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서대강 조선기 제3세 왕검

第三世檀帝(제3세 단제)

太一聖帝諱儉洪帝太子也. 元年戊辰在位九十三年.

太一聖帝(태일성제) 휘는 儉(검)이고 洪帝(홍제)의 태자이다. 원년은 戊辰年(무진년)이고 재위기간은 93년이다.

 

戊辰元年. 帝神聖文明仁愛慈勇道通宇宙德配乾坤望如日月就若山河端拱無爲坐定世界玄妙合機接化群生爲開國三聖之一也.

上月三日, 帝握天符三印, 將雲師雨師風伯雷公, 降于太白山檀木下神壇上, 與三千團部众, 奉祭于三神上帝, 講天符經, 頌三一𥛠. 諄諄敎誨其至神之德, 巍巍蕩蕩兼[1]聖之仁, 赫赫烈烈万能承天. 九桓之众咸恱誠服推爲天帝化身而尊之曰太一上帝. 是日卽帝位, 仍稱國號曰倍達那羅, 帝號曰倍達壬儉, 定帝都于太白山下天坪曰徐菀, 帝城曰壬儉城. 追尊皇祖考曰天一泰帝, 皇考曰地一洪帝. 命建廟而奉祀. 納妃菲西岬【今哈爾濱】河伯女爲皇后, 冊長子夫婁爲皇太子, 命彭虞爲元輔.

 

戊辰(무진, BC2333) 원년. 帝神聖文明仁愛慈勇道通宇宙德配乾坤望如日月就若山河端拱無爲坐定世界玄妙合機接化群生爲開國三聖之一也.

上月(상월) 三日(삼일) 帝(제)는 天符(천부) 3개의 印(인)을 거머쥐고 雲師(운사) 雨師(우사) 風伯(풍백) 雷公(뢰공)을 거느리고 太白山(태백산) 檀木(단목) 아래 神壇(신단)에 이르러 3000 부락의 무리와 더불어 三神(삼신) 上帝(상제)에게 받들어 제사하고 天符經(천부경)을 강연하였으며 三一𥛠(삼일신고)를 낭송하였다. 순순히 가르침이 神德(신덕)에 이르렀고. 드넓고 높음이 魚聖(어성)의 仁(인)에 이르렀으며, 맹렬함이 모든 것을 능하게 하니 하늘을 계승하였다. 九桓(구환)의 무리는 다같이 기뻐하고 진실되이 감복하여 하느님이 변화한 육신이라고 천거하여 太一上帝(태일상제)라고 하였다. 이날 帝(제)로 즉위하고, 국호를 배달나라라 하고 帝號(제호)를 배달임검이라고 했으며, 帝(제)의 도읍을 太白山(태백산) 아래 天坪(천평)으로 하였으니 서울(徐菀)이라고 하였고, 帝(제)의 城(성)을 壬儉城(임검성)이라고 하였다. 皇祖考(황조고)를 추존하여 天一泰帝(천일태제)라고 하고, 皇考(황고)를 추존하여 地一洪帝(지일홍제)라 하였으며, 묘를 건설할 것을 명하고 제사를 받들었다.  納妃 菲西岬(비서갑, 지금 하얼빈이다) 河伯(하백)의 딸로 부인으로 맞이하여 皇后(황후)로 삼고 큰아들 夫婁(부루)를 皇太子(황태자)로 세웠다. 彭虞(팽우)[2]를 명하여 元輔(원보)가 되게 하였다.

 

己巳二年. 追尊紫府先生【卽廣成子】爲桓夫帝光明王.

己巳(기사, BC2332) 2년. 紫府先生(자부선생, 즉 廣成子광성자이다)을 추존하여 桓夫帝光明王(환부제광명왕)이라고 하였다.

 

庚午三年. 定遼瀋界至于碣石接河相據.

庚午(경오, BC2331) 3년. 遼(료)와 瀋(심)의 경계에서 碣石(갈석)에 이르는 곳을 안정시키니 하천(河)과 서로 웅거하였다.

 

辛未四年. 帝復神巿舊規, 創立倧敎, 頒布國中, 以親九族設講𥛠誥于天下, 敎化萬民, 宣告神政于四海, 盖不言而信不怒而威. 無爲而化, 淳厖之治, 熙洽四表. 命三僊官四靈師主治人間三百六十六事, 盖以誠信愛濟禍福報應八理敎人, 人無賢愚, 易於達天理通人理, 無爲而化, 故人化湥於至治之世也. 寔神巿天皇開國, 敎化之神政也.

辛未(신미, BC2330) 4년. 帝(제)는 다시 神巿(신불)의 옛 규범을 되돌리고 上古神人(상고신인)의 가르침을 창립하여 나라안에 반포하였다. 친히 九族(구족)에게 삼일신고를 천하에서 강론하고 만민을 교화하였으며 神政(신정)을 四海(사해)에 널리 알리었으니, 말하지 않고 믿게 하며 화내지 않고 두려워하게 하고 행함이 없이 교화시켜서 淳厖(순방)의 다스림을 四表(사표)에 널리 드날리었다. 三僊官(삼선관)과 四靈[3]師(사령사)에게 명하여 인간의 366가지 일을 주관하고 다스리게 하였다. 대개 誠(성) 信(신) 愛(애) 濟(제) 禍(화) 福(복) 報(보) 應(응)의 8가지 도리로 사람을 가르쳤는데, 사람이 현명하거나 어리석거나 보다 쉽게 天理(천리)에 도달하거나 人理(인리)를 통달하였으며 행함 없이 변화되었다. 그래서 세상이 잘 다스려지는 데까지 사람들의 변화가 흘러 들어갔으니 이것은 오직 神巿(신불) 天皇(천황)이 개국하여 교화한 新政(신정)인 것이다.

 

壬申五年. 帝命三仙四靈, 曰彭吳.., 汝作虞官 掌土地. 大荒尙未闢, 薈蔚梗塞, 穿山濬川通路架橋, 以尊民居, 曰神誌.., 汝作史官 掌書契. 言以彰意, 書以記事, 敎民以義, 使知所從, 曰高矢.., 汝作農官 主穀. 剝皮䐄果, 壊厥生命, 相土, 宜時高梁下稌, 敎民稼穡, 曰持提.., 汝作風伯 主命. 上施下行爲命, 上行下效爲敎, 申厥命, 敎導民以和, 若風在地, 曰渥沮.., 汝作雨師 主病. 水土未平, 陰陽以愆, 預施以道, 毋伐天和, 若雨時滋, 曰肅愼.., 汝作雷公 主刑. 不孝 不忠 不敬 爲三賊, 不勤業 不迪命 不悔愆 爲三暴, 威制明愼, 懲戒萬民, 如雷振威, 曰守己.., 汝作雲師 主善惡. 善惟甘霖, 惡惟妖魃, 勸善以賞, 民之信從, 如雲祥集, 又命神后曰.., 作女工 主紡績. 衣裳禦寒署, 表貴賤, 乃剪乃縫, 用施於民.

壬申(임신, BC2329) 5년. 帝(제)는 三仙(삼선)[4]과 四靈(사령)들에게 명하였다.

彭吳(팽오)[5]에게는 이렇게 말하였다. “너는 虞官(우관)이 되어 토지를 관리하여라. 크게 거칠고 오히려 아직 열리지 않아 薈蔚(회울)과 梗(경)들이 막아있으므로 산을 뚫고 강을 파헤쳐서 길을 만들고 다리를 놓아 백성들이 거할 곳을 마련하라.”

