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김지호

Interviewee: 김지호

Interviewer: 안정배, 조동원

2012.3.10

이지모드 사무실

몰래 전산실을 드나들던 과학고 시절

대학은 90년에 들어갔다. 88년 대전과학고에 입학해 처음 컴퓨터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내 컴퓨터는 아니고, 밤에 몰래 전산실에 들어가 게임을 하면서 시작했다. 전투기 공중전이나 삼국지 류의 시뮬레이션, 한참 어릴 때니까 스트립 포커 같은 것도 했다. 그때 적성에 맞는다 좋다 그런 느낌이 있어서 하게 되었다.

대학에 들어와보니 서울 출신들하고 차이가 있었다. 내 경우는 고등학교 때 처음 XT 컴퓨터를 접했고, 대학 2학년 때 개인 컴퓨터를 가져봤는데, 서울 출신들은 보통 용산전자상가부터 시작해서 초등학교, 중학교 때 애플2나 MSX로 시작을 했었다.

게임을 다들 좋아했기 때문에 친구들과 밤에 몰래 전산실에 왔다갔다 했다. 학교에서 전산실을 오픈한 것은 아니었지만 과학고는 기숙사생활을 했으니까 가능한 일이었다. 밤에 몰래 하는 거니까 선생님들이 좋아하진 않으셨지만 당시 과학고 분위기가 자유로운 편이었기에 가능했다. 당시 모든 과학고 정원을 합해도 과기대 정원보다 적어서 과학고생의 95%가 과기대에 진학할 수 있었기 때문에 1학년 때는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실험도 많이 하고 자기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는 분위기였다. 2학년 10월~11월에 입시 준비 모드가 되기 전까지는.

당시 과학고 수업은 과학, 수학 좋아하는 애들에게 심화된 커리큘럼 중심이었다. 1학년 때까지는 입시 같은 거 거의 신경 안쓰고, 과학영재 대상 심화과정을 가르쳤다. 전산이나 통신은 수업은 아니었고, 동아리 같은 것이었다. 수업이 있긴 했지만 크게 신경쓸 분위기는 아니었다. 과학고다 보니까 좋은 실습실이 있는 정도. 기숙사랑 학교가 붙어 있었고, 중간에 비안맞고 다닐 수 있게끔 통로가 있었다. 밤 11시까지 자율학습시간이었는데 말이 자율학습이니 공부하든지 말든지 하는 분위기였다. 꼭 도서관에 앉아있어야 하는 강압적 분위기는 아니었으니까 전산실 잠긴 문 따고 들어가곤 했다.

과기대 입학 후 인터넷과 게임을 시작하다

88년이니까 통신은 없었고, 90년도에 대학에 들어오니까 PC통신을 해본 애들이 좀 있었고, 인터넷이란 게 있다는 것도 그 때 처음 알았다. 당시에 하이텔을 통해 인터넷에 접속할 수 있었다. PC통신은 터미널서비스로 들어가는 것이었는데, 이걸 telnet 같은 프로그램을 통해 인터넷에 연결할 수 있었다. 하지만 당시에는 유료서비스였기 때문에 저런 것도 있구나 하는 정도였다. 대학 친구들 일부는 이미 집에서 PC통신을 하다가 오는 경우도 있었고, 하이텔 통해 인터넷 들어가고 해외에서 게임을 다운받아 하기도 했다.

90년도에 학교에 왔는데 당시 과기대도 학부제였다. 거기서 전산과를 택한 것이다. 당시는 과를 정하면 다 받아주는 분위기였다. 학교 교양수업이었던 전산수업에서 접속계정을 만들어 인터넷을 시작했다. 그 때 처음 워크스테이션을 써봤다. 기숙사마다 학교 서버에 연결된 터미널실이 있었다. 숙제하고 공부하라는 용도였는데 이걸로 게임을 했다.

