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김병학

Interviewee: 김병학

Interviewers: 고양우, 안정배, 조동원

2012.1.26 19:00~21:00

강남역 토즈

과학원 시절

전길남 박사님 랩에서 석사과정하고, 1993년 겨울에 전박사님이 인공지능연구센터 TO로 박사과정에 진학하라고 해서 인공지능 연구센터 TO로 전박사님 랩 박사 과정에 진학했다. (소장은 조정완 박사님이었고, 전박사님은 인공지능연구센터(cair)의 참여교수였다.)

인공지능연구센터(cair)는 전산학과의 입장에서 보면 별도로 기계와 장비를 운영했는데, 내가 그것들을 관리하는 일까지 하게 됐다. 학생이면서 직원으로 일하는 구조였다.

웹을 처음 시작한 배경

우리 랩에 당시 박태하 박사님이 정보시스템(information system) 관련해서 논문을 준비하고 있었고, 그것을보면서 나도 한 번 해봐야지 했던 것이 시작이었다.

당시 고퍼(텍스트 기반)가 제일 유명했고, 웨이즈(WAIS 검색 인터페이스를 이용해서 정보 navigation하는 시스템, 텍스트 기반), 그리고 웹도 서서히 퍼지고 있었다. 그 때 모자이크가 처음 나왔는데, 설치해서 보니까 고퍼보다 훨씬 좋았다. 지금보면 아무것도 아니지만, 그림도 구현이 됐다. 이런게 된단 말야!

웹서버를 설치하고 코딩을 배우며 이것저것 시도했다. 그 당시 애플의 맥에 하이퍼카드가 되는 브라우저가 있었고, 그것은 코딩할 필요도 없었다.

웹사이트 구축

무척 재밌다고 생각했고, 웹사이트를 직접 만들어 써보려고 했다. 근데 웹사이트를 만들려고 보니 콘텐츠가 하나도 없었다. 카이스트나 인공지능연구센터를 영어로 소개할 수도 없고. 그 때 한국관광공사에서 나온 ‘Welcome to Korea’라는 책자의 한글판을 보게 됐고 그것의 영문판이 있을 거다 생각해서 관광공사에 전화해 서 구했다. 모두 스캔을 해 광학문자인식(OCR)을 통해 글을 추출하고 이미지도 캡춰해서 그 책 전체를 올렸다. ‘Welcome to Korea’라는 페이지를 만들고, 영문으로 된 카이스트 소개나 인공지능연구센터 소개문을 한 두 장 구할 수 있어서 그것도 올렸다. 이제 공지(announce)할 수 있겠다 생각했다.

당시 월드와이드웹 컨소시엄(W3C)하고 NCSA라는 모자이크 만든 곳에서 웹의 디렉토리를 운영하고 있었 는데, W3C 디렉토리가 가장 큰 것이어서 우선 거기에 등록을 했다. 한국에 이런 페이지가 있다고. 가끔 메일을 받았는데, 한 번은 외국에 있는 한국 사람이 이메일을 보내서, 잘못된 문자를 지적해 주었다. 광학문자인식(OCR)을 통해 문자를 올린 것이니까 한국의 원(₩)자가 다 깨진 채로 있었기 때문이다. 또 한 번 은 미국 사람이 안동소주를 사달라고 메일을 보냈다. 그때는 안동소주가 있는지도 몰랐는데.

그렇게 웹사이트를 처음 만들어 본 것은 순전히 개인적인 차원에서 한 일이다. 선배가 정보시스템에 대해 연구하면서 웹을 알게된 것이고, 보니까 재밌고 사람들이 봐도 좋아할것 같아서, 그리고 한국에 대한 소개페이지를 만들면 의미있을 것같아서 만든 것이다.

세네 달 작업을 했는데, 그게 1993년 겨울이다. 디렉토리 등록은 1994년 1, 2월이었을 것이다. 당시 전세계적으로 웹사이트가 아마도 수백 개가 채 안 되던 시기였는데, 아시아 분류가 제일 아래에 있었 고(아시아 분류였는지 기타였는지는 기억이 정확하지 않지만),하나 있었던 게 한국이었다. archive.org에서 cair.kaist 의 초기 웹페이지들을 볼 수 있다.

