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동‎ > ‎

칼럼 / 기고


[기고] 프레시안 / 2013 청년활동가 인터뷰

게시자: 이름, 2014. 1. 1. 오후 10:31   [ 2014. 1. 1. 오후 10:32에 업데이트됨 ]

2013년 9월 15일부터 2013년 12월 10일까지 프레시안에 13편의 청년활동가 인터뷰를 기고하였습니다. 
(달군, 이태영, 황윤지, 김민하, 나영, 장성건, 박은선, 송이, 공현, 두란, 단편선, 김성일, 두란) 

[기고] 프레시안 최저임금 연속기고

게시자: Inho Won, 2013. 5. 7. 오후 10:00   [ 2013. 5. 7. 오후 10:01에 업데이트됨 ]

백희원 
[최저임금 연속 기고 ①] 최저임금 1만 원으로 올리고 일자리 나눠야
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30130402112800

최성문
[최저임금 연속기고 ⑥·끝] 최저임금 1000엔과 1만 원
 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30130426185521&Section=03

[2012 특별연재: 기본소득과 공공성] 기본소득과 예술 / 박은선

게시자: 이름, 2013. 1. 8. 오전 5:02   [ 2013. 1. 8. 오전 5:03에 업데이트됨 ]

박은선
수유너머N, 리슨투더시티 

2012.11.12



1. 새로운 통치성과 주체 발명 도구로써의 기본소득

지금 한국사회는 환경 여성 노동 장애인인권 등 모든 시민사회 분야에서 더할 나위 없이 나쁜 일들이 동시에 일어나고 있다. 그런데 신자유주의가 과연 지금 모든 일어나는 나쁜 일들의 원인일까? 때로는 지금 신자유주에 대한 증오의 인플레이션이 일어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신자유주의 통치성이 종말을 고한다면 과연 더 나은 사회가 도래할 것인가?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신자유주의 체제 안에서 벗어날 수 없는 이유는 신자유주의가 괴물이기 때문이 아니라 이 체제를 벗어날 수 있는 대항의 문화나 사회체제가 발명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공간과 맑스주의의 관계를 분석한 앙리 르페브르는 사회주의가 쇠퇴한 이유는 그들이 그들만의 공간을 만들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여기서 공간이란 양식(style)을 말하는데, 건축이나 예술등 시민의 문화 일반에 해당한다 할 수 있다. 1920년대 그 어느 나라보다 진보적이고 진취적인 성향의 예술가들이 다양한 문화를 생산하던 러시아는 1930년대 스탈린 통치하에 '사회주의적 리얼리즘'만을 강요받게 된다. 러시아 붕괴까지 거의 60년간 18세기에 유행하던 신고전주의 양식을 되풀이 하던 소비에트의 예술은 그 사회가 새로운 공간 문화를 만들지 못한 명증이다. 

푸코는 단호하게 콜레주드프랑스 강의 '생명관리정치의 탄생'를 통해 "사회주의에는 통치의 내재적 합리성이 결여 되어있다"고 말한다. "사회주의에 어울리는 통치성은 어떤 것일 수 있을까? 엄밀하고 내재적이며 자율적으로 사회주의적일 수 있는 것은 어떤 통치성일까? 아무튼 실제로 사회주의적 통치성이 있다고 한들 그것이 사회주의 및 그 텍스트 내부에 숨겨져 있지 안다고 한들 그것이 사회주의 및 그 텍스트 내부에 숨겨져 있지 않다는 것만은 확실하다. 그런 통치성을 사회주의로부터 연역할 수 없다. 그것은 발명되어야 하는 것이다"라고 했다. [미셀푸코, 생명관리장치의 탄생, 오트르망 번역, 난장, 2012, 146p] 그러한 측면에서 모순되고 불안한 신자유주의 통치를 벗어나기 위한 방법으로 우리는 여러 가지 상상을 해야만 한다. 그리고 그 중 가장 설득력 있는 것은 '기본소득'모델 이 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기본소득은 첫째, 불필요한 노동시간을 줄여주기 때문이다. 원하지 않는 노동으로 빼앗긴 시간을 주체가 자율적으로 쓰게 된다면 그 주체는 자신이 원하는 순수노동. 꼭 교환가치로 환원되지 않는 생산을 할 수 있는 가능성이 증가하기 때문이다. 둘째,  지금의 선별적 복지 시스템은 누구나 평등하고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충분한 보장이 아닌, 자본주의에서 살 수 는 있는 최소한의 시혜에 불과하다. 지금의 선별적 사회보장은 사각지대를 양산할 수 밖에 없는데 그 이유는 심사의 기준이 합리적이지도 탄력적이지도 못하기 때문이다. 이 선별과정에서 가장 취약한 계층이 바로 장애인 노인 예술가이다. 장애인 등급제와, 의무부양제는 대표적 선별복지의 대표적인 허점이라 할 수 있다.

한국에서는 예술가를 위한 복지가 전혀 없었다가 2010년, 2011년 미디어 액티비스트의 생활고를 비관한 자살, 최고은 작가, 인디 가수 달빛만루역전홈런의 죽음이라는 사건으로 사회적 문제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급하게 마련된 예술인 복지법은 역시 많은 사각지대를 내포하고 있다. 이 글은 한국 사회에서 가속화 되고 있는 신자유주의화적 예술정책과  그 대안으로서 기본소득의 가능성에 대해 간략히 다루고자 한다. 


2. 예술이여 경영하라 생존하라 

프랑코 베라르디(Franco Berardi)는 예술과 일반지성은 행복과 사적 소유를 동일시하는 것이 깊게 뿌리박힌 이 사회의 편집증으로부터, 녹아내리고 있는 근대적 정체성을 상실한 사람들의 치료라고 주장한다. [Franco Berardi, 노동하는 영혼, 서창현 옮김, 갈무리, 2012, 301p] 디지털 과학기술과 세계경제의 금융적 성격은 자본이동의 속도를 가속화 했고 이 가속화는 공동체의 형성보다 빨랐다. 예술은 가속도가 붙은 사회의 변화 속에서 잠시 중지를 요구하는 역할을 하고 다른 삶을 상상하게 한다. 그런데 신자유주의 게임에 가담하는 예술도 자본주의에서 낙오된 자들을 치유하는 것일까? 

국립현대미술관은 1995년 시작해 매년 활동이 두드러진 작가를 선정해온 '올해의 작가상'의 형식을 올해부터 경쟁 시스템으로 바꾸었다. 국립현대미술관은 상의 취지를 "역량 있는 작가들이 세계 미술계로 뻗어 나갈 수 있는 교두보를 제공하고자 마련된 제도"라고 밝혔고, SBS와 공동 기획했다.  '올해의 작가'는 4명의 후보를 만든 후 그 중에 한 명을 올해의 작가로 선정하는데, 한국 일보는 이를 두고 "올해의 작가상은 올해부터 국립현대미술관과 SBS문화재단이 공동 주최하면서, 수퍼스타K 같은 일종의 오디션 프로그램 형태를 띠게 됐다."고 보도했다. 미술계 전문가들의 추천과 심사를 통해 선발된 4팀의 작가들은 각각 3,000만원의 'SBS문화재단 후원금'을 받았고, 1명의 최종 수상자는 전시가 열리는 동안 인터뷰와 작업실 탐방 등의 프로그램을 거쳐 11월 초에 선정발표된다. 선정이 되면 국제적인 홍보와 매니지먼트를 국가에서 해준다고 한다.

이 기획은 영국의 테이트(Tate Britain) 미술관의 터너 프라이즈(Turner Prize)의 방식을 그대로 채택한 것이다. 터너 프라이즈는 영국의 채널 포(Channel 4)라는 공중파와 협력하여 작가에 대한 프로그램을 만들어 그것을 공중파에 내 보내고 넷의 후보 중 한 명의 승자를 뽑는 방식이다. 터너 프라이즈는 YBA(Young British Artists)로 이름을 날린 데이안 허스트, 트레이시 에민을 비롯 많은 현대예술가들을 대중적으로 알리고 스타로 만든데 어느 정도 역할을 수행했다. 이 방식이 한국사회에서 현대미술에 대한 대중의 이해와 관심을 도모할 수 있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경쟁 속에서 적자를 추려내는 것이 과연 예술이 옳게 나아가는 방향인지 질문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네 명의 경쟁자 중 한 팀을 뽑아 '집중된 혜택'을 준다는 것은 전형적인 '선택과 집중' 즉 대기업에서 쓰는 경영윤리를 그대로 적용시킨 셈이다. 이런 경쟁방식의 상수여 방식은 올해의 작가상이 국내에서 처음이 아니지만 이 프로그램이 '경쟁'을 요구로 한다는 점 그리고, 이것은 국가가 주도하는 '지원정책'의 한 방식이라는 점이 중요하다. 미술의 참과 거짓을 분할하는데 더 이상 '참신함과 새로운 방향'보다는 '세계적 경쟁'이 핵심이 되었다. 1인 기업의 형태를 비상업적 예술까지도 적용시키는 전형적인 신자유주의식의 경영이 그대로 적용되고 있다. 이 시스템을 도입한 예술 관계자들은  세계 미술계로 뻗어 나간다는 것은 정확하게 무엇을 의미하는가에 대한 엄밀한 대답을 해야한다. 터너 프라이즈는 1984년 대처가 영국 수상일 때 만들어졌고, 예술이 만들어내는 경제적 부가가치를 분석한 연구와 함께 등장했다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91년 터너 프라이즈 후보들이 모두 사치 갤러리나 리슨 갤러리 등 굴지의 상업갤러리 전속작가들이어서 논란이 되기도 했다. 국립현대미술관이 원하는 것은 스타작가인가? 세계적 작가인가? 경제적으로 경쟁력 있는 부가가 가치 생산자로서 일 인 기업(enterprise)인 작가인가? 