神誌(신지)에게는 이렇게 말하였다. “너는 史官(사관)이 되어 書契(서글)을 관장하여라. 말은 뜻을 밝히는 것이고 책은 일을 기록하는 것이니 백성을 올바르게 가르쳐 따라야 할 바를 알게 하라.”

高矢(고시)에게는 이렇게 말했다. “너는 農官(농관)이 되어 곡식을 관장하여라. 나무의 껍질을 벗겨 먹고 과일로는 배가 부르지 않아[6], 생명을 무너뜨리게 하나니, 토지의 잘살펴서 마땅한 때에 높은 곳에는 기장을 싶고 낮은 곳에는 벼를 심어 백성에게 심고 거두는 것을 가르쳐라.”

持提(지제)[7]에게는 이렇게 말하였다. “너는 風伯(풍백)이 되어 나의 명령을 주관하라. 위에서 베풀고 아래서 행하는 것이 명령이고, 위에서 행하고 아래서 본받는 것이 가르침이니, 거듭 그 명령을 행하여 백성을 가르치고 인도함에 있어서 화합함을 바람이 땅에 있는 것 같이 하려라.”

渥沮(악저)에게는 이렇게 말하였다. “너는 雨師(우사)가 되어 질병을 관장하라. 물과 땅이 아직 평정되지 아니하였고 음과 양이 어그러졌으므로 이치대로 즐겁게 베풀어 벌하지 아니하는 하늘의 화합함을 비가 때에 따라 내림같이 하라.”

肅愼(숙신)에게는 이렇게 말하였다. “너는 雷公(뢰공)이 되어 형벌을 관장하라. 불효과 불충과 불경이 3개의 적이요, 부지런히 일하지 아니함과 명령대로 나아가지 아니함과 자기 허물을 뉘우치지 아니함이 3가지 사나움이니, 위엄으로 제어하고 밝음으로 삼가며 만민을 징계함을 우뢰가 위엄으로 떨침같이 하여라.”

守己(수기)[8]에게는 이와 같이 말하였다. “너는 雲師(운사)가 되어 선과 악을 관장하여라. 선은 오직 단비요 악은 오직 요망한 귀신이니, 선을 권장하여 상을 주면 백성이 믿고 따름이 구름이 상서롭게 모여듬과 같으리라.”.

또한 神后(신후)에게는 이렇게 말하였다. “女工(녀공)이 되어 紡績(방적)을 다스리라. 옷을 만들어 추위와 더위를 막고 옷으로 천한 것과 귀한 것을 나타내며 자르고 꿰매어 백성들에게 베풀어라.”[9]

 

庚寅二十三年. 帝移都于吉林之西部稱曰平壤, 改國號曰朝鮮. 平壤卽扶餘在太白山之西南地, 是爲平壤城, 卽古之粟末水, 今渤海之顯德府.

庚寅(경인, BC2311) 23년. 帝(제)은 도읍을 吉林(길림)의 서남쪽으로 옮기고 平壤(평양)이라 했으며 국호를 朝鮮(조선)이라고 고쳤다. 평양이란 즉 扶餘(부여)로 太白山(태백산)의 서남쪽 땅인데 이것이 평양성으로서 옛 粟末水(속말수)이며 지금 渤海(발해)의 顯德府(현덕부)이다.[10]

 

辛卯二十四年. 定官制, 有八加之稱, 命太子夫婁爲虎加, 率諸加. 二子扶餘爲馬加, 主命. 三子夫宇【宇一作虞】 爲鷺加主病. 四子夫蘇爲鷹加主形. 高矢爲牛加主穀. 特明爲熊加主兵. 朱因爲鶴加主善惡. 余守己爲狗加主忽【卽州縣也】.

辛卯(신묘, BC2310) 24년. 관제를 정하였는데 8 加(가)라는 것이 있었다. 태자 夫婁(부루)에게 명하여 虎加(호가)가 되게 하였고 모든 加(가)들을 통솔하게 하였다. 둘째 扶餘(부여)는 馬加(마가)가 되어 명령을 주관하였다. 셋째 夫宇(부우, 혹 夫虞(부우)라고도 한다)는 鷺加(로가)가 되어 질병을 주관하였다. 넷째 夫蘇(부소)는 鷹加(응가)가 되어 형벌을 주관하였다. 高矢(고시)는 牛加(우가)가 되어 곡식을 주관하였다. 特明(특명)은 熊加(웅가)가 되어 병사를 주관하였다. 朱因(주인)은 鶴加(학가)가 되어 선악을 주관하였다. 余守己(여수기)는 狗加(구가)가 되어 忽(홀, 즉 주와 현이다)을 주관하였다.

 

壬辰二十五年. 帝出巡南海上, 赤龍呈瑞, 因龍祥, 改虎加爲龍加.

壬辰(임진) 25년. 帝(제)는 남쪽 海上(해상)으로 巡行(순행)하였는데, 붉은 용이 상서로움을 보여주었고 이로 인하여 虎加(호가)를 龍加(룡가)로 바꾸었다.

 

甲午二十七年. 帝曰.., 朞三百有六旬有六日四歲置閏者日行爲準五歲再閏者月行爲準以閏餘成一歲定春夏秋冬四時二十四節七十二候爲曆頒于天下使民不失農時.

 

己亥三十二年. 帝曰.., 百姓不親五倫不明百司不協故也. , 命神祐爲司徒, .., 汝敬敷五敎在寬.[11] 命雲牧爲司曆, .., 汝監星造曆在準. 命高矢爲司農曰汝播歛百穀在勤.[12] 命持提爲司樂曰汝歌舞節樂在和.[13] 命海月爲司工曰汝制器厚用在便. 命磨玉爲司藝曰汝格物致知在精.[14] 命成造爲司築曰汝建築宮室在儉. 命臣智爲司書曰汝書契記事在實. 命奇省爲司藥曰汝隨症施療在驗. 命那乙爲司籍曰汝管掌版籍在完. 命羲和爲司易曰汝典筮稽疑在叶.[15] 命蚩尤爲司馬曰汝訓練兵馬在勇. 命彭吳爲司土曰汝治山治水在厚. 命橋牛爲司牧曰汝馴致六畜在順. 命高臾爲司空曰汝掌理民事在柔. 命肅愼爲司弓[16]曰汝掌造弓矢在的. 命沃沮爲司兵曰汝制作斧矛在利. 命諸臣各授職司曰格物, 而後致知致知, 而後發明發明, 精進, 則能成敎化, 克臻治平之道爾百司其欽㢤.

