거의 기억되지 않고 있지만, 인터넷이 느리고, Web이 보급되기 이전에는 그야말로 연구자들을 위한 정보의 원천으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USENET 뉴스의 분류체계인 뉴스그룹에는 소프트웨어 소스, 연구분야별 토론 그룹, 심지어는 유머 그룹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정보와 컨텐츠가 활발하게 교환되었으며, 비싼 국내외 통신비를 절감하기 위해, USENET 서버들 간의 경로를 관리하여 트래픽을 최소화하는 것도 네트워크 매니저의 중요한 역할이었다.

이메일도 가격 때문에 하와이와 연결된 이후에도 한동안 UUCP 또는 X.25로 전송되었다. UUCP는 다이얼업 모뎀으로, 주기적으로 하루에 한번씩, 특히 국제전화요금이 저렴한 심야시간대에 자동으로 연결하여 큐에 저장된 메일을 송수신하는 방식으로 동작하였기 때문에, 해외에서 오는 이메일이 지금처럼 실시간으로 배달될 수는 없었다.

이메일 게이트웨이의 구성도 현재처럼 단순하지는 않았다. 말이 인터넷이지 당시에는 UUCP, X.25, BIETNET 등 여러 네트웍에서 메일이 오고갔으며, 통신요금도 다 달랐기 때문에, sendmail configuration을 일일이 해줘야 했다. 이메일 목적지에 따른 경로를 메일 게이트웨이에서 잘 지정해줘야 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물리적인 것을 알아야 이해할 수 있는 상당히 어려운 것이었다. 예컨대 한국에 있는 사람이 미국 대학에 이메일을 보내는데, 그 대학에 연결된 네트웍이 BITNET이라면, 보내는 사람이 어디를 거쳐서 그쪽으로 보낼 건지 지정해줘야 하는 것이다. 이 경우, 그나마 싸게 보내려면 서울대(BITNET)를 경유하여, 미국의 BITNET으로 보내야 하는 것이다. 만약에 일단 국제구간의 X.25를 통하여 미국으로 보낸후에, 그곳에서 BITNET으로 전송한다면 국제통신요금이 왕창 나올 수도 있는 일이었다.

당시 데이콤에서 운영하던 국제 X.25 회선은 통신료가 상당히 비쌌다. 그래서 이 회선을 통해 이메일을 받을 수 있는 이용자는 교수님으로 제한되어 있었다. 한 번은 어느 해커가 KAIST 전산학과의 모교수님 이메일로 소프트웨어 소스를 다운 받은 적이 있었는데, 교수님 연구실로 부과된 통신비가 200만원이나 되었다. 당시 서울대 한 학기 등록금이 70만원이었는데 200만원이 나왔으니... 교수님이 이 해커를 잡아내라고 했는데 잡지 못하고 흐지부지 되었다.

1992년에는 서울 및 대덕에 각각 게이트웨이를 설치하여, 국제망을 구성하고, 두 지역의 각각 10여개의 SDN 가입기관을 연결하였다. 게이트웨이는 냉장고만한 SPARC4 서버였는데, 서울 및 대덕지역의 호스트를 각각 kum.kaist.ac.kr 및 daiduk.kaist.ac.kr이라고 붙였다. SDN에서 호스트명은 원래 sorak, worak, halla 등의 산이름을 붙였는데, 일부 강이름도 붙이기 시작했던 것 같다. 당시에는 게이트웨이에 상당히 애착을 가지고, 또한 물리적인 구조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했기 때문에, 호스트명을 정하는 것도 꽤 의미있는 일이었다.

게이트웨이에 들어가는 MCP 보드라는 56K 포트 두 개짜리 커뮤니케이션 시리얼 포트를 이용하여 서울-대덕 구간 및 국제회선 백본을 연결하였는데, MCP 보드만으로도 당시 1500만원 정도의 고가 장비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요즘 기준으로 하면 거의 8000만원에 해당하는 보드라고 할 수 있다.

UUCP는 느린 대신에 통신요금이 쌌다. 그래서 기본적으로 양이 많은 것은 UUCP로 왔다. UUCP는 옛날 전산과 사람들에게는 정보의 보고였다. 소스나 연구정보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지금이야 인터넷 정보가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그 시절에는 그게 있으면 전산학과의 경우 연구를 하거나 논문을 쓰는데 아주 유용했다. 자료의 출처란 게 인터넷을 제외하면 출판된 저널 뿐이었는데 저널에 실린 자료들은 리뷰하는 기간을 고려하면 적어도 1, 2년 지난 것들이었다. 반면 인터넷을 잘 뒤져보면 자기와 같은 분야의 연구원들과 거의 하루 단위로 정보 교류를 할 수 있었다.

