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12.1
안정배
지금은 세계를 아우르는 컴퓨터 네트워크라고 하면 누구나 인터넷을 가리키고, 다른 컴퓨터 네트워크가 존재하는지도 잘 모르는 시대지만, 인터넷 기술이 처음 개발되었을 때만 해도 이 기술이 전세계를 상호연결하는 컴퓨터 네트워크의 대명사가 되리라고 예측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NSF가 미국에서 56Kbps 백본을 구축하고, 인터넷을 확장시키던 87년만 해도 인터넷으로 연결된 전세계 컴퓨터(host) 수는 10,000여 대에 불과했다. 물론 대부분은 미국 내 네트워크에 연결되어 있었고, 미국의 NATO 우방국인 영국과 노르웨이에 일부가 있었으며, 자력으로 TCP/IP 네트워크를 구축한 한국에 200여 대가 연결된 정도였다.
[그림1. ARPANET Map]
[그림2. CSNET Map]
[그림3. NSFNET Map]
또한, 컴퓨터 네트워크 프로토콜도 TCP/IP 뿐 아니라 OSI, UUCP 등이 경합을 벌이고 있었다. 당시 연구자들 사이에서는 인터넷보다 OSI 프로토콜이 향후 국제 컴퓨터 네트워크를 장악할 것이라는 예측이 파다했는데, 한국도 예외는 아니었다. [Editorial: OSI가 각광받았던 이유 추가] 이런 환경으로 인해 컴퓨터 네트워크를 다루는 대부분의 대학이나 연구기관에서 OSI 연구에 한창이었다. TCP/IP 네트워크를 구축한 KAIST 전산학과에서도 인터넷과 OSI 연구를 병행하면서 앞으로는 OSI 연구로 방향을 틀어야 하는 게 아니냐는 얘기가 나오고 있었다.
SDN도 이를 반영해 아래와 같은 다양한 프로토콜의 네트워크를 포함하고 있었다.
- UUCP를 이용한 국제 전화회선망
- CSNET의 IP-over-X.25 소프트웨어를 이용한 네트워크
- X.400 등을 사용한 OSI 네트워크
- TCP/IP를 사용한 국내 백본망
- UUCP를 이용한 국내전화회선망
- TCP/IP를 사용한 대학내 네트워크
1986년 미국 NSF의 IPv4 개방정책으로 한국에도 IP주소와 .kr 국가코드도메인이 시작되었다. 이어 1987년에는 2, 3단계 도메인 사용정책을 확립했다. 또한, 1989년에는 미국과 아시아 4개국을 전용선으로 연결하는 PACOOM 프로젝트에 참가하여 이듬해인 1990년 전용선을 이용한 국제 인터넷 시대를 열게 되었다.
3.1 해외/국제?? 컴퓨터 네트워크
SDN 초기에 가장 많이 사용된 프로토콜은 UUCP였다. 1990년 미국과의 전용선 협약이 체결되기 전까지 외국과의 네트워크는 모두 국제전화회선을 사용했는데, 국제전화회선은 속도가 느리고 사용시간에 제약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속도는 느렸지만 저렴하게 이용할 수 있었던 UUCP가 주로 사용되었고, 트래픽의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던 항목은 이메일 어플리케이션이었다.
[그림 1. SDN 해외 Mail 연도별 통계표 or SDN Overseas Yearly Mail Traffics (CSRC-89-002)]
1984년에는 CSNET과도 상호연결되었는데, 역시 일반 국제전화회선(PMDF)을 사용했기 때문에 주로 사용된 어플리케이션은 전송량이 많지 않은 이메일이었다. CSNET은 전화회선과 데이터통신망으로 접속할 수 있었고, UUCP와 TCP/IP 프로토콜을 동시에 지원했기 때문에 IP 주소가 개방되기 전까지 미국의 인터넷을 경험할 수 있는 방법은 CSNET에 접속하는 것 뿐이었다. 하지만 일반전화회선의 대역폭으로 CSNET의 파일전송 기능을 사용하기는 무리였다.
