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한선영

2012.1.2(월) 19:00~21:00

Interviewee: 한선영

Interviewers: 고양우, 안정배, 조동원

장소: 건국대학교

최초의 인터넷 국제학술대회 PCCS

- 1980년대 초 컴퓨터 네트워크 환경과 인터넷 파이오니어들

2012.1.2(월) 19:00~21:00

Interviewee: 한선영

Interviewers: 고양우, 안정배, 조동원

장소: 건국대학교

1985년, 한국은 SDN(TCP/IP) 구축된 상태

83, 84년, 한국은 TCP/IP 베이스의 R&D 네트웍인 SDN이 막 전국망을 가지고 있었고, 미국, 유럽(영국, 독일), 호주, 캐나다, 일본에서 각 나라의 R&D 망을 구축하고 있었다. 각국이 각자의 R&D망을 가지고 있어서 서로 기술과 정보를 교환하고자 했고, 도메인네임 등의 필요성이 제기되던 때였다. 예를 들어 PCCS의Call for Paper에 기록된 UUCP 이메일 주소를 보면 주소포맷이 다른데, 이를 표준화하자는 논의가 제기되고 있었다.

당시 우리는 PDP/VAX에 4.1BSD를 올리고 TCP/IP를 포팅해 인터넷 연결을 했는데, 이 TCP/IP 방식의 네트웍은 미국과 우리나라 등 몇 개 나라만 갖춘 기술이었다. 이런 경험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에 PCCS를 준비할 수 있었던 것이다.

컴퓨터 네트워크 분야의 최초 국제 컨퍼런스

당시, 전길남 박사님의 지인인 김광회 교수님(당시 USF, 이후 UC Irvine) 등이 IEEE??에서 활동중이었기 때문에 미국측counterpart로 모셨고, 와세다대에서 공부하시고, 막 한양대로 오신 박용진 교수님이 일본을 담당해주셨다.

당시는 물론, 지금까지도 명성이 자자한 인터넷 최고의 전문가 Larry Landweber, David Farber 등의 전문가들이 초청됐고, 해외에서 120~130명 정도가 참여했다. 참석자가 많았지만 큰 예산이 들어간 것은 아니었다. 이 중 몇 분에게만Honorarium으로 2~300불을 드렸을 뿐, 대부분은 자비로 참석했다. 일본과 미국에서 가장 많이 참석했고, 유럽, 싱가폴,호주, 캐나다, 대만, 홍콩, 중국 등지에서도 참석했다. 명실공히 컴퓨터 네트웍스 분야 최초의 글로벌 컨퍼런스로 기억한다.

PCCS 전에는 네트웍에 제한이 많았다. 어느 정도였냐 하면, RFC를 쓰고 싶어 SRI에 편지를 쓴 적이 있다. 현재는 IETF 홈페이지에 다 공개되어 있지만, 그 때는 편지를 쓰는 수밖에 없었다. RFC 822번을 보고 싶으니 복사해달라고 담당자에게 편지를 썼더니 1달 만에 국방성 비밀이라고 보내줄 수 없다는 메일을 받을 정도였다.

PCCS의 주제

PCCS의 주제는 Pacific, Computer Communications 였다. 컴퓨터 네트워킹이 정확한데, 네트웍이라 하면 오퍼레이션이나 아카데믹한 냄새가 났기 때문에 당시에는 잘 쓰지 않고 Computer Communications란 말을 많이 썼다. 지금의 4G처럼 당시로서는 hot keyword였다. 따라서 Computer Communications와 연관된 technology의 전문가들, 그리고 그들의 관심분야가 망라되었다. Internet 전문가도 있었고, 김광회 교수같은 분산시스템의 최고 권위자도 있었다. 이들 덕분에 computer network 분야의 최첨단 논의가 있었다.

