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허진호

인터뷰이: 허진호

인터뷰어: 고양우, 안정배, 조동원

2012년 1월 5일(목) 16:00~18:00

크레이지피쉬 사무실

최초의 인터넷접속서비스사업자 - 아이네트를 창업하기까지

하나망을 통한 기업의 인터넷(연구망) 접속

1992년 하나(HANA)망이 KT로 이관되고 나서 일반 기관들이 조금씩 인터넷을 사용하기 시작했는데, 공식적으로 쓸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은 아직 아니었다. 그래도 알음알음해서 메디슨이라든가 몇 개 기업이 인터넷 접속을 했는데, 하나망이 연구망이기 때문에 각 기업의 연구소가 그 연구망에 연결한다는 명분으로 접속한 것이었다. 그렇게 1991~3년 동안 조금씩 늘어갔다. (당시 하나망 status report를 보면 확인 가능하다.)

미국에서 상용 ISP 등장

미국에서 처음 나타난 ISP가 PSINETUUNET이다. 기억하기로 1991년 같다. 처음으로 상용ISP가 나오면서 인터넷 연결이 비지니스로 부각되기 시작한 것이다. 당시 나는 삼보컴퓨터에 있었고, 1993년쯤 나는 왜 KT에서 상용 서비스를 왜 한 하지? 라고 생각했다. 딴 것은 몰라도 이메일의 중요성, 특히 기업들에 아주 중요한 것인데, 이를 제공하려면 상용 서비스가 필요하지만 KT가 하지를 않고 있는 것이다. 그러다가 1993년 말인가 1994년 초쯤에 그것을 준비한다는 말을 들었다. 당시 KT 상무였던 송주영 박사가 주도했다. 그런데 4월, 5월이 지나도 안 나왔다.

INET 컨퍼런스에 참가

그래서 내가 1994년 3월 정도에 아! 이걸 가지고 비지니스를 해봐야겠다 결정을 하고, 제일 처음 한 것이 4월에 있었던 INET 컨퍼런스에 참가한 것이었다. 이는 PCCS의 후신으로1991년부터 시작한 년차 국제회의다. 해에 체코 프라하에서 있었고 거기에 갔다. 이유는 이제 비지니스를 하려면 PSInet과 UUnet의 경험을 먼저 들어봐야겠다 생각했고, 그 회의에 UUNET을 창업한 릭 아담스(Rick Adams)가 참석했기 때문이다. 릭 아담스는, 80년대 카이스트에서 UUCP로 해외로 연결한 사이트 중의 하나가 미국의 지진연구소(Center for Seismic Studies)의 노드인 seismo라고 있었고, seismo의 시스템 관리자였다.

SDN에서의 담당 업무

카이스트에서 당시 박현제 박사가 주로 TCP/IP 차원의 연결을 담당했고, 나는 메일을 담당했다. 국내 메일 게이트웨이 운영. 그 때는 지금처럼 유저@도메인 식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UUCP 주소도 있고, CSNET 주소도 있고, user%host@host2..fjfjfjfj 등의 복합적인 주소도 있었고, 한 10종 넘게 있었는데 그걸 다 해석을 해야 했다. 어떤 주소로 이메일이 들어올 줄 모르니까.

UUNET의 릭 아담스

유저 딜리버리와 메일 딜리버리를 담당하면서 릭 아담스와 메일을 여러 번 주고 받을 수 있었다. 그래서 나중에 UUnet 창업했다는 얘기 듣고, 또 INET 컨퍼런스에 온다는 얘기를 들으면서 이 친구를 만나봐야겠다 한 것이다. 회의에서 만나 한 시간 반인지 두 시간 동안 점심 같이 먹으면서 얘기를 쭉 들었다.

ISP 사업 노하우와 당시 미국의 상황

경험에서 나온 노하우를 들어 본 것인데, 가장 첫번째가 개별 소비자를 대상으로 하는 게 아니라 기업을 대상으로 한 비지니스를 해라였다. 몇 가지 더 있었는데, 기업 대상의 서비스를 하라는 것이 가장 중요한 메시지였다.

당시 미국에는 다이얼모뎀 랙(rack)을 한 10개 정도 사놓고 전화번호 할당 받아서 백엔드에 연결하여 일반인들한테 10불, 20불 받으면서 인터넷 접속 서비스를 제공하는 ISP들이 워낙 많았다. 이전에 BBS하던 방식이 인터넷에 적용돼서 나타난 것이었다. 5천 불, 만 불만 있으면 창업하기도 쉬었고. 금방 수익이 나니까 이렇게 소규모로 하는 것들이 수천 개 생겼는데, 90년대 초반에 다 없어졌다. 그 수천 개 중에 PSInet과 UUnet가 살아남은 것은 기업 대상 비지니스를 했고, 몇 천만 불 가량의 벤처 펀딩을 받았기 때문이다. 기업을 대상으로 한 비지니스를 하라는 것이 가장 중요한, 내가 프라하까지 가서 들을 가치가 있었던 아주 중요한 메시지였던 셈이다.

사업 준비: 첫 멤버

돌아와서 사업을 준비하는데, 카이스트의 후배들, 박태하, 위의석, 그리고 카이스트의 전산센터 CSRC의 엔지니어로 있었던 유재준, 그리고 삼보컴퓨터에서 같이 일했던 엔지니어 한 명, 이렇게 해서 총 6명이 모여 시작했다.

