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메일클럽] 종루에서 두모포까지 걷다

게시자: 알 수 없는 사용자, 2013. 10. 21. 오전 2:18


[이메일클럽] 종루에서 양화진묘지까지 걷다

게시자: 알 수 없는 사용자, 2013. 10. 21. 오전 2:17


[이메일클럽] 종루에서 안산 봉수대까지 걷다

게시자: 알 수 없는 사용자, 2013. 10. 21. 오전 2:16


[이메일클럽] 종루에서 인왕산 기차바위까지

게시자: 알 수 없는 사용자, 2013. 10. 21. 오전 2:15


[이메일클럽] 종루에서 숭례문까지

게시자: 알 수 없는 사용자, 2013. 10. 21. 오전 2:14


[이메일클럽] 종루에서 낙산공원까지 걷다

게시자: 알 수 없는 사용자, 2013. 10. 21. 오전 2:13


[이메일클럽] 서울성곽 암문을 통해 만해의 심우장을 만나다

게시자: 알 수 없는 사용자, 2013. 10. 21. 오전 2:12


[이메일클럽] 언덕위 남향집을 꿈꾸며 서울 성곽을 걷다

게시자: 알 수 없는 사용자, 2013. 10. 21. 오전 2:11


[서울이야기] 순라길-서민 정취가 풍기는 돌담길

게시자: 알 수 없는 사용자, 2013. 10. 21. 오전 1:58

선주성 시티스토리 편집장  김민철 조선비즈 인턴기자 | 2013.06.12 ChosunBiz.com

덕수궁 돌담길이 고급스러운 분위기의 길이라면 순라길은 서민 정취가 물씬 풍기는 예스러움 가득한 돌담길이다. 

조선 왕조 정통 가계, 이씨 왕가의 신주를 모신 곳 종묘. 종묘를 둘러싼 담장을 따라 형성된 길이 순라길이다. 순라(巡邏)는 조선시대 도둑과 화재를 막기 위해 돌던 야간 순찰을 뜻한다. 당시 순라군들은 밤 10시경부터 다음 날 새벽 4시까지 종묘와 궁중, 도성 둘레를 순찰했다. 그중에서도 유독 이곳이 순라길이라 불리는 이유는 동쪽 궁궐인 창덕궁 순찰을 담당했던 좌순청(左巡廳)이 지금의 종로 3가역 근처에 있었기 때문.
순라길은 종묘를 기점으로 서순라길과 동순라길로 나뉜다 / 그래픽=최지웅 연결지성센터 연구원
 순라길은 종묘를 기점으로 서순라길과 동순라길로 나뉜다 / 그래픽=최지웅 연결지성센터 연구원
지하철 1·3·5호선 종로 3가역 11번 출구로 나가 동대문 방향으로 150m를 걸으면 서순라길을 만날 수 있다. 개편된 주소 체계에 따르면 순라길은 종묘를 기준으로 동순라길과 서순라길로 나뉜다. 동순라길은 종묘 공원 입구에서 원남동 우체국까지 600m 거리다. 주차장과 빌딩을 지나면 작은 동네길이 나타난다. 자동차 한 대 지나다닐 정도의 좁은 길 왼쪽으로는 종묘 담장이 높은 옹벽 위에 있다. 종묘가 북악산 응봉 줄기의 끝자락 서쪽 경사면에 있기 때문에 담장이 높은 곳에 있는 것이다. 

도보 여행객들이 선호하는 길은 서순라길이다. 서순라길은 종묘 공원 입구에서 창덕궁 앞길인 율곡로까지 약 800m 거리이다. 율곡로에서는 돈화문 건너편에서 원남동 사거리 방향으로 가다 종묘 돌담길에서 접어들면 된다. 종묘 앞에 있는 종묘공원 입구에서 귀금속 상가를 지나 돌담길 초입에 들어서면 종묘 돌담의 고풍스러운 길이 시작된다. 은행나무와 느티나무 가로수가 3~4m 간격으로 열을 맞춰 서 있다. 주택가 쪽으로 이발소와 작은 식당, 보석 세공집들이 오밀조밀 모여 있다. 길가 탁자에 둘러앉은 노인들이 이야기 나누는 풍경은 마치 한적한 소도시 모습이다. 

