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pe Nicaragua
Updated Jan 24, 2012 5:40 PM
Sharing our mission work in Nicaragua with you!
Use template


Matthew's Monthly


토요일, 12월10일,2011

목회자 훈련회



올해에도 감사해야 할 것이 너무 많다. 무엇보다도 딸 둘이 같은 대학에서 함께 대학 생활을 한다는 것이다. 둘째라서 그런지 대학에서 잘 적응할까 하는 걱정이 있었는데, 같은 대학으로 진학을 하여서 걱정거리를 덜어 주셨다. 그런 것까지 섬세하게 돌보아 주시고 인도해 주심에 감사하다. 

무숙자 센터에 아동 돌봄 센터를 시작한 것도 감사하다. 사랑이 많으신 선생님들을 모시고 지역 아이들에게 꼭 필요했던 사랑을 나누어 줄 수 있었다는 것도 감사하다. 요즘에는 방학기간이라서 그런지 40명 이상의 아동들이 찾아 온다. 말씀과 사랑으로 그들의 영과 혼을 살찌우는 사역이다. 날마다 먹임으로 육신의 배고픔을 해결해 준다. 어려서 받지 못한 사랑을 채우기 위해서 자라면서 마약과 매춘, 임신 등으로 인생을 저버리는 일이 없기를 바랄 뿐이다.

목회자 훈련원 사역의 열매도 귀하다. 지난 토요일에 11명이 수료식을 가졌다. 엘파라이소 지역의 목사님들과 교회 지도자들의 연장 교육 형식으로 시작했었다. 마나구아에서 교수들을 초청해서 시작한 작은 모임이었지만 생각보다 참석하신 분들의 열심에 감동했다. 25명으로 시작해서 11명의 수료자가 생긴 것은 기대 밖의 큰 결실이다. 일년의 기간을 성실과 열심으로 참석해 주신 목회자들에게, 그리고 멀리 마나구아에서 찾아와 섬겨주신 모든 분들이게 감사할 뿐이다. 

내년에도 다시 했으면 좋겠다는 참석자들의 부탁으로 대표격인 목회자들과 교수(선생님) 두 분이 함께 모여 계획을 잡아 봤다. 더 많은 분들에게 기회를 제공하고자 하는 의도로 장소를 마나구아로 옮기기로 결정을 했다. 그리고, 훈련 프로그램 참석 예상자의 수를 이리 저리 알아 봤더니 60명 이상이 참석하실 수 있다고 하신다. 니카라과 백성들의 마음이 원래 선해서 전구 선교사의 귀에 듣기 좋으라고 말씀하신 것이라 생각되지만 60명 이상이라면 적지 않은 수다. 1월 14일로 계획된 준비 모임을 갖고, 2월부터 새 학기가 시작된다.

니카라과 땅에서 목회자 훈련은 귀한 사역이다. 나라의 평균 교육 수준이 초등학교 4학년이다. 특별히 시골에서 사는 사람들의 수준은 더 열악하다. 목회자들의 교육 수준이 일반인들의 평균 교육 수준 이상일 것이라고 예상하더라도 고등학교 졸업자가 많지 않다는 것은 쉽게 짐작이 된다. 그렇기에 신학교의 문턱에도 가보지 못하신 분들이 90프로 이상이다. 그런 상황에서 일반 교육 과정을 완료한 후에나 받아 주는 신학 대학은 목회를 꿈꾸는 일반 성도들에게는 구름잡기와 같이 비현실적이다. 더군다나 대학 과정을 완수한 후 입학 허가가 되는 신학원은 생각 조차도 할 수 없다. 그래서 목회자 훈련원과 같은 목회자 비정규 신학 교육 기관의 필요가 크다. 

‘하나님의 일에 무슨 자격이 필요합니까? 믿음과 열정, 그리고 소명만 확실하면 되지…’ 라고 주장하시는 분의 의도는 충분히 이해가 된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런 사람들도 사용하셨다. 반면에 신학적, 성서적, 목회적 훈련의 부재로 인하여서 발생하는 목회 현장의 부작용와 교회의 아픔 또한 무시할 수 없다. 

올해 2011년의 사역을 돌아 보며 ‘모두 주님이 이루셨으니 주님이 영광 받으소서’ 라는 감사의 손을 높이 올려 사랑의 아버지를 찬양한다.

금요일, 10월 28, 2011

Tranquilo - 트랑킬로


니카라과에 비가 쏟아 부은지 4일째 되었다. 동쪽 에 태풍이 오고 있나 보다. 동쪽 해안으로 태풍이 올 때마다 서로 약속을 했듯이 서쪽에는 몇 일동안 비가 쏟아진다. 이럴 때면 무숙자 식구들이 걱정된다. 특별히 연세가 있으신 분들이 걱정된다. 어디서 밤을 보내실까? 우기가 찾아 올 때마다 늘 걱정하지만 아무 것도 하지 않는 (또는 할 수 없는) 내 자신에 대해 속상할 뿐이다. 몇일 동안 어린이 인성 교육 센터의 아이들도 보이지 않는다. 소낙비가 오면 대부분의 아이들이 결석한다. 삼십 명까지 오던 아이들이 겨우 대여섯 명의 아이들만 찾아 온다. 

마나구아가 수도이지만 하수도 시설 등등 기반 시설이 열악한 나라다. 그래서 큰 사고를 격을 수있는 경우가 생기기 때문이다. 그래서 장마비가 쏟아지면 아이들은 학교 조차도 가지 않는 것이 일반이다. 이런 때에는 으슬으슬한 추위(시원함?)에 감기로 고생하는 사람들도 즐비 하다. 자연을 거스를 수 없는 인간의 연약함과 한계를 다시금 인정케 한다. 반면에, 비가 와서 감사 한 것들도 있다. 일년 내내 더운 니카라과에서 가끔 시원함을 느낄 수 있어서 감사하다. 덕분에 선교 클리닉도 바뻐서 감사하다. 감사와 평안는 이곳 니카라과의 형제들이 나에게 가르쳐 준 큰 인생의 교훈이다. 니카라과 사람들은 보고 있으면 절로 이런 질문을 하게 된다. “어떻게 저런 상황 속에서도 기쁨과 감사함 가운데 평강을 유지 할 수 있을까?” 

평안을 사랑하는 니카라과 백성들은 “Tranquilo -트랑킬로”라는 단어를 많이 사용한다. 영어로 직역하자면 ‘Quiet’ 이고, 우리말로 하자면 ‘잠잠한’이라는 형용사라고 하면 되겠다. 말하자면 큰 흔들림이 없는 수면의 잠잠함, 큰 변화없는 날씨의 고요함과 같은 것이라고 이해하면 좋다. 자신의 삶이나 마음에 큰 흔들림이 없는 상태를 표현할 때, “트랑킬로”라고 말한다. 무슨 사건이 생긴 후에 ‘괜찬냐’는 질문에 일반적으로 ‘트랑킬로’ 로 답한다.– ‘별 일없습니다. ‘ ‘마음이 평안하다’라는 뜻이다. 무숙자 선교관에서 늘 일어나는 서로간의 말다툼이 있은 후에’괜찮냐’고 물으면 ‘트랑킬로’라고 답한다. – 마음에 흔들림 없이평강을 유지하고 있음을 뜻한다. 화가 날 만한 일을 당한 경우에 ‘어떠냐?’고 물으면 ‘트랑킬로’라고 답한다. – 그런 상황 가운데에도 평강을 유지하고 있음을 뜻한다. 약속 시간에 늦게 도착해서 미안한 마음에 ‘늦어서 죄송합니다.’ 라고 말하면, ‘트랑킬로, 트랑킬로’라고 답한다. ‘괜찮습니다.’ 라는 의미다. 나도 요즘은 상대방이 늦어도 ‘트랑킬로’하는 마음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 사실 ‘내가 손해 보고 살겠다’라고 작정하면 ‘트랑킬로’ 하지 못 할 이유가 없다. 상황을 이해하려는 마음으로 받아드리고 나면 ‘트랑킬로’ 하다.

상황을 받아드림에 익숙한 니카라과 백성들은어떤 일이 있어도 화를 내거나 언성을 높이는 경우가 드물다. 모든 상황에서 평강을 유지하는 지혜를 가지고 살아가는 선한 민족이다. 조그만 일에 언성을 높이고 화를 내는 우리 한국 민족에게 부족한 ‘트랑킬로’를 이 민족은 누린다. 

주어진 상황에서 감사 제목을 찾고, 만약 감사함을 찾을 수 없다면 적어도 그대로 받아드리고 평강을 유지하는 삶을 이곳에서 배운다. 또한 발전과 풍요 속에서 살지만, 받아드리지 못함에서 유발되는 갈등과 복잡함, 두려움과 걱정, 후회와 불평 속에서 트랑킬로를 유지하지 못하고 사는 우리들의 삶을 반성한다.