사업 방식: 개인 대상 서비스를 위해 나우콤과 제휴

기업 대상으로 하려면 초기 투자가 상당히 많이 필요하고 개별 대응을 해야 하기 때문에 매출이며 성장 속도도 느리다. 그래서 방법으로 생각한 것이 기업 대상을 메인으로 하면서도 일단 초기의 매출이 있어야 하니까 개인 대상도 일단 시작하자였다. 그 것을 위해 나우콤(나우누리라는 PC통신 서비스했던 곳, 현재 아프리카와 이전의 피디박스 서비스했던 곳)과 제휴를 하기로 하고, 우리가 마케팅 할 수 없으니 그것은 나우콤이 맡고, 나우콤 회원 대상으로 인터넷 서비스 제공하자라는 식이었다. 제휴를 제안하러 회사 법인 설립을 8월에 하자마자 아는 사람 없이 바로 찾아갔다. 그 때 만난 사람이 문용식 당시 이사였다. (이 때 얘기가 작년에 문용식 대표가 정치하려고 자서전 낸 책의 한 챕터에 나온다.) 내용도 별도 없이 파워포인트로 해서 간단하게 제안했는데, 이 양반이 듣고 그 자리에서 오케이했다.

사업 시작

1994년 11월 1일에 첫 론칭이 되었고, 그 날 조선일보에 IT섹션 1면에 전면으로 나왔다. 당시 일간지에서 IT섹션을 내는 게 유행이어서 조중동 다 지면이 있었다. 제일 먼저가 조선일보였다. 그렇게 시작했다.

기업 대상 서비스와 PPP(PC통신에서의 인터넷 접속 서비스)

나우콤과 하는 것과 별개로 1995년 2월에, 미국의 스타트업들이 하듯이 모뎀 랙을 만들어서 모뎀 몇 백 개 사고 전화 회선도 몇 백 개 따고 대표 번호 받고 인터넷 접속 제공하는 서비스를 독자적으로 했다.

나우콤을 통해서 인터넷 접속하는 것은 이메일 주고 받을 수 있고 FTP 할 수 있는데, 기술적인 문제 때문에 웹브라우저는 띄울 수 없었다. 웹으로 가려면 SLIP/PPP 프로토콜을 띄워야 했는데, 그것을 가능하게 해주는 것으로 모뎀 랙을 마련해서 독자적인 제공 서비스를 한 것이다. 다이얼업을 통해서 웹에 접속할 수 있게 하는 PPP 서비스를 우리가 제일 처음 한 것이다. KT, 데이콤은 좀 늦었고.

나중에는 하이텔이나 다른 곳들에서도 PPP가 있었는데, 그것은 PC통신업체에서 PPP 프로토콜을 제공하려면 개발을 해줘야 한다. PC통신 서버를 통하는데, 그 때 자체 서버의 프로토콜 스택을 안 쓰고, PPP 프로토콜 스택을 쓰게 하려면 개발이 꽤 많이 돼야 한다. 당시에 다 클라이언트가 있었잖는가. 당시 PC통신을 쓰려면, 아스키 단말을 주는 방식 - 에뮬레이터 방식이 있었고, 또 하나가 클라언트 방식이 있었는데, 클라언트로는 가능했는데 에뮬레이터로는 실제로 불가능했다.

그래서 1995년부터 메인 비지니스는 기업을 대상으로 한 서비스에 집중한 거다. 갑자기 1995년에 많은 곳들에서 관심을 보여서 PR차원에서 돈도 많이 받았고.

대기업의 인터넷 사업 진출

당시에 모든 대기업이 다 뛰어들었다. 삼성, 현대, LG. LG는 LG인터넷, 삼성은 삼성SDS 유니텔, 현대는 현대전자에서 그 때 김택진 대표가 주도해서 신비로를 론칭했고. 그리고 우리와 비슷한 ISP가 수십 개 생겼다.

기업 대상 사업을 통한 성공

릭 아담스의 조언에 따라 기업 대상 사업을 하면서, KT나 데이콤과 경쟁하며 탑3가 될 수 있었고, 중소 ISP와 격차를 벌일 수 있었던 것이다. 기업 대상으로 안정적 접속 서비스 제공하고, 그러면서 백본 - 전국 전용망 같은 것을 확충할 수 있는 여력도 갖게 되고, 해외로 연결되는 회선도 독자적으로 구축하고.

KT, 데이콤과의 경쟁과 정부 규제

IX와 KINX

KT도 데이콤도 IX를 만들었고, 당시 IX가 총 3개 있었다. 나머지 하나는 전산원이 운영하는 공공기관용 IX. 이 세 가지가 연결되어 있었다. 그 때 우리가 KT와 데이콤에 IX 피어링을 하자고 제안했는데, 거절당했다. 피어링이란 동등한 위치에서 비용 정산 없이 서로 트래픽을 연결시켜주는 것이다. 미국에서는 대체로 1계층(tier 1) ISP 끼리는 피어링을 한다. 국내에서는 KT와 데이콤이 아이네트를 1계층 ISP로 인정을 안해준 것이다. 그 둘은 기간통신사업자니까 자기들끼리는 피어링을 하는데, 너는 기간통신사업자 아니니까 돈 내고 들어와! 한 것이고, 그에 열받고 아예 별도의 IX를 만들어버렸다. KT와 데이콤을 제외한 모든 ISP는 여기에 붙어라, 우리는 미국식으로 해서 비용을 n분의 1로 분담하고, 동등한 입장에서 트래픽을 주고 받는 피어링을 하겠다. 그게 킹스(KINX, Korea Internet Neutral eXchange)다. 전산원이 한 것(KIX, Korea Internet eXchange)하고 다른 거다.