3. 예술지원금, 예술인 복지법 VS 기본소득

위에서 살펴본 사례처럼 국가 정책은 예술을 부가가치를 창출하는 산업정도로 파악하고 있기 때문에 경쟁을 부추기는 방향으로 흘러갈 수 밖에 없다. 물론 모든 수상 프로그램이 다 나쁜 것은 아니다. 경쟁도 나쁜 것이 아니다. 하지만 그것이 제1의 원칙이 되면 무수한 패배자가 생기고 도태되는 사람들이 생겨난다. 기본소득은 수여 심사를 철폐하기 때문에 무한 경쟁의 구도를 완화시키고 경쟁이 아닌 다른 미덕으로 움직이는 예술 공동체의 탄생이 생겨나리라 기대해 본다. 지금 젊은 미술가들이 모여 노조와 같은 조합의 형태를 만들려고 하고 있다. 이는 문화연대에서 준비 중인 예술인 노조와는 별개로 운영되고 있다. 함께 모임을 하는  예술가들은 대체적으로 기본소득에 대해 호감을 가지고 지지하는 데 이유는 크게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첫째, 예술인 복지법 대신 기본소득을 실시한다면 예술가의 실질적 생활비가 보장될 것이다. 


1) 현재 예술지원금 시스템은 예술가에 대한 지원이 아니라 예술작품에 대한 지원으로 예술가의 생계에 대한 어떤 보장도 없다. 지금 생겨나는 예술인 복지법 역시 허점이 많아 실질 보장 받을 수 있는 예술가가 많지 않다. 지금까지 한국에서 실행된 예술지원금은 기실 여러 작가 피부에 닿을 만치 풍요롭거나 골고루 분배되지 않았으며 그 허점이 너무 많았다. 왜냐하면 지금 지원금은 우선 절대적 액수가 많지 않을 뿐더러 대부분 최소한의 재료비만을 지불하고 있기 때문이다. 국가가 지원하는 지원금은 예술작품 자체만을 지원하는 개념이지 절대로 예술가를 지원하는 제도는 아니었다. 예술가의 생존이 사회적 문제로 대두되자 예술가 복지 법을 발의했으나 그것 역시 많은 사각지대를 가질 수 밖에 없다. 2000년대 이후 예술지원금 규모는 1조원 안팎을 오갔다. 김대중 정권 때 1조원대, 노무현 정권 때는 8000억 원 규모였고, 이명박 정권 때는 다시 1조를 넘었으나 대부분 4대강 사업 홍보비라고 한다. 

핵심은 지원금이 순수 창작 지원금 혹은 시설비으로서 예술가의 생계와 곧바로 연결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나마도 대부분 부가가치를 많이 생산하는 영화 산업과 드라마, 한류 산업 등에 집중되어있다. 그다지 돈을 많이 만들 수 없는 클래식, 전통음악, 순수미술, 무용, 연극에는 상대적으로 지원금이 적다. 투자를 하면 이익을 산출해야한다는 기업의 윤리를 국가 기금에도 그대로 적용하기 때문에 생기는 폐해이다. 미술의 경우 개인 작가가 문예진흥기금 수혜를 받기 위해서는 10장이 넘는 자세한 신청서와 이미지 포트폴리오제출 등의 과정을 거치는데 그 번잡한 과정을 거쳐 지원서를 내도 기금을 받는 비율은 10-20% 미만이다. 지원금액은 500-2000만 원 정도 인데 지원금액은 절대 인건비로 사용할 수 없고 또한 물품취득도 되지 않는다. 가장 문제가 되는 부분은 예술가 자신의 인건비이다. 만약 일천만원의 지원금을 한 전시의 지원금으로 받게 되었다고 가정하자. 일천만원은 모두 재료비나 교통비같이 증빙이 가능해야하는데, 막상 예술을 생산하고 기획한 예술가 자신에 대한 수고비나 기획비는 청구할 수 없다. 이것은 전업으로 예술을 해 다른 수입원이 마땅하지 않은 예술가들에게 치명적이다. 전시를 하면 할수록 가난해 지는 것이다. 

2) 또 '누가 예술가 인지'의 기준을 우리는 쉽게 만들어 낼 수 없지만 기본소득은 예술인과 비예술인을 구분할 필요가 없다. 정부는 개인전의 회수, 발간 회수, 수입 등으로 자격요건을 내걸었지만 누가 예술가인지 아닌지를 가르는 기준은 혼란을 가중시킬 뿐더러 아마추어와 프로의 경계가 무너져가고 있는 현대예술의 흐름에도 위배된다. 예를 들어 옷가게를 운영하시지만 백화점 문화 센터에서 학습을 받아 사비를 털어 미술활동을 하고 있는 어머니의 친구 분의 경우는 예술가인가 아닌가? 이미 이분은 5회 이상의 단체전을 하셨지만 매 전시에 한 점 정도만 출품하셨다. 반면 수 백개의 그림을 가진 한 젊은 화가는 그림을 10년 넘게 그렸지만 근 5년간 전시를 하지 않고 작품제작에만 몰두하였다. 그런데 그림을 판적도 없고 지원금 수혜도 받은 적이 없고 그림을 전시한 적도 없는데 이 사람은 화가가 아닌가? 이는 미술뿐만 아니라 연극 클래식 음악 등에도 많은 논란을 이야기 하고 있다. 얼마 전 예술인 복지 법 실행을 앞두고 문화부가 주최한 공청회에서 소설가 백가흠은 법령 시행 자체를 반대하는 등 가장 회의적인 견해를 드러냈다. 드러난 실적에 따라 예술인을 규정하기 때문에 정작 지원이 필요한 이는 혜택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이다. 백 작가는 "차라리 기존의 지원 제도를 활성화하는 게 더 낫다"며 "예술인을 위한 사회안전망 구축에 도움을 주려면 문화예술인노조가 먼저 설립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둘째, 기본소득은 예술의 자율성을 증진시킨다. 

신자유주의 경쟁구도에서 생활비를 벌어야하는 작가들은 자신의 화풍이나 작업의 방향을 바꾸어, 미술시장에서 팔 수 있는 형태로 바꾸기도 했고 지금도 그러한 위험은 도처에 도사리고 있다. 실험적 예술을 하면 대부분 작업을 팔 수 없는 경우가 허다하고 그러한 경우 작업을 포기하게 된다. 심지어 미술대학에서도 팔릴 수 있는 형태의 작품을 만들기를 권유하고 학생들에게 아트페어에 참여하기를 권유한다. 작품을 판매하는 것이 다 나쁜 것은 아니지만 본디 하고 싶었던 예술의 창작과 실험이 그 길을 잃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소득원과 예술이 분리될 필요도 있다. 그러한 측면에서 기본소득이 지급된다면 예술인들의 창작의 실험 시도가 증대 될 것이다. 

셋째, 많은 이들이 상상하고 살 게 될 것이다. 

평등하고 자유로운 사회를 만드는 데 있어서 '자유로운 시간'의 확보는 결정적 요소가 된다. 기본소득 지급으로 불필요 노동시간이 줄어 자유시간을 확보 한다면 창조적 사회를 만드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할 것이다. 노동거부는 활동의 제거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노동의 지배에서 벗어난 인간적 활동들의 가치화를 의미한다.  신자유주의의 문제는 모든 일상생활을 경제구조 기업의 메커니즘로 맞추어 놓은 것이다. 사람들은 화폐가 될 가능성이 있는 일에만 집중하게 되고 외의 시간에는 대중매체나 휴대폰에 할애한다. 자유시간이 늘어난다면 자기가 관심 있던 분야에서 자기의 재능을 더 계발할 수 도 있다. 

기본소득은 아직 한국에서 낯 설은 개념이고 기본소득의 지급으로 자유시간이 늘어난다고 해도 그 시간이 무조건적으로 자율적인 공동체성을 회복하는 데 쓰이라는 확신은 없다. 그것은 기본소득의 통치성을 준비하며 함께 정교하게 고안해야 할 문제이다. 또한 기본소득 자체도 정권에 따라 하나의 무기가 될 수도 있는 위험성도 내제 하고 있다. 현재 예술 지원금은 예술가들이 국가지원금에 의존할 수 밖에 없는 구조를 이용하여  지원금의 지급을 예술가들의 자율성을 위축시키는 도구로 사용하고 있다. 2008년 촛불 집회 이래로 한국문화예술진흥기금에 시위에 가담하면 돈을 회수하거나 불이익을 주는 조항이 생겼고 실제로 불이익을 당하는 경우가 생겼다. 그 조항은  "불법시위 참여단체 등에 대한 보조금지원 제한 및 교부결정의 취소가능성을 명시하는 내용은 지방자치단체의 장이 국가예산을 지원받아 민간단체를 지원하는 경우에도 동일하게 적용" 으로 이 조항은 표현의 자유를 정면으로 위배한다. 

