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이야기] 약현(藥峴), 순교자의 피가 스며든 서소문 밖 첫 언덕

게시자: 알 수 없는 사용자, 2013. 10. 21. 오전 1:54
선주성 시티스토리 편집장   강지혜 조선비즈 인턴기자 | 2013.06.15 ChosunBiz.com

조선시대 사람들이 소의문(昭義門·서소문) 나가 처음 만나는 언덕, 숭례문(崇禮門·남대문) 나가 아현(阿峴·애오개)으로 갈 때 만나는 첫 언덕. 조선시대 약현(藥峴) 또는 약전현이라 불린 곳이다. 고산자(古山子) 김정호(金正浩)의 ‘수선전도(首善全圖)’에도 그 표시가 있다. 약현이라는 이름이 붙은 이유는 이곳에 약초를 재배하는 밭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전해진다. 


이곳에 1892년 우리나라에 지어진 최초의 서양식 교회건축인 ‘약현성당’이 그 이름의 흔적을 이어가고 있다. 약현 높은 곳에 있는 약현성당에서 숭례문 쪽을 바라보면 염천교길이 직선으로 뻗어 있고, 그 끝에 숭례문의 정면이 비스듬하게 보인다. 큰 건물이 들어서기 전에는 서소문과 성곽 안까지 시야가 탁 트여 있었다. 1960년대까지만 해도 숭례문이나 서소문로로 서울을 나가는 사람들은 멀지 않은 높은 언덕에 세워진 약현성당을 항상 볼 수 있었다.
1910년대 약현성당과 주변 마을 모습. 성당이 서 있는 약현의 모습이 잘 드러나난다. 사진 왼쪽으로 보이는 만리재 언덕 사이에 약현으로 오르는 지금의 중림로 옛 모습도 보인다. /사진=약현성당 제공
 1910년대 약현성당과 주변 마을 모습. 성당이 서 있는 약현의 모습이 잘 드러나난다. 사진 왼쪽으로 보이는 만리재 언덕 사이에 약현으로 오르는 지금의 중림로 옛 모습도 보인다. /사진=약현성당 제공

서소문로를 따라 2호선 충정로역 방향으로 가면 경의선 기찻길인 서소문 건널목이 나온다. 기차가 지날 때 ‘땡 땡 땡’ 경보음이 울리며 차단기가 내려온다. 서울 중심부에서 보기 힘든 정취다. 건널목 지나 서소문공원이 있고 바로 언덕이 시작된다. 약현이라 불린 곳이다. 행정명으로는 중림동이다. 약현은 북쪽으로 서소문로, 동쪽으로 현재 한국경제신문사 앞 청파로, 서쪽으로 충정로역 5번 출구에서 서울역 서부교차로로 이어지는 중림로 사이 삼각형을 이루는 지형이다.

한국경제신문사 앞 청파로를 따라 야채, 생선 좌판이 이어진 길거리 시장이 제법 북적인다. 시장 중간에 있는 서소문로6길에도 야채 가게, 정육점, 기름집 풍경이 계속된다. 이곳이 약현성당 뒷쪽 성요셉 아파트 언덕 골목이다. 40년 넘게 이곳에서 장사를 한 고일남(67)씨는 “시장이 한창 잘 될 때는 약현 언덕 끝까지 사람들로 꽉 차 지나다니기 어려울 정도였다”고 말했다.

약현 지역에서 가장 잘 알려진 건물은 약현성당. 드라마 촬영지로 자주 등장했기 때문이다. 아이리스(2009), 제빵왕 김탁구(2010) 등 유명 드라마가 약현성당의 모습을 담았다. 오는 8월 방송 예정인 SBS 드라마 ‘주군의 태양’도 지난 4일 본당에서 촬영했다. 한명숙(49) 약현성당 사무장은 “색유리를 통해 성전 안으로 들어오는 빛과 나무 바닥이 중세 수도원의 느낌을 자아낸다”고 말했다.

‘수선전도(首善全圖)’의 약현과 지금의 중림동 / 그래픽=최지웅 연결지성센터 연구원
 ‘수선전도(首善全圖)’의 약현과 지금의 중림동 / 그래픽=최지웅 연결지성센터 연구원
하지만 약현성당은 역사성과 건물의 의미가 더 깊다. 약현성당은 명동성당보다 6년 일찍 지어진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성당으로 사적 제252호 문화재다. 1801년 신유박해부터 1866년 병인박해까지 100여 명의 천주교인이 처형되어 순교성지가 된 서소문공원을 바라보는 언덕에 세워졌다. 청파로를 따라 서울역 방향으로 가면 길거리시장 거의 끝부분 오른쪽으로 약현성당 정문이 나온다. 그 뒤로 이어진 언덕이 서소문 순교자 기념관과 성당 본당에 가는 길이다.

약이 많지 않았던 시절 종기치료제의 대명사 ‘이명래 고약’도 약현에 있었다. 이명래 고약은 1906년 프랑스 선교사에게 서양 약학을 배운 고(故) 이명래 선생이 개발한 종기 치료제다. 치료 효과가 뛰어나 연간 70~80만포가 팔릴 정도로 인기가 많았다.
현재 중림로의 모습. 사진 왼쪽이 만리재, 오른쪽이 약현이다. /사진=강지혜 조선비즈 인턴기자
 현재 중림로의 모습. 사진 왼쪽이 만리재, 오른쪽이 약현이다. /사진=강지혜 조선비즈 인턴기자
중림동 약현성당 근처에 있던 이명래 진료소는 해방 이후 애오개(현재 종근당 자리)에 정착했다. 70년대 말 충정로3가로 자리를 옮겨 2011년까지 있었다. 지금은 임재형(70)씨가 3대 째 명맥을 이어오고 있지만, 맥이 끊길 위기에 놓였다. 임씨는 “건강상의 이유로 휴업 중이라 진료를 하지 않는다”며 “명래한의원의 맥을 이을 사람을 찾고 있다”고 말했다.

최근 많은 사람이 서울성곽 답사를 하고 있다. 남대문~서소문을 지날 때 역사적 정취와 옛 추억을 느끼고자 한다면, 남대문에서 염천교를 지나 약현을 둘러보고 다시 서소문터로 향하는 코스를 추천할 만하다. 빌딩 속에 갇힌 성곽구간을 벗어나보는 것이다. 배낭을 봇짐 삼고 옛 서울의 모습을 상상하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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