그러나 진정한 ‘트랑킬로’는 하늘의 선물이다. 다른 선택의 여지없어서 숙명적으로 받아 드려야 하기에 받아 드리는 니카라과 식의 평강이 아니라, 평강의 주님이 우리 삶의 주인이심을 아는 지혜와 그에게 모든 상황을 맡길 수 있는 믿음으로 살기에 누리는 믿는 자들의 평강이 진정한 평강이다. 평강을 잃지 않는 삶이 믿음의 삶이며 진정으로 복이 있는 자의 삶이다. 전도서 4장 6절의 말씀이다. “두 손에 가득하고 수고하며 바람을 잡는 것보다 한 손에만 가득하고 평안함이 더 나으니라”

우리 모두가 데살로니아 후서 3장 16절의 축복을 누리기를 기도한다. “평강의 주께서 친히 때마다 일마다 너희에게 평강을 주시고 주께서 너희 모든 사람과 함께 하시기를 원하노라” 
오늘도 장마 비 속에 함께 쏟아 부어 주시는 주님의 평강을 느껴 본다.
작성자: Hope Nicaragua, 시간: 3:23 오후 0 개의 댓글  

수요일, 9월 14, 2011

섬김은 기쁨을 낳는다


오늘도 집으로 돌아 오는 길이 멀게 느껴진다. 사실 20분도 걸리지 않는 길이지만 가는 길보다 돌아 오는 길은 길다. 시간의 길이는 주관적이라는 말이 맞다. 멀게만 느껴지는 이유는 전적으로 나의 피곤함에 있음이 틀림없다. 살아도 살아도 익숙해 질 수 없는 선교지의 열대성 기후가 그렇게 만든다. 오래 살아 본 사람이 아니면 이해 할 수 없다. 그래도 감사한 것은 몸은 피곤한데, 마음은 그렇지 않다. 돌아 오는 운전대를 잡고 있는 내가 나 스스로에게 이렇게 말했다. 물론 속으로 속삭였다. 그렇지만 뚜렷한 울림이 있었다. ‘아, 너무 좋다…..’ 

누구라도 곁에 있었다면, ‘참 좋지요?’ 라고 말하며 질문 형식으로 대화를 끄집어 냈을 것 같다. ‘뭐가 그리 좋아요?’라는 질문이 다시 돌아 오기를 기다리면서 말이다. 그러면 이렇게 대답했을 것이다. ‘그냥 마음이 흐믓해요… 나에게도 그 이유는 뚜렷하지 않고 정확이 꼬집어 뭐라고 말할 수는 없어요. 그런데 그냥 마음에 기쁨과 만족함이 꽉 차 있어요.’ 차 밖에서 밀려 드는 습도는 자동차가 뿜어내는 시원한 에어콘 바람을 무시한다. 소낙비라도 시원하게 내려주면 이 습기를 잠시라도 씻어 버릴텐데… 

집으로 오면서 곰곰히 생각해 보았다. 오늘은 왜 마음에 이런 기쁨으로 꽉 차 것일까? 그리고, 그 형제의 얼굴이 떠 올랐다. 임마누엘 말티네스 (Imanuel Martinez): 남, 58세, 무숙자, 가족과는 연락이 끊겼음, 촌딸레스 출신, 전 산타니스타 해방군, 전 알콜 중독자 ….

오늘 아침도 늘 하듯이 무숙자 선교관에 섬기고 있었다. 임마누엘 형제가 나에게 다가와 인사를 건냈다. 평소에 조용하고 숫기가 별로 없는 이 형제는 자기의 전 재산이 들어 있는 백팩 가방에서 무엇인가를 찾았다. 한 동안 뒤적거린 후에 조그만 무엇인가를 드디어 찾아낸 손을 번쩍 들었다. 그리고, 조용한 미소가 그의 입가에 가득히 담기는 것이 보였다. 앞에 서 있는 나에게 그것을 건내 주면서 설명을 빼뜨리지 않는다. ‘어제 교회에서 받은 선물인데 당신에게 주고 싶었다’는 내용을 더듬 거리며 말했다. 성탄절에 크리스마스 트리에 다는 장식이다. 나무로 만든 싸구려지만 임마누엘 형제의 마음이 담겨 있음이 느껴졌다. 몇 번이나 반복되는 감사의 인사는 그를 쑥스럽게 만들었다. 슬그머니 빠져 나가려는 그를 붙잡고 사진이나 하나 찍자고 했다. 주위의 무숙자 형제 자매들이 자기도 함께 찍겠다며 달라 붙기 시작했다. 임마누엘 형제의 작은 선물은 나의 마음을 하루 종일 붙잡고 놓아 주질 않았다. 섬김은 진정으로 축복이다. 너무 큰 기쁨을 우리에게 선사한다. 섬길 수 있는 자리에 있는 것은 큰 감사의 조건이다. 

집에 도착하기 전에 구름이 터져버렸다. 잠시 후면 터트리려고 울먹이던 아기와 같이 구름의 울움이 터졌다. 차창을 굵은 빗방울이 구분하지 않고 마구 공격한다. 넘치도록 흐르는 빗물을 씻어내기 위해서 윈도우 와이퍼를 단게를 올리며 조정했다. 결국 최고의 빠르기까기 조정될 정도로 쏟아 붙고 있었다. 

내리는 소낙비가 습도를 조절해 시원해졌다. 마음 속에 이런 생각이 들었다. ‘하나님, 이렇게까지 나를 사랑하십니까?’ 오늘 밤은 조금 시원하게 지낼 수 있겠구나 하는 기대감에 마음이 기뻤다. ‘사랑의 하나님 감사 합니다.’라고 외쳤다. 감사는 주어지는 것보다 감사를 찾는 것이 기독교 영성이다. 나의 마음은 오늘 묵상했던 시편 57편의 말씀을 다시 기억하고 있었다. “하나님이여,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내 영혼이 주께로 피하되 주의 날개 그늘 아래에서 이 재앙들이 지나기까지 피하리이다. 내가 지존하신 하나님께 부르짖음이여 곧 나를 위하여 모든 것을 이루시는 하나님께로다…. 하나님이여 주는 하늘 위에 높이 들리시며 주의 영광이 온 세계 위에 높아지기를 원하나이다.”
작성자: Hope Nicaragua, 시간: 5:21 오후 0 개의 댓글  

요일, 4월 18, 2011

성령은 섬김을 위한 영


<-- 의료 선교관에서 전도지를 읽고 있는 환자들

오늘은 의료 선교 사역의 스테프들과 사도행전의 말씀으로 성령의 능력에 대해서 간단하게 나누었다. 성령의 능력이 우리에게 임하시면 어떤 결과가 일어나는가에 대한 말씀이다. 성령이 임하시면 물론 초자연적인 현상이 나타날 경우도 간혹 있지만, 성령의 임하심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역사는 결국 하나님 섬김이다. 또한 이웃 섬김에 있다. 성령의 능력을 얻은 결과가 자기 중심이 되거나 자신만을 위한 것일 때는 위험하다. 자기 자랑이나, 자기 만족을 위함이 되면 성령이 아니다. 그렇기에 성령이 함께 하시는 성도의 삶 속에는 섬김이 나타나야 한다. 그리고 우리가 섬김을 위해서 살아가면 나머지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을 더해 주시리라’는 약속을 이행하심을 체험하게 될 것이다. (대충 그런 메세지의 내용이었다.) 

그러니, 다음 주에는 ‘더욱 열심이 섬기자’고 말했다. 설교는 아니었지만 말씀을 통한 짧은 메세지로 프로비덴시아 의료 선교 클리닉의 존재 목적을 다시 한번 강조한 경우가 되었다. 다음 주에는 여성 암 치료 및 예방 프로그램을 미국의 선교 단체와 함께 진행하는 스케줄이 잡혀 있음을 염두에 두고 나눈 말씀이다. Cervical Cryotherapy (자궁 경관부 냉동 요법) 와 LEEP ( loop electrosurgical excision procedure) 을 통하여 여성의 자궁 경관부에 있을 수 있는 비정상적인 부분을 잘라내고, 그럼으로 자궁암으로 발전하기 전에 치료하는 시술이 된다. 

이 시술을 위해서 미국의 선교 기관에서 전문의를 보낸다. 그리고 우리 클리닉의 여성과 의사는 그와 함께 일하며 배우는 기간이 되는 것이다. 다음 주에는 일반적인 환자들 이외에도 많은 여성들이 이 프로그램의 해택을 받기 위해서 드나 들게 될 것이다. 의료 선교관 전체가 들석 들석할 것이고, 환자들에 치어서 모든 스테프들이 지치기 쉬운 경우다. 단단하게 마음의 준비, 영적인 준비를 하지 않으면 심신의 피곤함을 견디지 못해서 짜증 나는 일주일이다.

특별히 지역의 매춘 여성들을 중심으로 하기에 더욱 그렇다. 그 자매들은 마음에 상처가 많은 경우이기에 일반인들의 조그마한 말과 행동의 실수도 자신을 향한 돌 던짐으로 받아 들이기 쉽상이다. 무조건 겸손하게 섬겨야 하는 때이다. 섬김은 육신과 영혼과 정신 등, 총체적인 치유와 구원를 목표로 한다. 섬김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섬김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이 체험되어지고, 그 사랑으로 받아 드리어 하나님 사랑/구원에 이름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섬김 자체가 목표일 때 우리는 인도주의적인 봉사 차원을 벋어 날 수 없다. 

예수님도 섬기셨다. 그의 삶은 섬김을 위해서였다. 그러나 그의 섬김은 우리 삶을 온전케 함이 목적을 뿐 아니라, 하나님 사랑의 깨달음을 통한 구원이 목적이었다. 그리고 그 구원은 총체적인 구원이다. 그래서 천국의 복음을 선포하셨고, 삶의 어려움을 해결해 주셨고, 더 나아가 사회적인 차원의 문제까지도 다루셨다. 

