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11.5
안정배
국내 최초의 상용 인터넷 서비스가 시작될 무렵, 한국 인터넷은 또 하나의 역사적인 도약을 준비하고 있었다. 바로 미국의 NII(National Information Infrastructure) 프로젝트의 영향을 받은 초고속정보통신망 구축 사업이었다.
NII는 고성능 컴퓨팅 및 컴퓨터 통신과 이를 통한 혁신적인 기술 개발을 도모하는 사업으로 1991년, Al Gore 당시 상원의원의 발의로 통과된 High Perfocmance Computing Act of 1991 법안을 기반으로 하는 계획이었다., 구체적으로 NII는 초고속 광섬유망을 사용한 컴퓨터 네트워크 건설을 목표로 하고 있었다. 1991년 12월 9일을 기해 발효된 이 법에 대해, 조지 부시 당시 대통령은 이 계획이 DNA의 비밀을 밝히고, 해외 자유 무역시장을 개방할 것이며, 정부와 학계, 산업 사이의 협동을 도모할 것이라고 말했다. [wikipedia "High Performance Computing Act of 1991"]
결과적으로 NII는 조지 부시의 예상을 따랐다. 차기 대통령으로 선출된 빌 클린턴 역시 1993년 9월의 NII Agenda for Action에서 "미국의 미래 운명은 정보통신기반의 구축에 달려있다"고 천명하고, 1994년부터는 이 정책을 전세계로 확대하는 GII(Global Information Infrastructure) 정책을 전개해나갔다. 그 결과 고성능 컴퓨터를 통해 인간 게놈 지도가 작성되었으며, 초고속망 구축 전보다 수천배 빨라진 컴퓨터 네트워크는 각 분야와 개인이 연결된 '네트워크 사회(Network Society)'의 도래를 앞당겼다. 그리고 NAFTA나 EU와 같은 경제블럭화 및 WTO 체제와 더불어 세계를 더 가깝게 만드는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네트워크 사회와 세계화의 물결은 각국으로 하여금 국가경쟁력 강화에 총력을 기울이게 하였으며, 특히 그 중심에 위치하고 있는 디지틀 및 광통신기술을 중심으로 한 정보화와 관련된 기술개발 프로젝트가 주요 선진국의 국가전략사업이 되었다. 미국에 이어 일본은 "신사회자본"이라는 슬로건으로 초고속정보통신기반구축 계획을 진행하기 시작했으며, 유럽연합(EU)도 범유럽정보통신망(Trans European Network; TEN) 구축을 추진했다. [chon 1994]
한국의 초고속 정보통신망 구축계획도 이러한 배경 속에서 수립되었다. 초기 계획은 광케이블(광섬유) 백본망을 구축하면서, 정보통신부와 ETRI의 주요 연구방향이던 B-ISDN을 중심으로 네트워크 기술을 개발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1998년, 광케이블 백본망과 케이블TV망을 사용한 두루넷이 최초로 초고속인터넷 서비스를 시작하면서, 향후 초고속망 서비스는 점차 인터넷 방식으로 수렴되었다. 당시 광케이블망 백본망은 한국전력, 가스공사, 도로공사와 같은 공공 인프라 사업자들에 의해 전력 망 등과 함께 설치되었는데, 이는 이후 광케이블을 이용한 초고속통신망 사업자의 다각화를 가능하게 하였다.
11.1 초고속인터넷 이전
지금은 월 3만원 안팎의 요금으로 100Mbps 속도의 초고속인터넷이 각 가정에 제공되고 있지만, 1990년대 후반까지 한국에서 일반인이 사용할 수 있는 인터넷 속도는 수 Kbps에 불과했다. 1982년, 전용회선을 사용한 서울대학교와 구미 KIET 사이의 첫 TCP/IP 네트워크의 속도가 1.2Kbps였고, 1984년에 서비스를 시작한 X.25 데이터통신망의 백본망 대역폭이 56Kbps였고, 1990년의 하와이 대학과 금산위성지국 사이의 전용선 대역폭도 56Kbps였다. 그나마 56Kbps의 속도를 내는 회선을 구축하고 있던 대학이나 연구소에서나 수십 Kbps 속도를 경험할 수 있었고, 모뎀을 이용해 일반전화회선으로 접속해야 했더 개인 이용자가 인터넷에 접속할 수 있는 속도는 대부분 2.4~9.6Kbps에 불과했다. 망의 대역폭도 넓지 않았지만, 전화선에 부착해 데이터통신을 가능하게 하는 기기인 모뎀의 속도도 1989년에는 9.6Kbps, 1991년에 14.4Kbps, 1994년에 28.8Kbps로 더디게 발달하고 있었다.
