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장병규

인터뷰 대상: 장병규

질문자: 안정배

일시: 2013.4.25 17:00~18:30

장소: 본엔젤스 사무실

KAIST 재학 시절

KAIST 학부 91학번이니까 22년 전이다. 고등학교 때까지 PC통신도 안했었기 때문에 개인적으로는 인터넷을 사용한다는 사실이 신기했다. UNIX 상에서 영어로 talk, IRC로 채팅을 하는 것이 일종의 문화적 쇼크였다. 그런데 선배들은 이미 너무 자연스럽게 인터넷을 사용하는 분위기였기 때문에 그렇게 이상한 느낌은 들지 않았다. 자연스러웠달까?

돌이켜보면, 좋은 환경에서 자란, 수혜를 받은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인터넷이 사회적 담론을 형성하던 시기는 아니었지만 업무하며 이메일을 주고 받고, 논문도 UNIX 상에서 레이텍(LATEX)이라는 프로그램으로 쓰는 환경이었으니까. 레이텍은 수식 등을 잘 표현할 수 있었던 문서 편집 프로그램이었다. 일상적으로 FTP, 뉴스그룹 등을 쓰는 것이 아주 자연스러운 분위기였다.

WWW의 등장은 하나의 역사적 사건

그러다가 93,4년 들어오면서 커다란 변화가 생겼다. WWW이 등장한 것이다. WWW이 출현하기 전에도 유사한 프로젝트가 많았다. Gopher도 있었고, WAIS도 있었다. 그런데 Mosaic이 나오면서 이 모든 것이 한 순간에 정리되었다. 신기했다. 그 전까지는 텍스트를 구현하는 방식이었는데 Mosaic은 그래픽이 됐다.

물론 PC에서는 이미 그래픽으로 구현되는 프로그램이 돌아가고 있었지만, PC 윈도우는 개별 컴퓨터에서만 사용하는 것(stand alone)처럼 느껴졌기 때문에 UNIX나 인터넷에서 그래픽을 구현한다는 것은 충격적인 일이었다. 처음 PC와 UNIX 워크스테이션에서 Mosaic가 돌아가는 것을 본 것이 아직도 기억난다.

그 전까지는 FTP, 뉴스그룹, Gopher, WAIS가 개별적으로 존재했는데, Mosaic은 이 모든 것을 한 번에 할 수 있는 프로그램이었다.

WWW이 특별했던 점은 장난치기 쉬웠다는 것이다. 현재는 HTML 작성이나 웹서버 관리를 전문가들이 하지만, 당시의 웹서버 시스템은 단순해서 이해하기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이전의 FTP 같은 것들이 전산과 나온 전문가들이 하는 것이었다면, 일반인에 가까운 굉장히 많은 대학생, 대학원생, 연구원들이 사용할 수 있는 환경이 된 것이다.

그래서 WWW의 출현은 네트워크에 관심있던 사람들이라면 전부 다 뭔가 해 보자 하는 사건이었다. 충남대 이강찬, ETRI 김용운, 데이콤 권도균 등이 주도해서 1995년에 WWW-KR이 첫 행사를 했다. 초기에는 연구소들이 대전에 모여있었기 때문에 대전 소재 연구소의 연구원들이 중심이 되고, KAIST와 충남대 등의 학생들이 지원하는 형태였다.

사용이 쉽기도 했지만, 인터넷의 개방성도 대중화의 한 요인이었다. 인터넷은 원래 모두 오픈되어 있어서 누구나 쓸 수 있는 것을 기반으로 한다. 그 기반 위에서 오픈 라이센스, 오픈 소스로 기술이 공유되고, 이것이 사회와 교류하면서 발전하는 것이다. 이 특성은 젊은 세대의 개방적인 사고와 잘 들어맞았던 것 같다. 그래서 단순히 신기할 뿐 아니라 이런 기술이 기존의 것들을 바꿀 수 있는 큰 사회적 흐름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었다. 물론, 그때 이미 돈이 될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었을 것이다.

WWW-KR 멤버들이 집필한 <가자, 웹의 세계로!>도 자발적으로 이뤄졌다. 편집도 인터넷을 통해 진행됐으니, 인터넷을 통한 협업(collaboration)이 그 때 이미 시작된 것이다. 누가 얘기한 것도 아닌데 자연스럽게 된 것이다.

