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11.19/11.26
안정배
“SDN(System Development Network)은 국내의 전산 전자 분야의 연구 기관들의 컴퓨터로 구성된 연구 개발용 컴퓨터 네트워크이다. SDN의 연구는 가입 기관 사이에 소프트웨어나 인력 등의 자원의 공유, 국내외 최신 정보를 신속히 교환하는 연구 환경의 조성 및 네트워크 개발 기술의 축적을 목적으로 한다. 1986년 2월 현재 21개의 기관이 가입, 50여개의 컴퓨터가 연결되어 있으며, 제공 서비스로는 전자우편(mail transfer), 파일 전송(file transfer), 가상 터미날(virtual terminal) 및 전자 게시판(Electronic Bulletin Board)이 있다. 국제적으로는 미국의 교육 연구망인 CSNET, UNIX machine 간의 정보 교환을 목적으로 하는 USENET/UUCP Net와 상호연결을 하고 있어 북미, 유럽, 오스트레일리아 및 일부 아시아 지역과 정보교환이 가능하다. 현재로는 UNIX machine 만이 가입되어 있으며, 이종 OS의 연결 및 X.25 protocol을 이용한 네트워크 확장의 연구가 진행되고 있다.”
- SDN 동향보고 ‘86 2월
KAIST 전산학과 SDN에 가입
1982년 5월, 국내 최초의 TCP/IP 네트워크 구축 이후, 한국의 컴퓨터 네트워크 연구는 새로운 전기를 맞이하게 된다. 1982년 말에는 먼저 구축된 서울대와 KIET에 KAIST(한국과학기술원) 전산학과의 VAX 11이 추가되어 세 개의 노드를 가진 네트워크 SDN이 구축되었다. 이후, SDN의 관리/운영을 KAIST 전산학과 SALAB(System Architecture Lab; 시스템 구조 연구소)에서 맡게 되면서 이 VAX 11이 네트워크의 중심이 되었다.
[그림1. 1983 SDN Map]
[그림2. VAX 11]
1983년 9월, KAIST 전산학과의 VAX 11의 UNIX OS를 4.1BSD에서 4.2BSD로 업그레이드하는 과정에서 외부 네트워크가 끊어져 한동안 SDN이 마비된 적이 있었다. 새로 출시된 4.2BSD로 OS를 업그레이드했으니 다시 컴퓨터를 서로 연결해야 했는데, 4.2BSD는 외부장치를 연결할 때 시리얼라인(전용선)을 사용하도록 프로그램되어 있었던 것이다. 당시 한국에서는 이 시리얼 라인을 구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SDN이 끊어지게 된 것이었다. 할 수 없이 박현제가 직접 커널 소스 등을 만들어 개발을 시작했는데, 커널 프로그램을 만드느라 시스템을 리부팅해야 했기 때문에 학생들의 원성이 자자했다. 당시 전산과나 전자과, 기계과 학생들은 시뮬레이션 하느라 컴퓨터를 1~2주일 씩 돌리곤 했는데, 이 작업들이 시스템 리부팅으로 무산되었기 때문이었다. 박현제의 커널 프로그램 개발이 거의 완료되었을 때, 미국 하버드 연구팀이 한 발 앞서 프로그램을 내놓았다. 박현제로서는 아쉬운 일이었지만 덕분에 1983년 12월 ?? 에는 다시 SDN이 되살아날 수 있었다.
이후, SDN은 점차 확대되어 1985년 말에는 20여 기관, 40여 컴퓨터가 SDN의 일원이 되었고[cho 1986a], 1990년까지 32개 기관으로 확대되었다. KAIST, 한국데이타통신(DACOM), 한국전자통신연구소(KIET), 한양대학교를 주 노드로 하고, 여기에 다시 3~10개의 기관이 연결되는 방식이었다.
[CSRC-Net-010]
[그림 3. SDN Map (1990)]
SSM-16
SDN 연구와 함께 시스템 연구도 한창이었다. 1984년에는 삼성전자와 ETRI??가 공동으로 국내 최초의 16비트 마이크로 컴퓨터인 SSM-16을 개발하면서 비교적 쉽게 TCP/IP 네트워크를 활용할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되었다. SSM-16은 당초 전자교환 회선처리용량 부족을 해결하기 위해 개발된 16비트 마이크로컴퓨터로 당시 최신 16비트 마이크로프로세서였던 모토로라 M68000 칩을 사용되었다. 이 칩은 애플이 1984년 1월 출시한 매킨토시에도 사용된 칩이었다.
SSM-16을 통해 TCP/IP 네트워크를 사용할 수 있었던 까닭은 OS로 UNIX V.7을 사용했기 때문이었다. UNIX OS는 당시 마이크로 컴퓨터의 대표적인 OS였지만, UNIX V.7의 코드라이센스를 발급받아 자체 개발한 하드웨어에 성공적으로 이식해 사용한 것은 SSM-16이 최초였다. 이를 통해 다양한 응용 소프트웨어를 보다 용이하게 개발할 수 있는 기반도 마련되었으며, UNIX OS를 기반으로 TCP/IP 네트워크에 필요한 라우팅이 가능해져, SSM-16을 사용하는 각 대학과 기관 내의 네트워크도 SDN을 이용할 수 있게 되었다. 1986년을 기준으로 동국대, 전남대, SERI가 SSM-16을 이용해 SDN에 연결되었고, KAIST, KIT, KTA 등에서도 일부 SSM-16을 통해 SDN을 이용했다. 이 시기까지만 해도 '라우터'를 구할 수 없었기 때문에 TCP/IP 소프트웨어는 3Com의 UNET을 사용했다.
