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송재경

2012.2.8. 14:00~16:00

인터뷰이: 송재경

인터뷰어: 안정배, 조동원

장소: 테헤란로 XLgames 사무실

컴퓨터를 처음 접한 경험

컴퓨터 처음 접한 것은 중학교 때, 친구네 집에 놀러갔는데 8비트 컴퓨터인 MZ-80의 복사품을 봤을 때였다. 그리고 친척 형네 집에서 애플2 컴퓨터를 접했고, 이것도 청계천 세운상가에서 복제한 것이다. 게임도 하다가, 베이식으로 간단한 프로그램도 짜보는 정도였다. 대학에 들어가서 IBM-PC의 클론을 갖게 되고, 게임도 하고 프로그램도 짜보고 했다.

인터넷을 처음 접한 것은, 과학원 석사과정 SALAB에 들어가서였다. 그래봐야 www도 없었고, 텔넷, FTP, 뉴스그룹 정도 사용했다. FTP 는 주로 야한 사진 모으는 데 사용했던 것 같고, 지금은 웹에서 검색하면 수없이 나오지만, 당시에는 그런 게 없어서 FTP 서버에 리스트가 파일로 된 것으로 이용했고. 오픈소스로 된 프로그램들 소스 받아 오거나, 해외 텍스트 머드 프로그램 받아오는 정도로 사용했다.

과에 썬 워크스테이션 클론이 공용으로 있었고, 거기에 X 터미널로 연결됐고. 기본적으로 썬 워크스테이션이 있었고 일반 PC도 몇 대 있었다.

'한텀' 개발과 한글화

SALAB 에서 당시에 하고 있던 프로젝트가, 유닉스에서 GUI 환경이 기반이 되는 X Window 시스템이 있는데 이를 위한 지역화하는 작업이었다. 거기서 내가 담당하던 워크스테이션이, 석사 1~2년차에서 실험실의 워크스테이션들을 관리하게 되는데, 내가 담당했던 것이 '코스모스'였고, 그 기계에서 우리가 하는 것과 별개로 한글화된 X Window 시스템을 독자적으로 만들었는데, ‘뉴스’라고 불렀던 게 있었는데, 거기서는 한글이 잘 되었다. 그런데 보통의 X Window에서는 한글이 잘 안 되었다. 코스모스의 메모리가 적었기 때문에 썬에서 제공하는 한글이 잘 되는, X Window 시스템하고 호환도 된, 독자적인 시스템을 띄우면 버벅거렸다(느려졌다). 그런데 보통의 X Window를 띄우면 잘 돌아갔다. 그래서 보통의 X Window로 해서 한글이 터미널에서 잘 보이면 좋겠다는, 나의 개인적인 필요가 생겨서 '한텀'을 만들기 시작했다.

만든 김에 처음에는 학과 내에 배포했고, 오픈소스로, 그리고 한국사용자들에게 전달됐다. 그리고 어느 정도 안정되고 난 후에 나는 손을 떼고, 다른 분들이 맡아서 작업했고, X Window 버전이 올라갈 때마다 수정 보완해서 배포했다. 그 이후 한텀의 소유권은 그 분들이 맡아서 관리했다. 오픈소스였는데, 그것은 X Window 시스템의 기본 라이선스가 MIT 라이런스라고 해서 GPL 보다 '자유로운' 것이었다. GPL는 그 소스코드가 조금이라도 섞여 들어가면 공개를 해야 하는데, MIT 라이선스는 상대적으로 그런 '제약'이 없었다.

한텀을 만들면서 처음에는 스크래치부터 짰는데(완전 새로 개발했는데), 그렇게 하기 보다는 기본 프로그램으로 있는 (한글이 안 되는) 엑스텀(xterm)을 가져다가 한글이 되게 하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렇게 고치는 방향으로 했고, 그래서 엑스텀의 라이선스가 MIT 라이선스가 되고 그거 그대로 한 거다. 오픈소스를 가져다가 오픈소스로 한 것이다.

박사과정 때도, 일주일에 한 번씩 모든 학생들이 프리젠테이션을 하는데, 나는 첫 발표를 할 때 박사과정에는 별로 관심이 없고, 한글 프리 소프트웨어 파운데이션을 해보고 싶다고, 스톨만이 MIT에서 GNU를 한 것처럼, 한텀을 비롯해서 몇 가지 작업 - 메일에서 한글이 되게 하기라든가 -을 구상하고 있다고 발표했다.

오상수, 최우형, 또 1년 선배 한 명 이렇게 같이 해보기로 했다. 유닉스에서 한글 환경이 열악했기 때문에 한글화가 가장 큰 사안이었다. 각 벤더별로 - 한국의 유닉스 벤더가 삼보, 대우, 썬코리아 - 등이 뭔가를 했지만, 스텐다드랄까 프리웨어로 한 것은 없어서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박사논문에는 관심이 없고 그런 것들을 하고 싶다고 발표를 했는데, 그 이후에 압력을 받은 것은 없었고, 열외처럼 지내다가... 그러다가 관심 분야가 바뀌게 되었다. 한글 솔루션이 좋기는 한데, 비생산적이랄까... 한국의 환경에 그게 중요한데, 별 재미는 없는... 당장 필요에 의해 유틸리티 만들기는 했지만.

텍스트 머드

그 뒤로는 머드를 그래픽하게 하는 것을 주제로 삼아서 했다. 박사과정 올라가기 전에 텍스트 머드를 어떻게 알게 돼서, 그것도 뭔가 하면서 해보다가 내가 만들면 더 잘 만들 수 있겠다 생각이 들어서 텍스트 머드 소스를 구해서 뜯어 고치고 작업했다. 어쨌든 프리젠테이션은 주1회 계속 했는데, 주로 발표 내용이 텍스트 머드를 그래픽하게 하는 쪽으로 했다. 랩에서 재밌어 한 분들도 있고, 그러던가 말던가 관심없어하기도 했고. 박사학위랑 상관이 없는 거니까...