기본소득은 강한 국가의 조세를 바탕으로 한다. 강한 조세는 국가 존재가 강력하다는 것을 뜻하며 강해진 이 존재는 폭력으로 변할 수도 있다. 기본소득은 그에 대한 안전장치도 함께 고려되어야 한다. 신자유주의 정글의 법칙과 같은 통치성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문화의 층위 그리고 새로운 주체가 생겨나야만 한다. 지금 세계적으로 미국식 신자유주의 시스템의 혼란이 가중되는 시점에서 오큐파이 월스트리트를 비롯한 여러 형태의 봉기와 같은 흐름이 생겨났지만 민중봉기의 자율성을 항상화 시키지 못한다면 그 봉기는 사건의 연속에 그치고 말 것이다. 기본소득의 활발한 논의가 새로운 주체의 형성에 중요 역할을 하리라 기대해 본다.

[2012 특별연재: 기본소득과 공공성] 자유로 가는 길 - 길드사회주의와 기본소득 / 정영목

게시자: vanguard ology, 2012. 11. 19. 오전 1:56   [ 정영목에 의해 업데이트됨(2012. 12. 15. 오전 8:21) ]

정영목
기본소득청'소'년네트워크

2012.11.15


1. 러셀 다시읽기



최근에 입맛에 맞는 책들이 다수 출간되어 기분이 딱 좋을 정도로 들떠있다. 여기서 소개할 버트런드 러셀의 『자유로 가는 길』도 그런 책 중의 하나인데, 본격적인 이야기로 들어가기 전에 기본소득에 대한 나의 생각을 간단히 정리하고자 한다.

최근에 홍기빈 씨의 『신자유주의와 한국정치경제』라는 온라인 강의를 듣게 되었다. 상당히 유익한 내용이었는데, 이 강의에서 그는 기본소득에 대해 다소 부정적인 의견을 표출하였다. 그는 한국에서 나름 유명한 좌파 철학자라고 일컬어지는 아무개의 인터뷰 기사를 언급하면서 자본이든 좌파든 뭐가 잘 안 된다 싶으면 손쉬운 해결책으로 국가를 호출하는 경향을 비판하는데, 그의 이야기를 재구성 해보자면, “그 철학자는 기사 전반부에서 국가는 개인을 억압한다, 국가는 뒤로 빠져야 한다고 주장하더니, 정작 후반부로 가서는 비정규직 문제의 해결책을 답하는 부분에서 그건 국가가 나서야 한다고, 그러면서 기본소득을 말하던데, 제가 생각하기에 기본소득을 하려면 연간 400조가 필요하고 그 예산을 집행하려면 국가기구가 엄청 강력해질 텐데, 앞뒤가 안 맞는 주장이다.”라는 요지의 말을 했다. (오마이스쿨. 『신자유주의와 한국정치경제』 2강 3부. 11분~13분.)

사실 그의 비판은 그리 정교하진 않다. 강의에서 지나가는 말로 언급한 내용을 굳이 따지고 드는 게 미안하긴 하지만, 기본소득은 다른 복지제도보다는 국가를 비대하게 만든다는 혐의에서 그나마 자유로운 편임을 강조하고 싶다. 심사과정도 필요 없고 행정처리 절차가 비교적 간소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기본소득은 시민의 정치적 권리를 향상시키면 향상시켰지, 강력한 국가가 개인을 압도하는 그런 상황을 상정하고 기본소득의 부작용을 논하는 건 딱히 유효한 관점은 아니다. 여하간 홍기빈 씨의 발언을 나름대로 반론하는 과정에서, 기본소득이 어쩌면 시민세력이 미약한 우리의 상황에 오히려 적절한 연결고리가 될지도 모른다는 (새삼스러운) 생각을 하게 되었다. 한국이 앞으로 증세를 통해 복지예산을 확보하고 그것을 기반으로 복지국가로 나아가야 한다는 점을 전제한다면, 시민세력의 힘은 지금보다 훨씬 강력해져야만 하고 무엇보다 정치세력과 산업세력을 견제할 역량을 갖추어야 한다. 그렇지 않고 단순히 증세만 했을 경우(이마저도 그리 희망적이진 않지만), 늘어난 복지예산은 한낮 정치세력의 선심성 공약으로 남발되거나 산업세력의 손쉬운 먹잇감으로 전락할 것이기 때문이다.

요인즉, 국가정책의 수립 및 운용에 있어 그 전반을 감시하고 통제할만한 힘이 시민세력에게 여전히 부족하다면, 차라리 그 상황을 역이용해서 딱히 강한 통제력이 필요 없는 (현금 중심의) 기본소득으로 시민세력의 힘을 강화하고, 그 역량을 쌓아서 강한 통제력이 필요한 영역인 (현물 중심의) 복지체계를 구축하고, 그렇게 차근차근 두 복지축의 균형을 맞추고……. 그런 식의 선순환 고리를 만들어 나가자는 것이다. 물론 단지 시민세력을 강화할 목적으로는 기본소득은 너무 값비싼 솔루션이라는 반론이 있을 수 있는데, 이는 ‘시민세력’을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따라서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할 것이다. 기존 시민단체에 정부지원사업을 좀 더 발주하는 것이 ‘시민세력의 강화’일까? 생각해볼 일이다.

일단은 개인적인 의미에서, 혹자가 왜 기본소득을 지지하냐고 내게 물었을 때, 나름 초점을 잡고 이야기를 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이 소박하게 기쁠 뿐이다. 그간 내게 기본소득은 글쓰기로 치자면 ‘단순한 소재’ 정도였다. 그 가능성에 늘 호의적이긴 했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다른 이야기를 할 때 간간히 써먹는 그런 수준의 위상이었다. 허나 이제는 ‘시민세력(혹은 중재구조)의 강화’라는 주제에 걸맞은 ‘주요 소재’로 격상되었고, 주제와 소재가 분명해진 만큼 플롯을 뽑기 위한 약간의 진전을 이룬 셈이었다.

다만 무릇 ‘주요 소재’라면 촘촘한 자료조사가 필요할 터였다. 무엇보다 시민세력을 구체화할 밑그림이 필요했다. 여기서 또 홍기빈 씨의 다른 논의인 『비그포르스, 복지국가와 잠정적 유토피아』가 내게 어떤 영감을 안겨주었다. 그 책에 나오는 에른스트 비그포르스의 이야기도 대단히 유용했지만, 무엇보다도 G. D. H. 콜의 길드사회주의를 다시금 환기시켜준 것이 다음과 같은 질문을 가능케 했다. 시민세력의 바람직한 모델을 길드사회주의에서 찾으면 어떨까? 운동의 전통이랄까, 아직까지 마음에 드는 노선을 찾지 못한 내게 길드사회주의는 종종 매력적인 관심거리였다. 물론 한국에선 『영국의 위기 속에서 나온 민주주의』를 제외하곤 몇몇 서적을 통해 있는 듯 없는 듯 무심하게 소개되던 터라 관심의 영역이라기보다는 신비의 영역에 가까울지도 모르겠지만, 여하간 스웨덴 사회민주당의 정책을 케인즈주의의 마이너 버전으로 오해하는 이들(주로 미국인들)에게 비그포르스가 길드사회주의를 직접 언급하였다는 내용은 내 호기심을 다시 그쪽으로 옮기기에 충분했다. 잘못짚은 게 아니라는 그런 확신이 들었다고 할까.

그 확신을 갖고 이것저것 찾다가 건진 것 중의 하나가 바로 여기서 소개할 버트런드 러셀의 『자유로 가는 길』이다. 평소 러셀의 저술이나 정치적 입장을 선호하는 편이라 늘 즐겨찾기를 해왔지만, 솔직히 러셀에게서 ‘길드사회주의’를 구체적으로 듣게 될 줄은 몰랐다(지금 돌이켜보면 이 생각이 도리어 어색하다). 게다가 이 책의 중반부부터 러셀은 기본소득으로 알아들어도 될 만한 이야기를 폭넓게 개진하기 시작하는데, 그건 마치 어떤 논리적-필연적-운명적 결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내게 강렬한 경험을 선사했다. 그러니까 기본소득, 시민세력의 강화, 에른스트 비그포르스, G. D. H 콜, 길드사회주의, 버트런드 러셀 그리고 다시 기본소득이 어떤 하나의 의미망으로 엮이는 순간이 다가온 것이다.


2. 길드사회주의와 기본소득

“오늘날 낙관론자란 세상이 더 나빠지지 않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다.”

