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이야기] 한양도성 밖 동쪽 최고의 명당, 선농단(先農壇)

게시자: 알 수 없는 사용자, 2013. 10. 21. 오전 1:49
선주성 시티스토리 편집장 | 2013.07.29 ChosunBiz.com

서울 제기동 선농단이 있는 마을 입구에 들어서자 넓은 대지에 잘 지은 2층 주택들이 줄지어 있었다. 집장사들이 똑같이 찍어낸 형태가 아닌 각각이 품격과 개성을 갖춘 집들이었다. 야트막한 남향 언덕에 가지런히 들어선 집들과 조용한 골목길의 포근함은 “이곳에서 살고 싶다”는 생각을 저절로 불러 일으켰다. 성북동, 평창동, 장충동,한남동, 연희동 등 서울의 간판 고급 주택가와는 달리 잘 알려지지 않은 선농단 일대가 이처럼 좋은 느낌을 주는 이유는 바로 선농단에서 찾을 수 있다.
선농단 입구 서울대학교 사범대학터 표지석이 있는 느티나무. 오른쪽 길로 가면 선농단이다. 조용하고 품격 있는 마을 분위기가 인상적이다. 사진=선주성 시티스토리 편집장
 선농단 입구 서울대학교 사범대학터 표지석이 있는 느티나무. 오른쪽 길로 가면 선농단이다. 조용하고 품격 있는 마을 분위기가 인상적이다. 사진=선주성 시티스토리 편집장
조선 건국 초, 개경에서 한양으로 도읍을 옮기고 고려시대부터 계속 이어진 선농제(先農祭)를 지낼 장소로 정한 곳이 바로 선농단이 위치한 제기동 일대였다. 선농제는 ‘농사가 천하의 근본(農者天下之大本)’임을 강조하기 위해 왕이 선농단에서 매년 제사를 올리고 직접 농사일을 시범보이는 행사다. 

선농단은 설렁탕의 유래가 만들어진 곳으로 잘 알려져 있다. 하지만 농업이 국민총생산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2퍼센트도 안되는 현실을 반영하듯 선농단은 2001년 국가지정문화재 사적 제436호로 지정되었음에도 많은 사람들에게 잊혀진 곳이 되어가고 있다.

조선비즈 서울답사팀은 동대문에서 옛 관동대로 길을 따라 조선 왕들의 능행로를 밟으며 선농단을 방문했다. 선농단을 찾기는 쉬웠다. 신설동 교차로를 지나 동쪽으로 계속 가면서 용두동 사거리를 지나자 지하철 1호선 제기역 6번출구가 나왔다. 길을 건너 제기역 1번출구 앞 마을 길이 선농단 가는 길. 이 길로 접어들면 삼거리 가운데에 키 큰 느티나무를 만난다. 느티나무 아래에 서울대학교 사범대학터 표지석이 있다. 

서울대 사범대학은 일제시대 경성여자사범학교 건물과 교정을 이어받아 1954년부터 1975년 관악캠퍼스로 이전하기 전까지 이 곳 선농단 일대 약 3만평을 사용하고 있었다. 일제는 선농단 구역을 동양척식회사 자산으로 강제 편입시킨 후, 한국의 민족정신을 말살하기 위해 숭인보통학교(종암초등학교 전신)와 경성여자사범학교를 설립하고, 청량대(淸凉臺)라는 공원도 조성했다.
선농단 제단. 이곳에서 매년 곡우(양력 4월20일경) 무렵 선농제를 지낸다. 제단의 크기는 4m 정방형. 선농단은 평상시 잠겨 있어 방문하려면 동대문구청 문화체육과에 미리 연락해야 한다. 사진=선주성 시티스토리 편집장
 선농단 제단. 이곳에서 매년 곡우(양력 4월20일경) 무렵 선농제를 지낸다. 제단의 크기는 4m 정방형. 선농단은 평상시 잠겨 있어 방문하려면 동대문구청 문화체육과에 미리 연락해야 한다. 사진=선주성 시티스토리 편집장

사범대가 이전하면서 이 일대는 택지로 분할 분양되었다. 당초 계획은 선농단도 밀어내고 아파트단지를 조성하려고 했다고 한다. 이곳에서 30년 이상 살고 있는 선농단 보존위원회 이경장(75)위원장은 “당시 주민들의 반대가 거세자 200평 단위로 분양되어 고급 주택들이 들어서게 되었다”라고 말했다.   