머드 역사, 도입, 초기 이용

당시 이용자는 소수에 불과했다. 텍스트 머드 처음 생긴 건, 1979년인가 영국의 리차드 바틀(Richard Bartle)인가 하는 아저씨가 네트워크가 아니라, 터미널들이 달려있는 메인프레임에서 50-60여 명의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최초의 텍스트 머드를 만들었다. 이에 대한 논문도 있다. 그 뒤로 미국 등에 인터넷이 퍼지면서 또 일부 생겨났고.

한국에는 1991년 말쯤 과학원 학부의 김지호씨가 몇 명의 친구들과 함께 디꾸 머드 엔진을 가져다가 열심히 뜯어고쳐서 KIT머드를 서비스했다(당시 머드 엔진이 여러 가지가 있었지만 스웨덴의 한 애가 만든 엘피 머드[LP MUD]와 덴마크의 디꾸대학에서 만들 디꾸 머드[Diku MUD]가 있었다).

당시 과학기술대(KIT)와 과학기술원(KAIST)가 합쳐지는 과정이었다. 그 때 내가 처음 텍스트 머드를 알게됐고, 석박사과정 학생들 사이 그 겨울 방학 때 유행을 했다. 그래봐야 동시 플레이 이용자수가 100명. 일부가 외부에서 인터넷 타고 들어오고, 해외에서 인터넷 타고 들어오고, 그런 외부 이용자가 조금 있었다. 그 외 대부분은 과학원 학생이었다.

나는 한 달 정도 했는데, 맘에 안드는 게 있어서 내가 하면 이 보다 잘 만들 수 있겠다 싶어서 플레이는 그만하고 소스를 들여다보고 뭔가 새로 내가 만들기 시작했다.

인터넷을 통한 머드: 인터넷 기반의 엔진은 스웨덴, 덴마크, 미국 등의 애들이 만든, 텔넷으로 접속해서 하는 것은 80년대에 많이 나왔던 것이고, 한국에서 처음 한 것은 김지호와 그의 일당들이었다. 그 사람들이 나가서 마리텔레콤을 만들고, 단군의땅을 만들고 상용서비스를 하게 된 거다.

BBS를 통한 머드: 94년쯤에 그 때까지는 천리안, 하이텔, 나우누리의 3대 BBS가 있었고, 단군의땅과 쥬라기공원으로 서비스된 거다.

쥬라기공원

내가 박사과정 2년차쯤 될 때 학교를 그만두고, 한글과컴퓨터사에 입사했다. 거기서 어찌어찌 삼정데이터시스템의 오충용씨를 알게 되었는데, 집안이 꽤 부자라 방 하나를 꽉 채울 급의 썬 워크스테이션을 사다놓고 홍대 앞의 사무실에서 놀리고 있었는데, 거기를 놀러다니다가 어느날 오충용씨가 텍스트머드를 서비스하겠다고 하면서 엘피 머드 소스를 가져다가 한글이 잘 되게 고쳐달라고 해서 내가 좀 고쳐줬다. 텔넷 환경에서 하는 거라 8비트 캐릭터들을 다 짤라 버리고 전송이 안 되게 하는 것과 같이 수정해 주고, command가 다 영어로 north, south로 되어 있어서, 남, 북, 전투 등으로 바꿔주고. 이런 일을 2주 정도 재미삼아 해줬다.

그 때 영화 <쥬라기공원>이 개봉되고 히트를 치고 있었다. 그리고 서점에 가면 어드벤춰북이 있었는데, 나무 밑으로 내려가려면 69쪽으로 가고 그냥 있으려면 다음 쪽으로 가시오라고 해서, 69쪽으로 가보면 공룡이 달려듭니다, 때리려면 35쪽, 도망가려면 15쪽으로 가고, 이런 식의 쥬라기공원 어드벤춰북이 있었고, 이것을 가져다 그대로 입력했다. 텍스트 머드와 딱 맞는 구조다. 텍스트 머드라는 게 방 단위로 연결된 일종의 노드의 그래프이기 때문에.. 그것을 그대로 입력해서, 천리안과 계약을 맺고 분당 20원 받는 것으로 해서 서비스를 시작했다(천리안 접속 서비스 자체가 분당 15원이었고, 하이텔, 나우누리는 정액제로 한 달에 만 원이었다). 라이선스나 저작권도 싹 무시하고, 엘피 머드 소스의 첫 부분에 이것을 상업적으로 이용하면 안됩니다 써 있는데, 무시하고..

KIT머드, 단군의땅

그 비슷한 시기에 김지호 그룹 - 마리텔레콤 쪽에서 단군의땅을 시작했다. 마리텔레콤의 장인경 사장은 여성으로 처음으로 서울대 전자공학과를 졸업하고. 그 분이 정철, 박현제 박사님들 다 아시고.. 내가 그 분을 알게 된 게 석사과정 때 코스모스 기계를 관리할 때, 모뎀이 두 개 달려 있었고 - 외부에서 협력해서 하시는 교수님들이 모뎀에 접속해서 이메일 확인 등을 할 수 있게 모뎀이 두 개 있었는데, 모뎀을 한 대 점유하시고 처음에는 IRC를 열심히 하시더니 이후 텍스트 머드에 빠졌다. KIT머드의 이용자로서. 열심히 하다보니 만든 사람들과도 친해지고 대전에도 놀러오고 했다.

김지호네 그룹이 낮에 자고, 수업도 안 가고, 밤에는 어슬렁 전산실에 나타나서 뭔가 하는 생활을 하면서, F 받고, 학사경고 맞거나 군대 끌려가거나 했다(학사경고를 받으면 과학원은 군대를 가야했다). 그런 상황에서 장인경씨가 동기나 후배인 과학원의 교수들을 찾아다니면서 그 아이들을 써머잡 등을 통해 구제해주기로 해서 구제도 받았다. 그 일을 계기로 아예 그 그룹이 나가서 별무리라는 이름으로 모였다가 마리텔레콤이라는 회사가 되고, 거기는 나우누리에 처음 서비스했다.