사용자 학생들의 해킹 및 게임

1980년대 말의 해킹은 네트워크 및 Unix 서버를 대상으로 했기때문에, 더 도전적이고 흥미있었다. 해킹이 흥미있었던 이유는 컴퓨터 수가 한정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1988년 당시 KAIST의 일반적인 랩에도 SUN3워크스테이션 1, 2대에 터미널을 여러대 연결하여 사용하는게 보통이었다. 이걸 10-20명의 석박사 과정 학생이 함께 사용하는 것이다. 주로 박사과정이 관리를 하고, 그러다보니 석사과정은 컴퓨터에 심한 로드를 걸면 눈치가 보이는 분위기였다. 하지만 카이스트 전산과에는 메인프레임 VAX11-780이 있었다. 91년에 폐기한 이 기계는 메인메모리 1MB에 냉장고만한 700MB짜리 “대용량” 하드디스크를 가지고 있었다. KAIST 전체가 이 용량을 나눠 쓴 것이다. 전산과 학생들에게 1MB씩 줬던 것으로 기억한다. 근데 가끔 숙제를 하다가 작업물을 컴파일링 하다보면 1MB를 넘기는 경우가 있었다. 이럴 때는 해킹을 해서 용량을 늘리고 싶은 동기가 생긴다.

또 당시에도 게임을 많이 했다. 제일 많이 하던 게 텍스트 MUD의 일종인 'Hack'이다. 핵에선 D를 용(Dragon)이라고 했는데, 이걸 계속 하다보면 D에서 진짜 용으로 보일만큼 재밌다. 그래서 날밤을 새는 것이다. 핵은 유저들이 요즘처럼 동시에 플레이하는 방식은 아니었지만, 먼저 플레이하다 죽은 플레이어의 시체와 아이템은 볼 수 있었다. 가끔은 죽은 플레이어가 유령이 되어 쫒아오며 "내 갑옷 어딨냐?"고 묻기도 하는 등 재밌는 아이디어들이 있었다. 기본적으로 이런 게임들은 템포가 빠른 게임이 아니었기 때문에 머릿속으로 상상하면서 하는 게임이었다. 해킹하던 학생들이 서버를 해킹해 이런 게임을 몰래 숨겨놓고 플레이했다. 나도 석사과정 때는 해킹해서 숨겨놓는 처지였지만 매니저가 되니 이걸 찾아서 지우는 역할이 된 것이다.

이 시기에는 인터넷의 사용자 및 관리자가 서로 아는 사람들이었고, 주로 해킹을 하던 학생들도 비교적 순박해서 지금처럼 악의적인 해킹이 문제가 된 적은 거의 없었다. 초기에는 해킹이란 게 시스템 문제를 찾아서 남몰래 해결하는 것이었는데 실제로 그런 일이 많았다. 뭔가 해보다가 자기가 불편하니까 고쳐놓는 식으로. 또, 해킹 많이 하던 사람들은 항상 전자계산소 주변에서 지내다 보니 매니저들과 친하게 지냈다. 그래서 해킹하다 걸려도 약간 야단치고 모른 척하는 식이었다.

한번은 해킹과 코딩을 잘하던 위 모 군이라는 친구와 해킹을 하다가 당시 금성사 (현 LG전자)의 시스템을 멈추게 한 적이 있었다. 실수로 가짜 패스워드 파일을 다른 곳에 놔둔 상태에서 시스템의 원본 패스워드 파일을 지워버려서, 시스템이 다운되어 버린 것이다. 대기업 연구소의 서버가 다운되어, 몇 주 동안이나 복구가 안되고 있어서 상당히 미안해했다. 나중에 시스템 관리자가 되어 금성 관리자에게 예전에 시스템이 멈춘 적이 있지 않았냐고 슬쩍 물어봤다. 그쪽 관리자가 이유는 모르겠는데 시스템이 멈춰서 OS를 다시 설치한 적이 있다고 하더라. 나도 끝까지 얘기는 하지 않았다. 아마 담당자는 싱글 유저모드로 들어가서 백업시스템으로 복구를 할 수는 있었겠지만, 시스템이 멈춘 이유는 끝까지 몰랐을 것이다.

