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IYN 기본소득 세미나 2017 <여성과 기본소득> 기본소득청'소'년네트워크의 다섯 번째 기본소득 세미나가 열립니다. 올해는 여성주의의 관점에서 기본소득을 바라보고 이해해봅니다. 기본소득의 의미를 풍부하게 확장하기 위함입니다. 기본소득을 정의하는 다섯가지 특징인 보편성, 개별성, 무조건성, 지속성, 현금성의 철학적 의미와 현실에 적용될 때의 가치를 스스로/함께 공부하고, 마지막 시간에는 여성주의적 관점에서 이러한 특징들을 재정의 해 보는 시간을 가질 예정입니다. 지금, 가장 절실하고 정의로운 기본소득을 그려보는 과정에 함께하실 분을 기다립니다. • 일시: 매주 일요일 오후 12시-2시 ✓ 세미나 일정 및 자료 0. 2/12 - 내가 기본소득을 받는다면? 1. 2/19 - 기본소득 살펴보기 2. 2/26 - 남성중심적으로 형성된 생산과 분배의 이분법 3. 3/5 - 누가, 어떻게 개인이 되었는가 4. 3/12 - 마무리 워크숍 ✓ 매 주 한 사람 이상 1-2 페이지의 쪽글을 준비하여 함께 읽고 이야기 나눕니다. 신청 시 원하는 주차를 적어 위의 메일로 보내주세요. 관심있는 분들의 많은 참여 바랍니다. |
2017 겨울 <기본소득 X 여성>
2017 세미나 <여성X기본소득> 3. <남과 여, 은폐된 성적계약> 1장, 3장
게시자: 기본소득청'소'년네트워크, 2017. 4. 12. 오후 5:29 [ 2017. 4. 12. 오후 5:57에 업데이트됨 ]
1. 대담내용 | 사회계약의 숨어있는 이야기, 근대적 가부장제의 형성 K
희원
지원
신아
공허한 구호로서의 여성 시민권 주연
희원
K
경아
“개인/시민/공동체 라는 말 모두 여성인 나와 갈등을 만들어낸다”
주연
희원
지원
희원
경아
희원
K
희원
주연
신아
경아
K
희원
|
2017 세미나 <여성X기본소득> 2. <분배정치의 시대> 서론 및 1장
게시자: 기본소득청'소'년네트워크, 2017. 4. 6. 오후 8:10 [ 2017. 4. 8. 오후 9:16에 업데이트됨 ]
1.발제내용 | 발제 1 - 김지원 <여성과 기본소득> 세미나에 내가 관심을 갖게 된 이유 중 하나는, 세미나의 목적 중 하나로 소개된 ‘기본소득의 의미를 풍부하게 확장하기’였다. 나는 지난주에 『조건 없이 기본소득』을 읽기 전에 (바로 저자인 밀롱도가 비판했던 것처럼) 시혜의 차원에서만 기본소득을 생각했다. 최저시급의 개념과 별다른 구분 없이, 최소한의 삶의 질을 위한 사회보장제도 정도로 치부했던 것 같다. 그러나 『조건 없이 기본소득』을 읽으면서 기본소득이 제도의 도입 뿐만 아니라 여러 맥락에서 기존의 개념들을 새롭게 정의하기를 요청한다는 걸 알게 되었다. 기본소득에 대한 논의에는 돈, 가치, 개인, 시민(권), 일 등의 개념들이 줄줄이 딸려 나오고, 기본소득에 대한 고찰은 이러한 개념들에 대한 검토 없이는 불가능하다. 『조건 없이 기본소득』 1, 2장을 읽으면서 그러한 문제의식은 갖게 되었지만 사실 여러 개념들의 역사적인 맥락을 고려한 구체적인 논의가 어떻게 가능할지 좀 모호하다는, 혹은 깊게 다뤄지지 않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이에 비해 이번주의 『분배정치의 시대』는 여러모로 나의 생각을 자극했다. 저자는 사회과학의 굵직한 지적 계보, 특히 (경제)인류학의 공헌을 토대로 (혹은 그것들에 도전하여) 새로운 제도의 실행과 동시에 새로운 사유의 방식들을 탐구한다. 퍼거슨의 기본소득 논의의 지역적인 무대는 남아프리카공화국이다. 1994년 정권을 잡은 남아공의 ANC(아프리카민족회의)는 아파르트헤이트 이후 정치적 평등은 얻었지만 경제적으로 배제된 흑인 빈민 계층을 정치적 기반으로 했다. ANC는 이들을 위하여 (명목 상 조건은 있을 지언정 실질적인) 보편적 현금지급 기본소득을 시행했고, 남아공 인근 국가들도 이 추세를 따르고 있다. 