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대학이 직면한 또 다른 위기
이전의 “부산대학이 직면한 위기”라는 글에서 국립대학 법 제정에 있어 재정지원 구체화의 중요성에 대해 언급하였다. 이번에는 훼손된 학문의 자유에 대해 살펴보자. 학문의 자유는 부당한 권력으로부터의 자유와 자본과 시장으로부터의 자유로 나눌 수 있다. 오늘은 자본과 시장으로부터의 자유에 대해 생각해보자.
■ 자본과 시장으로부터의 자유
대학의 교육 및 연구 활동에 관련된 제도는 학문 탐구라는 본질을 강화하기도 왜곡하기도 하는 매우 중요한 정책의 하나이다.
❶ 성과급
1) 의무감에 연구하는 곳
창의적 학문 탐구를 무리하게 수치화하고 이를 근거로 차등 보상하면 관심과 열정에 기반한 자유롭고 창의적인 연구 활동의 본질은 왜곡되고 평가기 준을 충족시키기 위한 온갖 편법이 기승을 부리게 된다.
학문 그 자체를 목적으로 두지 않고 학문을 굳이 생계 수단으로 전락시키는 대학 정책의 강제는 학문의 자유를 심각하게 훼손하고 그에 따른 부작용은 상당히 오랜 기간 지속된다.
대학의 교육 및 연구 활동과 그에 따른 보상 체계(교연비 등 성과급)는 대학의 고유한 학풍을 형성하는 중요한 정책의 하나이다.
2) 전국에 획일적 평가 체계 구축
전국의 모든 대학에 획일적인 평가 및 보상체계가 강제되면 다양성에 기반한 대학 고유의 창의적 학풍이 형성될 여지가 없어진다. 이처럼 획일화된 규제는 창의가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던 개도국 시절의 모방경제에는 유효한 정책이었을 수도 있지만, 창의와 소통이 중요한 4차 산업혁명 시대의 경쟁력은 다양성에서 시작된다.
❷ 실험·실습비를 포함한 기본연구비 (이전에 언급했던 내용)
교수가 개인적으로 연구비를 수주해 오지 않으면 실험·실습 교육 및 이에 필요한 최소한의 기본 연구조차 수행하기 어려운 기형적 국립대학 재정구조는 교수와 학생 모두의 학문의 자유를 심각하게 훼손한다.
연구재단의 자료에 따르면 전국 이공계열 교수 1인당 평균 연구비는 1억 4148만 원이다. 추가 예산 확보 없이도 이 금액의 일부만으로도 국립대학의 교육과 연구를 위해 필요한 최소한의 기본연구비가 배정될 수 있다. 그럼에도 이런 최소한의 기본경비의 마련은 도외시되고 경쟁 방식의 연구비만 지속적으로 키워져왔다. 또 이렇게 마련된 연구비의 상당 부분은 수도권 사립대로 배정되고 있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국가가 설립한 교육기관에서 교육과 연구를 위해 필요한 기본경비는 교수 개인의 선택사항이 아니라 국가의 당연한 의무이어야 한다.
❸ 지나치게 소모적인 경쟁
1) 지나친 경쟁
재원이 많이 부족했던 시절 부족한 연구비를 둘러싼 치열한 경쟁은 불가피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교수 1인당 평균 연구비를 감안하면, 총액을 늘리지 않고 연구비 배정 방식의 변경만으로도 이 문제는 상당 부분 해결된다.
경쟁을 통한 수주라는 연구비 관리 방식 자체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과제 수와 과제당 선정 인원에 문제가 있다.
과제당 선정 인원을 대폭 줄이고 과제 수를 늘려 놓으면 배정되는 연구비의 총액이 변함없어도 구성원 대다수가 지나친 경쟁에 시달리게 된다. 과제 수를 줄이고 과제당 선정 인원을 늘리면 총액은 동일해도 경쟁률은 훨씬 낮아지고, 교수들은 학문해야 할 시간을 지나치게 빼앗기지 않고 조금 더 학문에 전념할 수 있는 자유를 누릴 수 있게 된다.
