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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몬은 기독교인인가?

서 문 

1986년 7월 복음주의 기독교인들과 한 때 몰몬이었던 일부 사람들이 솔트레이크 시에서 기자 회견을 가진 후 예수 그리스도 후기성도 교회(The Church of Jesus Christ of Latter-day Saints)에 교회를 “기독교”로 부르지 말라고 촉구하는 진정서를 제출하였다. 이 진정서에는 미 49주와 31개국의 20,453명의 서명이 들어있었다.(Deseret News, 25 July 1986, p. A10을 보라)    

유타 주민들은 대부분 경악을 금치 못했다.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후기성도들은 “우리 교회의 이름이 예수 그리스도 후기성도 교회가 아니던가?”  “우리가 그리스도를 숭배하고 있지 않는가?”   “몰몬경은 예수 그리스도의 또 다른 성약이 아니던가?” 하고 자문하게 되었다. 유타 후기성도들은  “과연 그 누가 후기성도를 기독교인이 아니라고 의심할 수 있을까?” 하고 의아해 하였다.  몇 주가 지난 후 유타의 주요 일간지의 편집란에 실린 독자들의 편지 내용을 보면 이 진정서가 양측에 얼마나 격한 감정을 불러 일으켰는지 알 수 있다.  비난과 변론, 헌신과 험담이 논쟁 가운데서 적나라하게 드러났으나 양측이 관련된 기본 문제를 제대로 이해하고 있었다는 증거는 거의 찾아볼 수 없다.  

몰몬이 기독교인이 아니라는 비난은 이러한 비난을 거의 들어보지 못하고 설혹 듣는다 할지라도 말도 안되는 비난으로 간주하여 무시해온 유타주 후기성도들을 곤혹스럽게 만들런지 모르나 후기성도가 소수인 지역에서는 이러한 비난이야말로 예수 그리스도 후기성도 교회와 교리에 대한 비난으로 가장 자주 듣는 비난이다.  대부분의 경우 후기성도의 수가 소수인 지역에 사는 후기성도도 이러한 비난을 이해할 수 없는 것으로 여긴다.  따라서 이러한 비난을 이해하지 못하고서는 일관성 있는 답변을 해주기가 어렵다.    

본인은 본서가 두 가지 면에서 도움이 되길 바란다. 첫째는 본서가 후기성도는 기독교인이 아니라는 비난을 이해할 수 있게 해주는데 도움이 되길 바라고, 둘째는 이 비난에 대해 지적이며 논리적인 답변을 후기성도들에게 제공해주는데 도움이 되길 바란다. 그러나 본서는 적몰몬과 말싸움을 하고 싶어하는 분쟁의 정신을 가진 사람들에게 탄약을 제공하기 위해 쓰여진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분쟁의 정신은 언제든지 기독교인답지 못한 정신이기 때문이다.(교성10:63을 보라)   

본인은 예수 그리스도 후기성도 교회가 참되며 이 교회의 교리가 옳다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지만, 본서에서 이 두 가지 명제를 입증 하려거나 주장하려는 것이 본인이 의도하는 바는 아니다.  본서가 의도하는 바는 후기성도를 기독교 세계로부터 배제하기 위해 이용되는 주장에 결함이 있음을 보이는 것이다.  본인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원리는 정확하지는 않으나 공정하다.  즉 본인의 주장은 갑에게 적용되는 것이면 을에게도 적용된다는 속담에 기초를 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어거스틴이나 마틴 루터나 요한 바오르 이세가 기독교 주류와는 다른 믿음을 주장하거나 다른 견해를 보이더라도 여전히 기독교인으로 간주된다면, 조셉 스미스브리검 영도 이들과 똑같은 견해나 비슷한 견해를 보이더라도 기독교인의 자격이 박탈될 수 없다는 뜻이다.  만약 주된 기독교파들이 신학적인 차이나 교파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서로를 비기독교인으로 비난하지 않고 아량을 보일 수 있다면 후기성도가 보여주는 비슷한 차이점도 아량으로 보아 넘겨야 할 것이다.  이는 단순히 어떤 수준에서 게임을 하느냐 하는 정도의 문제다.    

한 때 신교와 구교가 서로를 배도하고 상대방을 기독교가 아니라고 주장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종교개혁이 있은 지 500년이 지나면서 신교와 구교는 서로에 익숙해져 일부 정통주의자들을 제외하고는 신교와 구교 사이에 존재하는 차이점에 아량을 보이려 한다.  신교와 구교는 지금도 상대편 교리에 동의하지 않으면서도 이러한 차이점을  “가족 내부의 차이점”으로 보며 넓은 의미에서 서로를  “기독교인”으로 부른다.    

문제는 예수 그리스도 후기성도 교회가 생긴지 160년 밖에 되지 않아 기성 교파들이 후기성도에 아직 익숙지 못해 그들 사이에서는 자동적으로 보이는 친절과 아량을 후기성도에게는 보이니 않는데 있다.  본인은 다음 장에서 후기성도는 단순히 표리부동한 신학의 희생자일 뿐이며 다른 기성 교파들 가운데서는 자유롭게 묵인되는 견해와 종교의식이 후기성도에게는 비기독교적이라는 낙인이 찍히게 되었다는 것을 밝히겠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본인은 이러한 비난은 공정치 못할 뿐만 아니라 논리적으로 결함이 있는 것임을 밝히겠다.  갑이라는 사람이 다른 기독교인과는 다른 의견을 고수하더라도 여전히 기독교인으로 취급받는데, 을이라는 사람이 똑같은 의견을 가졌는데도 비기독교인으로 취급받는다면 논리에 맞지 않는다.  갑에게 적용되는 것이면 을에게도 적용되어야 한다.   정직한 사람이라면 기독교인이거나 몰몬이거나 비몰몬이거나를 막론하고 결과가 기준이 없는 놀음이나 표리부동한 신학에서 비롯된다면 이에 만족할 수 없을 것이다.  

후기성도를 “기독교” 가족으로부터 배척하는 사람들은 여러 가지 복잡하고 상층되는 주장을 제시한다.  일반적으로 이 주장들을 다음 여섯가지 기본 범주로 분류해 볼 수 있다.    

(1) 단어 정의에 의한 배제:
(2) 왜곡에 의한 배제:
(3) 인신 공격에 의한 배제:
(4) 역사나 전통에 의한 배제 :
(5) 경전(성서)에 의한 배제:
(6) 교리에 의한 배제.  

이 광범위한 범주 하나 하나 마다 기독교의 본질과 역사 교리에 근거한 배제를 생각하기 전에 먼저 정의를 내리고 조사해야 할 미묘한 가정들이 있다.  이 가정들을 상세히 조사를 한 본인은 기독교의 본질과 역사 및 교리에 근거한 이러한 가설과 주장들이 비논리적이며 불공정한 것임을 알게 되었다.    

독자들은 본인이 고대의 글로부터 보기와 실례를 들 때면 이 실례들이 정통 기독교의 자료로 간주되는 것으로부터 나온 것이지 영지주의자나 마르시오니트파, 라니채니언파와 같은 비정통파의 글로부터 나온 것이 아님을 알아주기 바란다.  또한 본인이 권위 있는 현대 학자의 글을 인용할 때는 이들의 저서들이 널리 인정받는 존경받는 비몰몬 학자들, 즉 전문분야에서 인정받는 권위자들의 글만 인용하였다. 독자들은 본인이 고대나 현대의 별난 “권위자”의 글은 다루지 않았음을 알게 될 것이다.    

다음 장에서 본인은 정통(ORTHODOX)이라는 용어를 주된 기성 기독교를 가리키는데 사용할 것이다.  이는 단순히 편의상 그렇게 하는 것이지 본인이 “정통” 기독교를 신학적으로옳은 기독교로 인정한다는 뜻은 아니다.  

마지막으로 독자들은 내가 예수 그리스도 후기성도 교회의 교리와 브리검 영 대학교를 공식적으로 대변해 말하는 것이 아님을 알아주기 바란다. 본성에서 제시된 견해가 합당한 근거를 둔 것들이기는 하지만 혹 잘못된 견해가 있다면 그건 전적으로 본인의 책임이다.    

1 단어 정의에 의한 배제   

기독교인이란 누구인가?  이 용어는 신약 성서에 세 번 언급되어 있다(행11:26: 26:38 벧전4:16). 그러나 이 어느 성구에서도 용어가 정의되어 있지 않다.  웹스터 사전에 따르면 기독교인이라는 용어를 여러 가지로 정의할 수 있으나 가장 일반적인 정의는 다음과 같다: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가르친 진리를 믿거나 공포하는 사람, 또는 그렇게 추정되는 사람: 기독교 추종자: 기독교 원리와 도덕적인 원리를 받아들인 사람: 그리스도에게 보여 진 것으로 간주되는 충성을 하나님에게 보이는 자: 자신의 생활이 그리스도의 교리와 일치하는 자.” 두 번째로 가장 자주 오르내리는 정의는 “그리스도 교리나 믿음을 공포하는 교회나 그룹에 속한 사람”이다.    

가장 흔히 사용되는 이 두 가지 정의에 따르면 후기성도는 기독교인이다.  게다가 이 정의는 대부분의 후기성도 자신들이 기독교인이라는 용어를 다른 교파에 적용할 때 사용하는 정의이기도 하다. 그 러므로 후기성도들이 자신들의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의 참된 교회라고 확고히 믿으면서도 구교와 신교가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서로 달리 해석한다 할지라도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으며 그의 가르침을 따르려 하기 때문에 여러 교파의 개신교인과 구교인을 여전히 기독교인으로 받아들인다.  

기독교파 사이에는 교리의 차이점이 있는 게-어떤 경우에는 심각할 만큼- 사실이긴 하지만, 교인들은 일반적으로 자신이 속한 교파가 그리스도를 가장 잘 이해하는 가운데 그리스도를 따른다고 믿는다.  사전이 정의하듯 이것이 바로 대부분의 사람들이 기독교인이라는 용어를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이요 세상의 구세주로 믿는 사람들 가운데 존재하는 교리와 교파간의 차이점을 묵인하는 일반적인 명사로 사용하는 방법이다.  만약 기독교인이라는 용어가 이런 의미로 이해된다면 몰몬이 기독교인이 아니라는 비난은 참으로 심각한 비난이 아닐 수 없다. (비록 후기성도가 바른 표현이기는 하나 명확하게 밝힐 필요가 있을 때나 문맥상 필요할 때는 몰몬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겠다.)    