연구소의 웹사이트였지만, 내가 개인적인 차원에서 만들고 운영한 것이었다. 교수님들이 알게 된 것은 나중이었다. 처음에는 cair.kaist로도 등록되었지만, www.kaist(DNS alias)로도 등록되어 있었기 때문에 사실상 학교 전체 웹사이트이기도 했던 것이다(사실 이에 접속하는 외부에서는 전혀 모르니까...). 나중에 웹에 관심이 커지면서 www.kaist 는 학교에서 관리했다.

웹코리아(webkr) - 웹 연구 모임 활동

1994년에 몇 명이 모여 코엑스에서 웹코리아 만드는 작업을 시작했다. 이강찬(ETRI, 당시 충남대), 김용운 (ETRI), 권도균(이니텍, 당시 데이콤) 등 10여 명이 모여서 웹을 국내에 확산시키는 일을 하자 했다.

“월드와이드웹”(www)이라는 워크숍을 열었다. 1995년이었던 것 같은데 충남대에서 첫 “월드와이드웹 ”(www) 워크숍을 열었고 4~500여 명정도 참석한 것 같다. 웹이 본격적으로 관심을 받은 시기였으니까. 사람 들이 많이 오니까 책도 쓰자 해서 [가자! 웹의 세계로]라는 책도 만들었다.

워크숍 준비, 후원 조직하는일 등 모두 자발적으로 모인 사람들이 다 한것이다. 그때 이강찬씨가 충남대 박사과정이었는데, 1회 때 그런 일들을 도맡아 했다. 2회 워크숍은 중앙일보랑 같이 해서 호암아트홀에서 했다.

그런 식의 모임과 활동이 특이한 것이었다. 웹이 재밌고 신선하다고 생각했고, 이렇게 좋은 것을 우리만 쓰 지 말고 여러 사람들에게 알리자, 사람들에게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한 일들이었다. 수익을 얻기 위 한 일은 하나도 없었다. 충남대에서 했을 때, 참가비가 1만원이었는데, 책자 나눠 주니까 남는 게 없었다. 프리 (free)로 일하고, 기여한다(contribute)고 했던 것이다. 전혀 욕심도 없었고, 순수하게 했다.

웹코리아(webkr) 형성 과정

1995년경인데, 나의 경우 처음에 웹에 대한 모임을 하자는 메일을 받았다. 당시 국내 웹사이트들이 동국대 사이트 등 10여 개 있었고, 그 웹마스터들에게 그런 메일이 보내진 것인데, 보낸 사람이 누군였는지 기억이 안 난다. 당시 김용운씨는 ETRI에 있으면서 웹 표준화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고, 권도균씨는 데이콤에 있으면서 뜨고 있는 분야에 관심을 가진 것이었고... 한 10여 명이 처음에 모였고, 모임이름을 “웹코리아”(webkr)로 지었다.

메일링리스트, FTP 서버, 파일공유

이 모임을 위한 메일링 리스트를 내가 만들어 운영했다. Sun sparc 490이라는 대형 컴퓨터에 설치된 cair.kaist에 두었는데, 거기에 애초에 메일링 서버를 설치해서 연구센터에 참여하시는 연구 교수님들이 커뮤 니케이션할 수 있도록 인프라를 구축했다. 여러 메일링리스트가 있었고 가장 대표적인 것이 한글이었다. 한글 관련 소프트웨어를 어떻게 구하냐, 어떻게 까냐 등을 논의했다. 그리고 그 중의 하나로 웹코리아(webkr) 메일 링리스트를 두었고(webforum.cair.kaist), 1995-6년에 전국적으로 2~3천 명이 가입돼 있었다. 메일링리스트 관리를 위한 소프트웨어도 수 차례 업그레이드를 했다.

cair.archive는 ftp.kaist 라고 해서 한글하고 웹 관련 소프트웨어들을 모두 올려 둔 곳이었다. 처음에 가장 큰 문제가 모자이크나 hotjava 등에서 한글이 안 보이는 문제였다. 그래서 패치 만들어 저 서버에 올리고 공유 하는 일이 많았다. 메일링리스트(webforum.cair.kaist)에서 메일이 오갈 때, 어떤 사람이 패치를 만들어 ftp.kaist에 올리고 나서 ‘가져가서 쓰세요’ 알려주곤하는 식이었다.

ftp.kaist를 운영할 때 거기에 incoming이라는 디렉토리가 있었고, 이는 계정이 없어도 누구나 접근해 파일을 올릴 수 있고 파일공유를 할 수 있는 곳이었다.