아이네트가 주도해서 별도로 한 거다. 그런데 킹스를 시작할 때부터 별도 법인(한국인터넷연동협의회)으로 만들었다. 킹스 만들 때 아이네트가 계속 주도하는 것이 아니라 그 회원의 하나로 들어가기로 하고, 위원회를 두어 그 결정에 따르는 것으로 하자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킹스는 이후 인프라 비지니스로 바뀌었다. 1996년 혹은 1997년 정도로 기억한다.

레이어2 방식의 연동 서비스

또 하나는 레이어2 방식의 연동 서비스를 제공했다는 점이다. 레이어2로 연동이 되어야만 피어링이 가능하다. 레이어3로 연동한다는 것은 서비스를 산다는 뜻이다. 기술적으로 보면 업스트림 ISP, 즉 상위 ISP가 있고, 하위 ISP가 있다. 레이어3 연동을 한다는 것은 하위 ISP가 트래픽을 보내면 상위 ISP에 다른 쪽으로 보내주는 식으로 연동이 된다. 그래서 킹스의 원칙을 정할 때, 피어링 한다, 그리고 레이어2로 연동한다는 것 등이 주요했다.

KT, 데이콤의 연동 거부

킹스를 만들고 그 차원에서 KT와 데이콤와 협상했다. 너네도 IX고 우리도 IX다. 우리는 20-30개의 ISP가 있다. 그런데도 안 받아들여줘서 전산원에서 하는 KIX하고만 연동했던 것으로 알고 있다. 나중에 KT와 연동이 되기는 했는데, 그 전에는 아이네트 가입자가 KT 가입자에게 연결되려면 해외에 나갔다 들어와야 했던 것이다. 우리도 자존심이 있어서 KT와 데이콤 서비스 안 산다고 했다. KT와 데이콤을 업스트림으로 인정할 수 없었던 것인데, 규모도 비슷하고 심지어 1995-6년까지는 가입자수 기준으로 우리가 데이콤보다 컸다. 데이콤이 우리보다 커진 것은 1996년 하반기다. KT보다는 작았지만.

기간통신사업자가 아닌 불리한 조건

아이네트는 KT나 데이콤처럼 기간통신사업자가 아니어서 회선을 사와야 했는데, 즉 기간통신사업자가 회선을 사는 가격으로 살 수가 없었던 것이다. 끝까지!

미국과 한국의 기간통신사업자 규제에 대한 가장 큰 차이가 바로 이 점이다. 한국은 이러저러한 역무의 기간통신사업자가 몇 개 필요하다고 공지하고 여기저기서 신청하면 자격되는 곳들을 선정하는 미인대회 방식이다. 그러고 나면 다른 곳들은 기간통신사업자가 될 수 없다. 반대로 미국은 일정 요건을 갖추고 신청해서 통과되면 누구나 기간통신사업자가 될 수 있다. 그걸 FCC 214 라이센스라고 한다. 이를 받으면 뭐가 가능하냐면 광케이블을 기간통신사업자 원가로 살 수가 있다. 그것도 다크 파이버(dark fibre)로 살 수가 있다. 그것은 양쪽으로 기계 장비가 붙지 않는 순수 케이블이고, 기계를 자기가 붙이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다크 파이버를 살 수 없으니까 양쪽에 KT가 붙인 장비에서부터 일종의 부가 회선을 사는 꼴이다. HDCL 라인을 우리가 사서, 혹은 프레임 릴레이 회선을 사서 양 끝에 우리가 IP 디바이스를 붙여서 IP 서비스를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결국 우리는 부가통신사업자로서 원가를 부담하면서 서비스를 했던 셈이다.

KT의 경우, 원칙적으로 기간통신사업 부서와 부가통신사업 부서 간 회계 분리가 돼야 한다. 그래야 공정경쟁이 될 수 있다. 내 기억으로 한 번도 그렇게 된 적이 없다. KT나 데이콤과 같은 조건이 아닌 데도 그 사업을 한 것인데 ... 처음 시작할 때는 몰랐다. 만약 처음에 알았다면 안 했을 것 같다.

라스트 마일의 언번들링에 대한 규제 문제

아이네트를 1998년에 PSInet에 매각 했는데, 그 때 우리가 손을 떼지 않았다면 같이 망했을 것이다. 1998년 케이블 모뎀으로 서비스가 시작되면서 급속하게 광대역으로 넘어갔는데, 그런데 우리는 광대역 서비스를 제공할 방법이 없었다. 우리나라 법적 규제상! 라스트 마일을 언번들링하지 않은 것 때문이다.

교환기를 거쳐 땅 속을 거쳐 가정까지 도달하는데, 그 마지막 가정에 도달하도록 하는 것을 라스트 마일(last mile)이라고 한다. 가정까지 인입되는 가장 마지막 구간. 미국 같은 곳은 이 라스트 마일을 언번들링된 것으로, 즉 아까 말한 다크 파이버처럼 이걸 순수 케이블만 해서 살 수가 있고 그것으로 광대역을 제공할 수 있다. 그걸 드라이 카퍼(dry copper)라고 하는데, 그래야 양쪽에 케이블 모뎀이 됐든 DSL 서비스가 됐든 우리가 붙여서 서비스를 할 수 있는 거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그렇게 따로 살 수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KT가 제공하는 DSL 서비스를 도매로 사서 우리가 소매하는 방법 밖에 없다. 그건 부가통신사업이고 지금도 가능하다.