[그림4. SSM-16]
[표1. SDN site list, As of Jan 1986]
SDN 내의 다중 네트워크
SDN은 WAN와 LAN으로 이루어져 있었고, WAN은 주로 TCP/IP나 UUCP 프로토콜을 사용해 연결되었다. 이외에 미국 CSNET과 연결하기 위해 PMDF도 사용했다. PMDF는 CSNET의 Phonet 소프트웨어인 MMDF(Multi-Channel Meomo Distribution Facility)의 Pascal 버전이었다. 또한 한 기관 내에서 보유하고 있는 컴퓨터 수가 증가함에 따라 LAN을 구성하는 기관도 점차 늘어나고 있었다.
사용자들은 SDN을 통해 이메일 교환, 파일 전송(FTP), 전자게시판(BBS)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SDN을 통해 사용자들이 가장 기대했던 기능은 해외 네트워크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SDN은 그 시작부터 국내의 시스템구축 실험이나 컴퓨터 네트워크 자원 및 정보의 공유 뿐 아니라, 해외의 첨단기술을 효율적으로 들여올 요량으로 만들어진 네트워크였다. 컴퓨터 네트워크를 이용한 외국과의 활발한 정보교환이나 기술교류를 통해 당시의 낙후된 한국의 과학기술계를 진보시키고자 했던 것이다. 따라서 국내 TCP/IP 네트워크 구축의 다음단계는 서둘러 해외 네트워크와 SDN을 상호연결시키는 것이었다.
SDN과 해외 네트워크
당시 세계의 모든 컴퓨터 네트워크는 컴퓨터 네트워크를 연구할 목적으로 만들어진 연구/개발 네트워크였다. 따라서 지금처럼 개인사용자 사이의 일상적인 대화보다는 네트워크 분야의 전문 기술들이 공유되고, 이에 대한 토론이 컴퓨터 네트워크의 주요 컨텐츠였다. 당시에도 단연 미국이 모든 면에서 앞선 기술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미국의 컴퓨터 네트워크에는 주요 소프트웨어의 소스 프로그램들이 올라와 있었고, 연구자들이 공유한 연구결과를 놓고 활발한 토론이 벌어지고 있었다. 이를테면, 스몰톡 같은 프로그램의 소스를 다운로드해 자신의 시스템에 설치하고, 그 결과를 다시 공유하는 식이었다.
미국의 주요 컴퓨터 네트워크로는 미국 국방성의 지원으로 1968년 처음으로 TCP/IP 네트워크를 구축한 ARPANET과 UNIX 운영체제에 기본으로 포함되어 었던 UUCP 소프트웨어를 사용한 Usenet, 그리고 미국 과학재단의 지원 아래 ARPAnet에 참여하지 않은 대학과 연구소들을 연결한 CSNET이 있었다.
이중 미국 국방성이 관리하고 있던 ARPANET은 가장 진화한 컴퓨터 네트워크였지만, 접속제한정책 때문에 미국 국내 및 유럽의 NATO 조약국에서만 제한적으로 접속할 수 있었다. UNIX의 모든 버전에 기본으로 탑재되어 있는 UUCP protocol을 이용한 Usenet은 상대적으로 저렴한 이용료로 이메일과 뉴스 서비스를 제공해 북미와 유럽에서 빠른 속도로 퍼져나가고 있었다. 한편, CSNET은 ARPANET의 높은 기술적 성과에 주목하면서 점점 늘어날 컴퓨터 네트워크 관련 전문가를 양성하고, 네트워크 기술에 대한 다양한 정보의 공유를 촉진시키기 위해 개발되고 있었다. 또한, CSNET은 TCP/IP 프로토콜 뿐 아니라 국제전화회선이나 데이터통신망인 X.25 를 통해서도 접속할 수 있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었다.
SDN은 1983년 7월, 미국의 UUCP 노드인 haplabs와 UUCP로 연결됨으로써 처음으로 해외 네트워크를 구축하게 된다. 1983년 7월에는 유럽의 UUCP 네트워크인 EUNET 노드였던 네덜란드의 mcvax로부터 EUNET 뉴스를 제공받기 시작하고, 1984년 12월에는 CSnet과도 연결되어 해외 네트워크와 정보를 교환할 수 있게 되었다. 당시의 해외 네트워크 이용은 대부분 이메일 사용과 함께 국제전화회선(dial-up)을 사용하여 Usenet에 접속해 Usenet이 운영하는 뉴스그룹의 자료를 다운받아 보는 것이었다.
