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오익균

Interviewee: 오익균

Interviewers: 안정배, 전응휘

2012.11.9

KAIST 도곡캠퍼스

SDN과 UNIX

SDN은 UNIX 시스템과 뗼 수 없는 관계다. 전길남 박사님과 손덕주 박사가 1983년에 만든 강의자료에는 UNIX를 기반으로 하는 SDN 프로토콜 및 운영원리에 대해 잘 설명되어 있다. 1983년 당시 SDN은 5개의 노드가 상호연결되어 있었다. SDN의 시작은 1982년 5월의 KIET와 서울대 사이의 상호연결이지만, 서울대의 경우는 이후 SDN에 주도적으로 참여한 것은 아니고, 프로젝트에 참가한 한 개의 연구실이 참여하는 수준이었다.

컴퓨터 네트워크의 시작은 IBM이나 DEC 등 컴퓨터 제조업체가 갖는 통신네트워크구조를 기반으로 하였으며, 이에 대한 내부기술은 공개되지 않으며, 다만 사용자가 운영할 수 있는 인터페이스만을 제공하였다.

그러나 UNIX는 C언어 기반의 운영체제 소스가 공개되었고, 기본적인 UNIX 통신으로 UUCP(Unix to Unix Copy) 기능이 제공되었으며, 미국 국방망 통신표준인 TCP/IP 프로토콜 사양이 공개되고, UNIX machine에 기본 탑재되면서, UNIX 네트워킹은 막강한 컴퓨터통신 네트워크 구조를 갖게 되었다.

이후, 개방된 컴퓨터통신 구조를 추구하는 국제 사회의 요구에 따라 시작된 ISO/IEC TC97 SC21 위원회의 노력으로 1980년대 후반, TCP/IP를 그대로 수용하는 컴퓨터상호접속규격의 국제표준인 OSI(Open System Interconnection) 7 Layer(계층)가 만들어지게 되었다.

OSI 국제표준 제정을 위한 노력은 영국을 중심으로 이루어졌으며, 세계 강국들은 GOSIP, 즉 정부 OSI 조달규격으로 발표하게 되었는데, 그 당시 한국에서도 행정전산망의 GOSIP이 수립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1990년 무렵, 미국 정부가 주도하는 학술연구 목적의 TCP/IP 망인 NSFNET의 상업적 목적의 이용이 허용되면서, 미국 내에 PSInet, MCInet, Sprintnet 등이, 한국에는 DACOM Internet, Kornet, INET 등 다양한 상용 인터넷들이 구축되고, 서비스가 이뤄지면서 OSI는 더 이상 보급, 개발, 확산되지 않는 국제표준으로만 남게 되었고, TCP/IP는 지금의 글로벌 인터넷으로 보급, 개발, 확산되는 계기가 되었다.

그 이후 WWW이 나와서 또 한 번,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WWW 자체는 멀티미디어와 하이퍼링크를 잘 구현하도록 설계된 시스템인데, 이것이 인터넷(TCP/IP)과 맞물리면서 폭발적 증가가 이루어진 것이다.

X.25

1980년대 초반, 국내에서는 미국과의 전용선 망을 구축하지 못해서 매번 해외전화(dial-up)를 걸어 인터넷에 연결해야 했었는데, 해외통신회선사용료 부담이 만만치 않았다. 게다가 dial-up으로 연결하는 경우는 대역폭의 한계 때문에 File Transfer 등의 기능을 사용하는데 큰 제약이 있었다. 1980년대 미국에서는 각 대학 전산과가 주로 연결된 CSNET이 큰 인기를 끌었는데, CSNET에서 사용하던 망 중 하나가 X.25 데이터통신망이었다. TCP/IP 네트워크는 전용선으로 연결하는 것이 보통이었지만, TCP/IP over X.25라는 프로그램을 통해 X.25망에서도 TCP/IP 네트워크에 접속할 수 있었다. 1984년 데이콤이 X.25 망을 서비스하기 시작하면서, 이를 통해 CSNET에 TCP/IP로 접속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한글 표준