머드 게임 - 피씨통신, 인터넷

쥬라기공원이 저작권 무시 등의 사정으로 일주일 먼저 서비스를 하고, 단군의땅은 차분히 준비해서 서비스했다. 당시 이용자 규모를 보면, 썬 워크스테이션이 기본적으로 소켓을 열 수 있는 게 256개인가 그랬고, 그게 꽉 차서 더 이상 이용자를 받을 수 없다고 했던 것 같다, 그래서 내가 커널의 설정을 고쳐서 1024로 늘려줬던 기억이 나는데, 그 정도 규모, 2~300명 정도였던 것 같다.

꽤 성공을 해서 한 달에 5천 만원을 버네 했다. 그 후로 그래서 천리안, 나우누리, 하이텔 할 것없이 우후죽숙 텍스트 머드를 했다, 만들기 쉬우니까. 다들 라이선스는 모르겠고 오픈소스 엔진 가져다가 거기에 콘텐트 얹어서 한 것이다, 콘텐트와 텍스트 입력하는 건 한 두 달이면 되니까. 전성기 때는 20여 개 가까이 서비스가 됐고, 모두 월 5천씩 버는 건 아니었고 몇 백 정도도 있었지만. 1993-4년까지도 서울대, 에트리, 카이스트, 이 정도가 한국의 인터넷의 전부였기 때문에 극소수의 엘리트 학생들만 접근할 수 있었던 거고, 대부분의 일반 대중은 피씨통신 쓰던 시절이었다.

www은 93년쯤에 모자이크 나오면서 많이 쓰였다. 윈도 3.0에서 네스케이프나 모자이크를 쓸 수는 있었지만, 이를 쓰는 사람은 극소수였고. 94년쯤에 아이넷이라는 회사 - ppp로 인터넷 접속 서비스했지만, 사용자 수는 몇 백 명수준이었다. 당시 아이넷의 모뎀 갯수가 2-300개 정도였고, 모뎀 갯수의 수가 그 정도 숫자이므로. 윈도95가 95년 말쯤 나오면서, 인터넷이 www로 해서 된 것이다.

일반인한테 텔넷이니 FTP니 해봐야 대중성이 없는 것이고, 결국 그림이 나오는 www의 웹브라우저가 나와야 폭발적으로 성공한 것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게 되는 윈도95가 나오고, 네스케이프나 모자이크가 쉽게 설치가 되고 쉽게 접속이 될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인터넷이 95년말서부터 전세계적으로 폭발적으로 성장한 것이 아닌가 생각이 된다.

그래픽 머드

그래픽 머드를 생각한 것은 1992년 쯤이다. 텍스트 머드는, 텍스트를 치면 화면에 그게 줄줄이 올라가는 것인데.. 이게 그래프 구조다. 노드가 방(room)이고. 그래서 당신은 광장에 서 있습니다, 남쪽으로 가면 뭐가 보이고, 북쪽은 뭐가 보이고, 이런 스타일의 그래프 구조인데, 이거 만드는 애들이 지리적으로 잘 만드는 게 아니라, 대충 생각나는 대로 한 거다, 동남서북으로 이동하면 다시 원래지점으로 와야 하는데, 그래프가 그렇게 안 생기게 한 것이다. 그래서 한 참 돌아다니면 길을 잃고, 짜증이 나서, 이게 좀 그래픽하게 나오면 더 재밌게 할 수 있겠다 생각이 들어서. gui를 붙이는 것을 생각했다.

인터넷이 어떻게 발전할 것이라는 선구안이 있었던 게 아니라, 내가 직접 텍스트 머드를 하면서 불편했던 것을 고치려고 하면서 한 것이다. www, 고퍼 등을 갖다가 프리젠테이션 시간에 박태하 선배가 발표를 하곤 했는데, 당시만해도 www으로 통일될 것이라고는 아무도 생각을 못했다, 1993년 정도에는 지금 경쟁하는 프로토콜이 몇 가지 있다: 고퍼, www, ... 등이 소개되는 정도였고, 나도 그런 얘기만 들은 정도였다. 지금의 인터넷 이용자들은 인터넷 하면 웹으로 생각을 하고 있지만, 그 당시에는 웹이 이렇게 될 줄은 아무도 몰랐다.

94년 쯤인데, '머드 데브(MUD-Dev)'라는 메일링리스트가 있었다. 당시의 커뮤니티라 하면 유즈넷 뉴스그룹이고, 지금이야 크랙파일 올리고 다운로드 받는 것으로만 쓰이는 것 같지만, 그 때만해도 괜찮았다. 뉴스그룹이라는 공식적인 것까지 안 가더라도 메일링리스트라고 해서 그게 굉장히 많이 있었다.

머드 데브에 포스트를 한 적은 없고, 트렌드를 살피는 데 이용했다. 거기의 토론은 이상론 같이 나온 것들이다. 실현해서 한 게 아니고. 300명 넘어가는 텍스트 머드가 필요하냐는 갑론을박이 있었고. 머드 데브에 말 많은 사람 중의 하나가 래프 코스트(Raph Koster)라고, 울티마 온라인 메인 기획자, 스타워즈 갤럭시 메인 기획자의 한 사람이다. 그 당시에는 메일링리스트에서 토론 열심히 했던 사람이다.