일반 사용자로서는 미국과 이메일 교환을 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생소한 일이었으나, 사용빈도가 높았던 박현제 같은 네트워크 관리자들은 자주 전화회선의 한계에 직면했다. 간혹 뉴스그룹에서 "이 자료는 FTP를 통해 다운로드할 수 있다"고 적힌 자료를 볼 때마다 인터넷을 구축했으면서도 인터넷 사용의 묘미인 파일 교환을 할 수 없다는 사실이 무척 아쉬웠던 것이다. 전화망(Public Switched Teletphone Network; PSTN)은 구조적으로 파일 교환을 할 수 있는 대역폭을 가지고 있지 못했기 때문에 TCP/IP 네트워크에서 구동할 수 있는 파일교환 어플리케이션이 무용지물이었던 것이다.
한편, 1984년 7월에는 데이콤이 X.25 망을 이용한 공중데이터통신망(Public Switched Data Network; PSDN)을 서울과 부산 사이에 개통했다. X.25는 56Kbps로 데이터를 주고받을 수 있었는데, 당시 SDN 호스트들이 대부분은 2.4kbps의 속도의 일반 전화회선으로 연결되어 있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획기적인 속도로 컴퓨터 네트워크를 구축할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이었다. 당시 데이콤은 X.25 공중데이터통신망 서비스가 향후 비디오 정보를 주고받는데도 무리없는 대역폭을 가지고 있는 차세대 네트워크라는 점을 강조하며 판촉을 벌였다.
이 무렵, 인터넷 파일교환 어플리케이션을 사용할 방법을 찾던 박현제는 미국의 퍼듀 대학에서 개발한 "TCP/IP over X.25"라는 소프트웨어를 구해 X.25 망을 통해 CSNET으로의 접속을 시도했다. 그런데 TCP/IP 프로토콜을 이용해 미국의 CSNET에 연결하려면 국제적으로 통용되는 IP 주소가 필요했다. 박현제는 Usenet 뉴스를 뒤져 IANA에 IP 주소의 할당을 요청할 방법을 찾아냈다. 할당을 요청할 수 있는 IP 주소는 3개의 클래스로 나뉘어져 있었는데, 미국 외의 노드는 일반적으로 256대의 컴퓨터를 연결시킬 수 있는 C 클래스의 IP 주소를 신청하는 추세였다. 하지만 SDN 사무국은 한국의 네트워크 기술과 향후 대중화를 고려해 6만 5천 대 이상의 컴퓨터를 연결할 수 있는 B 클래스의 IP 주소를 신청했고, 한 달 만인 1986년 8월에 IP 주소가 할당되었다는 연락을 받게 된다.
[Editorial: UUCP, CSNET 연결 및 coordination은 chapter 2에서 미리 다룸. 추후 내용에 따른 재배치가 필요할 것으로 보임.]
3.2 IP 주소 할당과 .kr 도메인 네임 설계
사실, 미국은 전세계로 인터넷을 개방하는 방안에 회의적이었다. 당시는 냉전이 한창인 시기였고, 미국과 소련은 서로의 첨단기술 유출에 극도로 예민하게 반응하고 있었다. 게다가 1969년에 시작된 ARPANET 프로젝트를 지원하던 기관이 다름 아닌 미 국방성이었다. 1983년부터 미국내 대학 연구소들이 연결되어 있던 ARPANET과 군사 네트워크인 MILNET이 공식적으로 분리되긴 했지만, 각 호스트에 퍼져있는 정보가 완전히 분리된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미국으로서는 인터넷 개방이 안보와 직결되는 문제이기도 했다. 한편, ARPANET에 가입되어 있지 않은 대학, 연구시설을 중심으로 한 NSFnet이 존재했지만, 1985년까지만 해도 NSFnet을 지원하고 있는 NSF가 미국의 인터넷 개방을 결정할 만한 영향력을 갖추지는 못했기 때문에 미국이 NATO 우방국 이외의 해외 노드에 인터넷을 개방할 것인지는 묘연한 상황이었다.
심지어 한국은 공산국가인 북한과 인접하고 있었기 때문에 더더욱 미국과의 인터넷 연결가능성을 점칠 수 없는 상황에 놓여 있었다. 사실, 1980년대 강력한 반공정책 아래 살고 있던 한국의 연구자들로서는 북한으로 기술이 유출될 수 있다는 미국의 우려가 잘 이해되지 않았지만, 당시 유럽에서는 동유럽과 인접한 오스트리아 등을 통해 미국의 첨단기술이 빠져나가는 경우가 빈번했기 때문에 미국으로서는 조심할 수 밖에 없었다.
