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일회장단 메시지
“이 건물을 다 둘러보았는데, 이 성전의 바깥 벽에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은 씌어 있었지만 기독교의 상징인 십자가는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가 없었습니다. 다른 곳에서도 이 교회의 건물을 본 일이 있지만, 역시 십자가를 볼 수는 없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말하면서 왜 십자가가 없습니까?” 저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우리는 대성당의 첨탑이나 예배당의 제단에 십자가를 사용하거나 성직복에 십자가를 부착하고, 책이나 기타 다른 출판물에 십자가를 새겨 놓는 기독교 동역자들 어느 누구의 마음도 상하게 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십자가는 돌아가신 그리스도의 상징인 반면 우리의 메시지는 살아 계신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것입니다.” 그러자 그가 물었습니다. 제 대답 때문에 그가 저를 잘난 척하거나 독선적인 사람으로 여기지 않았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입장에 대한 사람들의 첫 인상은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신앙의 중심 인물이라는 우리의 주장이 모순되는 것으로 보이게 할 수도 있습니다. 이 교회의 공식 명칭은 예수 그리스도 후기성도 교회입니다. 우리는 그분을 주님과 구세주로 예배합니다. 성경은 우리의 경전입니다. 우리는 메시야의 강림을 예언한 구약의 예언자들이 신성한 영감을 받아 말했다고 믿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 즉 아버지의 독생자의 탄생, 성역, 사망 및 부활 등의 사건을 전하는 마태, 마가, 누가 및 요한의 기록을 기쁘게 생각합니다. 고대의 바울과 마찬가지로, 우리도“[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며 이는] 이 복음[이] …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로마서 1:16)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베드로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가“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사도행전 4:12) 유일한 이름임을 단언합니다. 우리가 신세계의 성약으로 여기고 있고 고대에 서반구에 살았던 예언자들의 가르침을 전해 주는 몰몬경은 유대의 베들레헴에서 태어나 갈보리 언덕에서 돌아가신 주님을 증거합니다. 신앙이 흔들리는 세상에서 몰몬경은 주님의 신성함에 대한 강력한 또 하나의 증거입니다. 1,500년 전에 미대륙에 살았던 한 예언자가 쓴 그 책의 서문에는“유대인과 이방인들에게 예수는 그리스도시요, 영원하신 하나님으로, 모든 나라의 백성들에게 친히 나타내어 보이신다는 사실을 확신하게”하기 위해 그 책이 기록되었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그리고 현대의 계시의 책인 교리와 성약에서 그분은 이러한 확실한 말로 이렇게 자신을 선언하십니다. 그런 질문에 대해 저는 먼저, 이 교회의 어떤 회원도 모든 인류를 살리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버리신 우리 구속주께서 치르신 엄청난 대가, 즉 겟세마네에서의 고뇌, 재판정에서의 견디기 어려운 모욕, 살을 찢는 가시관, 빌라도 앞에서 폭도들이 그를 십자가에 매달아야 한다고 외치는 소리, 갈보리로 가는 길을 외롭게 걷는 그분의 무거운 발걸음, 손과 발에 커다란 못이 박힐 때의 끔찍한 고통,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분이 그 비극의 날에 십자가에 달리셔서“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누가복음 23:34)라고 외치실 때 그분의 육신에 가해진 모진 고문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고 대답드립니다. 이것이 바로 십자가, 즉 그분을 고문한 도구이며, 평강의 사람을 파멸시키기 위해 고안된 끔찍한 장치이며, 병자를 고쳐 주고 눈먼 사람을 보게 하며 죽은 자를 일으켜 세우신 그분의 놀라운 업적에 대한 악의적인 보상이었습니다. 그분께서 골고다의 쓸쓸한 언덕 위에서 돌아가신 곳이 바로 이 십자가 위에서였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잊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결코 그것을 잊어서도 안 됩니다. 그 곳에서 우리의 구세주, 구속주, 하나님의 아들께서 우리 각 사람을 위해 자신을 희생물로 바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분의 생명 없는 육신을 끌어내려 빌린 무덤에 황급히 누여졌던 유대의 안식일 전날의 어두운 저녁의 침울함은 심지어 그분을 잘 알고 있고 가장 헌신적인 제자들의 희망까지도 앗아가 버렸습니다. 그들은 예수께서 이전에 그들에게 말씀해 주신 것을 이해하지 못했기에 매우 슬펐습니다. 그들이 믿었던 메시야가 돌아가셨습니다. 그들이 온갖 소망과 신앙과 희망을 걸고 있던 그들의 스승께서 사라지셨습니다. 영생에 관해 말씀하시던 그분이, 무덤에서 나사로를 일으키신 그분이, 그분 앞에 죽어 간 모든 사람들과 똑같이 이제 분명히 돌아가셨습니다. 그분의 슬픔에 찬 짧은 생애가 이제 막을 내렸습니다. 그분의 생을 이사야는 오래 전에 이렇게 예언했습니다.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 받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이사야 53:3, 5) 이제 그분은 가셨습니다. 우리는 현재의 달력의 토요일에 해당하는 유대의 안식일의 오랜 시간 동안 그분을 사랑했던 사람들이 그분의 죽음에 대해 생각하면서 가졌던 느낌을 다만 짐작할 수 있을 따름입니다. 그런 후 우리가 알고 있는 것처럼 주님의 안식일, 즉 일주일의 첫째 날이 밝아 왔습니다. 슬픔으로 괴로워하며 무덤에 왔던 사람들에게 그 곳에 있던 천사는 이렇게 선언했습니다. “어찌하여 살아 있는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누가복음 24:5) 인류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기적이 여기에 있습니다. 그 이전에 그분은 갈보리에서 그분은 죽어 가고 있던 예수였습니다. 무덤에서 그분은 살아 계신 그리스도로 나타나셨습니다. 그 십자가는