내가 한 달에 한 번씩 디렉토리 정리를 하는데, 거기에 음란물이 올라온 경우도 많았다. 경찰서에서 전화가 온 적도 있었다, 빨리 지우라고. 누군가 잡혔는데, 어디서 구했나 보니까 ftp라는 곳에서 받았다고 하면서 알았던 모양이다.

그러나 대체로 FTP 서버는 웹 관련한 새로운 패치나 여러 프로그램을 만들면 여기에 올리는 식으로 이용했다. 최우형씨가 한글 이메일 관련 작업을 많이 했는데, 만든 거 있으면 거기에 올리고 공유했다. IS2022-KR 표준을 만들기도 하고, 한글 메일 패치하는 방법도 올리고.

저작권 문제... 별 이슈가 없었다. 내 주위에서는. 대부분이 다들 GNU GPL을 표방했다. 당시는 유명했던 게 GNU와 BSD 라이선스 밖에 없었고, 대부분이 GNU 라이선스가 붙어 있었다.

cair.archive가 4기가 정도되었다. 디스크 하나. 700메가짜리 6개를 설치해서. 트래픽이 제일 많았을 때가 10기가 정도. 지금은 우습지만 1996-7년 당시로는 상당히 큰 것이었다. 서버를 두고 큰 파일을 공유한 것이었 다. 천리안, 나우누리의 통신망에 모뎀 연결해서 큰 파일을 받기 쉽지 않았는데, 여기는 모뎀으로 연결해도 큰 파일을 받을 수 있었다. 학교 안에서는 인터넷에 직접 연결하여 큰 파일 받는데 문제없었다.

웹코리아(webkr) 워크숍

1년에 두 번씩 봄, 가을에 워크숍을 했다. 제일 처음에 충남대, 그리고 호암아트홀, 광운대, 경북대, 부산대 등5~6회 했던 것 같고, 그 다음에는 내가 회사에 들어가게 돼서 잘 모르겠다.

첫 해만 500여명이 참가했고, 그후에는 매번 1,000여 명이 넘었다. 참가비가 비싸면 안 온다는 것을 알았다. 특히 중앙일보랑할때, 돈 벌려고 한 것이 아닌데 참가비가 비싸게 책정됐고 그 때문에 불평하는 분도 많았다. 참가자들에게 미안했다. 아마추어들이 준비해서 하는 거라 편의시설도 없으니까. 그래서 이제 비싸게 받지 말 자했고, 그 다음부터는 학교를 돌았던 것이다. 우리가 수익을 내는 일을 하려는 게 아니라, 참가한 사람들이 최소한 책 한 권이라도 들고 가서 웹을 시작할 수있었으면 좋겠다는 마음만 있었다.

두번째 워크숍-중앙일보-정통부후원

중앙일보와 함께 했는데, 중앙일보가 웹에 대한 인식이 빨랐다. 조인스닷컴이 신문을 처음으로 인터넷에 올린 것이었다. 중앙일보는 CTS 라고 조판시스템을 따로 구축하고 있었고, 이것을 웹으로 어떻게 구현하는가가 이슈였다. 초기에 기자가 제주도에서 기사 전송을 했는데, 편집데스크에서 편집하지 않은 것이 웹에 그대로 올라오는 일도 있었다. 초기에는 공정상 어디부터 웹에 구현할지 잘 정리가 안되어 있는 상태였기 때문이다.

조선일보도 열심히 했다. 1995-6년경에 조선일보가 웹 관련 전시회를 코엑스 빌려서 하기도 했다. 신문사 들이 이렇게 발빠르게 나섰던 것은 외국의 신문사들이 그런 쪽으로 빨리 움직였기 때문이었다.