대학에서 전산과를 택한 이유는 물론 컴퓨터를 좋아헀기 때문이었다. 컴퓨터는 명확했다. 시키는대로 좍 하고, 커뮤니케이션에 대해 신경 쓸 필요 없고, 얘기 이상한 짓을 하면 내가 잘못한 거고, 이게 명확했다. 여기에 과기대에 간 덕분에 인터넷을 알게 되어 굉장히 많은 선택지가 생겼다. 마이너 근성의 게임 좋아하는 친구들이 있었고, 해킹 좋아하는 친구들이 있었고, 밝고 건전한 웹 좋아하는 친구들이 있었다. 저는 마이너한 게임 좋아하는 그룹에 있었다. 인터넷을 가지고 할 수 있는 게임 쪽을 판 것이다.

초기 MUD 게임 커뮤니티

게임은 주로 인터넷으로 게임소스를 다운받아서 했다. 당시 게임은 텍스트로 하던 핵(<넷핵 Net Hack>??이나 로그Rogue 등이었는데 글자가 곧 캐릭터였다. 그래픽으로 구현되는 게 아니라 "세게 때렸습니다.", "아프게 맞았습니다" 이런 메시지가 나오는 식이었다. 그러다가 인터넷을 통해 해외의 MUD 게임을 시작했다.

당시에는 웬만한 게임의 소스가 인터넷에 올라와 있어서 컴파일해서 게임을 했다. 혼자 하는 게임도 있고, MUD처럼 누군가 서버를 띄우면 여기에 접속해서 하는 방식도 있었다. 당시의 접속방식은 Telnet을 사용했고, 프로그램은 뉴스그룹인 USENET에서 다운받았다. USENET의 MUD 그룹이 있었고, 여기에 누군가가 MUD 리스트를 올려두었다. 이 리스트에 Telnet으로 접속해서 이것저것 해보는 방식이었다. 이 중 재밌는 걸 발견하면 다 같이 몰려가서 했다. 같이 하던 친구들이 여럿 있었는데, 학교 내에서 MUD 서버를 운영하는 친구들도 있었다. 외국 MUD를 한글화하는 작업도 했다. 당시 게임을 하던 친구들에게는 MUD 게임 한글화 작업이 그렇게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이렇게 MUD 게임을 며칠 서버에 띄워놓으면 서버 관리자들이 리소스나 디스크를 많이 잡아먹는 게임은 내리기도 했다. 그래서 서버관리 아르바이트하는 친구들이 주로 띄웠다. 서버 관리에 일손이 많이 필요했기 때문에 학부생들에게도 아르바이트를 많이 맡겼다. 이 아르바이트를 하던 친구들이 뒤로 몰래 FTP 사이트도 운영하고, 게임도 돌렸다. 그리고 가끔 해킹하는 친구들이 몰래 계정을 해킹해서 게임을 띄워 놀기도 했다. 이렇게 하면 관리자들은 게임이 띄워졌는지도 몰랐다. 당시 과기대 한 학년 정원이 500명 정도였는데, 같이 게임을 하던 동기들이 10명 정도였다. 같은 건물에서 살고, 식당도 하나였으니 따로 동아리를 만들 필요는 없었다.

당시에도 폐쇄적인 집단이었기 때문에 익명성을 중요시하고, 집단의 서브컬쳐도 있었다. 이공계 트레이닝을 받고, 집에서 굉장히 빨리 떨어졌으며, 다른 사람들보다 기술적으로 십 년 이상 앞선 기술을 일상적으로 활용하는 집단이 몇 년 간 모여있는 셈이었으니 당시 모였던 사람들의 특징이 드러나는 고유한 문화가 있었던 것은 당연했다. 엘리트 의식과는 다른. 기본적으로 다들 자기만족을 위해서 했다. 기본적으로 다들 똑똑하고, 지적 호기심이 강했다. "아 여기 신기한 거 있다." 그러면 파고 드는 분위기였다.

