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윤석찬

최종수정일: 2013.6.4

작성자: 안정배, 윤석찬

인터뷰 대상: 윤석찬

질문자: 안정배

일시: 2013.3.21 12:00~13:30

장소: 한남동 daum

커뮤니티, IT 산업의 원동력

초기 대중적인 컴퓨터 마니아들은 이른바 80년대 초등학교를 다녔던 마이컴 세대로 부터 시작되었고 이후 PC통신, 인터넷, 그리고 웹 기반 포탈,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로 진화되어 갔다. PC통신이 서비스되기 이전, 월간 컴퓨터학습이 PC CLUB이라는 모임을 조직한 적이 있었는데 이때 모인 사람들이 류한석, 김국현, 김학규, 권순철 같은 사람들이다. 이들은 현재까지 IT 전문가로 활동중이다. 이와 별도로 유니콘, KUS 같은 전산학과 동아리들이 있었고, 이들은 보안전문가로 성장했다.

80년대 후반 PC 통신을 중심으로 한 사설 BBS를 통해 이용자들이 온라인 통신을 이용한 소통에 모여들었다. 1989년 KETEL 서비스가 시작했고, 하이텔에서 OSC동호회가 큰 인기를 끌었다. DIY, 공동구매 등의 아이디어가 OSC동호회를 통해 시작됐는데, 안철수 등이 이 동호회 출신이다. 90년대 초반에는 인터넷이 처음 보급되기 시작한 대학가를 중심으로 이용자들이 KIDS를 비롯해 학교별 BBS가 왕성하게 만들어졌고, EMPAL(E-mail PAL) 등도 성행했다.

당시 그래픽 인터페이스(GUI)가 없던 시절이었고, 컴퓨터는 오직 영어로만 사용했던 시기였기 때문에 커뮤니티 활동에 제약에 있었다. 최초의 한글 터미널인 '한텀'이 공개되면서 보다 용이하게 커뮤니티 활동을 할 수 있었다. 리눅스 개발 커뮤니티도 활발히 활동했다.

한국 웹의 태동

국내에 웹을 공식적으로 소개한 것은 1993년 1회 KRNET에서의 포항공대 이재용 교수의 키노트 발표였다. 이후, KRNET '94에서 최우형씨가이 www-forum@krnic.net을 개설하고 점차 멤버가 확대되었다. 이 메일링리스트의 초기 멤버는 주로 KAIST, 대전 소재 연구소 계신 분들, 국내에 웹을 소개한 교수님들과 그 랩에 있던 학생들이었다. 이를 계기로 국내에 최초의 웹 서버인 KAIST 인공 지능 연구소 홈페이지(cair.kaist.ac.kr)가 만들어지기도 했다.

나는 KRNET '94에 참석하지는 못했지만, 이후에 www-forum@krnic.net 메일링리스트의 내용이 archive되는 USENET의 뉴스그룹에서 이런 것이 있다는 것을 알고 메일링리스트에 가입했다. 웹이 보편화 되기 전에 유즈넷 뉴스그룹이라는 것이 인터넷 정보 창고 역할을 했는데, 일종의 분산된 게시판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뉴스그룹은 일종의 계층적 구조를 가진 정보 게시판으로서 이메일과 유사한 소통을 할 수 있게 해준다. 창조와 진화 토론방(talk.origins)이나 PC 쉐어 웨어 창고(alt.binaries)는 등이 유명했다. sci.comp.www, han.www 형태로 뉴스그룹 주소 및 개설을 하기 위한 규칙을 기반으로 일종의 온라인 정보 공유 문화가 처음 시작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당시 han.comp.www 라는 그룹이 www-forum@krnic.net 메일링리스트와 연계되어 메일링리스트에 글을 쓰면, 뉴스그룹에 함께 교차 투고되는 구조였다. 나처럼 뉴스그룹을 보고 가입한 학부생들이 많았다. 메일링리스트는 점차 커져서 1996년 이후에는 1,000여 명이 활동했다.