그리고 우리에게 물으신다. “네가 섬겨야 할 너의 이웃은 누구냐?” (누가복음 10장 36절) 우리의 대답은 ‘구원이 필요한 모든 이가 우리의 이웃입니다.’ 일 것이다. 예수님이 말씀하신다. “가서 그들을 섬기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여 주시리라. (마태복음 6장 33절)

목요일, 3월 03, 2011

사랑하는 정헌택 장로님을 보내며

장로님의 소천 소식을 들었습니다. 사랑하는 정헌택 장로님의 먼저 떠나심은 슬픔이고 아픔이고 아쉬움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 앞에 ‘왜?’라는 답이 없는 질문을 많이 올렸습니다. 언제가는 누구나 거쳐 가야하는 과정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당장 떠나셨다고 하니 혼돈스러워졌습니다.

그러던 중 죽음에 대한 어떤 시를 읽었습니다.
내용은 간단한 것이었습니다. “항구에 아름다운 한 척의 배가 정착되어 있었다. 이제 출항의 시간이 되어서 배는 항구를 떠났다. 멀리 멀리 떠나 가고 있었다. 그렇게 아름답만 보이던 배가 작아지고 작아지면서 결국 바다와 하늘이 닿는 그 곳으로 다가 갔다. 그리고는 하늘 끝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사라진 배를 보고 있던 사람이 말했다. “이제 사라졌구나!” 그 옆에 사람이 말했다. “사라졌다니요?” 그리고는 설명했다. “사라진 것은 당신의 눈에서만 사라진 것입니다. 사라지는 그 순간, 반대편에서 기다리고 있는 이에게는 나타나는 것죠.” 

죽음이란 바로 그런 것이죠. 저 건너편에서 기다리고 있는 분에게는 나타나는것이 죽음이죠. 그래서 시편 기자는 이렇게 쓰셨나 봅니다.

“하나님 앞에서 경건한 자들의 죽음은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귀중한 것이로다”
사랑하는 고 정헌택 장로님의 죽음이 바로 그렇다고 생각됩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보시기에는 경건한 성도가 오는 귀중한 시간이라고 믿습니다.

제가 알고 있는 정헌택장로님은 거룩하신 분이었습니다. 걷는 모습과 몸가짐이 거룩해서가 아닙니다. 점잔케 목소리를 내리고 말하는 외적인 거룩함도 아닙니다. 가끔 멋진 정장을 하고 나타나실 때는 파마라도 하신 것같은 굵은 곱슬 머리가 어우려져 무슨 영화 배우가 나타나셨나 할 정도로 멋도 부리는 분이었습니다. 말씀 하실 때에는 생각같이 빨리 입이 따라 주지 않으셔서 그러신지 가끔 더듬 거리시기도 하셨습니다. 뭐가 그리 바쁘신지 성가대에서 주일 예배에 들어가실 때의 걸음도 제일 빠르셨습니다. 외적인 거룩한 모습은 별로 찾아 보기 힘드신 분이라 해도 과장이 아니라고 봅니다.

하지만 정헌택 장로님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분이셨기에 거룩한 분이었습니다. 그 분만큼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기기를 기쁨으로 여기신 분도 많지 않으리라 봅니다. 목사인 저 자신도 장로님을 뵈면서 저런 분이 목사가 되었으면 최고였을텐데 하는 생각이 날 정도로 주님의 사랑하셨던 분이었습니다. 그래서 사정이 허락하시는 한 교회의 예배는 절대로 빠지지 않으셨습니다. 투병 중에도 성가대를 서셨다는 말씀도 들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셨기 때문이겠죠. 주님이 장로님의 큰 기쁨이었기 때문이겠죠. 

교회 건축을 준비하고 있었을 때였습니다. 새벽 기도를 마치고, 교회를 떠나시기 전에 불쑥 나타나셔서 말씀하셨습니다. “목사님, 건축 빨리 진행합시다. 저는 세컨드 몰게지 신청해 놓고 있습니다. 결정만 되면 건축 헌금 먼저 다 드리고 나중에 갚아 나가렵니다.” 주님의 성전이 건축되는 것을 소원하신 것은 장로님께서 주님을 너무 사랑하셨기 때문이었을 겁니다. 우리 장로님은 주님을 사랑하셨기에 거룩하신 분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을 아끼셨던 분이셨습니다. “마음이 넓은 사람은 사건에 대해서 말하고, 마음이 좁은 사람은 사람에 대해서 말하다.”는 격언과 같이 장로님은 대화 중에 다른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원치 않으셨던 분이셨습니다. 그저 짧게 ‘그럴 수도 있죠. 목사님’하고 말을 정리하는 크신 분이셨습니다. 옳은 것은 옳다고 하시는 곧으심과 그른 것은 그르다고 하시는 용기가 있으신 분셨습니다. 남을 의식하지 않고 교회를 섬기셨고, 남들의 칭찬과 관심에 따라 움직이지 아니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자신이 믿는 바에 따라 살아가는 분이셨습니다. 그래서 그는 거룩한 분이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거룩한 분을 저 멀리로 보냈습니다. 하나님께서 건너 편에서 기쁨으로 기다리고 계신 줄로 믿습니다. 미켈란젤로가 말했다고 합니다. ‘한 사람의 삶이 아름다웠다고 생각한다면, 그 분의 죽음도 아름답게 생각해야 한다.’ 우리 장로님의 삶은 아름다웠습니다. 거룩했습니다. 축복되었습니다. 그렇다면 그 분의 죽음도 아름다운 것입니다. 거룩한 것입니다. 축복인 줄로 믿습니다. 

“경건한 자의 죽음은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귀중한 것이니라” 존경하는 정헌택 장로님과 같은 분이 내 주위에 있었던 것을 축복으로 여기며 저편에 계신 하나님께 먼저 보내 드립니다. 그토록 사랑하셨고 섬기셨던 그 분의 품에서 평안하세요. 그 분의 사랑 안에 이제 편히 거하세요. 거룩하게 사셨던 장로님의 마지막 모습을 뵙지 못해서 죄송해요. 멀리서나마 기도로 눈물로 함께 합니다. 

니카라과에서 선교사 전구 드림


일요일, 2월 27, 2011

아동 인성 신앙 교육 센타


벌써 4년은 된 것 같다. 훌리아 라는 11살쯤 된 예쁘장한 여자 아이였다. 무숙자 센터에 볼 때마다 수줍음없이 다가와 껴안기며 인사했었다. 훌리아는 무숙자는 아니다. 그렇다고 크게 차이가 있다고 할 수도 없다. 무숙자 사역관이 위치한 큰 길을 건너 킨타니나 라는 동네에 사는 아이다. 그곳은 마나구아의 모든 오물로 오염되어 냄새가 지독한 마나구아 호수가에 위치한다. 선진국과 반대로 니카라과은 호수 주변에 가장 어려운 형편에 처한 사람들이 모인다. 그러다 보니 범죄도 많고, 마약과 매춘이 호수 물같이 범람한 지역이다. 그곳의 부모들은 아침에 나가서 저녁 늦게 들어오는 것이 일반적이고, 집에 있다면 알코올 중독이나 마약 중독이다. 그러니, 아이들은 혼자 자란다고 해도 과장이 아니다. 물론 학교가 있지만 소낙비만 내려도 교사들이 아이들을 집으로 보내기가 태반이 책임지지 않는 공립 교육에 맡겨진다. 

벌써 1년 반쯤 되었나 보다. 훌리아가 보이지 않았다. 주위 아이들에게 물어봐도 어디갔는지 모르겠다는 대답 뿐이다. 나도 그런가 보다 하며 지냈다. 부모가 조금 더 나은 지역으로 이사하면 아이들이 나타나지 않는다. 도리어 바람직한 경우이기를 은근히 바란다. 그런데 훌리아가 지난 여름에 무숙자 사역관에 다시 나타났다. 너무 반가워서 안아 주려고 하는데 움추린다. 수줍음을 타는 듯하다. 벌써 열 네 다섯은 되었으니 그럴만도 하다. 그 동안의 소식을 들어 보려고 말을 걸어도 그저 피하는 느낌이다. 식사를 받고 나면 무숙자 센터를 바쁘게 나간다. 급하게 돌볼 일이라도 있는 소녀 마냥…. 