러셀은 『자유로 가는 길』의 제3판 서문에 이렇게 썼다. 제1판이 나온 후로 30년의 세월이 흐른 시점인데, 사실 제3판이 나오던 당시(1948년)를 생각해보면 그의 자조적인 발언이 이해가 된다. 양차세계대전의 참혹성을 겪은 사람들은 더 이상 인간 이성의 힘을 신뢰할 수 없게 되었고, 학문적으로도 “우리는 알아야 하고, 알게 될 것”이라던 데이비드 힐베르트의 당찬 선언이 이미 흘러간 옛 노래가 된 지 오래였다. 게다가 더 이상 소련 정부를 맹목적으로 숭배할 수 없게 된 국가사회주의자(아마도 대부분의 마르크스주의자가 포함될 범주)들은 대책 없이 갈 길을 잃어버리고 있었고, 그렇다고 해서 망각된 아나키즘/생디칼리슴의 전통이 되살아 난 것도 아니었다. 대략 이 정도면 우리 시대와 가히 필적하는 암울함을 떠올려 볼 수 있을 듯하다.


러셀은 제1판에서 국가사회주의의 타락을 예측이라도 한 듯이(사실 많은 사람들이 여러 맥락에서 비슷한 ‘예측’을 하긴 했지만) 길드사회주의를 지지했고, 제3판에서는 (다소 양가적인 어투로) 그 지지를 재확인한다. 그는 사람들에게 사회주의의 이상을 버리지 말 것을 당부하면서 국가사회주의와 아나키즘/생디칼리슴 양쪽 모두를 돌파하기 위한 기획으로서 길드사회주의를 강조하는데, 애초에 이 책을 쓸 때 콜의 도움을 받았다는 점을 감안하면 그러한 결론은 예정된 것으로 보인다. 사실 그들의 작업엔 ‘영국적’이라고 할 만한 친족성(이를테면 온건하고 경험적인 틀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는)이 적잖이 반영되었다는 인상을 받긴 하지만, 그런 억측은 이 정도 농담으로만 해두고, 러셀이 길드사회주의를 도출하는 논의를 가볍게 따라가 보겠다.

일단 러셀은 아나키즘을 생디칼리슴에 포함시킨다. 이는 “아나키즘 자체는 널리 퍼진 믿음이었던 적이 한 번도 없으며 생디칼리슴의 수정된 형태로서만 인기를 끌었을 뿐……생디칼리슴의 본령은 아나키즘에서 파생되었으며……경제적 아나키즘이라고 불러도 무리가 아니다(p.23).”라는 대목에서 확인할 수 있다. 다만 그 차이는 밝혀두는데, 여기엔 1907년 8월 암스테르담에서 열린 국제 아나키즘 대회의 결정사항-“아나키스트는 자본주의 독재 사회를 타도하는 일은 오로지 무장봉기 및 강제몰수를 통해서만 실현될 수 있다고 생각하며, 따라서 총동맹 파업과 생디칼리스트 운동을 어느 정도 받아들인다 하더라도 정부의 군사력에 더욱 직접적으로 맞서는 투쟁 수단들을 잊어서는 안 된다(p.113).”-을 인용한다. 즉 생디칼리스트 운동을 폭력혁명의 대체물로 보지 않는 관점을 아나키스트의 것으로 간주하고, 이 같은 차이를 염두에 두고서도 둘을 같은 진영으로 바라보겠다는 태도로 정리할 수 있겠다.

국가사회주의에 관해서는 우리가 능히 짐작할 수 있듯이, 러셀의 입장은 ‘비(non)’ 또는 ‘반(anti)’에 가깝다. 대체로 마르크스의 학설을 검토할 때는 ‘비’, 국가사회주의의 대의제 정부(민주집중제로 요약되는)에 대한 옹호에 있어서는 ‘반’, 그리고 그 사이에 존재하는 폭넓은 영역에서는 두 관점이 혼재한다고 보면 적절할 것이다. 책 곳곳에 국가사회주의자의 입장에서 볼 때 불편한 지점이 적지 않은데다, 5장 전체에 걸쳐 국가의 권력을 축소하는 방법에 대해 논하는 걸 보면 역시 그는 아나키즘/생디칼리슴의 손을 들어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허나 그렇다고 그들의 주장으로 논의를 종결짓지도 않는 건, 중앙지배기구가 없는 공동체는 국방, 관세, 위생관리 및 불건전 약물규제, 공정한 분배체제 유지 등 국가의 특정한 기능을 수행하지 못하리라 보기 때문인데(p.183), 제3판 서문에서는 아예 이 책을 다시 쓴다면 아나키즘에 대해 훨씬 적게 동조할 것이라고 명시하기도 했다.

내 보기에 아나키즘/생디칼리슴에 대한 러셀의 입장은 ‘탈(post; 스승을 이기고자 하는 제자의 마음)’에 가깝다. 그리고 그 뛰어난 제자로서 길드사회주의를 지목하는 것이다. 그가 말하는 길드사회주의의 시각에서 보면, 국가사회주의는 사람을 소비자로만 파악하는 반면 생디칼리슴은 오로지 생산자로만 파악한다. 그런 식으로 어느 한쪽의 관점을 부정하는데서 그칠 것이 아니라, 국가는 소비자 자격을 지닌 공동체의 연합(의회)으로, 전국의 길드는 생산자 자격으로 그들을 대표하는 기구(길드평의회)를 조직하고, 둘을 양대 권력으로 설정한 후, 그 위에 합동위원회를 두어 다양한 이해관계를 해결할 것을 주문한다. 말이 긴가민가한데, 우리 현실에 억지로 끼워 맞춰서 이야기하자면 민주노총이 국회와 동등한 위치에 서서 정부를 꾸리는 것이다. 물론 노동자자주관리, 산업별노조, 내각책임제 등등 일차적으로 비교하기엔 전제되어야 할 사항이 너무 많지만, 도식적인 설명이 갖는 장단점은 알아서들 구분토록 하자.

다시 정리하자면, 길드사회주의는 ‘국가(아마도 부르주아의)’는 인정하되 의회에 버금가는 국가운영의 축을 생디칼리슴적 전통을 근원삼아 새로이 구성하려는 기획인데, 러셀이 이 책을 쓸 당시, 그러한 시도에 대한 생디칼리슴 쪽의 태도는 대체로 다음과 같았다고 한다. “중산계급 중에서도 중산계급으로서 중산계급의 모든 단점(하마터면 ‘우둔함’이라고 쓸 뻔했다)을 대문짝만하게 써 붙인 ‘길드사회주의’는 중산계급 정신이 만들어 낸 최신 작품으로 세상에 등장했다. 이는 생디칼리슴의 선도적 개념을 멋들어지게 도용하여 교묘하게 왜곡한 것이다……우리는 길드사회주의에 나타난 국가개념에 반대한다(p.122).” 100년이 지난 지금도 충분히 나올 법한 얘기인 듯싶다. 다만 이쯤에서 오해를 막기 위해 길드사회주의와 페이비언의 차이를 언급할 필요를 느끼는데, 러셀에게 있어 페이비언은 그저 혁명이 거세된 ‘점진적’ 국가사회주의에 불과하다(p.96). 나 역시 이러한 관점에 동의한다. 뭔가 타협적이고 같은 영국이라고 비슷한 부류로 취급되기 십상이지만, 국가권력을 축소하기 위한 장치가 적어도 운영원리 차원에서는 페이비언 쪽은 없다는 점을 말해두고 싶다.

이제 기본소득이 나올 때가 되었다. 러셀은 콜의 주장을 지지하면서도, 어느 한 축이 갑자기 상대를 압도하는 상황과 ‘길드평의회’가 개개인에게 드러낼-기존 지배기구와 크게 다르지 않을-‘억압’에 대해서 우려를 표한다. 그리고 여기에 대한 근본적인 해결책은 길드사회주의 내에선 찾을 수 없다고 보는 듯하다. 아니 애초에 집단이 개인의 자유를 모자람 없이 지킬 방법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가정한 후, 자유의 문제와 관련해서는 아나키즘의 근본적인 논의를 가져온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일을 하든 안 하든 간에 사람은 누구나 적지만 생필품을 구하기에는 충분한 소득을 일정액 보장받아야 하며, 이보다 더 큰 소득은 생산된 재화의 총량이 허락하는 한도 안에서 공동체가 유용하다고 인정하는 일에 종사하는 이들에게 돌아가야 한다……우리가 지지하는 체제는 길드사회주의의 형태를 띤 체제로서, 어쩌면 정식 길드조합원은 선뜻 인정하기 힘들 정도로 아나키즘에 치우쳤을지도 모른다. 아나키즘은 (자유와 관련 있는 - 필자주) 과학과 예술, 인간관계, 삶의 즐거움처럼 보통은 정치인들이 별 관심을 갖지 않는 문제에 강점을 보인다. 우리가 ‘뜨내기의 품삯’ 같은 아나키즘적 요소를 얼마간 함께 논의한 것도 주로 이러한 문제들을 위해서였다(p.155;267).”