저자에 따르면 이러한 글로벌 남반구 복지국가모델은 기존의 북반구 복지국가모델과는 매우 다르다(사실 각 모델이 구상된 배경이었던 (각 국가들이 놓인) 조건부터가 달랐다.) 우선 모두에게 지급되는 조건 없는 기본소득은, 남성 생계부양자와 여성, 아이, 노인 피부양자를 상정하지 않는다. 이는 마르크스 이후 계속되어온 생산-노동-독립-남성 대 분배-소비-의존-여성이라는 아주 오래된 이분법적, 위계적 사고에 대한 도전이자, ‘권리’를 ‘소유’하며 ‘노동’하는 ‘독립적인’ ‘성인 남성’으로 상상되는 근대적 개인에 대한 도전이다. 또한 이는 곧 “북반구 복지국가 시스템에 오랫동안 뿌리 박힌 가정생활 구조를 통치, 감시하려는 야심과 결별(63쪽)”을 의미한다. 경제인류학과 여성주의 인류학에서 발전된 논의들은 이러한 강력한 이데올로기에 대한 도전이 가능할 수 있도록 지적 자원을 제공했다. 예컨대 마르셀 모스는 『증여론』에서, 증여와 답례 체계를 바탕으로 부유하게 살았던 멜라네시아 부족들은 추상화된 법, 경제적 개념을 갖고 있지 않았으며, 개인과 집단을 분리하지 않고 혼동했다고 말한다. 그들은 부의 공평한 분배에 대한 필요의식으로 증여를 생활화하게 되었을 리는 만무하지만, 적어도 부를 둘러싼 인간관계의 성질에 대한 고민을 했었던 것 같다. 증여는 답례를 전제로 하며 관계의 순환을 만들어낸다는 『증여론』의 골자처럼, 개인과 개인 사이, 집단과 집단 사이의 관계가 일회적이지 않고 지속적이기 위해서는 관계의 의존적인 혹은 독립적인 측면만 강조될 수 없다. 또한 증여 체계를 통해 멜라네시아 부족들이 지킬 수 있었던 자유는 경제적 자유주의의 관점에서의 자유가 아니라, 부로 인해 지배당하고 구속당하지 않는다는 적극적인 의미에서의 자유다. 우리는 ‘의존’을 열등하고 부정적인 것으로 인식해왔지만 사실 의존하지 않는 삶이란 불가능하며, 의존하면서도 ‘자유’로울 수 있다. 이러한 사유 방식은, ‘소유’에 근거한 근대적 인간관으로는 불가능하다. 이때 ‘소유’는 단순히 ‘가지는 것’으로 이해하기 보다는 그 개념의 역사적 맥락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소유’는 ‘개인이 사물에 대한 배타적인 권리를 갖는 것’을 의미하고 (대개 이는 사유재산을 자연(토지)에 대한 인간의 투자와 노동(성과)으로 정의하는 것과 직결되고, 따라서 생산으로서 규정된 노동에 대한 논의의 연장선에 있다), 그 역사가 홉스와 로크로 거슬러 올라가는 개념으로 서구 근대 사회의 특수한 ‘소유적 개인주의(possessive individualism)’에 기반한다. 퍼거슨이 인용한 크로포트킨(Kropotkin)의 “과거든 현재든, 어떤 사상이든 발명이든 공유재산이 아닌 것이 없다. 그렇다면 이 광활한 전체에서 한 조각이라도 떼어가려는 사람이 도대체 어떤 권리로 이게 오로지 나만의 것이고 너의 것은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가?”(119쪽) 하는 문제제기는 인류학자들이 비서구사회에서 발견한 ‘소유하지 않으며 존재하고 관계 맺는 방식’과 일맥상통한다. 한편 저자는 공적/사적 영역의 위계적 구분에 대한 상징분석을 통해 여성의 종속적인 위치를 문화적으로 설명하고자 했으며 인류학계에 여성주의적 시각을 처음 도입한 미셸 로잘도를 인용하며 분배-소비-의존에 대한 평가절하가 여성에 대한 폄하와 쉽게 연결된다는 점을 주장했다. ‘건강한 성인 남성’에게 “노동교환이 아닌, "물고기를 줘라"라는 식의 분배라는 유령은 바람직하지 않은 수동성과 여성성, 즉 개발과 사회적 지원에 관한 정책 담론에서 혐오의 대상이 되어버린 '의존성'을 환기(101쪽)”시키며 젠더 공포상태를 유발한다. 이와 같은 논리가 쉽게 납득이 되면서도, 한국의 상황에 딱 들어맞지는 않는 것 같다. (‘한국의 가부장은 제대로 가부장적이지도 않다’는 농담 아닌 농담처럼) 서구의 가부장적 생산주의와 동아시아, 혹은 한국의 그것은 좀 다르기 때문이다. 