이유는 모르겠는데 BBS 사용자들을 꿀꿀이들이라고 불렸다. 새로운 기술을 쉽게 수용하는 사람의 구성을 보면 대부분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 남자, 이공계라는 특성이 나온다. 흔히 말하는 youth culture와는 다른 특성인 것 같다. 당시 유저들을 보면 장르문학에 심취해있었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다들 인문학적 소양이 있어서 심리학 책 같은 걸 보는 사람들도 많았고.

KIT MUD와 장인경 선생님

MUD 들은 대부분 open source여서 Linux가 여러 배포판으로 갈라지는 것처럼 다양한 MUD가 존재했다. 대학교 3학년이던 92년, 당시에 굉장히 재미있게 하던 MUD 운영자가 서비스를 접는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걸 본 같이 놀던 친구가 이걸 띄워보자고 해서 서버 관리 아르바이트를 하던 선배를 통해 계정을 얻어 MUD 서버를 돌리기 시작했다. 이것이 KIT MUD였다. KIT는 당시 한국과학기술대의 약자였다. 해외 사이트에 가서 홍보도 하고 1년 이상 꾸준히 했었다. 홍보는 게임 안에 들어가서 채팅으로 알리거나 newsgroup의 MUD list를 통하는 식이었다.

서버는 인공지능연구센터 서버를 몰래 사용했다. 당시 문정훈이라는 유명한 해커가 관리자였는데, 이 선배가 학교에서 제적당한 다음에 다른 친구들이 우수수 제적된 기억이 있다. 대학원에도 송재경 선배 등 헤비게이머가 있었다. 학부보다 더 많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당시 학교 입장에서는 게임을 해서 문제라기보다는 수업에 들어가지 않아서 문제였다. 그래서 학사경고를 받고 제적을 당할 위기에 처하기도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 교수님들을 찾아가 도와달라고 했으면 그냥 넘어갔을 수도 있었을 텐데, 내가 워낙 다크포스가 강해서... 당시가 카이스트와 과기대를 통합하는 시기여서 카이스트에서 오신 교수님들은 학부생들을 어떻게 다뤄야 할지 굉장히 곤혹스러워 하셨다. 과학고를 나와서 한 살 어리고, 계속 기숙사에 살았기 때문에 터프하지도 않은 공대학생을 다루기 쉽지 않았을 것이다.

제적을 당할 뻔 했다가 교수님들의 선처로 계속 학교를 다닐 수 있게 된 것이 92년이다. 이때 장인경 선생(이후 마리텔레콤 대표)이 많이 도와주셨다. 그렇게 학교에 남아서 93년 한 해 얌전히 학교를 다녔다. 그렇게 지내다보니까 장인경 선생님이 방학 때 뭔가 만들어보지 않겠냐고 제안하셔서 93년 말부터 94년 초까지 방학중 프로젝트로 <단군의 땅>을 만들게 된 것이다. 동기들은 졸업할 타이밍이었지만, 그때 게임하던 친구들은 4년 만에 졸업하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장인경 선생은 MUD를 같이 하면서 알게 된 인연이었다. 당시 일반인이 인터넷을 이용할 수 있는 방법이 몇 개 없었다. 그 중에 하나가 모뎀으로 SALAB에서 운영하던 cosmos 서버(cosmos 서버는 SALAB에서 다른 사람들을 위해 열어둔 통로였다. 이 서버를 통해 학교 안의 다른 서버나 외부로 접속할 수 있었다.)에 접속하는 방식이었다. ETRI 연구원 출신이고, 삼성전자에도 계셨던 장인경 선생님도 이렇게 인터넷에 접속해 MUD를 같이 하던 분이었다. 장인경 선생님은 연배가 좀 더 있었지만, 게임을 통해 만난 사이라 나이가 문제가 되지는 않았고 잘 지냈다. 방학 때 프로젝트를 하려면 먹고 자고 해야 했는데, 이것은 장인경 선생님이 해결해주셨다.