즉 정부구성의 차원에서는 길드사회주의를 최선으로 보고, 개개인 삶의 차원에서는 ‘뜨내기의 품삯(기본소득)’을 제안하는 셈이다. 그리고 이 둘을 엮는 키워드는 ‘자유’이다. 러셀에게는 왜 이토록 자유가 중요할까? 이는 가치의 문제도 있겠지만, 체제의 성공조건이라는 맥락에 한정한다면, ‘권력의 부작용을 막을 실질적인 힘'으로서의 자유를 강조하고 있다.

"통상 사회주의 이론에서는 오로지 노동만이 노동의 산물을 누릴 권리를 부여한다고 본다……일할 능력이 있는 사람은 누구나 일하도록 강제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때 일로 인정받으려면 당연히 당국의 눈에 들어야 한다……현존하는 정부의 사상적 토대에 반대하는 책을 쓰는 행위는 일로 인정받을 리가 없다……정작 사회주의자들은 이러한 결과를 내다보지 못하는데, 오늘날 그 사상을 옹호하는 이들과 똑같은 사람들이 장차 사회주의 국가를 지배하리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그러나 개혁이 완료된 후에 권력을 쥐는 자는 주로 야심찬 관료 유형이게 마련이며……이러한 유형은 반대파에 관용을 보이거나 자유와 친했던 적이 한 번도 없다……아나키즘은 자유와 관련하여 장점이 있고 사회주의는 사람들에게 일을 시키는 것과 관련하여 장점이 있다. 이 두 가지 장점을 한데 묶을 방법을 찾을 수는 없을까? 내가 보기에는 찾을 수 있을 듯싶다(p.152~154)."

러셀이 말하는 '뜨내기의 품삯'은 이러한 논의 선상에 있다. 어떤 정치이념이든 기존 대의제를 극복하는 길은 시민/인민/개인의 정치효능감을 재고하고 이를 통해 공동체의 안녕을 도모하는 유무형의 움직임을 이끌어내는 것일 터인데, 개개인이 단지 최소한의 생계 때문에 자신의 정치적 권리를 '방기당한다'면 그러한 목적을 달성할 수 없을 것임이 분명하다. 바로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것이 ‘뜨내기의 품삯’이고 ‘자유’의 실용적인 측면인 것이다. 이는 길드사회주의와 기본소득 간의 연결고리를 어디서 찾아야 하는지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고, 앞서 제기한 시민세력의 강화라는 주제와 거의 일치하는 내용이기도 하다.

사실 자유는 기본소득의 최근 논의에서도 늘 중요하게 다루어지는 척도이다. 판 빠레이스(Philippe Van Parijs)의 '실질적 자유지상주의'(Real-libertarianism)가 그 대표적 예라 할 수 있을 텐데, 그는 자신의 저서 『모두를 위한 실질적 자유』(Real Freedom for All)에서 기존 자유지상주의의 (자유를 위해선 자본주의적 불평등을 감내할 수밖에 없다는 식의) 주장을 비판적으로 검토하고 개별성과 연대성을 동시에 추구하는 방향으로 자유 개념을 재구성한다. 이에 대한 반론과 여러 경쟁 작업들이 있지만, 이 글에서는 그 논리가 쉽게 기각당할 성질의 것이 아님을 언급하는 정도로 넘어가기로 한다.


3. 게으름뱅이가 될 자유

앞서 내가 찾고자 한 바를 굳이 딱딱한 용어로 정리하자면, ‘시민세력의 강화를 통한 체제내적인 하방안정성의 근본적 재고’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여기에 초점을 맞추다 보니 자유의 개념을 너무 한정적으로 사용한 측면이 있는데, 러셀은 이보다 더 근본적인 논의로 나아간다.

그것은 게으름뱅이가 될 자유다. 여기서 게으름은 ‘체제/다수가 인정하지 않는 일’이란 의미에 가깝다. 즉 그것의 부정적인 맥락(러셀의 용어를 빌리자면 '농땡이')과는 구분되며, 주로 살아 있는 동안에는 체제/다수로부터 무시당하다가 죽은 후에야 인정을 받는 그런 이들을 위한 개념이다. 여기에 해당되는 대표적인 이들이 바로 예술가이지만 비단 그들만의 문제는 아닌 것이, 예컨대 게으름을 인정하지 않는 사회(오늘날의 모든 사회)는 원칙적으로 돈벌이가 되지 않는 여타 가치들을 무시한다. 지식의 공유가 그렇고 전통적인 집안일이 그렇다. 대체 그 (따위) 기준은 누가 정했는가? 과연 돈벌이가 우리 삶의 판단기준이 될 수 있는가? 러셀은 말한다.

“대다수 갑남을녀의 일상에서 공포는 희망보다 훨씬 더 크게 작용한다. 사람들은 자신의 삶과 자신이 만나는 사람들의 삶 속에서 만들어 낼 기쁨보다는 자신이 소유한 것을 남에게 빼앗길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더 사로잡혀 있다. 삶을 이렇게 살아서는 안 된다(p.239).”

삶을 이렇게 살아서는 안 된다. 2008년 이전에는 이러한 주장이 비웃음을 사기도 했지만, 요즘은 그래도 일군의 사람들에게 나름의 울림을 주는 것 같다. 여기에 동의한다면, 이제 다음 질문이 가능하다. 그렇다면 우리는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인류가 참으로 오랫동안 붙들고 있는 물음인데, 그에 비해 만족스러운 답이 안 나오는 것도 사실이다. 헌데 러셀은 우리 모두에게 게으름뱅이가 될 자유가 있어야 이 질문에 대한 답을 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소유보다 창조를 추구하는 정신에 따라 살아가는 삶에는 근원적인 행복이 존재한다……일찍이 이러한 삶의 방식을 찾은 이들은 두려움으로부터 해방되었다. 왜냐하면 그들이 삶에서 가장 소중히 여기는 가치가 외부의 권력에 아랑곳하지 않기 때문이다……만약 공포의 지배를 극복하고자 한다면 대중에게 용기를 갖고 불운에 의연해지라고 설교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우선 공포의 원인을 없애야 하고, 선한 이의 삶이 더 이상 세속적인 의미에서 실패하지 않도록 해야 하며……한 사람이 다른 사람의 삶에 관여하는 정도를 가능한 한 최소화하는 방식으로 사회의 정치 및 경제 조직을 혁신해야 한다(p.240~243).”

다시 말해, 외부의 권력에 아랑곳하지 않을 수 있는 조건, 즉 우리 모두가 게으름뱅이가 될 수 있는 구조로 우리 사회를 바꿀 수만 있다면, 비로소 우리는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해답을 찾아나갈 수 있다는 전망인 것이다. 사실 이 정도만으로도 ‘뜨내기의 품삯’은 자신의 정당성을 입증하기에 충분하다고 본다. 인류의 가장 근원적인 문제를 해결할 초석이니까. 적어도 윤리의 영역에 있어서는 그렇다는 이야기다. 과학의 영역에서 사고할 때에도, 옳은 건 옳은 거고 현실이 녹록치 않다면 그건 ‘못하는’ 것이지, 옳은 게 그른 것이 되지 않는다는 점을 늘 명심해야 할 것이다.

『자유로 가는 길』에서 내가 읽은 내용은 대략 이 정도이다. 러셀은 푼돈을 벌 목적으로 이 책을 썼다고는 하지만, 적어도 제목이 부끄럽지 않을 만큼, ‘자유’의 문제를 심사숙고하여 이를 잘 정리했다고 본다. 게다가 내 경우엔 (평소 궁금해 마지않던) 길드사회주의와 (평소 지지해 마지않던) 기본소득을 (평소 존경해 마지않던) 러셀에게서 직접 전해들었으니 감격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이 모든 논의가 ‘어떤 하나의 의미망’에 있다는 점을 재확인하는 차원에서 콜의 『영국 노동운동의 역사』에 수록된 장석준 씨의 해제를 인용하며 글을 맺고자 한다.

“국가가 총량적 규제와 더불어 무엇을 누가 어떻게 생산할지에 대한 결정과 구매력의 광범한 분배로까지 더 나아가지 못한다면, 케인스주의적 처방만으로 어떻게 인플레이션을 조장하지 않으면서 완전고용을 달성할 수 있겠는가? 이것이 그의 물음이었다……복지국가 건설을 탈자본주의 변혁과의 관계 속에서 고민한 콜의 이러한 면모는 복지국가 건설의 당사자이면서도 그 너머의 전망을 놓치지 않았던 스웨덴의 에른스트 비그포르스와 견줄 만하다……『경제계획의 원리』에서는 계획의 주요 과제 중 하나가 구매력의 분배라고 지적하면서, 그 수단으로서 모든 시민에게 현금 급여를 지급하는 방안을 제안했다. 콜은 구매력의 50~60 퍼센트는 사회 수당으로 충당하고 나머지는 임금으로 해결하는 체제가 바람직하다고 주장했다. 콜은 오늘날의 기본소득론의 선구자 중 한 명이었다(p.719;731).”