3개월 전쯤 되었나 보다. 훌리아가 동생인듯 싶은 아이를 하나 안고 있었다. 너무 예뻐서 빼앗듯이 받아 안았다. ‘동생이냐?, 조카냐?’ 물으면 아이를 흔들었다. 처음 안기는 나에게도 잘 안겨있어 너무 귀여웠다. 자기도 어린 나이에 학교도 가지 못하고 동생을 돌봐야 하는 처지가 안타깝게만 느껴졌다. 그래도 이 나라에서는 흔히 있는 일이니… ‘이름이 뭐냐’고 물었다. 데세니아. 이름도 너무 예쁘다. ‘데세니아, 데세니아, 데세니아,… 얼 럴러러…’ 부르면서 아이를 흔들어 줬다. 아이도 좋아하며 조그만 얼굴에 웃움이 가득하다. ‘데세니아가 몇 달 되었니?’ 물어 본다. ‘4개월…’

‘아이, 예뻐라….’ ‘엄마는?’ 아이 젖은 어떻게 먹이나 걱정이 되어 물어 봤다. 분유를 구입해서 먹인다는 것은 꿈도 꿀 수 없는 경우이기 때문이다. ‘훌리아가 엄마예요’ 옆에 있던 친구 아이가 대신 답니다. 훌리아는 얼굴이 불거지면서 사라진다. 너무 걸음이 빨라서 저러다 데세니아를 떨어트리지나 않을까 걱정을 정도다. ‘잘못된 질문이었구나… 내일 다시 와야 할테데…’ 감사하게도 그 다음 날에도 아이를 안고 왔다. 아이가 아이를 키우는구나…

훌리아를 처음 만났을 때, 조금이라도 더 관심을 주었으면 뭔가 틀려졌을까? 별 별 생각이 다 들었다. ‘일찍 돌보지 못했던 내 잘못이지…’, ‘밥만 줘서는 않돼…’, ‘어른들은 그렇다고 치고, 아이들을 먼저 챙겨야겠다… ‘ , ‘어른들이야 변화되기 힘들지만, 아이들은 잘 교육하면 아직은 늦지 않았다.’ 

그래서 전에 의료 선교관이었던 곳을 개조해서 올해부터 아동 인성 신앙 교육 센타를 시작한다. 아침에 모이면, 말씀 듣고, 함께 놀고, 좋은 만화 영화도 보고, 점심도 먹고, 그림도 그리고, 글씨 쓰는 것도 배우고 하면서 지내고 있다. 학교는 아니지만 학교보다 더 큰 역활을 해야 한다. 이렇게 해서 한 명이라도 인생이 변화될 수 있다면 하는 기도로 시작했다. 어제 왔던 7살 된 여자아이가 선생님에게 이런 말을 해서 우리 모두 걱정하고 있다. ‘선생님, 내 배 속에 인형 하나 갖고 싶어요.’ 해야 할 일이 너무 많다. 기도도 많이 필요하다.

일요일, 1월 16, 2011

2011년의 계획


새해가 되면서 어떤 사람이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나는 주님을 의지하고 살아 갑니다. 모든 것을 다 주님께서 인도하셔서 저의 삶을 최선의 길로 인도해 주실 줄로 믿습니다.’ 그리고는 그 분은 계획없이 한 해를 시작하고 살아간다고 한다. 믿음이라고 해야 할지, 무책임이라고 해야 할지… 혼돈 되는 경우다. 그 삶에서 열매를 봐야만 판단이 서는 경우다. 반면에 철저하게 계획을 세우는 사람도 있다. 삶은 스마트 (SMART) 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래서 그의 계획은 철저하게 S-M-A-R-T 하다. 구체적 (Specific)이고, 평가할 수 있고 (Measurable), 달성할 수 있고 (Achievable), 타당하고 (Relevant), 기한이 정해진 (Time-bound) 목표를 가지고 살아간다. 하나님의 은혜가 들어 설 자리가 없다. 그렇게 철저히 세우면 이루어 질 것이라는 방자한 사람이라 해야 할지… 이런 경우도 난감하다. 미래의 계획에 하나님의 은혜를 포함 시킬 수 있는 믿음의 자리가 없다. 아버지의 사랑 안에서 찾을 수 있는 삶의 넉넉함과 여유가 없다. 2011년을 시작하면서 무책임하지 않아야 하고, 방자하지 않게 시작해야 한다.

한편, 계획을 세울 때에는 해야 할 것(Doing)을 중심으로 계획을 세우는 사람들이 있다. 누가 복음 12 장의 한 부자가 그랬다. 밭에 수확이 풍성해서 곳간이 모자랄 정도였다. 그 부자는 많은 수확을 위해서 곳간을 더 크게 지을 것만을 계획했다. 그리고 편히 쉬고 즐기리라고 생각했다. 그는 해야 할 것, 즉 Doing 에는 많은 관심을 두었지만, 되어야 할 것, 즉 Being 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풍성한 수확으로 가난한 이웃을 돕는 성품, 즉 Being은 전혀 관심이 없는 사람이었다. 하나님께서 부자를 그날 저녁으로 데려가셨다. 계획을 세울 때, 해야 할 것도 세워야 하지만, 되어야 할 것도 함께 세우는 2011이 되어야 한다.

나 자신에게 주어진 2011년을 계획해 보았다. 해야 할 것은 의료 사역관의 발전을 위해서 Diagnostic Center 준비해 보려 한다. EKG, X ray, Ultrasound, Endoscopy 를 갖추는 검사실을 만들어 보려 계획하며 기도한다. 그렇게 하면 여성 암 퇴치 프로그램, 매춘 직업 여성 섬김 프로그램, 지역 어린이 돌봄 프로그램, 지역 교단 목사님들 섬김 프로그램에 크게 도움이 될 것이다. 그리고 3살부터 6살까지 돌보는 기독교 아동 인성 교육 센터를 무숙자 사역관 곁에 시작할 계획이다. 오랫 동안 계획해 왔던 사역이다. 학교 입학 전의 아동들에게 성경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인성, 신앙 교육을 생각해 본다. 교육 센터에 있는 우리 아이들 생각만으로 기분이 좋아 진다. 

그리고 되어야 할 것으로는 절제를 택했다. Self Control 은 성령의 9가지 열매 중에 하나다. 절제에는 시간의 절제, 물질의 절제, 육신의 본능의 절제 등이 있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언어의 절제를 생각했다. 언어의 절제는 생각의 절제다. 언어 안에는 생각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언어 가운데 아름다운 언어, 생명의 말, 칭찬의 말, 따뜻한 말, 긍정의 말을 해야겠다. 인생의 연수를 더해 가면서 새삼스럽게 느끼는 것이 있다. 한 사람의 인생은 그 사람의 말에 따라서 변한다는 것이다. 믿음의 말을 하는 사람은 믿음의 능력을 누리는 삶을 산다. 소망의 말은 그 사람의 미래를 보장한다. 사랑의 말은 상대를 변화시키는 힘이 있다. 마음의 아픔을 정리하고 쓴 뿌리를 도려내 버린 깨끗하고 믿음이 풍성한 언어를 사용해야 한다. 그런 자에게 하나님의 축복이 이슬비 같이 스며든다. 

2011년을 허락하신 주님께 감사하고 또 한번 기회를 허락하신 주님께 감사함으로 시작한다.

일요일, 12월 05, 2010

믿음은 하나님의 생각을 받아드리는 것


노상용 선교사님과 지난 6년간 동역하며 함께 섬기고 있는 하얄리야 장로교 학교의 졸업식이 금요일에 있었다. 올해를 시작하면서 서로의 역할을 바꾸었다. 즉, 노상용 목사님께서 교장으로서 실무를 담당하시고, 나는 뒤에서 목사님의 사역을 밀어주고 돕는 역할로서 이사장의 직분을 맡았다. 이런 저런 이유로, 졸업식에서 축사를 맡았다.

기도하며 생각하다가 축사의성경 본문을 예례미아 29장 11절 이하로 잡았다. 부정적인 생각에 잡혀서 살아가고 있는 우리 니카라과 사람들에게 나누고 싶은 말씀이다. 누구나 힘든 삶을 살다보면, 그리고 상황이 어려워지면 부정적인 생각에 쉽게 사로 잡힌다. 믿음으로 하나님의 선하신 손길을 바라봐야 할 때, 어려운 환경을 바라보면 자연스럽게 환경의 지배에서 벋어나지 못한다. 그러다 보면 생각의 기본 구조까지도 부정적으로 된다. 결과는 믿음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걱정과 염려로 사는 니카라과 백성들이 되었다. 미래를 바라보고 사는 백성이 아니라, 과거에 묶여 사는 백성이 된 것이다. 소망이 아니라 자포자기다. 이번 졸업식에서는 예레미아 29장 11절의 말씀을 통해서 생각이 변해야 믿음의 능력을 힘입어 살수 있음을 가르치고 싶었다. (아니면, 믿음을 가져야 생각이 변하는 것이라고 가르치던지…)

그래서 예레미아 29장 11절 이하의 말씀으로 간단한 설교를 준비했다. 이 말씀은 요즘 나 자신 개인에게 힘이 되어 왔던 말씀이고 묵상하며 주님께 예배했던 말씀이었다.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라” 

설교의 내용은 간단했다. ‘나의 생각을 버리고 하나님의 생각을 받아 드리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해서 가지고 계신 생각은 미래가 있는 생각이시고, 소망을 주시는 생각이시다. 평강을 원하시며 우리의 삶에 축복을 원하신다. 물론 때로는 채찍을 드실 때도 있지만, 그것도 그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근거로 하는 것이다.’ 

학생들에게 한가지 흥미있는 사실을 말해 주었다. 심리학에서 이야기하는 대체의 법칙 (law of Substitution)이다. ‘우리의 두뇌는 한가지 종류의 생각만 받아드린다. 두 종류의 생각을 동시에 가질 수 없다는 법칙이다. 절망이 자리 잡으면 희망을 동시에 생각할 수 없다. 미움으로 채워지면 사랑이 들어설 자리가 없다는 법칙이다. 마치 우리의 생각에는 의자가 하나만 있는 것과 같다고 하겠다. 한 의자에 두 사람이 동시에 앉을 수 없는 것과 동일한 이치다. 빛과 어두움이 함께 존재할 수 없는 것과 같다. 어두움에 빛이 들어오면 어두움은 사라져야 한다. 하나님의 생각으로 채우면 나의 생각은 사라진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하여 가지고 계신 생각은 모두 그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라는 성품을 근거로 한다. 이것을 믿음으로 받아드리고 기쁨과 감사를 잃지 않고 사는 것이 신앙 생활이다. 그리고 그런 믿음으로 삶을 살 때, 우리는 축복을 누리는 삶을 산다.’