1995년, 첫 WWW Workshop을 했는데, 처음에는 상상도 못할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모였다. WWW을 배우고자 하는 요구가 굉장히 컸던 것이다. 사회를 바꿀 수 있는 큰 사건이라는 느낌이 들었는지, 언론사, 기업, 기관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시는 분들도 관심을 가지고 봐주시기 시작했다. 그래서 2회부터는 스폰서를 받고 개최되게 되었다.

기본적으로 WWW-KR 모임은 굉장히 자발적으로 모든 과정이 일어나는 곳이었다. 혼자 독재하거나 주도한다기보다는 여럿이 모여있는 커뮤니티 같은 느낌이었달까? 여러 사람의 의견이 제출되고, 컨센서스를 도출해서 일을 진행하는 흐름이 3~4회까지 이루어졌다. 1, 2회 워크샵을 거치면서 아마츄어적인 것만으로는 안되겠다는 의견이 있어서 공식적인 기구를 만들었다.

20여 년 간 인터넷과 웹에 있어 가장 강력한 임팩트라고 하면 역시 WWW-KR이라고 생각한다. 최근 모바일 시대가 되면서 그 사실을 다시 한 번 느끼고 있다. WWW와 Mosaic의 등장은 사람들의 삶을 바꾸고, 산업을 바꾸고, 사회 전체에 임팩트가 된 사건이었다. 그 이후 등장한 아바타나 소액결제(Micro transactions), 검색광고도 물론 중요한 사건이었지만, 이들은 자연스럽게 나타난 사건이라고 생각한다.

네오위즈의 창업

대학원 시절 박사과정에는 관심이 없었다. 다행이 실험실 교수님은 학생들이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게 허용해주시는 분이었다. 우리 실험실의 연구 주제는 자연어 처리 시스템이었는데, 이 분야는 최근에 들어서야 아이폰에 Siri가 탑재되고, 구글이 자연어 시스템 기술을 인수하면서 사람들에게 알려진 기술이다. 20년이 지나서야 그 학문이 기여하고 있는 것이다.

대학원 시절에는 연구실에서 개발하는 기술이 발전속도가 느리고, 그야말로 연구하는 분야였기 때문에 나와는 잘 맞지 않았다. 오히려 WWW-KR 하면서 여러 분들을 만났다. 그러다가 연구실 선배인 최환진 박사가 박사논문을 막 마치고 창업한다고 해서 이것을 지원해주는 개념으로 네오위즈 창업에 참여한 것이다.

당시에는 스타트업이라는 말이 없었다. 벤처라는 단어를 썼는데, 그 떄는 벤처가 위험한지 어떤지도 몰랐다. 처음에는 같이 10억을 벌어보자 하는 단순한 목표로 시작했다. 나성균 대표와는 WWW-KR 1회 때 인연을 맺은 사이였고, 개발은 경영을, 경영은 개발을 원했기 때문에, 공동창업은 자연스럽게 진행되었다.

벤처 투자 같은 것을 받을 길이 없었던 초기에는 SI 용역 일을 정말 많이 했다. 공동창업자였던 신승우가 개발 일을 참 많이 했다. 마지막으로 SI 프로젝트를 했던 곳이 노동부였는데, 컴퓨터를 낮에 뺄 수가 없어서 저녁에 꺼내 돌아오던 길에 여의도 벚꽃을 처음 봤을 정도로 신물나게 SI 프로젝트를 했다. 돈은 SI 프로젝트로 벌고, 번 돈으로 이것저것 아이템을 시도해보는 방식이었다.

인터넷 광고가 돈이 될 거라는 얘기는 90년대 중후반 부터 있었다. 하지만 인터넷 광고가 터진 것은 2000년 이후의 일이다. 기업들이 인터넷을 미디어로 받아들여줘야 광고가 들어오는데 그것이 느렸다. 반대로 웹이 처음 나왔을 때, 웹사이트 하나 만들어주고 1, 2억 받는 시기도 있었다. 처음엔 인터넷을 잘 모르니까 돈을 쉽게 쓰다가 나중에는 좀 알게 되고, 트래픽도 작은 수준이고 하니까 돈을 다시 안 쓰다가, 인터넷이 발전하면서 트래픽이 커지니까 다시 투자하는 식으로 반복되는 것 같다. 버블이었다가, 버블 꺼지고, 정상화되는 과정을 겪는 것이다.