90년대 초반, 과기대와 카이스트가 통합되던 시기에 학교를 다녔던 89, 90학번 학생들은 이 당시 정체성의 혼란을 많이들 겪었다. 이것을 완화해준 분 중 하나가 장인경 선생님이다. 이 시기를 돌아보면, 폐쇄적인 곳에서 성장한 학생들이 상당히 앞선 기술에 휩쓸리는 시기였던 것 같다. 여기에 청소년기의 불안이 겹쳐서 학교를 떠나거나 군대로 도피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이런 문제 자체를 해결해준 건 아니지만, 뭔가 완화하려는 어른이 있었다는 것이 중요했다.

이때부터 90년대 말, 2000년대 초에 인터넷이 대중화되면서 세상이 시끄러워졌다. 기술이 삶과 결합하면서 충격들을 받는다. 기술을 일찍 접한 사람들이 특히 그랬다. 그때 어른들이 필요했다. 이와 관련된 사회 문제를 다루는 사람이 필요했다. 한국이 인터넷 대중화는 굉장히 빨랐는데 그에 대한 분석은 거의 없었다는 점. 개인적으로도 가장 혼란스러운 시기였고.

연대 심리학과의 황상민 교수님이 유일하게 이 시기를 분석했었다. 어떻게 보면 한국의 인문 사회과학계가 기회를 놓친 것이고, 산업 안으로 들어올 수 있는 기회를 완전히 놓쳤다고 볼 수 있다.

아무튼 장인경 선생님이 가끔 서울로 불려들여서 같이 밥먹고, 잘데 없으면 집에서 재워주고 하는 등 게임하던 친구들을 많이 보살펴주셨다. 당시 피씨통신 커뮤니티에서 가장 액티브한 사람들이 "삼성 소프트웨어 멤버쉽(http://www.secmem.org)"에 갔는데, 장인경 선생이 이쪽과 연결해 주기도 했다. "삼성 소프트웨어 멤버쉽"은 삼성이 프로그래머들을 키우는 곳이었다. 이곳에 가면, 침대와 컴퓨터, 일본 만화 등이 있었다. 서울에 거주하는 소프트웨어, 게임 잘하는 친구들이 모여있었다. 나는 서울에 올라오면 놀러가는 정도였다.

(학업에) 문제가 있었던 친구들은 해킹하던 친구들과 게임하던 친구들로 나눌 수 있었다. 해킹하는 친구들의 특징은 말을 안한다는 것이었다. 어떻게 하는 거냐고 물어봐도 안 가르쳐줬다. 반면, 게임하던 친구들은 끼리끼리 놀면서 다 같이 얘기하는 스타일이었다.

80년대 말, 90년대 초는 인터넷이 대중화되기 직전이었다. 하지만 학교에서 하던 인터넷 관련 일을 계속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은 개개인마다 달랐던 것 같다. 게임이나 해킹을 하던 친구들도 그렇고, 웹을 하던 친구들도 그렇고 기본적으로 자기가 좋아서 하는 일이었다.

94년, <단군의 땅> 나우누리 서비스 시작

단군의 땅 프로젝트는 93년 말, 94년 초에 5명 정도가 모여서 시작했다. 인공위성연구센터 앞에 복도를 막아놓고 창고로 쓰던 곳이 있었다. 여길 빌려서 랜선 끌어오고 강의실 책상 위에 각자 가져온 자기 컴퓨터로 시작했다. 당시에는 주로 해외에서 게임을 가져오는 것이었던 반면, 이 프로젝트의 목표는 스크래치부터 만들어보자는 것이었다. 단군의 땅은 기존의 외국 게임과 비교할 때, 게임으로서는 똑같은 장르의 게임이었지만, 구조로 보면 완전히 다른 프로그램이었다. 어려서 그랬는지 "우리 것"에 대한 환상도 있었다. 그래서 이름도 <단군의 땅>.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단군의 땅> 작업의 난이도가 높았던 것 같지는 않다. 그리고 이미 3년 정도를 남의 소스를 가지고 고치면서 놀았으니까 어떻게 돌아가야되는지 필요한 게 무엇인지는 알고 있었다.