우리 워크숍을 후원했던 것은 웹을 사람들에게 널리 알리면서 웹을 상업적으로 활용하기 위한 목적이 컸다고 생각한다. 당시 중앙일보에 가서 2-3일 일을 한 적이 있다. 당시 cair.kaist를 같이 관리하던 학부생이었던 이 호선씨와 둘이 중앙일보에 가서 워크숍을 준비했는데, 정통부에 가서 후원을 받아오라고 하더라. 경험이 하나

도 없었지만 시도했다. 당시 정통부에 인터넷 담당자가 한 명밖에 없었다. 이상훈 사무관. 거기에 혼자 찾아가 만나서 뜬금없이 우리가 월드와이드웹 워크숍을 하는데 후원해달라고 했다. 사무관이 실적이 있어야 한다고 했다. 그 전에 충남대에서 500명 오고 했던 것을 기록으로 남겼으면 실적이라고 했을 텐데, 아마추어다보니 그런 증거자료가 없었고, 절망하고 왔다. 그런데 중앙일보에서 다시 어떻게 접촉했는지 정통부의 후원을 받아왔다. 정부의 후원은 그게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웹코리아(webkr)의 정리

웹포럼??은 사용자 모임으로 사설 단체 성격이었다. 우리는 사용자에게 웹을 빨리 보급하자는 차원에서 주로 활동했다.

어느 때부턴가 웹이 널리 쓰이면서 웹코리아(webkr)는 점차 유명무실해졌고, 돈이 있었다면 따로 서버도 구해서 운영했을 텐데 그게 안됐다.

인공지능연구센터(cair)도 연구소 자체가 1999년에 없어졌고, 그러면서 (메일링리스트 등이 있는) 서버를 옮겼는데, 이강찬씨가 가져갔던가...

과학원과 웹 탐구

아쉬운 것은 혼자 했다는 점이다. 전박사님은 알고 있었는데, 인공지능센터에 계신 선생님들은 끝까지 모르셨던 것같다. 웹이 퍼지고 나서야 cair.kaist의 위치가 알려졌는데, 내가 잘못한 것 같다. 미리 알려드리고, 세일즈할 수 있 게 했어야 했는데, 나 혼자 재밌어서 돌아다니고 한 것이다. 학교에서 1995-6년에 퍼지기 시작했을 때 사람들이 관심을 갖고 썼지만, 웹만 연구하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나는 학교에서 웹과 관련한 연구주제를 만들어 랩에서 과제를 하기는 했다. 검색모델을 보면, 지금은 거의 다 중앙집중화된 것이다. 그때 내가 설정한 것은 사용자마다 자기의 어떤 방문 히스토리나 전문 분야를 가지고 있는데, 그것들을 수집하고 협력하게 해서 검색하는, p2p 형태로 검색하는 구조를 연구했다.

그 당시에는 그런 것으로 논문을 써보면 어떨까 했는데, 그러기 전에 학교를 그만뒀다. 박사과정 공부가 잘 안맞았던 것 같다. 재밌는 것을 찾게 되면, 학교공부가 안보이는 거 같다.

행사 준비한다고 돌아다니고 다른 곳에 강의 나가고. 강의는 처음에 웹코리아(webkr) 워크숍에서의 강의 가 주였고, 1997년경에는 기업들에 강의하러 다녔다. 이렇게 내가 재밌는 분야에 쫓아다니니까 학교에는 흥미를 잃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러면서 좋은 사람들을 많이 만났다. [인터넷은] 그런 좋은 사람들이 만든세상이라는 생각이 든다.

보안산업

취직을 하게 되었는데, 처음 간 곳은 공식 직원으로 간 것은 아니었다. 넥슨(게임기업)인데, 초기에 <바람의 나라>가 잘 안 풀렸고 고생을 하면서, 웹 사업을 하게됐다. 내가 당시는 웹의 전문가축에 속했기 때문에 기술 적인 부분에 대해 가서 해결해 주는 일을 했다. 넥슨은 그런 식으로 도와주는 차원이었고.

본격적으로는, 갑자기 분야를 바꾼 것인데, 보안 쪽으로 가서 일했다. 1996-7년에 보안산업으로 갔는데, 내 가 1997년에 결혼을 하면서 돈을 벌어야 하는 상황이기도 했다. 웹은 많은 사람들이 웹사이트 만들거나 쓰게 되면서 이제 뭘해야 되지 했는데, 보안은 이건 진짜 굉장히 어려운 문제고, 내가 도전해볼 만한 재밌는 분야라 고 생각했다. 사람이 공격하고 사람이 막는 거고, 영원히 풀어야 할 문제라고 생각했다.