기본소득 논의와는 좀 거리가 있지만, 나는 예컨대 군대를 둘러싼 논의에서 어김없이 등장하는, “여성들은 권리를 주장하기 전에 (군대라는) 의무를 먼저 수행하라”는 식의 주장들이 한국의 가부장주의, 한국의 남성성이 무엇인지 집약적으로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여러모로, 한국의 젠더 정치를 고려했을 때 저자가 제공하는 여러 아이디어들을 어떻게 변형, 활용할 수 있을지 이야기 나눠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다. <토론거리>
발제 2 - 이용상 남아공의 경우, 최슨의 한 평가가 지적하듯 “사회급여가 빈곤을 완화하는데 정말로 성공적이었다”는 합의가 폭넒게 형성되었다. (48p)
오늘날 구조조정을 거친 자본주의는 이주노동 시스템이 만들어낸 저임금, 미숙련 노동자들을 더는 충분히 필요로 하지 않는다. … “내일 최소 1,000만명이 갑자기 죽는다 해도 요하네스버그 증권거래소에서는 잔물결조차 일지 않으리란 건 사실입니다. (55p) 노동이나 재생산 개념이 아니라 시민권과 정치적 압력 같은 것을 토대로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일련의 재화와 서비스를 ‘전달할’ 필요를 느껴왔다.
유럽 복지국가의 설계자들은 사회부조 프로그램들이 ‘발전된’ 산업경제와 적어도 최소한 남성 ‘가장’의 완전고용 달성을 전제로 한다고 가정했다. … 식민지 세계에서 태동한 ‘복지’ 제도들은 주로 백인들과 소수의 특권층을 위한 것이었다. … 북반구에서 이루어진 급여의 핵심 개념은 종종 남성 ‘가장’으로 당연시되는 ‘생계부양자’와 그의 ‘피부양자들’에게 사회적 보호를 제공하는 ‘안전망’이었다. 남아프리카 제도는 일반 국고에서 자금이 나오고 수혜자들의 사전 ‘기여’를 참조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비각출적이다. 그러한 급여제는 개개인의 고용이력을 참조하지 않으며, 대신에 일례로 연금의 경우 절대 연령, 육아보조금의 경우 자녀수와 같이 노동과 무관한 기준들을 토대로 한다. 게다가 보조금에 의존하게 된 인구가 절대 다수라는 점은 비정상적 상황을다루기 위한 예외적 조치로서의 ‘안전망’ 이라는 개념 자체를 무색하게 만든다
여기서 가난한 여성들이 단지 소득을 얻기 위해서 아이 출산 여부를 결정할 것이라는 우려는 근거가 별로 탄탄하지 않다.여러 연구가 육아보조금이 도입된 이후 출생률은 실제로 떨어졌거나 안정화 추세임을 밝힌 바 있다. 현금지급이 노동시장 참여에 부정적 영향을 끼친다는 증거는 거의 발견되지 않는다. 오히려 반대로 많은 연구가 현금지급이 구직활동에 필요한 비용을 충당해주거나 곤궁한 지역에 새로운 시장을 창출함으로써 새로운 고용기회를 만들어내고 있다는 긍정적 효과를 증명하고 있다. 더불어 중요한 것은 새로운 현금지급 프로그램이 북반구 복지국가 시스템에 오랫동안 뿌리박힌 가정생활 구조를 통치, 감시하려는 야심과 결별했다는 것이다. … 실제로 보조금을 받는 ‘주요 돌봄제공자’ 는 아이의 부모일 필요도, 심지어 친척일 필요도 없다. 사회복지사의 성가신 개입을 통해 도덕적인 가족규범을 적용하려는 것으로 악명 높은 전통적 북반구 제도와 달리, ‘진짜 부모’를 가려내거나 친부의 책임을 부과하록, ‘올바른’ 행동이나 가족형태를 강제하려는 어떤 시도도 하지 않는다. 젠더, 연령, 고용상태나 가족구성을 전혀 기준으로 참조하지 않고 사회급여가 이루어지며, ‘건강한’ 노동연령대의 남성들도 수급 자격을 갖게 될 것이다. 임금을 벌어들이는 능력을 통해 사회적 권력을 행사했던 젊은 남성들의 지위가 약화되고 불안정해진 것이다. 하지만 동시에 사회적.