<가자 웹의 세계로!> 출간

1994년 봄에 ETRI의 최준혁씨가 미국 출장길에 Mosaic과 WWW'에 관련된 서적을 하나 구해 왔는데, 메일링 리스트에 책을 복사(?)해서 공유하자는 이야기가 나왔다. 그러자 수많은 사람들이 복사를 요청해 오는 상황이 됐고, 여기에 포항공대 김기태 교수님의 “배운 사람들이 어찌 그럴 수 있는가?”라는 일침에 상황이 종료되고 말았다. 그러자 ETRI의 김용운씨가 "굳이 영어로 된 정보를 읽을 필요 있나. 정보는 공유되어 있는데. 한국에서 쓸 수 있는 정보를 직접 만들어보자. 책이 아니어도 좋으니까 우리만의 필살기를 모아 온라인으로 배포를 해 보자."라는 제안을 하였고 직접 만든 웹 가이드를 만들어서 뉴스그룹에 올려놓자고, 분야별로 할 사람 손들라고 해서 된 것이다.

이것이 아마 국내 최초의 E-book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필자는 22명에 달했다. 이렇게 자원자들이 나타나, 각자 맡을 분야를 자원하면서 그렇게 모인 글로 목차가 만들어졌다. 만나지도 않고 다 온라인으로 글을 모아 한 명의 에디터가 에디팅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배포할 파일 포맷은 인쇄 가능한 PS파일로 했다. 당시에는 웹 자체를 모르니까 www 가이드도 인쇄해서 볼 수 밖에 없었다.

1995년 2월 그렇게 첫 판이 나왔고, 그 후 2판이 나왔는데, 2판에 필자로 참여했다. 터미널을 사용하는 사람이 여전히 많았기 때문에, 텍스트 브라우저인 LYNX를 사용하는 것에 대해서 썼다. 이렇게 만든 책은 총 500페이지가 넘었다. 처음 시작할 때는 이 정도로 잘 될 줄은 몰랐다. 당시의 모임은 취미와 연구가 혼합된 컴퓨터로 치면 Homebrew club 같은 느낌이었다.

책의 내용은 주로 인터넷 접속 하는 방법, 브라우져 설치 및 사용법, 웹 서버 설치 및 사용법 같은 것이 주요 내용이었다. 당시는 웹에 정보를 제공하는 사람이 곧 사용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서비스 제공자를 위한 내용과 사용자를 위한 기술적 내용이 같이 있었다는 점이 특징이었다.

W4 (World Wide Web Workshop)

책이 배포되자 반응은 아주 뜨거웠고 공부 모임을 해보자는 이야기가 나왔다. 메일링 리스트에 그 이야기가 나오니 이젠 아예 공개 세미나를 열어 보는 게 어떻겠냐는 의견이 올라왔다. 얼굴도 한번 보지 못했던 사람들이 인터넷으로 일을 꾸민다는 것은 정말 즐거운 경험 그 자체였기 때문에 모두 찬성하는 분위기였다.

1995년 3월 충남대에서 제1회 WWWW (WWW Workshop)를 개최했다. 처음엔 100명 정도 오겠지 했는데, 전국에서 600명 이상이 몰렸다. 모집을 받기 시작했는데, 숫자가 장난이 아니어서 처음에는 강의실을 빌렸다가 홀을 빌렸다가, 결국 충남대에서 가장 큰 홀을 빌려서 겨우 겨우 워크샵을 치렀다. 그 홀이 꽉 차서 서서 듣곤 했다.

그 때 누구나 앞으로 웹이 매우 인기있는 컴퓨팅 기술이 될 거라는 공통된 인식을 얻을 수 있었다. 이에 고무된 첫 워크샵 주최자가 중심이되어 95년 5월 마침내 '웹코리아(www-kr)'이라는 오픈 커뮤니티를 결성하게 됐다.

이후 조선일보를 비롯한 언론 매체를 중심으로 "산업화는 늦었지만 정보화는 앞서가자"란 슬로건으로 인터넷 붐업을 일으켰고, 그 덕에 95년이 1,200여명이 참여한 2번째 행사는 중앙일보의 지원으로 호암아트홀에서 성대하게 열렸다. 행사 기획 및 진행은 모두 자원봉사로 이루어졌다.