1980년대 한글 사용은 서로다른 표준으로 인해 사용이 불편했다. 표준은 데이터의 양과 속도와 관련된 문제였기 때문에 KAIST SALAB에서 연구를 많이 했다. 네트워크를 위해서는 통일된 표준이 필요했는데, 당시 대부분의 시스템은 2바이트 한글코드를 썼는데, 유일하게 SDN만 n바이트 한글표준을 썼다. 1987년에 한글 완성형 인코딩 표준이 나오면서 그걸 따라 썼다.

PACOMM과 SDN/HANA

1989년 NSF의 PACOOM(Pacific Computer COMmunication Network Project)를 통해 미국과의 전용선을 구축하여 SDN의 해외 연결점을 "하나로" 묶자는 프로젝트가 진행되기 시작했다. 그 결과, 1990년 미국 하와이 대학까지 전용선을 연결할 수 있었다. 이 프로젝트에 한국통신이 주도적으로 국제회선을 지원하였고, 전통적 SDN과 구분하여 SDN/HANA라는 명칭을 사용하게 되었다. 이를 위해 박현제 박사와 한국통신 허문행 국장이 큰 기여를 하였다.

KREN과 KREONet

서울대는 SDN을 통한 CS, NSFNET 등의 연결보다는 일본 동경공과대학을 통한 IBM의 BITNET을 썼다. BITNET은 IBM에서 전세계의 대학 및 연구기관을 지원해주는 네트워크였다. 그러다가 SDN에 참여하던 최양희 박사가 서울대 전산센터장으로 가면서 점차 TCP/IP도 같이 사용하게 되었다.

연구망(KREONet)은 주로 슈퍼컴퓨터 공동 활용과 학술연구정보를 제공하는 용도로 네트워크를 만들었다. SDN Workshop에 참여하게 됨으로써 TCP/IP를 통한 네트워크로 발전하였으며, 변옥환, 임채호, 한근희 등이 주요 KREONet 멤버들이다.

OSI

1980년대 아르파넷을 주축으로 하는 미국의 네트워크가 확대되면서 유럽에서는 견제의 움직임이 있었다. 이때 당시 미국은 dial-up을 사용하는 전국망이 갖춰져 있었다. 유럽도 이것을 만들고 싶어했지만, 미국의 기술이었기 때문에 별도의 방식을 구상하게 된다. 그것이 바로 국제 표준화 작업이다. OSI 모델은 이런 배경 속에서 만들어졌다. 영국에서 먼저 GOSIP(1988)이 등장했고, 나왔고, 곧이어 미국에서도 GOSIP이 만들어졌는데, 국제 표준을 정하는 테이블에서 부담을 느낀 미국에서 TCP/IP를 GOSIP의 대체 프로토콜로 선정해버린 것이다. 만약, 당시 이런 결정이 없었다면 전세계 네트워크가 인터넷이 아니라 OSI 쪽으로 갔을 수도 있을 것이다.

연구자들의 네트워킹

1회 SDN 워크샵이 1986년 2월 과기대 캠퍼스에서 열렸다. 과기대는 그해 3월에 1회 입학생을 받기로 되어 있었는데, 개교를 앞두고 있던 신축건물에서 개최한 것이다. 이후 포항공대에서도 개교 전 건물에서 개최하는 식으로 개최를 했다. 김동규, 박용진, 최양희, 한선영 박사 등이 가장 SDN에 기여를 가장 많이 했고, 안순신, 김동규, 이영희, 부분적으로 강철희 박사 등이 열심히 참여했다.

이후 다른 아시아 국가들과 함께 JWCC를 개최했고, 90년대 들어 WWW가 나온 다음에는 WWW-KR 등으로 이어졌으며, 1993년에 KRNET이 시작되면서 그간의 학술대회가 통합되었다고 할 수 있다.