기회는 1986년 더블린 IANW 회의장에서 찾아왔다. IANW(International Academic NetWorkshop)는 1982년부터 개최된 국제회의였는데, 주로 ARPANET에 참가하고 있던 미국 및 NATO 우방국의 네트워크 전문가들이 참석하는 자리였다. IANW에서는 인터넷을 비롯한 컴퓨터 네트워크 운영에 필요한 기술이나 운영방식은 물론, 네트워크 구축에 필요한 각국의 사회, 경제적 상황 등을 고려해 국제 네트워크를 조율하는 자리였는데, 전길남도 이 회의에 1985년부터 참석하며 SDN 연구 및 개발 현황을 공유하고, 국제 네트워크 구축 협의에 참가하고 있었다.
1986년 더블린에서 NSFnet의 국제협력부서의 담당자였던 Steve Wolfe를 만난 전길남은 NSFnet의 국제개방을 넌지시 제안했다. 물론 그간의 미국측 반응을 잘 알고 있던 그였기 때문에 큰 기대를 하지는 않았다. 안보 문제 때문에 한국에 인터넷을 개방한다는 게 어려울 것이라는 생각도 있었고, 당시만 해도 인터넷 뿐 아니라 OSI, RSCS, DECNET, UUCP 등 다수의 프로토콜이 경합하는 중이었기 때문에 SDN을 인터넷에 연결해야 할 것인지 확실히 판단하기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예상을 깨고 Steve Wolfe가 바로 그 자리에서 긍정적인 답을 하는 것이었다. 기대도 하지 않았는데, 오래 숙제가 시원하게 해결되는 순간이었다. 그로부터 한 달 남짓 후, NSFnet으로부터 IPv4 IP 주소를 전세계에 개방하겠다는 연락이 왔다. 마침내 인터넷이 전세계를 아우르는 네트워크가 될 관문이 열리는 순간이었다. 1986년 NSFnet의 IP 개방 결정은 이후 인터넷의 폭발적인 확산을 불러일으켰고, 이로부터 12년 만인 1998년, 인터넷이 드디어 지구상의 모든 국가를 연결하는 명실상부 컴퓨터 네트워크의 대명사가 되는 결과를 낳게 된다.
Steve Wolfe는 원래 미 국방성 출신의 기술전문관료로 전길남을 만난 1986년부터 NSFNET 국제협력담당으로 IANW에 참가한 인물이었다. 그의 전격적인 IP 개방의 전략은 이후에도 계속되어 미국정부가 이메일조차 개방하지 않으려고 했던 중국에도 인터넷을 개방시키는 데 주요한 역할을 한다.
국방성 출신이라는 그의 타이틀은 안보 문제로 인터넷의 해외 개방을 꺼려하던 미국정부에 신뢰감을 주었던 것으로 이해된다. 또한, 80년대 초중반 각축을 벌이던 컴퓨터 네트워크 프로토콜 경쟁에서 우위를 점하려는 의도와, 당시 일부 국가에서 자력으로 인터넷을 구축하는 동향을 보면서 향후 인터넷 분야에서 주도권을 미국이 놓치지 않으려는 의도도 작용했으리라 판단된다. 결국 미 국방성은 끝까지 ARPANET을 개방하지 않았고, 이후 국제 인터넷은 NSFnet을 중심으로 확산되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박현제의 IP 주소 할당 요구가 받아들여진 것이다. 이렇게 할당받은 국내 최초의 국제 IP 주소가 바로 128.134.0.0였다. 또한, 한국(남한)을 나타내는 국가코드인 .kr도 이 시기부터 정식으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kr 아래의 2, 3단계 도메인에 관한 규격과, 두 글자로 이루어진 2단계 도메인 네임(ac는 학술단체, co는 기업, go는 정부기관, re는 연구기관과 비영리단체)도 설계되었다. .kr 도메인 네임 서버로 KAIST의 컴퓨터들(sorak.kaist.ac.kr, kum.kaist.ac.kr 등)이 등록되어 국내 뿐 아니라 국제적으로 .kr을 도메인 네임으로 사용하는 컴퓨터들에 자유롭게 접속할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되었다.