비표준적인 정의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이런 비난을 하는 사람들은 이러한 정의를 마음에 두고 기독교인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는다. 용어를 정의 하는 자가 용어를 좌지우지 한다. 예를 들어 후기성도들이(그들 자신의 개인적인 정의에 근거해) 기독교인을 선지자 조셉스미스의 신성한 부름과 영감서인 몰몬경을 믿는 사람으로 정의하여 후기성도가 기독교인이라는 결론을 내린다면 이 정의는 기술적으로는 맞을 것이다. 그러나 나머지 세상 사람들이 이같이 편협하고 왜곡된 정의에 동의할 것 같지 않으며 후기성도들은 언어를 교묘하게 이용하여 부정한 방법으로 게임을 한다고 비난할 것이다. 예수를 믿거나 믿지 않는 것에 대해서는 전혀 고려해 보지 않고 기독교인을 몰몬이 믿는 것을 받아들이는 사람으로 정의 하여 비몰몬들이 기독교인 아니라는 결론을 내리는 것은 비몰몬이 몰몬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사실, 어떤 사람들은 이러한 말장난으로 후기성도를 기독교인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이들은 기도교인을 일반적인 의미로 정의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교리와 다른 사람들을 제외시키는 편협한 종파적인 의미로 정의한다. 다른 교파사람들이 기독교인이라는 용어를 배타적인 방법으로 정의해 자신들을 배제할 때 아량을 보이지 못하는 사람들도 위치가 바뀌어자기들이 다른 교파 사람들에게 속임수를 쓸 수 있다고 믿으면 왕왕 이와같은 전략을 받아들인다. 그러므로 표면상으로는 이들이 후기성도가 예수 그리스도로를 믿지 않는다거나 그의 가르침을 따르려고 하지 않는다라고 심각하게 비난하는 것처럼 보이나 실제로는 후기성도가 그들과는 다른 방법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이해하고 경배한다고 말하는 것에 불과하다.    

어느 모로 보나 이런 식의 게임은 임시변통에 불과하다. 예를 들어 기독교인을 보수적인 정통파 신교를 믿는 사람으로 정의한다면 오직 정통파 개신교인만이 기독교인이 될 것이다. 기독교인을 교황 요한 바오르 이세의 지도력과 권위를 받아들이는 사람으로 정의한다면 오직 천주교인(로마 카톨릭)만이 기독교인이 될 것이다. 기독교인을 마키리오스 대주교나 쉐노다 교황의 권위를 받아들이는 사람으로 정의 한다면 희랍 정교나 콥트 교도만이 기독교인이 될 것이다. 이런 부류의 말장난은 마치 오리를 넓고 납작한 부리와 짧은 다리와 물갈퀴와 갈색 깃털을 가진 물새로 정의하고 물오리 암컷이나 숫컷은 깃털이 갈색이 아니므로 오리가 아니라고 우기는 거나 다를 바 없다.    

인간을 “남성”이나 “백인” 또는 “앵글로 색슨족”으로만 정의하는 사람들이 있듯 바로 이런 식으로 후기성도나 깃털이 자신들의 깃털과 다른 교파 사람들을 배제하기 위해 기독교를 교파적으로 정의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런 자들이 자신들의 깃털에 맞는 교파뿐만 아니라 모든 부류를 받아들일 수 있도록 그들의 정의를 바꾸게 할 수는 없으나 이들이 배제를 목적으로 비표준적인 정의나 공공연하게 특정한 분류법만을 사용하고 있다는 논리적 허위를 지적해 줄 수는 있다.    

웨인 에이 믹스(WAHNE A. MEEKS)에 따르면 신흥 종교를 미신으로, 그 종교에 속한 사람들을 무신론자로 왕왕 비난했던 이교도들이 고대 기독교인을 배척하기 위해 이와 같은 용어정의 전략을 이용했다니 아이러니칼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기독교인들은 자신들이 하나님(Gods)을 예배하므로 이러한 비난은 공정치 못한 것이라고 항의했지만 박해자들은 기독교인이 신들(gods)을 섬기지 않으므로 즉 이교도 신들인 다신을 섬기지 않으므로 무신론자라고 몰아부쳤다. 무신론자를 이런 식으로 특정하게 정의를 내려 기독교인을 비난하고자 했던 의도는 기독교인은 이교도와는 다른 방식으로 신을 예배한다는 것이었으나 이와 같은 비난이 대중에게는 기독교인은 신을 믿지 않는 비종교인이라는 인상을 심어 주었다(물론 그렇게 의도된 것이기는 하지만). 이 일로 말미암아 기독교인에 대한 증오와 박해가 한결 더 손쉬어졌으며 기독교인이 공정하게 발언할 기회를 갖기가 매우 어렵게 되었다. 그리스도를 예배하는 후기성도의 방식이 맘에 들지 않아 후기성도를 비기독교인으로 매도하고 싶어하는 기독교인들이 이와 똑같은 계략을 후기성도에게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후기성도를 포함한 다른 교파를 배제함   

기독교인이라는 용어가 예수가 그리스도이며 하나님의 아들이자 세상의 구세주임을 믿고 구약과 신약은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담고 있다고 믿는 사람을 뜻하는 것이라면 분명 몰몬은 기독교인이다. 후기성도가 이 모든 명제를 입증하는 것은 단순히 역사적인 문제다. 비록 후기성도가 교리상의 해석에서 다르다 할지라도(즉 다른 기독교인과는 깃털의 색이 다르다 할지라도)후기성도들은 근본적으로 분류학적인 유사성을 공유한다.  

반면 기독교인이라는 용어가 교파적으로 정의되어 “우리가 믿는 것을 믿는 사람”을 뜻한다면 이 문제의 교파는(교파적이며 비표준적인 용어를 사용하여) 몰몬은 기독교인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겠으나 이 모든 진술이 진정으로 뜻하는 바는 몰몬은 침례교인가 오순절 교인이나 다른 교파의 교인이 아니라는 뜻이며 이는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바다. 이런 경우의 비난은 배척하는 사람이 일반적인 정의를 사용한다면 그렇게 심각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자기의 편의에 맞추어 정의를 내린다면 몰몬에 대한 비난은 하찮고 쓸모없는 것이 되고 만다. 이 비난은 후기성도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안믿고와는 전혀 상관이 없다.    

자신이 믿는 교파에 상관없이 일반 “기독교인” 독자가 명심해야 할 것은 단어의 정의로 배제하는 사람들은 보통 후기성도만을 배척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 기독교인이라는 용어가 신교 정통파만을 뜻하기 위해 비표준적인 방법으로 정의된다면 후기성도는 분명 제외되지만 로마 카톨릭(천주교)과 희랍 정교 및 대다수의 신교-깃털 색이 다른 모든 오리-도 배제된다. 심지어 가장 보수적인 신교파가 적용하는 똑같은 배제가 팻 로벗슨, 로버트 슐러와 오랄 로버츠 등과 같이 편협한 종파적인 견해에 동의하지 않는 복음 전도자들을 “이단”으로 매도하기 위해 최근에 이용되고 있다. 이런 식으로 배제하는 사람들에게는 기독교를 이루는 가족이란 대단히 적다. 그들이 정의하는 기독교인이란 “참된 교회에 속한 교인[우리 교회]”이거나 “우리가 믿는 것을 믿는자”인 것이다. 자신의 교회만이 참된 교회라고 확고하게 믿는 후기성도도 기독교인을 이와같이 편협한 방법으로 정의하지는 않을 것이다.    

한번은 본인이 동부에서 여러 교파의 성직자들에게 강의를 한적이 있었다. 성직자 중 한 사람이 몰몬은 기독교인 아니며 이러한 이유 때문에 본인이 말한 모든 것이 가치없는 것이라고 계속 주장 하였다. 청중 가운데 천주교 사제가 있다는걸 알고는 그 성직자에게 천주교인은 기독교인이냐고 물었다. 그는 천주교인은 “구원받았다”는 경험 하나만을 통한 구원이 아니라 천주교의 성사를 통한 구원을 믿기 때문에 기독교인으로 간주될 수도 있겠으나 일반적으로는 그렇지 않다고 대답했다. 청중 가운데 그리스 정교회 사제가 있다는 걸 알고 있던 저자는 그에게 동방 교회는 기독교인지 물었다. 성직자는 “그들이 기독교인이 믿는 것을 믿는다면” 기독교인이 될 수 있다고 대답했다. 나는 그에게 정통 신교의 이론을 받아들이지 않는 진보 신교는 기독교인지 아닌지 물었다. “절대 아니오. 그들은 그리스도의 대의를 배신한자들이오”라고 대답했다.    

그 모임에 참석했던 많은 성직자들이 처음에는 몰몬이 기독교인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성직자의 말에 동의했을는지 모르나 똑같은 근거와 이유에서 나온 이 똑같은 비난이 자신들에게도 퍼부어지자 분노하게 되었다. 사실 이 성직자가 뜻했던 바는 다름이 아니라 몰몬과 천주교, 희랍 정교, 진보파 신교는 한결같이 정통 신교파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그의 주장 뒤에 숨어있는 명제는 사람들이 자신이 믿고 있는대로 믿지 않는다면 기독교인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나 분명히 그것에 근거를 둔 숨겨진 명제와 논리가 다른 기독교파에 사용될 수 없다면 후기성도에게도 사용될 수 없다.    

정통 신교와 다른 종파는 자신들의 목적에 맞게 자신들이 원하는 대로 기독교인이라는 용어를 정의할 수는 있다. 나머지 기독교 세계가 그러한 정의가 그들이 기독교인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방법이라고 이해하고 그들로부터 나오는 “몰몬은 기독교인이 아니다”는 주장이 단순히 몰몬은 그들과 견해가 다르다는 것을 이해하는 한 그들은 자신들을 전 세계에서 유일한 진짜 기독교인으로 정의하고 나머지 기독교파를 배척할 수는 있을 것이다.    