己亥(기해, BC2302) 32년. 帝(제)가 이렇게 말했다. “백성들이 5륜을 가까이하지 아니하여 밝지 아니하고 百司(백사)들이 서로 협력하지 아니한다.” 이에 神祐(신우)에게 명하여 司徒(사도)가 되게 하여 이르기를 “너는 공경하여 5가지 가르침을 베풀고 이에 너그러움이 있어야 한다.” 雲牧(운목)에게 명하여 司曆(사력)이 되게하고 이르기를 “너는 별은 살피고 역법을 만들며 이에 있어서 기준이 있어야 한다.” 高矢(고시)에게 명하여 司農(사농)이 되게 하고 이르기를 “너는 씨뿌리고 100가지 곡식을 바라는데 있어서 부지런해야 한다.” 持提(지제)에게 명하여 司樂(사악)이 되게 하고 이르기를 “너는 가요와 춤에 가락을 맞추고 이에 조화를 이루어라.” 海月(해월)에게 司工(사공)이 되라고 명령하고 이르기를 “너는 그릇을 두텁게 만들어 쓰임에 편하게 하라.”고 하였다. 磨玉(마옥)에게 司藝(사예)가 되도록 하고 이르기를 “너는 사물의 이치를 깨닫기 위하여 자신의 지식을 완전케 하는데 있어서 정성이 있게 하라.”고 하였다. 成造(성조)에게 명하여 司築(사축)이 되고 하고 이르기를 “너는 궁실을 건축하는데 있어서 검소하여라.”고 하였다. 臣智(신지)에게 명하여 司書(사서)가 되게 하고 이르기를 “너는 書契(서글)에 일을 기록함에 있어서 사실대로 하여라.”고 하였다. 奇省(기성)에게 명하여 司藥(사약)이 되게 하고 이르기를 “너는 질병에 따라 치료를 베푸는데 있어서 효과 있게 하여라.”고 하였다. 那乙(나을)에게 명하여 司籍(사적)이 되게 하고 이르기를 “너는 서적을 출판하는데 있어서 완전하여라.”고 하였다. 羲和(희화)에게 명하여 司易(사역)이 되게 하고 이르기를 “너는 점을 치는데 있어서 상고하고 의심하여 화합이 있게 하라.”고 하였다. 蚩尤(치우)에게 명하여 司馬(사마)가 되게 하고 이르기를 “너는 병마를 훈련시켜 용맹이 있게 하라.”고 하였다. 彭吳(팽오)에게 명하여 司土(사토)가 되게 하고 이르기를 “너는 산과 강을 다스려 두터움이 있게 하라.”고 하였다.  橋牛(교우)에게 명하여 司牧(사목)이 되게 하고 이르기를 “너는 6가지 가축을 길들여 순함이 있게 하라.”고 하였다. 高叟(고수)[17]에게 명하여 司空(사공)이 되게 하고 이르기를 “너는 백성의 일을 관리하는데 있어서 부드러움이 있게 하라.”고 하였다. 肅愼(숙신)에게 명하여 司弓(사궁)이 되게 하고 이르기를 “너는 화살과 활을 만들고 관장하는데 있어서 표준이 있게 하라.”고 하였다. 沃沮(옥저)에게 명하여 司兵(사병)이 되게 하고 이르기를 “너는 도끼와 창을 만드는데 예리함이 있게 하라.”고 하였다. 모든 신하에게 각각 職司(직사)를 받도록 명하며 이르기를 “格物(격물)하고 致知(치지)하고 發明(발명)하고 精進(정진)하면 즉 능히 敎化(교화)를 이루며 태평한 길에 이르리니 너희 百司(백사)는 그것들을 공경하라.”

 

庚子三十三年. 帝命元輔彭虞曰.., 祭天報本敬神愛人爲治國之大道也. 汝以祭天敬神之事敎百姓曰.., , 有一位神無所不在, 有大德大慧大力, 主無數世界, 創造万物宇宙, 無限之大圈也. 天道無限之正圈也. 人道無限之正軸也. 物情無限之橫軸也. 自其正圈直射乎正軸者諸思想也. 自其正軸反射乎正圈者誠力也. 判斷之主體卽我而思想之實體, 是爲一身之靈主也. 自其宇宙自然之體互相融會交換其秘情之處卽靈䑓也. 今人宗敎之心始發於此也. 惟一允執厥中不失其正也. 彭虞[18]承命頌誥于天下九桓之民咸歸于一.

庚子(경자, BC2301) 31년. 帝(제)는 元輔(원보) 彭虞(팽우)[19]에게 명하여 이르기를 “하늘에 제사하고 근본에 보답하며 하느님을 공경하고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나라를 다스리는 큰 도리이다. 너는 하늘에 제사하는 것과 하느님을 공경하는 일을 백성이 가르치면서 이렇게 말하라. 하늘에는 하나의 하느님이 있으고 어느 곳에나 있으며 큰 덕과 큰 지혜와 큰 힘이 있으니 무수한 세계를 다스리고 우주 만물을 창조하였고 무한의 큰 권역이다. 天道(천도)는 무한한 正圈(정권)이며 人道(인도)는 무한한 正軸(정축)[20]이다. 物情(물정)은 무한한 橫軸(횡축)이다. 그 正圈(정권)으로부터 直射(직사)함이여, 正軸(정축)이라는 것은 모든 사상이다. 그 正軸(정축)으로부터 反射(반사)함이여, 正圈(정권)이라는 것은 모든 誠力(성력)이다. 판단의 주체 즉 나는 사상의 실체인데 이것이 하나의 육신의 靈主(령주)이다. 그 宇宙(우주)로부터 自然(자연)의 근본과 상호 融會(융회)와 交換(교환)하나니 그 비밀스런 뜻이 있는 곳이 곧 靈䑓(령대)이다. 현재 사람들의 종교에 대한 마음은 여기에서부터 시작한 것이다. 비록 그 하나를 진실로 잡아[21] 그 중에 잃은 것이 있을지라도 그 진실된 바른 것은 잃어버리지 않는 것이다.” 彭虞(팽우)[22]는 명을 이어 천하에 頌誥(송고)하니 九桓(구환)의 백성들이 하나로 다함께 돌아왔다.

 

癸卯三十六年. 敎化洽被四表, 國家泰平, 人民安樂, 雨順, 風調, 無病長壽, 山無盜賊, 家有餘糧, 夜不閉門, 道不拾遺, 耆老歌詠, 兒童舞踊, 人人以忠君愛國爲心, 家家以設壇祭天爲主. 每晨敬拜而就業, 自是敬天之道爲國民固有之大本. 每歲國中大會以上月三日【古之歲首元日今之冬至朔日】爲祭天節倍達民族之開天開國日也.

癸卯(계묘, BC2298) 36년. 교화가 四海(사해)를 덮어 화합하니 국가는 태평하고 인민은 안락하고 비는 순하게 오고 바람을 고르게 불고 병이 없어 오래 사니 산에는 도적이 없고 집집마다 양식이 넉넉하여 밤에도 문을 잠그지 아니하고 길가에서도 拾遺(습유)하지 아니하고 노인은 노래하고 아이들은 춤추고 뛰어다니었다. 사람마다 忠君(충군)과 愛國(애국)이 마음이 되었으며 집집마다 제단을 설치하고 하늘에 제사지내는 것이 주요한 것으로 삼았다. 매일 새벽에 경배하고 나아가 일을 하였는데 이것으로부터 하늘을 공격하는 도가 나라의 고유한 큰 근본이 되었다. 매 해마다 국가의 큰 모임을 上月(상월) 三日(삼일)【옛날에 한 해의 元日(원일)은 지금의 동지 朔日(삭일)이다.】 祭天節(제천절)로 하였는데 배달민족의 開天(개천) 開國(개국)한 날이다.

 

甲辰三十七年. 命史官神誌述九變震檀之圖, 預言歷代定都, 盖九變其局. 命蒲衣子爲太師, 其材器能於理氣之變化, 兼有德望.

甲辰(갑진, BC2297) 37년. 史官(사관) 神誌(신지)에게 명하여 九變震檀(구변진단)의 圖(도)를 짓도록 하였는데 도읍이 정해질 것을 예언하는 것으로 대개 9번 변하는 그 구획을 말하는 것이다. 蒲衣子(포의자)에게 명하여 太師(태사)가 되도록 하였다. 그는 材器(재기)가 능하여 변화의 기운을 다스릴 수 있었는데 겸하여 덕망이 있었다.

 

乙巳三十八年. 時有南夷之患, 遣皇子夫餘率兵卒, 討平之冽水以南, 悉服皇化, 故靑丘之民漸得遷居, 及洪水旣平, 南渡者益衆於是. 南夷之人并沾神化遂變其俗. 後之辰弁諸族是也.

