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김정주
인터뷰 대상: 김정주
질문자: 안정배
일시: 2013.3.4 14:00~15:00
장소: 신사동 313 갤러리
cosmos.kaist.ac.kr를 관리하던 대학원 시절
석사과정이던 91~92년에 SALAB에서 했던 일은 모뎀을 관리하는 일이었다. 그땐 진짜 비가 오면 끊어지는 때라서 모뎀의 선이 빠지거나 비와서 물 묻으면 접속이 안되었는데, 그럴 때 장비를 점검하고 고치는 일을 했다. 생각해보면 기술도 중요하지만 이런 일도 중요했다고 생각된다. 정말 네트워크가 끊어지면 다 죽는다는 생각으로 매일 매일 살려놓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당시에는 전화를 걸어 천리안으로 들어가는 피씨통신이 한창이었고, SALAB에서 나와 동료들이 지키고 있던 cosmos.kaist.ac.kr 서버에 모뎀으로 접속해 인터넷을 쓰는 사람도 있었다. 당시 (SDN, KREONet 등에 가입되어 있는) 학교에서 전용선 통해서 접속하는 방법 이외에 인터넷에 접속할 수 있는 방법은 전화를 걸어 8개의 모뎀이 부착된 cosmos 서버를 통해 접속하는 방법 뿐이었다. 건국대 한선영 교수 등이 당시 cosmos를 통해 인터넷을 사용하던 이용자들이다.
넥슨의 설립
근본적으로 게임과 인터넷은 서로 다른 분야라고 생각한다. 게임은 게임의 조건이 있고, 인터넷은 전화나 모바일폰처럼 메시징 기술이다. 나는 우연한 기회에 우리나라에 전용선을 이용한 인터넷이 막 시작되던 시기에 KAIST SALAB에 있게 되었고, 그 덕분에 이메일을 비롯한 인터넷을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특히 인터넷을 통한 이메일을 현업에서 쓸 수 있었던 것은 살아오면서도 큰 도움이 되었다.
웹 브라우져가 처음 나온 것이 92~93년의 일이다. 그 때, HTML이 처음 나왔고, 비슷한 프로토콜로 Gopher 등이 있었다. 이 시기에 대학원에 있었기 때문에 논문도 Gopher 등을 비교하는 내용을 쓰게 되었다. HTML은 이미지를 구현할 수 있었지만, 초반에는 그렇게 예쁘게 구현되지는 않았다. 웹사이트가 이미지를 이용해서 예쁘게 구현된 것은 94년 쯤 되었을 때의 일이다. 93년부터 웹사이트 만드는 일을 하기 시작했고, 94년 무렵에는 회사에서 웹사이트 구축 일을 하기도 했다.
넥슨은 94년에 설립됐는데 당시는 인터넷보다 하이텔, 유니텔, 천리안이 주류였기 때문에 첫 게임 서비스도 당연히 천리안으로 했다. 첫 서비스는 95년에 시작했다. 오픈했을 때만 해도 윈도우가 아니라 도스에서 돌아가던 천리안 위의 애플리케이션이었다. 인터넷 위에서 돌아간 것은 인터넷 카페가 생기고 인터넷을 통한 과금 체계가 생기고 그런 이후였다. 게임은 애플리케이션이었기 때문에 인터넷 기술의 발전과 정확히 맞물려 돌아간 것 같지는 않다.
사실 게임은 완전한 애플리케이션이기 때문에 인터넷이 있건 없건, 네트워크가 있건 없건, 별도로 존재해 왔다. 여기에 커뮤니케이션 채널을 IP를 쓰느냐, 버츄얼 서킷 같은 다른 것을 쓰느냐 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인터넷과 게임을 무리하게 연결시키는 것은 무리라고 생각되지만, 당시 인터넷 하던 친구들이 포털도 만들고 게임회사도 만들었다는 사실에서 보면 관련이 없는 것도 아니다.
메일링리스트를 통해서 해외에서 비슷한 프로젝트가 있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넥슨이 만들던 MUD는 상업적으로 성공을 거두기 전 학교에서 하는 실험적인 것이라 큰 교류가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메일을 이용하면서 해외에 울티마 같은 프로젝트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이런 것을 해외에서도 한다는 사실을 파악할 수 있었다. 그러면서 우리가 영 엉뚱하는 것을 하는 것은 아니구나 하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지금은 이메일에 그림도 보내고, 프로그램도 보내고 하지만, 당시에는 이 정도는 아니었고 "살아계세요?" "그런 프로젝트를 하고 있어요?" 이런 정도였기 때문에 활발한 교류를 하기는 어려웠다.