졸업생들은 별로 알아 들은 것 같지 않았다. 학부형들이 도리어 더 열심히 들었다. 내가 하는 말씀 증거였지만 나 자신 스스로도 열심히 들었다. 때로는 환경에 의해서, 재정의 상황에 따라서, 주위 사람들과의 대화에 따라서 부정적인 생각으로 가득 채워 사는 것이 나의 삶의 현실이기 때문이다. 또한 선교의 현실도 특별히 다르지 않다. 

하나님의 생각을 받아드리는 것이 믿음 생활이다. 이 믿음 없었으면 얼마나 선교의 삶이 힘들까 생각해 본다. 역으로 생각하면, 내가 때로는 선교의 삶을 힘들게 생각하는 이유는 믿음으로 살지 않는다는 증거가 아닌가? 

이번 졸업식에서는 나 자신에게 설교하고 나왔다.



토요일, 10월 16, 2010

간난


가난은 어려울 간(艱)자에 어려울 난(難)자가 합쳐져서 만들어진 한자이다. 하지만 동음 생략법에 의하여 ‘간’자의 ‘ㄴ’(니은)이 생략됨으로 해서 가난이 되었다. 그렇기에 가난은 어려움이 겹쳐있다는 의미로 무척 힘든 상황을 뜻하리라. 가난의 동의어로 사용되는 빈곤 역시 가난할 빈 자에 어려울 곤 자가 합쳐져서 이루어진 단어로 가난으로 인한 극한 어려움을 뜻한다. 한자의 의미만을 따져보아도 가난은 좋은 것이 되지 못한다. ‘필요(욕심이 아님)를 채우지 못함으로 인하여 어려움을 격고 있는 상태’를 일컫는 가난을 소원하는 사람 또한 없을 것이다.

성경에서도 가난은 하나님의 축복이 부재한 상태를 말하거나 구원 받아야 할 대상으로 표현되어지고 있다. 또한 말라기에서 말씀하듯이 가난과 궁핍은 하나님이 불순종하는 이스라엘을 위하여 준비한 채찍이었다. 그렇기에 성경의 말씀을 현실성없이 감상적으로 받아드리지 않는다면, 가난을 긍정적으로 수용하거나 기독교인이 추구해야 하는 삶의 상태라고 할 수 있는 여지가 전혀 없다. 물론 영적인 가난은 하나님의 영적 풍성함으로 채워지기 때문에 ‘마음은 가난하라’고 말씀하신다. 즉 하나님을 사모함으로 인하여 마음이 무척 힘든 상황을 ‘마음(영)의 가난’이라고 표현했다. 이러한 가난은 주님을 사모하게 만들기에 축복으로 받아드린다.
반면에 육신적 가난도 주님을 더욱 바라보게 하고 주님을 의지하게 하는 상태로 성도들을 이끌 수 있기 때문에 분명히 그 영적인 역할이 있음을 성경은 가르치는 것은 사실이다. 그렇지만 그러한 영적 역할이 있음을 이유로 가난의 상태에 머무는 것을 축복이라고 가르치지는 않는다. 

가난은 하나님의 축복과 역사하심으로 벗어버려야 할 삶의 상황이고, 빈곤의 산은 믿음의 기도와 삶의 수고로 밀어 버려야 하는 고난 덩어리다. 물론 영적인 도전과 도움이 될 수 있기도 하지만… 

나는 니카라과에 와서 가난의 실체를 체험했다. 그 전에는 빈곤의 무서움과 추함, 또는 악함을 체험적으로 느끼지는 못했다. 더 이상 가난을 감상적으로 받아 드릴 수 없게 되었다. 빈곤은 영적으로 도움이 될 수도 있으니 감사함으로 받아 드려야 해… 라는 식의 합리화를 버렸다. 왜냐하면 가난은 추함을 낳기 때문이다. 가난으로 생기는 폭력, 살인을 보았기 때문이다. 가난으로 낳은 사생아를 품에 안고 눈물을 흘려 봤기 때문이다. 가난 때문에 학교 책상 앞에서 꿈을 꾸어야 할 소녀들까지도 역겹도록 짙은 화장을 얼굴에 바르고 길거리에 나서는 상황이 눈 앞에서 일어나기 때문이다. 가난 때문에 어깨가 무너지도록 무거운 땔감 나무를 매고 가는 소년들을 보며 모르는 척하며 지나가야 했다. 지나가는 소년들을 보고 있는 나의 마음은 늘 울고 있었기 때문이다. 혼자 걸어서 들어 오지도 못할 정도로 중병이 들어 오는 환자들이 의료 선교관에 찾아 올 때, 그들의 흐트러진 눈에는 질병의 고통 보다도 더 무서운 소망없음이 가을의 쓸쓸함과 같이 퍼져 있는 것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교회를 방문할 때 달려와 반기는 아이들을 끌어 안았을 때 ‘기브 미 원 달라’라고 손을 내미는 4살 짜리의 입술에서 가난의 조롱을 들었기 때문이다. 배고픔과 절망을 잊기 위해서 본드를 입에 물고 쓸어져 누워있는 무숙자 형제들을 날마다 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가난은 두려움, 무기력, 질병, 폭력, 마약, 죽음, 배고픔, 절망 과 같은 불량배들을 끌고 다니며 지구촌을 괴롭히는 깡패 두목이다. 빈곤은 범하지 않은 죄에 대해서 형벌을 주는 불의다. 

10월 17일은 ‘세계 빈곤 퇴치의 날’이다. 빈곤을 퇴치하는 일에 적은 방법이든 큰 방법이든 동참하는 것이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삶이다. 물론 축복을 많이 누리는 사람일 수록 나눌 책임이 크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야고보서 2장 15절 이하의 말씀이다.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덥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며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믿음의 말과 삶의 행동이 분리 될 수없음을 가르치신다.

토요일, 9월 18, 2010

감사하는 마음이야 말로 축복 중에 축복이라고 할 수 있겠다. 반면에 감사를 잃은 마음, 더 나아가서는 불평하는 마음은 심하게 말하면 저주라고 하겠다. 선교사로서의 나의 삶을 살펴 보아도 그렇다. 힘들 때 일수록 감사하는 마음을 잃지 않으려고 노력해 본다. 이유는 간단하다. 내가 하나님을 나의 좋으신 아버지라고 고백하는 자이다. 그리고 그 아버지가 나를 사랑한다는 사실을 깊이 인식하고 있다. 그러면 당연히 감사를 잃어서는 않된다는 단순한 논리다. 좋으신 아버지 나를 돌보고 계시다는 사실을 체험을 통해서 너무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좋으신 아버지가 계심에도 불구하고 경우에 따라서 어려운 환경에 처할 때가 있다. 그때는 반드시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 이유는 그 당시는 명확하지 않다. 그러나 나중에 보면 적절한 이유가 있기 때문에 주어진 어려움이다. 그리고 그 이유는 나의 유익을 위한 것이라는 결론 이외에는 없다. 잠언 17장 32절의 말씀과 같다. “도가니는 은을, 풀무는 금을 연단하거니와 여호와는 마음을 연단하시느니라.” 연단은 쓰임을 위한 것이고, 쓰임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은 우리가 누릴 수 있는 최고의 축복이다. 우리는 그런 목적으로 창조되어진 자들이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 때 축복을 누릴 수 있도록.

요즘에 의료 선교관 사역을 보면서 믿음 없었음에 많은 반성을 한다. 2년 전에 시작한 후에 그렇게도 힘들어 했던 사역이다. 지역 주민들을 섬기고 말씀을 전하기 위해서 시작한 사역이었다. 그리고 열정과 열심으로 사역을 했었다. 그러나 결과는 너무 초라했다. 의료 선교관을 보면 마음이 아플 때도 많았다. 아버지 앞에 엎드릴 때도 불평조의 기도였던 것을 기억한다. ‘왜 하나님의 도움이 없냐’는 불평이었다. 그 당시에는 그렇게도 좋으신 아버지가 숨어 버리신 듯했다. 시편에서 말씀하시는 ‘나의 산성’, ‘나의 도움’, 나의 방패’ 되시기를 거절하는 듯하기도 했다. 

그런 어려움을 지낸 이년 후인 지금의 의료 선교관를 보면 아버지 보기가 죄송스럽다. 하나님의 은혜로 사역 장소를 옮긴 후 지금의 의료선교는 전의 것과 비교하면 하늘과 땅의 차이다. 하루 평균 15명의 환자에게 아버지의 사랑을 전한다. 앞으로 40명이 되는 것을 목표로 기도하고 있다. 지역의 어려운 사람들에게 치유를 나누는 귀한 사역이 되어지고 있다. 여러 기관과 연결되어 함께 사역을 하고 있다. 감사할 뿐이다. 이렇게 될 것을 알았으면 지난 2년 동안 마음 고생하지 않았을 것을 … 하는 생각을 한다. 불평을 늘어 놓았던 아버지께 죄송하다는 생각이 든다.