이런 열기는 웹코리아 지방 워킹 그룹으로 이어져 제3회 부산 워크샵(부산대, 1996년 3월)을 시작으로 지방으로 확산됐다. 당시 석사 1학년의 신분으로 그 워크샵을 총괄했던 기억이 난다. 장소 섭외 부터 등록, 포스터, 책자 그리고 운영까지 부산 지역 학생들이 다 모여서 700여명이 참여한 가운데 성황리에 개최하였다.

이어 제4회 서울 워크샵(광운대, 1996. 11)에 600여명, 제5회 대구 워크샵(경북대, 1997. 5)에는 800여명이 참가하는 자원 봉사자로 만들어진 국내 최대의 웹기술 워크샵이 됐다.

웹코리아가 남긴 것

초기 웹 기술의 국내 확산을 주도했던 웹 코리아는 당시 ETRI 연구원인 김용운씨를 위시하여 충남대 이강찬(현, W3C 한국 사무국), KAIST 김병학씨, 데이콤 연구소 권도균씨(현 프라이머 대표)씨 등이 주축이 되었다.

특히, 1회와 2회 행사가 너무 잘 된 탓에 행사가 끝나고 돈이 많이 남아버렸다. 많은 사람의 관심에 부응하기 위해 조직적인 활동의 필요성이 대두되었고, 다양한 관심 그룹, 지역모임도 만들고, 예산 분배도 하면서 온라인 상에서 대중적인 모습을 갖춘 최초 기술 커뮤니티라고 할 수 있다.

웹코리아의 주요 목표는 역시 웹 기술의 대중화를 위한 활동이었다. 국내 최초의 인터넷 잡지인 '월간 인터넷' 창간호에 웹에 대한 특집을 실었는가 하면, 각종 잡지와 미디어에 웹코리아 멤버들의 기고가 이어졌다. 또한 온라인으로 배포됐던 '가자 웹의 세계로'를 수정 보완해 오프라인 서적으로 출간하였다.

초기 웹 기술이 한국에서 단기에 폭발적으로 성장할 수 있었든 이유는 단지 초고속망의 확장이나 벤처붐 이전에 국내 인터넷의 선각자와 이를 미리 체득한 세대들이 웹 기술을 빠르게 흡수하면서 생긴 국내 기술 마니아 층의 형성, 그들의 지식과 문화에 대한 끊임없는 욕구, 그리고 충족된 정보를 여러 사람과 아낌없이 나누는 공유 정신, 겁낼 줄 모르고 인터넷 기술 개발과 비즈니스에 몸 바쳤고 이름 없이 사라져간 열정들이 만들어낸 소산이라고 생각한다.

웹코리아는 국내에 해외 선진 기술을 도입하기 위해 당시 웹 표준화 기구인 웹 컨소시엄(W3C)에 한국 전산원의 도움으로 가입, 국내 최초로 W3C 한국 멤버로 활동하기도 했다. 이런 활동이 밑거름이 돼 드디어 2002년 ETRI에 W3C 한국 공식 사무소(www.w3c.or.kr)가 설립되기도 했다.

하지만, 1998년에 들어서자 국내 인터넷과 웹이 산업화의 물결을 타게 되었고, 공유된 정보를 기반으로 수많은 웹사이트와 관련 서적, 그리고 인터넷 벤처 기업이 봇물을 이루게 됐다. 웹코리아도 이러한 시대적 환경에서 사명을 다하고 내부적인 기술 토론 그룹으로 남게 되면서 사실상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된다.

인터넷 키즈가 된 마이컴 세대

90년대 초반 대학을 다녔던 그래서 인터넷과 웹을 빠르게 체득한 사람들은 초등학교 때 컴퓨터 학원에서 PC를 처음 배우던 마이컴 키즈라고 불렀던 세대였다. 이들이 대학을 가서 PC를 가지고, 인터넷을 접하게 된 것이다. 그러면서 "인터넷 키즈"라고 할 수 있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대학교 안에서 E-mail이라는 것을 배우게 되고, LYNX를 사용해 인터넷 정보를 탐색하면서 Gopher나 웹을 쓰기 시작했다.