乙巳(을사, BC2296) 38년. 때에 南夷(남이)가 환란이 있어서 皇子(황자) 夫餘(부여)를 보내 병사를 이끌고 冽水(렬수) 남쪽을 토평하게 하였는데 모두 복종하고 교화되었다. 그래서 靑丘(청구)의 백성들이 점차 옮겨가 살게 되었는데 홍수가 이미 평정되어 남쪽으로 건너는 자들이 이때에 더욱 많아졌다. 南夷(남이)는 점차 神化(신화)되어 기 풍속이 드디어 변하였는데 후대에 변진(辰弁)의 모든 족속들이 이들이다.[23]

 

戊申四十一年. 時有猰猶之亂【猰猶卽蒙古土民乃獫狁之屬是也】. 洪水之際, 僥倖得免, 而反看水土未定州里蕭然, 乃乘釁東侵, 其勢頗猛, 帝命夫餘集中外兵. 肅愼造弓矢, 沃沮作斧矛, 而討平之. 又命太子夫婁招撫鎭安一域化之.

戊申(무신, BC2293) 41년. 이때에 설유(猰[24])의 난리가 있었다【설유猰猶는 즉 몽골 토착인인데 험윤獫狁[25]의 족속이다.】. 홍수가 있었을 때에 요행히도 면함을 얻었는데 이에 돌이켜물과 흙으로 인하여 州(주)와 里(리)가 숙연한 것을 보고는 이내 동쪽으로 침략한 것이며 그 세력이 지나치게 사나웠다. 帝(제)는 夫餘(부여)에게 명하여 안팎의 병사를 모으도록 하였다. 숙신은 활과 화살을 만들고 옥저는 창과 도끼를 만들어 그들을 토평하였다.[26] 또한 태자 부루에게 명하여 鎭安(진안) 지역을 招撫(초무)하여 교화하도록 하였다.[27]

 

壬子四十五年. 始自甲辰歲, 天下有九年之水, 遼瀋之水漲溢, 平壤沉潜, 帝遣皇子四人相土地之宜卜居于阿斯達下唐莊坪, 而結㢚盡濟平壤之民. 命彭吳治國內高山大川, 以奠民居至于牛首州【今之春州】有彭吳碑.

壬子(임자, BC2289) 45년. 처음 甲辰(갑진, BC2297??)년으로부터 천하에 9년의 홍수가 있어서 遼瀋(료심)의 물들이 불어 넘쳐 평양은 가라앉아 버렸다.[28] 帝(제)는 皇子(황자)와 4명을 보내 토지를 살펴보고 마땅히 거할 땅을 점치어 阿斯達(아사달) 아래 唐莊坪(당장평)에 에 살게 하였고 곁채를 지어서 평양의 백성을 다[29] 구제하였다. 彭吳(팽오)에게 명하여 나라 안의 높은 산과 큰 하천을 다스리고 백성들로 牛首州(우수주)【지금의 춘주春州】에 거하게 하였는데 여기에 彭吳碑(팽오비)가 있다.

 

癸丑四十六年. 高矢之親兄, 高臾有子容貌才質非凡, 故甚愛之命名曰舜【槿花】, 又曰重華,盖如國華之愛重也. 性之孝, 自幼受學於蒲衣子, 而耕歷山, 漁雷澤, 陶河濱所居, 一年成聚, 二年成邑, 三年成都. 其玄妙之化遠及四方. 是時堯聞之, 大加敬慕, 而致書厚幤, 舜遂不仕於檀朝, 欲仕隣邦堯朝. 由是父子意志相左, 高臾愛小子象欲殺舜, 舜知父意克諧以孝.

癸丑(계축, BC2288) 46년. 高矢(고시)의 친형 高叟(고수)는 아들이 있어 용매와 자질이 비범하였으므로 심히 그를 사랑하여 이름하기를 舜(순)【무궁화라는 뜻】이라 하였고 또한 重華(중화)라고 하였는데, 대개 國華(국화)의 愛重(애중)이라는 말이다. 효성이 있고 어려서부터 蒲衣子(포의자)로부터 배웠다. 歷山(력산)에서 밭을 갈고 雷澤(뢰택)에서 물고기를 잡고 陶河(도하)가에서 살았다. 1년이 지나 취락을 이뤘고 2년이 지나 邑(읍)을 이뤘으며 3년이 지나 都(도)를 이뤘으니 그의 현묘한 교화가 멀리 사방에 미치었다. 이때에 堯(요)가 이를 듣고 敬慕(경모)를 크게 더하여 致書(치서)하고 후한 禮幣(예폐)하니 舜(순)은 드디어 檀朝(단조)에서 벼슬을 하지 않고 이웃나라 堯朝(요조)에서 벼슬을 하려고 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부자의 뜻이 서로 맞지 아니하였으니 高叟(고수)의 사랑하는 작은 아들 象(상, 즉 유상有象)이 舜(순)을 죽이고자 하였다. 舜(순)은 아버지의 뜻을 알고 효도로 화합함을 이루었다.

 

丙辰四十九年. 唐堯聘舜, 以娥媓女英兄第二女妻之, 而攝行國政舜欲置幽幷營三州于遼地. 檀朝遣書諭其不可而止.

丙辰(병진, BC2285) 49년. 唐堯(당요)는 舜(순)을 불러 娥媓(아황)과 女英(녀영)[30]을 부인으로 주고 舜(순)에게 섭정시켰고 幽州(유주) 幷州(병주) 營州(영주)를 遼地(료지)에 설치하려 하였다. 檀朝(단조)는 書(서)를 보내 타일러 불가하다고 하니 설치하지 않았다.[31]

 

丁巳五十年. 彭吳治山治水屢年功完. 是時, 汚濕蒸氣癘疫發生, 罹死者甚多, 夫宇治醫藥而防𣑃瘵猛獸毒虫乘間繁殖被害者不少. 夫蘇燻燒山澤, 除祛害毒. 不軌之民乘勢猖獗, 夫餘親率武士誅暴亂除殘▨. 神后治衣裳勸紡績. 夫婁設陶冶備器用. 高矢浚溝洫開田陌. 余守己掌州縣制民産. 肅愼造弓矢制兵器. 蚩尤建宮室定宅宇. 於是柳亭蓬閣土階自成草茆不除檀木茂陰熊虎交遊牛羊茁庶民漸饒國用大敷四境安定百姓樂居政令行於上敎化施於下四海之內歌頌泰平九桓之民咸戴帝功.

丁巳(정사, BC2284) 50년. 彭吳(팽오)는 산과 물을 다스리는데 몇 년에 완성되었다. 이때에 더러운 습한 기운으로 인하여 창질과 염병이 발생하였는데, 병에 걸려 죽는 자가 심히 많았다. 夫宇(부우)는 의약으로 다스렸다. 맹수와 독충들이 그간에 번식하여 피해입은 자가 적지 아니하였다. 夫蘇(부소)는 산과 연못을 태워 독소를 제거하였다. 따르지 않는 사람들이 많아질 때는 夫餘(부여)가 친히 무사를 이끌고 나가 난리를 진압하고 잔당들을 제거하였다. 神后(신후)는 옷만들기를 다스리고 길쌈을 권하였다. 夫婁(부루)는 쇠를 불리는데 쓰는 도기를 만들었다. 高矢(고시)는 봇도랑을 치고 논두렁을 열었다. 余守己(여수기)는 주와 현을 관장하고 백성의 생산을 제어하였다. 肅愼(숙신)는 弓矢(궁시)를 만들고 병기를 제어하였다. 蚩尤(치우)는 궁실을 짓고 거처를 안정시켰다. 이때에 柳亭蓬閣(류정봉각)의 돌계단에 풀과 순채가 스스로 자라 제거되지 아니하였고, 박달나무는 무성한 나무그늘이 되었다. 곰과 호랑이는 交遊(교유)하였고, 소와 양은 잘 자라갔으며, 서민들은 점차 넉넉해졌다. 국가는 널리 베풀어 모든 지경이 안정되었고 백성은 즐겁게 살았다. 정치의 명령은 위에서 행하여져서 교화가 널리 아래에까지 미쳤다. 천하에 태평의 노래가 흘러나오고 구환의 백성들은 모두 임금의 공로를 느꼈다.