1990년대 들어서 웹(www)에게 그 기능을 넘겨주기 전까지 Usenet과 CSnet의 자료는 네트워크의 주 이용자였던 연구자들에게 그야말로 보물창고였다. 이전까지만 해도 연구자들이 필요한 자료를 구하려면 출판된 저널을 찾아보는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저널에 실린 자료는 저널 게재를 위한 검토 기간을 고려하면 통상 연구가 끝난 지 1~2년이 지난 자료일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해외에서 출판된 저널을 배송받는데도 몇 주일씩 걸리던 때였다. 반면, Usenet의 뉴스그룹에는 갓 발표된 생생한 연구자료들도 게시되어 있어서 개발속도가 빠른 분야의 연구자들은 연구패턴을 획기적으로 바꿀 수 있었다. 게다가 네트워크 분야의 경우에는 네트워크 소프트웨어의 소스코드도 구할 수 있었으니 연구에 굉장한 도움이 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림 5. 전자우편]
[그림 6. 뉴스그룹]
국제 네트워크 조율
하지만 지금처럼 세계 각지에 흩어져있는 자료를 검색엔진으로 찾아들어가 원하는 자료를 자유롭게 다운로드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상대편 네트워크의 관리자를 알고 있는 것이 아니라면, 상대 컴퓨터에 접속할 수 있는 권한을 얻거나 상호연결 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다. 네트워크 상호간의 연결 자체가 기술적으로 굉장히 어려운 시기였기 때문에 연결을 시도한 다음 전화로 상대편 관리자에게 결과를 확인해야 했다. 요컨대 당시의 컴퓨터 네트워크는 모두 사람과 사람의 네트워크에 기반을 둔 네트워크였던 것이다.
Usenet의 뉴스그룹에 접속해 뉴스를 다운로드하는 것도 어느날 하늘에서 뚝 떨어진 사건이 아니었다. 1982년, 서울대와 KIET 사이의 SDN이 구축된지 반 년 후인 1982년 10월, 전길남은 아시아와 북미, 유럽 사이의 UUCP 네트워크 구축에 대한 논의에 참여하기 위해 보스턴에서 열린 USENIX 컨퍼런스에 참석했다. 이 회의를 통해 UUCP 네트워크에 포함된 한국은 향후 Asianet의 중추로 자리매김할 초석을 쌓게 된다. 그는 이듬해 1월, Usenet 관련 Birds of Feather 회의가 열리는 샌 디에고의 UNICOM 회의로 날아가 Usenet에 접속할 수 있는 "netnews"라는 소프트웨어를 구해 귀국했고, 이 netnews를 설치하면서 비로소 SDN 이용자들이 Usenet의 뉴스자료를 이용할 수 있게 된 것이었다.
UUCP 네트워크에 접속할 수 있는 소프트웨어 뿐 아니라, 미국의 특정 UUCPnet 노드에 접속할 수 있는 협의도 필요했다. 1985년, 전길남은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열린 IANW에 참가해 암스테르담 수학센터(Mathematics Centrum)의 Teus Hagen을 만나 네덜란드의 UUCPnet 노드인 mcvax와 SDN 사이의 이메일 교환에 대해 협의하고, 미국의 hplabs(휴렛-패커드 연구소)와 seismo(지진연구소)와도 이메일과 뉴스를 교환하기로 협의했다. UUCP를 통한 네트워크가 상대적으로 저렴하긴 했지만, 여전히 해외 네트워크와의 교신에 가장 높은 장벽은 국제전화회선 사용료였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Seismo의 네트워크 관리자였던 Rick Adams와 협의해 Usenet 뉴스를 마그네틱 테이프에 저장해 우편으로 받아볼 수 있게 되었다. 이렇게 받은 뉴스 자료를 일본과 공유하고, 이후 Asianet 구축 후에는 Asianet의 가입국가들과도 공유하였다.
TCP/IP over X.25와 IP 주소 할당
해외를 돌아다니며 해외 네트워크를 구축하는 일은 전길남이 도맡고 있었고, 이제 막 구축된 SDN의 운용은 SALAB의 학생들이 맡고 있었다. Usenet의 자료를 이용할 수 있게 된 것은 분명 획기적인 변화였지만, 당시 가장 우월한 프로토콜이었던 TCP/IP 프로토콜을 이용해 국내 네트워크를 구축해 놓고, 막상 해외에서는 이메일과 뉴스만을 제한적으로 이용해야 하는 사실은 못내 아쉬운 일이었다. 간혹 Usenet 뉴스그룹에서 뉴스를 다운로드하다 보면, "이 정보는 FTP로 가져갈 수 있다"고 명시된 자료가 올라오기도 했는데, 이럴 때마다 파일전송서비스(FTP)를 이용할 수 있는 인터넷(TCP/IP 네트워크)에 대한 갈증이 커져갔다.
1984년부터 1989년까지 SDN 관리자로 일했던 박현제는 이러한 갈증을 가장 가까이에서 느끼는 사람 중 하나였다. 서울대 공대 재학시절 어수선한 사회 분위기 속에서 사회문제에 깊은 관심을 갖게 된 박현제는 컴퓨터 네트워크가 컴퓨터를 이용해 사람과 사람의 관계를 파고드는 학문이라는 것을 깨닫고 KAIST 전산학과를 선택한 대학원생이었다.
입학시험 때 으레 지나가는 질문만 던지는 다른 교수들과 달리 KAIST를 학생들이 오고 싶어하는 학교로 만들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이겠느냐는 질문을 던진 전길남 박사에 대한 인상과 연구실에서 VAX 11을 다룰 수 있다는 매력 때문에 전길남 박사의 SALAB에 지원하게 되었는데, 바로 이 선택을 기점으로 그는 국내 최초의 컴퓨터 네트워크인 SDN을 가장 오랫동안 관리한 네트워크 매니저가 된다. 박현제는 이후, 미국과 전용회선을 이용해 첫번째 이메일 교신을 하게 되는 장본인이자 국내 최초의 초고속인터넷 서비스를 시작하는 주요 사건들의 주역이 된다.