그래도 당시에는 인터넷을 사용할 수 있었던 사람들에게 권력이 있어서 해외에서 받은 툴을 시디에 구워 팔기도 하고, PC통신의 자료방 같은 것을 하면서 인터넷에서 구한 Linux 유틸리티 등을 배포해 돈을 벌기도 했다. 해외에 돌아다니는 공짜 게임만 모아서 시디로 구워 팔던 회사도 있었다.
회사의 모든 논의는 이메일로
개인적으로는 게임을 하지 않아서 우리 회사에서 서비스하던 머드를 한 번도 해보지 못했을 정도였다. 주로 개발은 송재경이 거의 다 했고, 나는 비즈니스를 했다. 그래서 회사 운영에서 인터넷을 사용했던 점이 더 기억에 남는다. 90년대 중반 넥슨을 시작할 때, 외부와는 이메일로 커뮤니케이션을 많이 하지는 않았지만, 회사 내에서는 처음부터 모든 커뮤니케이션과 모든 결정, 모든 기록을 메일로만 했다. 2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렇게 하고 있다. 이게 다른 회사와 조금 다른 점이었다고 생각된다. 지금이야 너무 당연한 얘기지만, 당시로서는 우연히 KAIST를 나와 좋은 랩에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회사를 시작해서 10년이 지나도 여전히 서류를 만드는 회사를 보면 한심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효율적인 문화가 만들어졌다는 데에서 인터넷에 빚을 지고 있었다고 할 수 있겠다. 코딩도 여전히 하지만, 무엇보다도 현재까지 Batch 방식의 아웃룩을 이용해 하루 5시간 씩은 이메일을 이용한다. 이메일을 통해 사내 논의를 하게 되면 여러 사람들이 직접 모이지 않아도 되니까 여러 면에서 효율적이라고 생각한다. 게다가 이메일은 아카이브가 용이하기 때문에 회사에 기록 좋아하는 친구들은 회사의 초기 자료부터 가지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바람의 나라 상용화와 PC방
MUD를 처음 고민할 때도 인터넷 프로토콜을 이용한다기 보다는 네트워크로 연결된 컴퓨터에서 그래픽이 되는 터미널을 이용해 게임도 해 보자는 정도였다. 당시에는 X-Terminal을 사용하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네트워크가 주라기 보다는 X-terminal에서 돌아가는 것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그래서 "바람의 나라" 첫 프로토타입은 X-terminal이나 Sun Sparc에서 돌아가는 방식이었다. 그러다가 나중에 상용서비스는 PC에서 하게 되었다. 학교에 X-terminal이 죽 있었던 terminal실이 있었으니까 이런 아이디어를 구현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이후, 97년에 도스 위에서 PC통신(천리안)에서 접속할 수 있는 클라이언트 프로그램을 처음 출시했고(상용화 시작), 인터넷 접속은 피씨방이 생기면서 과금이 가능하게 된 97년에 서비스를 시작했다. 그때부터 INET을 통해 회사에 전용선을 깔아서 피씨방에 직접 과금하기도 했다. PC통신으로 접속한 이용자와 인터넷으로 접속한 이용자가 같이 게임을 하던 시기가 아마 97~98년 어느 시점으로 기억한다. 이후에도 꽤나 오랫동안 피씨통신을 통해 접속할 수 있게 해두었다.
최초 상용화는 총 이용자가 30명 정도일 때 했다. 동점자 10~30명 선에서 상용화를 한 것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말도 안되는 일이다. 그러다보니 이전에는 이용자가 100명 넘고 1000, 2000명 넘었을 때가 다 기억이 나는데, 지금은 그렇지 않다. 요즘은 동접이 350만~400만 정도가 게임을 출시하기 때문에 예전과는 많이 다르다.
최초의 게임 회사 중 하나였으니 피씨방 과금 시스템을 비롯해 온갖 과금 모델도 우리가 다 처음 했을 것이다. 지금도 피씨방의 피씨별 과금, 피씨방별 과금, 피씨방의 기계 중 몇 대만 특정 게임을 할 수 있게 할 수 있다. 그래서 어떤 피씨방의 어떤 피씨는 한 달 내내 게임을 할 수 있고, 어떤 피씨방의 어떤 피씨는 분 별로 과금하게 하는 등 조절할 수가 있는데, 이런 시스템이 다 97,98년에 만들어진 것이다.
1997년은 PC방의 전성기여서 대형 PC방 체인까지는 아니었지만, 피씨 한 대 당 과금을 꽤나 비싸게 할 수 있었다. 당시 피씨방 요금이 지금보다 더 비쌌다. 지금은 1000원 정도지만 당시에 오히려 시간당 3000원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신림동 등지에 PC 30대를 보유한 PC 방 등이 기억난다.