 

戊午五十一年. 洪水旣平, 化被四土. 北曁大荒, 東窮滄海, 南至海岱, 西率獗猶, 東西五千餘里, 南北六千餘里. 區劃天下之地, 分封勳臣爲諸侯. 環南西地封蚩尤氏之後, 曰藍國侯, 在遼河近地, 宅奄慮忽. 環北東地封臣智氏之後, 𠐍侲國侯, 在黑水東南地, 宅夙沙忽【肅愼】. 環南東地封高矢氏之後, 曰靑丘侯, 在大同江近地, 宅樂浪忽. 封朱因爲蓋馬侯, 在太白山東南地. 封余守己爲濊國君, 在黑龍江近地, 治濊城. 封緋天生爲南海長, 在渤海上, 守閻洋. 封夫餘爲餘州侯, 在濊地南. 封夫宇爲眞蕃侯. 封夫蘇爲句麗侯.

戊午(무오, BC2283) 51년. 홍수가 이미 평정되고 교화가 사방을 덮었다. 북쪽은 大荒(대황)에 미치고 동쪽은 滄海(창해)에 닿으며 남쪽은 海岱(해대)에 이르고 서쪽으로는 獗猶(궐유)[32]를 다스렸으니 동서 5000여리이고 남북으로 6000여리이다. 천하의 땅을 나누었는데 군신은 공적에 따라 제후로 임명하였다. 남서쪽을 둘러싸도록 蚩尤(치우)씨의 후손을 봉했는데 藍國(람국) 侯(후)라고 하였으며 遼河(료하) 근방의 땅이고 奄慮忽(엄려홀)에 도읍하였다. 북동쪽을 둘러싸도록 臣智(신지)씨의 후손을 봉하여 𠐍侲國(속진국)[33] 侯(후)라고 하였고 黑水(흑수) 동남쪽의 땅이고 夙沙忽(숙사홀)【肅愼(숙신)】에 도읍하였다. 남동쪽을 둘러싸도록 高矢(고시)씨의 후손에게 봉하여 靑丘(청구) 侯(후)라고 하였는데 大同江(대동강) 근방에 있고 樂浪忽(락랑홀)에 도읍하였다. 朱因(주인)씨를 봉하여 蓋馬(개마) 侯(후)가 되게 하였고 太白山(태백산) 동남쪽의 땅에 있다. 余守己(여수기)를 봉하여 濊國(예국) 君(군)이 되게 하였고 黑龍江(흑룡강) 근처에 있으며 濊城(예성)에서 다스렸다. 緋天生(비천생)을 南海(남해) 長(장)에 봉하였고 渤海(발해) 위에 있는데 바다의 관문을 지킨다. 夫餘(부여)를 봉하여 餘州(여주) 侯(후)가 되게 하였고 濊(예)의 땅 남쪽에 있다.[34] 夫宇(부우)를 봉하여 眞蕃(진번) 侯(후)가 되게 하였다. 夫蘇(부소)를 봉하여 句麗(구려) 侯(후)가 되게 하였다.

 

庚申五十三年. 命造琴瑟笙簧仍制檀簫.

庚申(경신, BC2281) 53년. 琴(금)과 瑟(슬) 笙簧(생황)과 檀簫(단소)를 제작하게 하였다. .

 

辛酉五十四年. 命植槿于國內山川

辛酉(신유, BC2280) 54년. 무궁화를 국내 산천에 심게 명하였다.

 

壬戌五十五年. 先是天下萬國皆有洪水之亂, 堯當九年之水, 命鯀治洪水, 九載不績. 舜攝𠬨[35]七年殛于羽山, 使鯀之子禹繼而治水.

壬戌(임술, BC2279) 55년. 이보다 먼저 천하만국이 모두 홍수의 난이 있었는데, 堯(요)는 9년의 홍수에 맞서 鯀(곤)에게 명하여 홍수를 다스리라고 하였지만 9년이 지나도 효과가 없었다. 舜(순)이 섭정 7년되는 해에 羽山(우산)에서 곤을 죽였고 그의 아들 禹(우)가 治水(치수)를 잇도록 하였다.

 

丙寅五十九年. 帝南巡至阿斯達, 封禪祭天幸穴口【今江華島】, 使皇子三人【夫餘夫宇夫蘇】築石城于甲比次【今傳[36]燈山】, 三子各築一峯, 故稱三郞城, 一名鼎足山城, 三子主之重視國防【古記云.., 三郞倍達臣是乃三神守護之官】. 又築祭天壇于頭岳山摩尼丘稱塹星壇. 上方下圓, 高十七尺, 上四方各六尺六寸下, 圓直徑十五尺. 其制應天一地二, 下立二石, 上覆一石, 爲東洋第一天壇.

丙寅(병인, BC2275) 59년. 帝(제)는 남쪽으로 순행하여 阿斯達(아사달)에 이르렀다. 封禪祭天(봉선제천)을 위하여 穴口(혈구)【지금 江華島(강화도)】에 행차하였다. 皇子(황자)와 三人(삼인)【夫餘(부여)와 夫宇(부우)와 夫蘇(부소)】로 하여금 石城(석성)을 甲比次(갑비차)【지금의 傳燈山(전등산)】에 쌓게 하고 세 명의 아들로는 각자 한 개의 봉우리를 쌓게 하였으므로 三郞城(삼랑성)이라 하였으며 또한 鼎足山城(정족산성)이라고도 하는데 세 명의 아들이 삼랑성을 주관하였는데 나라를 방어하는데 중시되었다【古記(고기)에서 말하기를 三郞(삼랑)이란 倍達(배달)의 신하이고 또한 더하여 三神(삼신)을 수호하는 관리라고도 하였다.】. 또한 祭天壇(제천단)을 頭岳山(두악산) 摩尼丘(마니구)에 쌓았는데 塹星壇(참성단)이라고 칭하였다. 윗부분은 각지고 아래부분은 둥근데, 높이가 17척이다. 윗부분은 네 면이 각각 6척 6촌이고 아래 원의 직경은 15척이다. 그것은 하늘과 땅에 응하도록 만들어졌고, 아래는 2개의 돌이 서있고 윗부분은 1개의 돌로 덮여 있으니 동양 제일의 天壇(천단)이다.

 

己巳六十二年. 堯臣禹居外八年, 困於治水聞檀朝已成, 厥功欲取治水之法會萬國于塗山【今直隷界】. 帝遣太子夫婁會禹授三神五帝中經及五行治水法以彭吳爲特命大使以我國治水時所用橇梮及巨斧授之禹. 禹拜受而治水告功. 後禹改塗山之名而讚夫婁之會見, 故改稱覆釜山, 得神書, 故又稱宛委山, 稽考神道, 故又稱會稽山. 不㤀朝鮮救災之德, 而銘之曰 啗其實勿傷其枝, 飮其水莫淆其流. 禹至年老嘆曰.., 壽將盡五月後葬我於會稽山. 蓋太子夫婁與堯臣親善, 而授禹以治水之法, 故禹從身不忘其恩如此也.