관리자 입장에서 옛날에는 해커를 잡는게 쉬운 편이었다. 네트워크 및 컴퓨터 속도가 느리기도 하고, 단말기의 숫자도 한정되어 있기때문에, 해커들이 뭔가 하고 있으면 매니저들은 비교적 쉽게 잡아낼 수 있었다. 일단 해커가 Root 권한을 획득하거나, 또는 시도하면 관리자 Console에 경고메시지가 뜨기때문에, 실시간으로 추적할 수 있다. 대덕의 과기대 학생들의 경우, 터미널 번호 (tty라고 한다)를 보면 전산실인지, 또는 기숙사인지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다. 홍릉 계산소에서 해커의 위치를 파악한 다음, 과기대 전산실에 전화를 해서 잡아내는 식이었다. 아이폰 cpu보다 몇 백배 느린 시스템을 몇 백명이 썼으니 느릴 수 밖에 없었다. 컴파일이 큰 경우에는 엔터 치고 커피 마시고 올 정도였으니까.

당시만 해도 학생들은 Vax나 Sun 워크스테이션에 더미터미널을 연결해서 사용하는 형태였고, 막 386 PC가 나오긴 했는데 상당히 비쌌다. 90년대에 386이 처음 나왔을 때, Unix와 X 윈도 시스템을 깔아서 워크스테이션이라고 불렀다. 386 이전에는 워낙 PC 성능이 떨어져서, X 윈도 시스템을 까는 것이 불가능했고, 주로 Xenix 등을 사용했다.

SALAB: 전길남 박사님과의 일화

요즘도 대학원의 연구실을 보통 Lab 또는 실험실이라고 한다. SALAB은 당시 KAIST 전산학과에서 네트워크 분야를 커버하는 유일한 랩이었다. 랩에서 매주 월요일마다 돌아가면서 세미나 발표를 했다. 15분 정도 발표하는데, 발표시간보다 더 긴 냉정한 코멘트를 듣기 일쑤였다. 일요일 저녁부터 소화가 안될 정도로 스트레스가 심했다. 힘들기는 했지만, 나름 분야의 최고가 되겠다는 자부심이 있어서, 전박사님의 푸쉬를 박사과정은 이해하고 있었다.

전박사님은 학생들을 엄청나게 푸쉬하는 분이지만 자기자신은 더 푸쉬한다. 낭비하는 시간이 전혀 없다. 출장을 가면 노닥거리는 시간이 없고, 스케쥴을 짜서 중요한 사람들을 다 만나거나 혹시 남는 시간이 있으면 끊임없이 책과 논문을 읽었다. 단순한 이론보다는 기술 발전의 핵심 추세를 중요하게 생각해서 매거진도 수십 여권 이상 처음부터 끝까지 다 보시던 것으로 기억한다. 물론 다 읽지는 않더라도 빠른 속독으로 맥락을 파악한다. 이렇게 본인 스스로 치열하셨기 때문에 학생들도 납득을 하고 존경했다.

전박사님과 같이 다닐 때는 항상 집중을 해야 했다. 전박사님과 서울-대전간의 출장을 자주 다녔는데, 전박사님은 공정한 것을 중요하게 생각해서 보통 번갈아가면서 운전을 하는 식이었다. 전박사님이 운전할 때도 쉴 새 없이 말씀을 하셔서 쉴 수가 없고, 내가 운전할 때도 끊임없이 말을 거셔서 쉴 틈이 없었다. 뭔가 계속해서 물어보는데, 대답을 안 하면 또 혼났다. 전박사님 질문이 일정부분은 생각을 정리하면서 확인을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집중하지 않아서 핀트를 놓치면 혼나는 상황. 그래서 항상 집중을 해야 했다. 이렇게 하루 종일 전박사님과 같이 다니면 기력이 거의 빠진다. 전박사님이야 매일 달리기를 하시는 분이니 체력이 남으시는 듯 했다.