내가 인터넷을 처음 사용하게된 계기는 아주 단순했다. 물리학이 부전공이었던 내가 미분 방정식 수업을 듣고 있을 때였다. 당시 Mathematica라는 소프트웨어를 사용하게 되었는데, 원서에서 개발회사인 Wolfram의 이메일 주소를 발견하게 된 것이다. 메일을 보내면 예제 파일을 보내준다는 것이었다.

물리학과 선배의 도움으로 전산 전공이 아니었지만 난 그날 학교에 전자 계산소에 가서 이래 저래한 과정을 거쳐 이메일 주소를 만들었다. 그리고 며칠 동안 쉘 계정 이용 방법을 익힌 후 이메일을 보냈다.

그렇게, 처음 학교 전산소의 터미널실에 문을 두드리게 되었다. 당시 포항공대, 부산대, 경북대, KAIST, 충남대, 서울대, 연세대 등이 연구전산망(KREONet)에 함께 가입되어 있었는데, 공간적 거리를 넘어서 서로에 대해 알기 시작했다.

대학 내 인터넷 이용자들은 주로 각 학교별 BBS에서 활동했는데, 이는 PC통신을 인터넷으로 옮겨온 형태였다. KIDS 같이 telnet에서 모두 모일 수 있던 공간도 있었고 각 대학별 BBS도 만들어졌다. 당시 삐삐를 차고 다니던 시기였으니까, 학교에서 처음 컴퓨터 통신을 해 본 사람들이 많았다. 기존에 많이 쓰던 PC통신은 회사의 폐쇄망에서 쓰는 반면, 인터넷은 학교와 국가를 넘어설 수 있으니까 매력적이었다. Gopher, WWW를 통해 MIT나 스탠포드 대학교의 홈페이지를 가본다거나 했던 기억이 있다.

학교에서는 인터넷 계정을 가지고 뭔가 해 보려는 사람들이 다른 이용자들에게 도움이 되는 일을 하자 해서 "한 페이지 가이드"라는 것을 만들었다. 유즈넷 뉴스그룹, 텔넷과 FTP, PPP 연결, LYNX 사용법 등 바로 따라할 수 있는 한 페이지 짜리 가이드를 만드는 것이었다. 학교 전자계산소에서 그걸 인쇄해서 전산실에 비치해두고 누구나 필요한 사람에게 나눠 주었다.

인터넷 연결 프로그램을 학교 내 교수님들 컴퓨터에 설치해드리기도 하고, 세미나도 열고 하니까 당시 전산소장이셨던 김경석 교수님이 들이 좋은 프로그램을 공유해보라며 무려 1GB 용량의 사용자계정을 받았다. 여기에 자료를 모아두고 공유할 수 있도록 했다. 인터넷이 워낙 느렸기 때문에 미러링하는 방식으로 자료 굥유를 했다.

연구 전산망 연결 초기에는 학교 대역폭이 속도가 256K나 512K 쯤 되다가 96년이 지나 T1(2MB)로 바뀌었던 것 같다. 그래서 GNU 프로그램, 리눅스 배포판, PPP 접속 및 Ztelnet 프로그램과 쉐어웨어들을 함께 공유했다. 당시 개인 계정에 2~5MB를 주던 시절이었으니 1GB는 통큰 공유 수단이었다.

벤처붐을 일으킨 웹 키즈

90년대 세대들은 80년대 인터넷을 만들고 구축했던 분들의 도움으로 그 네트워크 위에서 놀았던 사람들이었다. 오히려 고속도로 위에 올라가는 "정보"의 공유가 중요했다. 인터넷 응용 프로그램을 통해 다양한 변화를 일으키고자 하는 욕구가 생겨났다. 내가 가진 정보를 공유하고 나라 밖의 정보를 갖고 싶었던 사람들이었다. 이후에 벤처 붐이 일이났을 때도 인터넷을 이용한 인프라 구축 사업을 했던 분들과는 다른 방식의 비즈니스를 했다. 주로 정보 및 콘텐츠 사업이나 응용 서비스 등에 집중했다.