드라이 카퍼 형태로 우리가 DSL 장비를 붙이고, DSL 서비스를 할 수 있는 것은 국내에서 불가능했던 것이다. 그런데 우리처럼 언번들링 안 한 나라가 OECD 국가 중에 별로 없다. 일본도 소프트뱅크가 NTT 것을 드라이 카퍼로 사서 자기 DSL장비 붙여서 DSL 서비스나 케이블 모뎀 서비스하는 거다. 미국도 그렇고. 미국의 경우를 보면, 광대역을 제공하는 전통적인 캐리어가 아닌 새로운 캐리어들 - CLEC(competitive local exchange carrier) - 이 1990년대 후반과 2000년대 초반에 많이 생겼다. 지금은 많이 없어졌지만. 우리는 규제상 CLEC 같은 사업자가 나타날 수 없는 구조다.

정통부 마피아를 이해하지 못한 상태에서 정통부 가서 무지하게 일을 많이 했는데, 안 됐다. 스타트업으로서 한계가 빤히 보이는 ISP 서비스였는데, 그걸 알았다면 처음부터 안 했을 것이다.

사업자 면허 문제: 부가통신사업자로 ISP 시작

이건 아는 사람이 몇 없는 얘기인데, 1994년에 회사 설립하고 라이선스를 얻어야 하는데 어떻게 할 지 고민이 됐다. 당시 들은 얘기가 있었다. 일본에서 준무라이 교수의 제자들이 나와서 우리와 똑같은 방식(startup)으로 ISP를 설립했는데, 그게 IIJ다. Internet Initiative Japan. IIJ는 나중에 기간통신사업자 라이선스를 받기는 했다. 초창기는 우리처럼 시작했다. 그 친구들도 INET 컨퍼런스에서 만났는데, 그 때 들은 얘기가 IIJ가 일본 정부로부터 라이선스를 받는 데 2년 걸렸다는 것이다. 왜? 아무리 뒤져봐도 인터넷 서비스에 대한 사업자 허가 항목이 없길래 정부에 문의를 한 것이다. 그랬더니 그 때부터 정부가 스터디를 하면서 인터넷 서비스를 이해하고 이에 대한 카테고리를 만들고 하는 데 2년이 걸렸기 때문이다. 그 동안 IIJ는 인터넷 서비스를 못하고 UUCP 이메일 서비스만 했다. 다이얼업로 연결해서 이메일 확인하는 정도.

그 얘기 듣고, 나도 정통부에 얘기하면 분명히 똑같은 결과가 나올 거다. 그래서 나는 안 물어보기로 하고, 관련 법령을 다 뒤져봤다. 우리는 딱 두 종류가 있다: 기간통신사업자, 부가통신사업자. 그 차이는 딱 하나: 기간통신사업자는 광케이블, 동축케이블 등의 인프라를 자체적으로 소유하고 서비스를 하는 것이고, 나머지는 다 부가통신사업자가 된다.

'우리는 인프라 없지? 그럼, 우리는 부가통신사업자네' 하면서 부가통신사업자로 신청했다. 정부에 아무 얘기 안하고, 부가통신사업자 허가 신청해서 허가 받고 바로 사업을 해버렸다. 정부가 이 사업이 뭔지 이해를 하기 전에 서비스를 먼저 시작한 거다. 만약 우리도 IIJ와 똑같은 절차를 거쳤으면 2년은커녕 훨씬 더 걸렸을 것이다.

정통부, 당시 체신부였을 텐데, 그 쪽에서 보기에, 우리가 규정을 어긴 게 하나도 없으니까 문제 삼을 게 없는 거다. 그런데 이게 퍼블릭하게 사업이 되니까 기정사실화되었고, 그러고 나면 손을 못대는 것이다.

그러다가 인터넷 접속 서비스가 기간통신 역무로 바뀌었다. 내 기억으로 2000년인가 2001년인가. 정확하게 말하면 초고속 인터넷 서비스가 기간통신 역무로 된 것이다. 모든 접속 서비스가 그런 게 아니고 DSL - 초고속 접속이 바뀐 것이다.

[질문] 그럼 아이네트가 없었다면 한국에서는 ISP가 기간통신사업으로 시작되었을 것인가? 그랬을 것이다. 그러면, 다이얼업 모뎀 접속 이외에는 KT와 데이콤 밖에 하지 못했을 것이다. 다이얼업 모뎀 접속은 기존의 PC통신망에서 하던 것이고, 우리처럼 백본을 갖추고 독자적인 ISP 사업을 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았을 것이다. 인터넷 서비스는 KT와 데이콤 두 회사만 계속 하는 형태가 되었을 수도 있었던 것이다...

광대역 인터넷 접속 사업

두루넷의 케이블 인터넷 사업

두루넷의 케이블 모뎀 사업 계획할 때 내가 관여하기도 했다. 당시 아이네트의 최대주주가 삼보컴퓨터였고 두루넷의 최대주주도 삼보컴퓨터여서, 이용태 회장님이 사업 계획서 잡는 데 가서 도움을 좀 주라해서, 내가 사업 계획서 짜는 데 모든 사업 구조에 대한 정보를 다 알려줬다. 이런 사업을 해본 적이 없으면, 원가 구조를 모르니까, 가격 체계, 초기 비지니스 모델을 정리해 준 거다.