[그림 5. 1986.12.9 Leo Lanzillo가 박현제에게 보낸 확인 메일 캡쳐화면]
1986년, IP 주소를 할당받고, X.25를 이용해 인터넷에 연결할 수 있는 기술적인 기반도 갖춰졌지만 여전히 인터넷 이용에는 제약이 있었다. 바로 통신비였다. X.25는 속도가 빠른 반면, 데이터 사용량만큼 과금되는 구조였기 때문에 자유롭게 고용량의 파일을 다운로드하는 것은 쉽지 않았고, 일반 국제전화회선을 이용한 해외 컴퓨터 네트워크도 점차 사용자가 많아지면서 통신요금부담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고 있었다. 당시 SDN을 통한 해외 통신 요금은 SALAB에서 부담하고 있었는데, 이러한 상황이 지속되면서 재정적인 부담이 가장 큰 부담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CSNET의 사용이 늘어나면서 1986~87년, UUCPnet 트래픽과 비슷했던 X.25 트래픽은 1988년에는 전체 트래픽의 80%를 차지할만큼 크게 늘어났다. CSNET 사용료는 SALAB에서 부담하고 있었는데, 1988년에 이미 CSNET 사용료가 5천 6백만원에 육박하고 있었다. 이는 대학 연구실에서 부담하기에 무척 부담스러운 금액이었다. 이런 문제가 지속되면서 네트워크 사용량에 따른 과금이 아니라 정액요금으로 인터넷을 마음껏 사용할 수 있는 전용선 구축의 필요성이 점점 커지고 있었다.
[표 2. SDN 해외 Mail 연도별 통계표 (CSRC-89-002)]
1980년대 후반만 해도 국내에서 인터넷의 존재를 아는 사람은 매우 드물었다. 1988년 기준, SDN의 해외 이메일 트래픽은 KAIST가 43.6%를 차지하고 있고, ETRI(29.7%), 포항공대(11.8%), DACOM(4.4%), 삼성전자((4.4%), 과학기술대(2.0%), 한양대(1.1%), 서울대(1.1%) 순이었으며, 이상의 기관을 제외한 소규모 연구센터나 개인 사용자의 트래픽은 1.7%에 불과했다.
[표 3. 1988 SDN Overseas Mail Traffics (CSRC-89-002)]
이 당시 사용자들은 SDN에 연결된 대학이나 연구기관의 학생, 연구자들이 대부분이었지만, 간혹 독특한 루트로 일찍부터 인터넷의 세계에 들어온 이용자들도 존재했다. 1988년, 경기과학고 1학년생이었던 최우형도 그런 경우였다. 최우형은 당시 PC를 보급하던 '정보문화센터'에서 학교에 기증한 모뎀과 컴퓨터, 그리고 데이콤의 X.25 계정을 사용해 처음으로 인터넷에 접속하게 된다. 12살 때 처음으로 Apple2 컴퓨터를 만져보면서 컴퓨터 게임에 빠져들었던 최우형은 이렇게 우연히 인터넷을 마주하게 된 후 줄곧 인터넷의 핵심 분야에서 살아가게 된다.
당시 경기과학고에 지급된 데이콤 계정은 데이콤 이메일 서비스를 사용하게 할 목적으로 지급된 것이었다. 우연한 기회에 이 계정이 X.25 로 연결된 전 세계의 어느 컴퓨터에도 접속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최우형은 점점 더 자주 인터넷에 접속하게 되었다. 그가 속해있었던 '전산반' 학생들은 전산실 개방시간 이후에도 자율적으로 전산실을 운영한다는 미명 아래 밤늦게까지 전산실에 남아 컴퓨터로 게임을 하거나 인터넷을 사용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당시 데이콤의 X.25 요금에는 두 가지 허점이 있어서 최우형과 전산반 동료들은 이 점을 잘 활용했다. 한가지는 1989년 말까지 국내 시내통화요금이 통화당 정액요금이었다는 것이다. 이를 이용해 모뎀을 사용해 전화로 네트워크에 접속하면 몇 시간이고 끊지 않고 계속 사용해도 한 통화요금만 부과되었기 때문에 늦은 새벽까지 요금부담 없이 사용할 수 있었다. 두번째는 당시 경기과학고에 발급된 X.25 계정은 사용량에 따른 요금이 과금되지 않았고, 해당 계정의 사용량도 확인하지 않았기 때문에 고가의 통신요금 부담이나 과도한 사용량에 의해 제재를 당할 염려 없이 마음껏 외국의 인터넷을 사용할 수 있었던 것이다.