[그림추가: 인터넷 속도의 변천]
오히려 당시 인터넷 이용상의 문제는 접속속도보다 다른 요인들이 더 큰 문제였다. 1993년에 등장해 WWW를 확산시킨 일등공신인 Mosaic는 높은 컴퓨터 성능을 요구하는 무거운 프로그램이었다. 사용자들은 당시 막 AT 등의 컴퓨터로 Mosaic의 실행에 고전하며, WWW이 성공하지 못할 것이라는 전망을 하기도 했다. 그리고 전화회선이란 기본적으로 전화국에서 양쪽을 배타적으로 묶어놓는 방식이기 때문에 컴퓨터 통신을 하는 도중에는 전화를 사용할 수 없다(통화중으로 인식)는 점도 난점이었다.
동축케이블 전화선을 그대로 사용하면서 속도 문제를 해소하려는 시도는 ISDN(Integrated Services Digital Network; 종합디지털서비스망)을 통해 처음 나타났다. ISDN은 기존의 아날로그 신호를 모두 디지털 신호로 만들어 전송하는 방식으로, 문자, 이미지, 동영상, 팩시밀리, 전신 등을 전송할 수 있는 통신망이었다.
1993년 12월 29일, 한국통신은 ISDN의 상용서비스를 개시하는데, 이 때 제공된 접속속도가 128Kbps로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속도였다. 그 뿐 아니라 ISDN 서비스는 회선 당 최대 8대의 통신기기를 연결할 수 있었으며, 2회선을 이용해 두 대의 기기를 동시에 이용할 수 있었기 때문에 기존 전화선 사용의 불편함이 한층 완화되었다. 1990년대 초반, 한국의 망 연구 방향은 대부분 ISDN 중심이었는데, 이는 ISDN이 일본에서 대성공을 거둔 데 크게 영향을 받은 것이었다. 일본은 일반 전화기까지 ISDN 전화기로 바뀌는 추세였고, ISDN이 너무 잘되어 오히려 초고속인터넷 개발이 늦어질 정도였다.
11.2 PC방 문화
1994년 상용인터넷 서비스가 시작되면서 같이 등장한 것이 바로 인터넷 카페였다. 당시 확산되기 시작한 WWW 서비스는 컴퓨터와 네트워크에 관심을 가지고 있던 일반인들에게 무척 매력적이었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가정에서 인터넷을 사용하기는 쉽지 않았다. 당시 "넷스케이프"가 보유하고 있던 인터넷용 컴퓨터 장비는 최신 프로세서인 인텔 펜티엄을 탑재한 PC와 썬과 실리콘그래픽스의 워크스테이션, 매킨토시 등이었고, 256Kbps의 전용회선으로 인터넷을 사용할 수 있었는데, 당시 이런 시스템을 개인적으로 보유하고 집에서 인터넷을 사용할 수 있는 일반인은 극소수에 불과했기 때문이었다.
이런 환경 탓에 인터넷 이용자들은 자연스럽게 인터넷 카페에 모이게 되었다. 1995년 9월에 문을 연 홍익대 앞의 "넷스케이프"와 종로의 "네트"가 국내 인터넷 카페의 시초로 알려져 있으며, 1996년, 신림동에 첫번째 점포를 낸 "인터넷매직플라자"는 3년 만에 100여개에 달하는 체인점을 확보할만큼 성업하기도 했다.
일반 카페에서 인터넷을 사용할 수 있었던 인터넷 카페들은 이후, 온라인 게임 등의 인터넷서비스를 즐기는 "PC방"으로 변화했다. PC 방은 당시 다른 나라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한국만의 독특한 인터넷 이용방식이었고, 1999년에는 PC 방이 전국 1만 5천여 점포로 늘어날 정도로 성업했다. PC 방 비즈니스는 2000년대 이후 초고속인터넷이 구축되는 중국과 동남아시아 등 세계 각국으로 확산되었다.