아이네트와 같은 선례의 영향

아마 KT, 데이콤 이외의 아이네트와 같은 제 3의 업체가 인터넷 서비스를 제공할 수도 있다는 선례가 없었다면, 두루넷이 사업을 시작 안 했을 것 같다. 왜냐면, 당시 두루넷이 최초에 설립됐을 때, 전용회선 서비스를 역무로 받아서 기간통신사업자가 된 것이다. 그러나 그게 사실 비지니스로 가능성이 너무 낮아서 다른 길을 찾았는데, 아이네트가 나름대로 하고 있으니까, - 내 기억에 97년에 우리 매출이 80이나 90억 되었을 것이다 - 저런 조그만 회사도 매출이 100억 정도 나오는데, 두루넷도 해볼만하지 않겠니 하면서.. 하지만 그런 선례가 없었다면 아마 사업을 생각하지 못했을 지 모른다.

두루넷과 KT의 초고속 인터넷 사업 경쟁

그런데 두루넷이 엔드유저 - 가정을 대상으로 한 브로드밴드 서비스를 시작하지 않았으면, KT가 DSL 서비스를 시작하는 게 한 1년 이상 늦춰졌을 것이다. 왜냐면, 그 때까지 KT는 브로드밴드에 대해 아무 생각이 없었다. 두루넷이 케이블 서비스를 98년에 선보이고 나서, 어이쿠야 이거 뭐야 하면서 1년 정도 후에 KT에서 서비스를 내놓았다. 99년에 KT에서 사업하고 나서 6개월만에 뒤집어지긴 했지만.

두루넷 - DSL 아닌 케이블 모뎀

두루넷이 기간통신사업자였음에도, 마찬가지로 두루넷조차도 라스트 마일의 언번들링 규제에 걸려서 서비스를 제대로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 문제에 걸려서 케이블 모뎀을 한 것이었다, DSL이 아니라. 케이블은 KT, 데이콤이 아니라 동축 케이블을 가지고 있는 SO 사업자와 딜을 하면 되었다. 물론 개별 SO 사업자들과 모두 협상을 해야 해서 힘은 들었지만, 그렇게 하는 게 가능해진 거다. 양쪽의 이해관계도 맞았고. 하지만 KT, 데이콤과 딜을 해야 했다면 두루넷은 초고속 사업을 못했을 것이고, 그러면 KT에서 초고속 인터넷 사업 한 것도 늦어졌을 것이고...

KT의 초고속망 사업 계획: ATM

당시 KT는 ISDN, 그리고 그 다음으로 ATM으로 진화하는 게 사업 전략이었다. 1994년 전후에 나온 당시 유행한, 정부의 정보 고속도로 사업계획을 보면, 총 예산이 20조였고, 모든 가정마다 ATM을 까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당시는 맞는 얘기였다, 왜냐면 당시 ISDN이 중심이었고 그게 진화하면 자연스럽게 ATM으로 가는 것이었다. IP 기반의 네트워크가 아니고.

정통부도 KT도 그렇고, 정보화 고속도로는, 즉 광대역은 ATM으로 간다는 생각을 했고, 1998년까지도 그랬다. 왜냐면 그 계획 전체가 바뀌지 않았기 때문에.

두루넷의 케이블 모뎀을 통한 초고속 인터넷 서비스의 의의

두루넷이 케이블 모뎀을 통한 초고속 인터넷 서비스가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지 않았으면, KT는 그 뒤로도 한 참을 ATM으로 가고 있었을 거다. 일본이 ISDN이 너무 잘 돼서 브로드밴드로 넘어가는 게 늦어졌듯이. 똑같은 거다. 그 당시에 일본에 가면 전화기가 다 ISDN 폰으로 바뀌고 했죠. 너무 잘 되었는데... 역사의 아이러니다.

ATM의 포기

통신사업자들이 DSL과 케이블 모뎀이 확산되기 전까지 포기를 못했다. 포기할 수 없는 게 거의 10년 동안 R&D로 들어간 게 몇 조 원에 달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내부에서 포기하자는 얘기를 아무도 못했다.

그 당시 네트워크 일하던 사람들이 다 ATM 공부했다, 다 이것으로 바뀐다더라 하면서... 그런 데 그게 사라져버렸다. 그게 BISDN이다. Broadband ISDN. 기술적으로는 ATM 기반이었고.

카이스트 생활

벤처 창업

벤처에 대한 얘기를 하는 곳들이 너무 많은데... 여기서 - 이 책 프로젝트에서 벤처를 다루는 것은, 아주 깊게 다룰 수도 없고, 간단히 하는 것은 딴 데서 많이 하고 있고. ...

창업에 대한 꿈

요새 스티브 잡스가 화제인데, 우리가 스티브 잡스를 롤 모델로 삼은 건 82년이다. 애플2 처음 나왔을 때인데, 내가 대학교 3~4학년이었던 때 같다. 그 때 정철과 또 세 명이 더 있었는데, 그 세 명은 SALAB에 오지는 않았는데. 그 때는 아무것도 모르고, 스티브 잡스와 스티즈 워즈니악이 애플 만들고 회사를 창립했다는 얘기를 전해듣고, 야! 우리도 저런 회사 하나 만들자라고 5명이 얘기한 것이다. 선례도 없고 어떻게 해야하는지도 몰랐으니까 일단 각자 자기 영역에 가서 고수가 돼서 10년 후에 다시 만나자 했다. 그 중에 3명 - 나, 정철, 서정배가 카이스트에 갔고, 두 명은 서울대 대학원 가고 나중에 교수가 됐다. 나, 정철은 박사과정까지 갔고, 서정배는 석사 마치고 3년 취직해 일하다가 88년에 창업했고, 정철이 나보다 1년 먼저 졸업해 창업했다. 나는 90년에 졸업했다.