동의에 의한 기독교   

비기독교적이라는 용어를 기독교 가족 가운데서 찾아볼 수 없고, 가르치지 않고, 믿지 않는 것에 적용할 수 있다고 주장할 수 있겠으나 이러한 주장은 어려움에 부딪치게 된다. 먼저 이런 주장은 문제점을 증명하지 않고 이론을 펴 나가는 꼴이다. 누가 “기독교인”인가 알아내기 위해 조사해 볼 수도 있는 기독교 가족의 일원으로 후기성도를 취급할 수 있을까? 이 질문에 예/아니오라고 대답할 수 있기 위해서는 이 조사의 결과를 미리 추측해 보아야 한다. 따라서 문제점을 증명하지 않고 이론을 펴 나가는 것은 시험해 보아야할 명제의 결과를 예측하는 것과 같다. 이 경우에 있어서 명제는 “후기성도는 기독교인인가?”이다.    

둘째, 신약은 바울이 일부 기독교인과 함께 나눌 수 없는 것을(고린도 전서 3:1-2를 보라), 또는 어느 기독교인과도 절대로 나눌 수 없는 것을(고린도 후서 12:2-4) 확실히 알고 믿었음을 보여준다. 바울이 성서에서 가르치지 않고 다른 기독교인들이 몰랐던 것을 알고 믿었다는 이유 때문에 바울이 “비기독교인”인가“ 물론 그렇지 않다. 이런식으로 기독교인을 특별하게 정의하는건 통하지 않는다. 신약성서 자체는 누가 제자이며 누가 제자가 아닌지에 대해 매우 편협한 견해를 제시하지는 않는다. 사도행전 18:24-28에는 ”주의 도를 배웠으나“ 불완전하게 배운 아볼로에 대한 기사가 나와있다. 아볼로는 비록 말을 잘하기는 했지만 아길라와 프리실라가 하나님의 도를 더 완벽하게 자세히 설명하기 전까지는 그가 가르친 교리에는 결함이 있었다. 그러나 그의 교리가 바로 교정되기 전에 비기독교인으로 간주되었다는 암시가 없다. 이와 유사하게 바울은 에베소 근처의 ”어떤 제자들“이 불완전하게 복음을 배웠음을 알고는 그들에게 다시 침례 주겠다고 작정한다(행19:1-7). 그들이 비록 배운 바가 불완전하고 심지어는 그들이 교리적인 면에서 더 발전해야 했지만 그들은 아볼로처럼 제자로 불리웠다. 고린도의 기독교인들은 성숙지 못해서 바울은 그들에게 복음의 깊은 교리를 전혀 가르 칠 수 없었다. 그럼에도 바울은 그들을 성도로 불렀다(골전3:2: 1:2).   

바울의 서신은 모세 율법이 그리스도의 복음안에서 성취되었으므로 더 이상 구원의 필수조건으로 구속력이 없다는 점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따라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것을 기독교 교리로 간주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사도행전 21:20에서 야고보는 바울에게 ”형제여 그대도 보는바에 유대인 중에 믿는 자 수만명이 있으니 다 율법이 그리스도 안에서 어떻게 성취되었는지에 관한 기본적인 교리를 이해하지 못했지만 교회에서 쫓겨나지 않았다. 오히러 야고보는 바울에게 유대 기독교인들의 민감함을 가라앉혀줄 섭외활동 방법을 제안해 주었다(행21:23-24). 비록 그들의 교리에 결함이 있기는 했으나 예루살렘 교회 안에서 그들을 믿는자”로 간주해 아량을 보였으며 심지어는 그들과 교제하기까지 했다. 자비의 옹호자인 바울 자신이 자신의 교리와 상층되는 유대 기독교인들을 위해 큰 노력을 했다면, 교리가 서로 다른 모든 현대 기독교파들은 교리상의 차이를 갖는 교인들에게 비기독교인이란 낙인을 찍는데 신중해야 되지 않을까?  

요 약   

요약해 보자면 후기성도가 기독교인 아니라는 비난은 후기성도가 예수 그리스도 후기성도 교회를 믿느냐 안 믿느냐 하는 문제나, 후기성도가 신약성서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느냐 거부하느냐 하는 문제와는 하등의 상관이 없다. 기독교인이라는 용어가 표준 영어에서 사용되듯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과 세상의 구세주로 받아들이는 사람을 뜻하기 위해 사용된다면 몰몬이 기독교인이 아니라는 비난은 잘못된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인이란 용어가 특정한 교파의 견해에 따라 그리스도나 신약성서에 대한 믿음을 나타내기 위해 교파적인 의미에서 사용된다면 이 비난은 하잘 것 없으며 무익한 것이다. 왜냐하면 이런 식의 정의는 후기성도가 이런 비난을 하는 교파와 견해가 다르다고 말하는 것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전형적으로 후자의 의미로 기독교인을 정의 하는 자들은 몰몬 뿐만 아니라 개인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이 있든 없든 그들과 의견이 맞지 않는 사람이면 어느 누구라도 배척한다. 따라서 이런 편협한 공론가가 아니라면 단어 정의에 의한 배제와 관련된 논리상의 허위를 감지해 낼 수 있어야 한다.

2

허위제시에 의한 배제   

 

간략히 말하자면 허위제시에 의한 배제란 후기성도들이 믿지 않는 것을 놓고 후기성도를 비난하려는 시도다. 미합중국의 헌법은 사람들이 자신들이 원하는 방식대로 믿고 예배할 수 있는 기본적인 자유를 보장한다. 어떤 단체나 개인도 자신들이 교리를 다른 사람에게 강요할수 있는 권리는 없다. 이 기본적인 자유의 당연한 결과로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느 교회나 종교도 그들이 믿는 교리를 그들의 목적을 위해 정의하고 해석할 수 있는 권리가 있다는데 의견을 같이 할 것이다. 감리교인은 감리교인 무엇을 믿을지 결정하면 침례교인은 침례교인이 무엇을 믿을지 결정하므로 감리교회의 교리는 감리교인 자신들이 결정하는 것이지 다른 교파 사람들이 감리교인들이 누구이며 어떤 사람들이 되어야 하는지를 결정하지 않는다.   

적몰몬의 마음을 가진 독자들   

그렇지만 후기성도에게는 자신들의 교리를 정의하고 해석할 수 있는 이 기본적인 특권이 거부되어왔다. 종종 자신이 믿는 신조를 비몰몬에게 설명할려는 후기성도는 “아니냐, 그게 당신네들이 믿는게 아니야: 이게 바로 당신네가 믿는 거야” 라고 말하는 자칭 전문가의 방해를 받는다. 그런 다음 이 자칭 전문가들은 예수 그리스도 후기성도 교회가 가르치지 않는 엉터리 교리를 일사천리로 낭송하는게 보통이다. 이게 얼마나 터무니 없는 것인지 잠시 생각해보자. “당신은 당신이 무엇을 믿고 있는지도 몰라. 그러나 나는 당신이 믿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지. 나는 당신 생각를 당신보다 더 잘 알아!” 라고 말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전문직에 종사하는 저자는 직업생활에서 “미안합니다만 그건 제가 믿는게 아닌데요”라고 말한 적이 여러번 있었다. 그러면 아니다 다를까 정말로 개인적으로는 은밀하게 “나도 그것을 믿지요”라고 말하는 일부 적대자들에 의해 본인의 말이 강력하게 확인된다. “내말은 내가 책임집니다. 내가 믿고 있는 것에 관한한 본인은 세계적인 권위자지요 그런데 당신이 내가 믿느다고 말한 교리를 나는 믿어본 적이 없소”라고 내가 대답하면 보통 이러한 내 쪽의 선언은 아무런 소용이 없게 된다. 왜냐하면 이들은 이미 마음 속에 무엇이 나의 개인적인 믿음인지 무엇이 예수 그리스도 후기성도 교회의 믿음인지 이미 마음을 굳혔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를 부정하는 어떠한 간증도 이들은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나는 내 자신의 믿음을 정의할 수 있는 권리를 빼앗긴 셈이다.    

이런 사람들은 보통 몰몬 교리는 몰몬보다는 비몰몬들이 더 잘 이해하고 더 권위있게 해석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건 결코 내가 믿어온 것도, 내 교회가 믿어온 것도 아니오”라고 말하는 어느 정도 지식을 갖춘 후기성도 앞에서도 그들은 적몰몬들이 쓴 팜플렛이나 성직자의 말을 더 믿으려 한다. 사실 세상의 어떠한 후기성도도 교리로 가르치는 것을 들어본 적이 없는 터무니없는 엉터리 교리를 후기성도들이 믿는다고 주장하는 것이 종종 적물몬들의 신조가 된다. 몰몬의 교리는 몰몬이 믿는다고 말하는 것일까 아니면 몰몬의 적들이 몰몬이 믿는다고 말하는 것일까? 

적몰몬들이 후기성도에게 교리를 강요하거나 후기성도를 대신해 교리를 해석하려고 할때 생겨나는 허구는 보통 다음 세 가지로 분류해 볼수 있다: (1) 과감한 조작. (2) 진짜 몰몬 교리를 알아볼 수 없는 형태로 왜곡. (3) 후기성도 전통 안에서 찾아볼 수 있는 변칙(anomaly)을 마치 후기성도 공식 교리인냥 나타내 보임.  

조 작    

프락토 앤 갬블(Proctor & Gamble) 회사가 겪었던 한 가지 경험이 본 주제인 과감한 조작에 대한 약간의 배경이 될 수 있다. 극단적인 종교의 가장자리 그 어디에선가 비누 회사인 프락토 앤 갬블은 사탄 숭배자들이 소유하고 있으며 이 회사의 모든 이득은 사탄의 교회로 돌아간다는 루머가 1980대 초기에 시작되었다.  

분명 일부 “기독교인”들이 달과 13개의 별에 있는 남자가 13개의 식민지를 숭배하는 것을 보여주는 회사의 상표에 주목하게 되었고 이에 대한 확실한 증거가 없는 상태에서 이를 사탄의 상징으로 여기게 되었다. 이윽고 이 회사의 죄악을 상세하게 다룬 삐라가 전구에 배포되었으며 이 이야기가 퍼지자 루머가 확산되었다. 결국에는 사탄의 교회가 회사 전체를 소유하고 있으며 그 회사 중역이 도나후 대담쇼“에 출연해 회사가 사탄 숭배와 어떤 관계가 있는지 토론했다는 주장이 나오게 되었다.    