당시 일본의 최고 관심사가 5세대 컴퓨터였는데, 게이오 대학의 아이소 교수가 최첨단 기술인 제6세대 컴퓨터를 BoF세션에서 발표하기도 했다. 바이오컴퓨터 같은 컨셉의 네트워킹을 생각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미국과 연결된 지역 네트웍(regional network)을 연결하는 게 각 나라의 주된 관심사였다. 미국과 유럽은 지역네트웍이 있었지만, 태평양 지역엔 없었기 때문이다. 미국 Wisconsin 대학교 Larry Landweber 교수가 Pacific-USA Joint network meeting을 했는데, 여기서 지역네트웍을 구축해 정보를 교환하자는 논의를 했다.

비록 속도가 300bps에 불과했지만, 한국이 미국 네트웍과 연결했단 소문이 나니까 다른 나라들도 다른 나라와 연결하자,이런 움직임이 생겨났다. 그러면서 Domain Name Standard를 만들자는 움직임이 있었다.

지금은 인터넷이 전세계에 연결되어있지만, 그 때는 자국만 연결되어 있었다. 그래서 다른 나라와 연결하고 싶어했다. 우리나라도 SDN이 82년에 시작되었고, 84년에 미국 hplabs에 연결된 상태였다. 당시엔 HASE modem이라는 300bps 짜리 모뎀으로 하루 3차례씩 dial-up modem으로 연결했다. 이걸로 USENET 뉴스 일부를 받아 보았다. USENET의 뉴스량은 테잎으로 몇 개씩이라 대부분은 한 달에 한 번 테잎으로 받고, 중요한 것들, 네트웍 분야의 뉴스만 받고 있었다. USENET에서 뉴스를 받아 SDN에 다이제스트를 뿌리는 방식이었다. 한달 분량의 뉴스가 테이프로 여러 개라서 시간이 많이 걸렸다.

Regional Network 구축

또한, PCCS에서 PACNet이 만들어졌다. 이를 통해 추후에 dial-up 대신 전용선 라인을 하와이와 연결했다. 이를 계기로 그 전엔 미국망이었던 인터넷이 global network이 된 것이다. 이는 PCCS로 인적교류망을 구축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아태 지역의 APAN과 그 후 유럽을 연결한 TEIN2,3,4 등이 PCCS를 계기로 인적 네트워크를 구축하고 정보를 교류하기 시작한데서 비롯되었다고 볼 수 있다.

5대 국가기간전산망

PCCS 덕분에 정부에 가서도 할 말이 생겼다. 미국도 NSF에서 엄청난 펀들를 해주는데 정통부에서도 컴퓨터 네트웍에 지원을 해야되는 거 아니냐고 말했다. 일본인들도 배우러 오는 걸 보고 나니까 체신부 관리들도 귀를 기울였다. 행정망 구축도 아마 IBM의 메인프레임을 사용하려고 했을 것이다. 그렇게 VM머신이니, IBM OS 가지고 Bitnet 통해 구축하는 방식으로 했다면 돈도 무진장 많이 들었을 것이다.

말도 많고 탈도 많았지만, 다행이 당시에 UNIX라는 게 있어서, 또 우리가 가진 TCP/IP 기술을 체신부가 밀어줬기 때문에 할 수 있었다. 당시엔 사람들이 막 욕했다. 되지도 않는 기술, 학교 연구실에서나 하는 기술로 국가망을 어떻게 하느냐고 말했지만 지금은 아무도 욕하지 않는다. 그 때 그렇게 했으니까 지금 한국이 이만큼 하는 게 아닌가 한다. 당시 체신부 오명 차관, 청와대 홍성원 비서관, 데이콤 이용태 회장, KAIST 전길남 교수 같은 분들이 이 중요성을 아시고, 국가정책으로 입안했다.

세계 네트웍 권위자들의 자발적 참여

Computer Network 분야에서 전세계를 커버하는 컨퍼런스로는 PCCS가 처음이었다. 유럽이나 미국 내에서는 지역 컨퍼런스가 존재했겠지만, Pacific, 동남아(싱가폴, 홍콩)를 아우르는 건 처음이었다. 당시 자국의 네트워크 권위자들이 자발적으로 참가했다.