'머드 데브'에는 주된 토론의 주제가 몇 가지 있었는데, 텍스트 머드가 그 때까지 싱글 쓰레드 구조라서 맥시멈 퍼포먼스가 몇 백명 수준에 그치는 문제, 즉 텍스트라 양이 적더라도 동시에 처리할 수 있는 게 2~300명이 넘어가면 힘들게 되기 때문에 멀티 쓰레드화해야 한다는 것이 주된 이슈였다. 그 다음이 그래픽한 클라이언트를 붙여서 해야 한다, 울티마 만들었던 오리진에서 울티마6를 가지고 그런 식으로 프로토타입으로 만들었다는 소문들이 왔다갔다 하고 있었다. 그런 걸 보면서, 아! 멀티 쓰레드로 만들어야 하나보다 생각하고는 그 때 내가 하고 있었던 게, 그게 한컴 가기 전에 그런 얘기를 들은 거니까 93년경인데, 한컴 가기 전에 혼자 개발하면서 멀티 쓰레드를 해보려고 했고, 좋게 말하면 R&D이고 나쁘게 말하면 삽질을 열심히 했던것이다.

그 다음에 그래픽한 클라이언트를 만드는 것은, 경험도 없고, 그림도 못 그리고 하니까, 클라이언트는 피씨에서 돌아가는 것이어야 할 텐데 내가 피씨 쪽은 안 한지 좀 됐고(대학 때만 좀 하다가 과학원에서는 유닉스에서만 프로그래밍했으니까), 그래서 그냥 클라이언트 따로 없이 VT100에 이스케입 시퀀스로 뭔가 화면의 커서를 잘 콘트롤해서 네트 엑이나 로그 같이 화면의 골뱅이가 나 대신 돌아다니게 만들어 볼까 했다, 그래픽은 아니지면 텍스트가 돌아다니게 하는 2차원이기는 했던 거다. 그런 걸 조금 만들긴 했다. 로그인 되고, 화면에서 커서로 골뱅이 이동하고, 채팅도 되고, 그러다가 한컴사에 93년 10월경에 갔고. 쥬라기공원 아르바이트로 개발한 것은 94년에 한컴 다니면서 퇴근하고 저녁 때 가서 한 것이었다.

콘텐트를 얹힌 것은 그 쪽에서 알아서 한 것이다. 8비트 문자가 못 지나가게 막힌 것을 쭉 찾아 뚫고, 한글 입력을 파싱해서 텍스트 입력이 되게 하고. command(명령어) 자체가 뭘 할 지는 그 쪽에서 프로그래머가 콘텐트를 얹히면서 작업한 것이고, 나는 그 밑의 부분만 작업한 것이다. 한 2주 정도 걸린 것 같다. 책의 내용을 그대로 입력한 콘텐트 작업한 것은 한 달 정도 걸린 것 같다.

한컴

93년 10월 쯤 한컴사에 갔고, 거기서는 머드나 온라인 게임 쪽 일을 한 건 아니었다. 나의 첫 보스는 김형집씨였다. 대부분의 한국 인터넷에 연관된 사람은 과학원, 그 중에서 SALAB에 집중이 많이 돼 있다면, 한컴은 말하자면 자생적인 그룹이다. 조금 예외적으로, 인터넷과는 상관이 없어 보이기도 하지만, 전반적으로 소프트웨어라고 보면, 한컴이 자생적으로 개발한 것이다 - 서울대 scsc 동아리에서 이찬진, 김택진, 우원식, 김형집의 네 명이 아래아한글 1.0 만든 4인방이고, 지금 김택진, 우원식은 NC소프트에 있고. - 그 당시에 리딩 컴퍼니였고, 한 해 매출이 2-3백억씩 나고 했다.

한컴사에 들어 가기 전에 장인경 사장이 미리 소개를 해줘서 김형집씨를 만나면, 오프젝티브 C를 공부해야 한다고 계속 강조했다. 지금은 아이폰용 게임 만든다고 다 오프젝티브 C 공부하는데, 이미 93년에. 그래서 아까 말한 간단한 그래픽 머드 시도를 오프젝티브 C로 만든 것이었다. 그 언어를 배우는 차원에서.

김형집씨가 하고 싶었던 것이 next step과 유사한 GUI를 만드는 것. 그래서 프로젝트가 그와 유사한 GUI 툴킷이 도스에서도 돌고, 윈도3.1에서도 돌고 OS2, X Window에서 모두 돌아가게 하는 것이었고, 그 위에서 아래아한글과 같은 애플리케이션을 쓸 수 있게 하려는 것이었다. 나의 담당 업무는 그 툴킷의 X Window에서 잘 돌게 하는 것이었다. 툴킷의 메인 코더는 따로 있었고, 나는 그게 X Window에서 잘 돌아가게 살짝 포팅만 해주면 되고, 그 밑에 기반되는 콜 몇 개를 구현해주면 되는 일이라 별 흥미를 못느끼고 열심히 안 하고 있었는데, 그래서 94년 여름에는 쥬라기공원 작업을 한 거다. 그러다가 메인 코딩을 하는 그 분이 병역특례로 4주간 훈련을 가게 됐고, 일이 진척이 안 되고 놀자 해서, 그럴거면 내가 하고 싶었던 그래픽컬 머드를 만들어보자 했고, 내가 서버를 짤 테니, 지금 NC소프트 부사장 이희상이라는 분이 어셈블리 잘 해서 클라이언트 짜기로 하고, 4주동안 했는데, 해봐야 많이 못했고.

또, 한국IBM에서 11월경에 올해까지 꼭 써야 하는 5천 만원이 생겼다며 나를 찾아왔다. 제안을 해온 사람은 서울대 법대 출신인데, scsc에 들어가서 그 인맥들을 잘 아는 사람이었다. 투자를 할 테니 그래픽 머드를 만들면 나중에 수익을 반반씩 나누자 했고. 그런데 한컴사가 돈 잘 벌고 있는 회사였는데, 그렇게까지 해야하나, 회사는 이 일에 별 관심이 없구나, 그리고 또 딴 사건이 있기도 해서 나는 한컴을 그만뒀다.