PC 방의 확산은 인터넷 관련 사업자들에게도 희소식이었다. 이들은 PC방 체인과 전용선 설비나 게임서비스 일괄계약을 통해 안정적인 고객층을 확보할 수 있었다. 한국에서 대성공을 거두면서 세계적 게임으로 자리잡은 스타크래프트나 온라인 게임의 신화를 쓴 리니지 역시 PC 방을 통해 확산된 서비스였다.
[kim 2009b]
[Editorial: 11.1과 통합하는 것이 좋겠음.]
11.3 초고속정보통신망 구축계획
1990년대 초, 미국의 NII의 영향을 받은 선진국들은 저마다 정보화 사업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앞으로 다가올 정보사회에서 산업경쟁력을 강화할 정보유통망의 고도화를 목표로 하고 있었는데, 구체적으로는 "새로운 사회간접자본(New SOC)"로 불리고 있었던 초고속정보통신망을 구축하는 것이었다. 한국은 1980년대 국가기간전산망을 구축한 전례가 있었기 때문에 정부와 연구부문, 산업부문의 협동으로 종합계획을 수립해 정보통신기반을 만드는데 익숙했다. 한국의 초고속정보통신망 구축계획의 초기 디자인은 1994년 3월에 제출된 "초고속정보통신망 구축방안에 관한 연구"라는 연구보고서에 잘 정리되어 있다.
[전길남, 초고속정보통신망 구축방안에 관한 연구]
전길남 등이 작성한 이 보고서를 보면, 당시 초고속정보통신망의 목표는 전산망의 대중화와 유비쿼터스 환경구축을 통해 정보화 선진국의 기반을 마련하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다. 이 보고서는 초고속정보통신망이란 시간적, 공간적 한계에 구애받지 않고 "언제 어디서나" 음성, 데이타, 영상등을 종합한 멀티미디어 정보 자원을 공유할 수 있도록 하는 차세대 정보통신망을 말하며, 초고속정보통신망의 구축이 완료되는 시점의 전산망 사용자는 1000~2000만 명에 달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1994년 당시 전산망 사용자는 인터넷 1~2만 명, PC통신 20~30만 명 수준에 불과했지만, 이 보고서는 향후 20년 후에 국민 대부분이 사용하는 초고속정보통신망의 구축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이를 국가 전략사업으로 추진할 것을 권고하고 있다. 또한, 이때 이미 FTTH(Fiber-optics To The Hom; 댁내 광케이블)를 염두에 두고, FTTH의 실제 구축시기를 예측하여 계획을 추진할 것을 제안하기도 하는데, 두루넷을 필두로 초고속인터넷서비스가 시작한지 불과 4년 만에 1천만 가구가 초고속인터넷서비스에 가입했다는 사실을 비추어볼 때, 정확히 미래를 예측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주지하듯이, 선진국에 비해 상당히 뒤져있었던 다른 산업부문과 달리, 인터넷을 중심으로 한 컴퓨터 네트워크 분야에서 한국은 세계적으로 가장 앞선 나라 중 하나였다. ?? 이를 토대로 한국은 미국의 NII, 일본의 신사회자본, 유럽의 초고속 행정전산망 구축계획과 같은 선상에서 초고속정보통신망 구축계획을 추진하기로 했지만, 이 계획의 구체적인 추진전략은 국내의 제반현실을 고려해 조정되어야 했다.또한, 국가전략사업으로 막대한 예산과 노력을 들여 구축될 초고속정보통신망은 기술적으로 향후 도래할 멀티미디어 및 비디오를 이용한 응용서비스에 적합해야 할 뿐 아니라, 기존 서비스를 수용할 수 있어야 하고, 향후 진화도 가능해야 했다.
