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장은 심의 절차를 정상화하라

 

고등교육법 제15조 「총장은 교무(校務)를 총괄한다」가 대학의 권력구조를 규정하는 유일한 법 조항이다. 대학을 말단 정부 조직의 하나로만 인식하던 군부독재 시절 이 규정 하나로 정부가 임명한 총장에게 모든 권한을 실어주었다. 1980년대 민주화 운동과 함께 개정된 헌법에 의해 대학의 자율이 보장되어, 대학에는 정부 조직이면서도 독립적인 이중적 성격이 부여되었다. 어떤 집단의 자율이 보장되려면 집단 내 견제와 균형의 원리가 바르게 작동해야 한다. 그러나 헌법 개정 이후 대학 자율을 보장하기 위한 구체적인 후속 입법은 전무하다.


고등교육법 제15조를 「총장은 모든 교무를 구성원의 의사와 관계없이 독단적으로 총괄한다」로 해석할 것인가 아니면 「총장은 모든 교무를 구성원의 의사를 물어 민주적으로 총괄한다」로 해석할 것인가에 대한 지극히 상식적인 선택은 후자이다. 이것이 구체화 되지 않은 이 법률에 대한 올바른 기대이자 해석일 것이다. 따라서 구성원과의 소통 의무는 고등교육법 제15조의 올바른 구현을 위한 최소한의 전제이다. 긴 시간을 두고 보면 소통 없는 비민주적 인물은 선거를 통하여 배제되므로, 이 법의 전제는 자연스레 구체화된다.

구성원과 소통하는 방법에는 직접적인 소통과 대의기구를 통한 간접적인 소통이 있다.

 

모든 사안에 대하여 직접적인 소통이 필요한 것은 아니나, 특별히 중요한 사안에 대해선 직접적인 소통이 필요하다. 이는 마치 헌법이 전 국민의 의사를 직접 물어 개정되는 것과 비슷한 맥락이다. 간접 소통은 교수회, 대학평의원회, 교무회의 등의 대의기구를 통한 것이 있다.

 

이번 약학대학 정원조정 건으로 대학 본부는 소위원회를 구성하여 안을 마련하였고, 교무회의의 투표를 통하여 대학 본부의 안을 결정하였다. 추후 교수회, 대학평의원회를 거쳐 교무회의의 심의를 다시 거칠 예정이라고 한다.

 

① 대학 본부 보직자의 심의 기구 참여

단과대학을 대표하는 학장이 교무위원이 되는 것은 정당하나, 문제는 이 안을 만든 장본인인 대학본부 보직자들이 심의에 참여하여 의결권을 행사한 것이다. 이는 자신이 만든 안을 자신이 심의한 격이 된다. 이런 심의를 누구도 정의롭고 공정한 심의라 생각하지 않는다.

 

백 보를 양보하여 대학 본부 보직자의 교무회의 참여를 허용한다고 해도, 대학 본부 보직자가 의결권을 행사해선 안 된다. 모든 학칙과 규정을 만드는 대학본부 보직자가 참여하는 어떠한 기구도 태생적으로 심의 기구가 될 수도 없고 되어서도 안 된다.

 

② 교무위원으로 구성된 소위원회

교무회의와는 별도로 심층적인 논의를 위해 소위원회를 구성함에는 별다른 이견이 없다. 예를 들면 코로나 대책을 위해 외부의 전문 의료인을 모셔서 의견을 듣는 것은 바람직하다. 그러나 대학본부의 안을 만들기 위해 향후 그 안을 심의해야 할 교무위원으로 소위원회를 구성하는 것은, 자신이 안건을 만들고 자신이 심의하는 격으로, 해당 교무위원의 심의권 제척 사유에 해당한다.

 

③ 교무회의의 이중적 활용

교무회의가 투표를 통해 대학 본부의 안을 결정하고, 얼마 후 다시 교무회의가 그 안을 심의하는 경우, 이는 자신이 결정한 안을 자신이 심의하는 격이 되어, 누구도 이런 심의가 공정할 것이라 기대하지 않는다. 본 안건에 대한 교무위원의 심의권은 제척되어야 한다.

 

총장이 모든 사안을 독단적으로 처리하지 않고 논의하여 결정하고자 함은 바람직하나, 대학 본부의 안을 결정하기 위한 논의 기구는 교무회의가 아니라, 처·국장 회의와 대학 본부의 모든 보직자로 구성된 정책회의이다.

 

교무회의가 스스로 총장을 보좌하는 자문기구이기를 원한다면 심의 기구의 권위를 내려놓고 학칙으로 정하는 모든 심의 절차에서 빠져야 하고, 만약 최고 심의 기구로서 권위를 지키고자 한다면 자신이 심의해야 할 안건의 작성에 직접 개입하면 안 된다. 자문과 심의는 양립될 수 없는 성격이다.

 

특정인이 심의받기 위한 안을 만들고, 그 안을 만든 당사자가 다시 심의에 참여하는 권력의 독점을 독재라고 하고, 심의받을 사람과 심의하는 사람의 부적절한 관계를 야합이라 한다. 이는 현행 학칙과 법률의 느슨한 그물은 모두 피해 가서, 절차상 하자가 아닐 수는 있으나, 그 본질은 민주주의 근간을 흔드는 독재이자 야합이다. 세상의 어떤 심의 기구도 자신이 만든 규정을 자신이 심의하지 않는다.

 

이 문제가 중요한 이유는 비단 약학대학 6년제 전환에 관련된 정원조정 문제뿐만 아니라 향후 있을 학내의 모든 대소사와 관계된 것이기 때문이다.

 

후속 입법은 총장의 몫이 아닐지라도 권력의 독점과 야합을 방조하는 현행 학칙의 개정과 제도의 민주적 운영은 총장의 시대적 사명이다. 강한 대학 본부는 억지의 관철이 아니라 수용할 수 있는 것은 최대한 수용하는 열린 자세로 구현된다. 시대에 뒤처진 현행 규정의 소극적 자구 해석에만 매몰되지 않는 민주주의의 본질에 충실한 총장이 되시기를 희망한다.

 

총장은 제도의 민주적 운영과 구성원과의 적극적인 소통에 나서라!

 

2020.10.23.

교수회장 김한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