경제적 영향력이 미미했던 사람들, 특히 여성들과 연금생활자들에게 새로운 가능성이 열린 점 또한 명백하다. Q. 한국 사회구조에서 기본소득을 설득할 포인트는 무엇이 있을까요? 2. 대담내용 한국, 여성, 기본소득 용상 한국은 북반구와도 남반구와도 사회경제시스템이 다른데 (그와 다른 방식으로) 어떻게 기본소득을 설득할 수 있을까. 주연 책에서 ‘복지모델에 대한 노스텔지어를 갖지 말라’는 부분이 기억에 남는다. ‘유모국가’나 ‘복지의 여왕’이라는 프레이밍을 할 만한 시스템을 사실 우리 사회는 경험해본 적이 없으니까 말이다. 지원 그래서 신선했다. 복지모델에 대한 논의를 보통 그렇듯 북유럽 국가 사례에서 시작할 것 같은데, 여기서는 그렇지 않고 오히려 남반구의 사례들로 이루어져 있다. 주연 첫번째 발제의 토론거리에 대해 - 저자는 글로벌 북반구/남반구의 복지 모델을 비교했다. 그렇다면 동아시아의 복지 모델, 대한민국의 복지 모델은 무엇이라 할 수 있을까? 동아시아의 근대성과 남성성 등은 글로벌 북반구/남반구와 어떻게 같고 어떻게 다르고 그것이 기본소득을 둘러싼 논의에 어떤 영향을 주는가?에 대해 이야기 해보고 싶다. 지원 저자는 의존적인 것, 돈을 받는 것이 남성에게 수치심을 불러일으킨다고 하지만 한국에서는 여성의 의존을 정당하게 보지 않는 것 같다. 용상 이 책에서 의존에 수치심을 느끼는 남성성은 여성에게 “내가 돈벌어올게, 너는 집에만 있어” 라고 한다면, 한국의 남성성/가부장은 여성에게 “돈도 벌고 집안일도 해”라고 하는 식이다.(웃음) 지원 그런 차이 때문에 서구에서 여자들은 ‘우리도 할 수 있다’고 말하기 쉬운 반면, 한국에서는 좀 와닿지 않는 부분이 있다. 주연 동아시아의 근대성은 경제성장에 대한 열망과 국가를 가정처럼 보는 가족이데올로기가 뒤섞여있다. 대만, 홍콩, 일본 등의 국가들은 강한 가족국가 이데올로기에 기반한 남성부양자모델을 갖고 있다. 한국의 경우 국민은 산업역군이고, 그 국민의 기본값은 남성이며 여성은 그 남성을 돌보고 뒷바라지 하도록 전제되어 있다. K 서구는 이른바 근대적 가부장제라면 한국은 전근대적 가부장제의 수준에 머물러 있다. 일제 강점기와 박정희 시대로 이어지는 과정에서 만들어지는 것일 수 있겠다. 서양에서는 중세에서 근대로 넘어갈 때 마초, 기사도 정신이 이어져오면서 남성성이 만들어졌는데, 한국의 남성성은 그런 문화로부터 탄생한 게 아니지 않은가. 풍요로운 시대에는 몰랐다가 경제가 악화되면서 밑바닥을 드러내고 있는게 지금의 시점이 아닌가 생각한다. 주연 그래서 한국의 가부장제에 대해서는 서구와 다르게 접근해야 하는 게 맞는 것 같다. 지원 한국적인 가부장주의, 가족주의가 그대로인 상황에서 기본소득이 도입되면 가정생활을 통치하려는 국가의 의지와 결별하지 않을 것 같다. 다른 제도가 어떠한지는 모르지만 건강보험제도를 생각해보면 그렇다.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묶이고 구성원들이 가족 단위의 책무에서 벗어나기가 어렵다. 그런 조건들이 변하지 않으면 기본소득이 실패하게 될 것 같다. 경아 시기는 현대인데 우리는 현대적으로 살기 어렵다는 것이 힘든 점이다. 주연 기본소득을 매개로 다양한 논의가 나온다면 가족제도의 개편 논의가 필요하다. 한편에서는 파트너등록법 추진하고 있는데 그것을 기본소득과 같이 이야기할 수 있겠다. 주연 어제인가 트위터에서 분노의 타임라인이이 형성됐다. 고소득 고학력 여성은 결혼시장에 들어오지 않으니까 ‘스펙’을 적당히 만들고 결혼해야 한다는 공공기관의 연구 보고서 때문이었다. 소득과 학력에 상관없이 결혼하고 싶지 않은 현실을 마주한 젊은 2-30대 여성들, 다른 형태의 가정을 꾸리고 싶은 여성들에게 기본소득을 어필할 수 있지 않을까. 페미니즘 운동과 그 흐름을 따라가지 못하고 완전히 벗어나 있는 국가. 이것이 기본소득의 배경이 될 수도 있다. 희원 요즘 대선정책으로 기본소득을 들고 나온다. 