이를 위해 앞의 보고서는 국내의 제반 현실을 고려해 기술연구는 최첨단 선진국인 미국의 행보에 발맞추어 첨단을 추구하고, 물리적인 망 구축은 미국보다 2년 정도의 시간차를 두고 구축하는 것을 기준으로 삼았다. 그리고 당시 그러한 요구사항에 가장 적합한 것으로 제안된 기술은 매체기술로는 광케이블을 이용한 광통신 기술, 전달기술로는 ATM 그리고 ATM을 이용한 통신망 기술로는 B-ISDN이었다.
[그림 추가]
광케이블은 기존 동축케이블의 수십배의 속도를 낼 수 있고, 제작단가가 훨씬 저렴하기 때문에 차세대 통신매체로 각광받고 있었다. 다른 선진국의 초고속망도 모두 광케이블 설치를 주요 골자로 하고 있었다. 또한, 광케이블은 기존의 동축케이블과 달리 통신케이블만 별도로 설치할 필요없었다. 전기선이나 도로, 가스관과 함께 설치할 수 있었기 때문에 한국의 경우 한국전력, 가스공사, 도로공사 등의 인프라사업자도 광케이블망을 손쉽게 설치할 수 있었다.
전화교환방식과 유사한 ATM 교환기를 사용한 ISDN 망은 당시 대부분의 네트워크 연구자들이 미래의 기술로 가리키고 있는 방식이었다. ISDN의 특징은 음성전화, 팩시밀리, 전신, 데이터통신 같은 서비스를 통합하여 운용할 수 있다는 것으로, 기존 기술로는 최대 2Mbps까지 낼 수 있었다. 하지만, B-ISDN은 광케이블과 발전된 통신기술을 이용해 전송속도를 155/622Mbps까지 끌어올린 기술이었다.
이를 골자로 1995년 9월, "초고속정보통신기반구축계획"이라는 이름의 종합계획이 대통령의 재가를 받아 초고속정보통신망 구축 사업이 시작되었다. 소요예산은 2015년까지 총 45조원으로 책정되었는데, 이는 현재까지 단일사업으로는 한국 최대 규모이다. 사업을 추진할 전담기관으로는 한국전산원이 지정되었고, 통신망의 상세설계 및 시공, 망 건설 및 운영, 보수 등에는 통신사업자인 한국통신(주사업자)과 데이콤(부사업자)이 선정되었다.
초고속망의 구축은 1995년부터 1997년까지 ATM 교환망을 도입해 설치하는 것으로 고속통신망으로의 진화기반을 마련하고, 2010년까지 대역폭을 확장하고 전국적인 망의 설치를 완료한다는 것이었다. 또한, 1980년대에 구축된 국가기간전산망과 기타 공공기관의 전산망도 이에 포함시켜 향후 고도화된 전자정부 서비스를 구현할 기반을 마련하도록 했다.
초고속망 구축 사업은 초고속국가정보통신망, 초고속공중정보통신망, 선도시험망이라는 세 부분으로 나누어 추진되었다. 우선, 초고속국가정보통신망은 국가의 공공재원으로 국가, 지방기관, 연구소, 대학 등의 공공기관을 광케이블로 연결하는 것으로, 구축 초기 수요를 창출하고 응용서비스와 기술개발의 기반으로 활용하기 위해 구축되었다. 다음, 초고속공중정보통신망은 통신사업자들이 일반 사용자를 대상으로 멀티미디어 서비스 등을 제공하기 위해 구축되었다. 마지막으로 산,학,연이 공동으로 응용서비스와 핵심기술을 개발할 목적으로 "선도시험망"을 구축하였다. 이 선도시험망은 연구 개발을 위한 시험환경의 마련을 위해 구축되었다.
APII
한국의 초고속정보통신기반구축 계획의 수립이 마무리될 무렵인 1994년 11월, 인도네시아 보고르에서 개최된 APEC 정상회담에 참가한 김영삼 대통령은 APII(Asia Pacific Information Infrastructure)의 구축을 제안한다. 내용은 미국의 GII 정책에 조응해 아태 지역에서 조기에 첨단 정보기반을 구축하자는 것이었다.