2) 항상 새로운 주제
경쟁이 치열해지면 한 우물을 파는 연구의 섬세한 창의성은 경시되고 또 중복연구로 치부되기 십상이다. 반면 매번 새로운 주제가 선정될 확률이 더 높아진다. 하나의 주제에 천착한 깊이 있는 연구를 할 학문의 자유는 훼손되고, 「일만 시간의 법칙」이나 「축적의 시간」은 한낱 구호에 그치기 십상이다.
지나치게 소모적인 연구비 수주 경쟁은 누구에게도 득이 되지 않는다. 지금 당장은 몰라도 장기적으론 자본과 시장의 경쟁력 강화에도 역행한다.
❹ 필연적 결과
우리나라의 GDP 대비 연구개발비는 세계 최고 수준이며, 매년 수많은 논문이 쏟아져 나오고, 반도체·원자력·조선·자동차·전자 등 첨단산업의 제조 강국임에도 불구하고, 원천 기술의 부족으로 매년 선진국에 로열티를 지불 하고, 100년 가는 장수기업이 턱없이 부족하고, 아직도 노벨상 수상자가 없음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첨부파일 참조 (서울대와 MIT의 차이.pdf ).
■ 국립대학 법 제정
대학의 자율성은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보장된다. (헌법 31조)
대학의 자율은 원칙적으로 허용되고 예외적으로 금지하는 형태로 운용되는 것이 마땅하나, 실상은 원칙적으로 금지되고 예외적으로 허용된다.
그럼에도 상위법인 헌법에 명시된 대학 자율의 구체적인 내용을 담은 독립적인 하위법이 제정된 적이 없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하위법인 고등교육법 제5조(교육부 장관의 지도ㆍ감독 권한)에 따라 상위법인 헌법에 규정된 대학의 자율은 원천적으로 차단된다.
따라서 지금 준비 중인 국립대학 법이 재정지원의 구체화와 더불어 학문의 자유에 대한 법률적 구체화의 첫 삽이 되기를 희망한다.
■ 나가며
대학 관련 모든 정책을 대학만의 자율로 둘 순 없겠지만 대학의 자율 중 학문의 자유와 관련된 정책의 결정권은 오롯이 대학에 주어지고, 정부의 연구비 관리정책의 결정에 있어 대학의 공적 목소리의 반영을 의무화하는 것이 학문의 자유와 대학의 자율을 규정한 헌법정신의 준수를 위한 최소한의 노력이다.
국립대학 법의 제정에는 국립대학의 목소리가 가장 중요하다.
고등교육법, 교육공무원법 등에 흩어져 있는 법안을 한곳에 모으는 일만 해도 결코 만만치 않다.
그러나 이왕에 제정되는 국립대학 법이 허울뿐인 것이 되지 않도록 대학 본부는 구성원의 의견을 충분히 담은 목소리의 적극적인 개진에 힘써 주실 것을 다시 한번 부탁드린다.
인터넷에서 퍼온 글입니다. (출처 : https://instiz.net/pt/4134842)
--------------------------------------- 서울대와 MIT의 차이 ---------------------------------------
저는 서울대를 졸업하고 6년 전 MIT에 유학 와서 박사학위를 받고 지금은 미국에서 회사에 다니고 있습니다. 처음 1년 이곳에서 공부할 때 저는 제가 한국에서 대학 교육을 받은 것에 대해 약간의 자부심을 갖고 있었습니다. 주위의 많은 한국 유학생들이 서울대 과 수석 또는 서울대 전체 수석도 있고 한국 대학원생의 상당수가 서울대 출신이니까 미국 학생들을 바라보면서 그래 너희가 얼마나 잘났나 한번 해보자라는 생각마저 들었습니다. 한국에서 하던 대로 이곳에서도 한국 학생들이 시험은 아주 잘 보는 편입니다. 특히 한국 중고등학교에서 가르치는 수학의 수준이 미국의 그것보다 훨씬 높기 때문에 공대생들로서는 그 덕을 많이 보는 편이죠. 시험 성적으로 치자면 한국 유학생들은 상당히 상위권에 속합니다. 물론 그 와중에 한국 유학생들 사이에서 족보를 교환하면서까지 공부하는 친구들도 있습니다. 한번은 제가 미국인 학생에게 족보에 대한 의견을 슬쩍 떠본 일이 있습니다. 그랬더니 정색을 하면서 자기가 얼마나 배우느냐가 중요하지 cheating을 해서 성적을 잘 받으면 무얼 하느냐고 해서 제가 무안해진 적이 있습니다. (물론 미국인이라고 해서 다 정직하게 시험을 보는 것은 물론 아닙니다.)
