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가 좋아? 아빠가 좋아?

 

■ 들어가며

엄마가 좋아? 아빠가 좋아? 좋아하는 정도를 숫자로 말해봐. 92점? 91점? 말을 못 하겠어? 자 그럼 엄마 아빠에게 거는 주당 전화 횟수로 점수를 매기고 그 순위에 따라 용돈을 차등 지급하겠어(?). 보상금액의 차이가 커지면 커질수록 최초에 의도했던 사랑이란 본질은 온데간데없고 통화 횟수에만 집착한 편법이 기승을 부리게 된다.

부모와 자식 간의 통화 횟수는 의미 있는 자료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자료는 그저 소통이 많구나! 또는 적구나! 정도의 참고 자료로 활용해야지, 최초에 의도치 않은 목적 외 활용은 본질을 왜곡한다.


■ JCR Ranking과 성과급

 

기업 클래리베이트 애널리틱스는 매년 웹 오브 사이언스 Journal Citation Reports™(JCR)을 공개한다. 저널에 수록된 논문이 특정 년도에 인용된 빈도를 나타내는 임팩트팩터(JIF)와 피 인용된 빈도를 보여주는 즉시성 지수(Immediacy Index)를 기준으로 저널이 속해 있는 카테고리 내 순위를 발표한다.

이 순위 활용의 문제점을 살펴보자.


➀ JCR Ranking과 학문적 가치

이 지표는 학자 개개인의 연구 결과물의 학문적 가치를 평가한 수치가 아니라, 저널이 전 세계 도서관으로 팔려나가는 판매 부수라는 상업적 가치와 직접적인 상관관계를 가지는 수치이다. 학문적 가치는 유행과는 무관해도 큰 의미를 가질 수 있지만 상업적 가치는 유행에 더 민감하다.


➁ 학문의 다양성

민주주의의 다양성은 하나의 기준으로 줄 세우면 1등은 한 명이지만 기준이 다양해지면 모두가 1등이 될 수 있다. 다양한 능력의 극대화가 민주주의의 강점 중의 하나로 손꼽힌다. 학문의 다양성 또한 동일한 맥락에서 이해되어진다. 유행에 민감할 수밖에 없는 이 지수에의 지나친 집착은 학문적 편식 현상을 부채질한다.


➂ 국내 학술지의 고사

SCI의 활용이 심해질 무렵 국내의 한국어판 학술지는 거의 고사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국내 학회에서도 서둘러 영문판 저널을 발간했고 현재는 그나마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그러나 JCR 상위 Ranking에의 집착은 대부분 후발주자로 아직은 Ranking이 낮은 국내 영문판 학술지마저 모두 고사시키게 될 것이다.


➃ 철 지난 성과급

최근 수년간 미국의 마이크로소프트, 어도비 시스템, 익스피디아, 일본의 맥도날드, 미쓰이물산, 후지쯔 등 굴지의 기업들이 성과급제를 폐지했다. 성과 기반 급여는 단순·반복 업무에 효과적인 반면 비표준적이고 창의성을 요하는 업무에는 적합하지 않다. (매일노동뉴스 2021. 4. 21.) 성적 줄 세우기는 이미 초중등 교육기관에서도 사라진 지 오래이다. JCR Ranking이라는 형식적 목표가 지나치게 강조되면 관심과 열정이라는 본질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Ranking 그 자체가 목적이 되어 버린다. 성적 줄 세우기의 폐해를 한 번쯤 생각하게 하는 글이 있어 첨부합니다. (첨부파일: 서울대와_MIT의_차이.pdf)

 

■ 대학 평가


중앙일보, 조선일보, TIMES 등의 국내외 언론사에서는 해마다 대학평가를 진행한다. 교육과 연구의 본질에 대한 평가를 할 수 없기에 논문 수 또는 교수 수 등 수치화 가능한 외형적 요인들을 주로 평가한다. 그렇기에 이 평가들은 본질적인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런 평가를 무시할 수 없는 이유는 이 평가가 부산대학교의 사회적 평판도에 영향을 미치며 더 나아가 우리 학생들의 진로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순위 향상을 위한 대학 본부의 노력은 의미 있는 것이다.