당시까지만 해도 해외 네트워크는 모두 국제전화회선을 이용하고 있었다. TCP/IP를 이용하려면 전용회선이 필요했는데, 해외와 전용회선은 아직 설치되지 않았고, 데이콤에서 개발한 X.25 데이터 통신망이 개발되어 있었지만, 가격이 비쌌기 때문에 잘 이용되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박현제를 비롯한 SDN 운영자들은 어떻게든 TCP/IP 프로토콜로 미국의 인터넷(Arpanet, CSnet)에 접속해야겠다는 생각으로 다양한 접속방법을 찾고 싶었다. 그러던 중 박현제는 미국의 Perdue 대학의 John T. Korb이 개발한 TCP/IP over X.25/IP-to-X.25 Interface ?? 라는 소프트웨어를 이용해 X.25망으로 CSnet에 접속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박현제는 당시 데이콤을 통해 막 상용서비스를 시작한 X.25 데이터통신망을 통해 CSnet에 접속하기로 했다.
TCP/IP를 통해 네트워크에 접속하기 위해서는 IP 주소가 있어야 했기 때문에 Usenet 뉴스를 뒤져서 IANA에 IP 주소의 할당 신청도 했다. IP 주소 할당은 3개의 클래스로 나뉘어져 있었는데, 당시에는 일반적으로 256대의 컴퓨터를 연결시킬 수 있는 C 클래스의 IP 주소를 신청하는 추세였다. 하지만 한국은 앞선 네트워크 기술과 향후 대중화를 고려해 6만 5천 대 이상의 컴퓨터를 연결할 수 있는 B 클래스의 IP 주소를 신청했고, 한 달 만인 1986년 8월에 IP 주소가 할당되었다는 연락을 받는다. 국내 최초의 IP 주소인 128.134.0.0이 할당된 것이다.
정보 공유에 대한 갈증으로 시작된 이 일은 미국의 네트워크 제한 정책을 변경시키는 단초가 되었다. 당시 미국의 주 TCP/IP 네트워크인 ARPANET은 미 국방성 프로젝트의 영향으로 미국 국내와 유럽의 NATO 조약국인 영국과 노르웨이에만 한정적으로 개방되어 있었다. 냉전이 종식되지 않았던 80년대 중반에는 유럽을 통해 첨단기술이 유출되는 경우가 종종 일어났고, 이에 미국은 과학기술이 소련의 영향권으로 넘어가지 않도록 신중을 기하고 있었던 것이다. 심지어 휴전선을 두고 북한과 치열하게 대치하고 있던 한국도 같은 이유로 미국의 ARPANET 접속을 거절당한 적이 있을 정도로 컴퓨터 네트워크 기술의 보호에 대한 미국의 입장은 완고했다. 하지만 1986년, NSFNET의 국제협력담당자였던 Steve Wolfe가 IPv4 개방을 선언함으로써 한국도 IP 넘버를 할당받을 수 있었고, 세계 인터넷 노드에 포함될 수 있게 되었다. NATO 우방국인 영국과 노르웨이에게만 한정적으로 ARPAnet이 개방된 지 10년만의 일이었다.
SDN에서의 한글 표준화
해외 네트워크 구축과 함께 국내 네트워크인 SDN에서 한글을 사용할 수 있게 하는 기술의 개발도 동시에 이루어졌다. 1980년대 중후반 당시에는 한글 표준안이 마련되어 있지 않아 한글 이용에 제약이 따랐다.
1980년대 초반에는 SDN은 물론 개별 컴퓨터 네트워크를 위한 한글 표준화도 되어 있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에 각 기관마다, 심지어 같은 기관 내에서도 소프트웨어 종류에 따라 다른 한글 코드를 사용하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한글을 사용하기 위한 한/영문 혼영 터미널이나 프린터를 보유하고 있지 않았고, 보유하고 있다 하더라도 그 특성이 제품마다 모두 달랐다.
하지만 1980년대 중반에 들어서면서 점차 한/영문 혼영 기기들이 보급되고, SDN을 이용하나 통신 빈도나 사용범위가 증대되면서 각 기관에서 개발한 한글 소프트웨어의 교환도 잦아지고 있었다. 이러한 변화는 SDN 내 단일 한글 표준안의 필요성을 점점 불러일으켰다.
[표. SDN의 각 기관에서의 한글 소프트웨어 개발 상황 (“SDN에서의 한글 표준화" SDN Workshop ‘86 proceedings)]
SDN에서의 한글 표준화는 Presentation 계층에서의 한글 코드 표준화와 Application 계층에서의 각 응용 프로토콜 표준화를 의미하고 있었기 때문에 국내 및 국제 표준안을 고려해 신중하게 결정해야 하는 문제였다. 1986년 SDN Workshop에서는 7비트 코드, 8비트 코드, 16비트 코드 및 3바이트 코드 안을 두고 한글 표준에 대한 논의가 시작되었다. 이 논의는 이후 1993년 12월에 발행된 인터넷에서의 한글 메시지 인코딩 방법을 다룬 RFC1557가 만들어지는 초석이 되었다.
국제학술대회
R&D는 기본적으로 가능한 해결책을 찾아 적용하는 일이기 때문에 같은 분야의 정보를 공유할수록 정보의 부재로 인한 시행착오를 줄이고, 이에 소모되는 비용을 아낄 수 있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컴퓨터 네트워크를 통한 정보 교환이 제한적이었기 때문에 대부분의 정보는 인쇄매체를 통하거나 사람과 사람이 직접 만나 교환하는 수밖에 없었다. 국제 학술대회는 이 두 가지 방식이 잘 접목된 행사였기 때문에 각 분야에서 보다 전문적인 주제를 가지고 국제 학술대회를 개최하는 추세였다.
