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권도균

최종수정일: 2013.5.28

작성자: 안정배

인터뷰 대상: 권도균

질문자: 안정배

일시: 2013.3.27 15:00~16:30

Via Skype

첫 WWW의 경험과 WWW-KR 모임의 시작

1993년 10월에 데이콤에 근무하다가 데이콤 연구소가 대전에 이전 할 때(1993년 11월), 연구소 소속으로 대전으로 옮겼다. 이 시기에 막 웹이 나와서 데이콤 연구소 오자마자 http 1.0의 GUI 브라우져인 Mosaic으로 볼 수 있었다. 이때가 첫 WWW 사용이었다. 서울에서 개최된 KRNET '94 BoF 모임에서 웹에 관심있는 사람들이 모였는데, 이 때 참석했던 연구원들 여러 명이 대전 소재 연구소에 있었기 때문에 대전에서 모임을 가졌다.

당시 나는 텍스트로만 서비스하던 PC통신 천리안 서비스를 멀티미디어로 서비스할 수 있는 방법을 연구하는 멀티미디어 연구팀 소속이었다. 당시는 인터넷은 잘 몰랐지만, PC통신 환경 하에서 어떻게 하면 멀티미디어 서비스를 할 수 있을까 연구를 하던 중에 WWW를 만났기 때문에 보자마자 "이거다" 하는 느낌이 왔다. 그때부터 WWW에 빠져서, 집에 와서도 아내에게 새벽까지 설명하고, 늦은 밤에 연구소로 아내를 데려와서 Mosaic에서 하이퍼링크 기능을 실현해 보여줬던 기억이 있다.

WWW-KR 모임은 KRNET '94 BoF 모임 이후 메일링리스트가 만들어지면서 시작되었다. 김용운이 주도했고, 이호선 등이 메일링리스트에 많은 글을 남겼다. 이 메일링리스트가 Linux 워킹그룹과 더불어 국내에서 가장 컸던 것으로 기억하고, 가장 많은 메일이 오가던 메일링리스트였다.

데이콤에서 첫 전자지불 시스템 개발

WWW-KR 이전에도 여러 워킹 그룹의 메일링리스트에 가입이 되어 있었는데, e-commerce 관련 미국의 메일링리스트에도 메일링리스트가 만들어지던 94년 초부터 가입이 되어 있었다. 많을 때는 하루 100개씩 오던 메일도 follow-up을 했다. 그때부터 전자상거래에 관심이 많았다. 당시 WWW-KR에 참여했던 이강찬 박사 같은 경우는 DBMS를 하면서 검색 쪽에 관심이 있었고, 나는 전자상거래, 전자지불, 그러다 보니 보안까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데이콤에서는 84년부터 X.25 데이터 통신망 서비스를 하고 있었다. 당시만 해도 X.25가 주류라고 할 만큼 중요한 망이었다. 이 망 위에 PC통신 애플리케이션을 띄워 통신 서비스를 제공 했다. 그 때, 나는 TCP/IP 망(전용선 망) 위에서 멀티미디어 서비스를 제공하는 연구를 하고 있었다. 아쉽게도 천리안은 완전한 TCP/IP 베이스로 전환을 오랫동안 하지 않다가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TCP/IP 베이스로 하던 포털들이 이후에 성공을 한 것이다. 예전에 데이콤은 천리안을 운영하면서 CP(Contents Provider)들의 컨텐츠를 받아서 수익금을 나눠주는 일종의 포탈 서비스 기능을 텍스트 베이스로 했다. 당시 데이콤이 천리안 서비스를 할 때, 국내 수백 개의 CP들이 붙어있었는데, 이것이 이후 포탈 서비스에 붙어 정보를 서비스 하게 된 것이다.