종교적인 광신자들에 의해 공격을 받고 있다고 인식한 프락토 앤 갬블 회사는 맞서 싸웠다. 그렇게 터무니 없고 그렇게 쉽게 퍼진 루머 따위는 쉽사리 잠재울 수 있다고 생각한 회사는 무료 대중 전화를 가설하고 누가 그런 거짓말을 퍼뜨리고 다니는지 알기위해 사립탐정을 고용하였다. 여러 주에서 거짓 내용을 담고 있는 책자를 유포한 사람들이 고발되었다. 회사는 피해를 입은 지역의 성직자들에게 소문이 거짓임을 입증해 주는 빌리 그래함, 제리 팔웰, 남부 침례 교회의 지미 드레이퍼, 그리고 신시메티의 천주고 대주교인 죠셉의 성명서가 담긴 회사 홍보 자료를 보냈다. 도나후 대담쇼 담당자들은 프락토 앤 갬블 회사의 어떤 관계자들도 자신들의 쑈에 출연한 적이 없으며 도나후는 이와 관련한 대담 쇼를 결코 한 적이 없다고 부인했다.  

그러나 모든게 허사로 돌아갔다. 프락토 앤 갬블이 대항해 싸웠던 극단적인 종교인들은 이 모순된 증거의 질이나 양에는 아랑곳 하지 않고 자신들이 무엇이든지 믿었고 이를 배포하였다. 진리를 알아내는 것 보다 그들에겐 공격대상이 있다는 것이 더 중요하였다. 결국 몇 년 동안 법과 홍보를 동원해 싸우던 미국내 굴지 회사인 프락토 앤 갬블은 백기를 들 수 밖원하는 것이면 에 없었으며 결국 상표를 없애야만 되었다. 극단적인 종교인들의 완고하고 의도적인 조작을 막아낼 수가 없었던 것이다.    

요지는 이렇다. 비누 회사 같이 전혀 무해한 단체가 비합리적인 종교단체에 공격 대상이 될 수 있다면 그리고 계속적인 거짓 유포를 완전히 막을 수 없다면 후기성도들은 어느 정도의 가능성을 가질 수 있을까? 후기성도와 후기성도의 믿음에 대해 가장 잔인하게 조작하고 유포한 점은 프락토 앤 갬블을 공격했던 점과 전혀 다를 바 없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 후기성도 교회는 변호사나 사립탐정을 고용하지도 않는다. 조작과 대항하기 위해서 엄청난 양의 편지나 홍보도 하지 않는다. 후기성도들은 자신들의 진짜 믿음을 듣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묵묵히 가르칠 뿐이다. 불행히고 프락토 앤 갬블 사건과 같은 내용에 말려들지 않을 만한 지식인도 후기성도를 매도한는 책자들이 쓰여지면 이 무지막지한 책자의 내용에 넘어가는 경우가 있다.  

본인의 가족이 펜실베니아에 살고 있었던 1983년 어느날 그 당시 열 살이었던 딸 쎄라가 눈에 띄게 흥분된 채 학교에서 돌아왔다. 수업시간에 초기 몰몬 개척자에 대한 이야기가 나와 선생님이 몰몬에 관해 아는 것이 있으면 어느 누구든지 이야기해 보라고 했다는 것이다. 쎄라가 응답하기 전 반 아이 하나가 “우리 아바지가 그러는데 몰몬은 유타에 살며 우상을 숭배하는 사람들이래요”라고 말했다. 쎄라는 재빨리 대꾸하였다. “나도 몰몬이데 우리는 우상를 숭배하지 않아.” 그러나 선생님은 쎄라의 말을 지지해 주지 않았다. 따라서 많은 반 아이들은 쎄라의 말을 믿지 않았다. 이는 자신들이 다니는 교회 주일학교에서 몰몬은 우상이나 조셉 스미스를 숭배한다고 이미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다시 한번 살아있는 말일성도의 개인적인 간증이 잘 알려진 적몰몬의 조작 내용에 따라 거부된 것이다.    

이러한 사건의 진상을 접할 때 중세와 중세 이후 유대인의 믿음에 대해 기독교인들이 취했던 태도가 생각난다. 유대인이 뭐라고 말했든지, 증거가 무엇이었든지 간에 많은 기독교인들은 유대인들이 비밀 의식에서 사람의 신체를 절단하고 있으며 기독교 어린이들을 살해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와같은 조작들로 말미암아 수세기에 걸쳐 수천 명의 유대인이 학살되었다. 유대인의 믿음과 풍습에 대한 기독교인들의 이와 같은 견해가 사실은 진짜 유대인들의 믿음과 풍습과는 전혀 무관한대도 유명한 기독교 믿음이 되어 버렸다.    

왜 곡   

조작과 가까운 친척은 왜곡이다. 왜곡은 근거가 전혀 없지는 않다는 점에서는 조작과 같지만 후기성도들이 실제로 믿고 있는 교리와 관계가 있다는 점에서는 조작과 다르다. 그러나 조작에 의한 배제와 마찬가지로 왜곡에 의한 배제도 똑같은 목적을 가지고 있다. 비록 왜곡된 교리가 실제 후기성도의 교리와 비슷하다 할지라도 후기성도들이 믿고 있지 않는 믿음 때문에 후기성도들이 논리적으로나 이치적으로 비기독교인으로 간주될 수는 없다.  

그들 자신의 교리는 그들 자신들이 말하게 하자   

저자가 막 대학원을 마쳤을 때 전공 분야가 아닌 천주교에 대한 강의를 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동료 교수들은 몰몬이 감리교회 대학에서 천주교를 강의하는 것 보다 더 초 교파적인 일은 없을 거라고 말했다. 또 실제로 이 경험은 본인의 직장 경험 가장 보상이 큰 경험이 되었다. 여러 해 동안 비 천주교인이 천주교회를 본인에게 설명해 주었는데 이번에는 본인이 실제로 천주교 신학자가 설명하는 천주교도의 믿음에 대한 책자를 읽었다. 나는 카톨릭이 내가 배워 온 그런 종교가 아니었음을 알게 되었다. 강의에서는 "nihil obstat" 또는 "imprimatur"라고 명시된 책만을, 즉 천주교회가 공식적으로 승인한 책만을 보도록 지명하고 또 이 책들만을 사용했다. 본인은 날마다 학생들과 함께 배워 나갔으며 한때 본인이 천주교회의 교리의 일부로 잘못 알았던 왜곡되고 거짓된 교리를 버리게 되었다. 이 경험으로 인하여 어떤 종교든 자신들이 피력하고 자신들이 믿는 교리를 설명하도록 허용되어져야 하며 다른 모두에게도 똑같은 특권이 주어져아 한다는 확신을 더욱 굳히게 되었다.      

후기성도를 비판하려면 적개심을 가진 비평가들이 후기성도의 교리라고 여기거나 후기성도 대신에 그들이 해석하는 후기성도의 교리가 아니라 후기성도들이 실제로 믿고 있는 교리를 비판해야 하는 것이 정당하다.  

후기성도를 비판하려면 적개심을 가진 비평가들이 후기성도의 교리라고 여기거나 후기성도 대신에 그들이 해석하는 후기성도의 교리가 아니라 후기성도들이 실제로 믿고있는 교리를 비판해야 하는 것이 정당하다. 만약 후기성도가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 단지 평범한 인간에 불과하다고 믿거나 예수가 아닌 다른 사람을 숭배한다면 당연히 후기성도는 비기독교인으로 간주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몰몬이 그러한 믿음을 가지고 있는지 안으면 몰몬의 적들이 몰몬들이 그러한 교리를 믿고 있다고 하는 것인지가 먼저 밝혀져야 한다. 분명 논리적인 구도자라면 몰몬이 믿지 않는 교리를 근거로 후기성도를 논리적으로나 이치적으로 비기도교인으로 간주해서는 안된다는 점을 인정해야한다.    

무엇이 공식교리인가?   

그렇다면 무엇이 몰몬의 참된 교리란 말인가?  무엇이 후기성도의 “nihil obstat"이며 ”imprimatur"일까?  후기성도들의 진짜 믿음은 무엇일까?  세상 어느 곳에나 있는 어느 몰몬들이라도 믿고 있는 것이 있다면 모두 “몰몬”교리로 간주될 수 있을까?  만약 후기성도였던 본인의 할머니가 개구리가 사마귀를 생기게 한다고 믿었거나 지구가 평평하다고 믿었다면 할머니의 그러한 믿음이 후기성도의 교리가 될 수 있을까?  어떤 후기성도 선교사가 지구는 속이 비어있으며 잃어버린 열 지파가 지구 소게 숨었다고 믿는다면 그의 믿음이 후기성도 교리가 될까?  물론 그렇지 않다.    

결국 모든 종교는 교회의 공식 교리와 교회 구성원의 개개인이 믿는 믿음을 구분해내는 절차를 가지고 있다.  사실 몰몬교의 절차는 많은 개신교의 절차와 매우 흡사하다.  이 절차의 한 예는 1880년 10월 10일 후기성도 교회의 50차 반 연차대회의 기록에서 찾아볼 수 있다.  본 대회에서 죠지 큐 캐논 부 대관장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 본인의 손에는 하나님의 계시를 담고있는 교리와 성약과 값진 진주가 들려있습니다.  커틀랜드에서 처음 출간되었던 최초의 교리와 성약을 투표에 붙이기 위해 교회 역원과 회원 여러분 앞에 내놓습니다 초판에는 들어있지 않았던 계시를 출판하므로써 초판에 첨가되었으므로 본 대회에서 본 책과 책의 내용를 하나님에게서 온 것으로 받아들이고 우리를 한 백성과 한 교회로 결속하는지 아닌지를 거수지지를 통하여 결정할 목적으로 본 대회이 책들을 내놓는 것이 현명하다고 생각되었습니다.    

이 이후 교회가 가지고 있는 표준 경전의 내용이 변경될 때마다 비슷한 방법으로 회원들의 지지를 받기 위해 연차대회에서 회원들에게 제시되었다.  교회의 교리로 모든 교회 회원들에게 공식적인 구속력을 갖는 변화를 가져오는 것은 바로 회원 개개인이나 회원을 대표하는 역원들의 지지 투표인 것이다.  