얼마 전에 학교 부지로 정해 놓았던 산타 엘레나 지역에서 연락을 받았다. 학교 부지로 우리 선교 재단에 기증했던 부지를 문교부에서 일부 사용하겠다는 연락이다. ‘일부’를 사용하면 우리는 학교를 건축할 수 있는 땅이 없는데…. 무슨 말이십니까? ‘우리는 서류도 다 가지고 있습니다.‘ 따지고 싶었다. 재판이라도 걸고 싶었다. 속상했다. 사실 지금도 그 지역을 지나갈 때마다 마음이 아프다. 가슴에 꽉 맥히는 듯한 느낌이 있을 때도 있다. 그래도 좋으신 아버지를 의지하며 위로 받는다. ‘아버지가 나를 사랑하신다. 당신의 독생자 예수님을 보내시어 나를 구원하실 정도로 뜨겁게 나를 사랑하신다‘ 라는 이 믿음의 확신 때문이리라. 아버지가 나의 모든 것을 아신다는 이 믿음의 경험 때문이다.

오늘도 물론 선교 환경이 내 마음 같지는 않다. 세상 살면서 어떻게 모든 것이 완벽하기를 기대할까? 그래도 아버지께 감사하는 마음을 잃지 않을 것이다. 감사의 마음은 믿음의 소산이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나를 이렇게 사랑하고 계세요’라는 확신의 증거이기 때문이다. 물론 힘들다. 나의 영과 마음을 지치게 하는 일이 주위에 넘친다. 그래도 ‘감사는 잃지 않으리라’ 다짐하며 하루 하루를 시작한다. 그리고 말로서 표현도 한다. 그래서 아침에 일어나자 마자, 중얼거려 본다. ‘주님 감사합니다.’ 이것은 믿음의 선포다. 축 늘어지기 쉬운 어깨를 피며 선포한다. ‘주님, 정말 감사합니다.’ 감사하는 자에게 감사하는 일이 더 많이 생기는 것이 영적의 법칙이다. 그래서 말씀의 명령대로 ‘모든 것에 감사’하는 자세를 유지해야 한다. 

요즘같이 세상 살기가 힘들고 지칠 때의 감사는 우리 아버지를 아는 자만 가질 수 있는 믿음의 자세라는 생각을 해 본다. 나름대로 선교지에서 얻었던 경험을 통해 영적 공식을 만들어 본다. 연단=쓰임=영광=축복



금요일, 8월 06, 2010

행복은 줍는 것이다

마나구아 시에서 서쪽으로 15 마일 정도 떨어진 지역에 ‘라 반데라’라는 마을이 새롭게 시작되고 있다. 아직 물도 없고 전기도 없는 곳이다. 공산당 시절에 산디니스타 당을 위해서 내전에 참여 했던 가정들에게 보상 차원으로 이 지역의 땅을 정부에서 분할해 주면서 시작된 마을이다. 친구 목사님의 소개로 아이다 목사님을 알게 되었고, 아이다 목사님은 그곳에 지교회식의 개척 교회를 시작하셨다. 그리고 지역을 위해서 함께 복음을 전하기를 원하는 마음으로 선교사인 나를 초청한 것이다.

라 반데라를 방문했을 때 마을 가정들을 돌아보면서 마을 사람들과 잠시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 중에서 ‘자넷 라구나’라는 이름을 가진 자매가 많이 인상에 남는다. 그리고 잠시의 만남이었지만 진한 감동이 나의 마음에 찾아 왔다. 굳이 찾아 온 감동을 굳이 밀쳐 낼 이유는 없었지만 생각보다 오래 자리를 잡고 있었다. 

자넷 자매와 대화를 나누게 된 것은 집 앞에서 밭 일을 보다 자매가 쉽게 눈에 들어 왔기 때문이다. 집이라고 부르기에는 사실 너무 허름했다. 자매는 검은 비니루로 만들어진 집 앞에 널쳐 뒹굴고 있던 호박을 가꾸고 있었다. 지나가면서 ‘올라’ 하고 자넷 자매에게 인사를 했다. 미국말로는 ‘하이’라고 번역하면 적당한 인사말이다. 이 인사말이 숙이고 있던 허리를 폈게 했다. 그리고 잠시지만 자세히 살펴 보는 눈길을 느낄수 있었다. 아마도 마나구아 시내에서나 볼 수 있는 외국인이라서 그랬을 것이다. 그것도 동양인이 아니던가? 눈길을 끌기에 충분하다.

‘기회다’라고 생각하며 문은 없지만 철사 줄로 경계선을 만들어 놓은 자넷 자매의 집 입구 앞에 섰다. 들어 가도 되는지를 묻는 듯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아델란떼’ 라는 소리가 급한듯이 들려 왔다. 그렇게 시작된 교제가 적어도 20분 이상 계속되었다. 자넷 자매는 그저 행복하다. 5살짜리 아들을 두었다. 남편은 고깃배도 없이 호수가에서 물고기를 잡는 어부다. 그래서 그런지 물고기 그물이 벽에 걸려 있다. 마치 고급 생선 요리집의 내부 치장을 위해서 걸어 놓은 듯이 단정한 모습을 드러낸다. 바닥에는 생선 뼈가 널려 있다. 아마도 12마리나 된다며 자랑했던 닭들에게 주었던 사료로 쓰이지 않았나 싶다. 

자넷 자매는 행복했다. 더 이상 바라는 것이 없는 듯한 만족한 마음의 상태가 느껴진다. 그녀는 집의 뜰에 키우는 호박이 잘 자라서 기뻤다. 잘 자란 호박을 하나 추수 할 때는 마치 자식을 낳는 듯을 기쁨을 누린다고 설명까지 해 주었다. 남자로서 이해되지 않는 표현이었다. 아마도 수고 후에 얻는 뿌듯함을 말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짐직 뿐이다. 돼지가 새끼를 낳아서 기뻐한다. 어디 있는가 보았더니 검은 비니루 집 뒤 쪽에 자리 잡고 있었다. 돼지와 사람이 함께 사는 것이라 생각하면 적당하다. 그래도 행복했다. 물은 길러 와야 하는데 그리 멀지 않아서 감사하다고 말한다. 그것도 행복의 조건이다. 멀리 있는 학교에 아들을 보낼 때 옆집의 소달구지를 태워 보낼 수 있는 것도 감사하다. 남편이 돌아 올 시간이 되어서 식사를 준비 할 시간이 되었다고 한다. 식사는 쌀 밥,팥 끓인 것, 그리고 기쁨으로 거두어드린 호박을 재료로 만드는 음식이라고 설명한다. 장작을 가져다 불을 지피기 시작한다. 행복에 넘쳐 있는 자넷 자매를 보며, ‘디오스 레 벤디가’ 라고 하나님의 축복을 기원하며 집 경계선을 넘어 나왔다. 

뜨거운 태양 아래를 걷지만 내 마음도 풍성해져 있었다. 자넷 자매 안에서 넘쳐 흐르는 감사의 마음에 전염된듯 하다. 그리고 세상은 참 불공평하다고 생각하며 마을 길을 걸었다. 없어도 저렇게 행복한 사람이 있는 반면에 있어도 불행하게 사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잠언 기자의 말씀이 떠 오른다. “그가 비록 천 년의 갑절을 산다 할지라도 행복을 보지 못하면 마침내 다 한 곳으로 돌아가는 것뿐이 아니냐” (개역 개정) 행복은 널려 있다. 행복은 보는 사람만이 누리는 하나님의선물이다. 결국 행복은 환경이 아니라 마음 가짐이다.



부질없는 판단

2010년도 벌써 6월을 맞이한다. 세월 빠르다고 하지만 이렇게 빠를 줄이야... 

올해 초에 엘파라이소에 위치한 여호와 이레 교회의 하비에르 목사님과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었다. 올해의 계획이 무엇이며, 이루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여쭈었었다. 나와 하비에르 목사님과의 관계는 선교사와 지역 교회 목회자 이상의 관계로 발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여호와 이레 교회는 2008년 9월에 니카라과 현지 목사님께서 개척 하셨다. 그런 후에 나를 초청해서 함께 예배를 드린 적이 있다. 그곳에 도착했을 때의 놀람이란 상상할 수 없었다. 마치 광야를 연상케 하는 열악한 지역에 개척된 교회라고 보여 준 현장은 2 평 남짓한 땅 위에 올려진 생나무 기둥이다. 그리고 나무가 받치고 있는 함석 철판 6 장이었다. 전기도 없고 가장 기본이 되는 마실 물도 조차도 쉽게 구할 수 없는 지역이었다. 너무 큰 안타까움으로 인하여 그 지역을 드나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여호와 이레 교회 중심으로 사역을 시작했다. 물이 없는 사정이 제일 마음이 아파서 우물을 파기를 시작했었다. 그렇게 열악했던 곳이 이제는 전기도 들어오는 지역으로 발전을 이루었다. 