길 안쪽으로 들어갈수록 예스러운 분위기가 더해진다. 종묘 돌담 너머로는 100년 된 갈참나무들이 검은색 담장 기와를 넘어와 큰 그늘을 드리우고 있다. 팔각 가로등과 돌의자가 어우러져 운치를 더한다. 허름한 구멍가게, 과학사, 상패(賞牌)사, 수리점이 있는 길 풍경은 80년대 동네 입구 모습과 비슷하다. 깨끗하게 잘 정비된 길과 돌담 위로 높이 솟은 참나무가 만들어 내는 그늘, 아직 자본의 욕망이 덜 침투한 듯한 동네 모습이 오가는 이들에게 한적함과 어우러져 도시 여행의 색다른 맛을 준다.
서순라길 초입 풍경/사진=김민철 조선비즈 인턴기자
 서순라길 초입 풍경/사진=김민철 조선비즈 인턴기자
이 길의 3분의 2 지점쯤에는 허영만의 만화 ‘식객’에 나오면서 유명해진 홍어 요리 전문점 ‘순라길’도 보인다. 길의 끝자락에는 공방과 갤러리가 드문드문 자리 잡았고, 오른쪽으로 쌈지 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순라길은 시대에 따라 이용하는 사람이 달랐다. 조선시대에는 양반과 내시들이, 일제 강점기에는 순사들이 지나다녔다. 해방 후에는 봇짐과 나무를 진 행상들이 드나들었다.

순라길은 한때 자취를 감출 뻔한 적이 있었다. 1950년대 후반 극심한 가난으로 이곳에 좀도둑이 들끓자, 정부에서 이 길을 막아버렸기 때문. 그 사이 주민들은 돌담 앞까지 집을 늘려나갔다. 

1973년부터 이곳에 살아온 윤장강(71) 할머니는 “처음 이사 왔을 때는 돌담과 벽 사이 거리가 채 1m가 되지 않았다”며, “돌담을 도배해서 벽처럼 쓰거나, 장독대를 올려놓는 뒷마당으로 썼다”고 말했다. 때문에 서순라길의 서쪽길인 지금의 율곡로 10길이 집으로 향하는 유일한 통로였다고 한다. 

40여년 간 이름만 전해지던 순라길이 현재와 같은 모습을 찾은 건 도로개설공사를 시작한 1995년. 종묘 돌담에서 주택가로 이어지는 작은 언덕 위 불법 점유물을 헐어내고 언덕을 깎아내 도로를 만들었다. 이 도로에 보도블록을 깐 인도와 1차선 일방통행로를 설치하였다. 1997년 순라길이 역사문화탐방로로 지정되면서 돌담이 복원됐다.
홍어 요리가 유명한 ‘순라길’/사진=김민철 조선비즈 인턴기자
 홍어 요리가 유명한 ‘순라길’/사진=김민철 조선비즈 인턴기자
서순라길 주변에는 봉익동(鳳翼洞)과 권농동(勸農洞)이 있다. 두 동네 모두 이곳에 많이 살았다고 전해지는 내시들과 관련이 있는 지명이다. 봉익은 ‘봉황의 날개’라는 말로 높은 곳 붙어 세도를 누리는 내시를 뜻하는 말이기도 하다. 조선 시대 권농동에는 궁중에서 필요한 채소를 기르는 내농포(內農圃)가 있었다. 이곳 관리를 궁중의 내시가 맡았다. 

현재 순라길 종로 쪽 입구 주변에는 귀금속 상가들이 운집해있다. 1970년대 중반, 순라길 건너 종로 4가 쪽 예지동 귀금속 상가가 포화 상태가 되면서 자연발생적으로 자리 잡기 시작한 것. 현재 종로3가 일대에는 약 3,500개에 가까운 귀금속 상점이 있다. 고풍스럽고 서민적인 순라길 탐방의 덤으로 귀금속 구경의 즐거움도 느낄 수 있다.

[서울이야기] 북창동길, ‘풍류의 거리’로 변신

게시자: 알 수 없는 사용자, 2013. 10. 21. 오전 1:55

허성준 기자   강지혜 인턴기자 | 2013.06.01 ChosunBiz.com

나라 곳간 있던 곳에서 유흥가의 대명사로, 지금은 관광특구로 재도약을 꿈꾸는 곳, 북창동. 그 중심지인 북창동길의 공식행정명은 남대문로 1길이다. 새 주소명 체계에 따르면 남대문에서 시작돼 종각사거리에서 끝나는 남대문로 북쪽 첫 번째 길이다. 새 주소 체계는 ‘로’ 또는 ‘대로’라 불리는 큰길의 서쪽에서부터 북쪽 길은 홀수로, 남쪽 길은 짝수로 번호가 매겨진다. 