KAIST와 ETRI가 주최를 했는데, 예산은 사무국운영지원비 정도여서 참석자들 모두에게 초청비를 지원할 수준은 아니었다. 김광회 교수님이 NSF 여비 보조 프로그램을 통해 미국 참가자들을 위한 예산만 자체적으로 조달한 것으로 알고 있다. 당시 사무국장이었기 때문이었기 때문에 예산 관계된 일을 했는데, 비행기 티켓 등을 보내거나 그런 것은 없었다.

이메일 이용

UUCP 망을 통해 하루 세 번 이메일을 받았다. 예정된 시간에 전화를 걸어 MTA끼리 메일을 주고 받았다.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외국인 120~130명이 참석하는 대규모 행사로 개최하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Call for Paper, personal e-mail, 숙박 예약 등, UUCP가 없었다면 telex를 이용해 복잡하게 연락할 수밖에 없었다. 미국 등 웬만한 나라들과 모두 UUCP로 연락했다. 당시 UUCP는 dial-up을 이용한 물리 계층이 맨 아래 있고, 그 위에 UUCP, 그 위에 UUCP메일이나 Bit메일 같은 메일러를 올려 전화로 연결하는 방식이었다.

SSM-16 설치

또, PCCS 행사장에 국산 라우터인 SSM-16을 설치하기도 했다. 삼성전자 김건중 상무를 통해 SSM-16 슈퍼미니컴퓨터를 구했다. OS가 시스템V였는데, TCP/IP가 탑재되지 않은 시스템이었다. 그래서 이동만 박사가 TCP/IP 소프트웨어를 구해 SSM-16에 포팅해 인터넷을 사용할 수 있게 했다. 이 시스템을 PCCS 개최장소인 쉐라톤워커힐호텔에 설치하고, 레이저프린터를 비롯한 단말기 몇 대를 설치했다. 카페처럼 차려놓았더니 외국사람들이 아주 붐볐다. 준 무라이 교수도 이 때 많은 자극을 받은 것으로 알고 있다. 이런 최첨단 기술이 망라된 컨퍼런스는 그 후로도 한 5년은 없었을 것이다. 한국이 SDN으로 앞서가니까 해외의 연구자들이 보러 온다고 하니 우리가 뭔갈 보여주자 해서 준비한 건데, 컨퍼런스에서 이메일을 쓸 수 있다는 사실은 아마 미국인들도 충격을 받을 만한 일이었을 것이다. 한국에 와서 자기 나라에서 쓰던 이메일을 쓸 줄은 몰랐을 것이다. 행사장에서 이메일을 쓸 수 있다는 데 일본인들도 깜짝 놀라고 갔다.

또, TCP/IP로 전국을 커버하고 있다는 점, SSM-16에 TCP/IP를 포팅하는 기술을 보고 놀라며 관심을 보였다. 당시에는TCP/IP가 기본장착된 시스템이 없었다. 87년에야 출시된 VAX 4.2BSD에나 TCP/IP가 기본장착될 정도였으니까. MS윈도우도 3.2 버전쯤에야 장착됐다.

젊은 참가자들

당시 각국의 R&D 책임자들이 주 참가자. 교수들은 학생들을 데려오기도. 일본은 JUNET, 미국엔 ARPANET, NSFNET, 영국, 프랑스,독일 등이 당시의 유명한 네트웍이었는데, 그 책임자들을 초청했다.

그 당시엔 이들의 나이가 모두 30대였다. 이 당시부터 최양희 교수, 박용진 교수, 안순신 교수, 송관호 박사, 한선영 교수, 이동만 교수, 허진호 박사, 정철 박사, 박현제 박사 등 거의 30대나 20대엿던 세대가 국내 인터넷을 주도해 온 것이다. 당시의 30대 핵심멤버들이 현재 50대까지 온 것이다. Landweber도 Farber도, 김광회 교수님, 전길남 박사님도 당시에는 젊은 분들이었다.