박사후 과정을 접고 기업체로!

주위의 많은 사람들이 니가 사업할 줄은 몰랐다고 했는데, 당시 졸업하면 당연히 교수가 되는 것으로 다들 알고 있었는데, 실제로 90년 4월에 영국 UCL에 포닥을 가기로 되었다. 89년 12월에 장학금 문제 해결하고 이후 지원에 대한 약속도 받아놓은 상태였다. 그리고 아내도 직장 그만두고 MBA도 지원해놓고 있었다. 그 때 정철 박사가 자기 회사에 와서 일하자고 제안을 했다, 휴먼컴퓨터. 그래서 일주일 고민하고 알았다, 갈께 하고 갔다. 와이프한테 미안하다, 과학재단이랑 UCL에 미안하다 다 연락하고.

왜 그렇게 했는가? 그게 80년대 초반에 꿈꾼 게 있었고, 그걸 하고 싶었고, 아마 내가 카이스트에서 다른 교수님한테 배웠다면 그 꿈은 사라졌을 것 같다. 하지만 전박사님은 내가 있는 7년 동안 그걸 더 부추겼다. 그런데 졸업하면서 뭔가 창업을 하려고 해도 마땅한 게 없었다. 그 때 마침 정박사가 같이 일하자고 해서 잘됐다 하면서 간 것이다.

예외적인 기업 진출

당시 카이스트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기업에 가는 일은 상당히 예외적인 일이었다. 안 믿겠지만, 1980년대 중반만 해도 박사학위 받고 기업에 가면, '이사'부터 시작했다. 1990년대에는, 1년 선배가 박사받고 삼성전자 들어갔는데, 바로 과장으로 들어갔다. 요새는 대리받기도 쉽지 않을 건데.

전길남 교수의 지도

우리는 전박사님께 학교에 꼭 남아야 한다기 보다는 다양한 분야에 진출해서 사회에 기여하는 방식에 대해 얘기를 많이 들었다.

카이스트에 있었을 때 인터넷 관련해서 이메일 담당했다가 휴먼컴퓨터에서는 소프트웨어 만들고 하면서 다른 일을 하게 된 셈이다. 내용으로 보면 달라진 것이었지만, 내가 전길남 박사님께 어떤 기술에 대해 깊게 훈련을 받은 건 아니다. 박사과정에서 네가 배워야 할 것은 어떤 작업을 하든지 문제 해결(problem-solving)하는 능력과 방법이라고 배웠던 것이다. SALAB에서 그 System Architecture가 문제해결하려는 것. 그런 능력을 가진 architect를 길러내는 게 목적이지 구체적으로 컴퓨터 네트워킹의 전문가가 되어야 한다는 것은 아니었다.

전길남 박사님의 박사논문 주제도 OR이었다. 산공과에서 하는 optimization.

PCCS 준비

당시 PCCS 준비를 위해 필요한 일들을 모두 분담했는데, 나는 tutorial을 맡았다. 1985년 10월에 행사가 있었는데, 당시 여름에 정철과 내가 미국에 나가게 됐다. 나는 유즈닉스라는 컨퍼런스에 갔는데, 그 목적은 컨퍼런스를 하는 방법을 배우기 위해. 단적으로, BoF 세션을 전박사님 말고는 아무도 해본 적이 없으니까, 어떻게 하는지 내가 보고 와서 이렇게 합디다 하면서 준비했다. 당시 그렇게 외국에 나가서 보고 하는 일은 굉장히 예외적이었다.

하지만 내가 PCCS의 의미를 알고 한 것은 아니다. 박사과정 학생이 알면 얼마나 알았겠나, 모르고 그냥 한 것이다. 돌이켜 보면, PCCS가 아이네트 컨퍼런스의 전신이었다. 컴퓨터 네트워킹에 대한 컨퍼런스가 없었는데 PCCS가 처음으로 열렸던 것이고, 이후에 INET 컨퍼런스로 이어진 것이다.

80년대 인터넷 관련 일 - 모르면서 했다!

사실 나는 당시에 하는 일이 어떤 의미였는데 이해를 못했다. 실제로 미국에서 인터넷이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본 적이 없었으니까. 그래서 당시 소원 중의 하나가 FTP 한 번 해봤으면 좋겠다는 것이었다. 당시에 이메일 보면 어느 FTP로 가서 다운 받으면 돼 라고 오는데, 우리는 UUCP밖에 안 됐기 때문에 할 수가 없었으니까, 그거 한 번 해봤으면 하는 게 소원이었다. 이메일은 되는데, 자료 다운로드는 안 되는 상황. 지금은 어딘가에 가서 자료 다운 받은 일이 일상인데, 그것을 못했던 것이다.