김정주, 넥슨, 바람의 나라

김정주는 대학교 동창인데, 1학년 때부터 소프트웨어 회사를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을 같이 했다. 쭉 못하다가 드디어 한컴 그만두면서 이제 해보자 해서 회사를 만들려고 생각하고 있는데, 예의 한국 IBM에서 다시 찾아와, 이 돈은 아저씨를 보고 투자를 하려고 한 건데, 회사를 나갔으니, 따라가야겠다 해서, 그게 씨드머니가 돼서, 넥슨을 창업하고, 95년 1월 1일부터 바람의 나라 개발을 시작했다.

회사 만들었다고 선배들한테 인사 다니고, 허진호 박사님이 아이네트에서 고생한다고 또 인터넷을 56kbps 전용회선을 무료로 놔주셨다.

서버는 오브젝티브 C로 짰다. 그거는 잘 한 선택 같다. 다이나믹한 게 있어서 서버쪽은 잘 했고, 클라이언트는 486DX 66 에서 돌아가는 것을 목표로 했다. 클라이언트 용량 4메가, 메모리 1메가, 640-480 해상도에 맞춰서 작업했다.

그렇게 바람의나라를 개발을 하다가 95년 말에 김정주와 싸우고 - 지금 생각해 보면 그럴 일도 아닌데. 내가 나온 이후에 김정주가 후배를 끌어모으고 해서 완성해서 천리안에 서비스를 시작했다. 피씨통신에서! 천리안이 허용하는 글자대로 코딩을 한 것인데, BBS니까 중간에 깨지는 일도 많고 - 천리안인지, 내 모뎀인지 .. 분당 20원에 오픈을 했고, 그래픽컬하고 전투가 되고 채팅이 된다는 것만으로 획기적이었던 것이다.

나는 그 전에 나와서 아이네트에, 허박사님이 딱히 오갈 데 없는 애를 받아주시고, 96년 상반기는 놀았던 것 같고, 아! 이러고 있지 말고, 바람의나라 하다 때려쳤으니 마저 완성을 해야겠다는 생각에 리니지를 시작했다. 신일숙씨 찾아가서 계약도 하고. 바람의나라 만들 때도 김진씨 찾아가서 계약했고.

만화 원작

둘 다 만화를 원작으로 한 건데, 내가 공돌이라 이름짓는 거나, 세계관 설정 등에 자신이 없어서, 원작이 있으면 편하다 싶어서 보던 만화 중에 괜찮네 하면서 선택한 것이다. 그 때까지만 해도 한국 만화들이 명맥이 살아 있었고, 지금은 웹툰 빼고 일본 만화가 점령하고 있지만. 우연히 다 그렇게 된 것이다, 쥬라기공원도 그렇고, 만화도 보던 것에서 선택한 것이고.

내 생각에는 만화를 원작으로 한 게 잘 했다 생각한다. 일본의 콘텐트 사업을 보면, 만화가 됐건 소설 됐건 그걸로 영화, 애니, 프라모델 쭉 연관돼서 만드는 게 부럽기도 했고, 그래서 우리도 그런 구조가 만들어지면 좋겠다, 만화하나 잘 그리면 평생 잘 먹고살 수 있게 되면 좋겠다 생각했다. 그런데 만화산업, 게임산업이 시너지를 갖고 동반성장하지는 못했고, 전자는 많이 없어졌다.

머드 - 커뮤니티

92-3 년 쯤에 소프트웨어 분야에서 뭘 해야될까 생각을 했을 때, OS는 끝난 것 같았다. 당시에 한국 정부가 한국형 도스를 만들다고 하기는 했지만, MS의 OS로 끝난 것 같았고, 심지어 리눅스가 91년인가 92년에 나와서, 밤에 ftp로 받아다가, 처음 나왔을 때 플로피 2장이었는데, 와 신기하다 해서, 핀란드의 대학생이 만든 거래 해서, 놀고 있는 386 공용 피씨가 있어서, 플로피 구워서 부팅해보고 X Window까지 뜨게 해서, 잘 만들었네 하고는 곧 잊어버리고.. 그랬는데. 그런 판국이라 OS로 뭔가 할 건 없었고, 그 다음은 오피스 소프트웨어. 한컴이 잘 됐지만, M$-word가 부상하고 했던 거라, 그리고 한컴이라는 강력한 회사가 있어서 내가 넘어설 것 같지 않았다. 그 다음으로 많이 하는 게 게임 - 그래서 패키지류의 게임은 이미 자본 투하가 많이 돼서, 플로피 10장 등으로 용량 크고 해서 그것을 따라갈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런데 그래픽 머드는 우리가 세계 최초는 아니더라도, 미국 쪽에서도 만들고 있었지만, 거의 뒤쳐지지 않고 같은 시간대에 할 수 있겠다 싶어서 경쟁력 있을 수 있겠다 생각을 했다.

게임이라는 게 궁극적으로 네트워크되고 여러 사람들이 같이 할 거라는 생각을 했다. 바둑, 장기 등을 봐도 인류역사상 원래 게임이 혼자서 하는 게 아닌데, 컴퓨터가 발명되면서 혼자하는 게임이 가능해졌다. 상대 역할을 AI가 대신해주니까. 그런데 네트워크가 발달하면서 다시 사람들끼리 하는 게 가능해진 것이고, 요새 싱글로 하는 패키지 게임도 네트워크 모드가 있어서 다 되고.