일본의 준 무라이 교수도 30대 초반이었을 때, PCCS에 참석했다. 아마 PCCS를 통해 자기 일생을 이걸 하겠다는 동기를 얻은 것 아니겠나. NSF의 David Farber 교수, Wisconsin 대학의 Larry Landweber 교수, 영국의 D. Barber 교수, 게이오 대학의 아이소 교수, 동경대학의 이시다 교수, 캐나다의 Kummerfeld 박사 등 쟁장한 권위자들이 참가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Human Network

시간 가는 줄 몰랐다. 당시 KAIST를 졸업하려면 SCI 저널을 썼어야 했었는데, 당시 우리나라 교수들도 SCI에 저널을 싣지 못했다. 근데, 그 때 영국의 Barber 교수가 와 있었다. Davis와 함께 Computer Networks라는 책을 쓴 저자였다. 내 관심분야인virtual terminal 부분을 쓴 사람이었다. 당시 아카데미에서 최고의 권위자였다. 내가 PCCS에서 논문을 발표하는 자리에 Barber 교수가 와 있었다. 아, Sir Barber가 와 계시는구나, 끝나고 박사학위 논문 드래프트를 들고 찾아갔다. 물론 게재되지 않은 논문을 보여주는 건 당시로서는 금기사항이었다. 컨퍼런스용 short version도 아니고, full paper를 들고 가서 리뷰를 부탁했다. 당시 그는 SCI 저널인 Computer Networks의 에디터였다. 그에게, 교수님께 보여드리면 혼날까봐 못 보여드리고 있던 논문의 리뷰를 부탁했다. 고맙게도 그가 빨간 연필로 논문을 검토해 주었다. 이거 좋은 논문인데, 내가 많이 고쳐줬다고 했다. 이 논문을 저널에 내도 되겠느냐고 물었더니, Computer Networks에 내라고 하더라. 나로서는 무척 행복하고 고마운 일이었다. 나 뿐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당시에 내놓으라 하는 Computer Networks 전문가가 다 왔었으니까. 하지만 120여 명의 전문가들이 한꺼번에 오니까 활용을 잘 못했다는 아쉬움은 든다.

스탠다드는 RFC로 만들지만, 실제 오퍼레이션은 컨퍼런스나 인적 교류가 있어야 한다. 만나서 신뢰를 쌓아야 한다. 진짜 할 마음이 있는가 자국의 R&D 네트웍을 regional, international, global하게 연결시킬 의지가 있는가. PCCS는 이런 일을 할 수 있는 기폭제였다. 인터넷과 관련된 주요한 결정은 이러한 인적 네트워크가 형성되고 그 중 핵심멤버가 되어야 권한을 부여받을 수 있다. 들러리나 서고, 참석도 안하고 그런 사람에게 백본 연결해주고 그러지 않는다. APAN을 어떻게 연결할 것인가, 현재 백본은 2.4G인데, 공식적인 인정을 받는 사람이 추진해야 10G로 확장할 수 있는 것이다. 돈만으로 되는 게 아니다. 돈도 중요하겠지만, 이 사람이 실력있고, 리더쉽있고, 파이오니어고, 인스파이어인지 일반의 인정을 받은 후에 권한을 주는 것이다. 전박사님은 이후에 APAN 체어, founding chair도 하시고 그랬다.

PCCS는 한 차례로 끝났지만, 그 영향을 받아 비슷한 컨퍼런스를 하자는 얘기가 많았다. 국내에서는 'SDN 워크샵'을 1년에 두 차례,여름과 겨울에 진행했다. SDN 프로젝트가 끝난 이후에는 SWCC(Summer Workshop on Computer Communications)가 되었다. SWCC는 지금도 정보통신연구원에서 매년 개최한다.

일본사람들과는 PCCS 이후, JCCW(Joint Computer Communication Workshop)를 만들었다. 86년에 설악파크호텔, 이듬해에는 일본의 Tsukuba에서 개최했다. 그러자 대만의 폴린 박사 같은 이가 관심을 보였다. 그래서 후에 ICOIN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이렇게 규모가 커지자 연구실에서 커버할 수 없게 되었다.