90년대 초에 한 번은 "인터넷 백본이 1Gbps는 되어야 하는데" 라고 말씀을 하신 적이 있다. 서울-대전간의 최고 백본이 56Kbps인 시절이었다. "그렇게 네트워크가 고속으로 빨라지면 컴퓨터에 디스크도 필요하지 않겠다. 휴대용 컴퓨터의 크기를 줄이고, 디스크는 무겁고 시끄럽기만 하니까 어디 한 군데 대규모로 모아두면 되지 않겠냐"는 말씀을 하셨는데, 그때는 랩탑 컴퓨터도 무지 크던 시절이라, 미래 소설 같은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98, 99년 쯤 미국 사업자들이 와서 한 참이나 데이터 센터 얘기를 하는 것이었다. 서버들이 시끄러우니까 디스크와 서버들을 빌딩 한 군데에 쳐넣고, 회사들이 전산실을 운영할 필요는 없다는 요지로 전박사님이 했던 논리와 똑같은 얘기였다. 1999년 우리나라도 데이터 센터를 운영하기 시작했다. (LG 데이콤의 논현데이콤 센터가 국내 최초의 데이터센터) 세계적으로 빠른 편이었다. 휴대용 단말기는 결국 클라우드라는 형태로 데이터를 단말기 내부가 아닌, 데이터센터의 접속 형태로 크게 패러다임이 바뀌었다.

네트워크 기술 그룹 (SG-INET)

SG-INET의 SG는 sub group의 약자다. sub group인데 하나밖에 없었다. 전박사님은 강경란 박사에게 RFC-KR를 권유하는 등 관련 멤버들에게 세분화를 하자고 하셨지만 그게 잘 되지는 않았다.

처음에는 SG-INET을 박현제 박사님이 맡아서 하시다가 후반에 나도 3년 정도 맡아서 했다. 1994년 본격적으로 인터넷이 상용화되기 시작했는데, 그 전에는 기업들도 연구소 교류의 형태여서 친목적인 분위기였다. 그러나 상용화가 되면서, 어느정도 경쟁적인 분위기로 바뀌도, 기술 정보도 모두 공유하기 보다는 회사들이 조율을 하는 형태가 되었다. 회사 얘기를 바깥에서 하기 꺼리는 분위기가 이때부터 형성됐다.

SG-INET이 없어진 이유는, 원래 인터넷과 관련된 그룹은 연구 그룹, 엔지니어링 그룹, 오퍼레이션 그룹으로 나눠지는데, 이전까지 같은 그룹이었던 엔지니어링 그룹과 오퍼레이션 그룹이 분화되면서, 엔지니어링 그룹이 리서치 그룹과 같이 KRNET conference활동으로 전환되고, operator 그룹은 각 기업의 상용망 운영으로서, 정보 공유가 중단되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개인적인 해석이다).

즉, 연구망에서 상업망으로 바뀌면서 일어난 일이다. 이 당시에는 각 기업에서 상용 router가 도입되고, 네트워크 구축 및 운영도 어느정도 단순화/자동화되어, 옛날처럼 엔지니어들이 수작업을 할 필요도 없었으니 자연스럽게 만날 필요가 사라진 것이다.

또한, 사견으로는, 조직이나 연구 분야가 빨리 바뀌는 한국의 문화도 이유의 하나로 생각된다. 일본의 경우 게이오 대학의 Jun Murai 교수를 중심으로한 WIDE 프로젝트가 일본 인터넷의 효시로 인정되는데, 당시 프로젝에 참여하는 핵심 스탭 교수가 10여명, 관련되는 사람들이 거의 100여명이었다. 각각의 참여자는 각각 연구 그룹을 나누어 역할을 분담했는데, 10여년이 지난 후에도 여전히 같은 멤버들이 해당 분야에서 활동하는 것을 보고 감명을 받았다. WIDE에는 아직도 오퍼레이션 그룹도 있을 것이다. 미국도 연구자나 엔지니어들이 자발적으로 오퍼레이션 그룹을 만드는데 익숙하다. 반면, 우리나라는 상황이 바뀌면 뭐든지 새로 변경하고 적응하는데 익숙한 것 같다. 학회도 새로 만드는 경우가 많고. 다이나믹한 면은 있지만, 연속성이나 노하우가 잘 전달이 안되는 단점이 있는 것 같다.