인터넷과 웹의 묘미에 빠져들고 나서 학업을 소홀히 하자 지도 교수님의 불호령이 떨어졌다. 여차저차 교수님께 나의 계획을 말씀 드리고 석사 1년만에 학업을 중단하고 벤처 기업에 투신했다.

처음 했던 사업은 해외 CDNow사를 벤치마킹해서 온라인 음반 판매를 하는 것인데, 당시 온라인 상에 음악 정보가 워낙 없었기 때문에 정보와 콘텐츠를 만드는 것이 중요했다. 그래서 코리아뮤짓넷이라는 음악 정보 서비스와 나인포유라는 음악 전문 인터넷 방송을 국내 최초로 개설했다.

이 때문에 나중에 우리 회사는 소리 바다, 벅스뮤직과 더불어 국내 최대의 음악 저작권 소송에 휘말리게 되었다. 물론 음악 정보와 CD 판매를 겸하면서 음반사와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기에 감옥에 가는 것은 면했지만, 온라인의 변화와 기존 가치 체계가 충돌하는 역사적 현장에 있었다는 점에서 감회가 새롭다. 고작 20대 후반의 나이에 회사와 경영, 비지니스와 소송 그리고 인수 합병과 같은 다양한 경험을 했던 역동적인 시기였다.

물론 나 처럼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함께 뛰어들었다. 대표적으로 아이네트, 새롬기술 등 인터넷 인프라 회사뿐만 아니라 다음과 같은 서비스 회사들은 초기 대기업 홈페이지 제작이나 인트라넷 솔루션을 만드는 사업을 기반으로 한메일과 카페와 같은 서비스를 만들고 포털 서비스에도 진입했다. 당시 함께 온라인 비지니스를 했던 사람들은 거의 20대 중반이나 30대 초반 세대였고, 대기업 위주로 움직이던 국내 기업 문화가 획기적으로 변하고 있었다.

인터넷으로 돈을 벌다!

초기에 벤처붐이 일어났을 때 비즈니스 모델이 뚜렷하지는 않았다. '묻지마 투자'라는 말이 횡행할 정도였다. 하지만, 홈페이지 만들고 정보를 제공하면 결국 사람들이 올 것이고 많이 올 것이다, 그럼 어떤 형태로든 비즈니스를 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러다보니 남의 회사 전자상거래 사이트를 만들어 주고 돈을 벌어 그 자금으로 내 음악 서비스 운영을 하는 식으로 회사가 굴러갔다.

나중에야 음악 콘텐츠 및 배너 광고 판매, 전자상거래와 지불 서비스 등으로 다양한 비지니스를 만들게 되었는데 처음엔 그런 것들을 전혀 몰랐다. 이런 수익 모델을 창출하지 못했던 많은 벤처 기업들은 닷컴 버블이 꺼지면서 수 없이 쓰러져갔다.

인터넷 서비스에서 대박 수익이 나는 기업도 있었다. 같은 웹코리아 동료였던 나성균, 장병규씨(현, 본엔젤스 대표)가 공동 창업한 네오위즈가 그랬다. 초기에 인터넷 자동 접속 프로그램인 원클릭을 시작으로 채팅 서비스인 세이클럽과 피망과 같은 게임 포털로도 성공을 거두었다.

인터넷 연결 설정이 어려웠던 시절 '원클릭'은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일반인들도 디스켓 한장으로 클릭만 하면 분당 20원을 받고 모뎀으로 인터넷을 손쉽게 접속할 수 있었다. 인터넷 접속을 하고 나니 그 위에 할 수 있는 다양한 서비스를 손 보였는데 당연히 바람의 나라와 같은 머드 게임이나 세이 클럽 같은 채팅이 부상했고, 이것들이 다시 원클릭의 비즈니스를 돕게 된 것이다.