아이네트의 초기 사업들

아이네트 명칭

인터넷을 바로 떠올릴 수 있는 명칭으로 생각했다. 원래 회사 시작할 때 이 이름으로 하고 싶었는데, 직원들의 아이디어를 모으는 회의를 여러번 해 보아도 이 보다 좋은 이름이 나오지 않았다. 그래서 그냥 아이네트로 정하였다.

핵심 유료 서비스 - 이메일

가장 큰 것은 이메일. PC통신망 끼리 메일을 주고받을 수 없었다. 그게 무슨 이메일인가? 나는 처음부터 이메일은 전세계 누구와도 주고받을 수 있는 것으로 배웠는데, 하이텔은 하이텔끼리만 해야하고, 나우누리하고는 못 주고 받는 것, 이게 무슨 이메일이야! 그래서 나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어필할 수 있다고 봤고, 실제로 그게 먹혔다고 본다. 시작할 당시에는 www 개념이 없었고.

그리고 미국에서 되니까. 사람들이 돈내고 쓰는 사례가 있으니까 그것으로 판단한 것이다.

하여간 당시에 나는 PC통신에서의 이메일은 이메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일본에서 통신사가 다르면 문자를 못 주고 받았다. 당시에 딱 그런 상황이었다.

당시 일반인들의 인식은 분명하지 않았겠다. 안 써봤으니까...

새로운 아이디어와 자율적 실행

우리 팀 구성원이 좋았다. 실장급의 5~6명으로 된 핵심 멤버가 있었고, 새로운 아이디어가 나오면 각자 알아서 만들어내는 것이다. 웹진 이미지를 만들고 있는 것도 자세히 몰랐다. 한다고 하길래 해봐라 했는데, 나중에 보니까 이거 뭐야! 하면서 놀라고.

그리고 동영상 생중계를 한 것도, 호텔에서 행사를 생중계하려면 T1 라인을 미리 깔아놔야 하는데, 그게 한 달 걸린다. 최소로 해서 2주 걸렸다. 우리는 KT의 주요 고객사였기 때문에 - 98년 기준으로 KT의 billing 고객사 중 top5였다, 그 만큼 많은 회선을 썼으니까. 하여간 이런 컨퍼런스 (최초) 생중계도 직원들이 아이디어를 내서 하게 된 것이었다.

주요 업무

내가 주로 한 것은, 아까 말한 KINX, 그리고 전국 백본망을 자체적으로 갖출 거냐 말거냐라든가, 그리고 해외 라인에 어느 선으로 업그레이드할 거냐의 문제. 우리가 98년에 해외로 45메가 백본 회선을 처음 깔았는데, KT, 데이콤과 비슷한 시기에 한 건데, 그게 한 달 회선 비용만 6억이었다. 당시 매출이 80억이었는데. 나는 이런 거 작업하고, 개별 서비스는 팀에서 알아서 다 했던 거다.

ISP 차원에서 콘텐트 사업의 필요성

웹진 이미지 같은 사업을 할 필요성이 있었던 게, 95년에 우리 나름 대로 야후같은 형태의 디렉토리 서비스를 만들었다. 그게 아이월드였다. iworld.net - 이게 95년 6월에 나온 것으로 기억한다. 웹서비스가 막 생기는데, 당시 검색이라는 개념도 없고, 사람들이 막 찾아오는 데 뭔가 제공하기 위해서 디렉토리 서비스를 만든 것이다.

아이월드가 당시 만든 히트상품 중의 하나가 음악 스트리밍이었다. 당시 SBS 가요톱텐이 있었는데, 당시 리얼네트웍스에서 하는 스트리밍 기술을 가지고 다이얼업 모뎀으로 접속해서 웹에서 음악을 스트리밍으로 들을 수 있게 한 것을 우리가 처음 서비스한 것이다. 그게 95년 10월 말 정도였다. 그 즈음에 웹 관련해서 니즈가 많이 생기는데 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우리가 여러 가지 실험을 한 것이고, 웹진도 그런 차원이었다. 나에게는 웹진보다는 아이월드 디렉토리 서비스가 더 크게 남아 있다.

콘텐츠 사업의 수익모델 부재

아이월드팀이 따로 있었다. 개인홈페이지 만들수 있는 기능도 있었고, 뉴스 서비스, 아까 말한 인기가요 등의 엔터테인먼트가 있었고, 또 게임도 붙였고. 그런 식으로 이것저것 놀거리를 만들자고 했다. 당시 포털 개념은 없었지만. 그런데 이런 것을 독자적인 비지니스로 가져갈 생각은 하지 못했다. 우리의 주 사업이 접속 서비스고 그것으로 80억 정도 나오는데, 이 쪽은 매출이 없는 거다. 당시 수익모델도 없고, 검색광고 개념도 없고, 기껏해야 배너광고인데 많아야 몇 백만원 정도. 그래서 이 부분을 별로 크게 생각하지 않았고, 96년부터는 비중을 줄였다. 1997년에는, 우리 회사 서비스에 대한 홍보와 약간의 콘텐트 정도로 가자고 결정했다.