연구 분야에서도 한국에 비해 미국이나 일본은 좀더 보수적이다. 소프트웨어 testbed를 만들 때, 한국은 1년 만들다가 버리고 새로 만드는 식이다. 석사 논문 주제는 implement 쪽이 많은데, 이경우 전체를 만들 수는 없으므로, 기반 플랫폼이 필요했다. 내 경우에도 석사과정때에 연구 프로젝트로 랩에서 DBMS를 만들면서 미국의 WISS라는 Wisconsin 대학의 스토리지 플랫폼을 가져다 썼는데, 잘 정리된 소스레벨의 플랫폼을 가져다 쓰면서, 시간도 절약하고, 많이 배울 수 있었다. 미국에서는 하나의 플랫폼을 만들면 이걸 계속 업그레이드하며 커뮤니티를 만들어 간다. 근데 우리나라는 이게 좀 약한 것 같다. 연구 프로젝트의 경우에도 연구 보고서 만들고 나면 버리는 경우가 많은 듯 하다. 다음 연구를 할 때 새롭게 만드는 식이다. 최근에는 점차 오픈 소스 프로젝트 등에 적극 참여하는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다.

인터넷 거버넌스 (KNC, ANC)

ANC에서 KNC로 바뀐 게 1994년 10월 경으로 기억된다. 당시 인터넷은 academic한 것 밖에 없었는데, 여기에 인터넷 사업을 하는 기업들이 들어오면서 KNC로 확대된 것이다. 이때부터는 학술망의 책임자 모임이라기보다 네트워크 운영 기관들의 협의체로 변해갔다.

92년부터 Hana/SDN 망의 관리를 KAIST 전자계산소에서 KT 연구소로 이관하게 되었다. 전박사님께서는 KT가 관리하면 통신비에 대한 부담없이 비교적 네트워크 용량을 확대할 수 있고, KT가 국내에서 가장 큰 통신업체니까 인터넷을 키울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셨던 것 같다.

Hana/SDN의 운영은 KAIST를 중심으로 이루어졌지만, 특이하게도 정부의 펀드가 아닌 네트워크 연결 기관들의 회비로 운영이 되었다. 당시 약 50여개로 기억되는 기관들이 회비 또는 통신비를 납부하는 형태로 운영이 되었으나, 특히 고객의 국제 통신비를 감당하기에는 안정적인 재원 또는 네트워크 용량의 확보가 필요한 단계에 이르렀다.

DNS에서는 한때 교육망과 연구망에서 각각 ac.kr 및 re.kr에 대한 관리 권한을 가져가겠다고 해서 논란이 있었다. 이런 논의는 전체 네트워크 관리 관점에서 접근해야 되는데, co.kr, ac.kr, re.kr 이 각각 다른 기관에 의해 행정적, 기술적으로 나뉘어 관리되면, 결국 KRNIC 업무 및 DNS 운영이 파편화되는 문제가 생길 수 있었다. 결국 기술적인 이슈를 포함한 권한에 대한 결정을 조정하는 기구가 필요했고, 각 네트워크의 책임자가 참여하는 ANC 및 KNC가 이 역할을 수행하였다.

네트워크라는 게 원래 여러 네트워크가 연결되어 동작하는 것이라서, 각 연결 기관의 입장을 고려한 공정한 정책 및 조정이 필요하다. 기술적으로도 그렇고, 누가 관리할 것인지, 비용을 누가 댈 것인지 조율하는 게 중요했다. 전박사님은 네트워크 당사자들간에 조정이 안되면, 결국 정부가 관리권한을 가져갈 것이라며 우려하셨다. 전길남 박사님은 인터넷 거버넌스를 초기부터 중요하게 생각하셨던 것 같다. 우리나라는 뭔가가 만들어지면 정부에서 자기 산하기구로 만들고 규제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는 인터넷 발전에 맞지 않는 방향이므로, 초기부터 체계적인 거버넌스 조직의 구성에 고려를 많이 하셨다.

KRNIC에 날아온 정통부의 공문

한국 및 일본의 주도로 매년 열리던 인터넷 관련 컨퍼런스인 JWCC에서 NIC의 필요성이 제기되어 한국과 일본에 NIC을 설치하기로 한 것이 92년이다. 92년 10월, KNIC이란 이름으로 사전 테스트 서비스가 실시되었고, 93년 4월 KRNIC으로 명칭을 확정해 공식 서비스를 시작했다. KRNIC의 사무국은 KAIST 내에 위치했으며, 1994년 1년간 DACOM의 프로젝트 펀드 지원을 받았는데, 돌이켜보면 감사할 일이다.