당시에 그 정도로 확신을 가지고 하게 됐던 것이다, 잘 먹고 잘 살 수 있겠다 정도. 이 정도로 산업이 커질 줄을 생각하지 못했지만. 만들면서 시행착오가 많이 있었다. 어찌보면 이런 대규모의 인원이 모여 게임 플레이를 하는 게, 전에 없던 것이니까. 이전의 텍스트 머드가 있기는 했지만, 몇 백명 수준에서 하는, 거의 매일 접속하면서 하니까 서로 잘 아는 친밀한 것이었다. 그런데 상업적 게임은 그렇지 않고, abuse 문제가 있고, 인발브 사람수도 다르고 하니까, 초반에는 여러가지 시행착오가 있었다. 플레이어들끼리 서로 죽일 수 있게 하는 PK라는 거. 텍스트 머드에는 그런 기능이 아예 없는 것도 많이 있고, 있다하더라도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 게, 결국 다 알고 친밀한 조직이라 그거 가지고 분쟁이 생기지 않고, 장난으로 끝나는 건데, MMORPG에 오면, 동접(동시접속)이 4~5,000 규모니까 실제 서버에서 생활하는 사람은 몇 만 명 수준이고, 현대사회처럼 익명성이 생기는 것이다. 너와내가 다시 볼지 안 볼지 모르는 상황, 그러니까 PK 등을 심리적 부담 없이 하게 되고. 엔지니어링 관점에서 보면, 싱글 쓰레드의 작은 규모가 아니라, 이제 멀티 쓰레드에 한 번 접속이 몇 천 명이 되고, 온갖 버그들이 생긴다. 그에 맞게 서버의 아키텍처를 잡고 하는 게 처음에 상당히 어려웠다.

플레이어의 분쟁 때문에 회사에 항의 방문은 없었고, 항의 방문이 많았던 것은, 버그 때문에, 자기 아이템이 없어진다거나, 거래를 해서 아이템을 샀는데, 알고 보니 계정을 해킹해서 나온 것이다 하면, 애초 해킹 당한 사람이 신고를 할텐데, 그 사람이 비번 관리를 못하거나 한 책임도 일부 있지만, 어쨌든 그 아이템이 흘러간 길을 따라서 로그를 조사해서 그것을 막아버리는데, 일단 막고 시작하는데, 산사람 입장에서는 해킹 당해서 나온지 몰라서 산 거라 와서 항의하는 것이다. 도가 지나치시는 분은 공기총을 쏘기도 하고, 기물 파손, 책상 위에 똥을 싸고 가신 분도 있고.

클라이언트 해킹말고, 서버 해킹은 없었던 것 같다. 한국 서비스에서. 중국이나 대만 갔을 때 있었던 것 같지만. 기본적으로 방화벽 뒤에서 클라이언트가 접속하는 포트만 열어놓고 서비스하는 거라, 서버를 해킹하는 것 자체는 어렵고, 가짜 클라이언트를 만든다거나 그런 사례는 많다. 봇, 오토 등. 프로포콜을 역공정해서, 프로포콜도 다 암호화를 걸었는데, 암호화 알고리즘을 열심히 찾아서 하는 것. 암호화 알고리즘이 서버가 한꺼번에 5천 개가 동시에 열려야 하는데, 5천 개의 스트림을 리얼타임으로 인크립션을 해야 하니까, 그것만 할 수도 없고, 게임 로직도 돌려야 되는데, 그래서 강한 인크립션을 걸기 힘들고, 그래서 리얼타임으로 걸 수 있는 것은 몇 개 안 되고, 그 중의 하나겠지 하면서 애들이 뭔가 시행착오로 하면서 풀게 되고, 패킷의 구조를 역공정해서 비슷한 클라이언트를 만들기도 하고. 거꾸로 하기도 한다. 프로토콜을 분석을 해서, 프리섭이라고 불리는, 서버를 만드는 거다. 노말한 클라이언트가 여기에 붙으면 여기가 진짜 서버인 줄 알고, 그래서 프리썹으로 수익을 올린다거나.

클라이언 트 해킹 - 초반에는 유저들의 치팅인데, 게임을 편하게 하는 건데, 나중에는 골드파밍을 쉽게 하기 위해 사람 대신 플레이를 하는, 하루종일 하는 하고, 거기서 획득한 아이템이나 골드를 아이템베이 등에서 팔아서 수익을 올리는.. 그거는 아직도 전문업체가 있다 - '작업장'이라 불리는.

게임: 사회의 축소판

게임이, 새로운 테러토리이고, 미국에서도 똑같은 일들을 겪었고, 처음 가보는 영역이라 미처 대비를 못한 것이 있었고, 개발자의 생각은 게임인데, 가볍게 즐기면 되지 라는 마인드가 있는데, 실제 플레이 하시는 분들은 그거 이상으로 진지하게 생각하는, 그래서 여러 문제 생기는 것 같다. 사실 게임만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 문제와 연결된다. 똑같은 게임, 똑같은 콘텐트인데,

미국에서 서비스할 때랑, 대만, 한국 서비스랑 굉장히 많은 차이를 보인다. 예를 들어, 리니지 같은 경우도 일본 서비스 - 일본 성향이 그런지 점잖게 지켜가면서 하는 취향이 나타난다. 미국에서는 롤플레잉 컨셉에 충실하게, 미국 사회는 70년대 말, 80년대에 TRPG - D&D (dungeon & dragons) 등이 유행했고, 학교 다니면서 한 번씩 해봤고, 그래서 롤플레잉에 대해 컨셉이 있는, 원래는 테이블에 둘러앉아서 주사위 던져가면서 말로 하던, 종이와 연필로 써가면서 말로 한 것을, 내가 기사고, 뻘쭘할 것도 같은데, 그게 80년대 미국 대학생들에게 유행했던 거고, 그래서 그런 문화가 있었기 때문에 게임 안에서도 롤플레잉하는 것에 익숙한 것이다. 그래서 엄격하게 롤플레잉하는 것을 요구하는 RP서버를 만들기도 하고 - 그래서 거기서는 엄격하게 이름도 모두 중세 이름으로 지어야 하고, 현실의 이야기 - 어제 NFL 풋볼의 누가 우승했는데.. 같은 얘기하면 바로 제재먹고, 다 중세 얘기만 해야돼고. 그런 서버가 나름 잘 되기도 하고.