네오위즈가 사업 아이템으로 처음 한 프로젝트는 당시 미국에서 주목받고 있던 "Pointcast" 라는 서비스를 벤치마킹한 것이었다. 이 서비스는 스크린세이버에 정보를 뿌려주는 것이었는데, 놀고 있는 컴퓨터 화면에 정보를 찾아 서비스해주는 모델이라 미국에서는 핫한 아이템으로 각광받고 있었다.

처음에는 개발에 큰 걱정을 하지 않았다. 그런데 생각했던 것보다 오래 걸린 것은 물론, 런칭 후에도 문제가 있었다. 당시 인터넷 자체가 대학이나 연구소, 소수의 기관에서만 쓰이는 것이었기 때문에 서비스 수요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인터넷을 사용할 수 없으니 이런 서비스가 무용지물이었다. 게다가 트래픽을 너무 많이 썼다. 당시 PC 스펙으로 동영상을 돌리는 것은 문제가 안되었지만, 그림, 동영상, 텍스트를 네트워크로 전달하는 것에 오버헤드가 걸리는 시대였던 것이다. 물론 과금도 어려웠고, 사용자가 적고, 그래서 미국에서도 실패한 것으로 기억하는데, 한국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원클릭 서비스

하지만 네오위즈로서는 이 프로젝트에서 쌓은 기술과 경험을 바탕으로 용역을 맡으면서 종잣돈을 만들게 되었다. 인터넷 연결이 문제가 된다는 것을 경험하고 나니까 자연스럽게 접속을 쉽게 하는 프로그램에 대한 요구로 이어졌다. 그렇게 등장한 아이디어가 원클릭 서비스였다. 당시에는 원클릭 서비스가 잘 될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학교에서 인터넷을 경험했기 때문에 일반인들도 인터넷을 자연스럽게 사용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원클릭이라는 프로그램의 실효성을 이해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런데 실은 나같은 개발자들은 대학이나 회사에서 인터넷 전용선으로만 썼기 때문에 일반 대중들이 겪는 인터넷 접속 상의 복잡함을 몰랐던 것이다. 그래서 처음 그 얘기가 나왔을 때 이해를 못했던 것이다.

당시 인터넷을 접속하려면, 회사나 연구소 등 전용선이 설치되어 있는 곳에서는 Netscape나 Internet Explorer를 띄워 지금처럼 인터넷을 사용하면 됐지만, 일반 전화선을 이용했던 일반 가정에서는 모뎀 프로그램을 띄워 전화를 건 다음에 인터넷 접속이 되면, 브라우져를 띄우는 식이었다.

원클릭은 이 과정을 클릭 한 번으로 진행시키는 프로그램이었다. 사실 KT에서 제공하는 Infoshop에 유사한 기능을 이미 제공하고 있었고, 사용자가 설정을 잘 하면 이미 사용할 수 있는 기능이었지만 그 설정 자체가 당시로서는 너무 어려운 과정이었다.

원클릭을 출시하고, 처음 사람들이 쓰고 돈을 내는 것을 보고 신기해했던 기억이 있다. 당시 나는 개발 리더여서 직접 개발을 하는 것은 아니고, 개발자들이 개발하기 싫어하는 일을 도맡아 하는 일을 맡고 있었는데, 어느 날 회식 자리에서 회사로 불려들어온 적이 있었다. 원클릭 서비스가 안된다는 것이었다. 근데 들어와서 해보니까 되는 것이 아닌가? 알고 보니 내가 짜넣은 원클릭 로그 시스템에 동시 접속자를 최대 100으로 설정해두었는데, 그 순간 동시접속자가 100명을 넘은 것이었다.