세이클럽은 단순한 채팅 서비스를 넘어 개인의 온라인 아이덴티티를 아바타라는 것을 만들고 이를 디지털 아이템으로 만들어 유료 판매하는 모델을 만들어 냈다. 이 방식이 이후 세이클럽의 도토리나 게임 아이템과 같은 비즈니스에 많은 영향을 많이 미쳤다.

네오위즈 뿐만 아니라 다음의 이택경 공동 대표와 국내 최초 전자지불 전문 기업인 이니시스의 권도균 대표도 웹 코리아 멤버였다. 많은 사람들이 직접 창업을 하거나 벤처 기업에 투신해서 그들만의 비지니스 모델을 만들어 냈다.

웹의 정신: 기본으로 되돌아가자!

90년대 중반 초기 웹이 국내에 정착될 때 모습은 매우 이상적이었다. 자기가 획득하는 만큼 정보를 공유하는 그런 문화가 정착되었다. 국내에 온라인 비지니스가 강성해졌던 것도 그런 초기 문화적 역할이 주효했던 것 같다.

웹은 공유와 분산 환경으로 정보를 창조해 내고 느슨한 연결망이라고 정보를 복제할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의 정보를 서로 나누면서 중복된 정보가 서로 축적되고 백업도 되는 것이다.

그런데 최근 웹의 발전을 보면 그런 정보 저장소가 한 두 회사에 집중되는 경향이 있었다. 느슨한 연결망에서 정보 검색이 힘드니 포털 같은 것을 만들게 된 것이다. 이것이 닷컴 버블이 터지면서 다시 분산되었다. 포털은 사라지고, 전문분야에서 강세를 보였던 구글, 아마존, 이베이 같은 회사들이 성공하였다. 각자 영역에서 자기 서비스 제공하면서, 혼자가 아니라 여러 서드파티랑 같이 하는 회사들이 살아남은 것이다. 그러다가 최근 들어서 다시 구글 등이 정보 게이트 역할을 하면서 페이스북, 아마존 등 몇 곳으로 다시 집중되는 시기가 왔다.

정보의 집중이 가속화 되면 역효과도 생겨난다. 개인 정보 분산 기능을 톡톡히 했던 블로그를 위한 RSS 구독 서비스인 구글 리더가 중단되니 정보 네트워크가 날아가버린다. 물론 그 대안을 위해 탐구하고 있지만 말이다.

웹의 발전은 일종의 유기적 생물체처럼 주기가 있는 것 같다. 기술로 인해 정보 네트워크가 분산됐다가 그 역작용으로 한 두 서비스 업체에 집중됐다가 다시 역 작용으로 분산되는 역사가 반복되고 있다. 마치 생명체처럼 진화해나가는 것이다.

우리 나라 웹 초기의 모습은 기술이 이렇듯 복잡하고 빠르게 진화해 나가는 오늘날 우리에게 기본으로 돌아가자는 가르침을 주고 있다.

*다음 챕터는 윤석찬 선생님께서 2013.6.4에 이메일로 추가해주신 내용입니다.

인터넷 방송의 성장

우리 나라의 가장 획기적이고 차별화 된 요소는 바로 초고속인터넷을 선도하는 국가가 되었다는 점이다. 현재 방송통신 융합의 기틀을 만들었던 부분이기도 하다. 이런 단초를 제공한 것이 바로 1990년대 중반 부터 불기 시작한 인터넷 방송 열풍이다.

인터넷의 보급이 급속도로 확산되면서 통신과 방송을 결합해 인터넷을 통해 프로그램을 내보내는 새로운 개념의 방송 매체가 등장했는데, 이것이 바로 인터넷 방송이다. 즉, 오디오나 비디오 같은 멀티미디어 데이터를 스트리밍 기술을 이용하여 일반 사용자에게 제공하는 것으로 일반 방송과 달리 라이브와 주문형 서비스가 함께 제공될 수 있었다.