데이콤 인터넷(ISP)

데이콤 인터넷을 처음 제안한 것은 1993년 경이었다. 상용인터넷의 첫 시작은 KT가 1995년 4월, 사업 계획을 확정지으면서다. 서울 지역에 한정된 전용선 서비스만 운영했으며, 들어간 예산은 40억 정도로 가격은 56Kbps 전용선 기준 월 80만원 수준이었다. 데이콤 인터넷은 그보다 늦게 사업을 확정지었으나, 11월 전국적 서비스를 먼저 하게 되었고, 비용에 있어서도 그보다 저렴하게 시작하였다.

그것은 전용회선 서비스만 하는 것이 아니라, 기존 데이콤에서 운영하던 PC통신인 천리안 사용자들이 인터넷 서비스를 쉽게 이용할 수 있는 서비스를 만든 것이다. 일반 전화(dial-up)로 천리안에 접속한 사용자들이 손쉽게 인터넷에 접속할 수 있게 한 것인데, 이 방식은 INET가 95년에 실시한 SLIP PPP와 비슷한 형태로 구성되었다.

1996년 1~2월 경, 대전 금성초등학교에 INET 전용회선(56Kbps)을 설치하며 국내 최초 인터넷이 보급된 학교가 되었으며, 조선일보에서는 이 모델을 참조하여 전국 초등학교에 인터넷을 연결하는 KIDS Net 캠페인을 주도적으로 추진하게 되었다.

전산원으로 KRNIC을 이전하다

1994년에 KAIST에서 KRNIC을 전산원으로 옮기는 작업이 이루어졌다. 1980년대에는 NIC이라는 표현을 잘 쓰지 않았다. 초기 NIC 기능은 미국에서 IP 주소를 받아다 주는 것이었다. 전길남 박사님이 .kr ccTLD의 contact point였기 때문에, 전 박사님 연구실에서 국내의 IP 요청을 모아 미국에 요청하는 방식이었다. 1990년대 초반, InterNIC(1993) 및 대륙별 NIC 등이 만들어지면서 KRNIC의 필요성도 제기되었던 것이다. 전길남 박사님이 계시던 KAIST SALAB에 KRNIC이 설치된 것은 1993년이다. 당시 실무를 맡은 분이 서동숙/서남숙??이었다. 당시 데이콤에서 KRNIC 프로젝트 지원을 했다.

당시 KRNIC을 비롯한 Internet 운영상의 기술문제는 SG-INET에서 맡았는데, 국내 IP 할당을 모두 관할하는 KRNIC을 KAIST에서 맡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는 고민이 SG-INET 내에서 공유되었으며, 한국전산원의 이철수 원장께서 국가 차원의 인터넷에 대한 여러가지 제안과 함께 KRNIC의 이전 계획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KIX

전산원의 KRNIC 운영과 동시에 추진한 것이 KIX였다. KIX 설치 전에는 서로 다른 ISP 사이에 데이터 교환 시 외국을 경유해야 했다. 이 내용이 언론에 공개되었는데, 그 기사를 보고서야 정통부가 관심을 가졌다. IX를 위한 하드웨어는 전산원에 서버를 하나 설치해서 각 ISP를 T1으로 연결하게 되었다.

전산원 KIX는 점차 발전되어, 데이콤 망을 사용하는 다양한 ISP 리셀러들이 생겨 데이콤 내에 IX의 필요성이 생겨 DIX가 만들어지고, KT도 같은 식으로 KT-IX가 만들어져 운영되었다. 이후 98년에는 중소 ISP들이 따로 KINX를 구성했다. 이렇게 망사업자들이 자체적으로 IX를 운영하는 방식으로 확대되면서, 이후에는 개별 ISP 사이에 직접 각각 연결되는 방식으로 변모하였다.

1996년부터 정통부에 인터넷정책과가 만들어지면서 인터넷 정책과 운영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2013.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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