ICOIN이 이제 25년 쯤 되었을 것이다. 지금은 internet operation이나 governance를 다루는 컨퍼런스가 많기 때문에ICOIN은 아카데믹하게 흘렀지만, PCCS를 계기로 한 Huma Network을 바탕으로 지금까지 지속된 오래된 컨퍼런스라고 할 수 있다.

정보통신연구회도 PCCS를 계기로 인맥이 형성되서 88년에 OSIA를 만들었다. PCCS 직후에는 TCP/IP보다 OSI가 흥했다. JTC1, SC6, SC18, 29 이런 네트웍 관련 SC를 조직했다. 정보과학회 산하에 정보통신연구회, 핵심멤버가 조국현, 박용진, 안순신, 최양희, 김동규 교수님, 송관호 박사 등이 다 PCCS에서 알게 된 분들이다. 그 인맥이 지금까지 가면서 무슨 일을 해내는 것이다.

전박사님이 얼마나 많은 커뮤니티를 만드셨는지 모른다. 국내에선 PCCS, 정보통신연구회, OSIA, 외국에서는 APAN, APNG, APTLD, CCIRN, 셀 수 없는 커뮤니티를 만들었다. 인맥, 학회, 네트웍, 컨퍼런스, ...

나 역시 Josch Urban이 PCCS 끝나고 연락을 해서 IEEE 컨퍼런스 프로그램 커미티 멤버가 되기 시작했다. 이동만 박사도 이와 같은 방식으로 영국에 교환학생으로 가기도 했다.

준 무라이 교수는 PCCS 이후 영향을 받아 JUNET이라든가 WIDE, 한국의 SDN과 같은 것을 만들었다. 작년에 만났을 때,한국 인터넷30주년을 어떻게 준비중이냐 물어서, 백서도 만들고, KRNET 등에서 행사를 준비중이라 했더니 관심을 표했다. 일본도 곧 30주년을 맞는데, 이시다 교수 등 중요한 분들이 돌아가셔서 30주년을 대비해 정리하는 작업을 하고 싶다고 했다. 준 무라이 교수는 PCCS를 두고, "PCCS was the starting of everything."이라고 여러 차례 강조했다.

또, UC Irvine에 계시던 berkerly 출신의 김광회 교수님이 은사이신 Ramamouth 교수를 모셔왔다. 이분들과 교류가 계속 있었다. 학장할 때 김광회 교수님을 건대 석좌교수로 모셨다. 이때 real time system을 하셨는데 많은 도움 받았다. 건대 새천년관 꼭대기의 GPS안테나와 UC IRVine의 안테나로 연결해서 건국대에서 UCI에 있는 무인자동차를 원격으로 운전하는 실험을 하기도 했다.

85년부터 2011년까지 김광회 교수님을 알게 되서 나 뿐 아니라 우리과의 많은 교수님들이 research collaboration을 하는 등 도움을 많이 받았다.

Smalltalk Episode

준비기간 중에 Berkerley에서 Smalltalk이라는 머신이 만들어졌다. 당시 등장한 획기적인 윈도우, OOP의 원천기술이었다. 그 때, Goldberg에게 이메일을 보내 Smalltalk virtual machine의 object code(이미지파일)을 다운로드했다. 그게10MB였는데, 생각없이 HPLABS에 dial-up 모뎀으로 걸어 다운로드했더니, 다음 날 전박사님이 누가 통신료를 이렇게 많이 썼냐고 부르시더라. 그 때, SDN 프로젝트 1년 예산이 2~3천만원 할 때였는데, 하룻밤에 국제전화료가 300만원이 나온 것이다. 물론 통신료는 연구비에서 지불했다. 장사나 게임하려고 한 게 아니니까. 이후 관리를 위해 패킷마다 쿼터를 만드는 등의 accounting system이 만들어졌다. Berkerley에서 나온 것 외에 다른BBN에서 나온 terminal을 구입해 Smalltalk를 구현하였다.

모델조차 없던 시대, PCCS를 만든 힘은 무엇인가?