그러나 사실상 사회수당이 기본소득의 이름으로 한국에 들어오고 있는 상황이다. ‘한국에 복지시스템이 부족하기 때문’에, ‘사회수당(학생수당, 아동수당 등) 등의 현금지급정책이 한국에서는 전무하기 때문’에 필요하다고 이야기 하면서 말이다. 이런 논의들보다 앞서서 가장 진보적이고 우리에게 필요한 기본소득을 주장할 수 있는 주체들이 나와야하지 않나 생각이 들고, 그 주체가 여성이라고 생각한다. 이재명은 자기가 만든 아젠다로써 기본소득을 얘기하고, 그것이 화제가 되면서 정치인으로서의 자신을 부각시키는 것 같다. 이재명시장의 연100만원 주겠다는 정책이 별로이든, 당선후 정책이 실패작이 되든, 그것은 기본소득의 본질이 아니다. 기본소득을 띄우는데 급급한 실정에서 여성은 덜 부각되고 있는 것 같고. 개인에게 자기 삶에 대한 결정권을 준다는 그 부분에서 자유로운 정책이라는 것이 논의가 되어야 한다. 빈자대중의 형성과 의존에 대한 혐오 주연 한국에서 일련의 빈자대중이 정치적 기반이 된다는 게 가능한가. 지원 민주주의하에서 빈자대중이 보편적인 다수를 차지하는 상황이 정치적 기반이 된다면 어떻게 될까. 가난한 사람이 오히려 우파를 지지하는 경향도 있다. 혹은 특수하게 극단화되면 진보적으로 나아갈 수 있는 것일까. 또, 의존에 대한 혐오는 여성혐오와 유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고의 전환을 전제로 기본소득이 ‘받는다’는 것에 대한 수치심과 혐오를 극복할 수 있을까?
희원 제가 만나 본 개별적인 케이스로 보면 기본소득을 쉽게 받아들인 사람들은 프리랜서나 예술가였다. 자신의 일에 대한 충분하게 보상이 돌아오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기본소득을 받는다는 사실에 대해 자기검열이 낮다는 느낌이 있다. 기본소득을 얘기할때 공동체주의적인 지향이 있는 분들은 ‘다같이 사람답게 살자’고 말한다. 한국에서 빈자 공동체가 사라졌다는 이야기를 한다. 공동체가 있어 가시화되었는데 흩여졌고 쫒겨나서 존재하지 않는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가시화되지 않으면 정책대상이 되기도 어렵다. 내가 느끼는 것은 빈곤이 특정한 빈자주체의 상황으로 보이는게 아니라 다들 가난하고 숨기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 상황을 어떻게 정치적으로 우경화되지 않고 당당하게 이것을 받을 권리가 있다는 식으로 전환시킬 수 있을지 고민인 것 같다. 이 문제를 직면하는게 나을지 앞에 이야기한 것처럼 파트너법 같은 것으로 연결시키는게 좋을지. 주연 전자의 방식이 가능하려면 대중적인 홍보와 설득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희원 파트너법 이야기만이 아니라 자기이야기를 하면서 기본소득을 이야기했으면 좋겠다. 주연 그렇다. 다양한 욕망들을 이야기하면 좋겠다. K 정책입안하는 사람들은 가난이 뭔지 정말로 몰라서 그런 정책을 세울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희원 기본소득을 원하는 시민으로서 관료들의 무능함을 지적할 수 있을 것이다. 박근혜 정부의 복지정책은 현장에서 문제를 많이 일으킨다. 그것을 겪은 관료들이 기본소득을 반대한다. 현장에서 ‘우리만 죽어나는 상황’을 학습했기 때문이다. 관료들이 너무 무능하니까 차라리 개인에게 주자고 주장할 수 있겠다. 정책만드는 사람들은 성과안나면 어떡하지 고민하지만 사실 돈을 주는 것 자체가 곧 성과인 것이다. 지원 개발의 혜택이 사회적이나 정치적이 이유로 빈자들에게 돌아가지 않는 상황을 성과는 중시하는데 돈은 안가는 예로 이해해 볼 수 있겠다. 희원 현재의 복지정책은 부정수급/중복수급 막았는가에 초점이 맞춰져있다. 