어느덧 시험에만 열중을 하고 나니 1년이 금방 지나가버렸습니다. 이제 research 도 시작했고 어떤 방향으로 박사과정 research를 해나가야 할지를 지도교수와 상의해 정할 때가 왔습니다. 물론 명문대이니 만큼 교수진은 어디에 내놓아도 손색이 없습니다. 한국에서 교수님들이 외국 원서를 번역하라고 학생들한테 시킬 때 도대체 어떤 사람들이 이런 책을 쓸 수 있을까 의아하게 생각하던 바로 그 저자들과 만날 수 있다는 것은 굉장한 체험이었습니다. 과연 그런 사람들은 다르더군요. 태어나서 처음으로 아 과연 천재라는 것은 이런 사람들이구나 하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 사람들의 상상력과 창의력 앞에 존경심이 저절로 생겨났습니다. 그동안 제가 갖고 있던 미스터리가 풀렸습니다. 그동안 교과서에서만 보던 바로 그 신기하기만 하던 이론들을 만들어내고 노벨상도 타고 하는 사람들, 그런 정도가 되려면 이런 정도의 천재가 되어야 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때부터 걱정이 되었습니다. 과연 내가 얼마나 잘 할 수 있을까? 도대체 비밀이 무엇일까? 저런 사람들은 어떤 교육을 받았을까?
물론 지금까지 수업도 착실히 듣고 시험도 그런대로 잘 보고 해서 어느 정도 유학 생활에 자신감은 있었지만 이 부분에는 영 자신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세계 제일의 공과대학에서 이 정도 교수는 갖추고 있는 게 당연하고 나와는 다른 차원의 사람들이라는 식으로 위안을 삼았습니다. 주위에 있는 미국인 학생들을 보면서 그래도 내가 한국에서 어려운 교육도 받았고 (대학교 수학도 한국이 더 수준이 높습니다) 저 아이들보다는 잘할 수 있겠지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소름이 오싹 돋는 일이 자꾸 생겼습니다. 하나 둘씩 주위에 있던 몇몇 미국인 학생들이 점점 두각을 나타내면서 점점 더 어려운 문제를 해결해 나가고 벽에 부딪치면 새로운 길을 스스로 파헤쳐 나가는 등 저를 놀라게 하였습니다. 초기에 제가 미분기하학이란 이런 것이야라고 설명해 주던 미국 애가 이제는 제가 알아듣지 못하는 이론을 제게 설명해 줍니다. 뭐 그럴 수도 있지라고 처음에는 생각했습니다. 자기한테 맞는 분야를 잘 정했겠지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점점 더 많은 그런 케이스를 보면서 또 그들이 발전해 나가는 모습을 보면서 생각했습니다. 이들 중 몇 명이 내가 천재라고 생각하던 그런 교수님들처럼 되는 것이 아닌가. 바로 그랬습니다. 바로 그런 학생들이 그런 교수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때부터 왠지 슬퍼지더군요. 저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한국 유학생에게 넘을 수 없는 눈에 보이지 않는 어떤 장벽이 있음을 느꼈습니다. 우리나라 인구수로 따지자면 이미 노벨상 수상자가 여러 명 나왔어야 하고 우리나라 사람들의 교육열로 보면 이미 세계적 수준의 과학기술자가 전 세계에서 활약하고 있어야 할 시점에서 왜 한국에서 일류 교육을 받은 한국 유학생들이 MIT에서 기가 죽어 지내야 하는지 알 수 없었습니다. 학교 도서관에서 책만 읽어서는 그 이유를 알 수 없었습니다. 시간이 더 지나고 미국 친구도 사귀고 미국 사람들의 생활을 보면서 차츰 차츰 미국에서의 교육에 대하여 조금이나마 알게 되었습니다. 일단 갓난아기 때부터 한국과 미국의 교육이 달라지더군요. 