미국에서 ARPANET한다는 사실, 그것을 UNIX머신으로 한다는 사실은 모두 알고 있을 때였다. 전박사님이 IP주소를 나눠주는 ISI에서 RFC 관리하는 기관에 있는 존 포스텔과 동창이다. UCLA에서 어떻게 하는지 다 보시고 알고 있었다. 미국의 인터넷 좌지우지하는 핵심멤버들과 교분이 깊으셨다.

전박사님은 항상 몇 걸음 빨리간다. 옆에 있는 사람 힘들다. 일본사람보다 훨씬 빨리 간 거다. 그걸 끌고 가시니까 전박사님 무지하게 힘드실 거다. 우리같이 모르는 사람, 설득도 안하시고 끌고 가시니까, 아무말씀 없이 죽 가시면, 쫒아가기 힘들지만, 이거 가야 되나, 가자가자 하면서 간다. Pioneer라는 면에서 앞선 분이다.

전박사님은 Pioneer 일 뿐 아니라 inspirer다. 이런 일은 혼자 못하는 일이고, 다른 사람이 도와줘야 되는 일이다. 다른 사람을 감동시켜야 한다. 누구나 다 능력이 있는데, 그 능력에 집중할 수 있게 한 게 전박사님이었다. 마테호른 꼭대기, 맥킨리 꼭대기에 오르셨고, 얼마전까지만 해도 에베레스트 가야된다 하시면서... inspirer다.

전박사님이 실질적인 오거나이저인, 프로그램 체어였다. 우리나라는 organize chair가 중요하다고 하는데, 실제로는 프로그램커미티 chair가 가장 중요하다. organizing committee, general committee는 명예직이다. 실제 paper를 어떻게 택할 건가, 어떤 식으로 경쟁을 시킬 것인가, 어떡하면 내가 committee에 들어갈까 고민하게 만든 게 전박사님이다. Landweber,김광회, 박용진, 전박사님이 그걸 했다. 한국 측에선 전박사님이 맡았고.

우리나라는 SCI가 최고지만, 미국에서는 누가 컨퍼런스 program committee를 하느냐, 이걸 중요하게 생각한다. 누가 커미티가 되느냐, 어떻게 들어가느냐 이런 거. program committee에 들어가면 존경을 받는다.

Pioneer

지금처럼 컨퍼런스 참가 기회가 너무 많다면 이걸 전부 할 필요는 없지만, 당시엔 PCCS와 비슷한 경험이 전무했으니까 해보는 것이 큰 도움이 되었다. pioneer가 되어 남이 안하는 건 한국 사람들도 해봐야 된다고 생각한다.

최근, 전박사님이 Internet Society로부터 Jon Postel 상을 받으셨다. 국제대회도 유치하시고, 일본보다 먼저 원천 기술을 갖게 하고, 이런 것들에 대한 도전정신을 갖게 하는 건 필요하다고 본다. 물론 힘들다. 지금이야 당연한 일이지만, 당시에는 도메인네임부터 해서 전부 다 해야 했으니까.

내가 만지는 네트웍을 우리 연구실, 우리 학교가 바로 쓸 수 있다는 점에서 당시는 지금과 상황이 많이 달랐다. 지금은 이미 셋업된 분야에서 뭔가 하는 것보다 새로운 분야로 가야 한다고 본다. 주커스버그 같은 사람들이 페이스북 만드는 거 보면 파이오니어다. 새로운 곳에서 찾아야 한다.

인터넷 개발 초기, 인터넷으로 무엇을 커뮤니케이션 하려고 했었나?

대부분은 이메일을 생각했다. UUCP 위에 텔넷을 올려서 타이핑을 하면 300bps 속도에서는 커서가 잘 안 움직인다. 그래서 그 때는FTP랑 이메일이랑 뭐가 다르냐 이런 얘기를 했었다.

하지만 이메일을 써보니까, 미국사람들과 연락도 되고, 실제로 김광회 교수와도 계속해서 연락을 하니까 편지 등으로는 불가능한 일이 되더라. 300bps 정도였지만, 하루에도 3번씩 왔다갔다 할 수 있었으니까.