현재와 다른 정책을 먼저 시행해서 효과를 경험을 하게 하고 시스템을 무효하는 방향을 제안할 수 있다. 용상 성남시 청년수당 경험해본 사람들이 이것을 받았더니 좋다고 이야기 하지 않나. 소득을 받는 경험을 하게 하는 것을 국가레벨이 아니더라도 시도해보는 것이 필요하다. 경아 한국은 시간적 여유없이 정책을 시행하는 것 같다. 정책이 뿌리내리려면 시간이 있어야 하는데 씨뿌리자마자 추수하기를 원하다보니 그렇다. 일단 주고 좋은 것을 느끼게 하려면 기다림의 시간이 있어야 한다. 조급한 행정의 문제가 해결되어야 한다. 지원 조급하게 성과를 바라다보니 가시적인 것에만 집중하게 된다. “집을 가진 권리가 아닌 집을 원한다.” 지원 토론거리에 썼듯이 “집을 가진 권리가 아닌 집을 원한다” 라는 말이 이해가 갈듯 하면서도 구체적인 차이가 뭔지 모르겠다. 주연 ‘너는 ~할 권리가 있다’는 말에는 실질적이고 구체적인 삶의 상황들을 고려하게 하기 어렵게 만드는 측면이 분명 존재한다. 희원 여자들이 우리에게 어떤 권리가 있다고 하면, 남자들이 ‘그래 그렇게 해’ 라고 하는 것과 유사하게 이해된다. 지원 분배정치는 노동중심, 생산중심의 패러다임에서 분배중심의 패러다임으로 가는 걸 말한다. 여자들이 어떤 자리에 갈 수 있는 권리가 있다고 말하는게 아니라, 자리 그 자체를 갖는 것이라고 본다. 희원 분배와 정치를 결합시키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서구의 민주주의 발전의 역사를 보면, 부를 축적한 시민계급이 나온 뒤에 민주주의가 나오기도 한다. 기본소득을 통해 민주주의가 좀 더 활기를 얻을 수도 있다. 주연 한편으로 드는 생각은, 일종의 ‘기반’을 느껴보는 경험이 아주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래서 ‘어디서 받는가’라는 의구심이 들 수밖에 없는 것이다. 사회적으로 내가 딛고 설 ‘기반’이 물적으로도 비물질적으로도 존재하지 않은 채 30대 40대까지 기반을 구축해야한다는 생각을 갖고 살게 된다. 나에게 돌아올 몫은 과연 어떻게, 어디에서 오는가에 대한 질문이 개인들을 계속 괴롭힌다. 지원 신자유주의적 개인주의+가족주의의 결합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사람들은 국가에 대한 부채감이 있다. 내가 이렇게 받아도 되는건가, 국가가 이것을 왜 나에게 해주어야 하는가라는 의문들로 나타난다. 희원 국가대신 사회를 상상하게 해보는 것은 어떨까. 국가는 실체가 뚜렷한 시스템이다. 미국에서의 논의를 참조하면, 시장이 망하지 않으려면 중산층이 많이 있어야 하는데 일자리가 그만큼 안나오기 때문에 이런 제도를 통해서 중산층을 유지해야한다는 논리로 기본소득이 이야기된다.
|
2017 세미나 <여성X기본소득> 1. <조건없이 기본소득> 1, 2장
게시자: 기본소득청'소'년네트워크, 2017. 3. 28. 오전 7:07 [ 2017. 4. 8. 오후 9:23에 업데이트됨 ]

1. 발제 내용 | 첫 번째 발제자 - 경아 Q. 기본소득 실현가능한가? 이상적인 이론에 불과하지 않을까? A. 기본소득은 반성장, 반생산, 반소비 근간을 둔다. 모든 사람(부자,빈자,사회적 소외계층)이 조건없이 받을 수 있는 현금소득이며, 가난을 증명할 필요도 없이, 존재만으로 사회적인 부의 형성에 기여하므로 받을 권리가 있다. [경제학자 베르나르 프리오의 평생월급(사회적인 부 창출에 기여계급에 따른 차등지급)과는 차이점을 가진다. 그는 기본소득이 자본주의의 예비 타이어라고 비판하며 평생월급제를 대안으로 제시했다.] 이는 비용이 아니며 사회를 윤택하게 만드는 합리적인 투자이다 과거 서구에서는 미국, 캐나다, 프랑스에서 변형된 기본소득 실험(음의 소득세,시민소득)이 있었으며 신뢰와 연대를 기반으로 현실적인 사회대안의 하나로 제시되고 있다. 또, 기본소득은 사회 분열이 아닌 의견 분열의 길을 연다.