하여간, 딱히 게임만의 문제는 아닌 것 같고, 사회와 얽켜서 일어난다고 본다. 축소판이랄까, 한국사회가 경쟁이 심하고, 줄세우기에 익숙해져있고, 12년 교육과정 내내 1등부터 100등까지 일렬로 줄 서는 것에 훈련되는 것이다, 여러 줄이 있는 것도 아니고. 게임 플레이도 그런 스타일로 나타난다, 경쟁이 심하고, 경쟁에서 뒤쳐지거나 뭔가 불이익을 받았다고 생각하면 회사에 와서 항의하고. 플레이 패턴 자체도, 게임 안에 다른 즐길 수 있는 거리가 있음에도 다 돌아보지 않고, 오로지 강하고 쎄지는 것에 매진하는 성향이 많이 보이는 것 같다. MMORPG라는 게 그것을 만든, 사회의 반영, 거울 같은 게 아닐까. 사회의 어떤 면들을, 부지불식간에 당연하게 여기는 것들이 게임 안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게 아닌가.

MMORPG 에서 무조건 경쟁만 있지 않고, 파티 플레이를 통해서 협력을 한다거나 하는 것들도 많다. 그런데 협력은 거쳐가는 거고, 궁극은 경쟁일수밖에 없는 것이 있다, 그 장르에서는. 그렇더라도 경쟁을 완화할 수 있는 측면이 있는 것 같다. 한 가지 잣대가 아니라, 전투에서 얼마나 쎈가가 아니라, 여러가지 잣대가 있도록 말이다. 공부를 잘 해야 성공이라는 것만이 아니라, 음악, 체육, 미술 등.

한 줄로 세우면 하위 그룹의 유저는 게임이 재미없을 수 있고... 그래서 페이스북의 팜빌 등을 보면, 경쟁이 약하고, 내가 도와주면 나한테도 생기고 너한테도 생기고... 남의 집에 가서 뭔가 들고 오려고만 하는 게 아니라. 소일 거리 같이 징가 게임들이 성공했는데, 기존의 리니지 등이 달성했던 이용자 수보다 공 하나가 더 붙은 ... 결국 그런 게 이 쪽 게임의 디자인에도 영향을 준다.

개발자이자 경영자, 기업문화

지금 생각해보면 개발자로 있을 때가 가장 행복하다. 요즘 들어 남는 시간에 코딩을 하고 있는데. 내 입장에서는 코딩하고 있을 때, 다른 근심걱정 사라지고 행복하다.

미국의 실리콘밸리 - 전세계적으로 여기서만 가능한 일인지 모르겠는데, 개발하던 사람들이 창업해서 성공하고, 경영도 잘 하고, 그런데 그게 딱히 개인 능력의 문제이기도 하겠지만, 그 동네의 분위기와 사회적 여건이 중요하겠다. 실패해도 용인하는 분위기라든가, 개발자가 창업할 때 그것을 서포트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 - 돈만 투자하는 게 아니라 회사 경영에 도움이 되는 식으로. 구글의 두 대학원생이 투자를 유치하고 다닐 때, 한 조건이 대학원생들이 잘 모르니까 좀 점잖고 알만한 사람을 CEO로 하라는 게 있었고, 밍기적 대다가 에릭 슈미트를 데려온 건데, 한국에서라면, 외부에서 온 사람이 회사를 말아 먹었네, 어쩌네 하는 시각이 컸을 텐데. 내부의 정치투쟁이 있었는지 모르지만, 창업자들이 성장을 하고 나서, 에릭 슈미트는 그 중의 한 명한테 CEO 자리를 내주고 자기는 물러나고... 애플도 마찬가지로, 잡스가 창업했다가 다른 CEO가 하고, 잡스가 다시 돌아올 수 있는 구조.

우리나라는 지분이 몇 %되고... 한 번 실패하면 빚더미에 있고, 연대보증 등의 문제로 이어진다. 그런데 딱히 우리나라가 문제라기보다는 세계 어디를 봐도 실리콘밸리가 특이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회사 경영에도 참여해 봤고, 결국 독립해서 하고 있는데, 개발할 때가 가장 편안하다, 공부가 제일 쉬웠어요 같은. 전체적으로 사회 시스템을 좋게 만든다고 하면, 개발자 출신이 경영을 잘 할 수 있게끔 서포트 되는 시스템이 갖춰지면 좋겠다. 창업해보려고 하면 복잡다단한 과정을 거쳐야 하는데, 개발자들이 특히 그런 공무원 양식 작성에 어려워하고 힘들어한다. 이런 거부터 개선할 수 있겠다, 법률적으로 걸리는 거. 신경 안 쓰면 나중에 큰 문제되기도 하니까.

청년문화

처음에 넥슨 차릴 때, 여러 반응이 있었다. 서울대씩이나 나와서 게임 회사를 하냐는 얘기도 들어 봤고. 당시 사회분위기는 카이스트, 서울대 나오면, 삼성 같은 데 가서 차분히 다니다가 이사달고 정년퇴직하는 것이 올바른 삶. 창업하는 것은 힘든 일이야 했던 때다. 테크닉하게 그게 가능하냐는 얘기도 들었다. 과연 기술적으로 가능하냐는 얘기. 당시 피씨통신이 9600bps 였는데, 그런 속도로 어떻게 그래픽이 날라다니냐는 의문 등.

창업이나 무모한 도전에 있어서 지금보다 자유스러운 면이 있었다. 좀 더 리버럴했다고 해야 하나. 시대의 운이 맞았는지도 모르지만.