己巳(기사, BC2272) 62년. 堯(요)의 신하 禹(우)가 집밖에서 살기를 8년째되어 홍수를 다스리는데 지쳤는데 檀朝(단조)에서는 이미 물을 다스리는 것을 완성하였다는 것을 들었다. 물을 다스리는 법을 알기 위하여 만국에서 塗山(도산)【지금 直隷(직례)의 경계】에 모였다. 帝(제)는 태자 夫婁(부루)를 모임에 보내 禹(우)에게 三神五帝中經(삼신오제중경)과 五行治水法(오행치수법)을 주고, 彭吳(팽오)로 하여금 特命大使(특명대사)가 되게 하였고, 우리나라가 물을 다스리는데 사용한 진흙썰매(橇)와 나막신(梮)과 큰 도끼를 禹(우)에게 주었다. 禹(우)는 큰절을 하여 받고 물을 다스린 후 그 결과를 보고 하였다. 이후에 禹(우)는 塗山(도산)의 이름을 고쳤는데, 夫婁(부루)의 會見(회견)을 기리기 위하여 이름을 고쳐 覆釜山(복부산)이라 하였고, 神書(신서)를 얻었다 하여 宛委山(완위산)이라 하였으며, 神道(신도)를 稽考(계고)하기 위하여 會稽山(회계산)이라 하였다. 朝鮮(조선)이 재앙에서 구해준 덕을 잊지 않기 위하여 새기기를 “그 열매를 먹을 때에는 가지를 상하게 하지 말고 그 물을 마실 때에는 그 흐름을 흐트러뜨리지 마라.”고 하였다. 禹(우)가 늙어서 한탄하며 말하기를 “수명이 장차 다하였으므로 5개월 후에 나를 會稽山(회계산)에 장사지내라.”고 하였다. 대개 태자 夫婁(부루)와 堯(요)의 신하가 親善(친선)을 맺어 禹(우)에게 治水(치수)의 법을 주었으므로 禹(우)가 죽으려 할 때에 그 은혜를 잊지 못한 것이 이와 같다.

 

甲戌六十七年. 舜之先本神巿天皇時于部之人也. 舜生於諸馮【俗[37]說西豊】 故肇十二州, 而置幷州于冀州東恒山之地置幽州于其東北醫巫閭之地【遼西】置營州于靑州東北遼河之東【遼東】帝遣太子夫婁與舜之首揆禹會于塗山議定國界回復幽營二州屬于檀朝.[38] 帝曰.., 曾觀天下山川相侯國土地.., 靑丘則開田野, 興農業, 風氣溫美, 五穀豊饒, 民皆衣輕煖而食肥美, 頗有衣冠帶劒文化, 武威亦得以幷興. 𠐍侲則地氣勁寒, 不宜五穀, 土廣人稀, 牧畜頗適, 乃使民帶[39][40]佩劒, 幷事遊獵, 後世其民漸徙黑水之地, 漁獵爲業. 艱險儉嗇, 麤健勁悍, 徒習弓[41]. 藍國則遠紹先世之志, 撫民安業, 講習戎事, 恒爲西南煩弊, 且其民數遷海岱之地, 後世與中土諸國恒事干戈互相角逐. 經曰..,夫食足貨通然後, 國實民富而敎化成焉. 若使民, 終歲睊睊以絲穀爲慮, 則復奚暇言禮義㢤. 雖然, 天覆地載, 區隅各殊, 故氣有寒溫, 土有肥瘠, 其如天澤地利之不齊, 何此 三方之守國敎民之道, 所以各自不同者也.[42]

甲戌(갑술, BC2267) 67년. 舜(순)의 선조는 원래 神巿(신불) 天皇(천황) 때에 于[43](우부) 사람이다. 舜(순)은 諸馮(제풍)【속설에는 西豊(서풍)이라 하였다.】 에서 태어났다. 그래서 처음으로 12주를 두었는데, 幷州(병주)를 冀州(기주) 동북쪽 恒山(항산)의 땅에 설치하였고, 幽州(유주)를 병주의 동북쪽 醫巫閭(의무려)의 땅【遼西(료서)이다】에 설치하였으며, 營州(영주)를 靑州(청주)의 동북쪽 땅인 遼河(료하)의 동쪽【遼東(료동)이다.】에 설치하였다. 帝(제)는 태자 夫婁(부루)를 舜(순)의 首揆(수규) 禹(우)에게 보내 塗山(도산)에서 모여 국경을 논하여 정하고 營州(영주)와 幽州(유주)를 다시 회복하여 檀朝(단조)에 소속시켰다.[44] 帝(제)가 말하길 “일찍이 천하 산천을 내려보고 제후국들의 토지를 살펴보았는데, 靑丘(청구)는 곧 밭과 들을 열고 농업을 발전시켰는데 풍토와 날씨가 따뜻하여 오곡이 풍요하니 백성들이 모두 옷을 가볍고 따뜻하게 입었으며 자못 옷에 갓과 띠를 두르기도 하였지만 劒(검)의 문화와 武威(무위)가 역시 함께 발전하였다. 𠐍(속진)은 곧 땅의 기운이 강하고 차가워서 오곡에 마땅치 아니하였고 땅을 넓고 사람은 적어서 목축하기에 자못 적당하였다. 백성들로 하여금 활과 검을 차고 遊獵(유렵)하게 하였으니 후세에 그 백성들이 점차로 黑水(흑수)의 땅으로 들어가 漁獵(어렵)이 일이 되었다. 어려운 가운데서도 검소하고 거친 가운데서도 굳건하였으니 무리들이 弓馬(궁마)를 익히었다. 藍國(람국)은 곧 먼 선조의 뜻을 이어 백성을 위로하고 편안하게 하는 것을 업으로 삼아 병기를 익혀 항시 서남쪽을 보호하였다.[45] 또한 그 백성은 여러 번 海岱(해대)의 땅으로 옮겨가서 후세에 中土(중토)의 여러 나라와 항시 서로 싸워 각축하였다. 經(경)에 이르기를 “비록 음식이 풍족하고 재화가 유통된 후에야 국가가 틈실해지고 백성이 부귀해지며 교화가 이루어진다”고 하였다. 만약 백성으로 하여금 곁눈질하여 곡식을 염려하게 만들면 곧 다시 어떻게 한가롭게 예의에 대하여 말하겠는가? 비록 그러할지라도, 하늘이 땅을 덮고 땅은 하늘을 이고 있으니 구역이 각자 다르며 따라서 기후도 차고 따뜻하며 토지도 비옥하거나 척박하니, 그것이 하늘의 혜택과 땅의 이로움이 고르지 못한 것과 같다. 어찌 이와 같은가? 세 곳이 나라를 지키는 것과 백성을 가르치는 도리가 각각 다른 것이다.