조금 더 노력하는 사람에게 조금 더 보상하는 것은 언제나 정당하다. 그러나 숫자로 표준화할 수 없는 가치를 행정관리 목적상 숫자로 표준화하고 그 결과에 근거한 차등을 크게 하면 할수록 그 본질이 왜곡될 가능성 또한 커진다. 따라서 행정 관리의 목적상 필요하다면 할 수는 있겠으나, 그 결과에 따른 차등은 최소화 되어야 한다.


어떤 경우에도 동기는 필요하다. 연구에 있어 가장 중요한 관심과 열정에 어울리는 동기는 성과와 압박이 아니라 상생과 협력이란 키워드 속에서 고민되어야 한다.

 

■ 연구관리의 문제점

부산대학교에 연구처가 신설되었다. 대학에서 연구가 그만큼 중요하다는 의미일 것이다. 연구 정책에는 수도 없이 언급되어 온 많은 문제점이 있다. 그중 몇 가지만 되짚어보자.


➀ 연구 장비 관리방식의 문제

어떤 곳에선 연구 장비 위에 뽀얗게 먼지가 쌓여 가는데, 어떤 곳에선 2~3주씩 기다려야 한다. 이는 연구 장비 총액의 문제가 아니라 장비 관리의 효율성의 문제이다.


➁ 연구비 분배 방식의 문제

돌아서면 연구비를 따기 위한 계획서 작성, 연구를 좀 하나 싶다가도 또 돌아서면 수주한 연구비에 대한 보고서 작성 등 연구자의 상당수가 연구의 본질이 아닌 것에 너무 많은 시간과 열정을 낭비하고 있다. 이는 연구비 총액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이미 책정되어 있는 연구비 예산의 분배 방식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➂ 연구비 관리의 문제

연구비 항목 하나를 바꾸려 해도 많은 서류를 준비하고 허가받는 절차를 거치는 등 불필요한 서류 작업이 너무 많다. 연구비의 모든 항목에 세금계산서를 첨부하게 하고 횡령 여부를 철저히 관리하는 것만으로 족한 것이 아닌가.


➃ 연구 관리의 문제

현재의 위기를 돌파하고 우리 산업이 한 단계 더 도약하기 위한 해법은 긴 호흡으로 경험을 쌓아가기 위한 축적의 시간을 어떻게 벌 것인가에 달려 있다. (이정동, 서울대학교) 창의라는 이름으로 또 중복이란 이름으로 축적의 시간을 싹부터 자르지 않는 긴 호흡의 연구관리 정책이 필요하다.


■ 나가며

 

우리나라 연구비의 대다수는 정부가 직접 관리하고 있어 대학이 독자적으로 펼 수 있는 연구 정책은 거의 없고 정부를 상대로 해내야 할 일만 산적하다. 물론 그 일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그렇다고 연구처가 구성원을 닦달하는 부서가 아니라, 올바른 연구관리 정책을 고민하고 정부의 정책 변화를 이끌어 내기 위해 보다 적극적으로 노력하는 부서가 되어 주길 희망한다.


구성원의 의사에 반하는 모든 정책은 사람이 바뀌면 원점으로 되돌아가는 허업(虛業)이 된다. 구성원의 견고한 지지를 바탕으로 한 정책만이 향후 부산대학 발전을 위한 초석이 될 수 있다. 우리 총장에게 위임된 수년의 시간이 그런 것이기를 희망한다.

 

유기소재시스템공학과 김한성 드림

 

인터넷에서 퍼온 글입니다. (출처 : https://instiz.net/pt/4134842)

--------------------------------------- 서울대와 MIT의 차이 ---------------------------------------