유다의 배신이라는 쓴 열매, 베드로의 부인의 결과였습니다. 빈 무덤은 그분의 신성함에 대한 간증, 영생에 대한 확신, 그리고 이제 그분은 부활하셨기에 생명의 주가 되셨습니다. 이사야와 마찬가지로 그분의 제자들은 확실한 믿음을 가지고“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이사야 9:6) 하고 노래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욥의 다음과 같은 예언이 이루어졌습니다. 마리아가 처음으로 부활하신 주님을 보았을 때 무서워하던 베드로도 완전히 변했습니다. 의심 많던 도마까지도 진지하고 경건하고 실제적으로“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요한복음 20:28)라고 선언했습니다. 그 놀라운 순간에 주님께서 하셨던 잊을 수 없는 말씀은“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요한복음 20:27)는 것이었습니다. 그 후에 주님은 바울이 기록한 대로“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던]”(고린도전서 15:6) 것을 포함하여 많은 사람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서반구에도 주님이 일찍이 말씀하신 대로 다른 양들이 있었습니다. 그 곳에서 사람들은“하늘로부터 한 음성이 임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소리가 무리에게 고하여 이르기를 … 그런 다음 이 아름다운 기사에는 부활하신 주님께서 고대 미대륙 백성들 사이에서 베푸신 성역에 대한 많은 말씀이 이어집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현대의 증인이 있는데, 이는 이 경륜의 시대, 즉 이미 예언된 때가 찬 경륜의 시대를 열기 위해 주님께서 다시 오셨기 때문입니다. 영화로운 시현 속에서, 부활하셔서 살아 계신 주님과 그분의 아버지, 즉 하늘의 하나님께서 고대 진리의 회복을 새롭게 시작하시기 위해 소년 예언자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 후로
예를 들어 저는 자신의 조국인 베트남에 커다란 고통이 있었던 시기 동안에 알게 된 한 친구를 생각해 봅니다. 그는 침착한 사람이었으며, 또한 하나님, 즉 영원하신 아버지와 그분의 아들, 살아 계신 그리스도를 믿는 커다란 신앙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깊은 신념을 가지고 그가 이런 노래를 부르던 것을 저는 똑똑히 기억합니다. 나 너를 불러 깊은 물 건너나 구세주께서 살아 계시기 때문에 우리는 그분의 죽음의 상징물을 우리 신앙의 상징으로 사용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무엇을 사용합니까? 어떤 표적이나, 어떤 예술 작품, 어떤 형태의 표현도 살아 계신 그리스도의 영광과 경이로움을 표현하는 데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분은 어떤 것이 그러한 상징이 되어야 하는지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요한복음 14:15) 그분을 따르는 사람들로서 우리는 그분의 이미지를 손상시키지 않고는 천하거나 허울만 있거나 불쾌한 것을 행할 수가 없습니다. 또는 우리가 짊어져 온 그분의 이름이라는 상징을 더욱 빛나게 갈고 닦지 않고서는 선하고 점잖고 관대한 행동을 할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보다 의미 있는 표현, 즉 살아 계신 하나님의 영원한 아들이신 살아 계신 그리스도에 대해 우리가 지닌 간증의 선언으로서 우리의 삶을 상징으로 삼아야 합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그것은 아주 단순하면서도 심오한 것으로 6 우리는 결코 그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승리한 나의 구속주 신앙의 반석 인류의 주님의 영과 평안을 [리아호나, 200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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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전 애리조나 메사 성전을 보수한 후, 우리는 일반 공개 기간의 첫날에 다른 종교의 성직자들을 초대했습니다. 수백 명의 사람들이 초대에 응했습니다. 그들에게 설명을 하면서 저는 그분들의 어떤 질문에라도 대답을 해 드리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개신교 목사님께서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하셨습니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드리는 어린양에 대한 간증은 이러하니, 곧 저는 살아 계시다 함이니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