현재 진행중인 기본소득 논의 중 흥미로운 부분 프랑스: 월평균 생활비 1840유로 (287만원): 최저 생활비 1500유로 (183만원) 프랑스에서는 한국처럼 기본소득을 공약으로 내건 정치인이 대선후보로 등장했다. 집권 사회당 대선 경선에서 승리한 브누아 아몽(50) 전 교육부 장관은 전 국민에게 기본소득으로 매월 600~750유로(약 73만~92만원)를 주겠다는 공약을 했다. - 중앙일보 2016.2.7일자 한국: 최저 생활비 166만원 4인 가족 (*한국현실 한번에 이해하기: 실업율,행복지수,인구밀도 등) 2014년 한국형 기본소득 모델 설계도 > 인구5천명 기준 1인 월 30만원 기본소득지급 기준: 세금 소득세. 생태세부담 - 두 번째 발제자 - G <하고싶은 것 <도> 하는 삶을 위하여>
‘일’에 대한 개념이 확장된다면, (이를테면 가사노동, 봉사활동, 잉여생활까지도 ‘일’의 범주에 들어간다면) 기본소득으로 더 큰 자유를 얻는 대상은 여성이 아닐까? 내가 입사하고 들은 가장 모욕적인 말, “너는 이제 회사 못 그만둬, 27살 여자 신입을 누가 뽑냐? 넌 이제 빼박이야.” 말을 세게 하긴 했지만, 틀린 말도 아니다. 2016년 입사동기 50명 중 남자동기 6명이 나가는 동안, 여자 동기들은 대동단결 버텼다. 퇴사한 여자동기는 한 명도 없다. 동일 조건의 대졸자라도, 대기업의 문은 여성에게 더 좁기 때문이다. 기본소득이 주어지고, 하고 싶은 일을 할 자유가 생긴다면, 남성중심적으로 짜인 대기업에 혹은 제도권 근로사회에 편입하기 위해 급급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2. 대담: "최대화된 최소의 세계를 넘어" 들어가며 G
신아
G
지원
희원
일이란 무엇일까 - 기본소득이 바꿔낼 수 있는 일의 개념 희원
K
희원
주연
경아
지원
신아
'여성의 일'이란 주연
신아
주연
왜 현금을 줘야 할까 경아
주연
신아
기본소득 이야기를 통해 우리가 시작해 볼 수 있는 이야기들 주연
희원
용상
주연
희원
|
2017 세미나 <여성X기본소득> 0. <자기만의 방>
게시자: 기본소득청'소'년네트워크, 2017. 3. 26. 오전 4:40 [ 2017. 4. 8. 오후 9:20에 업데이트됨 ]
| <최저임금을 조금 넘는 돈을 벌며 그 돈으로 방을 빌리는 내가 페미니스트로 살기 위해서. (김신아)> ‘소설과 여성’이라는 주제의 강의로부터 발전한 이 글에서, 버지니아 울프는 여성이 글을 쓰기 위해서는 자기만의 방과 돈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내가 주목한 부분은 세상에 무언가를 창조하려 할 때 가져야 하는 마음에 대한 것이다. 그리고 불안정하며 충분하지 않은 방과 돈을 가진 내가 어떻게 페미니스트로 살아야 하는가에 대해 덧붙여 보았다. 버지니아 울프는 ‘메리’라는 여성작가를 화자로 만들어 글을 전개한다. 잠깐 언급될 뿐이지만 메리는 여러 노동으로 생계를 이어나가는 보이고, 경제적 어려움 속에서 글을 쓰는 일은 ‘자신의 재능과 영혼이 소멸하는 듯한 괴로움’이 잇따르는 일이다. 그러다가 갑작스러운 숙모의 죽음으로 매년 500파운드를 상속받게 되면서 자신에게 생긴 변화를 메리는 이렇게 말한다.