이를 계기로 이듬해인 1995년 서울에서 APEC 통신장관급 회담에서 APII 추진을 위한 서울선언문이 채택되었고, 이후, 초고속정보통신기반구축계획의 일환으로 구축된 선도시험망을 통해 현재까지 초고속망으로 아태지역을 연결하는 연구 및 개발이 진행중이다. 1984년 Asianet 의 구축부터 시작되었던 아시아 태평양 지역의 지역전산망 아이디어가 초고속망으로 발전한 것이다.
11.4 두루넷, 초고속 인터넷 서비스 개시
정부의 초고속정보통신망 구축계획에 모두가 동의한 것은 아니었다. 삼보컴퓨터의 이용태 회장 같은 이가 대표적이다. 그는 수십조원이 책정된 초고속정보통신기반구축사업을 비판하면서, 자신이라면 1조원의 예산으로 전국에 초고속망을 구축하겠다고 얘기하기도 했다. 장담대로 전국에 초고속 망을 구축한 것은 아니지만, 이용태 회장은 한국 초고속인터넷의 판도를 결정할 중요한 사건을 일으킨다. 1998년, 두루넷(thurunet)이 한국 최초의 초고속인터넷 서비스를 개시한 것이다.
1996년 이전까지는 통신망을 설치할 수 있는 사업자는 기간통신사업자로 지정된 한국통신과 데이콤 뿐이었다. 이 중 실제로 망을 설치한 것은 한국통신 뿐이었고, 데이콤은 한국통신의 망을 임대해 별도로 서비스하는 방식이었다. 한국통신과 데이콤을 제외한 기업들, 즉 기간통신사업자가 아닌 사업자는 자가 통신망(다크 파이버)을 설치할 수 없게 되어 있었다. 그래서 이들이 통신망 사업을 하려면 한국통신의 망을 임대해 다시 소비자에게 임대해야 했다. 이렇게 하면 원가부터 큰 차이가 나기 때문에 한국통신과 통신망 사업으로 경쟁한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라스트마일의 언번들링 문제라 불리는 이 규제 때문에 통신망 사업은 1996년까지 사실 독점체제였다.
이렇게 한국통신, 데이콤에만 허락되어 있었던 기간통신망사업자 라이센스가 1990년대 중반에 일부 풀린다. 1995년 7월 4일, 신규기간통신망사업자의 7개분야 선정계획이 발표되었고, 삼보컴퓨터와 한국전력의 콘소시움인 두루넷(당시 윈넷)과 대한송유관공사 중심의 지앤지텔리콤이 1996년 6월 10일에 전기통신회선설비임대사업부문에 최종 선정되어 기간통신사업자의 지위를 부여받은 것이다. 이 조치는 1996년, 설비임대사업을 기간통신사업자에 포함시키는 미국의 Communication Act가 발효와 맥을 같이 하는 정책이라고 할 수 있는데, 독과점 체제였던 통신망 사업에 경쟁방식을 도입한 처사였다.
이렇게 기간통신사업자로서 통신망사업을 할 수 있게 된 두루넷은 한국전력 광케이블백본망의 배타적 사용권을 확보해 기업을 대상으로 하는 전용선 임대 사업을 시작했다. 주로 대기업에 전용회선을 설치하는 사업을 했다. 나중에 이동통신사업이 시작되고 나서는 SK와 같은 이동통신사업자가 주 고객이었다. 당시 한국통신은 기업대상 전용선 임대사업에 광케이블 뿐 아니라 동축케이블이나 기존 전용선(4가닥 짜리 케이블 ??)을 섞어 제공했지만, 후발 사업자들은 100% 광케이블로 사업을 했다. 새로 구축하는 망이었기 때문에 모두 첨단 자재인 광케이블로 설비한 것인데, 이것이 한국통신과 경쟁하는 후발주자들의 마케팅 포인트였다.
나중에는 두루넷이나 기타 사업자들도 광케이블 망 설치를 했지만, 초기 두루넷이 서비스에 사용한 광케이블망은 한국전력이 설치한 망이었다. 이전부터 한국전력, 도로공사, 대한송유관공사와 같은 인프라사업자들은 자신들의 서비스를 위해 전국적으로 전기선, 도로, 송유관, 가스관을 설치할 때, 광케이블을 함께 설치하고 있었다. 이들은 기간통신망사업자가 아니었기 때문에 설치된 광케이블을 가지고 통신사업을 할 수는 없었지만, 원격 검침 등을 목적으로 한 네트워크 구축과 다가오는 미래를 대비해 광케이블을 미리 설치해두고 있었던 것이다.