저는 서울대를 졸업하고 6년 전 MIT에 유학 와서 박사학위를 받고 지금은 미국에서 회사에 다니고 있습니다. 처음 1년 이곳에서 공부할 때 저는 제가 한국에서 대학 교육을 받은 것에 대해 약간의 자부심을 갖고 있었습니다. 주위의 많은 한국 유학생들이 서울대 과 수석 또는 서울대 전체 수석도 있고 한국 대학원생의 상당수가 서울대 출신이니까 미국 학생들을 바라보면서 그래 너희가 얼마나 잘났나 한번 해보자라는 생각마저 들었습니다. 한국에서 하던 대로 이곳에서도 한국 학생들이 시험은 아주 잘 보는 편입니다. 특히 한국 중고등학교에서 가르치는 수학의 수준이 미국의 그것보다 훨씬 높기 때문에 공대생들로서는 그 덕을 많이 보는 편이죠. 시험 성적으로 치자면 한국 유학생들은 상당히 상위권에 속합니다. 물론 그 와중에 한국 유학생들 사이에서 족보를 교환하면서까지 공부하는 친구들도 있습니다. 한번은 제가 미국인 학생에게 족보에 대한 의견을 슬쩍 떠본 일이 있습니다. 그랬더니 정색을 하면서 자기가 얼마나 배우느냐가 중요하지 cheating을 해서 성적을 잘 받으면 무얼 하느냐고 해서 제가 무안해진 적이 있습니다. (물론 미국인이라고 해서 다 정직하게 시험을 보는 것은 물론 아닙니다.)

어느덧 시험에만 열중을 하고 나니 1년이 금방 지나가버렸습니다. 이제 research 도 시작했고 어떤 방향으로 박사과정 research를 해나가야 할지를 지도교수와 상의해 정할 때가 왔습니다. 물론 명문대이니 만큼 교수진은 어디에 내놓아도 손색이 없습니다. 한국에서 교수님들이 외국 원서를 번역하라고 학생들한테 시킬 때 도대체 어떤 사람들이 이런 책을 쓸 수 있을까 의아하게 생각하던 바로 그 저자들과 만날 수 있다는 것은 굉장한 체험이었습니다. 과연 그런 사람들은 다르더군요. 태어나서 처음으로 아 과연 천재라는 것은 이런 사람들이구나 하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 사람들의 상상력과 창의력 앞에 존경심이 저절로 생겨났습니다. 그동안 제가 갖고 있던 미스터리가 풀렸습니다. 그동안 교과서에서만 보던 바로 그 신기하기만 하던 이론들을 만들어내고 노벨상도 타고 하는 사람들, 그런 정도가 되려면 이런 정도의 천재가 되어야 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때부터 걱정이 되었습니다. 과연 내가 얼마나 잘 할 수 있을까? 도대체 비밀이 무엇일까? 저런 사람들은 어떤 교육을 받았을까?