SALAB, 인터넷 비즈니스의 용광로
나는 어떤 특별한 계기가 있어서가 아니라 어려서부터 회사를 하고 싶었다. 중학교 때 컴퓨터를 처음 접했는데, 컴퓨터를 가지고 사업을 하면 큰 자본 없이 시작할 수 있겠구나라는 생각을 대학 입학 전에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이런 생각으로 대학도 가고, KAIST도 진학한 것이다. 대학 때도 공장 등지에서 일을 많이 했고, SALAB에 있을 때도 회사를 운영하고 있었다. 당시 SALAB 자체가 산업계로 가는 용광로 같은 곳이었고, 실은 KAIST의 SALAB을 선택한 이유 중 하나도 그것이었기 때문에 SALAB 시절에 선배들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SALAB 시절에 정철 박사의 휴먼 컴퓨터에서 일을 하거나, 박현제 박사의 솔빛에서 일을 받아서 하기도 했다. 개중에는 독자적으로도 창업한 곳도 있었고, 이용태 회장이 있던 삼보의 투자를 받아 창업된 아이네트, 두루넷 같은 기업도 있었다. 이렇게 SALAB에서 박사를 마쳤거나, 박사를 그만두고 나가서 회사를 창업했던 선배들이 충분히 있었기 때문에 이들로부터 프로젝트 지원도 받고, 기계도 빌려 쓰고, 이야기도 듣고, 공간도 빌리고, 라인도 싸게 쓸 수 있는 좋은 환경을 제공받을 수 있었던 것 같다. 컴퓨터가 막 나오기 시작한 시절이던 당시는 삼성, 대우 등의 종합기업보다 이범천 회장의 큐닉스, 이용태 회장의 삼보 등의 혜택을 주로 받았다. 이러한 네트워크를 연결해주던 것이 바로 전길남 박사였다.
넥슨도 그때 배운대로 학생들의 프로젝트를 많이 지원한다. 학교에 적을 둔 학생 뿐 아니라 졸업하지 않은 학생들도 많이 지원하고, KAIST에 가서 강의도 하고, 강의 듣고 학교를 뛰쳐나가 회사를 해보겠다는 친구들도 지원하고 있다.
넥슨은 네트워크를 직접 개발하는 회사가 아니라 네트워크 위에서 돌아가는 회사이기 때문에 네트워크와 관련된 특별한 Breakthrough가 많은 것은 아니다. 예전과 지금 가장 기억나는 순간을 꼽는다면, 예전에는 20~30명이 접속하는 서버로 회사를 운영했는데, 사실 20~30명의 고객으로 돌아가는 회사는 온라인이나 오프라인이나 다를 바가 없었다고 할 수 있다. 20~30명이 이용하는 게임은 20~30명이 드나드는 카페나 음식점과 비슷했다. 매출도 비슷하고, 분위기도 비슷하고, 손님들이 뭐 하는지도 알아서 단골손님이 오면 그에 따라 서비스를 하기도 하고. 뭐 이렇게 하던 게 100명 넘어가고, 200명 넘어가는 순간 누가 누군지 모르게 되는 순간이 오고, 200명만 넘어가도 서버가 여지없이 부서져 나가는 순간이 왔다. 당시 서버 용량도 그렇고, 네트워크도 엉망이었으니까 아무리 핸들링을 잘해도, 클라이언트도 안되고 서버도 안되고 네트워크도 끊어지곤 했는데, 그런 순간이 지금 생각해봐도 가장 힘들고 괴롭고 기억에 남는 순간이다. 반면, 지금은 100만 명 넘는 게임도 수두룩 하고, 우리도 세상에서 제일 큰 게임을 갖고 있기도 하고, 여전히 그것들이 성장하고 있어서 단지 게임 뿐 아니라, LINE 같은 메신저도 그렇고, 지금 이 순간에도 놀라운 기록들이 여러 분야에서 만들어지고, 그 사이를 여전히 쓰러지지 않고 하루하루 사는 것이 가장 익사이팅한 순간이 아닌가 싶다.
기술도 여러 단계가 있고, 층위/계층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나는 비즈니스를 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기술을 최대화한다기보다는 사용자의 니즈에 가장 접촉해서 사용자의 목소리를 든는 것이 가장 힘들고 어렵고 재밌는 일이다. 그래서 사람들이 재밌어할 만한 것, 사람들이 그 안에서 즐거울 수 있는 것, 사람들이 감동하고, 긴장하고, 땀흘리고, 후회하고, 눈물흘리고, 배신도 느끼고, 감동을 느끼는 쪽으로 생각하게 된다. 새로운 기술을 한다기 보다는 이미 사람들에게 가 있는 기술을 잘 버무려서 사람들의 마음을 들었다 놨다 하는 일을 어떻게 하면 더 할 수 있을까 생각하고 있다.
2013.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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