벤처에 자금이 몰린 것은 2000년 전후니까 네오위즈를 창업하고 원클릭 서비스를 내놓던 1997년에는 벤처 투자라는 것이 없었다. 그래서 경영진 입장에서는 처음부터 돈 버는 모델이 필요했을 것이다. 원클릭은 사용료를 분당 과금하는 형태였기 때문에 인터넷을 사용하기만 하면 계속해서 돈을 벌 수 있는 모델이었다.

원클릭 프로그램 CD는 공짜로 배포했다. 집까지 무료배송하는 서비스를 했다. 이렇게 배송받은 원클릭 CD를 PC에 설치하고, 프로그램을 실행시키면 자동으로 전화를 걸고 인터넷 첫 화면을 띄워주는 것이었다. 과금은 전화선 사용요금 일부를 가져오는 방식으로 했다. 분당 20원이었다.

이렇게 전화선을 이용해 인터넷을 사용하던 시기였다. 인터넷을 사용하고 있을 때는 전화를 이용할 수 없었던 환경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인터넷을 접속하는 사람들이 대체 무엇을 할까 궁금해서 회사에서 패킷을 들여다봤다. 사용자 개개인의 개인정보 파악은 안됐지만, 어떤 패킷이 망을 통해 왔다 갔다 하는지 본 것이다. 트래픽이 가장 많은 것은 외국의 야한 사이트였다. 전체의 30% 정도 되었다. 그 다음으로 트래픽이 많고, 다수가 가장 많이 쓴 것은 웹메일이었다. 당시 daum의 hanmail 서비스가 인기를 끌고 있었다. 그래서 원클릭 메뉴에 접속 버튼 다음으로 메일 버튼이 추가되기도 했다.

세이클럽

"세이클럽"은 원래 "원클릭 채팅"이라는 애플리케이션으로 개발되었다. 당시 회사에 남세동이라는 휴학중인 인턴사원이 한 명 있었는데, 반년 쯤 인턴 기간이 남았을 때 딱히 줄 일이 없었다. 그래서 하고 싶은 것을 하라고 했더니 채팅을 만들었다. 기술적으로는 구현이 쉽지 않은 작업이었다.

채팅이라는 것을 당시 사람들이 PC통신에서 꽤 많이 하던 것이었다. PC 통신에서 사람들이 가장 많이 하던 것이 쪽지 보내기, 메일, 채팅, 게시판 등이었다. 인터넷의 어플리케이션도 대부분 PC통신에서 하던 것들이 대중화된 것이 많았다.

그렇게 채팅 애플리케이션이 개발되어 출시했는데, 굉장히 빠른 속도로 배포가 되었다. 원클릭은 CD를 배송해서 설치해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어 느릴 수밖에 없었던 반면, 원클릭 채팅은 웹사이트에 접속하기만 하면 바로 쓸 수 있으니까 이용자가 급격히 늘어난 것이다.

동시접속자 수가 1000명, 2000명 쯤 됐을 때, 트래픽이나 서버 관리가 감당이 되지 않았다. 그 때 쯤 회사 내에서 토론이 붙었는데, 돈도 안되고 비용만 드는 인터넷 사업을 계속 할 필요가 없다는 쪽과 앞으로 인터넷에 광고가 붙을 것이다, 투자해야 한다는 쪽으로 나뉘었다. 그래서 채팅의 수익모델은 뭘까, 돈은 어떻게 벌까 끊임없이 고민해야 했다.

인터넷으로 돈이 된다는 것을 반신반의하던 시절이다. 나는 어떻게든 돈이 될 수 있다는 쪽이었기 때문에, 발로 여기저기 뛰어야 했다. 회사에서 지원을 안해주는데, 네트워크와 서버는 필요했기 때문에 구할 수 있는 곳을 찾아 돌아다녀야 했다. 당시 아이네트에 있던 선배를 찾아가 얘기를 들어보니, ISP들 사이에 IX 문제가 있었다. ISP 간에 상호접속을 하면서 비용을 대는 문제가 불거져있었는데, 트래픽이 많은 쪽이 유리한 조건이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우리가 가진 "세이클럽"이 트래픽이 많으니, 서버와 네트워크를 지원해주면, 거기에 서버를 두겠다고 했다.