당시 보안사업은 큐어소프트, 안철수연구소 정도가 있었고, 대부분 업체들이 수입해서 파는 구조였다. 이 분야는 뚫고 막는 터프한 세상이다. 해킹이 처음에는 시스템이 궁금해서 하는 것이었는데, 요새는 대부분 상업 화된 것이다.

한 10년 보안 쪽 일을 하다가 시스템통합(SI) 사업같더라, 어렵고. 그래서 다시 검색 사업 하겠다고 [네이버 에] 배우러 들어가서 일하고 있다. 처음 관심으로 돌아온 셈인데...

인터넷 문화

인터넷 상용화가 중요하지 않았던 때를 보면, 기여(contribution) 문화가 널리 퍼져있던 상황이었다. 정보 공유, 서로 도와주려는 모습. 그런데 지금은 많이 싸우는 분위기다. 댓글로 싸우고.

당시는 인터넷이라고 안 부르고 씨에스넷(CSNET)이라고 했는데, 지금처럼 다운로드 잘 되고 하는 게 전혀 아니었고, 모두 다 메일로 했다. 내가 이멕스(emacs)를 받고 싶다고 보내면, 누군가 분할 압축으로 프로그램을 쪼개서 여러 메일로 보내고, 그것들을 다시 모아서 설치하고. 그 설치방법이나 사용방법을 다 뉴스그룹에 물어 보면서 알게 되었다. 유즈넷에서도 사람들이 뭔가 대해 궁금해하거나 토론이 붙으면, 나도 뭐 하나 가르쳐줘야지 하는 문화가 있었는데, 요새는 그런게 없어진 것 같다.

사실 처음 인터넷 - 네트워크 쓰는 사람들의 문화가 특수하게 존재했다. 초기에 연결은 불안한 것이었다. 연 결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상대방 네트워크 관리자와 긴밀한 소통이 있어야 한다. 루트 비밀번호도 교환할 정도 였다. 서로의 네트워크에 가서 고쳐주기도 하고. 그래야 전세계 네트워크가 작동이 되니까. 서로 계정도 부여 해 주고 하는 그런 문화가 있었고. 초기는 상호협력이 불가피했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일방적으로 쓰기만하는 것이 되면서 그런 문화가 달라진 것이다.

월드와이드웹 컨소시엄(W3C)

2002년에 정식으로 사무국이 열었다. 웹과 관련한 모든 집행(implementation), 서버, 표준 등이 여기에 모 아져있다. 한국에서 웹쓰는 것의 여러이슈-무엇보다도 한글.

한국에서의 웹 도입과 발전

사실 한국이 웹을 상당히 빨리 도입하고 발전시킨 것이라고 할 수있다. 일본의 경우 NHK뉴스에서 스포츠 뉴스처럼 뉴스 말미에 오늘의 웹페이지라고 하면서 방영했던 것을 우연히 본 일이 있었는데, 우리는 그런 거 없이 훨씬 빨리 도입되고 퍼졌다.

1997년경에 기업들이 상당히 빨리 웹페이지를 만들었다. 기술적인 문제로 몇 번 가서 봤는데, 당시 아시아 나에서 실시간 예약하는 웹페이지를 개발하려고 했고, 그게 상당히 어려운 것이었다. 항공사끼리 연결된 망이 따로 있는데, 프로토콜이 다른 그것에 인터넷으로 실시간으로 연결해서 하려는 것이었다. 외국에서도 그런 시 도가 있는 때였고, 아시아나가 상당히 일찍 시도한 것이다. 그런 식으로 우리나라가 빨리 웹에 접근하고 있었 다.

한국인의 민족성-빨리 적응하고, 그것을 파는 능력이 뛰어난 것 같다. 물론 언어의 문제가 있다. 이쪽 기술이 다 외국 것이고 다 영어로 된 것이니까, 영어권의 사람들은 개념을 자기의 언어로 만들고 그래서 직관적으로 이해하니까, 기술에 대한 접근도 그만큼 일반인들에게 쉽게 된다고 생각한다. 웹이 거미줄을 뜻한다는 것에 대한 개념과 그 용어. 우리는 우리말이 아닌 영어로 된 그런 개념을 이해를 해야하니까 상대적인 어려움이있 다. 워크숍을 할 때도 그런 개념이나 용어를 설명할 때 그런 측면이 부럽다는 생각을 했다.