93년, 정통부에서 KRNIC에 관한 공문을 받았다. 당시 정통부의 의문은 "인터넷이라는 게 있고, 이게 굉장히 중요하다는데 도대체 그게 무엇이냐, 이걸 관리하는 사람이 누구냐" 하는 것이었다. "전박사님이 한다"고 대답하면, "무슨 자격으로 KAIST가 그 역할을 하느냐"고 되묻고, "미국에서도 그렇게 한다. 인터넷은 연구자 및 관련 커뮤니티가 자발적으로 나서서 일을 하고, 그 커뮤니티 안에서 대표를 선출하는 형식이고, 전세계적으로는 IANA에 책임자 이름이 등록된다"라고 답하는 대화가 오갔다. 그러고 나서 정통부에서 KRNIC 업무를 KAIST에서 해주십사 부탁한다는 요지의 공문이 왔다. 이미 KRNIC이 돌아가고 있는 중이었지만, 정통부에서는 정부기관이 명확하게 상황을 통제하는 구도를 분명히 할 필요가 있었던 것 같다. (참고로 KRNIC의 명함이 아직 있다 ^^)

이후 94년 9월, KRNIC 사무국을 KAIST에서 한국전산원 (NCA)으로 옮기기로 하고, 2명의 전산원 직원이 KAIST로 파견나와 8월 한 달간 KRNIC 업무를 인계받았다. NIC이 정책적으로 중요해지기 시작한 것은 당시가 DNS를 돌리기 시작한 시점이었고, IP 주소가 그 무렵에 굉장히 많아졌기 때문이었다. 호스트의 개수도 굉장히 많아졌다. 원래는 NIC에서 이것들을 모두 트랙했다.

NIC의 역할은 등록(registration), 데이터베이스화(database service), 통계(information service) 세가지로, 실제로는 미국의 Jon Postel이 했던 것처럼 1, 2명이 operation을 맡는 형태로 운영된다. 등록업무는 IP 주소를 할당하는 것이고, 데이터베이스화 작업은 그 정보를 어딘가에 가지고 있는 것이다. 또, 통계는 트래픽, 호스트 개수에 대한 통계를 보유하는 것이다.

호스트가 많아지다보니 DNS에 할당할 규칙이 필요했다. NIC에서 규칙을 문서로 만들고, SG-INET에서 이걸 논의하고, KNC에서 이를 허가하는 수순이었다. 94년에 광운대와 강원대가 서로 KWU를 쓰겠다고 의견 충돌이 난 적이 있다. 그래서 대학교 이름은 full name으로 쓰는 것을 규칙으로 만들게 된 것이다. (ANC-92-037 참고)

조금 지나자 sex.co.kr 같은 도메인네임을 신청하는 사람이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과도한 규제 같지만, 그때 당시에는 인터넷이 국가를 위해 좋은 망이 되어야 하는데 나쁜 사람들에 의해서 악성코드가 유포되고 그러면 안된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 그래서 도메인 이름이 "망의 발전을 저해하거나 미풍양속을 해치면 안된다"는 식의 규칙을 만들기도 했다. (당시의 흔적이 남아있는 .kr 도메인이름등록 세부원칙) 당시는 아직 RFC-KR의 형태는 아니었지만, 공식 문서로 만들어진 규칙이었다. 규칙이 바뀌는 과정은 항상 SG-INET에서 논의하고 KNC에서 허가하는 방식이었고, 그때까지만 해도 외부 이용자의 항의나 문제는 거의 없는 상황이었다.

호스트 개수가 늘어나는 추이를 DB화한 파일도 전산원으로 이관할 때 전달했다. 이 추이를 자동으로 잡을 수 있는 프로그램을 내가 스크립트로 만들기도 했다. NIC 기능이 전산원으로 이감할 때, 전산부서(김원 현 KISA 인터넷진흥본부장이 당시 전산부장)에서 파견 나온 두 명의 과장급 실무자와 나, 최우형 (후에 조민경)이 이전작업을 했다. 하지만 이런 파일은 너무 실용적으로 만들어진 문서라서 지우거나 새로운 포맷으로 만들어졌을 것 같다.

KRNIC 및 APNIC

당시 미국의 NIC 업무는 국방을 담당하는 MILNET이 별도로 존재했고, 이외에는 GSI라는 회사가 맡아서 하고 있었는데 그 중립성에 말이 많았다. 우리는 JWCC를 통해 일본과 교류를 계속하고 있었는데, 여기서 NIC을 만들자는 얘기가 있었다. 일본은 JNIC, 우리는 KNIC을 하기로 했었는데, 전박사님이 "나중에 쿠웨이트가 NIC을 만들수 있으니 KNIC은 안되겠다" 해서 KRNIC이 되었다. 이렇게 KRNIC과 JNIC이 먼저 생기고, APNIC이 네트워크로 형성되는데 APNIC도 초기에는 한국과 일본이 주도해서 시작한 것이다.