물론 지금까지 수업도 착실히 듣고 시험도 그런대로 잘 보고 해서 어느 정도 유학 생활에 자신감은 있었지만 이 부분에는 영 자신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세계 제일의 공과대학에서 이 정도 교수는 갖추고 있는 게 당연하고 나와는 다른 차원의 사람들이라는 식으로 위안을 삼았습니다. 주위에 있는 미국인 학생들을 보면서 그래도 내가 한국에서 어려운 교육도 받았고 (대학교 수학도 한국이 더 수준이 높습니다) 저 아이들보다는 잘할 수 있겠지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소름이 오싹 돋는 일이 자꾸 생겼습니다. 하나 둘씩 주위에 있던 몇몇 미국인 학생들이 점점 두각을 나타내면서 점점 더 어려운 문제를 해결해 나가고 벽에 부딪치면 새로운 길을 스스로 파헤쳐 나가는 등 저를 놀라게 하였습니다. 초기에 제가 미분기하학이란 이런 것이야라고 설명해 주던 미국 애가 이제는 제가 알아듣지 못하는 이론을 제게 설명해 줍니다. 뭐 그럴 수도 있지라고 처음에는 생각했습니다. 자기한테 맞는 분야를 잘 정했겠지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점점 더 많은 그런 케이스를 보면서 또 그들이 발전해 나가는 모습을 보면서 생각했습니다. 이들 중 몇 명이 내가 천재라고 생각하던 그런 교수님들처럼 되는 것이 아닌가. 바로 그랬습니다. 바로 그런 학생들이 그런 교수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때부터 왠지 슬퍼지더군요. 저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한국 유학생에게 넘을 수 없는 눈에 보이지 않는 어떤 장벽이 있음을 느꼈습니다. 우리나라 인구수로 따지자면 이미 노벨상 수상자가 여러 명 나왔어야 하고 우리나라 사람들의 교육열로 보면 이미 세계적 수준의 과학기술자가 전 세계에서 활약하고 있어야 할 시점에서 왜 한국에서 일류 교육을 받은 한국 유학생들이 MIT에서 기가 죽어 지내야 하는지 알 수 없었습니다. 학교 도서관에서 책만 읽어서는 그 이유를 알 수 없었습니다. 시간이 더 지나고 미국 친구도 사귀고 미국 사람들의 생활을 보면서 차츰 차츰 미국에서의 교육에 대하여 조금이나마 알게 되었습니다. 일단 갓난아기 때부터 한국과 미국의 교육이 달라지더군요. 우리나라에서는 부모가 감정적으로 때로는 분에 못이겨 매를 드는 반면, 이곳에서는 모든 것이 논리 정연하게 말로 설명이 되었습니다. 아이가 왜 안되느냐고 물어보면 그것은 이렇고 저래서 그렇다고 꼬치꼬치 자세하게 설명해주고, 투정을 부리면 온갖 기발한 계략으로 아이의 관심을 돌립니다. 부모가 항상 아이에게 말을 시키려 하고 자기 자신들이 그들의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삶의 지혜를 전해주려 노력합니다. 거의 대화가 없는 우리나라 가정과 꽤나 대조적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도 아이가 있지만 도저히 그들처럼 할 수 없습니다. 그런식으로 대대로 물려받은 몸에 밴 경험이 대부분의 우리나라 사람들과 저에겐 없기 때문입니다. 과연 이렇게 시작이 다른데 미국에서 애를 잘 키울 수 있을까 걱정이 듭니다. 그들이 학교에 가면 차이는 더 벌어집니다. 우리나라 학생들이 암기력과 약간의 사고력, 이해력의 계발에 중점을 두는 동안, 이곳에서는 창의력, 상상력, 사회성 등을 키워나갑니다. 바로 이런 것들이 거름이 되어 아까와 같은 천재들이 대학원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한마디로 우리나라 학생들이 남들이 만들어놓은 포장된 지식을 주입받는 동안, 이곳 학생들은 생각하는 법을 배웁니다. 자발적 참여 및 토론에 의한 학습, 스스로 탐구하는 학습, 작문력, 발표력, 논리적 사고가 중요시되는 교육을 받고 이들은 비록 미분 적분에 대하여 우리보다 늦게 배울망정 인생에서 창의력이 극대화되는 20대가 되면 어렸을 때 생각하는 법을 배웠기에 스폰지처럼 지식을 습득하고 새로운 것을 창조해나갑니다. 이곳에 와서 한 가지 더 놀란 것은 미국 사람들의 호기심입니다. 새로운 것을 알고 싶어 하는 열정이 우리나라 사람의 몇 배는 되어 보였습니다. 우리나라에서 금속활자, 물시계, 해시계 등을 발명해 놓고도 더 발전 시키지 않고 있는 동안, 서양에서는 만유인력의 법칙을 발견하였고 이를 발전시켜 결국 오늘날의 과학기술로 바꾸어놓았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유치하다고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았을 automaton (자동인형 - 태엽 등의 힘으로 스스로 정해진 순서에 따라 움직임) 이 유럽에서는 이미 수백 년 전에 유행하여 자동으로 연주되는 피아노, 날갯짓하며 헤엄치는 백조, 글씨 쓰는 인형 등 갖가지 기발한 발명품이 쏟아져 나왔고 바로 이것으로부터 발전하여 나온 것이 자동으로 계산하는 기계, 즉 컴퓨터입니다. 제가 미국 친구들을 집에 초대하여 조금이라도 신기한 것을 보여주면 이것은 어떻게 만들었느냐 무슨 원리로 동작하느냐는 등 질문을 쏟아붓습니다. 심지어 하수구를 고치러 온 미국 사람도 똑같은 관심을 보이면서 돈을 줄 테니 자기 아들을 위해 하나 만들어달라고 조르던 적도 있습니다. 반면 MIT의 박사과정 한국 유학생들은 시선이 1초 이상 머무르지 않고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고 술만 마십니다. 과연 우리가 세계를 주도해 나가는 과학기술 수준을 이룩할 수 있을까요? 우리가 단지 선진국이 되기 위해 또는 노벨상을 받기 위해 과학기술을 하기 싫지만 억지로 연구하는 동안 이곳에서는 너무나 좋아서 신기해서 알고 싶어서 과학기술을 연구하는 사람들이 너무도 많습니다.

자기가 하는 일이 좋아서 하는 사람들의 열정은 절대 따라갈 수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