온라인게임이 다 그렇듯이 완성했다고는 할 수 없지만, 두 달 정도 작업하니 여러 사람이 같이 놀 수 있는 프로그램이 되었다. 30~100명 정도가 왔다갔다 할 수 있는 정도. 이걸 가지고 이상한 제작발표회 같은 걸 했는데, 여기서 장인경 사장님이 이걸 사업화해보자는 말씀을 하셨다. 이름도 붙이자고 하셔서 "별무리"라는 이름도 급조했다.

좋아서 하던 일이 사업이 되니까 갈등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같이 작업하던 친구들은 항상 같이 놀던 친구들이었고, 하고 싶은 걸 알아서 하는 문화였기 때문에 갈등해결 메커니즘 같은 것이 존재하지 않았다. 그런 사람들이 일을 나눠서 하게 됐으니 맨날 싸울 수밖에 없었다. 다들 사회성 안좋은 20대 초반 남자들이 모였으니 어떻게 됐겠나. 회사를 만들기도 전인 94년 상반기에 팀이 깨졌다. 그때 표현이 "별무리가 별똥이 되어 떨어졌다."

제작발표회 때 데이콤, 나우누리에서 부가서비스로 하자는 제안을 받았다. 당시 서버가 수천만원 정도 하던 시기여서 직접 서버를 운영하지는 못하고, 당시 서비스 런칭을 앞두고 있던 나우누리 서버를 대여하는 방식으로 서비스를 시작하게 된 것이다. 당시로서는 인터넷으로는 과금할 방법이 없어어 피시통신으로 시작한 것이다. 나중에는 천리안, 하이텔 등 다른 피시통신에서도 부가서비스로 <단군의 땅>을 이용할 수 있었다. 비슷한 시기에 송재경 선배가 만든 <쥬라기 공원>이 오픈했었고, 우리가 그 직후에 오픈했다. 이 두 게임이 피시통신을 이용한 국내 최초의 온라인 게임이다.

94년 당시에도 학부를 다니면서 주로 게임회사에서 프로그램 아르바이트를 하는 친구들이 많았다. 당시 주로 일본 게임을 들여오던 <만트라> 등의 게임업체도 있었고. 프로그램이 전문적인 분야다보니 학부생이 버는 것 치곤 급여가 높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과기대 이외에도 당시 게임을 만들던 팀이 꽤 있었다. 게다가 MUD 같은 온라인 게임의 경우는 인터넷을 뒤지면 소스와 컨텐츠를 구할 수 있었기 때문에 여러 팀이 게임을 만들고 있었다.

당시 피씨 통신 서비스는 수익이 100원이 나오면 그 중에 40원을 KT가 전화비로, 45원을 데이콤이 가져가고 컨텐츠 개발비로 15원이 들어오는 구조였다. 근데 상용인터넷 등장 이후 이걸 우리가 직접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때부터 게임업체들이 인터넷으로 눈을 돌리게 되었다. 게다가 이때부터 피씨방이 많이 생겨서 피씨방을 통해서 과금하는 형식의 사업모델도 만들어졌다. 피씨방 단위에서 게임사와 계약하는 방식으로. 중간에 이 영엽하는 총판도 있고.

게임을 운영하고, 새 게임 만드는 일을 하던 마리텔레콤을 그만둔 건 1999~2000년 정도였다. 송재경 선배는 기존의 MUD에 그래픽을 붙여야겠다며 그쪽으로 나간 반면, 나는 인터넷 서비스를 위해 웹게임을 시작했다.

인터넷 가상공간의 의미

MUD를 선택한 이유는 인터넷으로 할 수 있는 가상공간이 MUD 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인터넷을 보면서 이것이 미래라는 생각을 했다. 가상공간의 아바타들이 개개인의 정체성을 대체할 것이라는 기대가 있었다. 나 자신이 자아가 불안했던 시기였는데, 이 안에서는 끊임없이 새로운 자아를 만들어 실험할 수 있었다. 지금 사용하는 아이디도 게임 캐릭터였고. 인터넷이 일반화되면서 새로운 기술(미디어)를 접한 십대/이십대가 이러한 과정을 겪었던 것 같은데, 우리는 이것을 먼저 겪은 셈이다.