개인적으로 95년 말에 회사에 전자지불 프로젝트를 제안했다. 인터넷에서 쇼핑몰을 운영 하려면 어차피 금융인프라가 필요했기 때문에 전자지불이 먼저 필요하겠다 해서 금융결제원과 공동으로 프로젝트를 했다. 그때는 그야말로 단순 연구프로젝트였다. 데이콤 본사는 당시 미국의 사이버캐쉬라는 회사와 조인트 벤처를 설립해서 해외 프로그램을 들여올 계획을 가지고 있었고, 나는 연구소에서 개별적으로 연구프로젝트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1996년에 사이버캐쉬와 데이콤의 계약이 잘 진행되지 않았다. 당시 나는 개별적으로 연구프로젝트를 하며, 국내 2~3개 쇼핑몰에 실험적으로 적용하려고 하는 것들이 계획대로 진행을 하고 있었는데, 본사 사업부서에서 볼 때는 해외 제품 들여오는 것이 자꾸 딜레이 되니까, 일단 내가 개발하던 서비스를 가지고 1996년 11월에 "데이콤 페이 1.0"이라는 이름으로 서비스를 먼저 개시하게 되었다.

당시 우리나라에서 전자지불 서비스를 개발하던 경쟁사가 두세군데 있었다. 가장 큰 회사는 KICC라는 신용카드 VAN(결제대행) 사업자였다. 오프라인 신용카드 결제 회사였기 때문에 온라인결제에도 관심이 있어서 개발중이었고, 또 하나는 삼보컴퓨터의 자회사였던 메타랜드였다. 메타랜드는 자기 자신이 쇼핑몰도 운영하면서 다른 쇼핑몰들과 함께 전자지불도 개발중이었다. 이것이 95년의 전자지불 개발 환경이었다.

인터넷뱅킹과 이니텍 창업

당시 데이콤은 천리안을 중심으로 하는 데이터통신회사였는데, 시외전화 서비스를 시작하면서 통신회사로 변신하는 상황이었다. 나는 컴퓨터 전공이었기 때문에 고민이 되었다. 그때 나이 35살이었는데, 더 늦기 전에 내가 가진 기술로 사업을 해봐야 후회가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전자지불 서비스를 개발하면서 비즈니스 모델도 가지고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전자결제의 핵심은 암호기술인데, 미국의 암호제품은 수출금지법 때문에 개방이 되지 않았다. 그래서 내가 가진 노하우가 사업성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걸 계기로 97년에 이니텍을 창업했다. 이니텍은 암호인증 기술을 가지고 인터넷 보안 서비스를 제공하는 회사였다. 이니텍은 이후 2001년에 코스닥에 등록했다.

지금은 인터넷 컨텐츠가 많아서 다양한 용도로 인터넷을 사용하지만, 처음에 사람들로 하여금 인터넷을 많이 쓰게 한 것은 인터넷뱅킹과 인터넷 증권트레이딩이라고 생각한다. 다행이 국민은행, 신한은행이 99년부터 인터넷뱅킹을 시작했다. 인터넷 뱅킹은 처음부터 공개키 암호기술을 기반으로 하는 보안 시스템을 탑재해 시작 했다.

국내에서 인터넷 뱅킹이 비교적 빨리 시작됐고, 비교적 빨리 다수의 사람들이 많이 사용하게 되면서 일반인들이 인터넷으로 금융활동을 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또한, 보안시스템을 개발하던 회사들에게도 도움이 되었다. 99년에 인터넷 뱅킹 서비스를 시작했으니까, 보안 제품은 97, 98년부터 판매되기 시작한 것이다.

전자지불 서비스 개발과 이니시스 창업

이니텍을 창업한 동시에 그동안 개발하던 전자지불 서비스는 97년에 오픈했다. 당시 한솔 그룹에서 굉장히 일찍부터 쇼핑몰을 개발중이었고, 여러 업체에서 회사의 홈페이지를 구축하면서 전자지불 시스템을 만들어달라는 요청이 많았다. 이를 계기로 시스템을 개발해서 97년에 오픈을 하고, 98년에 투자자의 제안으로 전자지불 회사를 독립해서 주식회사 이니시스를 창업하게 된 것이다.

국내 최초의 인터넷 쇼핑몰은 강원도청의 강원도특산물쇼핑몰이었다. 97년 11~12월에 첫 서비스를 했다. 당시는 신용카드 유효기간과 정보를 넣어서 결제하는 방식이었다. 이 방식은 당시 국제표준과는 다른 방식이었다. 당시 국제표준은 VISA와 MASTER카드사가 IBM, HP 등과 함께 만든 SET라는 프로토콜 기반 방식이었다. 전자지갑이 바로 이 방식에 들어가는 것이다. 메타랜드나 KCP 등이 이 표준 서비스를 도입했기 때문에 이니시스는 이들 세계적인 브랜드들의 프로토콜과 경쟁을 시작해야 했다. 약 3년 간 SET 진영과 이니시스가 경쟁을 했다. 완전히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이었다. 메타랜드는 자본금 40억의 회사였고, KCC는 마스터카드사와 국내 신용카드 회사 5개가 공동으로 출자해서 만든 기업이었던 반면, 이니시스는 개인이 만든 자본금 1억짜리 벤처였다.