하지만 아시아 극동의 개발도상국이었던 한국에서 최첨단 과학기술 분야의 국제학술대회를 개최한다는 사실은 표면적으로는 어색하게 보일 수 있는 일이었다. 그래서 1985년에 개최된 PCCS도 언뜻 보기에는 다른 분야에서 비싼 돈을 들여 외국인을 "모셔오는" 국제학술대회와 비슷한 것으로 보일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시기에 한국은 미래 컴퓨터 네트워크 분야를 이끌 비전을 가지고 기반을 탄탄히 다져가고 있었다. 이미 한국은 미국에 이어 세계 두 번째로 국내 TCP/IP 네트워크(SDN)를 자력 구축한 상태였으며, 미국, 유럽과의 해외네트워크 구축에도 성공하고, 이를 기반으로 아시아-태평양의 지역 네트워크를 주도적으로 제안하는 등 컴퓨터 네트워크 분야에서 이미 세계적인 활동을 펼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활동을 바탕으로 한국은 1985년, 세계 최초로 전세계(북미, 유럽, 아시아)를 아우르는 컴퓨터 네트워크 분야의 국제학술대회를 개최하기에 이른다.
기획과 사전준비
1980년대 초까지만 해도 컴퓨터 통신 분야에서 아시아는 불모지나 다름없었다. 한국을 제외하면 아시아의 컴퓨터 네트워크 기술은 많이 뒤쳐져 있었고, 이 까닭에 컴퓨터 네트워크와 관련된 주요회의나 학술대회도 자연스럽게 유럽과 유럽 도시에서만 개최되고 있었다. 당시의 인터넷은 현재처럼 세계인의 일상에 없어서는 안될 환경이라기보다는 이들 국가들이 보유하고 있는 첨단기술에 가까웠고, 이를 전세계로 확대시키는 노력은 거의 나타나지 않을 때였다.
1984년 NUS/UNESCO 워크샵 참가자들은 이에 착안해 아시아에서 컴퓨터 네트워크 분야의 국제학술대회를 개최하자는데 의견을 모은다. 기본적으로 아시아 국가들의 컴퓨터 네트워크를 세계에 알리고, Asianet을 제안하는 것이 목적이었으므로 아시아 각국이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개최를 맡아야 했고, 국제 학술대회로서의 위상에 걸맞게 당시 컴퓨터 네트워크 분야를 주도하고 있었던 북미, 유럽의 적극적인 참가도 이끌어내야 했다. 1984년 당시, 아시아에서 이 일을 해낼 수 있는 국가는 한국 뿐이었다.
싱가포르에서 워크샵을 마치고 돌아온 전길남은 곧바로 PCCS 개최를 준비할 사무국을 꾸렸다. 당시 SALAB 박사과정이었던 한선영이 자원해 그날부로 PCCS 사무국이 발족되었다. 사무국이 처음 맡은 일은 국내외 연구자들에게 참가를 요청하는 공고(Call For Paper)를 만들어 배포하고, 외국 현지에서 협력해줄 적임자를 찾는 일이었다.
[그림 7. PCCS Advanced Announcement]
[그림 8. PCCS Call for Paper]
특히 미국과 유럽에 참가예정자들이 집중되어 있다보니 미국과 유럽에서 참가자들을 모으고, 이들을 서울로 올 수 있게 하는 미주 및 유럽 협력을 맡는 일이 매우 중요했다. 당시 IEEE 에서도 활동하며 전길남과도 교류가 있었던 South Florida 대학의 김광회(Kane Kim) 교수가 이 일을 맞는데 적임자였다. 김광회 교수가 프로그램 위원회 의장직과 함께 미주와 유럽의 협력을 담당하면서 PCCS 준비에 박차를 가할 수 있었다. 아시아 지역 네트워크의 주 파트너였던 일본 쪽과의 협력은 와세다대학에서 연구활동을 하다 당시 막 한양대로 부임한 박용진 교수가 맡았다. 시간이 갈수록 사무국의 일이 많아지면서 나중에는 SALAB 학생 대부분이 PCCS 준비에 참여하게 되었고, 외부에서 2명의 전임직원도 채용했다.
전임직원이었던 김수근과 조경희는 외국과의 이메일 연락 및 재무, 행정 업무를 전담했고, 홍보, 세션 준비, 논문발표집(Proceedings) 제작, 행사장 준비, 회의 운영, 회의장 내 이메일 서비스 제공, 참가자 맞이, 등록업무, 국내 관광 프로그램 및 산업시찰 등은 주로 SALAB의 박사과정 학생들과 SDN 스탭 조혜순 씨의 자원으로 준비되었다.
컴퓨터 네트워크 분야에서 열리는 국내 최초의 국제학술대회이자, 명실상부한 국제 학술대회로 기획단 행사다 보니 신경써야 할 문제가 한두가지가 아니었다. 각종 국제 회의가 무수히 열리는 지금과 달리 당시 사무국의 가장 큰 고민은 국제회의 경험이 없었던 학생들이 행사를 준비하고 진행해야 한다는 사실이었다. 물론 이전에도 서울에서 국제적인 행사가 개최된 적은 있었지만, 소수의 외국인을 초청하고 대부분은 국내 참가자들로 구성된 경우가 대부분이었고, 그나마 컴퓨터 네트워크 분야는 전무했다. 국제적인 행사의 분위기를 모르는 상태에서 해외 참가자들을 정중히 맞이하거나 수월한 행사 진행을 기대할 수는 없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PCCS 사무국은 1985년 여름, 정철과 허진호를 미국으로 보내 현지에서 열리고 있던 학술대회에 참가시키고 미국에서 진행되고 있던 PCCS 준비를 돕게 했다.