메리에게 찾아온 변화, 가난에서 해방되었을 때 마음속의 증오심, 쓰라림, 미움이 사라지고 그로 인해 사고의 자유를 갖게 되었다는 이 이야기에 가난과 창작의 관계에 대한 울프의 핵심적인 논의가 제시된다고 볼 수 있다. 가난하기 때문에 아예 창작이 불가능하다는 것뿐만 아니라 창작하는 데 적합한 마음을 가질 수 없다는 것이다. 이 글에서 여성은 여성이기 때문에 가난하다. 여성은 남성에게 ‘보호받는 성’으로서, 가사일과 양육일을 해왔지만 재산을 소유하지 못했고 개인 공간을 보장받았던 남성과 달리 공동의 공간을 나눠 사용했다. 창작을 위한 물적 조건을 갖지 못했던 여성들은 남성저자들이 만들어온 지식의 역사에 들어선지 얼마 되지 않았다(메리/울프는 여성에 대한 남성저자의 글이 넘쳐나는 가운데 여성저자의 글은 찾을 수 없었다). 버지니아 울프는 창조의 세계로부터 아예 배제되었던 이름 없는 여성들의 흔적을 더듬기 보다는 서가에 꽂혀져 있는 여성작가들의 글을 꺼내 읽는다. 그러면서 여성작가들에게 훼손되어 있으나 셰익스피어에겐 온전하게 존재하는 “창조행위에 순조로운 마음”(79)이라는 것을 설명한다. 그것은 자신이 생각하고 느낀 바를 자유롭게 창작물로 구현해내는 마음을 말하는데, 버지니아 울프가 보기에 여성작가들은 항의하거나 분노하는 데 몰두하느라 창작의 흐름을 놓치고 만다. 나는 얼마 전에 유튜브에서 영화 <비밀은 없다>의 이경미 감독의 어느 인터뷰를 보다가 ‘창조행위에 순조로운 마음’에 대한 버지니아 울프의 설명을 조금 더 이해할 수 있었다. 인터뷰에서 한 남성 감독이 ‘기업으로부터 투자를 받아 영화를 만들다보면 관객들을 의식하고 배려하며 깎여 나가는 부분이 있기 마련인데 <비밀은 없다>는 감독의 날 선 그대로 만들어진 영화 같다’고 말하자, 이경미 감독이 ‘이야기에는 타고난 그릇, 팔자, 운명이 있는 것 같고, 이것을 갖춰서 나와야만 완성되는 것이 있다’고 답하는 부분이었다. 이야기가 가진 운명을 충실하게 따르고 때로 인도하는 것이 창작자의 역할이라면, 창작자의 믿음이 세상으로부터 방해받지 않아야 한다. 세상의 시선을 의식해서 자신이 말하고 싶은 것을 감추거나, 그러느라 항의하는 마음이 섞여 들어간다면 좋은 이야기가 만들어질 수 없을 것이다. 여성들이 ‘창조행위에 순조로운 마음’을 갖지 못한 이유는 재능과 열망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마음을 성실하게 따르고 믿는 게 불가능하거나 어려웠기 때문이다. 글을 쓰려는 여성들에게 어떤 방해가 있어왔는지는 짐작할 수 있다. 서가를 훑어보기를 마친 버지니아 울프는 동시대의 여성작가를 향해 “오른쪽이나 왼쪽을 돌아보지 않고” “욕설을 퍼붓기 위해”서나 “비웃기 위해” 멈춰서지 말 것을, “망설이거나 더듬거”리지 말고 오직 뛰어넘는 것만을 생각할 것을 간청한다(142). 그녀가 돈과 자기만의 방을 소유한다면 울프의 간청대로 글쓰기가 훨씬 쉬워질 것은 자명하다. 창작하기에 충분한 돈과 자기만의 방은 여성이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는 조건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글쓰기’를 ‘페미니스트로 살기’로 바꿔서 이해해본다. 적은 월급을 받으며 그 돈으로 방을 빌려서 살고 있는 내가 어떻게 오랫동안 페미니스트로서 살 수 있을까. 나는 버지니아 울프가 이야기한 창조행위에 적합한 마음과 세상에 대한 단단한 태도를 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나의 언어가 분노에 지배당하지 않도록 할 것, 나의 경험과 느낌을 신뢰할 것, 나의 약자됨을 긍정할 것, 욕망을 정확히 이해하고 자유로워질 것, 그리하여 매순간 해방의 언어를 최선을 다해 찾아 행동할 것. 나는 자주 즐겁고 가치있다고 생각하는 일을 경제적인 이유로 선택하지 않는다. 아쉬워하거나 변명하고 싶지 않지만, 충분한 소득이 보장된다면 그런 갈등은 사라지거나 최소화될 것이며, 창작하는 데 적합한 마음을 갖기 더 쉬울 것이다. 아마 나 자신과 세상에 새로운 변화가 만들어질 것이다. 버지니아 울프는 강연의 마지막에 이르러, 대학에 다니고 전문직에 이르며 자신의 재산을 소유할 수 있게 된 여성들을 향해(동시대 한국의 젊은 여성들과 유사한 조건의), 여성들이 자기만의 방과 돈을 갖기 위해 노력하고 글을 쓰는 행위에 역사적인 의미가 있음을 상기시킨다.
2. 대담 내용 버지니아 울프의 500파운드 이름
신아
‘자기만의 방'이 의미하는 것? 신아
오베르만
지혜
G
창작을 위한 기본소득 경아
이름
여성과 기본소득에 왜 관심을 가지게 되었나요? 주연
지혜
경아
이름
G
용상
신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