그러던 중 개척하셨던 목사님께서 떠나는 바람에 여호와 이레 교회를 돌보는 자리를 떠맡게 되었다. 그 때 즈음 하나님의 섭리로 디트로이트 장로 교회의 오병 이어 선교비로 교회 건물이 지어졌다. 그리고 작년 11월에 헌당했다. 그 후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그 지역에 많은 선교사님들이 관심을 갖게 되어서 이제는 나 홀로 사역을 하는 것이 아니라, 주변의 가까운 지역을 포함해서 4명의 한인 선교사님들과 미국 선교 단체 2개가 연합되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과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고 있다. 

이렇게 되다 보니 이제는 하비에르 목사님은 단순한 엘 파라이소 지역의 목사님이 아니다. 선교사인 나와 함께 협력하며 동역하는 목사님인 것이다. 그래서 올해 초에 교회의 목표와 계획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고 여쭈었던 적이 있었다.

지난 주에도 함께 차를 타고 마나구아로 내려 오다가 다시 여쭈었다. 목회는 계획대로 잘 이루어지고 있습니까? 앞으로의 계획은 어떠하십니까? 제가 도와 드릴 일은 없습니까? 가족은 어떠십니까? 등등.... 
역시 목회는 힘들다. 나도 짧지 않은 시간을 이민 목회를 해서 목회에 대한 이해도가 낮지 않다. 니카라과의 목회도 만만치 않다. 무엇보다도 힘든 것은 성도들의 헌신을 볼 수 없다는 것이다. 니카라과의 문화가 그렇다. 역사적 이유로, 또한 사회 문화적인 이유로 그럴 수 밖에 없다. 그러니 혼자서 목회라는 무거운 수레를 끌고 가는 것 아닌가? 특별히 개척 교회 일 때는 부언할 필요가 없다.

하비에르 목사님께서 답하신다. 올해에는 30명을 전도해서 교인으로 받아 드리기로 했는데, 현재까지 15명을 전도하셨다고 한다. 아직 15명을 더 전도해야 한다고 다짐하신다. 그리고 교회의 찬양팀을 구성해야 하는데 키보드를 필요로 하신다고 한다. 친구 목사님의 교회에서 키보드를 가르쳐 주시는데 그 곳에 교인을 보낼 예정이라고 하신다. 키보드만 하나님께서 보내 주시면 찬양팀을 구성하실 수 있다고 한다. (라틴 문화가 모두 그렇지만 흥이 넘치고 감성이 있는 찬양이 예배에 중요하다.) 이 두 가지를 목표를 두고 함께 기도하기로 약속했다. 

선교사로서 돕고 싶은 것이 많고, 도울 수 있는 것도 있지만 절제해야 한다. 아무리 좋은 의도라도 교회와 목사님의 자립심에 해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독일의 신학자인 디트리히 본 하퍼 목사님께서 기독교 윤리에 대해서 고민하시며 이런 말씀을 하셨다. “형제를 파멸시키는 진실과 형제를 살리는 거짓” 중에 무엇이 정녕 하나님 앞에서 칭찬을 받는 것인지는 이 땅에 사는 동안은 분별하기는 쉽지 않다. 독일 나치 앞에서 유대인 형제 자매를 숨겨야 하고 그들을 위해서 거짓을 말해야 했던 갈등 속에서 나온 고민이었을 것이다. 

나에게는 그런 극한 상황에서의 고민은 아니지만 조금은 고민을 했다. 그리고 키보드를 구입해서 여호와 이레 교회에 봉헌해야겠다고 마음에 결정했다. 그 결과는 하나님만 아시리라. 그러니 필요한 키보드 보내 드리고 기도를 열심히 하자고 생각했다. 우리의 판단은 참으로 부질없다. 기도가 최고다.




    4월10일, 2010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시니라“ 라고 말씀하시는 잠언 16장 9절은 누구나 묵상하고 또한 체험을 통해 고백하는 성경 말씀이다. 특별히 선교하는 자에게는 더욱 많이 체험된다. 그리고 체험 가운데 성경 말씀을 새로운 관점에서 보며 깨닫게 되는 은혜와 축복이 주어진다.
얼마 전부터 엘 파라이소 교회에서 아동 급식 사역이 시작되었다. 매일 적지 않은 어린아이들이 모여든다. 우리 아이들이 급식을 받는 모습만을 봐도 절로 즐겁다. 엘 파라이소의 사역을 시작했던 지난 해에 그런 소망이 있었다. - '언젠가는 엘 파라이소 아이들에게 교회를 통해서 급식을 해야지...' 그러나 급식은 재정의 지속적이고 안정적인 흐름이 있어야 하기에 함부로 시작할 수 없는 사역이다. 2008년에 시작했던 아동 급식 사역은 6개월을 넘기지 못하고 마무리 지어야 했었다. 협력했던 현지 교회에 죄송했고, 찾아 왔던 어린이들에게 너무도 미안했다. 아픔과 죄송함에 제대로 인사도 못하고 떠났다. 전적으로 나의 책임은 아니었지만 시작했기에 전혀 책임이 없다고 할 수 없다. 그들도 나도 같은 아픔 속에 있었다. 그 아픔을 통해서 얻은 교훈도 많다. 
열정도 비젼도 좋지만 무엇보다도 순리대로 사역을 이루어 가야 한다는 것이다. 다른 말으로 표현하면 이렇다. '''기도하며 하나님께서 이루어 주시는 시간을 기다리는 것이다." 열정만 가지고 사역을 할 수 없다. 열심을 다해 달려 가도 틀린 방향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걸음을 인도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을 따라야 한다. 
그래서 이번에는 기다렸다. 간절함이 조급함을 가져왔지만 시작하지 않았다. 대신 기도 가운데 기다린다. 예레미아 애가 3장 36절의 말씀이다. "사람이 여호와의 구원을 바라고 잠잠히 기다림이 좋도다" 때로는 파수꾼의 간절함으로 기다려도 아침 태양은 여호와께서 허락하실 때 뜬다. 간절함이 해를 올라오게 하지는 않는다. 
기다림 가운데 하나님은 당신의 방법으로 응답하셨다. 인터내셔날 사마리탄스 라는 선교 기관에서 협력 요청이 들어왔다. 생각지도 못했던 연결이었다. 그 선교 기관에서는 빈민 지역의 교회들과 협력하여 급식 사역을 2008년 말부터 시작했다. 원래 열악한 지역이다 보니 그 곳에서 먼저 연락이 온 것이다. 그 선교 기관과 동역을 위해서 요구하는 조건이 있었다. 무엇보다도 교회 건물이 있어야 한다. 급식이 반드시 교회 건물 안에서 말씀과 함께 이루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감사하게도 작년 11월에 디트로이트 연합 장로 교회의 오병이어 프로젝트로 교회 건물이 들어섰기에 동역 조건이 이루어져 있었다. 교회를 건축할 때는 누가 감히 하나님의 지혜와 계획을 알았을까? 
급식 사역을 시작하면서 부엌 기구도 들여 왔다. 100여 명의 아동을 먹일 수 있는 양의 밥을 지을 수 있는 크기의 솥이 필요했다. 마치 한국의 가마솥과 같은 모양이다. 그 가마솥을 구입해서 교회에 가지고 도착했을 때, 목사님과 여선교회 자매님들이 모여 있었다. 그리고 간단한 예배를 드렸다. 가마솥 예배는 처음이다. 가마솥 앞에서 함께 기도 했다. 가마솥을 앞에 놓고 말씀을 나누기도 했다. 가마솥에 손 언고 축복의 기도를 했다. 헌물의 기도였다. 감사하는 기도였다. 찾아 오는 자녀들을 위한 기도였다. "이 가마솥을 허락해 교회에 허락하심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이 가마솥에 성령의 기름 부음을 허락하소서"
그 가마솥에서 나오는 밥을 먹는 아이들마다 성령의 사랑으로 충만해 지기를 바란다. "그 후에 내가 내 영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 요엘서 2장의 말씀이 이루어 지기를 기도한다. 이 가마솥에서 나오는 밥을 먹는 자녀들이 비젼을 가지고 장래를 꿈꾸며, 기대하며, 노력하는 자들이 되기를 소원 한다. 엘 파라이소 빈민촌의 자녀들에게도 꿈과 소망과 비젼이 있으면 좋겠다.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시니라“ 여호와의 인도하심을 따라 걸어가며 여호와의 구원을 바라고 잠잠히 기다리는 자에게 평안과 감사와 축복이 주어짐을 새삼스럽게 깨닫는다.


 March 3, 2010

정기적으로 써 왔던 선교 나눔을 쓰는 일이 이번에는 버겹게 느껴진다. 그리고 벌써 나눌 것은 많이 나누었기에 오는 그런 버겨움일 수도 있다. 물론 누리고 있는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와 돌보심을 나누는 것이 선교 나눔이기에 버겹게 느낄 이유가 없음을 안다. 그러나 이렇게 버겹게 느껴지는 다른 큰 이유가 있다. 쓰고 싶지 않은 내용을 적어서 나누어야 하는 불편함이다. 걱정거리를 나누어야 하는 어려움이다. 하지만, 현재의 마음과 고민을 함께 나누고 기도를 부탁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솔직히 나누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올테가 목사님은  함께 많은 의논을 하고 조언을 얻는 분이다 분과 식사를 하면서 사역에 대한 이런 저런 이야기를나누었다그러던  무숙자 사역이 너무 부담이 된다는 내용이 튀어 나왔다무엇보다도 그들을 돌보면서 마음의 부담이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크다고 말했다다른 한가지는 사역을 통한 인간적인 보람이 많지 않다하나님 앞에서는 상급이 많은 사역이지만 말이다. 또한 동네 사람들의 불평이 너무 무겁게 눌러 왔다고 나의 섭섭함을 이야기 했다. 자기 민족을 돕는 일인데 도와 주지는 못할 망정… 하는 마음이다.