윌포드 우드럽 회장이 회원들에게 복수 결혼을 중지하라고 명했을 때 그의 공식 선언은 1890년 10월 6일 교회의 60차 반 연차 대회에 제출되었으며 본 대회에서 이 선언문을 권위적이며 구속력을 갖는 것으로 만장일치로 받아들였다.  이 선언문을 교회의 공식 교리로 만든 것은 바로 이 투표였던 것이다(교리와 성약에 공식 선언문-1로 인쇄되어 나온다.  킴볼 대관장이 1978년에 하나님으로 부터 계시를 받아 모든 합당한 남자에게 신권이 주어질 수 있다는 선포를 했을 때 이 선언문은 1978년 9월 30일 연차대회에서 지지를 받아 공식 선언문-2가 되었다.    

후기성도 교회의 총관리 역원이었던 비 에이치 로버츠도 이 주제를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  

  • 교회는 세상 앞에서 하나님이 계시하신 것들이 기꺼이 구속력을 갖도록 해주면서 교회가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교리의 원천을 한정해 왔습니다.  여기에는 성경, 몰몬경, 그리고 교리와 성약값진 진주가 포함됩니다.  이 경전들은 거듭하여 대회에 참석한 교회회원들에 의해 받아들여졌으며 지지되어왔습니다.  따라서 이 경전들은 우리가 절대적으로 의지해야할 교리의 유일한 원천입니다.    

물론 책과 기사를 쓸 수 있는 교회의 대관장과 십이사도에서 부터 회원 개개인에 이르기까지 교리적인 문제에 관해 개인적인 의사를 피력해 온 것은 사실이지만 그러한 견해들이 연차대회에 제출되어 회원들의 지지를 받기 전까지는 구속력도 없으며 교회의 공식 교리도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 후기 성도교회의 교리를 배평하는 사람들은 이러한 중대한 차이를 거의 구분하지 않고 있다.  만약 후기성도 한 사람이, 그것도 저명한 교회 역원 중의 한 사람이 어떤 것에 대해 말했다면 이 비평가들은 이 특정한 진술이 주어진 상황이나 다른 후기성도들도 이것을 말했거나 믿었는지는 아랑곳하지 않고 이를 몰몬의 교리인냥 취급해 버린다.  종종 후기성도 자신들도 이와 같은 잘못을 저지르고 있으며 표준 경전에서 찾아볼 수 없는 그리고 오늘날 교회에서 가르치지 않는 새로운 교리를 찾아 이것이 마치 몰몬의 탈무드나 되는냥 강연록(Journal of Discourses)을 뒤적거리는 경우가 종종 있다.    

일반적으로 비평가들은 후기성도는 조셉 스미스와 브리검 영이나 다른 총관리 역원들이 언급한 것이면 모든 것을 교리로 방어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교리에 대한 후기성도의 생각을 그렇게 지나치게 늘릴 수 없다.  후기성도는 살아있는 선지자가 때로는 선지자로서 말을 하기도 하며 때로는 개인적인 견해를 진술하기도 한다고 생각한다.  이와 같은 차이는 다른 기독교의 차이와 다를 바가 없다.  예를 들어 비록 천주교인이 “교황 무류설”을 믿는다 할지라도 그들은 교황이 분명하게 정의된 특정한 상황, 즉 그가 신앙과 도덕적인 문제에 관하여 권위를 가지고 말할 때만 완벽하다고 믿는다.  그렇다면 후기성도들도 비슷한 구분을 할 수 있지 않을까?  후기성도의 견해는 조셉 스미스 자신이 간결하게 표현하였다: “나는 그들에게 선지자란 선지자로 행동할 때만 선지자라고 말해주었습니다. ”   

반면 반몰몬 비평가들은 종종 교회의 선지자들은 항상 예언자로 말하고 글을 써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와같은 절대주의자적인 기대는 일반적으로 비평가들이 가지고 있는 예언과 경전에 대한 극단적인 완벽함을 기대하는 견해로부터 나온다.  성경이 글자 하나 하나 완벽하며 영감을 받아 쓰여졌다는 비평가들의 믿음 때문에 선지자라고 주장하는 사람에게도 똑같은 요구를 하게 된 것이다.  비평가들의이 후기성도와 선지자들에게도 완벽한 견해를 강요할 수 있을지 모르나 후기성도들은 이러한 견해를 가지고 있지도 않으며 경전과 선지자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경전은 올바로 번역되는한 하나님의 말씀이며 예언자들은 때론 하나님을 대변해 말을 하기도 하고 때론  자신의 견해를 피력하기도 한다.  후기성도가 완벽주의자들이라면 앞에 말한 것과 같은 견해는 분명 모순이겠으나 후기성도들은 완벽주의자들이 아니므로 이러한 견해는 완벽주의자들만 속타게 만든다. 비 에이치 로버츠는 이를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  교리문제는 조셉 스미스브리검 영으로부터 나왔다고 하는 말을 인용하는 것만으로 충분치 못합니다. 우리 교회 회원들도 이 문제에 있어 교육과 교정을 받을 필요가 있습니다.  과거 총관리 역원들 중에서도 "그렇지만 조셉 스미스가 그렇게 말하는 것을 직접 들었다" 거나 "브리감 영이 그것을 가르쳤다."라고 말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것이 아닙니다.
  • 문제는 하나님이 그것을 말씀하셨느냐 아니면 선지자가 그것을 공적으로 말했느냐에 있습니다.
     심지어 저명한 역원들의 출판물에 관하여서도 똑같은 원리가 적용됩니다.  이 출판물들이 교리에 대한 최후의 공소법정은 아닙니다.  이 출판물들이 설명하는 방법이 유용하거나 가르치는 교리가 매우 좋거나 건전할 수 있으나 교회 교리의 궁극적인 원천도 아니며 교회에 구속력을 갖지도 못합니다.  이 점에 있어서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과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인 것만이 교리이며 이 교리만이 우리에게 구속력을 갖는다는 것이 원칙입니다.

    종종 후기성도들은 반몰몬 비평가들을 대할 때 이것 저것 많은 것을 방어해야할 의무를 느낀다.  예를 들면 올슨 프랫이 이러 저러한 경우에 대해서 이러 저러한 이야기를 했을 수도 있었다고 해서 그의 말을 방어 해야할 필오는 없다.  올슨 프랫은 자신의 의견을 솔직하게 피력하였고 어떤 의견은 다른 총관리 역원의 의견과 맞지 않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종종 그는 자신의 견해가 교회의 교리가 안닌 자기 자신의 견해라는 것을 청중이나 독자에게 분명히 밝히라는 훈계를 자주 받았다.  한번은 교회 대관장이 그가 교리로 나타낸 의견을 공중 앞에서 철회하라고 훈계한 적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듭하여 올슨 프랫과 다른 사람들의 사견이나 심지어는 반 농담으로 한 말 조차 반몰몬들의 책자에서는 몰몬의핵심 교리로 다루어진다.  더욱이 이와같읕 차이점을 이해하기 못하고 과거 지도자들의 사견이나 생각들을 마치 교회의 공식 교리인냥 가르치는 일부 후기성도에 의해 문제는 증폭된다.

 물론 이제까지 이야기한 것이 예수 그리스도 후기성도 교회 내의 행정 문제에 있어서 총관리 역원들이 영감을 못 받는다거나 총관리 역원들이 모든 정책을 회원들에게 투표로 물어보기 위해 대회에 내놓아야 한다는 뜻은 결코 아니다.  이미 교회가 구속력이 있는 것으로 받아들인 교리와 성약에 기록된 계시들은 마치 주님께서 인간 개개인의 결정을 도와주실 때 지지투표 없이도 일을 하듯이 총관리 역원의 직책에 대한 성임과 더불어 이 총관리 역원들에게 교회의 일을 처리할 수 있는 열쇠와 권능을 준다.  그러므로 교회는 총회에 열쇠를 쥐고 있는 개개인을 지지할 뿐 그들이 하는 일을 세부적으로 하나 하나 지지하지는 않는다.  따라서 교회의 정책과 절차는 그러한 일을 행할 수 있는 열쇠를 쥐고 있는 사람이 공적인 것이라고 선포하면 "공적인"것이며 "영감적인"것이 된다.  이와 비슷하게 교회가 이미 받아들인 계시는 총관리역원과  다른 많은 사람들에게 "설교하고 가르치고 설명하고 권고할 수 있는" 권리, 즉 그들이 맡은 개인적인 청지기 직분 안에서 기존의 교리를 해석하고 적용할 수 있는 권리를 준다.  회장단과 십이사도는 총회에서 선지자요 선견자요 계자로지지받고 자신들이 속한 정원회의 합당하게 성임된 회원으로지지받는 것 외에 교회의 교리를 해석하고 정의하고 적용하고 교회사를 처리하고 교회의 정책과 절차를 집행하기 위해 회원들의 지지나 자격증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후기성도는 교회의 총관리 역원은 교회사를 처리하는데 있어 끊임없이 하나님으로부터 영감과 계시를 받는다고 믿는다.  후기성도들은 또한 교회 내에서 개인도 자신들의 개인적인 혜택을 위해 심지어 교리 문제에 대해서도 계시를 받을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교리에 관한 계시가 개인에게 주어질 때는 주님은 그 계시를 혼자만 간직하라고 명하셨다 (앨마12:9) 이런 계시는 일반적으로 교회를 위해 주어지지 않고 개인을 위해 주어진다.  어떠한 새로운 교리도 교회 대관장이 계시로 받아 총회에서 교회 회원에 의해 지지를 받지 않는다면 교회의 공식 교리로 구속력을 갖지 못한다.  

 마지막으로 후기성도의 입장에서 볼 때는 어떤 것들은 공식적인 교회 교리가 아니면서도 옳은 수 있다.  예를 들어 정 삼각형의 양 측면의 곱의 합이 빗변의 제곱과 같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피타고라스의 정의가 결코 교회 총회에서 지지된 적은 없다.  이와 비슷하게 교리에 관한 후기성도 개개인의 사견도 올바를 수 있으나-실제로 많은 후기성도가 그러한 사견들을 믿지만-사견이 옳다고 해서 교회의 공식 교리가 되지는 않는다.  사실일 수 있으면서 교회의 일부 회원들이 믿고 있는 이런 부류의 교리는 회원과 비회원 할 것없이 혼란시킨다. 그래서 총관리 역원들은 표준 경전만이 교회의 공식 교리를 담고 있으므로 회원들은 항산에 떠도는 문제를 피하고 오직 표준 경전의 내용만을 가르치라고 거듭 강조해왔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 후기성도 교회의 교리가 기독교 교리인지 아닌지를 올바로 판단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교회의 공식 교리에 근거하여 판단을 내려야 하며 후기성도가 교회의 공식 교리를 해석하듯이 해석해야 한다.