느티나무 오른쪽 길을 따라 2~3분 걸어 올라 가면 언덕 위에 선농단이 자리하고 있다. 이 언덕은 제터고개라 불렸다. 제기동과 북쪽의 안암동 로터리 사이에 있는 나즈막한 고갯길로, 선농제를 지내던 선농단터가 있는 고갯길이라는 이름이다.


선농단에는 500년 이상 이 자리에 굳건히 서서 선농단의 역사를 지켜온 향나무(천연기념물 240호)는 아직도 왕성한 생명력을 자랑하고 있다. 이경장 위원장은 “이 향나무는 선농단을 조성하였던 성종7년(1476년)에 중국에서 선물한 어린 묘목을 심은 것”이라 말했다.


선농단 동쪽 모서리에 있는 제단은 4미터 정방형으로 복원한  것이다. 선농단에 올라서면 지금은 내부순환도로와 주변 높은 건물들로 인해 시야가 막혀있지만 수 십 년 전까지만 해도 멀리 청량리 일대까지 볼 수 있었다.  

 

선농단은 평상시 잠겨 있다. 관리인이 상주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안으로 들어가 둘러보려면 동대문구청 문화체육과에 미리 연락을 해야 한다.


선농단 안에 있는 수령 500년 이상된 향나무, 선농향(천연기념물제240호).  선농단 500년 역사를 지켜온 파수꾼이다. 사진=선주성 시티스토리 편집장
 선농단 안에 있는 수령 500년 이상된 향나무, 선농향(천연기념물제240호). 선농단 500년 역사를 지켜온 파수꾼이다. 사진=선주성 시티스토리 편집장
선농단 선농제에는 조선이 일본에 강제 병합되기 전까지 임금들이 매년 직접 참여하여 제를 지내고 직접 농사짓는 시범을 보였다. 조선의 마지막 임금 순종황제는 1910년 5월까지 선농단에서 선농제를 지냈다.

선농제는 농사를 처음 가르쳤다고 전해지는 신농(神農)씨와 후직(后稷)씨에게 제사 지내며 풍년을 기원하는 행사다. 매년 곡우 무렵(양력 4월 20일경) 소와 돼지 등을 제물로 바치며 선농제를 지낸 후, 제를 지낸 소고기로 탕을 끓여 백성들과 나누어 먹었다. 이 탕을 선농탕이라 하였는데, 시대가 지나면서 설렁탕으로 불리게 되었다. 또한 선농제를 지내던 이 동네를 제사를 지내는 터라는 의미로 ‘제기동(祭基洞)’이라고 하였다.


선농제를 지낸 임금은 선농단 인근의 밭에서 친히 농사짓는 시범을 보였다. 왕이 직접 농사짓는 땅을 적전(籍田)이라 하고, 왕이 농사짓는 것을 전농(典農)이라 하였다. 지금의 청량리역 인근에 있는 전농동의 이름은 왕이 직접 농사지었던 동네라는 뜻에서 유래한 것이다.

선농단과 선농제 보전을 위해 힘써 온 이경영(75) 선농단보전회 위원장은 “먹거리의 중요성은 더욱 더 커지기 때문에 선농단을 통해 농업의 의미를 되새길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사진=선주성 시티스토립 편집장
 선농단과 선농제 보전을 위해 힘써 온 이경영(75) 선농단보전회 위원장은 “먹거리의 중요성은 더욱 더 커지기 때문에 선농단을 통해 농업의 의미를 되새길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사진=선주성 시티스토립 편집장
 선농단의 역사와 의미를 되새기기 위해 역사문화공원으로 조성하기 위해 준비 중이다. 선농제는 일제 통치 이후 폐지되었다가 선농단보존회가 1979년부터 시행해 오고 있다. 1992년부터는 동대문구청과 함께 하며 농림부장관 등 농업관계자들이 참석하고 있다.

“아무리 전체 산업에서 비중이 떨어진다고 해도 농업은 천하의 근본이지요. 바른 먹거리 없이 사람들이 살 수 있나요.”  이경장 선농단보존회 위원장은 선농단과 선농제를 통해 국민들이 농업의 중요성을 인식해 주길 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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