재정 문제는 큰 걸림돌은 아니었다. 국제학술대회라는 이름을 걸어놓고, 한두명의 외국 연구자들에게 많은 예산을 쓰면서 구색을 맞추던 당시의 한국의 분위기와 달리 150여 명의 외국 참가자들 대부분이 숙소 및 체류비용을 자신이 부담하며 PCCS에 참석했기 때문이었다. 이중에는 가족 단위로 한국을 찾은 발표자들도 있었는데, 아마 당시 외국에 거의 알려지지 않았던 한국에서 국제 규모의 학술대회를 개최한다는 사실과 88 올림픽 개최예정지로서의 이미지가 겹쳐져 참석자들의 호기심을 자극한 측면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림 9. PCCS 행사장 사진??]
AsiaNet의 태동
1985년 10월 21일부터 닷새간 서울 쉐라톤워커힐호텔에서 개최된 PCCS(태평양 컴퓨터 통신 국제학술대회)는 명실상부 전세계의 컴퓨터 네트워크 전문가들이 한 자리에 모인 최초의 세계적 컴퓨터 네트워크 관련 국제학술대회였다. 아시아, 북미, 남미, 유럽 대륙의 16개 국가로부터 300여 명(외국 참석자 150여 명)이 참석했으며, 모두 108편의 논문이 발표되었다. 이들은 주로 미국의 UNIX 관련 회의 참가자, IANW이나 CSNET, EARN(유럽)과 관련된 전문가, Asianet 국가의 네트워크 전문가, IEEE 멤버 등 각국의 컴퓨터 네트워크의 책임자들이었다. 이중에는 지금까지도 쟁쟁한 명성이 남아있는 L. H. Landweber, D. L. A. Barber, D. Farber, J. Postel과 같은 세계 최고의 컴퓨터 네트워크 전문가를 비롯해 일본의 하루히사 이시다와 준 무라이, 호주의 R. Kummerfeld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첫날과 마지막 날인 10월 21일과 25일에는 4개의 tutorial 세션으로 이루어져 컴퓨터 통신, 분산시스템, 컴퓨터 구조 분야의 강의가 배치되었다. tutorial 세션은 미국에 파견되어 USENIX 회의 등에 참석하고 돌아온 허진호가 강사들과의 사전연락부터 세션 전반에 대한 준비를 맡았다.
10월 22일부터 사흘 동안은 32개의 세션이 진행되었다. 발표된 논문의 절반은 미국 참가자들로부터 제출되었고, 나머지는 유럽, 아시아, 남미의 참가자들로부터 제출되었다. 미리 청탁을 통해 입수된 초대 논문과 심의를 거쳐 선정된 일반 논문의 비율도 대략 절반씩이었다. 공식적인 세션이나 행사 외에도 여느 학술대회처럼 다양한 비공식 모임이 열렸는데, 이러한 비공식적인 모임, 회의, 토론을 통해 발표자들이나 참석자들은 서로 긴밀한 교류를 가질 수 있었고, 컴퓨터 네트워크 운영에 관한 협력도 대부분 이렇게 이루어졌다.
무엇보다도 주목해야 할 세션은 행사 나흘째 열린 "태평양-미국 컴퓨터 네트워크 공동 워크샵(Pacific-USA Joint Workshop on Computer Networks)"이었다. 이 자리에 참석한 전 세계의 주요 네트워크 담당자는 먼저 각 네트워크의 현황과 비전을 공유하고, 마지막에 전체 참석자가 함께 세계의 컴퓨터 네트워크를 상호연동하는 Global Network에 대해 토론했는데, 이 토론의 결과로 향후 지속적인 Global Network에 관한 논의가 시작될 수 있었다.
이미 컴퓨터 네트워크 분야에서 아시아는 물론 세계적으로도 중요한 위치로 떠오른 한국은 이미 범지구적 컴퓨터 네트워크라는 지도 위에서 아시아 지역의 네트워크 중추가 될 준비를 하고 있었다. 1984년 2월, 전길남은 싱가포르에서 개최된 마이크로컴퓨터 이용한 관한 NUS/UNESCO 워크샵에 참가해, 처음으로 아시아의 대학들을 컴퓨터 네트워크로 연결시키는 Asianet의 구축을 제안했고, 이어 그해 ??월, 파리에서 열린 IANW 기간 중 일본, 호주의 참가자들과 함께 Asianet을 주제로 한 최초의 워크숍을 열었다. 바로 이 워크숍이 최초의 아시아-태평양 네트워크 회의인 아시아-태평양 국제학술네트워크숍(IANW-AP)이다.
이렇게 공유된 Asianet의 아이디어가 전세계의 네트워크 전문가들이 참가한 가운데 개최된 "태평양-미국 컴퓨터 네트워크 공동 워크샵(Pacific-USA Joint Workshop on Computer Networks)"이라는 세션에서 Asianet에 소속된 국가들은 미국을 거쳐 간접적으로 연결되는 구조를 택하기로 한 것이다.