인쇄기가 발명된 지 600년이 지났다. 인터넷은 발명된지 아직 50년밖에 되지 않았다. 앞으로도 삽질할 거리가 많다고 생각한다. 미국 음악산업의 히스토리를 보면, 두 번의 쇠퇴기를 겪었고, 지금 세번째 쇠퇴기를 겪는 중이다. 그 첫번째가 20년대 라디오 방송의 대중화고, 두번째는 50년대 지역 라디오 방송이 대중화된 것이다. 미디어가 바뀌면서 사람들이 컨텐츠를 소비하는 방식을 바꾸고, 컨텐츠 산업이 그에 따라 재편되기 때문에 이러한 변화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지금 일어나고 있는 세번째 쇠퇴기가 바로 인터넷의 등장이다. 미디어가 결정하는 것들이 있기 때문에 기존의 시각으로는 해결할 수 없다.

새로운 미디어는 항상 기존 사회를 근본적으로 재편해왔다. 인터넷도 마찬가지이고, 혁명은 아직 진행 중이다. 특히 소프트웨어와 인터넷의 결합은 변화를 가속시킨다.

게임 내 재화와 시장 경제

초기 MUD 이용자는 소수였으니까 큰 문제는 없었다. 바람의 나라, 리니지를 거치면서 사람들이 많이 모여드니까 이에 따른 문제도 서서히 발생하기 시작했다. 리니지 같은 경우는 유저 내러티브, 즉 게임 시작할 때는 기본적인 것만 제공하고, 나머지는 플레이어들이 만들어가게끔 한 게임이다. 초반에는 개인 사이의 1대1 교환 형태를 취하다가, 나중엔 아이템베이 같은 게임 아이템 거래를 전문적으로 중계하는 업체가 생기기도 했는데 게임 내에서 거래가 이루어지고, 가격이 만들어지다보니 갈등이 생길 수 밖에 없었다.

똑같은 네트웍이라도 5명, 20명, 200명 이렇게 숫자가 많아질 수록 규모에 따라 그 사회의 성격이 바뀐다. 당시 동시접속 100명 규모의 MUD 게임 시절에는 모든 사람이 서로 아는 구조였다. 누가 새로 들어오면 서로 소개시켜주고, 환영해주는 분위기였다. 하지만 리니지는 동시접속 2, 3천 명이었다. 다들 아는 규모면 갈등이 생겨도 주위 사람들이 조정을 해준다. 하지만 그 규모를 넘어서면 커뮤니티의 조정 기능이 상실되고 낯선 사람과의 만남이 일상화되게 되어, 재화의 거래를 시장 경제에 의존하게 된다.

게임업계의 어제와 오늘

기존 온라인 게임 업계는 한동안 큰 회사들이 작은 회사를 사는 분위기가 유지되었다. 한국은 온라인 게임 분야에선 제일 일찍 시작한, 앞선 나라였지만, 스마트폰 게임 분야에선 일본이나 미국보다 뒤쳐져서 시작했다. 미국과 일본의 콘솔 게임 업체들은 이미 스마트폰 시장으로 뛰어들었다. 90년대와 같은 기회의 문이 열렸다고 할 수는 있지만, 파이의 크기에는 차이가 있을 것이다. 예전에는 한국 시장은 물론 세계 시장도 우리 업계가 선전했다면, 지금은 국내 시장에서도 해외 업체들을 디펜스하면서 해야 하는 상황. 90년대에는 하고 싶은 것을 하면서 산업을 열었고, 규제가 없는 상황에서 쉽게 할 수 있었던 반면, 지금은 고려해야 할 것들이 많다.

2012.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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