1998년 7월, 두루넷은 바로 이렇게 설치된 망 중 한국전력이 설치한 광케이블망을 백본으로 한 초고속인터넷서비스를 시작한다. 각 가정까지 연결되는 지역망은 지역의 SO(유선방송사업자)들과 협의해 지역 케이블TV망을 이용했다. 최고 10Mbps 까지 서비스할 수 있는 초고속인터넷이 국내 최초로 서비스된 것이다. 이 때 두루넷의 네트워크 설계를 맡은 사람이 바로 1980년대 SDN 네트워크 매니저였던 박현제 박사였다.
1997년, 당시 솔빛미디어에서 멀티미디어 사업을 하고 있던 박현제는 어느날 대학원 지도교수였던 SALAB 전길남 박사의 전화를 받는다. 내용은 즉, 지금 미국에서 시작한 초고속인터넷 사업을 해보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것이었다. 당시 미국에서는 @Home, Roadrunner, Cox 등이 초고속인터넷 서비스를 막 시작하고 있었다. @Home은 AT&T가 광케이블망을 이용해서 서비스하는 회사였는데, 각 가정에 들어가는 access 망까지 직접 설비하는 것이 아니라, 지역 SO들과 결합해서 서비스하는 방식이었다.
이 전화를 계기로 두루넷에서 일을 시작한 박현제는 1997년 이용태 회장과 함께 기술제휴를 목적으로 미국 @Home 사를 방문했다. 당시 @Home의 태도는 문전박대나 다름없었다. 사업부서?? 의 담당자가 나와서 자신들은 미국, 캐나다, 일본 시장 정도를 생각하고 있으며, 한국은 생각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었다.
할 수 없이 스스로 두루넷 서비스 모델을 만드는 수밖에 없었다. 박현제는 바로 두 가지 일에 착수했는데, 하나는 마케팅 포인트를 잡는 것, 다른 하나는 컨텐츠 서비스를 마련하는 것이었다.
당시 전화선을 이용해 인터넷을 사용하는 이용자 중에 하루 한 시간 씩 인터넷을 사용하는 이른바 파워유저들이 있었다. 이들의 사용패턴을 기준으로 월이용료를 산출하니 5만원이었다. 두루넷은 케이블TV망을 사용하기 때문에 인터넷에 접속할 때마다 접속과정을 거칠 것 없이 무제한 접속(all as on) 서비스로 제공되었는데, 이들을 기준으로 가격을 산출한 것이다. 1998년 7월 두루넷이 제공한 첫 초고속인터넷 서비스 사용료는 4만 ?? 원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인터넷 사용상의 가장 큰 문제는 인터넷 속도보다 오히려 접속이었다. SLIP/PPP 방식으로 인터넷에 접속할 수 있게 했던 기존 인터넷서비스들은 "이야기" 등의 접속프로그램에 01414(Kornet), 01438(아이네트) 등의 서비스 고유넘버를 입력하고, 회원 계정정보로 로그인을 해야 비로소 인터넷에 접속할 수 있었다. 이 과정을 아이콘 클릭 한 번으로 간소화한 네오위즈의 "원클릭" 서비스(1998년)가 한동안 선풍적인 인기를 끌 만큼, 인터넷 접속과정이 어렵고 불편한 시절이었다.
박현제는 이 문제가 전용선으로 항상 연결된 상태에서 인터넷을 사용해온 인터넷 연구자들이 아니라 전화 교환 방식에 익숙한 전화전문가들이 디자인했기 때문에 생긴 문제라고 생각하고, 인터넷 사용자들을 유치하려면 컴퓨터를 켜면 항상 접속되어 있는 방식(all as on)이 주효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또 하나는 컨텐츠 서비스를 마련하는 일이었다. 1990년대 말까지만 해도 인터넷 컨텐츠가 그리 많지 않았다. 또한, 기간통신사업자인 한국통신을 제외하고는 원가 때문에 인터넷접속서비스만으로 수익을 내는 것이 쉽지 않았다. 당시 인터넷 관련 기업들의 고민은 어떻게 인터넷 컨텐츠를 개발해 수익을 창출할 것인가 였다. 두루넷으로서도 가입자들이 빠른 속도로 인터넷에 접속했는데, 빠른 속도를 이용할 컨텐츠가 없다면 그 가입자들을 붙잡을 명분이 없었기 때문에 초고속인터넷에 적합한 컨텐츠의 발굴을 위해 고민이 많았다.