변칙 / 예외 

 반몰몬 비평가들이 종종 후기성도 교리를 그릇되게 제시하는 또 다른 방법은 변칙적인 교리를 마치 후기성도 교리인냥 잘못 제시하는 방법이다.  변칙(또는 예외)이란 인간이 추구하는 모든 분야, 심지어는 과학 분야에서도 일어난다.  변칙이란 기존의 교육이나 이론으론 설명될 수 없으나 그렇다고 규칙이나 이론을 변경할 만한 증거를 갖지 못하는 예기치 못한 일이다.  한마디로 변칙이란 과실이다.

 예를 들자면 화학자가 수소 둘과 산소 하나를 100번 연속 결합시켜 99번 연속물을 얻었으나 세 번째 알콜이 나왔다 할지라도 이 화학법칙이 일퍼센트 다르다는 뜻은 아니다.  이 말은 단순히 실험자가 무엇인지는 모르나 백번째 실험이 무언가 잘못 되었다는 뜻이다. 비이커의 표시가 잘못 될 수도 있고 졸업생이 농담했을 수도 있고 실험도구들이 제대로 작동되지 않았을 수도 있으며 비서들이 그릇된 정보를 입력했을 수도 있다.  만약 이 변칙이 실험상으로 반복된다면 이 변칙은 중요한 것이되며 따라서 이론에 변화를 요하게 된다 . 그러나  실험상으로 반복되지 않는다면 예외로 무시해 버릴  수 있는 것이다.  어떤 알려지지 않은 요인 때문에 결과가 예외적으로 달리 나오면 이러한 결과를 낳게된 실험을 무효라고 추측하는 것이다. 게다가 그러한 변칙을 무시하는 것은 부정직으로 간주되지 않고 오히러 건전한 과학적인 방법으로 간주된다.

 과학의 세계에서도 번칙이 있듯이 역사의 영역에서도 변칙이 있다. 후기성도의 전통 가운데에서 찾아볼 수 있는 역사적인 변칙은 물론 거의 알려져 있지 않거나 좀처럼 가르치지 않는 교리를 뜻하지는 않는다. 몰몬은 이 두 가지를 다 가지고 있으나 이것들이 변칙은 아니다. 후기성도의 변칙이란 교회 회원조차 이해할 수 없어 교회의 공식 교리로 받아들일 수 없는 교회 지도자의 진술을 뜻한다. 이 진술은 그 당시나 지금의 교회의 믿음과 교리와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으며 다른 선지자의 말씀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고 심지어는 똑같은 선지자가 한말이라도 상황에 따라 일치되지 않을 수 있다.  변칙에 있어 문제는 선지자를 믿어야 될 것인지 아닌지가 아니라 문제는 우리의 믿음을 위해 어떤 명제가 여기서는 제시되고 있느냐이다.

 많은 기독교파들은 고린도 전서 15:29를 변칙이나 예외로 제시한다. "만일 죽은 자들이 도무지 다시 살지 못하면 죽은 자들을 위하여 침례를 받는 자들이 무엇을 하겠느냐? 어찌하여 저희를 위하여 침례를 받느뇨? " 대부분의 교회가 죽은 자를 위한 침례에 관한 주제를 다룰 때 이 교회들이 당면하는 문제는 바울을 믿느냐 믿지 않느냐에 있는게 아니라 문제는 바울이 이 비평적인 구절로 뜻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정확히 아느냐에 있다. 성서는 이 주제에 관하여 더 이상의 정보를 제공하지 않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교리를 형성할 만큼 바울의 의도를 충분히 모른다고 생각해 이 구절을 예외로 접어둔다. 이 구절은 "바울이 무엇을 나타내려고 했던지 간에 그의 말은 의심할 여지없이 옳다. 그러나 바울의 의도하는 바가 무엇이었는지 확실히 알 수 없다."고 말한다.

아담-하나님 이론

 후기성도의 전통에서 찾아볼 수 있는 변칙의 고전적인 한예는 소위 "아담-하나님 이론"이다. 19세기 후반기에 브리검 영은 후기성도들이 지금까지 결코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아담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언급한 적이 있다. 그가 한 것으로 알려진 말은 브리검 영 대관장이 다른 시기에 언급했던 말과 상반될 뿐만 아니라 브리감 영 이전이나 이후의 예수 그리스도 후기성도 교회의 교리와도 상반된다. 그렇다면 후기 성도들은 이 현상을 어떻게 다룰까? 예외이기 때문에 우리는 이를 다루지 않고 단순히 무시해 버린다. 한번은 브리검 영 대학교의 동료 교수들과 브리감 영이 실제로 무엇을 말하려고 했는지 그리고 그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아볼려고 시도해 보았으나 시도할 적 마다 실패로끝나고 말았다.  브리감 영이 한 말은 도저히 이해가 안되는 말이다. 어것은 그것을 믿느냐 믿지 않느냐 하는 문제가 아니다. 우리는 단지 그것이 무엇인지 모르는 것이다. 만약 브리검 영이 이곳에 있다면 우리는 그에게 그가 한 말이 무슨 뜻었는지 물어 볼 수 있겠으나 그는 이곳에 있지 않다. 그리고 브리검 영을 전문적으로 연구한 전문가들도 그가 말을 잘못한건지 아니면 그가 할려고 했던 말은 이런건데 실제로는 다른 말을 한건지 아니면 성도들을 시험해 보기위해 농담한건지 아니면 이해하는데 필요한 어떤 중요한 요소가 생략된건지 전혀 모른다.

 그러나 후기성도들에겐 이 문제는 논의의 여지가 있다. 왜냐하면 브리검 영의 말이 옳든 그르든 그가 한 말은 지지투표를 받기 위해 교회 회원들에게 결코 제시된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의 말은 과거에도 교회의 교리가 아니었으며 지금도 마찬가지다. 자신의 실혐 결과를 설명 할 수도 없고 반복할 수도 없는 화학자처럼 교회는 이 현상을 단순히 예외로 처리한다.  

 그럼에도 반몰몬 비평가들은 브리검 영이 한 말을 그들 멋대로 해석했을 뿐만 아니라 "아담-하나님 이론"을 예수그리스도 후기성도 교회의 공식 교리로 승격시켜 놓았다. 다시 한번 몰몬의 교리가 몰몬의 비평가들에 의해 만드러지게 된 것이다. 이들에 따르면 브리검 영은 이브의 남편이자 가인의 아버지였던 아담이 영들의 아버지이자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이자 한나님인 엘로힘과 동일하다고 가르쳤다고 한다. 그러나 후기성도들에겐 이와같은 해석은 언제든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이러한 해석은 후기성도의 경전과도 상반되며 조셉 스미스의 가르침과도 다르며 브리감 영이 똑같은 시기에 했던 말과도 상반되기 때문이며 브리검 영이 친숙하게 잘 알고 있었던 후기성도 성전의 성스러운 의식과도 상반되기 때문이다.

 문제는 적몰몬들이 그들이 원하는 바를 믿을 수 있지만 후기성도들은 반몰몬 서적에서 설명되듯이 브리검 영이 "아담-하나님 이론"을 가르쳤다고 결코 믿지 않았으며 또 브리감 영이 그것을 믿었든지 믿지 않았든지간에 적몰몬들이 제시하고 해석하는 "아담-하나님 이론"은 후기성도의 신학에서는 발견되지 않는다. 본인도 이것을 믿지 않는다. 본인의 부모님도 이를 믿지 않았고 조부모님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우리 적들이 만들어 놓은 아담-하나님 이론을 후기성도의 가장 특정적인 교리로 제시하지 않는 적몰몬 서적들이 거의 없다. 이것이야 말로 잘못 제시하는 것이다. 이것은 정직하지 못한 짓이며 후기성도가 기독교인이 아니라는 비난을 정당화시키기 위해 사용될 때 이는 후기성도들이 믿지 않거나 가르치지 않는 것을 두고 후기성도를 비난하는 또다른 예인 것이다.

요 약  

 지금까지의 내용을 요약해 보면 후기성도는 조작이든 왜곡이든 또는 변칙이든간에 그들이 믿지 않는 것으로 인해 비기독교인으로 간주 될 수 없다. 예수 그리스도 후기성도  교회의 교리는 명확하게 정의 되어 있으며 누구든지 쉽게 구해볼 수 있다. 교회의 표준 경전(성경, 몰몬경, 교리와 성약 그리고 값진 진주)에서 찾아볼 수 있거나 총회에서 교회 회원에 의해 지지된다면 이는 교회의 공식 교리다. 교회가 지지한 사람이나 성역을 베풀 수 있는 열쇠를 지닌 사람이 교회의 공식 정책이자 절차라고 말하면 공식 정책이 된다. 다른 종파들은 자신들의 교리와 정책을 정의하고 해석할 수 있는 권리가 있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후기성도에게도 똑같은 권리를 주어야 할 것이다.
 

3

인신공격에 의한 배제

 

 논리적 사고를 다루는 교과서를 보면 인신 공격(ad hominem)이란 상대방의 논쟁에 실제적인 답을 주기보다는 욕설을 하는 것으로 설명되어 있다. 라틴어인 ad hominem은 개인에 반대하는 뜻이 담겨 있으므로 개인에 반대하는 논쟁은 그 논쟁의 논리 보다는 개인이나 단체에 느끼는 감정과 편견에 초점을 맞춘다. 따라서 인신 공격을 이용한 논쟁은 관련된 실제 문제를 모호하게 함으로써 빈약한 위치를 성공적으로 옹호하는데 꽤 효과적일 수 있다. 인신 공격은 종교 논쟁에서 자주 사용되어왔다. 천주교인은 개신교인을 "이단"으로, 개신교인은 천주교인을 "교황 추종자"로 천주교인과 개신교인은 유대인을 "그리스도를 살해한자"로 회교도는 이들을 "이교도"로 불러왔다. 그러나 지적인 말로 표현하자면 인신 공격 전략이란 "니네 종교 엉터리! 우리 종교 만세!"라고 말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사교(cult)"로서의 예수 그리스도 후기성도 교회 

 예수 그리스도 후기성도 교회를 비난 할 때 가장 자주 사용되는 이름은 "사교(cult)"다. 의심할 여지없이 이 용어는 드루이드 교단이 가는 가지로 엮어 만든 의자에 사람을 산채로 태워 죽이는 모습을 연상케하거나 온몸을 페인트 칠한 사제가 처녀를 화산 속으로 던지는 모습을 연상케 하거나 달 없는 밤에 행해지는 사탄 의식을 연상케 한다. 비평가들이 예수 그리스도 후기성도 교회를 "사교"라고 부를 때 그들이 의도하는 논리란 종교(religion)와 사교(cult)를 구분지어주는 객관적인 기준이 있으며 이 기준에 따르면 몰몬교는 사교이고 기독교는 종교이기 때문에 몰몬은 기독교인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이 논리가 갖는 결함은 실제로는 웹스텨 사전을 잠시 보아도 알 수 있듯이 religion과 cult를 구분지어주는 객관적인 기준이 없다. 웹스텨 사전은 cult를 다음과 같이 정의 하고 있다.  