다행이도 SET 진영이 개발한 소프트웨어는 덩치가 커서 현실적으로 사용하기 어려웠다. 심지어 삼보컴퓨터 회사가 PC를 온라인으로 팔 수 있는 PC 쇼핑몰을 만들었는데, 이니시스에 연락이 와서 전자지불 시스템을 달아달라고 할 정도였다. 삼보컴퓨터는 경쟁 전자지불회사인 메타랜드의 모회사이기 때문에 처음에는 정보를 빼가려고 하는 줄로 오해하고 대응을 안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자회사인 메타랜드가 만든 전자지불 시스템을 연동 할 수 없어서 우리 서비스를 찾은 것이었다. 우리 제품이 고객의 니즈를 잘 맞추었던 것이다. 이렇게 경쟁에서 살아남았다.

이후, 롯데쇼핑몰 등 국내의 굵직굵직한 쇼핑몰들이 개발해 서비스를 오픈하면서 이니시스 전자지불 시스템을 장착했다. 2000년에는 이니시스의 시장점유율이 70%까지 갔다. 이 때부터 인터넷쇼핑몰을 통해 실제로 물건을 팔고, 결제를 하는 체제가 정착되었다. 98년 초고속인터넷이 등장하면서 인터넷 쇼핑몰이 크게 성장했다.

처음 서비스를 시작할 때는 초고속 인터넷의 등장 전이라 일반인들의 인터넷 환경은 dial-up이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당시 쇼핑몰들은 이를 고려해 작은 이미지 중심으로 쇼핑몰을 구성했기 때문에 낮은 대역폭 dial-up 환경에서도 전자결제 시스템을 사용하는데 충분했다.

참고로 당시 초기에 주로 쓰이던 모뎀이 2400bps였는데, 지금은 상상하기 힘든 속도지만 2400bps 모뎀이 처음 나왔을 때는 혁명이었다. 그러다가 네오위즈에서 원클릭 서비스를 출시하면서 사용자들이 한층 편리하게 인터넷을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네오위즈에서 만든 원클릭 서비스는 PPP 서비스였는데, 망은 dial-up이나 X.25를 썼지만, 각 컴퓨터(end point)에서는 TCP/IP처럼 사용하게 한 것이다. 전용선을 설치하지 않아도 인터넷을 쉽게 사용할 수 있게 되었으니 사람들이 열광할 수 밖에 없었다. 이에 앞서 INET도 94년에 상용인터넷 서비스를 시작했고, 95년에는 dial-up으로 접속한 천리안 사용자들에게 인터넷을 사용할 수 있게 하는 PPP 서비스를 해서 큰 히트를 치기도 했다.

인터넷 쇼핑의 마중물, 아래아한글 815버전

97년, 강원도청 쇼핑몰을 처음 만들어놓았을 때 첫달 주문이 3건이었다. 그 중의 두 건은 도청 공무원이 테스트를 한 것이고, 실제로는한 달에 1~2건의 주문이 일어나는 정도였다. 쇼핑몰도 있었고, 전자지불 서비스도 했지만 개점휴업상태였던 것이다.

그러다가 전기를 마련한 사건이 바로 아래아한글 815버전의 인터넷 판매였다. 98년에 한글과컴퓨터가 아래아한글 815버전을 만들어서 이것을 1만 5천원에 인터넷으로 팔기로 한 것이다. 당시 아래아한글이 상당히 비쌌는데, MS 워드의 지배에서 독립한다는 의미로 8월 15일부터 인터넷으로 판매하는 서비스를 준비한 것이다. 그 때 네띠앙 대표를 겸하고 있던 이찬진 대표가 굉장한 얼래어댑터 기술자여서(물론 지금도 여전하시지만) 솔라리스 X86 위에 Sun OS를 올려서 만든 워크스테이션을 가지고 쇼핑몰을 만들었다. 그때까지 우리 엔지니어들은 그 기종을 사용해 본적이 없어서 고생을 많이 했다. 우여곡절 끝에 그 워크스테이션에 이니시스 전자지불 서비스를 연동해서 1998년 8월 15일에 쇼핑몰을 오픈을 했다.