멀티캐스트로 박사학위를 받고, 한동안 멀티미디어 업체를 운영했던 박현제는 초고속인터넷 접속 서비스에 멀티미디어 컨텐츠를 연동하는 방식을 생각했고, 그 결과 두루넷은 회선사업과 멀티미디어 사업을 동시에 오픈하게 되었다. 목표는 브로드밴드 포탈서비스를 만드는 것이었다.
10억 원의 비용을 들여 포탈서비스 디자인을 하고, 주문형 CD-ROM 서비스도 만들었다. 또, 현재의 파일공유서비스와 같은 FTP 프로토콜을 이용한 공용 웹 공간도 만들어 운영했다. KAIST 시절, 학생들이 이용하던 서버의 TMP라는 공간에 자료를 올리고 다운받던 것과 같은 방식이었다. 게임과 비디오 컨텐츠를 제작하기도 했다. 빠른 속도로 확산되며 성업 중이던 피시방 체인과 공동으로 스타크래프트 대회를 열기도 했다. 접속서비스사업자 입장에서 PC방은 주요고객이었는데, PC방 체인과 계약을 하는 것은 물론이고, PC방 체인 설립을 유도하기도 했다.
미국의 @Home 서비스가 두루넷처럼 광케이블과 케이블TV 망을 이용해 서비스를 시작한 것이 1996년이었으니 두루넷의 서비스는 선진적인 것이었다. 이 당시는 미국의 초고속인터넷서비스 업체들도 전국적으로 서비스를 할 수 있는 수준은 아니었기 때문에 장기적인 전망을 점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두루넷이 성공적으로 서비스 런칭에 성공하고 1999년에 다시 @Home 사를 방문해 양사의 컨텐츠를 소개하는 자리를 가졌다. 팩스서비스 등 비슷한 부가서비스가 많았지만 누가 보더라도 두루넷의 서비스가 우수하다고 판단할 정도였다. 2년 전 두루넷 측을 박대했던 @Home 담당자도 그때 두루넷과 손을 잡았어야 했다고 후회했다.
초고속정보통신기반구축계획의 일환으로 ATM 교환기를 이용해 ISDN 망의 개발에 주력하고 있던 한국통신과 데이콤은 갑자기 등장한 두루넷이 성공을 보며 난감해할 수밖에 없었다. 정보통신부는 두루넷 사업계획이 발표되던 시기부터 한국통신과 데이콤에게 초고속인터넷사업을 독려하기도 했다. 하지만 ISDN 개발의 주축이었던 한국통신은 타산성을 이유로 초고속인터넷 사업에 바로 뛰어들지 않았다. 1999년 4월, 두루넷이 서비스한 지 9개월이 지나 하나로통신이 ADSL 방식으로 초고속인터넷서비스를 시작했고, 한국통신은 그해 10월이 되어서야 ADSL 서비스를 개시해 따라왔다.
가입자들을 보유하고 있던 KT가 서비스를 개시하자 초고속인터넷 가입자수는 폭증했다. 두루넷이 처음 서비스를 개시한 지 2년이 지난 2000년, 초고속인터넷 가입자수는 300만을 돌파했고, 그로부터 3년 뒤인 2002년에는 1000만 명을 돌파했다. 2000년부터 2005년까지 한국은 OECD 국가 중 초고속 인터넷 가입자 비율이 가장 높은 나라였고, 현재까지 가장 빠른 속도로 인터넷을 이용하는 국가이다.
[그림. OECD, 국가별 초고속인터넷 가입자 수 (100명당 가입자수)]
[그림. 접속속도 그래프 ??]
2013.1.7
문의: sec at InternetHistory.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