동시접속자 수가 2~3만 명 될 때까지도 세이클럽으로 돈을 못 벌었으니 고민이 많았다. 세이클럽 부서 사람들이 1년 정도 유예기간을 받고 유료화를 고민하던 시기가 있었는데, 그 때 만들어진 것이 바로 아바타였다.

세계적으로는 넥슨의 성공이 많이 알려져있지만, 역사적으로 처음 그 모델을 시도해서 돈을 번 것은 세이클럽이었다. 네오위즈 내에서 처음으로 아바타 서비스 모델을 접했을 때, 다들 단순한 그래픽(그림 쪼가리)에 누가 돈을 내느냐 하는 반응이었다. 전반적으로 부정적이었다. 그런데 서비스가 오픈한 첫 달에 대박을 친 것이다. 돈이 된다는 것을 1, 2달 만에 의심없이 모두가 알게 된 것이다. 오히려 문제는 마이크로 트랜잭션 인프라가 열악했기 때문에 결제 시스템에서 나오는 상황이었다. 시스템의 헛점을 이용해 돈을 지불하지 않고, 사이버머니를 충전하는 abusing도 있었지만, 돈이 되는 것은 명확했다. 이후 free-mium 모델이 되는 것의 시초였던 것이다.

abusing이나 hacking 문제는 크지 않았다. 오히려 익명 채팅 시스템이었기 때문에 네티켓을 잘 지키는 사용자부터 남을 해하고 속이고 사기치는 분까지 다양하게 존재하며 문제가 발생하기도 했다. '불륜의 온상'이라는 말도 있었고, 성매매가 일어났을 수도 있다. 하지만 당시 세이클럽이 가장 큰 채팅 커뮤니티였고, 그래서 문제 건수도 많았겠지만 다른 어떤 커뮤니티보다 자정작용도 잘 되었다고 생각한다. 나쁜 코드가 당연히 있었지만, 그 코드 때문에 세이클럽이 성장한 것은 아니고, 자정작용이 있어서 네티켓이 정착되면서 독보적 넘버 원의 자리 지킬 수 있었다.

세이클럽과 같이 경쟁하던 채팅 커뮤니티로는 스카이러브가 있었는데, 처음 원클릭채팅이 런칭해 사용자가 1천 명을 돌파했을 때, 스카이프 사용자가 2만 명이었다. 두 채팅 시스템은 근본적인 구조상의 차이가 있었는데, 스카이러브는 java 기반으로 구축된 클라이언트 기반 채팅 시스템이었고, 세이클럽은 기본적으로 웹 기반 시스템이었다. 그래서 HTML로 장난을 칠 수 있었다. 폰트를 변경한다거나 이모티콘을 사용하거나 그림 올리는 등을 할 수 있는 구조였다.

당시는 인터넷과 웹이 막 퍼지던 때라 모두들 새로운 것을 시도할 때였다. 채팅창에 좌우로 움직이는 텍스트를 입력하면 다들 그걸 어떻게 하는 거냐고 알려달라고 하고, HTML 태그를 알려주는 식이었다.

이런 웹 기반 채팅 시스템은 국내는 물론 세계 최초의 시스템이었다. 지금은 AJAX 방식으로 알려져있지만, 그 때는 AJAX라는 이름도 없을 때였다. 그 당시에는 이런 모델이 없는 아주 원시적인 상황에서 만들었던 것이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이 쉽게 흉내를 못 냈던 것이기도 하고. 안타까운 점은 AJAX 모델도 영어로 만들어졌고, 그래서 우리가 처음 만들었지만 세계적으로 기여는 못했다는 것이다.

세이클럽이 부상하는 와중에 원클릭은 점차 다른 서비스로 대체되고 있었다. 1998년, 초고속인터넷이 등장하면서 말도 안되는 가격(3~4만원)과 속도로 심지어 한달 정액제 서비스를 하는 상황이었다. 원클릭도 KT와 합작해서 infoshop을 고도화하기는 했지만, 전화선으로 애당초 경쟁이 되지 않았다. 초고속인터넷이 나온지 1년이 채 되지 않아 원클릭은 대부분 초고속인터넷 서비스로 대체되었다. 마이크로소프트에서 PPP 접속을 default 탑재한다는 얘기도 있고 해서 점점 원클릭은 다른 서비스로 대체되었다.

2013.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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