요즘 정확히는 모르지만, 들리는 얘기로는 대학 가서도 과외, 토익, 스펙, .. 나는 토익 한 번 본 적도 없고, 누가 토익봤냐고 물어보지도 않았고. 서울대, 카이스트 나왔으면 어느 정도 증명 된 거라서 이제는 좀 자유로운 일을 할 수 있는 게 된 게 아닌가, 그런 분위기였던 것 같다. 90년대 초중반 분위기. 그런데 요즘 서울대, 과학원도 정말 시스템에 잘 맞춰서, 공부와 과외도 하는. 그런 면에서 우려가 된다. IMF 이후로 사회분위기가 보수화된 것 같다. 20대의 삽질, 무모한 도전이 조금은 용인되었는데, 여전히 규범적 사회적 삶이 제시되고 압력이 있었지만, 그래도 나같은 캐릭터로 살아갈 수 있는 길이 열려 있었는데, IMF이후로 남아 있는 틈새, 길마저도 호흡구가 막혀서 규범적 삶만이 강요되고, 체제가 더욱더 강고해져서, 그래서 중고등학생도 더 힘들어지고. 우리 때도자율학습 같은 거 있었지만, 야자 땡땡이, 놀러가고... 요즘은 초등학생부터 하루종일... 학원이 아니면 또래를 만날 수 없어서 학원가야 하는. 병적으로 심해진 거 아닌가 하고. 안 보낼 수도 없고. 사회적 합의나 정책 수단이 필요한데.. 그래서 답답함을 느낀다.

나 때는 대기업 가는 게 최후의 보루였다. 공부 잘 하면 교수, 유학. 대기업은 터부시했다. 근데 요새는 당연히 가려고 하는. 고시공부도 하고, 기술고시, ...

IMF 의 트라우마가 아직도 남아있어서 그런가. 사실 한국인 특유의 빨리빨리 하려는 태도로, 극복하자 하고, 금모으고 해서 5년만에 극복했어 선언하고 했는데, 사실 20-30년의 텀을 두고 천천히 뭔가 기회로 삼아, 필요한 사회 개혁도 하고 하면 좋았을 텐데.. 잘 안 될 것 같다.

하지만, 들은 얘기라 실상은 우리 때랑 다르지 않을 수 있고, 꿈을 가지고 하는 분들이 많이 있을 것이다. 아무리 학원 많이 다녀도 그런 것이 말살되지 않았을 것이고.. 규범적인 것을 없애자는 게 아니라, 대체로 그렇지만, 일부는 좀 빵구도 있고 해야 하는데, 숨통이 막히면 부글부글하다가 한 번에뻥 터질 수도 있으니까.

개발자들 면접을 다 보고 있는데, 면접이라 얌전하게 말하는 것일 수도 있지만, 좋은 학교일수록 순응적이고, 중간이나 대학 안 나온 분들이 더 열정이 있어보인다. 자기 주장이랄까, 자기 주장이 확고한 느낌은 있다. 우리 때만 해도 조직이 우선, 나를 희생, 그리고 튀는 애들을 배제하는 것이었는데, 요새는 회사는 회사, 나는 나, 쿨한 태도. 회사가 바쁜데 퇴근시간되면 퇴근한다든가, 그러면 나는 속이 터질라고 하고, 그런 건 확실히 있다.

회사 바쁜데도 오늘 연차내서 스키장 가고, 그리고 페이스북에 버젖이 사진 올리고. 우리 때는 핑계를 대고 숨기면서 했는데. 그 전에는 조직을 위해 희생하는 문화라면, IMF에서 그게 다 깨지고 한 것 같다, 수천명씩 해고하니까, 깨달은 것이다. 그거는 한편으로 바람직한 변화라고 할 수 있겠지만, 인간사회가 사람들이 모여사니까, 낱알로 흩어져서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가 있는데, 교육을 다 개인적인 솔루션을 찾으려고 하고.. 조직적으로 해야할 일 마저도 조직이 파괴되고, 개인 솔루션으로 하는, 문제가 더 심각해지는 문제가 있는 것 같다.

SALAB의 기억

SALAB 분위기는 독특했다. 나는 문화충격이 있었다. 전박사님한테 많이 배웠다. 내가 거기 가기 전까지 유교적, 가부장제적인 가치관을 가졌던 것이고, 전박사님이 그런 문화를 깨려고 했다. 자각을 하게 질문을 많이 던지시고, 우리로서는 당연하게 생각했던 건데. 예를 들어, 선후배의 엄격한 관계가 있는데, 그러면 발전이 있기 힘들다는 것이다. 박사 2년차가 발표하는데, 석사1년차가 문제제기하는 게 쉽지 않은 것. 심지어 형으로 부르는 것을 못하게 하자 하셨다, 반발이 심해서 실현이 안 됐지만. 적당히 개인주의적인 것이 있었다, 조직적으로 해야할 일도 당연히 있고. 각자 평등한 입장에서 협력하고, 일의 분배를 하고 했던 것의 조직 문화였다.

내가 SALAB에 들어간 게 90년이다. 그 때는 허진호, 정철, 박현제 선배들이 모두 나간 후인데, 그 세 분이 박사과정에 있을 때 굉장했다고 하더라. 적절한 경쟁과 협력 관계. 매일매일 불꽃이 튀는. 전박사님이 의도적으로 그런 조직 문화를 만들려고 했다고 할 수 있다. 한국사회에서 서바이벌하기 위해서 혹독하게 했다고, 엔지니어링 했다고 말씀하실 수도 있을 것같은데.

지금 사회는 과도기다. 위계적인 것은 빠르게 무너져가는데, 그래서 각 개인이 주체적 인간으로 판단하고 책임지고 하는 것은 잘 훈련 안 돼서 핑계나 책임전가만 하는 - 그게 주로 정부, 학교, 게임회사 등에 하게 되는. 미국식 사회가 꼭 좋은 게 아니지만, 좋은 점 중의 하나가, 국가와 개인 간의 적절한 균형 같다. 총기소유가 문제가 많지만, 헌법에 보장된 게 있으니까, 개인의 권한과 자유와 책임이 있는 건데, 우리는 아직 그런 경험이 없는 것 같다. 국가가 개입할 일이 아니다 식으로 선을 긋는 일이 없다.

지금에 와서, 현재의 세대에 맞는, 그건 비슷한 걸 만들면, 또 나름 재밌을 것 같다.

201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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