이 결정은 이듬해인 1986년 9월, 더블린에서 열린 5차 IANW 기간 중에 열린 제2차 Asianet 회의에서 다시 미국을 경우하지 않고 Asianet 소속 국가들이 직접 연결되는 계획으로 변경되었다. 그 결과로 이듬해인 1987년, 북미와 유럽을 제외한 최초의 독립적 지역 네트워크인 Asianet가 호주, 인도네시아, 일본, 한국,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홍콩이 참여한 가운데 탄생하게 된다. Asianet는 컴퓨터 네트워크가 미국과 유럽의 독주가 아닌 범지구적인 네트워크로 확대되는 주요한 기반이 되었고, 이 당시에 구축된 아시아-태평양 지역의 자립적인 네트워크 조율 전통은 APAN, APNG, APTLD, APCCIRN 등을 통해 현재까지도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
이 과정에서 주요한 역할을 한 것이 바로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 국가들의 컴퓨터 네트워크 연구 개발이었다. 아시아 국가들은 PCCS를 통해 국제적인 컴퓨터 네트워크라고 하면 북미와 유럽의 연결을 상상했던 당시의 통념을 깨고, 아시아에 한국을 비롯한 준비된 참여자가 있다는 것을 국제 사회에 알렸으며, 이를 바탕으로 전세계를 아우르는 컴퓨터 네트워크의 가능성을 더욱 앞당길 수 있었던 것이다.
PCCS가 개최된 다음 해인 1986년 더블린에서 열린 IANW에 참석한 L. H. Landweber는 미국에서 운영중인 NSFnet을 확대하는 형식으로 각국의 교육연구망을 연동하는 범 세계적인 국제교육망 계획을 소개한다. 미국과 유럽 사이에 64Kbps의 전용선 구축을 필두로 하는 이 계획에 한국과 서독이 포함됨으로써 세계 전 지역을 아우르는 국제 인터넷의 출현에 동참하게 된 것이다. 이 논의는 계속된 1989년까지 계속된 IANW의 주요 논의 주제였다. 아시아-태평양 지역의 APAN과 이후 유럽을 연결한 TEIN 등이 PCCS를 통해 형성된 참가자들의 네트워크를 통해 비롯된 것으로 볼 수 있다.
[editorial: 1984~1985 Norman Abramson의 UNESCO project과 관련된 내용]
비공식 행사와 휴먼 네트워크
공식 세션 외에도 PCCS는 한국의 컴퓨터 네트워크 기술력을 십분 드러내는 좋은 기회였다. 다음은 PCCS 행사를 생생하게 기록한 한 칼럼의 일부다.
"1985년 10월 19일 토요일 오후. Jennings 박사는 Washington D.C.에 있는 미 과학 재단(NSF)의 자기 사무실에서 마무리 정리를 하고 있다. 이제 일주일간 자리를 비우게 되기 때문이다. 그는 다음 주에 한국의 서울에서 있을 컴퓨터 통신관계 국제회의에 참석하러 떠나는 참이다. 책상 위의 서류뭉치를 깨끗이 정리한 그는 마지막으로 책상 옆의 터미널 앞에 앉는다. 자신에게 온 전자 우편을 정리하면서, 그 사이에 도착한 2개의 내용에 답장을 보낸다. 정리가 끝난 뒤, 자신에게 도착하는 전자 우편을 다음 일주일간 있을 곳에서 받아볼 수 있도록 하고 사무실을 나선다. 그의 머리 속엔 아직 며칠 전 Purdue 대학의 프로젝트 신청 건이 남아 있다. 그로부터 24시간 후, Jennings 박사는 서울 김포공항에 도착하여 호텔로 향한다. 호텔에 도착하여 여장을 푼 그는 샤워를 하고 바로 회의장으로 내려가 본다. 그 곳엔 미리 도착한 몇 사람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고, 회의장 한 구석에 설치된 터미널 앞엔 누군가가 열심히 일에 몰두하고 있다. 간단히 인사를 나눈 그는 터미널 앞에 앉아, 이번 국제회의의 사무국과 미리 연락하여 배정받은 자신의 계정으로 온 전자우편을 확인한다. 벌써 10여개의 내용이 도착하여 있다. 그 중에 Purdue 대학의 프로젝트 건은, 오면서 정리한 내용으로 결론을 지어 회답을 보낸다. 몇 가지는 그 자리에서 회답을 보내고, 몇 가지는 파일로 저장하고 그 내용을 바로 옆에 설치된 프린터로 인쇄한다. 이제까지 여러 번 국제회의에 참석해 보았지만, 회의장에서 자신에게 온 전자 우편의 처리를 가능하게 하는 시설을 본 적이 없는 그로서는, 이번 회의가 세밀하게 조직되었고 부드럽게 운영되고 있다는 생각을 하며 홀가분한 기분으로 호텔 방으로 돌아간다."
[전길남, "국제 회의장에서의 전자 우편 시스템", ??, 1986.1.]
허진호의 제안으로 국내에서는 처음으로 시도된 Birds of Feather 세션도 성공적이었다. 다양한 주제로 열린 BoF 세션의 주선은 이동만이 맡았는데, Usenet 개발을 둘러싼 뒷 얘기나 일본의 6세대 컴퓨터 개발에 얽힌 이야기가 BoF 세션을 통해 이루어졌다. 특히 일본의 아이소 교수가 발표한 6세대 컴퓨터에 관한 BoF는 100명 이상이 참여할 만큼 높은 관심을 끌었다.