비록 아직은 ‘어떤 하나의 의미망’이란 표현 그 이상으로 설명하기가 난망하지만, 길드사회주의와 기본소득은 콜의 언급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이 분명 큰 조류를 서로 공유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나는 당분간 그 조류를 ‘게으름뱅이가 될 자유’를 중심으로 읽고자 한다. 가급적 건조하게 말하건대, 보다 많은 이들이 길드사회주의와 기본소득을 자신의 화두로서 진지하게 검토하고 공유하기를 제안하는 바이다. 그럼으로써 ‘어떤 하나의 의미망’이 (문자 그대로) ‘자유로 가는 길’로서 우리 앞에 다가올 수 있기를 기대한다.

[2012 특별연재: 기본소득과 공공성] 기본소득과 다음 세대의 공공성 / 백희원

게시자: vanguard ology, 2012. 11. 19. 오전 1:53   [ 2012. 11. 19. 오전 3:59에 업데이트됨 ]

백희원
기본소득 청'소'년 네트워크

2012.11.8


1

2012년

지난 3년 간 카드대출로 인한 신용불량자가 50만명이라고 한다. 생활비 차원의 적은 부채도 감당할 수 없는 인구가 늘었다. 청년(15~29세) 경제활동인구 중 실업자 수는 31만명을 상회한다. 경제활동인구에 포함되지 않는 이들까지 고려하면 더 많은 청년들이 막막함 속을 헤매고 있는 셈이다. 구제금융 이후 신자유주의 경제 체제 15년을 거치며, 빈곤은 지속적으로 보편화 되어왔다. 청년들은 일찍이 88만원 세대라는 호칭을 부여받았다. 그들의 부모는 최근 하우스푸어 딱지를 달기 시작했다. 가족은 더 이상 서로를 책임질 수 없다.

지속적인 생계기반 없이 이들은 불안정 노동 속에 워킹푸어로 살아간다. 아르바이트생이나, 그 아르바이트생을 최저임금으로 고용하는 동네 자영업자나 사정은 매한가지다. 미디어는 근심에 찬 듯이 가계부채, 자살자 수, 청년 실업율 등 각종 불황과 불행의 통계들을 끌어와 심각성을 역설하지만, 사회문제로 드러나는 구체적인 증상들은 외면한다. 문제는 알 수 없고 문제의식만 횡횡한 가운데, 진정제 같은 ‘힐링’과 ‘멘토’만 날개돋힌 듯 팔려나간다. 2012년의 한국.

미래에 대한 논의 없는 회색사회

한편, 인류의 미래와 직결되어있는 진정 중대한 문제들은 외면당하고 있다. 탈핵과 에너지 정책 문제가 그렇다. 2011년, 후쿠시마 원전 사고 당시 한반도도 사고 영향권에 포함 됐었으나(독일기상청 발표) 정부는 “방사능이 유입될 수 있지만 인체 영향은 없을 것”이라는 어불성설을 내놓았다. 사람들은 찝찝한 기분으로 방사능 봄비를 맞았고, 결국 별다른 방도가 없자 길 건너 불구경하듯 넘어가버렸다.

그러나 정말 별다른 방도가 없었을까? 시간이 걸리는 문제를 대면할만한 역량이 부족했던 건 아니었을까? 오늘 내일 하는 불안정한 생활 속에, 다음 세대에 대한 생각은 회피해 버린 건? 와중에 정부는 원전을 줄이긴 커녕 2030년 까지 현재의 23개를 42개로 늘리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지난 해 사고위기를 간신히 넘긴 고리 1호기를 비롯한 노후 원전들에 대한 대책은 뒷전이며, 아는 사람들만 아는 얘기에 그치고 있다. 미래에 대한 논의가 불가능한 이 회색화 된 사회야말로 경제위기가 야기한 진짜 문제다.

다양성의 불모지

이상한 일이다. 90년대를 거치며 한국 시민사회에도 다양성에 대한 존중과 생태위기에 대한 반성이 싹트지 않았던가. 가시적 성과들도 많이 있다. 생협은 윤리적 소비를 강조하며 다수의 생활 속에 안착했고, 대안학교도 낯설지 않은 기관이 되었으며, 문화계에서는 ‘인디’란 접두어가 곳곳에 결합했다. 성소수자, 장애인 등 인권의 사각지대에 있었던 이들에 대한 편견도 많이 완화되었다. 기존의 터부들을 스스럼없이 드러내는 근래의 대중문화 컨텐츠들이 이를 증명한다.

또한 창의성을 요구받으며 자라온 오늘날의 청‘소’년(0세~30대)들은 인터넷을 통해 해외와 별 시차 없는 세계 속에 성장한 세대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이들에게는 이전 세대와 다른 것을 구상하고 실현시킬 씨앗이 있다. 이를테면 공장, 사무실 등 규격화된 도시 공간에서 벗어나, 생태적 삶을 실험하고, 대안 마을을 꾸리고, 소비가 아닌 공유의 경제를 실험하고 그렇게 세상이 더 나아가게하는 것.

그러나 우리가 도달해 있는 곳은 이 다양성의 맹아가 도저히 싹 틔울 수 없는 불안정한 시스템이다. 청‘소’년들의 미래가 산업화 된 교육 시스템에 고스란히 저당 잡혀있기 때문이다. 자녀들은 부자 부모의 투자대상이거나, 가난한 부모의 부채다. 따라서 학업을 끝낸 청‘소’년 대부분은 곧장 기존의 노동시장에 진입해야 한다. 자신의 욕망과 공공의 당위를 함께 성찰하며 삶을 기획하는 진정한 의미의 청‘소’년기는 없다고 해도 다름 아니다. 이런 사회에서 기대할 수 있는 미래는 없다. 극복의 시도들은 좀처럼 지속되거나 확장되지 못한다. 그러니까 더 늦기 전에 근본적이고 실질적인 변화가 필요하다. 무한경쟁의 생태계를 공공의 기반으로 재편할 보편적인 변화. 이 글은 그 새로운 공공성의 장을 제안하고자 한다.


2

경제민주화가 직시하지 않는 공공성의 파괴

대선 레이스가 한창인 2012년 올해. 오랜 내수시장 불황의 대책으로는 경제민주화가 부상하고 있다. 경제민주화와 주로 짝을 짓는 단어는 재벌개혁이다. 문어발식 경영, 탈세, 세습, 골목상권 파괴, 계열사 문제 등 각종 편법과 비리의 주범이지만, 그간 권력의 중심에서 물러난 적도, 온당히 처벌받은 적도 없는 재벌들에게 걸 맞는 책임을 묻겠다고 한다. 대기업 확장보다는 중소기업 육성에 집중하며, 그간 성장률에 비해 형편없었던 고용율도 높이겠다는 비전들을 펼치고 있다.

그러나 과연 경제민주화가 재벌 응징으로 달성되는 것일까? 물론 공정한 처벌은 사회정의구현을 위해 꼭 필요하다. 하지만 경제민주화를 무엇의 반작용으로 언급해서는 곤란하다. 공정한 시장 규칙의 정립으로 투명한 경제 생태계를 조성하는 것은 급속한 근대화 과정에서 어그러진 과거를 바로잡는 데 그칠 뿐, 미래를 위한 새로운 기반을 구축하는 데 까지 나아가지 못한다. 청‘소’년 세대에게 미래를 돌려주고, 회색화 된 사회에 다양성을 되찾아주기 위해서는 공공성을 담보하는 사회 안전망이 필수적이다. 경제 민주화의 범위는 이 지점까지 확장되어야 한다.

청‘소’년 세대, 다음 시대의 공공성을 기획하자

그 지점까지, 다음 시대의 공공성을 기획하는 것은 청‘소’년 세대의 몫(권리)이 되었다. 기성 유권자와 정치인들은 미래와 공공성을 공론장에 올려놓지 않는 까닭이다. 아무래도 이들은 재벌비리 같은 불의에 대해 논하는 것을 더 선호하는 모양이다. 하지만 살날이 훨씬 많이 남은 청‘소’년에게 이는 한참 부족하다. 상식, 희망, 진심 같은 것보다 구체적인 미래가 필요하다. 기존 공론장에서 너그러운 멘토에게 인정과 위로를 구할 때가 아니다. 지금 당장 필요한 것은 청‘소’년에게도 애초부터 자리가 배정되어있는 완전히 새로운 원탁의 공론장이다. 이를 테면 “다음 세대의 공공성 포럼(Next Commons Forum)"같은 것.

하지만 현 세대의 청‘소’년들은 발상부터 너무 수세적으로 하고 있는 것 같다. 이를테면 반값 등록금보다는 무상교육을, 더불어 교육의 질을 담보하는 시스템의 구축을 요구해야 하는 것은 아닌가. 만성적인 위기사회에서 성장하며 왜소해진 탓이겠지만, 현실적인 대안이라는 핑계로 현재에만 매달리며, 진정한 문제들을 회피해온 것은 아닌지 돌이켜 볼 일이다. 정치권에서 나오는 청년 정책들을 보면, 마치 청년들이 취직시켜달라고 떼쓰고 있는 것만 같다.