반면에동네 주민들의 불편함과 불평도 이해 할만 하다. 작년 12월에 한번 살인 사건이 발생했다그런  2 둘째 주일에도 ‘마체태라는 대칼 싸움이 일어나서 시체를 치운 적이 있다얼마 전에는 시장에 나갔다가 물장사하는 형제를 만났다질문: ‘무초 티엠포  베르 에르마노.’ (오랫동안  뵈었네요형제님:‘마테오 목사님센터로 가다가  맞을  했어요무서워서 못가요.’ 노숙자불량배매춘마약 등이  자리에 모이다 보니 지역이 험해진다.

지난 주에 있었던 일이다 형제가 와서 조용히 이야기  준다. ‘목사님저기 있는  ~   가지고 들어와 있어요.’  오는 형제라서 그냥 아무 생각없이 다가가서 말을 건냈다. "형제 가지고 있다면서…" 나를 향해 돌아 보면서답하는  형제의 눈빛이 매서웠다 눈빛은  마음에 겁을 밀어 넣었다형제는 말로 하지 않았다하지만, ‘그래서 어떻게 하겠다는 거요?’ 라는 의도를 눈빛이 대신 외쳤다나도 모르게 겁에 질렸다속으로 ‘주님’ 하는 기도와 함께  형제에게 설명했다. ‘우리 센타에서는 흉기나 마약또는 술과 담배를 소지   없는 규칙이 있습니다.’ 그러니 나에게 칼을주던지나가던지 하라고 명령이지만 사실은 조심스러운 부탁을 했다그의 눈빛으로  속에 밀어 넣은 두려움이 나를조금 멀지감히 서게 만들었다마귀의 영은 분명히 겁을 조장한다영적인 싸움이 되었다사랑으로 이겨야 한다그러나이겨도 너무 지치게 만든다.

주님의 사랑으로 이 사역을 얼마나 더 감당할 수 있을지… 하는 생각과 기도가 떠나지 않는다. 지난 주간에는 CPC 라는 지역 지도자 모임에 우리 센터의 대표가 불려 갔다. 센타로 인해서 지역 동네에 너무 많은 문제가 생기니 오전 11시 후에는 문은 닫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을 받아 들고 왔다. 그리고 몇 일전에 그 지도자 중에 한 사람이 와서 센터의 상황을 살펴 보고 있다. 선교로서 돕는 것도 좋지만 동네 사람들과 동네 어린이들은 늘 신경이 쓰여서 불편함이 많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나라고 해도 내가 사는 동네에 이런 부류의 사람들(?)이 모인다면 어떻게 받아 드릴까 하는 생각을 해 보았다. 많은 경우에 우리에게는 나의 편함이 이웃 사랑보다 더 중요하다.

이번 달에 있는 일이 계속된다면 노숙자 사역을 지역을 돕는 다른 사역으로 전환하고 싶다고 기도했다. 더 이상 이러한 어려움을 안고 사역을 이루어 나가야 하는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다. 이 사역은 귀하지만 다른 귀한 사역들도 많다고 아내 한미경 선교사와 이야기를 나누며 상의한다. 시장터에서 돌아 다니는 아이들을 위한 어린이 돌봄 사역도 이곳에 무척 필요하다. 노숙자 노인을 위한 사역도 필요하다. 또는 거리의 여성들을 위한 쉘터도 필요하다. 물론 현재의 노숙자 섬김 사역도 무척 귀하다. 주님을 섬기듯 이들을 섬기겠다고 하며 시작한지 벌써 오 년이 되간다. 이만큼 견디어 낸 것 자체가 주님의 은혜다. 요즘은 노숙자 섬김 센터를 나올 때마다 기도가 많다. 후원자 여러분들에게도 기도 부탁을 해야겠다고 생각해서 어려운 이야기를 나눈다.


                  (엘 파라이소 교회에서 성도들과 예배를 드리는 광경)

January 2010

2010년을 맞이해서 연초부터 올해에 집중해야 할 사역들을 정리하면서 기도해 왔다. 무엇보다도 선교의 현장에서 주님의 은혜를 체험하며 아버지를 더욱 알아가고 더욱 사랑케 되는 삶을 살 수 있는 은혜를 입었다는 것이 한없이 기쁘고 감사하기만 하다.

올해에는 아래의 것을 중심으로 섬길 계획이다.

1. 학교 사역 - 하얄리야 학교 사역은 전체 책임자의 직책에서 이제부터는 보조자로 섬기기로 했다. 지난 4년 반 동안 학교를 섬기면서 지역의 아동들에게 필요한 교육과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다. 이제는 설립자 되는 노상용 목사님께서 다시 맡으시고, 나는 뒤에서 뛰는 도우미로 섬기기로 역할 교환을 했다. 하얄리야 학교와는 계속해서 관계를 갖겠지만, 전과 같이 위치에서 섬기지 않는다. 가장 큰 이유로서는 기도해 왔던 새로운 기독교 중고등 학교 설립에 조금 더 열정과 시간을 투자해야 하기 때문이다. 작년 9월쯤에 새로운 학교 부지를 허락 받았다. 아직 땅 등기 서류가 완벽치는 않다. 기도 가운데 대지 등기를 진행하고 있고 있다. 땅 등기가 확실시 되는대로 학교 설립 준비를 위해서 건물 건축과 문교부 등록 등에 많은 시간이 투자될 계획이다. 산타 엘레나에 위치한 학교 부지를 다녀 올 때마다 마음에 감동이 흘러 넘친다. 이런 기회를 허락하신 아버지께 감사할 뿐이다. 열심히 해야겠다는 결심이 절로 생긴다.

2. 노숙자 사역 - 오늘도 우리 노숙자 형제 자매들이 먹는 밥을 받아서 함께 먹었다. 자신들이 먹는 식사를 선교사도 먹는다면서 좋아들 한다. 밥상을 같이 하니 더욱 가깝게 느껴지나 보다. 역시 함께 먹어야 가까워지는 것은 동서양이 한가지다. 요즘도 매일 180명에서 200명 가량이 무숙자 선교관을 찾아 온다. 처음 시작할 때 일주일에 한끼, 그들을 보면서 안타까운 마음으로 '일용할 양식 - 하루에 한 끼를 허락해 주소서'라고 기도했었다. 잘 차려진 밥상을 대할 때마다 배고파하는 그들을 생각하며 부끄러워 했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올해에도 이들을 지극히 사랑하시는 아버지께서 형제들의 필요를 채우실 것이다.

3. 의료 사역 - 올해는 옮긴 장소에서 의료 사역을 새롭게 시작했다. 이제는 제법 규모를 갖춘 의료 사역이 되었다. 일반과, 산부인과, 소아과, 치과, 안과, 그리고 의료 검진실까지 갖춘 의료 선교관이다. 감사한 것은 미국 의료 선교 기관(Austin Samaritans)의 도움과 니카라과 여성 암 퇴치 의료 단체인 Fundacion Ortiz Guardian(FOG)라는 기관에서 산부인과에 협력하기로 했다. 우리는 여성 암 (유방암, 자궁암) 검진 프로젝트를 한다. 그리고 암이 발견되면 FOG에서 치료를 담당하기로 되어 있다. 그리고, 의료 검진실에서는 노숙자 및 매춘에 관련된 여성들에게 HIV (에이즈) 검사와 STD (성병)에 대한 무료 검진을 해 준다. 그리고 국가 보건소와 함께 치료한다. 물론 찾아오는 모든 분들에게 육신뿐 만 아니라 영혼까지도 치유 받을 수 있도록 복음을 전하는 일에 관심을 갖는다. 이 사역을 맡아 열심히 섬기는 Denia 자매와 '기도하자'는 도전과 부탁, '하나님이 기뻐하실 거야'라는 격려가 서로를 대할 때마다 오고 간다. 하나님께서 이 사역을 어떻게 사용하실지 기대된다.

4. 엘 파라이소 교회 협력 사역 - 2009년부터 시작했던 엘 파라이소 빈민촌 사역도 그동안 많이 발전했다. 작년 11월에는 디트로이트 교회의 헌신으로 교회도 건축되었다. 그 지역의 가정이 필요로 하는 우물도 관심 있는 여러 교회들의 도움으로 다 채워졌다. 아직도 흙 길이지만 그래도 트랙터를 가지고 동네의 큰 길도 깔끔하게 다듬었다. 교회의 담임되시는 하비에르 목사님께서도 열심히 뛰신다. 올해에는 교회를 중심으로 지역 목회자 훈련, 지역 어린이 사역, 지역 전도 사역을 해 나갈 계획이다. 이번 토요일은 영화를 상영하고 전도 집회를 갖는 날이다. 늦은 밤에 먼 길을 다녀와야 하는 부담이 있지만 마음은 들떠 있다. 그 지역을 방문 할 때마다 그의 가난함, 단순함, 황량함을 통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

올해에도 귀한 사역을 위해서 든든한 기도와 재정의 후원을 간구한다. 2010년도 기대와 믿음으로 시작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