우리나라에서는 부모가 감정적으로 때로는 분에 못이겨 매를 드는 반면, 이곳에서는 모든 것이 논리 정연하게 말로 설명이 되었습니다. 아이가 왜 안되느냐고 물어보면 그것은 이렇고 저래서 그렇다고 꼬치꼬치 자세하게 설명해주고, 투정을 부리면 온갖 기발한 계략으로 아이의 관심을 돌립니다. 부모가 항상 아이에게 말을 시키려 하고 자기 자신들이 그들의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삶의 지혜를 전해주려 노력합니다. 거의 대화가 없는 우리나라 가정과 꽤나 대조적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도 아이가 있지만 도저히 그들처럼 할 수 없습니다. 그런식으로 대대로 물려받은 몸에 밴 경험이 대부분의 우리나라 사람들과 저에겐 없기 때문입니다. 과연 이렇게 시작이 다른데 미국에서 애를 잘 키울 수 있을까 걱정이 듭니다. 그들이 학교에 가면 차이는 더 벌어집니다. 우리나라 학생들이 암기력과 약간의 사고력, 이해력의 계발에 중점을 두는 동안, 이곳에서는 창의력, 상상력, 사회성 등을 키워나갑니다. 바로 이런 것들이 거름이 되어 아까와 같은 천재들이 대학원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한마디로 우리나라 학생들이 남들이 만들어놓은 포장된 지식을 주입받는 동안, 이곳 학생들은 생각하는 법을 배웁니다. 자발적 참여 및 토론에 의한 학습, 스스로 탐구하는 학습, 작문력, 발표력, 논리적 사고가 중요시되는 교육을 받고 이들은 비록 미분 적분에 대하여 우리보다 늦게 배울망정 인생에서 창의력이 극대화되는 20대가 되면 어렸을 때 생각하는 법을 배웠기에 스폰지처럼 지식을 습득하고 새로운 것을 창조해나갑니다. 이곳에 와서 한 가지 더 놀란 것은 미국 사람들의 호기심입니다. 새로운 것을 알고 싶어 하는 열정이 우리나라 사람의 몇 배는 되어 보였습니다. 우리나라에서 금속활자, 물시계, 해시계 등을 발명해 놓고도 더 발전 시키지 않고 있는 동안, 서양에서는 만유인력의 법칙을 발견하였고 이를 발전시켜 결국 오늘날의 과학기술로 바꾸어놓았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유치하다고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았을 automaton (자동인형 - 태엽 등의 힘으로 스스로 정해진 순서에 따라 움직임) 이 유럽에서는 이미 수백 년 전에 유행하여 자동으로 연주되는 피아노, 날갯짓하며 헤엄치는 백조, 글씨 쓰는 인형 등 갖가지 기발한 발명품이 쏟아져 나왔고 바로 이것으로부터 발전하여 나온 것이 자동으로 계산하는 기계, 즉 컴퓨터입니다. 제가 미국 친구들을 집에 초대하여 조금이라도 신기한 것을 보여주면 이것은 어떻게 만들었느냐 무슨 원리로 동작하느냐는 등 질문을 쏟아붓습니다. 심지어 하수구를 고치러 온 미국 사람도 똑같은 관심을 보이면서 돈을 줄 테니 자기 아들을 위해 하나 만들어달라고 조르던 적도 있습니다. 반면 MIT의 박사과정 한국 유학생들은 시선이 1초 이상 머무르지 않고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고 술만 마십니다. 과연 우리가 세계를 주도해 나가는 과학기술 수준을 이룩할 수 있을까요? 우리가 단지 선진국이 되기 위해 또는 노벨상을 받기 위해 과학기술을 하기 싫지만 억지로 연구하는 동안 이곳에서는 너무나 좋아서 신기해서 알고 싶어서 과학기술을 연구하는 사람들이 너무도 많습니다.
자기가 하는 일이 좋아서 하는 사람들의 열정은 절대 따라갈 수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