  • 1: 종교 예배
  • 2: 신이나 정혼의 숭배와 관련한 믿음 체계
  • 3: a. 종교의 의식과 예배: 종교적인 경험의 형식적인 면
        b. 천주교: 하나님이나 동정녀 마리아나 성인들 또는 이들을 상징하거나 나타내는
                       물질에 보이는 경외심이나 의식을 통한 숭배
  • 4: 정통성이 없거나 가짜로 간주되는 종교 또는 그렇게 간주되는 소수 종교 집단:교파.

 정의 1,2,3에서는 cult와 religion의 뜻의 차이점이 없으며 두 단어가 거의 동의어로 사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4번째 정의만이 적몰몬들이 바라는 뜻에 가깝다. 그러나 이 뜻으로  사교를 사용하게 되면 종교 자체에 대한 객관성이 없어진다. 이러한 용어는 단순히 의심받고 있는 종교의 부정적인 인상만을 줄 뿐이다. 부정적인 뜻만을 전달할 뿐 사교라는 용어는 종교가 무엇인지 설명하지 못하고 단지 종교가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지를 보여줄 뿐이다. 이는 단지 내가 좋아하지 않는[보통 내 교회보다 작거나 내 교회보다 생긴지 오래되지 않은] 종교를 뜻하는 것이다. 사교는 설명하고 있는 종교에 관한 정보보다는 화자에 관한 정보를 전달해 주는 단어다. 따라서 사교는 객관적인 용어가 아니라 주관적인 용어다. 이교도와 유대인들에게는 초기 기독교인들은 사교였다. 그러나 이 용어는 사교라고 표현하는 사람들이 기독교를 싫어한다는 사실 이외에는 기독교에 관한 객관적인 것을 전혀 말하지 못한다. 표준 영어에는 반몰몬들이 정의하고 싶어하는 그런 객관적인 정의가 나와있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용어가 갖는 부정적인 뜻을 잃지 않고서도 객관적으로 사교를 정의하려는 시도가 여러번 있었다. 지금까지 이러한 시도는 전부 실패했다. 고인이 된 왈터 마틴이 제한한 마지막이자 가장 야심적인 정의를 예로 들어보자. 이 정의를 택한 이유는 반몰몬의 입장에서 볼 때에는 마틴은 분명 이 주제에 있어 많은 사람들이 동의하는 전문가이며 그가 가장 최근에 내린 가장 긴 정의가  cult를 가장 완벽하게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마틴은 자신이 제안한 객관적인 정의에서 정통 종교와 사교를 구분해 낼 수 있다고 자신이 믿고 있는 열까지 특징을 열거하였다. 자신의 저서에서 이 특징들을 열거하고 난 뒤에 마틴은 "우리 사회로부터 그리고 성서상의 기독교로부터 많은 신흥 사교를 구분해내는 모든 특징들을 여기에 제시하였다"고 독자들을 확신시켰다.
 그러나 마틴이 제안하는 정의가 갖는 결함-그리고 사교에 대한 이러한 모든 정의가 갖는 최대 약점-은 예수 그리스도  후기성도 교회에 적용될 수 있는 사교에 대한 객관적인 정의가 모두 다 신약시대의 기독교와 오늘날 대부분의 기성 교회들이 초기 단계였을 때 적용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마틴의 열 가지 특징을 하나 한 살펴보자,

 1, "오래된 사교든 신흥 사교든 보통 추종자들을 완전히 장악하는 막강하고 힘있는 지도자에 의해 시작된다."
예수 그리스도는 확실히 막강하고 힘있는 지도자로 인정받고 있다. 예수가 자신의 추종자들을 완전히 자신의 손아귀에 쥐고 있었다는 것을 즉, 자신의 제자들이 자신의 목숨까지 바치는 것은 물론이고 예수를 위해 무엇이든지 할려고 했다는 것을 의심할 수 있을까? 예수는 자신의 추종자들에게 모든 것을 버리라고 요구했으며(마19:27-29, 9:57-62를 보라) 때때로 자신의 제자들이 가족에게 해야할 사회적인 의무 수행조차 못하게 하셨다(누가복음 9:57-62). 예수가 자신의 추종자들을 완전히 손아귀에 쥐었던 강력하고 힘있는 지도자였기 때문에 신약에 나오는 기독교는 "사교"였을까?

 2, "모든 사교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성경 이외의 다른 경전이 있거나 성경을 대신한 경전을 가지고 있다."
 초기 기독교의 핵심적인 주장은 새로운 성약과 복음을 담고 있는 신약전서가 모세 율법인 구 성약과 이를 담고잇는 구약전서를 대신하게 되었다는 것이다(갈3:24-29, 히8:7-13 10:8-9). 갈라디아인들은 예수 생애 당시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였던 경전에 최소한 4뵥음서와 사도행전, 그리고 21서신과 계시록을 첨가하였다. 오늘날 반몰몬 비평가들이 몰몬경에 대해 격분하듯이 고대 유대인들은 초기 교회 당시 하나님의 말씀에 첨가된 이 의경들(유대인들의 입장에서 볼 때)에 격분하였다. 초기 기독교인들은 기존의 경전에 다른 경전을 첨가하였을 뿐만 아니라 신약성서는 구약성서를 성취하고 대치하였다고 주장하였으므로 왈터 마틴의 정의를 빌리자면 이는 초기 기독교가 사교였다는 또다른 증거다.

 3. "신흥 사교는 교인들에게 엄격한 표준을 요구하며 이 집단에 온전히 몸 담으려고 하지 않는 사람들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예수님 말씀에 따르면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다"(마태7:14). 사도 바울은 고린도 성도들에게 "만일 어떤 형제라 일컫는 자가 음행하거나 탐람하거나 우상 숭배를 하거나 후욕하거나 술 취하거나 토색하거든 사귀지도 말고 그런 자와는 함께 먹지도 말라... 외인들은 하나님이 판단하시려니와 이 악한사람은 너희 중에서 내어 쫓으라"(골젼5:11,13). 고린도에서 교인이 되는 조건은 엄격하였음이 분명하다. 바울은 계속하여 고린도 교인들에게 "음란하는 자나 우상 숭배하는 자난 간음하는 자난 탐색하는 자난 남색하는 자나 도적이나 탐람하는 자나 술 취하는 자나 후욕하는자나  토색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고 경고했다(골전6:9-10). 분명 높은 표준을 요구하는 종교를 사교로 본다면 초기 기독교는 사교의 자격을 갖춘 셈이다.

  더 나아가 교인이 그 집단에 전적으로 몸 담으라는 주장이 사교의 특성이라면 고린도 후서 6:14,15,17에 나오는 사도 바울의 요구는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너희는 받지 않는 자와 멍애를 같이 하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 하며 빛과 어두움이 어찌 사귀며 그리스도와 베리알이 어찌 조화되며 믿는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찌 상관하며... 그러므로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희를 영접하리라."
 신약에 정통한 사람이 예수님이 자신의 추종자들에게 높은 의의 표준을 요구하지 않으셨다거나 주님의 복음에 부분적으로 헌신하는 것도 온전히 헌신하는 것과 똑같이 받아들였다고 믿을 수 있다고 본인으로서는 생각하기 어렵다. 이와는 반대된는 증거들이 엄청나게 많다. 초기 기독교가 높은 표준과 온전한 헌신을 요구했기 때문에 "사교"였을까?

 4. "사교에 속한 자들은 이곳 저곳 옮겨 다니면서 여러 사교에 가담한다."
 이 정의는 순회적 표현이다. 왜냐하면 사교라는 용어를 사용하기 전 사교가 무엇인지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고대의 문뭄맥에 맞추어 이를 간단히 고려해 보자. 유대인과 로마인의 관점에서 볼 때 침례 요한의 운동과 예수의 운동은 "사교"였다. 요한복음 1:35-37에는 침례 요한의 두 제자가 나중에 예수의 제자가 되었다고 나온다. 이로 미루어 다른 많은 제자들도 그러 했을 것이다. 마틴의 논리에 따르면 이와같이 종교를 옮기는 사람들이 사교에 속한 자들이라고 말할 수 있다.

 5. "신흥 사교는 복음 전파에 적극적이며 새로운 개종자들을 얻기 위해 많은 시간을 보낸다."
 마태복음 28:19-20에 따르면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 자신의 제자들에게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침례르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함께 있을리라"고 말씀하셨다. 분명 사도 바울은 "새로운 개종자를 얻기 위해 많은 시간을 보냈다." 다시 한번 신약 교회는 이 정의하에서는 사교가 될 자격을 갖춘 셈이다.

 6. "우리는 종종 신흥 사교의 지도자나 관리들이 전문적인 성직자가 아님을 알게된다."
 유대인 대제사장들은 베드로와 요한을 "학문없는 범인"으로 보았다(행4:13). 예수는 직업이 목수였으며 베드로, 야고고, 요한은 어부였다.