 

乙亥六十八年. 帝命改築平壤城. 按撫庶民, 大會諸侯, 復申天下, 農桑之政. 帝北巡祭天于太白山, 奉天下山岳河川之神三千, 州里各有祭神, 皇化洽被四土, 制治此前更定矣. 歷牛首忽至肅愼忽, 會北東諸侯, 撫賉百姓而還都平壤, 八加有众及諸侯畢集. 命立神誌氏廟於夙沙, 蚩尤氏廟於奄慮, 高矢氏廟於蘇委, 又召五加議立桓國天帝廟而造成. 帝親先祭之, 乃使五加众各致祭于日月陰陽四時之神, 及山岳河川里社之主, 而天下大祭畢. 帝大誥于众曰

乙亥(을해, BC2266) 68년. 帝(제)는 平壤城(평양성)을 改築(개축)할 것을 명하였다. 백성들을 어루만지고 제후들을 크게 모이게 하여 農桑(농상)을 천하에 명령하였다. 帝(제)는 북쪽으로 순행하여 太白山(태백산)에서 제사지내고 천하 산악 하천의 3000의 신을 봉하였고 각 주와 리마다 신에게 제사를 지냈는데 임금의 교화가 四海(사해)를 화합하여 덮었고 고쳐 정하기 전에 다스림을 정하였다. 牛首忽(우수홀)을 지나 肅愼忽(숙신홀)에 이르러 북동쪽을 제후를 모아 백성을 撫賉(무휼)한 후에 도읍인 평양으로 돌아오니 八加(팔가)와 뭇 제후들이 모두다 모였다. 神誌(신지)씨의 묘를 夙沙(숙사)에 세우라고 명하고, 蚩尤(치우)씨의 묘를 奄慮(엄려)에 세우라고 명하고, 高矢(고시)씨의 묘를 蘇委(소위)[46]에 세우라고 명하였으며, 또한 五加(오가)를 불러 모아 桓國(환국) 天帝(천제)의 묘를 세월 것을 의논한 후에 묘를 조성하였다. 帝(제)는 친히 환국 천제의 묘에 제사지내고 이내 오가와 무리들에게 각자 지극한 정성으로 해와 달과 음양과 사시의 신과 산악과 하천과 마을의 토지의 주인에게 제사지내게 하였고 천하에 큰 제사가 마치니 帝(제)가 크게 고하여 말하기를

若曰,

惟皇皇, 三神上帝在最高至上一位. 創宇宙, 主全世界, 造無量物, 蕩蕩洋洋, 無物不包, 明明靈靈, 纖塵弗漏.

惟明明, 桓國天帝桓因, 首出萬民, 庶物之上, 用御天宮, 啓萬善, 原萬德, 群靈諸嚞護侍, 大吉祥, 大光明, 處曰桓國.

惟桓桓, 神巿天皇降自天宮, 率三千團部, 爲我神巿開剏, 乃至功完而朝歸天宮.

咨爾五加有众, 惟則天範, 扶萬善, 滅萬善滅惡, 性通功完, 乃朝天.

天範惟一, 弗貳厥門, 爾惟純誠一爾心, 乃朝天.

天範惟一, 人心惟同, 惟秉己心, 以及人心, 人心惟化, 亦合天範, 乃用御于萬邦.

.., 爾生由親, 親降自天, 惟敬爾親, 乃克敬天; 以及于邦國, 是乃忠孝, 爾克體, 是道. 天有崩, 必克脫免.

飛禽有雙, 弊履有對; 爾男女, 以和, 毋怨毋妬毋淫.

爾嚼十指, 痛無大小; 爾相愛毋胥, 讒互佑毋相殘, 家國以興.

爾觀于牛馬, 猶分厥蒭; 爾互讓毋胥奪, 共作毋相盜, 家國以殷.

爾觀于虎, 强暴不靈, 乃作孽; 爾毋桀鷔以戕, 毋傷人, 恒遵天範, 克愛物. 爾如有越厥, 則永不得神佑, 身家以殞.

爾如衝火于華田, 華將殄滅, 神人以怒, 爾扶傾, 毋凌弱, 濟恤, 毋侮卑.

爾雖, 厚包厥香, 必漏, 爾敬持彛性, 毋懷慝, 毋隱惡, 毋藏禍. 心克, 敬于天, 親于萬民, 爾乃福祿無窮. 咨爾有众, 其欽哉. (이상 번역 생략)

 

帝大誥于五加有众, 於是神德益彰, 自是以來, 天下復熙熙焉, 浴化矣, 或曰此卽佺教八條之目.

(제)가 크게 오가와 무리에게 훈계하니, 이에 神德(신덕)이 더하여 빛나고 이로부터 천하가 다시 빛났고 浴化(욕화)되었다. 혹 말하기를 이것이 곧 佺教八條目(전교팔조목)이라고도 한다. .

 

庚子九十三年. 帝命太子夫婁攝政, 勅曰.., 天道昭昭降在爾心, 惟秉爾心, 親于萬民, 惟以純誠也㢤. 是歲三月十五日帝崩于檀宮, 葬于城外十里之地, 百姓如喪考, 四海悉廢音樂, 家家奉檀旂, 設神位晨夕, 合坐敬拜省念. 翌年辛丑太子夫婁立是爲元帝. 大金章宗皇帝明昌四年癸丑上尊謚曰開天弘聖皇帝【弘史作宏】.

庚子(경자, BC2241) 93년. 帝(제)는 태자 夫婁(부루)에게 섭정하도록 명하고 조칙를 내려 말하기를 “하늘의 도리는 밝아 네 마음에 내려와 있으니 오직 마음을 바로잡아 만민을 사랑하고 오직 순결한 마음과 정성된 마음으로 하라”고 하였다. 이 해 3월 15일 帝(제)가 檀宮(단궁)에서 죽어 성 밖 10리의 땅에 장사지냈다. 백성들이 자기 어미 죽은 것 처럼 슬퍼하며 四海(사해)가 모두 음악을 폐하였으며 집집마다 檀旂(단기)를 받들었고 神位(신위)를 아침 저녁으로 설치하여 같이 앉아 경배하고 마음을 살폈다. 다음 해 辛丑(신축)년에 태자 夫婁(부루)가 즉위하니 이가 곧 元帝(원제)이다. 大金國(대금국) 章宗皇帝(장종황제) 明昌(명창, 1190~1196) 4년 癸丑(계축)년에 높여 諡號(시호)를 더하여 開天弘聖皇帝(개천홍성황제)【弘(홍)을 역사책에서는 宏(굉, hong)을 썼다.】라고 하였다.[47]

 



[1] 이체자로 쓰여져 있다.

[2] 원문에는 𠈌로 되어 있다.

[3] 원문에는 𢩙로 되어 있다.

[4] 앞서 三僊이라고 적었지만 이곳에서는 三仙이라고 하였다.

[5] 元輔 彭虞와 같은 인물로 보인다.

[6] 원문에는 餡으로 되어 있으나 문맥상 䐄이 맞다.

[7] 이는 치우씨 慈烏智(자오지) 자손이다.

[8] 余守己(여수기)라고도 하는데 한문해독을 잘못하여 余守己(여수기)가 이름이 되었으니, 실재 이름은 扶餘(부여)이며 守己란 (설유, 獫狁)의 반란을 진압하여 지키고 다스렸다는 데서 기인한 것이다.

[9] 이상의 구절들은 대부분 𥛠事記(신사기)에 나오는 것들이다. 그런데 내용을 보면 檀國의 내용과 辰檀의 내용이 섞여 있는데 신지와 고시와 지제는 檀國의 내용이고 그 밖의 것은 辰檀의 내용이다. 辛卯 24년에는 이와 비슷한 기록이 또 나오고 있는데 그 실제 내용은 또 다르다.

[10] 책을 잘못베껴서 발해란 나라는 사라진지 오래되었는데 今渤海라고 적었다.

[11] 이 구절은 書經(서경)에 나오는 구절이다. “帝曰.., 百姓不親五, 汝作司徒敬敷五親相親睦也” 《書經大全 卷一》

[12] 百穀이란 관직 역시 書經(서경)에 나온다. “帝曰.., 棄黎民阻飢, 汝后稷百穀” 《書經大全 卷一》

[13] 風伯(풍백)을 맡았던 자에게 이제 司樂(사악)을 맡기고 있으니, 진실성이 의심된다.

[14] 大學(대학)에 나오는 말이다.