어차피 청‘소’년 세대가 상상하고 요구할 것은 구제금융 이전의 부모세대와 같은 안정적 생활은 아니다. 화석연료를 맹렬히 연소하던 시절의 호황기는 결코 돌아오지 않는다. 더 이상의 호황은 금융 시스템의 기만임을 이미 목도했으며 그 부작용의 여파 속에 제각기 고군분투 중이지 않은가. 그러니 겪어본 적도 없는 과거에 대한 향수는 접고, 미래와 직결된 새로운 문제와 마주해야 할 때다. 에너지 고갈을 비롯한 생태 문제, 소수자 문제, 전지구적 불평등의 심화 등 세대와 지역을 불문한 거대하고도 구체적인 문제들이 이미 코앞에 와있다. 더 미루면 돌이킬 수 없을 문제들.

물론 아직 아무도 풀어 본 적 없는 문제를 마주하는 것은 버거운 일이다. 이처럼 구조적인 문제들은 새로운 사회 디자인을 요구한다. 통념을 깨는 상상력과 거시적이고 꼼꼼한 데이터가 필요할 것이다. 국경을 뛰어넘는 연대가 요구될 것이다. 지금보다 훨씬 다양한 역할, 다양한 부류의 사람들이 머리를 맞대고 논의해야 한다. 바로 지금 이 논의의 장을 열고 유지시킬 수 있는 시스템을 구축하는 것이 시급하다. 다안성(diverstability)을 구현시킬 수 있는 공공성이 선행되어야 하는 것이다.


3

기본소득(Basic income)

그리고 이 글은 이같은 공공성에 걸 맞는 요구로 세금 감면, 복지혜택보다 효과적일 것으로 예상되는 '기본소득' 제도를 정책화할 것을 제안한다. 기본소득이란 ‘어떠한 심사나 노동 요구도 없이 모든 사회 구성원에게 개별적으로 지급하는 조건 없는 소득’이다.(http://basicincome.org) 이와 유사한 아이디어는 몇 세기 전부터 존재해왔으나 기본소득에 대한 구체적인 논의가 활발해지기 시작한 것은 7, 80년대의 북서유럽에서부터였다. 석유파동 이후 저성장 고실업 사회에 들어서며, 완전고용을 전제로 해온 기존 복지국가 모델이 위기에 처하자 기본소득이 실질적인 대안으로 받아들여지기 시작한 것이다.

이미 기본소득이 시행 중인 지역도 있다. 대표적으로 석유자원을 재원으로 한 미국 알래스카 주가 있다. 나미비아 오미타라 지역에서는 2년 간의 기본소득 실험 프로젝트가 여러 긍정적 효과들을 보이며 성공적으로 완료되었다. 물론 그 후로 정책도입 운동이 진행 중이다. 브라질에서는 2004년에 법안이 통과되었고 신중하게 시행 준비를 하고 있으며, 독일에서는 해적당과 좌파당 일각에서부터 DM의 회장 괴츠 베르너까지 상이한 형태의 기본소득 모델들을 제안하고 활발하게 논의를 진행 중이다.

기본소득의 효과

자, 이렇게 다양한 기본소득 아이디어들의 요는 복잡하고 선별적인 복지 시스템에서 벗어나, 노동연계나 자산심사 등의 조건 없이 모두에게 보편적으로 충분한 생활이 가능한 수준의 현금을 바로 지급하자는 것이다. 언뜻 들으면 황당하리만치 단순한 요구로 들리지만 기대효과를 따져보면 오히려 작금의 문제들을 해결함에 있어 꽤 합리적인 아이디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직관적으로 알 수 있는 것부터 따져보자. 일단 기본소득이 지급되면 생계를 위해 억지로 노동을 할 필요가 없어진다. 자연히 노동시간은 단축되고 이는 노동의 재분배를 촉진하여 실업문제를 완화시킨다. 이렇게 재편된 적절한 양의 노동은 생태계를 위협하는 과잉생산-소비의 악순환을 제재시킬 수 있다. 또한 부의 선분배(predistribution)는 경제적 양극화를 해소시키며 자치를 위한 평등을 보장함으로써 민주주의의 발전에 기여한다. 경제 민주화라는 단어는 이 지점에서야 말로 비로소 걸맞게 쓰일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기본소득이 곧장 실현되기는 힘들 것이다. 일단 서유럽식 복지모델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주장도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20세기 초중반의 서유럽 국가들의 그것과는 전혀 다른 전지구적 문제들에 직면해 있다. 고로 이전까지의 근대화 과정에서처럼 선진국의 전철을 밟아야 할 이유는 없다. 대신 기본소득으로 가는 중간단계로 다양한 아이디어들을 고려해볼 수 있다.

이를 테면 가장 보편적인 조건 중 하나인 나이를 기준으로 아동이나 청년, 노인 기본소득을 제안해 보면 어떨까? 혹은 지급액을 줄여 충분한 생활은 무리여도 청'소'년 생계비 수준의 정책을 시행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처럼 특정 나이대에 지급되는 기본소득은, 그들을 키우거나 모셔야 하는 중간 세대의 짐도 덜어줌으로써 모든 세대에게 부분적인 경제적 자유를 보장할 것이다. 또 핀란드의 자유년도(freeyear)제도처럼 일시적인 기본소득 제도를 시행할 수도 있을 것이다. 자유년도 제도란 5년 간 노동하면 1년 간은 무조건 재충전을 취하며 무상으로 생활비를 지급받는 제도이다. 이는 노동의 재분배 효과가 있으며, 평생직장이 거의 불가능한 현 사회에서 새로운 직업을 모색할 수 있는 여유를 제공한다.

공공성이 살아나는 미래를 위해

그 외에도 여러 기대효과들이 있지만 기본소득을 만병통치약으로 제안하고픈 의도는 없다. 다만 한 가지 강조하고 싶은 바는, 기본소득이 여태까지 생계와 불안에 종속되어있던 삶을 이로부터 해방시킴으로써, 사회 구성원 개개인에게 자치의 감각을 되돌려 주리라는 점이다. 즉, 누구나 자신의 삶을 자유롭게 기획할 수 있으며, 이로 인해 회색화 된 사회가 다채로운 색을 되찾을 수 있으리라는 것. 무한경쟁 승자독식의 시스템을 공생의 생태계로 되돌릴 수 있으리라는 것. 그리하여 앞서 언급한 진짜 문제들을 현안으로 가지고 와 논의할 수 있도록 사회 전체의 역량을 키워주리라는 것. 기본소득은 공공성이 살아나는 미래를 위한 가장 분명한 아이디어다.


4

다음 세대의 공공성 포럼(Next Commons Forum)

기본소득이란 키워드를 가지고 상상하기 그리 어렵지 않은 미래들을 그려보았다. 하지만 요구하지 않으면 미래는 영영 없다. 그러니까 예술, 생태, 비혼, 대안 공동체, 소수자 인권운동 등 각 영역에서 다음 세대를 위한 실험을 거듭하고 있는 0세~ 30대의 청'소'년들이 직접 요구하자. 우리들의 다양한 삶의 양태가 한 때의 참신한 아이디어에 그치지 않고, 지속될 수 있도록 먼저 사회를 회복시키자. 제각기 다양한 우리들이 서로 합의할 수 있는 가장 근본적인 지점으로 돌아가자. 그곳에서 공공성의 회복을 이야기해야 한다.

그 첫 발걸음으로 우선 "다음 세대의 공공성 포럼"에 함께 둘러앉기를 제안한다. 여기서는 기본소득을 이야기했다. 그 다음 이야기들이 계속 나란히 이어졌으면 좋겠다. 우리가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이다. 더 미뤄지면 돌이킬 수 없는 일이다. 그러므로 필히 참석하여 원탁을 넓혀주시기를. 단언컨대 새로운 공공의 룰을 만들어나가는 일은 어려운 만큼 틀림없이 즐거운 작업일 것이다. 창조적인 일들이 늘 그렇듯이.

[프레시안] “청소년에게 꿈은 개뿔…현실은 예산 0.04%” / 2012.2.9

게시자: 박장미, 2012. 6. 14. 오전 5:54   [ 이름에 의해 업데이트됨(2012. 11. 24. 오전 2:51) ]

0.04%의 현실, 청’소’년이 진정한 꿈을 꾸는 사회로

조병훈(기본소득청’소’년네트워크 대변인)

청년/청소년에게 꿈을 가지라는 말 투성이다. 꿈? 개뿔, 꿈도 욕망이 있어야 꾸어지는 것이고, 욕망이란 건 일말의 현실감 위에서 형성되는 것이다. 안정된 직장, 내 집 마련, 원하는 일을 원하는 만큼 하면서 소박하게 사는 삶? 이런 말들이 청년/청소년을 대상으로 방향없이 뿌려지든지 말든지 우린 꿈을 꿀 수 없다. 꿈은 커녕 잠도 제대로 못 잔다.