나는 나인포유(구, K&J)에서 전자상거래 서비스를 위해 음반이라는 아이템을 잡고 사용자를 모으기 위해 코리아뮤직넷(koreamusic.net)이라는 음악 정보 서비스를 시작했다. 그러던 중 인터넷으로 내가 원하는 음악만 골라 듣는 서비스를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당시 아이월드에서 하는 음악 차트 서비스가 있었지만, 발매되는 다양한 음악을 듣을 수는 없었다. 그래서, 우리가 제휴한 음반사와 홍보성 음원을 수급하기 시작했고 이를 기반으로 1997년 부터 코리아뮤직넷에 마이뮤직 서비스를 시작했다. 음반사는 인터넷 사용을 하는 대학생 및 직장인들에게 음반 판매 및 음악 뉴스 와 더불어 온라인 홍보의 장점도 있었기 때문에 호응이 좋았다. 뿐만 아니라 대표곡 한곡이 아니라 CD 전체 음원을 제공하고 골라 듣는 서비스를 시작했다. 이 때문에 98년 Alexa가 운영하는 글로벌 Top 1,000 사이트 랭킹 상위 100위내에 진입하기도 했다.

각 장르별 음악을 다양한 각도에서 소개하는 인터넷 라디오 서비스인 '나인포유'도 98년 초 개설했다. 당시 엠넷 및 KMTV 같은 음악 전문 케이블 채널이 VJ라는 이름으로 막 관심을 받을 때였고, 우리는 인터넷 DJ라는 이름으로 총 90여개 음악 채널을 운영하였다.

양진석, 곽상엽, 손성은, 류시현, 전유나 등 기존 공중파 및 케이블 TV 연예인들이 최초로 인터넷을 통해 음악 DJ를 하는 프로그램을 개설해서 주목을 받았다. 뿐만 아니라 일반인들 중 DJ를 선발하여 방송을 제작하고 편성하였고, 90년대말 데이콤이 만든 한국인터넷데이터센터(KIDC)에 입주한 후 150MB 대역폭을 사용하는 인터넷 방송 회사로 성장했다.

스트리밍 기술은 모뎀 부터 광대역 인터넷에 맞게 다양한 멀티미디어를 전송할 수 있는 기술로서 초고속 인터넷이 발달했던 국내에서 매우 활발히 발전했다.

97년 10월말 10여개에 불과했던 인터넷방송국들은 이제 2000년 초반 150∼200여개에 달했고, 관련 과목과 인력 교육 과정이 개설된 대학들도 생기고 전문인력을 양성하는 학원도 생겼으며, 스트리밍 전문 IDC등이 만들어지기도 했다.

특히, KT와 KBS가 '크레지오',삼성물산이 '두밥'을 개설하는 등 대기업과 정보통신사업자들의 참여도 잇따랐다. 캐스트와 네티즌을 합친 신조어로 인터넷방송을 즐기는 '캐티즌'이라는 신조어도 생겼다.

이러한 인터넷 방송에서 제공하는 콘텐츠는 기존 시장 질서와 충돌하는 경우도 많아서 이후 소리바다와 벅스뮤직이 음악 다운로드 및 스트리밍 서비스가 음악 저작권 소송의 시초가 되기도 했으며, 90년대 중반 스트리밍 기술의 시장 선도자였던 리얼네트워크가 미국이나 일본이 아닌 한국에서 마이크로소프트를 동영상 플레이어 끼워팔기로 공정위에 제소하기도 했다.

이는 우리 나라가 초고속 인터넷과 인터넷 방송 강국이라는 상징성을 보여주었고, 향후 방통 융합이라는 새로운 조류를 만들어 내는 단초가 되었다.

참고 자료

* 나인포유 wikipedia http://ko.wikipedia.org/wiki/%EB%82%98%EC%9D%B8%ED%8F%AC%EC%9C%A0

* 인터넷 방송과 나인포유 관련 기사 모음: http://channy.creation.net/project/nine4u/press

* 리얼네트웍스, 한국 공정위에 MS 제소「불공정 가려주오」 http://www.zdnet.co.kr/news/news_view.asp?artice_id=000000391313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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