북창동(北倉洞)의 명칭은 조선시대 선혜청(宣惠廳)의 북쪽 창고, 즉 북창이 있던 것에서 유래했다. 선혜청은 조선 중기 대동법 시행에 따른 쌀(대동미)과 베(대동포), 돈(대동전)을 관리하던 관청으로 지금의 숭례문 수입상가 자리에 있었다. 수입상가 입구에 표지석이 있다. 대동미로 녹봉을 받은 관리들은 주변 장터에서 옷감 등 생필품으로 교환했다. 이 시장이 확대돼 숭례문 근처에 큰 상권을 형성했다. 북창동도 그 중 하나였다.
▲ 남대문(숭례문) 수입상가 입구에 있는 선혜청 터 /사진=강지혜 조선비즈 인턴기자
 ▲ 남대문(숭례문) 수입상가 입구에 있는 선혜청 터 /사진=강지혜 조선비즈 인턴기자
북창동은 구한말 큰 변화를 겪는다. 1882년 임오군란을 계기로 청나라 상인들이 이곳에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북창동에는 이때부터 화교거리(차이나타운)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북창동길 주변은 1980년대 중반까지 155명 정도의 화교들이 식자재 도소매상, 중국집, 이발소 등을 운영하며 살아가던 서울 한복판의 마지막 차이나타운이었다. 현재도 그 흔적이 남아있다. 남대문로 쪽에서 북창동길로 들어서면 중국 식자재 도소매 상점 몇 곳이 장사를 하고 있다. 화교들이 이곳을 떠나게 된 이유에 대해 한성화교협회 관계자는 “화교들에 대한 정부의 억압 정책 때문”이라고 말했다.
▲ 옛 화교거리의 흔적을 볼 수 있는 중국 식자재 상점 /사진=강지혜 조선비즈 인턴기자
 ▲ 옛 화교거리의 흔적을 볼 수 있는 중국 식자재 상점 /사진=강지혜 조선비즈 인턴기자
북창동길이 현재의 모습을 갖추기 시작한 것은 1970~1980년대. 공화당사, 상공회의소 등 정치와 경제 조직체가 모여들었을 때부터다. 이때 북창동은 아침, 점심, 저녁으로 풍경이 달랐다. 새벽 4시부터 6시까지는 인력 시장이 열렸다. 남대문 등지에 일자리를 구하는 사람들이 차가 못 지나다닐 정도로 빼곡히 거리를 메웠다. 점심때가 되면 시청 근처 회사원들이 몰렸다. 저녁엔 술을 마시러 오는 직장인으로 붐볐다. 몰려드는 사람들로 북창동은 유명한 음식점골목, 유흥거리가 됐다.

북창동길은 1987년 6월 민주화 열기가 뜨거웠을 때 소위 ‘넥타이 부대’가 누비기도 한 길이다. 대통령 직선제 개헌 요구가 받아들여진 6월29일에는 상인들이 무료로 커피를 주기도 했다고 한다. 1980년대 중반 상공회의소에서 근무한 강철규(54)씨는 이때를 회상하며 “북창동 만두집들도 무료로 음식을 주고 완전히 축제 분위기였다”며 “평소보다 훨씬 많은 사람이 늦게까지 북창동에서 기쁨의 술잔을 기울였다”고 말했다.
▲ 밤 11시 30분의 북창동 거리 /사진=강지혜 조선비즈 인턴기자
 ▲ 밤 11시 30분의 북창동 거리 /사진=강지혜 조선비즈 인턴기자
북창동길에 ‘퇴폐’ 유흥업소가 물 밀듯이 들어선 것은 1990년부터 2000년 초반의 일이다. 이로 인해 북창동길은 지금도 ‘부정적인 이미지’를 못 벗고 있다. 북창지역관광특구협의회 민병렬(62) 회장은 “많을 땐 북창동 길에만 100개 이상의 업소가 있었다”며 “지금은 다 떠나고 10여개 정도밖에 없는 데 아직도 북창동을 유흥업소 거리로 생각하는 사람이 많아 피해를 보는 상인들이 많다”고 말했다.

현재 북창동길은 명동과 남대문 시장을 방문하는 외국인 관광객이 많이 들르면서 제2의 부흥기를 엿보고 있다. 이곳은 2000년 명동, 남대문과 함께 관광특구로 지정됐고 2012년에는 다동과 무교동까지 확장한 관광특구로 재조정됐다. 이 길 주변에는 올해만 8개의 관광호텔이 들어설 예정이다. 

민 회장은 “북창동은 퇴폐업소 밀집지역이라는 부정적 이미지를 벗고 관광명소로 거듭나고 있다”며 “북창동길이 외국인 관광객들이 많이 찾을 수 있는 ‘음식거리’·‘풍류거리’로 자리매김하기 위해 꾸준히 노력해 갈 것”이라고 밝혔다.
최지웅 조선비즈 연구원
 그래픽=최지웅 조선비즈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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