결과는 대박이었다. 오픈 후 첫날 하루 주문이 3000건의 주문이 발생했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때는 사람들이 인터넷으로 물건을 사는 행동을 역사 이래 한번도 해 본적이 없었기 때문에 두려워서 엄두도 못 내는 시대였다. 당시 외국 통계 중에 인터넷으로 구매를 한번이라도 해 본 사람은 계속 인터넷으로 구매를 하는 확률이 월등히 높다는 내용이 있었다. 처음 인터넷 결제를 하고 쇼핑하는 경험에서 문제가 없으면 편한 인터넷 상거래를 계속 사용하게 된다는 것이었다. 한글 815버전이 아마 수 십만 장이 팔렸을 것이다. 이 사건을 통해 대한민국의 일반인들이 첫번째 인터넷 쇼핑 경험을 하게 된 것이다. 이때 아래한글 815버전을 인터넷으로 처음 쇼핑했던 몇 십 만 명이 이후 오픈한 인터넷 쇼핑몰에서 물건을 계속 사게 된 사람들이 된 것이다. 우리나라 인터넷 쇼핑사에서 마중물 같은 사건이었다. 당시 다른 전자결제서비스도 하루 2~3건 처리에 불과했는데, 이니시스만이 하루에 수천 건을 경험했다.

전자결제 시스템의 전환

VISA, MASTER사가 제안해 국제 표준이라고 불리웠던 SET 프로토콜 전자지불 방식은 우리나라에서만 경쟁에서 뒤진 것이 아니라 전세계에서 모두 뒤졌다. 그래서 SET보다 훨씬 가벼운 웹브라우져 플러그인 기반의 "안심클릭"(3-D Secure) 서비스를 가지고 나왔다. 이것이 바로 지금 우리가 인터넷 결제를 할 때 사용하는 방식이다. SET 프로토콜이 굉장히 무거웠기 때문에 브라우져에 붙여서 사용할 수 있게 만든 것이었다. 비자와 마스터카드사는 이 방식을 사용하기로 국내 모든 카드사들과 협의가 거의 완료 되었다. SET보다 보안성도 좋으면서 가볍고 편리한 "안심클릭" 방식을 만들었으며, 모든 전자결제 방식이 이 방식에 이용된 보안성을 탑재하도록 모든 카드사, 정부 기관과도 협의가 다 완료되었다는 이야기를 1999년말 한 카드사 관계자로부터 들었다. 국내 인터넷 쇼핑몰, 전자지불 회사들과는 협의가 전혀 없이 순전히 밀실에서 해외 카드 브랜드사의 전략적 접근에 의해 국내 인터넷지불의 독점이 이루어지려는 찰나였다.

이 이야기를 듣고 부랴부랴 "안심클릭"에 대응하면서 보안성이 좋은 "안전결제" 서비스를 새로이 개발해서 BC카드를 찾아갔다. 모든 카드사가 해외 카드브랜드의 하나의 서비스에 종속되면 나중에 VISA, MASTER가 로열티를 요구할 때 무방비가 될 수도 있다고 설득했다. BC카드가 상황을 이해하고, 국민카드사와 함께 2000년도에 "안심결제"(ISP) 서비스를 시작하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2001년에 전자결제 시장이 양분되었고, 그 때부터 플러그인 방식의 전자결제시스템이 정착되었다.

플러그인 방식의 전자지불 인프라가 현재로서는 자연스럽지 않은 서비스로 인정받지만, 당시 브랜드도 없는 작은 벤쳐기업이었던 이니시스로서는 국내 신용카드사와 정부기관들을 설득하기위해서는 VISA, MASTER가 추진하는 방식을 완전히 뒤엎을 수는 없었던 것이다. 이후, BC카드와 함께 VP라는 회사를 만들어 지금까지 이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이 과정을 거치고 2002년 11월에 이니시스가 코스닥에 상장하면서, 그 이후로 여러 회사가 상장해서 우리나라에 인터넷 전자지불분야가 하나의 산업군으로 자리 잡게 된 것이다. 만일 해외 카드브랜드였던 VISA, MASTER카드사가 90년대 중후반에 추진했던 SET프로토콜과 2000년초에 추진했던 안심클릭등이 국내에서 독점적으로 받아 들여졌다면 국내 전자지불 분야의 산업이라는 것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또 이런 독점적 지위를 이용해 국내 전자상거래 시장에서 상당한 로열티가 해외로 유출되면서 국내 전자상거래 산업에도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예상해 볼 수 있다.