"PCCS, 모든 것의 시작"
이러한 PCCS 회장의 분위기는 당시 20, 30대였던 젊은 네트워크 연구자들에게도 깊은 인상을 남겼다. "일본 인터넷의 아버지"로 불리는 준 게이오 대학의 무라이 교수도 당시 30대 초반의 나이로 PCCS에 참석했는데, 그가 최근 당시의 기억을 "PCCS가 바로 모든 것의 시작이었다(PCCS is the starting of everything)."는 말로 회고했을 정도로 당시 아시아 지역의 네트워크 연구자들에게 PCCS는 세계적인 컴퓨터 네트워크 연구의 진수를 경험할 수 있는 특별한 경험이었다.
PCCS 사무국을 담당했던 한선영의 경우는 졸업을 앞당길 수 있는 값진 인연도 얻었다. 당시 컴퓨터 네트워크 분야의 교과서 중 하나였던 Computer Networks라는 책에 그가 연구하던 분야인 virtual terminal 부분을 집필한 영국의 D. Barber가 PCCS에 참석한 것이다. 심지어 Barber 교수는 한선영의 논문 발표 현장에도 찾아왔다. 세계적인 권위자에게 논문을 검토받고 싶었던 한선영은 발표가 끝난 후, 자신의 논문 초고를 들고 그를 찾아가 조심스럽게 검토를 부탁했다. 게재되지 않은 논문을 보여주는 것은 당시로서는 결례에 해당하는 일이었지만, 다행스럽게도 Barber 교수는 흔쾌히 그의 부탁을 들어주었다. Barber 교수는 다음날 빨간 펜으로 검토한 논문을 한선영에게 건네주며 자신이 편집자로 있는 Computer Networks 저널에 제출하라는 제안도 잊지 않았다. 당시 KAIST를 졸업하려면 SCI에 등재된 저널에 논문을 게재해야 했는데, Computer Networks도 SCI 저널 중 하나였다. PCCS 덕분에 고마운 인연을 만나 좋은 저널에 논문이 실릴 수 있는 기회까지 얻은 것이다.
이러한 전문가들의 값진 인연은 당시로서는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는 국제 학술대회라는 방식을 통하지 않고는 형성되기 어려운 일이었다. 준 무라이의 언급처럼 아시아의 네트워크 연구자들은 당시 PCCS에 참석함으로써 이후 수십년 간의 네트워크 연구에 필수적인 동료를 얻은 것이다. 박용진, 박현제, 송관호, 안순신, 이동만, 정철, 최양희, 한선영, 허진호 등 지금까지 한국 인터넷 분야를 주도하고 있는 인물들도 모두 당시 PCCS에 참석했던 20~30대였던 젊은 연구자들이었다.
사실, 연구를 바탕으로 한 표준은 RFC 등의 문서로 공유되지만, 실제 오퍼레이션은 PCCS와 같은 국제적인 행사를 통해 얻을 수 있는 사람과 사람의 네트워크를 통해 이루어진다. 상대에 대한 신뢰감을 갖지 않으면, 네트워크, 즉 관계망에서 상대에게 중요한 책임을 맡길 수 없는 법이다.
한국이 Asianet의 중추로서, 또한 전세계 컴퓨터 네트워크의 주요한 참여자가 될 수 있었던 것도 전길남이 참여했던 여러 국제회의와 PCCS와 같은 국제 학술대외를 통해 사람과 사람의 네트워크가 형성되었기 때문이었다. 다른 네트워크와 적극적인 교류를 할 의지가 충분히 있는지, 자국의 네트워크를 전세계의 네트워크로 확장하고자 하는 전망을 가지고 있는지 확인하지 않고서는 지역과 지역을 연결하는 중대한 일을 맡을 권한을 함부로 부여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PCCS를 토대로 한국과 아시아-태평양은 세계 네트워크의 한 축이 될 수 있는 든든한 네트워크를 만든 것이다.
PCCS라는 이름의 국제학술대회는 한 번으로 그쳤지만, 이와 비슷한 학술대회를 개최하자는 제안은 계속되었다. 우선 'SDN 워크숍'이란 이름으로 1986년 2월 첫 모임을 가진 KAIST, 서울대, 한양대, ETRI, DACOM 참가자들은 이 행사를 매년 두 차례로 나누어 개최하기로 결정하고, 겨울에는 WCCW(Winter Computer Communication Workshop)란 이름의 국내 워크샵을, 여름에는 아시아-태평양 국가들이 참여하는 JWCC(Joint Workshop on Computer Communication)으로 개최하기로 결정했다. WCCW는 ??년부터 여름에 개최되면서, SWCC(Summer Workshop on Computer Communication)로 명칭이 바뀌어 현재까지 지속되고 있으며, JWCC도 1986년부터 1994년??[editorial: 1994년 12월 또는 1995년 1월]까지 매년 개최된 이후 ICOIN으로 명칭을 바꾸어 현재까지 계속되고 있다.
Reference
[cha 1982]
[cha 1983a]
[chon 1983]
[chon 1983a]
[abramson 1985]
[chon 1985b]
[kim 1990]
[byeon 1992]
[chon 2011]
[PCCS Proceedings]
[SDN Workshop ‘86 Proceedings]
Asia Book 1 chapter 2
Asia Book 1 chapter 3
Asia Book 1 chapter 4
한국인터넷역사 인터뷰: 박태하
한국인터넷역사 인터뷰: 박현제
한국인터넷역사 인터뷰: 한선영
한국인터넷역사 인터뷰: 허진호
2013.1.7
문의: sec at InternetHistory.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