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립은 결코 외부적 강제력의 물리적 작동으로만 규정되지 않는다. 인간이 자신에게 잠재적으로 열려 있던 실천적 자유의 계기를 스스로 중지시키는 순간, 그는 이미 고립이라는 존재론적 단층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간다. 더욱 기이한 것은, 이와 같은 자기-고립의 과정이 ‘합리성’이라는 형식적·기능적 명목 아래에서 은폐된다는 점이다. 합리는 마치 투명한 자명성의 장막처럼 작동하여 고립의 실체를 감추고, 오히려 그 정합성을 보증하려 들며, 결국 주체를 더 심층적이고 미세한 고립의 구조 속에 가둔다. 이리하여 고립은 단순한 물리적 현상을 넘어, 합리적 사유의 자기기만적 구조에서 발생하는 잔여로 나타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