초기 벤쳐와 벤처 붐때 창업한 벤쳐의 차이

이니텍은 97년에 창업했기 때문에 초기에 2000년 닷컴 붐의 혜택을 받지 못했다. 심지어 창업 후 1년 만에 IMF를 맞아 위기를 겪기도 했다. 2000년초 닷컴 붐 때 회사들이 많이 만들어졌다. 사업계획서만 잘 쓰고 유명인사, 장관 출신 인사를 고문으로 두면 수십억 펀딩 받는 일이 다반사였다. 이렇게 모인 돈은 모두 친구, 친지 등 개인 돈이었다. 당시에는 벤처 투자를 안하면 뒤쳐진다는 시대였기 때문에 회사들이 아주 많이 만들어졌다. 그러다가 2~3년사이에 많은 회사들이 소리도 없이 사라졌다. 한 번은 명함정리를 하니 CEO 명함만 3,000개가 나왔다. 그 정도로 회사가 많이 만들어지고, 많이 없어졌다. 핵심 비즈니스 모델이 없으면 지속가능 할 수가 없는 것이었다. 벤처 붐은 2001년 말쯤 끝났다. 이후 알맹이 있는 회사들만 남아 인터넷 비즈니스를 이어갔다.

닷컴 버블 이전에 만들어진 벤처는 누구도 투자하려고 하지 않았던 시기에 만들어진 회사들이었기 때문에 자기 분야에 대한 확신이 있는 사람만 벤처를 했다. 그래서 어려움이 있어도 이길 확신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닷컴 붐 때는 이런 확신이 없어도 자금조달이 쉬웠고 사업을 쉽게 할 수 있었기 때문에 사업에 확신이 강하지 않았던 사람들도 많이 사업을 시작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었던 것 같다.

WWW 기술의 토착화 노력이 만든 국내 인터넷 비즈니스

<가자, 웹의 세계로!>를 집필하기 전의 일이다. 누군가 외국에서 WWW 매뉴얼을 가져왔는데, 이것을 복사하자는 이야기가 WWW-KR 메일링리스트에서 많이 오걸 때 였다. 이걸 보고 어떤 멤버 한 사람이 우리가 불법복제를 하면 되느냐고 일침을 가한 일이 있다. 그 사건이 우리나라 웹의 활성화에 중요한 사건이라고 생각한다. 그 사건이 없었다면, <가자, 웹의 세계로!>를 집필하지도 않았을 것이고, 항상 외국의 자료를 번역하거나 복사하는 수동적인 모방을 계속했을 가능성이 있다. 그런데 이 사건을 계기로 WWW 기술의 주도적인 토착화(localization)가 일어났다. 나는 책의 보안 부분과 전자지불 분야를 집필했는데, 이 원고를 쓰면서 우리나라 환경에서 보안 기술을 어떻게 할 것인가 정리가 많이 되었다. 나 뿐 아니라 집필자들이 우리가 직접 이런 글을 쓸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졌다.

책의 집필 뿐 아니라 전국을 돌며 WWW 워크샵도 개최했다. 이 때 워크샵을 들었고, 이때 만났던 사람들이 이후 인터넷 회사들의 중요한 기술적 자산이 되었다. 이 사건이 현재 유수의 인터넷 회사들의 창업자이자 경영자들을 만들었을 뿐 아니라, 그 회사에서 핵심적인 일을 하는 사람까지 여기서 만들어진 것이다. 회사 뿐 아니라 그 고객들에게 인터넷이라는 것이 즐거운 것이라는 것을 알게 해 준 것이다. WWW-KR을 불어줬기 때문에 인터넷 회사들의 바람개비가 돌아갈 수 있었던 것이다.

2013.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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