[표4. 당시 데이콤 X.25 요금표??]
이렇게 인터넷을 사용하다보니 1990년 대전의 과학기술대에 입학해서도 최우형은 "인터넷은 공짜"라는 생각으로 자유롭게 인터넷을 이용했다. 과기대의 중형컴퓨터들은 국내 인터넷에 전용선으로 연결되어 있었고, 인터넷으로 연결된 해외 네트워크와 직접 이메일 등을 주고받을 수 있었기 때문에 사용환경도 더 좋아졌다. 이때까지만 해도 "인터넷"이라는 용어는 거의 사용되지 않았고, 주로 "NSFnet"이라고 불렸다. 당시 최우형이 가장 많이 방문해 자료를 다운로드하던 곳은 USENET의 뉴스그룹이었다. 그에게 USENET FAQ는 마치 백과사전처럼 별의별 자료가 모여있는 곳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개개인에게 할당된 디스크 용량이 크지 않았기 때문에 USENET의 "무한한" 자료를 디스크에 보관하지는 못하고, 계속해서 프린트해서 쌓아두고 읽었다.
어느날 최우형이 수업에 들어가지 않고 기숙사에서 프린트한 뉴스그룹 FAQ 뭉치를 읽고 있는데 전산실에서 전화가 걸려왔다. 최우형이 전화를 받아보니 전산과 담당직원이 “학생, 우리 학교의 이메일을 쓰는데, 이게 혹시 유료인 것을 알았나?"고 묻는 게 아닌가? 깜짝 놀란 최우형이 "몰랐다"고 대답하자, 이번 달 요금이 무려 500만원이 나왔다고 하는 것이었다. 당시 과기대는 등록금이 무료였다. 그런데 첫 학기가 끝나기도 전에 통신료로 500만원을 써버린 것이다. 통신료를 부담할 길이 막막해진 최우형은 학교를 그만둘 생각까지 했지만, 몇 달이 지나도록 통신료에 대한 이야기는 다시 들려오지 않았다. 바로 이 시기가 1990년 6월부터 미국과의 전용선 라인이 구축돼 이메일 사용이 인터넷으로 전환되는 시기였기 때문에 요금 문제가 조용히 사라지게 된 것이었다.
3.3 하나망의 구축
"1990년 6월 1일,서울 홍릉 한국과학기술원(KAIST)의 전자계산소 빌딩(지금의 테크노경영대학원 자리)에서 작지만 한국 현대사의 한 획을 긋는 이벤트가 열렸다. 기억하는 이는 드물지만, 이 날은 정확히 10년 뒤에 한국이 아시아 최대의 인터넷 대국이라는 칭호를 받을 수 있는 씨앗을 뿌린 날이었다. 이 날 전자계산소 빌딩에서는 한국과학기술원과 미국 하와이 대학 간에 처음으로 국제 인터넷 전용회선(leased line: 전화선처럼 모두가 공유하는 통신 케이블이 아니라 특정 기업만 이용하는 데이터 망) 개통식이 열렸다.
이 날 국제 인터넷 회선 개통의 주역인 KAIST 전길남 교수는 '선 스팍1' (미국 선마이크로시스템스사의워크스테이션의이름)의 전원을 켰다. 이 컴퓨터는 국내 인터넷 사상 처음 설치된 국제 인터넷 관문 호스트(host) 컴퓨터였다.
이 선 스팍1 컴퓨터가 가동되자마자 국내 하나망(KAIST, 서울대, 삼성전자 등 국내 주요대학과 연구기관 사이에 구축된 국내 최초의 인터넷 망)은 미국 하와이 대학의 네트워크를 통해 인터넷에 직접 연결되었다. 56Kbps 인터넷 전용선을 따라 전세계로 이메일과 데이터 파일이 흐르기 시작한 것이다."