웹브라우저의 한글화

모자이크의 소스가 공개되어 있었고 그래서 한글화를 위한 부분 패칭이 가능했다. 그런데 패칭이 필요없이, 곧있어 지원이 되었던 것 같다. 16비트캐릭터xwindow에서디스플레이하는 방법이 금방 나왔던 것 같다.

‘한글 Motif’가 있었는데, 전박사님 랩에서 한 건데, 디스플레이하는 부분만 16비트 스트링 보이게 해서 한 글이 나타나게 한 것이다.

그 다음에 ‘핫자바’라고 자바 브라우저인데, 한글이 안 돼서 패치를 했고, 월드와이드웹 컨소시엄(W3C)에 서 나온 아레나(arena) 글이 안 돼서 패치했던 것 같다.

웹 기술의 발전

코딩할 수 있는 인터페이스가 당시에는 CGI밖에 없었다. CGI로 코딩을 해야 하는 것인데, 확장할 수 있는 프레임의 구조가 없고, 그 자체 안에서 기능을 구현해야 하는 방식이었다. 요새는 엄청 발전했다. WAS 같은 거 쓰면 , 또 하나의 굉장히 큰 프레임워크이고, 이걸 쓰면 뭐든지 다 되는 구조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발전할지 상상도 못했다.

웹이 세상을 바꿀 것 같다, 편하게 할 것 같다고 생각은 했는데, 이렇게 거의 다 바뀔지는 몰랐다. 종이를 대체한다는 생각은 가지고 있었다. 음악, 비디오 등 이렇게 다양한 형태로 될 지 몰랐다. 이게 오프라인에서만 되 는건지 온라인에도 되는지 헷갈릴 정도로 바뀌었다.

종이라고 생각했던 게, 사람들이 웹을 통해서 인터랙션이 힘들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인데, 막힌 부분이 뚫리니까 되었던 것이다. CGI가 아니라 더 다양한 프레임워크가 나오면서 뚫렸다: 자바스크립트, php 등. 풀 수 있는 구조가 나오니까 사람들이 풀더라. 초기에 예를 들어, 채팅은 상호작용이 강한 것인데, 세이클럽을 웹으 로 구현했을 때 깜짝 놀랬다. 자바스크립트로 채팅을 웹에서 구현한 것이었다. 아! 저런 게 되는구나. 채팅은 내 가 타이핑할 때야 내보내는 것이지만, 상대가 쓴 것이 가져와지는 것은 힘든 구조였는데, 그게 구현된 것이다.

(질문: 그런 것들을 가능하게 하는 기술적 프레임워크 구조 자체는 어떻게 나왔는가?) 다양한 것들을 쉽게 만들려고 하다보니까 되었던 것 같다. 초기에 CGI로 짤 때는 100줄에서 200줄 짜면 기능이 하나 만들어지는 건데, 그걸 일반화시키는 환경을 만들자고 한 게 시작이었던 것 같다. 100줄이 아니라 대여섯 줄로만 짜고, 그게 또 100줄이 되고, 보다 더 복잡한 로직이 생기고 하면서 복잡한 것으로 발전했던 것 같다. 하지만 국내에서 자체적으로 그런 프레임워크를 만들려는 시도는 ... 내가 아는 한 없다.

초창기 웹기술중에 html2.0–HTTPNG가 잘 안됐는데 왜 안됐는지...딜레이가 된 것이 커넥션타임의 문제였는데, 사실 소프트웨어의 향상보다 네트워크 자체가 속도가 높아져서 자연스럽게 해결되었다고 할 수 있다. 워낙 빠르게 속도가 증가했기 때문이다. 그 당시에 9600 모뎀, 56k 였다. 요새는 집에 1메가, 10메가의 속도를 내니까.