전체적으로 아시아의 비중이 큰 점을 감안하여, 당시에는 한국이나 일본 또한 유력 후보지로서 논의되었으나, 호주에서 이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면서, APNIC의 위치를 호주에 놓기로 합의되었다.

IX

당시 교육망, 연구망, SDN은 상업망이 아니고 연구를 중심으로 하는 망이었기 때문에 상호 경쟁하는 분위기가 있었다. 그래서 세 망을 연결하는 IX는 중립적인 KAIST 홍릉에 둘 수 밖에 없었다. 95년 전산원으로 이관하기 전에 두 망으로부터 operation 비용을 받고 독립적인 IX를 운영하는 방안도 논의되었지만, 결국 중립적인 한국전산원(NCA)으로 옮기는 것으로 결정됐다. 이후, KT와 데이콤이 커지면서 별도로 IX 를 추진하면서 전산원의 IX의 의미가 작아지게 되었다. (관련 자료: 이영로, 손영태, Internet eXchange in Korea 2002.3.5)

PACCOM 프로젝트의 비용문제

90년에 하와이를 통해 미국과 전용선 망이 구축(PACCOM 프로젝트)될 때, 우리가 그 비용을 대는 것에 대해 전박사님이 불공정하다고 생각하셨다. 국제 회선 비용을 불평등하게 부담하는 것은 전세계 대부분에서 지금도 마찬가지다. 마찬가지로 .edu, .gov를 미국에서 쓰는 것도 못마땅해하셨다.

아시아 지역 국가들은 위성 또는 해저케이블을 통한 미국과의 국제회선비용이 굉장히 많이 나왔다. 비용이 너무 많이 나왔기 때문에 각 국가 정부에서는 미국과 in, out 데이터양을 비교해서 비율대로 부담하자는 얘기도 나왔다. 하지만 미국정부의 입장은 똑같았다. 민간 사업자들의 문제니까 민간사업자끼리 해결하라는 식이었다. 물론 미국의 민간사업자는 미국 외의 국가에서 전액부담할 것이 아니면 아예 연결을 받아주지를 않았다.

인터넷 대중화는 빠른 상용화 덕분

네트워크 운영은 논문 및 연구에는 직접적인 도움이 안됐지만, 무척 재미있는 일이었다. 다른 네트워크 매니저들도 굉장히 자발적으로 열심히들 했다. 서울에서 모임을 가지면 지방에 있는 분들도 빠지지 않고 올라왔다. 돈이 된다는 생각은 못했지만 어떤 의미있는 인프라가 될 것이라는 생각은 공감하고 있었다. 완전히 새로운 경험이기 때문이다. 예컨데 지금의 MS messenger비슷하게 채팅을 할 수 있는 IRC라는 프로그램이 있었는데, 지금은 외국에 있는 사람과 실시간으로 대화하는 일이 새로울 것 없는일이지만 그때로서는 정말 신기한 일이었다. 그런 재미에 빠져있던 열정을 가진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에 즐거웠다.

또 인터넷을 운영을 잘하면 연구하는 사람들이 굉장한 혜택을 받았다. 88년, 석사 논문을 하이퍼미디어를 주제로 썼다. 당시 나는 DB LAB에 있었는데, 하이퍼미디어는 옛날 사람들에게는 DB의 일종으로 이해되고 있었다. 당시 유일하게 하이퍼미디어를 구현한 게 애플의 매킨토시였다. 맥에는 하이퍼카드를 장착할 수 있었는데, 정보를 입력하면 텍스트로 구현하는 것이 아니라 멀티미디어 정보로 구현하는 카드였다.

네트웍을 연구하다보니 자연스럽게 이 하이퍼미디어를 네트웍에서 동작시키면 굉장히 잘 맞겠다는 생각을 했다. 원리는 간단했다. link라는 게 결국 파일명인데, 파일명 앞에 호스트(컴퓨터) 이름을 붙이고, 파일의 경로를 붙이는 식이었다. 여기에 하이퍼미디어는 다른 컴퓨터 사용자도 똑같이 볼 수 있어야 하니까 이메일의 SMTP 포맷처럼 문서도 포맷을 정해서 하는 것으로 프로포절을 써서 발표를 했다. 당시엔 말도 안되는 얘기라고 엄청 깨지고 말았다. 그리고 잊고 있었는데, 93년에 웹이 나왔다. 이런 플랫폼이 좀 더 빨리 나왔으면 좋았을텐데 안타까웠던 기억이 있다.