[15] 羲和 역시 書經(서경)에 나오는 인물이다. “乃命羲和, 欽若昊天, 象日月星辰, 敬授人時.《書經大全 卷一》

[16] 원문에는 𢎗(及의 古字)으로 써 있다.

[17] 瞽瞍(고수)라고도 한다.

[18] 원문에는 𠈌로 되어 있다.

[19] 원문에는 𠈌로 되어 있다.

[20] 원문에는 𨋀로 되어 있다.

[21] 원문에는 𠙜로 되어 있다.

[22] 원문에는 𠈌로 되어 있다.

[23] 규원사화 기록을 베낀 것이다. 南夷(남이)의 환란을 토평한 것은 건국 후 10여년이 지난 해인 BC2323년이고, 30여년 만에 홍수가 있었으니 홍수는 BC2303년이다. 그리고 홍수가 평정되고 점차 청구의 백성들이 南夷(남이)의 땅으로 옮겨가 살게 된 것인데, 이제 이러한 일련의 기록을 무시하고 BC2296년에 남이의 환란과 청구 백성의 이주를 같이 적었다. 저자가 의도하는 바는 이 때에 이르러 홍수가 평정되었다는 것인데 어떤 기록을 근거하고 있는지 알 수 없다.

[24] 로 써야 할 글자로 猶는 “설유”이나 반절법을 취하여 “슈”로 읽어야 한다. 濊와 같다. 濊는 강희자전에 呼會切 즉 “회”로 읽어야 한다고 나오지만 濊는 歲(세)와 水(수)이니 이들 두 글자를 이용하여 반절법을 취하면 역시 “수”이다. 즉, 상고시대 濊의 발음이 “수”일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25]狁은 “험윤”이나 반절법을 취하여 “휴”로 읽어야 한다. “휴”가 구개음화가 되면 “슈”이니 곧 猰猶나 獫狁이나 “슈”라는 이름을 가진 濊族이다. 즉, 험윤 중에 단군조선에게 복종한 이들이 곧 獩貊(예맥)이고 복종하지 않은 이들이 匈奴(흉노)이다.

[26] 역시 규원사화에 나오는 구절이다. 개국 40여년 만에 설유가 침입하였다고 하였으니 대략 BC2394년이다. 그런데 갑자기 숙신이 활과 화살을 만들고 옥저가 창과 도끼를 만들어 토평하였다고 하였는데, 이는 단서대강 저자가 삽입한 구절이다. 설유가 맹렬하게 침입하여 왔는데 그때에 이르러 전쟁무기를 만든다는 것은 논리상 맞지 않는다.

[27] 역시 규원사화의 구절과 비슷한데, 설유가 침입한 후에 부여에게는 첫 번째 도읍인 牛首忽(우수홀) 주고 부루에게는 平壤城(평양성)을 다스리게 하였다고 하였는데, 이제 이를 고쳐 鎭安一域이라고 하였으니 어디인지 알 수 없다.

[28] 규원사화에는 개국한지 30여년만에 홍수가 있었다고 하였다. 대략 BC2303년에 홍수가 있었다.

[29] 원문에는 𥁞로 되어 있다.

[30] 娥媓女英兄第二女妻之라고 되어 있는데 娥媓女英二女妻之로 해석하였다.

[31] 규원사화에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처음에 夫婁(부루)가 임금의 자리에 올랐을 때는 虞舜(우순)이 藍國(람국)의 인접한 땅을 營州(영주)로 삼은 지가 무릇 수십년이기에, 부루가 뭇 加(가)로 하여금 그 땅을 정복하게 하고 그 무리들을 모두 내치게 하였다.”

[32] (알유)이다.

[33] 규원사화에는 僂侲(루진)이라고 하였다.

[34] 지금 부여국의 북쪽에 濊國(예국)이 있다고 하여 濊國(예국)이 흑룡강 근처에 있다고 하였는데 틀렸다. 부여는 단군조선 서쪽에 있었고, 그곳 북쪽이 바로 예국으로 북부여이다. 흑룡강 남쪽에 있던 부여는 북부여에게 밀려 동쪽으로 쫓겨난 동부여의 땅이다. 부여국을 동부여로 잘못이해하여 예국을 흑룡강에 잘못비정하였다.

[35] 원문대조 필요. 글자가 이와는 사뭇 다른데 무슨 글자인지 알 수 없으나, 政의 뜻임은 분명하다. 본 글자는 “절(다스리다)”이다.

[36] 傅인지 명확하지 않다.

[37] 원본 대조 필요.

[38] 앞서 BC2285에 유주와 영주를 설치하려 하였으나 서신을 보내 타이르지 설치하지 않았다고 하였는데, 이제 다시 유주와 영주를 檀朝로 회복하였다 하였다. 둘 중에 하나는 僞史이다.

[39] 원문은 𢃄로 되어 있다.

[40] 𢎗(及의 古字)로 되어 있다.

[41] 𢎗(及의 古字)로 되어 있다.

[42] 대부분 규원사화에 보이는 구절이다. 蚩尤氏旣受封於藍國, 乃紹先祖之志, 撫民安業, 講習戎事, 恒爲西南藩蔽. 且其民, 數遷(徒)[徙]海岱之地, 以致後世, 恒與漢土諸國, 互相角逐. 神誌氏受封於僂侲國, 地旣勁寒, 不宜五穀, 土廣人稀, 牧畜頗適, 乃使民帶弓佩劒, 幷事遊獵. 後世, 其民漸徙黑水之地, 遂以漁獵爲生, 艱險儉嗇, 麤健勁悍. 雖强勇遠出於諸國, 漸至不習文事. 後世, 漢曰挹婁, 元魏曰勿吉, 隋.唐曰靺鞨, 稍與窮北蠻人相混, 漸失其俗, 頗有陵夷之歎. 近古, 金女眞等, 皆其後身, 同族異稱也. 高矢氏就靑丘國, 觀山川, 相土地, 開田野, 興農桑. 風氣溫, 五穀豊肥. 民皆, 衣輕(暖)[煖]而食肥, 頗有冠帶衣履天下之槪, 文武亦得以幷興. 夫, 食足貨通然後, 國實民富而敎化成. 故《管子》曰: 倉廩實而知禮節, 衣食足而知榮辱. 若使民, 終歲睊睊以絲粟爲慮, 則復奚暇言禮義哉! 雖然, 天覆地載, 區隅各殊, 於是氣有寒溫, 土有肥瘠, 其如天澤地利之不齊, 何是! 三家者之守國敎民之道, 所以各異, 而其果應亦自不同者也.

[43] 亍으로도 보인다.

[44] 앞서 BC2285에 유주와 영주를 설치하려 하였으나 서신을 보내 타이르지 설치하지 않았다고 하였는데, 이제 다시 유주와 영주를 檀朝로 회복하였다 하였다. 둘 중에 하나는 僞史이다.

[45] 규원사화 구절을 잘못베꼈다. 규원사화에는 恒爲西南藩蔽라고 하여 서남쪽의 울타리가 되었다는 말이지만 단서대강에서는 이를 고쳐 恒爲西南煩弊라고 하여 서남쪽의 번거로운 폐단이 되었다는 말이 되어버린다. 규원사화에 따라 번역하였다.

[46] 규원사화에는 蘇婁達이라고 하였다.

[47] 金史(금사) 권10을 보면 “冊長白山之神開天聖帝(장백산의 신을 책봉하여 개천홍성제라고 하였다)”고 하였다. 이를 두고 단서대강 저자는 大金에서 초대 단군왕검을 개천홍성제로 諡號를 높이었다고 쓴 것이다. 또한 滿洲源流考에서는 開天宏聖帝로 썼는데 宏의 중국발음은 hong(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