[황순현, 닷컴 CEO, 그들이 꿈꾸는 또 다른 세상, p.79~80, 21세기북스, 2001.]
1989년, 박현제는 시드니행 비행기에 오른다. 그해 시드니에서 열린 IANW 중에 뉴질랜드, 일본, 호주와 함께 미국과의 전용선을 구축하는 프로젝트 협상에 참가하기 위해서였다. 이 프로젝트의 이름은 PACCOM(Pacific Communication Network), NSF의 지원을 받아 미국쪽에서는 하와이대학을, 아시아에서는 한국, 뉴질랜드, 일본, 호주를 연결하는 56Kbps 위성 전용선 라인을 구축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협상의 미국쪽 담당자는 하와이 대학의 토번 닐슨(Torben Nielson)이었고, 아시아 측에서는 일본의 준 무라이, 박현제 등이 참석했다.
[그림 6. NSF Award Abstract #9106198 Pacific Communications Network]
협상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협상의 쟁점이었던 미국과의 망 사용료는 아시아쪽 국가들이 전적으로 부담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당시 미국과의 전용회선을 연결하려면 NSF를 통하거나 일반통신사와 계약을 해야 했는데, NSF를 통한 교육연구망 간의 연결로 계약을 체결할 경우 비용이 일반 통신사와 계약하는 경우의 10~20% 수준으로 저렴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는 윈윈이었다. 이 협상을 통해 1989년 호주의 AARNET이 미국 NASA의 Ames와 연결되었고, 같은 해에 일본의 와이드 프로젝트(WIDE Project)가 미국의 하와이대학과 연결되었다.
한국의 경우도 PACCOM을 통해 하와이대학과 전용선 연결이 협의되어 있었다. 하지만, 전용선을 구축하는 프로젝트를 SALAB 차원에서 진행하기란 무리였다. 당시 전용선 설비 및 회선사용료는 1억 5천 만원 가량이었는데, 이 금액은 대학연구실에서 부담할 수 있는 금액은 아니었다. 결국 대학 내에 별도의 연구센터를 설치하거나 통신회사가 주도하는 방법 밖에 없었다.
당시만 해도 한국의 컴퓨터 네트워크 분야에서는 인터넷보다 X.400 등의 데이터통신 프로토콜의 전망이 밝다고 보는 편이었다. 84년 X.25 데이터통신 서비스를 시작한 데이콤의 판단도 데이터통신 쪽이었다. 자칫하면 모처럼 찾아온 기회인 미국과의 전용선 구축 프로젝트가 어쩌면 흐지부지될 수도 있었던 상황이었다. 다행이 한국통신 연구센터가 인터넷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고, 미국과의 전용선 망을 운영할 컨소시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기로 하면서 일이 추진되기 시작했다. 기존 SDN 가입자들이 중심이 되어 각 기관과 개인으로 이루어진 회원구조가 만들어지고, 한국통신, 한국전자통신연구소(ETRI), KAIST, 포항공대의 기관장들을 이사로 하는 이사회도 구성되었다. 이사회의 의장은 한국통신이 맡았다.
설비 및 운영비용은 회원들이 분담해 마련하기로 했다. 이렇게 만들어진 조직이 바로 "하나(HANA)"라는 조직이었다. 미국과의 전용선 망의 이름도 "하나망"으로 불리게 되었다. 초기 하나망은 '하나/SDN'망으로 불렸는데, 이전 SDN 사용자들을 고려하려는 이유도 있었지만, 하나망이 과거 한국의 교육연구망인 SDN과 같은 망이라는 사실을 미국 측에 알리기 위한 조처였다. 한국의 교육연구망은 미국과 달리 대학이나 비영리 교육기관 뿐 아니라 기업의 연구소도 포함되어 있는 구조였는데 이와 같은 산학 컨소시엄은 비영리 망과의 연결만 담당하는 NSF의 입장에서 볼 때 오해의 소지가 있었기 때문이다.