웹 기반 메일 서비스

당시 또 웹 관련해서 개발하는 아이소프트라는 자회사가 있었는데, 95년에 만들었는데, 여기서 제일 먼저 개발한 것이 웹 기반 이메일 서비스였다, 엣오피스(@office). 얼마 전에도 이재웅씨하고 다음을 공동 창업한 다음 CTO 이택경씨를 만났는데, 그 때 얘기를 하면서 아이소프트의 엣 오피스가 당시 다음의 메일 서비스보다 더 잘 만든 것이었다고 말하더라. 우리는 그걸 가지고 한메일 같은 서비스로 할 생각을 못하고, 기업 대상의 그룹웨어 서비스로 판 것이다. B2B 서비스를 한다는 것은 제품만 좋아서 되는 게 아니고 영업이 받쳐 줘야 하는데 그걸 잘 하지 못했고, 이래저래 해봤지만 잘 안 되니까 바뀌고 바뀌고 하면서 끝난 것이다. 다음은 그것을 가지고 그룹웨어로 하다가 핫메일 나온 거 보고 한메일 만들어서 그게 확 떠버린 것이다.

KT, 데이콤하고의 경쟁

하여간 나는 KT, 데이콤하고 싸우면서 접속 서비스를 하는 것이 메인으로 생각했다. 시장에서의 경쟁. 피어링. 공청회 가서 욕도 많이 하고. 서비스는 KT, 데이콤 보다는 훨씬 낫다. 장애가 생길 수밖에 없는데, 그 때 그런 문제를 얼마나 빨리 잘 해결하느냐의 퀄리티를 놓고 볼 때 우리가 KT보다 낫다는 것에 자부심이 있었다.

초기 가입한 이용자

PC통신 사용자들이 거의 대부분이었고, 95년 이후 PPP 서비스한 이후에, 동시에 쓴 것 같다.

뭔가 새로운 것을 제일 먼저 써보려고 하는 사람들. 96년에 PPP 서비스가 월 6만원이었는데도...

아이네트의 기술자

당시 인력이 없었다. 삼보컴퓨터 근무한 엔지니어, 카이스트, 박태하 등 말고는 경험이 없었다. 그러니까 모두 데려와서 가르치면서 한 것이다. 그 때 훈련받으면서 한 사람들 중에 - 네이버의 시스템 서버 운영쪽에 아이네트에서 일하던 인력이 많이 가있다.

그래서 사실, 시스템 쪽 경험이 있는 사람들 - 카이스트에서 있었으니까 초기에 우리가 추진력을 가지고 한 것이다.

당시 KT, 데이콤도 그렇게 했을 것이고. KT는 송주영 박사가 핵심이었고, 데이콤은 미국인 존 밀번(John Milburn)이 포항공대 시스템 관리자 하다가 데이콤으로 갔다.

아이네트 사업 정리 - 98년에 PSInet에 매각

브로드밴드로 넘어가면서 망하는 구조였는데, 적절한 때에 발을 뺀 것은 아주 잘 한 일이었다.

PSInet에 매각 - 언론에는 IMF 상황에서 외자유치를 한 것이라고 나오기도 했는데, 이는 순전히 재무적인 이유 때문에 결정한 것이다.

이건 뒷 얘기인데, 1996년 11월, 12월 쯤에 UUNet에서 투자 제안을 받았다. 2천만 불 투자할께 51%의 지분을 다오. 최대 주주인 삼보컴퓨터에 가서 상의했는데, 반대했다. 2천만 불 받으면 할 거 많은데... 그리고 97년 초에 IMF 터졌고, 사업은 큰 타격은 없었는데, 환율 문제가 컸다. 당시 800원에서 2000원으로 세 배가 뛰었다. 45메가 백본 회선 연결 비용 6억 중에 절반이 달러였는데, 매달 결제해야 하는 요금이 30 몇 만 불이었는고 그게 3배로 뛴 셈이다. 하루 아침에 6억의 추가 비용이 늘어난 것이다.

그때 결국, 자금이 더 필요하다 해서 삼보컴퓨터에 말했는데, 삼보컴퓨터 자체도 어려운 상황이 되어서 자구책을 찾아보라 하길래, 그럼 회사를 판다, 동의해줄래? 하고, 동의를 받았다. 97년 11월이었고, 그 때부터 인수할 수 있는 회사들을 찾았는데, 투자 제안했던 UUnet, 그리고 PSInet, 홍콩텔레콤 - 지금은 PCCW 으로 이름 바뀐 - , 그리고 일본의 KDDI, 그리고 또 하나 더. 다 접촉을 했는데, 결국 PSInet로 결정됐다. 전략적으로 매각한 것이 아니라 재무적인 문제로 한 것인데, 결과적으로 좋은 전략이 된 것이다.

20대에 대한 생각

일단 불쌍하다. 어느 세대든 어려운 것은 있는데. 우리가 직장가고 할 때는 고속성장 시기, 어떤 문제가 생겨도 그냥 넘어가고. 그러다가 성장 모멘텀을 잃어버리면서 그 때까지의 모든 문제들이 다 드러나게 된다. 5년이나 10년정도 그렇게 된 듯하다. 기회가 없어지는 것. 대학생들이 너무 많기도 하다. 진학율이 너무 높아서...

그 런데 지금 세대는 한 번도 빈곤을 체험해보지 않았다. 빈곤 때문에 생기는 절박함, 그래서 절박하게 일을 해야 하는 것에 대한 경험이 없는 것이다. 30~40년 동안 경제를 주도했던, 베이비부머 세대는 그런 경험 속에서, 좋아하든 안하든 일했는데, 지금 세대는 내가 왜 그런 일을 해야 해 하는 경우도 있다. 90년대부터 면접을 봐 왔는데, 많이 달라졌다. 반은 포기해서 그런 거 같다.

한편으로 불쌍, 또 한편은 너무 약한 것 같고...

2012.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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