당시에는 지금같은 인터넷을 상상하지 못했다. 예측했으면 다 부자가 됐을 것이다. 어떻게 갈 거라는 예측은 없었고, 아카데믹하게, 학교에서의 할 일을 하자는 분위기였다. 미국도 하는데 우리도 해보자, 그런데 해보니까 중요한 테크놀로지다, 다이얼업을 이용해도 하루 세번 미국을 왔다 갔다 하는 것이었으니까. 당시에도 이것이 중요한 테크놀로지라는 생각은 있었다.

물론 당시로서는 메인시스템에서 자체 단말기로 연결할 수는 있었지만, 이것이 서울, 대전, 부산 통해 연결될 수 있다는 생각은 못했을 때다. 그런데 이게 되니까 이게 진짜 좋은 거구나 그래서 막 느낌표(UUCP mail address) 붙이면서...

"TCP/IP 속에 들어갔다 나온 사람들"

그 당시 이동만박사를 보면 항상 TCP/IP 포팅하고, SSM-16, 32 만들던 SM삼성반도체통신(삼성전자)에 있던 김종식씨는 매일 68000 assembly가지고 시스템V에 포팅하고 있었다. 시스템V가 퍼블릭도메인소스라서 오픈소스인데, 500불이면 소스를 사올 수 있었다. 이걸 가지고 컴파일을 하는데, device driver 같은 건 일일이 손으로 68000 어셈블리 프로그램을 만져야 했다. TCP/IP 속에 들어갔다 나온 사람들이다.

TCP/IP 선택의 배경: 오픈소스

TCP/IP를 선택한 이유는 소스가 오픈되어 있었던 것이 결정적이었다. Bell Lab에서 500불만 지불하면 구할 수 있었다. 핸들링차지, 소스 라이센스fee 등으로. 시스템V 4.1bsd, 4.2bsd 모두 오픈소스다. 나도 논문 쓸 때, telnet에서 소스 보고 고치고 그랬다. TCP/IP 4.2 소스 출력하면 사람 키 넘어간다. 몇 만 줄 짜리다. 당시에는 4.2에만 TCP/IP 들어가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KRNIC

PCCS에서 도메인네임을 만들자고 해서 86년 설악산(JWCC)에서 토의한 주제가 도메인 네임이었다. 당시 도메인네임을 가진 나라는 미국과 영국 뿐. 그래서 KRNIC이 시작됐다. 도메인네임을 신청하려면 KRNIC에 해야 했었는데, 이게SALAB에 있었다. 전화, 팩스, 이메일로 신청을 받았다. 그때는 상업화되지 않아서 공짜로 나눠주었다. 나중에 5000개가 넘어가고 폭주하면서 학생들이 관리하기 힘들어졌다.

당시 Internet Society의 한국 administrative contact가 전길남 교수님으로 되어있었다. 그러니까 .kr의 오너가 전박사님이라고 인식되어 있었던 것이다. 다른 사람 같았으면 회사 차렸을 텐데.. 하지만 전박사님은 공공성이 있는 것이니까 공공기관에 넘기자고 하셔서 전산원과 타진했다. 처음엔 전산원 측이 싫어했지만, 송관호 박사가 설득해 결국 전산원이 받았다. 나중에 NIDA로 이관됐고, 현재는 KISA에서 관리한다.

당시에 우리가 혜안이 있었다면, A클라스(top level domain 등급의 종류)를 공짜로 받을 수도 있었을 텐데 하는 생각도 든다. 지금은 B, C클라스도 구할 수 없게 되었으니까. 그때 KAIST는 양심적으로 B클라스를 요청했다. 80년대 당시에는 한국은 A클라스도 받을 수 있었으니까 A클라스 domain을 가지고 있다면, 회사를 차릴 수도 있었겠지만 우리는 인터넷을 항상 공적으로 생각했다.

2012.7.20

문의: sec at InternetHistory.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