이용자의 기술 활용

예전에는 편집기도 없이 일일이 vi 열어서 편집하고, 일일이 마크업을 손수했는데, 예전보다 더 쉽게 만들 수 있게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액티브엑스 문제

처음에 모자이크, 네스케이프 처음 나왔을 때로 거슬러 가야하는 문제다. RSA 라는 암호화 알고리즘이 있는데, 비트수가 클수록 암호화가 강하게 된다. 우리나라에서 풀린 게 아마 40비트 암호화였던 것 같은데, 그걸 벗어나려면 더 강력한 암호화가 되어야 한다. 미국에서는 512비트 , 1024비트 쓰니까 우리나라도 그 정도 돼 야지 상용화의 시발점이 될 수 있는데, 그런 상황에서 해결할 수 있는 방법으로 제시된 게 액티브엑스였다.

액티브엑스로 암호화를 하면 웹브라우저가 지원하지 않은 암호화 모듈을 따로 가지게 한 것이다. 브라우저가 40비트로 암호화하지만 액티브엑스가 512비트, 1024비트 로 암호화해주면 안전하게 커뮤니케이션할 수 있는 방법이 생기니까. 그것 때문에 생겼는데, 그게 (키사이즈 제한이) 풀린 이후에도 계속 그것을 쓰는 게 문 제다. 브라우저에 내장된 인증서 규격, SSL 규격으로 보안이 되는데도 관성으로 쓰고 있는 것이다.

2003년 인터넷 대란과 보안

토요일 오후였다. 슬래머웜 - 대단한 확산력을 가졌다는 점을 극명하게 증명한 사례였다. 퍼지는 공격이 엄청난 속도로 되면 순식간에 마비가 되는 것이었는데, 처음 경험하는 일이었다.

그 전에는 보안에서도 안 다뤘는데, 이 사건 이후에 관제시스템이 만들어진 이유가 결국 글로벌하게 봐야 겠다고 해서였다. 한개 한개 막는 수준으로는 한계가 있고, 전체 네트워크가 망가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 서 당시 사건은 새로운 보안의 개념과 프레임을 설정하게 한 계기가 되었다.

콘텐츠 문제

지금도 콘텐츠 문제가 큰 것 같다. 저작권 문제도 포함하여. cair.kaist 처음 만들었을 때, 관광공사에 전화해 서영어본을 한 부 보내달라고 했을 때 허락받은게 아니라 영문자료를 구한 것이고, 내가 그냥 스캔해서 올린 것이다. 지금은 많이 나아졌다고 보이지만 그래도 더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정돈되고, 좋은 콘텐츠가 더 많이 필요하다.

네이버에서 많이 느낀 것은 우리나라의 콘텐츠 수준이 고등학교 책에 나오는 수준이라는 것이다. 대학 수 준의 전문적인 콘텐츠는 별로 없다. 네이버의 지식인도 초등학교 수준. 지식(knowledge)이라고 하기에는 부 족하다. 대학에서 사회학을 전공하는 대학생이 보는 전공서적 정도의 내용이 인터넷에는 10%도 안 될 것 같 다. 하지만 그런 수준의 콘텐츠가 있어야 정보가 많다, 지식이 많다고 할 수 있고 인터넷도 더 많이 활용할텐 데...

그래도 위키백과가 전문적인데, 우리나라의 위키백과는 그 정도의 전문적인 것은 없다는 문제가 있다. 영어에는 있는데, 한국어로는 없는 것이다.

나이보다는 마음가짐

당시 웹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이 젊은사람들이었기 때문에 쉽게 접근할 수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우리 웹코리아(webkr)에 참여하신 분 중에 서상용 박사님(항공우주연구소)은 연세가 많았는데, 꽤 열심히 하셨다. 열린 마음(open-minded)으로. 그래서 꼭 나이의 문제는 아닌 것 같고, 인터넷에는 오픈마인드, 쉽게 다른 사람들과 동화할 수 있는 문화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웹코리아(webkr)의 역사적 의의, 평가

불씨를 당긴 정도라고 생각한다. 사람들이 앞서서 관심을 가지고 있었고, 시초가 된 것이다. 웹 표준이라든가 초창기 멤버들이 지금도 계속 기여하고 있다. 그 마인드는 계속 가지고 있는 것 같다. 나는 굉장히 재밌게 일했다. 돈도 안 받고 했는데, 사람들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된 것은 내 평생에서 가장 좋은 기억같다.

2012.7.9

문의: sec at InternetHistory.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