하나망 서비스는 앞서 묘사된 것처럼 1990년 6월 1일 시작되었다. 실제 미국과의 전용선을 사용한 인터넷 구축이 성공한 것은 이보다 2달 앞선 3월 24일이었다. 예상치 못한 케이블 수급 문제로 고초를 겪었던 박현제 등 네트워크 관리자들은 만반의 대비를 하고, 연결 프로그램을 가동시켰다. 그리고 몇 초 후, "야호! 붙었다." 탄성이 터졌다. 더이상 모뎀을 통한 연결이 아니었다. 56Kbps 데이터통신을 위해 DSU(Digital Service UNIT)를 설치한 서울 홍릉의 KAIST의 컴퓨터가 TCP/IP 프로토콜을 통해 하와이 대학에 연결된 것이다. 이로서 드디어 전용선을 통한 인터넷 시대가 열리게 되었다. 네트워크 관리자들에게는 꿈이 현실이 되는 순간이었다. 그동안 국제전화회선으로 UUCP 메일을 주고받거나 마그네틱 테입에 담긴 USENET의 뉴스를 배송받을 필요도 없었다. 수백만원의 데이터 사용요금이 두려워 제대로 사용하지 못했던 인터넷을 이제는 56Kbps라는 빠른 속도로 원하는 만큼 인터넷을 사용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림7. 박현제(1990. May 4). network is connected. (email 캡쳐화면)]
하나망은 1992년 6월, NASA Ames를 통한 해저케이블(56Kbps)로 연결방식을 변경하고, 1992년 9월에는 한국통신연구센터로 운영센터를 이전시킨다. 이로써 1983년 SDN 운영센터가 KAIST 전산실로 이전하면서 시작된 KAIST의 운영 시기를 마감하게 된다. 또한, 1991년, 홍콩의 CUHK(홍콩중문대학교)가 하와이대학과 전용선으로 연결되면서 PACCOM 프로젝트를 통한 협상국들이 모두 미국과 전용선으로 연결되게 되었다. 전용선을 이용한 인터넷이 전세계적으로 일반화되기 시작하면서 점차 인터넷의 속도가 품질을 나타내는 지표로 자리잡아 갔다.
하나망은 1994년부터 시작된 상용인터넷 서비스가 번성할 때까지 교육연구 목적의 비영리 망으로 계속 운영되었다. 이처럼 하나망의 성립에서 눈여겨보아야 할 점 중 하나는 최초의 해외 전용선 인터넷 구축 과정에서 민간부문의 참여가 두드려졌다는 것이다. 만약 그 당시 한국통신연구센터 등이 참여하지 않아 미국과의 전용선 연결이 늦춰지거나 무산됐다면, 한국은 1993년 웹 등장 이후 폭발적으로 성장하는 전지구적 인터넷 환경에 대비를 하지 못하고 영영 뒤쳐져 있을 지도 모를 일이다.
사실, KAIST를 제외하면, 하나망의 이사기관들 대부분도 인터넷보다 당시 각광받고 있던 OSI 프로토콜 연구가 주요 연구분야였다. 한국통신의 경우도 인터넷의 성공에 대해 확신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탄탄한 재정 위에서 인터넷 개발에 많은 노력을 기울이는 편이었다. 한국통신은 서울 우면동에 위치한 자사 연구센터에 LAN을 구축하고, 여기에 56Kbps로 연결된 인터넷 망을 연결함으로써 자사 연구센터에서 쉽게 인터넷을 이용할 수 있도록 했고, Mosaic의 등장으로 월드와이드웹(WWW)이 폭발적으로 성장하면서 등장하기 시작한 미국의 상용인터넷 서비스 동향을 주시하고 있었다. 이러한 과정의 결과, 한국통신은 국내 최초로 상용인터넷 서비스를 시작하게 된다.
Reference
한국인터넷역사 인터뷰: 박현제
한국인터넷역사 인터뷰: 최우형
한국통신연구개발원 하나망사무국, '93년도 하나망 결산서 승인, 1994.3.4.
허문행, KT 인터넷 추진 20년과 시사점, 발표자료, 2012.8.31.
Douglas E. Comer, The Internet Book, 4th Ed., Pearson Education Inc., 2007.
NSF Award Abstract #9106198 Pacific Communications Network
[park 1989]
[chon 2005]
*book1 chapter 2
*book1 chapter 4
2013.1.7
문의: sec at InternetHistory.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