9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일반인은 인터넷을 거의 이용하지 않았다. 우선, 정보가 많은 PC통신이라는 대안이 있었고, 당시로서는 인터넷을 연결할 수 있는 모뎀을 구하는 것이 아주 어려웠다. 당시 하이텔의 컨텐츠 담당 부장에게 인터넷에 방대한 정보가 있다는 것을 알려주면서 몇 번 제안을 하기도 했는데 반응은 시큰둥했다. 94년이 되어서야 나우콤을 시작으로 PC통신에서 인터넷이 일부 부가서비스로 지원되기 시작하였다.

초기 ISP와 KT, 데이콤

결국 94년, 허진호 박사님의 ‘아이네트’가 나오면서 상용서비스가 시작했는데 세계적으로 상업 인터넷 서비스가 이렇게 빨리 생긴 사례가 없다. 미국의 경우도 공용으로 먼저 만든 다음에 몇 해 돌려보고 상용으로 공개하는 식이었다. 반면, 우리나라는 연구소에서 만들었기 때문에 작동이 된다는 것이 다 공개되어 있었고, 그래서 바로 상용서비스도 시작되고 사람들이 빨리 이용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사실 92~93년까지만 해도 정부를 비롯해 다들 TCP/IP가 아니라 OSI로 가야된다고 생각했다. TCP/IP 네트웍을 다들 "토이"라고 부르면서 "왜 그런 장난감 같은 걸 하는거야?"라고들 했다. 당시 전박사님이 정부를 잘 설득하셨던 것이 주효했던 것 같다. 정부의 관점에서는 5년 10년 후를 바라보고 프로젝트를 하는데 전박사님도 주로 그런 스케일로 이야기를 하는 분이셨다. 10년 후면 백본망의 속도가 어느 정도가 되고 집집마다 인터넷이 깔리게 된다는 식으로.

물론 한국에서도 초기 인터넷 접속서비스 사업자는 과잉경쟁 때문에 다들 망했다. 미국에서도 ISP가 다 망했다. MCI Worldcom조차 망하지 않았나? PSINET도 망했고. 원래 코어를 땅을 파서 심는 것과 건물에 설치하는 것이 비용이 많이 드는 일이다. 세계적으로 전화회사들은 인터넷을 안했고, 자그맣게 시작한 UUNET 같은 데이터 정보 회사들이 나오기 시작해서 98년 닷컴 붐 때 통신회사에 육박할 정도로 성장한 것이다. PSINET도 KT보다 시가총액이 컸다. 돈을 벌어서 통신회사를 사버리자는 말이 나올 정도로. 이렇게 호황이었기 때문에 돈이 생기면 땅을 사서 코어를 깔았다. 깔고 나면 이게 빚이 아니라 자산이 되니까. 이런 식으로 하다가 닷컴 붐이 꺼지면서 자산가치가 1/10으로 떨어지면서 다들 망한 것. 반면, 우리나라의 KT와 데이콤은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시작한 것이다.

사업하는 사람들은 운칠기삼이라는 얘기를 많이 한다. 기량은 거의 비슷하기 때문에 운이 70%라는 말인데, 실제로는 운이 90%는 되는 것 같다. 지금은 뭘 해도 잘 안되는 시기다. 좋은 아이디어가 있어도 대기업이 가져가게 되는 구조고. 초기 ISP 업체가 다들 망했지만 그때 게임 업체들이 돈을 많이 벌었다. 망이 깔리고 대중화되면서 피씨방도 많아지고 게임할 여건이 조성됐기 때문이다. 지금도 그렇다 스마트폰이나 소셜이 막 열리는 시기다. 원래 난세는 큰 업체가 무너질 때 생긴다. 지금 가장 잘나가는 구글, MS, 삼성, 페이스북, 아마존 중에 5년 뒤에도 지금처럼 잘나갈 수 있다고 확신할 수 있는 곳이 있나? 그 난세를 노리는 방법이 기회를 잡는 방법이다.

2012.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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