흘러간 ‘청년(대)학생’의 시대

꿈타령을 하기 전에 우선, 청년/청소년의 개념부터 제대로 잡아야 한다. ’20대’가 시사용어가 된 지 3년이 조금 지났다. 그 전까지 젊은이를 일컫는 단어는 ‘(대)학생’이었다. 이들은 80년대 민주화운동의 향수를 담아 ‘청년학생’으로 불렸는데, 주요 이슈는 대학생들의 사회참여나 졸업을 앞두고 있는 이들의 구직문제가 대부분이었다. ‘청년학생’이라는 말이 성행하던 2000년대 초중반까지는 그래도 이 ‘청년학생’들이 살기에 괜찮은 시기였다. IMF 한파가 추웠지만 집중적인 경기부양책 덕분에 서울의 상위권 대학 출신자들이 일자리를 걱정할 수준은 아니었고, 경쟁이 극단화될 조짐은 보였지만 폭발할 만한 수준은 아니었다. 시민단체 인턴쉽은 이 시기에 성행했고, 기업들도 보다 다양한 경험을 가진 ‘청년학생’들을 기용하는 것으로 불황을 극복하겠다는 의지가 있었다. 물론 이 시기에 이미 정리해고와 비정규직화를 필두로 한 신자유주의가 자리를 잡아가고 있었지만, 대부분의 젊은이들은 이를 자신의 일로 생각하지 않았다.

▲ 아르바이트 구인광고. ⓒ연합뉴스

’20대’ 워딩과 청년 문제의 본질

2007년에 나온 <88만원 세대>는 ‘청년학생’의 신화가 깨질 것을 내다보았다. 이 책의 저자들은 적시에 ’20대’라는 워딩과 함께 패러다임의 전환을 제안했다. 간단한 메시지였다. 이제 이 세대는 대학졸업장이 있건 없건 안정된 직장에서 멀리 떨어진 인생을 살게 될 것이라는 것. “직장 얻고, 결혼하고, 집 사고, 아들 딸 구별말고 하나만 낳아 잘 사는” 새해 덕담같은 삶을 꿈꿔보기도 전에 돈의 쓴 맛을 경험하게 될 것이라는 메시지는 주효했다. 꿈을 가슴에 간직하고 대학만 졸업하면, 입에 풀칠은 할 것이라는 기대는 수십 군데 면접을 보러 다니는 선배와 동료를 보면서 조금씩 무너졌다. 엄습하는 절망감으로부터 도망치기 위해서라도 외국어와 기업별 적성검사를 대비하는 학원에 다니거나 스터디에 참가해야 했으며, 이 와중에도 용돈벌이를 위해 아르바이트를 뛰어야 했다. 부모도 더 이상 ’20대’를 후방지원해주지 못했다. 은퇴와 갱년기를 대비했어야 할 노후자금이 부동산 시장과 함께 얼어붙었고, 마지막 투자처인 자식들도 기댈 언덕이 아니라는 사실에 부모들도 답답해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이렇듯 ’20대’란 워딩에는 더 이상 꿈을 꿀 수 없는 세대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싫은 게 당연하지만 외면하고 회피할 수 없을만큼 일분 일초를 압박하는 것이 현실이다. 애써 얻은 비정규직 임금은 식비와 교통비만으로도 금세 사라진다. 서울의 물가는 뉴욕을 제끼는 수준이지만, 최저임금은 1년에 고작 100원씩 오르고, 앞으로도 이 상황이 변할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꿈을 가지라고? 더 고생하고 아파하다 보면 희망이 보인다고? 지금 누가 누구에게 꿈을 갖고 버티라고 하는 것인가?

청소년의 경제적 현실

그나마 값싸게라도 노동력을 팔 수 있는 ’20′대들은 이렇게 닥치고 들으라고 쏘아붙일 힘이라도 있는 셈이다. 12세 소녀가 초경을 하면, 생리대 살 돈을 어떻게 구해야 하는지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부모”란 말을 반사적으로 꺼내기 전에 스스로의 힘으로 살아가는 청소년들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기 바란다. 아마 대답하기 힘들 것이다. 실제로 한국사회에서는 답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법으로 꽉 막혀있기 때문이다. 근로기준법 제64조는 15세 미만을 근로자로 사용하지 못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부득이 이 조항을 우회하려면 대통령령으로 정한 고용노동부장관의 취직인허증을 발급받아야 한다. 18세 미만이라면 합법적으로 자신의 노동을 팔 수는 있다. 다만, 그러려면 친권자를 밝혀야 하고, 친권자 또는 후견인의 동의서를 사업장에 제출해야 한다.

돈을 지불하고 생필품을 구입해야 하지만 이 돈을 벌 수는 없는 상태의 삶, 이것이 바로 청소년이 처한 경제적 현실이다. 대표자를 뽑을 권리(19세 미만, 선거법)나 가족과 떨어져 살 수 있는 권리(19세 미만, 청소년보호법)가 없다는 사실은 더 말해 입만 아프다. 이렇게 청소년은 정치적 자유, 거주이전의 자유, 재산처분의 자유와 같은 시민의 자유에서 완전히 소외되어 살아가고 있지만, 우리 사회의 논의수준은 이 문제 가까이도 가지 못한다.

벌지 못하지만, 생필품을 사야하는 게 현실이라면, 국가공동체가 복지혜택이라도 충분히 보장해야 하는 것 아닐까? 겨우 무상급식 정도를 어떻게든 막아보려고 아직도 소란을 떨고 있는 이들에게 꼭 다음 질문에 대한 답을 듣고 싶다. 청소년예산이 GDP 대비 얼마나 되는지 알고 있는가? 북구형 복지국가가 1인당 GDP 2만불일 때, 국가재정의 30%가 공공사회복지지출로 나갔고, OECD 국가 대부분이 국가재정의 15~30%를 공공사회복지에 지출하고 있다. 한국은 어떤지 아는가? 아니나 다를까, 1인당 GDP가 1만 7690달러였던 2006년, 한국의 GDP 대비 공공사회복지지출이 고작 7.83%였다. 그렇다면, 정부 전체 예산 중 청소년 정책 예산 비율은 어느 정도일까?

청소년 정책과 0.04%

0.04%. 정부 예산 대비 청소년 정책 예산 비율은 0.04%다. 아주 땅을 파고 지구의 핵을 뚫고 들어갈 만한 수치다. 사업별 금액을 따져봐도 청소년 활동에 500억, 시설에 300억, 복리증진에 200억을 쓰는 수준이다. 이해하기 쉽게 0~18세의 청소년 인구 1천 만명으로 이 금액을 나눠보면, 시설비 등 유지비를 죄다 포함해서 1년에 1인당 1만원도 돌아가지 않는다. 복지부 예산 내 비율로 봐도 겨우 1%를 넘었다 내려갔다 하는 수준이다. 이마저도 2006년을 정점으로 줄어들고 있다. 이게 청소년 정책의 본모습이다. 청소년을 “보호”한답시고 게임 셧다운제다 뭐다 하지만 예산표가 말해주는 “청소년 보호”의 진실은 고작 0.04%짜리 관심 뿐이다. 이 수치 앞에서 청소년들에게 뭐라 말할 수 있는 사람은 도대체 누구란 말인가?

청’소’년이 꿈을 갖길 바란다면

청년/청소년이 나서서 기본소득을 주장해야 한다는 아이디어는 바로 이러한 현실 위에서 등장한 것이다. 사실, 청년과 청소년은 근본적으로 서로 다른 존재가 아니다. 정확히는 97년 위기 이후 경제인이 되는 모든 세대는 같은 문제를 공유한다. 생존의 문제에 매순간 허덕이지만, 국가나 사회의 도움은 거의 받지 못하는 세대, 이 까닭에 기본소득청’소’년네트워크는 청년과 청소년을 연결한 청’소’년이라는 표기를 쓴다.

이들 청’소’년에게 쏟아지는 사디스트적 훈계(아파야 청춘이다?)나 시덥지 않는 낭판 놀음(꿈은 이루어진다?), 단순한 비명(아프면 아프다고 소리질러?)은 평생 단 한 번도 안정된 삶을 경험할 수 없을 거라는 불안의 핵심을 건드리지 못한다. ‘닥치고 정권교체’나 모호하기 짝이 없는 ‘진보’ 같은 수사로 ’0.04′라는 수치가 말하는 거의 완벽한 무시를 극복할 리도 만무하다. 물론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라도, 청’소’년에게 진정한 의미의 꿈이 필요한 것은 사실이다. 다만, 그 꿈은 우선 꿈을 가질 수 있는 사회를 꿈꾸는 것부터 시작하는 수밖에 없다.

기본소득을 받는 삶은 한 인간이 10년 후, 20년 후에도 생존에의 위협을 느끼지 않고 살 수 있는 삶을 말한다. 이러한 사회에서 사람들은 청’소’년 시절부터 완전히 다른 시각으로 자신의 삶을 설계하며 살아갈 수 있다. 다음 주, 아니 당장 내일의 끼니를 걱정하는 삶이 아닌, 자신의 가능성과 적성을 충분히 실험하고, 뚜렷한 목표를 위해 오랫동안 준비하는 삶이 보편화될 수 있다. 이런 삶이 지켜지는 사회가 바로 청’소’년이 꿈을 갖고 추구할 수 있는 건강한 사회 아닌가? 아직도 팔짱끼고 앉아서 꿈을 갖지 못해서 문제라고 청’소’년들에게 훈수만 두고 있을 생각인가? 어서들 기본소득 운동에 동참하시라.

출처: 프레시안


1-6 of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