 7. "모든 신흥 사교들은 유동적인 교리와 예배를 갖는다."
 유동적인이란 말은 상대적인말이다. 예수의 부활이 있고 난 40일 동안 사도들은 처음 갈릴리에서 제자가 되었을 때부텨 알지 못했던 새로운 많은 것들을 배웠다(행1:3). 예수의 부활이 있고 난 몇 년 후 베드로는 이방인에 대한 기독교인들의 태도와 모세 율법의 역할에 애한 태도를 변화시키는 시현을 받았다(헁10). 고린도전서 7:6-9,12,25,40를 보면 재혼에 대한 바울의 사견이 기독교의 교리와 성서의 가르침이 되었다. 신약시대의 교회은 이방인이 할례를 받을 필요성이 있는지 결정하기 위해 모임을 열었다.(행15장). 신약시대 이후로는 "정통" 기독교가 교리와 정책들을 결정하거나 명확히 밝히기 위해 니케아 종교회의부터 20세기 제 이차 바티칸 회의에 이르기까지 많은 종교회의를 가져왔다. 이 모든 종교회의들은 성서에서 묻거나 답하지 않는 질문들을 해결하였다. 초기 교회 지도자들이 그리스도 승천 이후에도 계시 받았으므로 또는 나중의 교회가 예수의 사망 이후 여러 세기 동안 성부, 성자, 성신의 관계에 대한 견해를 계속 달리해 오고 있기 때문에 기독교는 "유동적"이었으며 따라서 "사교"였을까?

 8, "모든 신흥사교들은 기독교 신학과 조화를 이루어 하나님과 끊임없이 계속적으로 대화한다고 믿는다.
그러나 사교들은 그들의 새로운 계시가 하나님의 최초의 계시인 성서와 모순되거나 심지어 때로는 성서를 대신할 수 있다고 믿는 점에 있어서 성서시대의 기독교와는 다르다."

 왈터 마틴의 말에 따르면 새로운 계시 사이의 모순은 분명 사교의 징표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신의 자녀에게 어떤 계명을 주셨다가 나중에는 그 계명을 철회하시곤 하셨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단순히 시험해 보시기 위해 그렇게 하시기도 하셨다(창22;1,12), 그러나 하나님이 명하셨다가 나중에 철회하는 특권을 행사하시는 가장 좋은 예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주셨으며 성서에 기록된 모세 율법이다. 이 율법으 나중에 주어진 계시와 상반되며 (창17:7,14와 갈5:1-4를 비교해 보라) 이 계시로 대치된다(갈3:24-29):히 8:7-13:10:8-9). 초기 기독교인들은 하나님께서 한 때 시내산에서 말씀하시고 그들에게 경전도 주었으나 이제 그들에게 다시 말씀하시며 옛 계시를 대치하는 새로운 계시를 주셨다고 믿었다. 많은 유대인들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경배하는 기독교인들이 시내산에서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율법을 무시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계속 괘씸하게 여겼다.

 9. 신흥 사교는 다른 어떤 단체나 개인이 가지고 있지 않는 진리를 가지고 있다고 주장한다.
 한번은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 때문에 감정이 상하여 주님을 떠날려고 했다. 구세주는 12제자에로 돌아서서 그들도 떠날 것인지 물어 보았다. 베드로는 "주여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까"라고 대답했다.(요6:66-68.) 초기 기독교인들은 예수 이외에는 다른 어떤 신성한 진리의 근원도 없음을 알았다. 예수님 자신은 "내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아버지께로 올자가 없느니라"고 말씀하셨다.(요14:6.)  바꾸어 말하자면 예수님은 "다른 어떤 원천으로부터도 얻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아무도 모르고 있었던 진리"를 초기 기독교회에 주었던 것이다. 다시 한번 초기 기독교는 마틴이 제안한 정의에 따라 사교의 자격을 갖춘 셈이다.
 

요 약

 요약하자면 , 사교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에겐 사교란 "내가 싫어하는 종교"를 뜻하는 주관적인 단어다. 예수 그리스도 후기성도 교회를 사교라고 부를 때 이는 단순히 예수 그리스도 후기성도 교회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할 뿐이다. 기독교는 한 때 역동적인 지도력과 강한 그룹내 결속력과 높은 도덕율과 기존의 경전 이외의 다른 경전을 가진 신흥 종교였으며 이 모든 것들이 그 당시 주된 종교를 모욕했다. 그리고 초기 기독교 지도자들은 전문적으로 훈련 받지 않은 성직자였으며 전 세계를 어느 누구도 갖지 못했던 진리로 개종 시키려고 하였다. 마틴이 제안한 사교라는 용어를 객관적으로 정의한다면 초기 기독교는 사교였다 그러므로 지금까지 후기성도에게 들어 맞는 사교라는 일반적인 정의는 한결같이 신약시대의 기독교에도 들어 맞는다. 그러니 신약시대의 기독교와 한 배를 타는 것도 그리 나쁘지 낳을 것이다.

4

역사나 전통에 의한 배제

 소위 현대 정통 기독교는 정통 기독교를 신약성서에 나오는 사건과 교리로만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신약 시대 이후의 역사, 신학, 전통으로도 이루어져 있다고 본다. 따라서 진정한 기독교가 되기 위해서는 현대 교회는 성서 시대의 기독교 뿐만 아니라 성서 시대의 기독교에서 발전해 나온 전통적인 기독교도 받아들여야 한다는 주장이 가끔 나오곤한다. 간략히 말하자면 이게 바로 역사에 의한 배제다. 성서상의 교리 이외에도 수세기에 걸쳐 이러한 세부적인 역사적 사건-종교회의, 신조와 풍습, 신학자와 철학자-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참된 기독교인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러한 견해에 따르면 성서의 내용만 받아들여서는 참된 기독교가 될 수 없다.

 이런 식의 배제는 내가 대학원에 재학 중일 때 일어난 사건으로 설명해 볼 수 있다. 나는 후기성도의 믿음과 예배에 관해 강의를 해 달라는 초청을 시내의 규모가 큰 개신교로부터 받는 적이 있다. 본인의 교수 중 몇 사람도 이 교회에 다니고 있었는데 본인의 강의에 참석해서 매우 기뻤다. 강의가 끝날 무렵 회복된 복음과 예언자 조셉 스미스의 신성한 부름과 그리고 무엇보다도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사업에 대한 간증을 했다.

 강의가 끝나자 교수 중 한 사람이 손을 들고 말하기를   "스티브! 강의가 훌륭하고 유익했어요. 그러난 실제로는 몰몬이 기독교인이 아니면서도 당신네 몰몬들이 기독교인이라는 그릇된 인상을 주었어요."  나는 이 교수를 잘 알고 있었으므로 그가 한 말이 무슨 뜻인지 알고 있었다.  그의 말은 악의에 찬 말도 아니었으며 후기성도가 예수 그리스도에 관하여 무엇을 믿고 무엇을 믿지 않느냐와도 전혀 상관없는 말이었다.  이 교수는 진보적인 개신교 역사가였으므로 그가 정의하는 기독교인이란 역사적인 정의에 의한 기독교인이었다.  즉 그가 내린 정의는 개인적인 믿음과는 하등의 관계가 없었다.  그에게는 기독교인이란 종교개혁을 통해서 신학적인 가계도를 추적해 가볼 수 있는 그런 사람이었다.  따라서 그의 정의는 무엇을 믿느냐와는 전혀 상관이 없었다.  어떻게 그러한 미음을 물려 받았느냐 하는 것이 더 큰 관심사였다.  그의 입장은 우리가 믿는 신학이 올바른 가계도를 가지고 있으면 참된 기독교인이 되고 지적인 가계도와 신학적인 가계도가 잘못되어 있으면 신약 성서의 모든 내용을 믿는다 할지라도 참된 기독교인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진보적인 개신교 역사가로서 이 교수가 믿음보다는 혈통의 의미로 기독교인을 정의하게된 또 다른 동기가 있었다.  왜냐하면 전에 그가 가진 개인적인 대화에서 알 게 된건데 그는 초기 기독교에서 일어난 대부분의 기적들을 개인적으로는 믿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이 개인적인 믿음이 아니라 계승의 문제였다면  신약의 역사적인 내용들을 믿지 않는다 하더라도 여전히 "기독교인"이라고 주장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교수의 배경과 사상을 잘 알고 있었던 나는 그가 "몰몬은 기독교인이 아니다"라고 말할 때 그가 뜻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알고 있었다. 또 한편으로는 강의에 참석한 회중들이 그가 말하는 바를 올바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음도 감지하고 있었다.  이들에게는 교수의 말이 후기성도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사람들 처럼 들렸다. 그래서 회중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나는 다음과 같은 말을 의도적으로 주고 받았다.

          "교수님은 예수가 문자 그대로 하나님의 아들이었으며 육신의 아버지가 없었다는 것을 개인적으로 믿습니까?"
          "아니오, 문자 그대로 믿지 않아요"그가 대답했다.
          "역사상의 예수님의 신성을 믿습니까?"
          "아니오"
          "예수님이 기적을 행할 능력이 있다고 믿습니까?
          "아니오."
          "예수님이 문자 그대로 세상의 죄를 짊어 지셨다고 믿습니까?"
          "아니오."
          "예수님이 문자 그대로 우리를 위해 돌아가셨다고 믿습니까?"
          "아니오."
          "예수님이 문자 그대로 육체적인 부활을 하셨다고 믿습니까?"
          "아니오."
          "최후의 심판을 믿습니까?"
          "아니오."
          "내세를 믿습니까?"
          "믿는 것 같소. "
          "교수님은 기독교인입니까?"
          "물론 기독교인이지."
          "어떻게 기독교인이라고 말할 수 있는거죠?"
          "왜냐하면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지는 않지만 신약을 하나님의 말씀을 담고 있다고 믿고 있기 때문이고 역사적인 단절 없이 신약시대까지 기독교 혈통을 추적해 갈 수 있는 교회의 성밍된 목사니까."
          "좋습니다.  저는 후기성도로서 예수가 문자 그대로 하나님의 아들임을 믿으며 그가 기적을 행할 수 있는 권능을 가졌었다고 믿으며 겟세마네 동산과 갈보리 언덕에서 세상의 죄를 지셨음을 믿으며 우리를 위해 돌아가셨음을 믿으며 삼일만에 문자 그대로 육체적인 부활을 하셨음을 믿으며 영화스러운 내세를 믿습니다. 자 제가 기독교인입니까?"
          "절대 아니지."
          "그 이유가 뭐죠?"
          "왜냐하면 당신은 신학적으로 역사적인 교회의 종교회의와 신조에서 비롯되지도 않았고 의존하지도 않고 이세기 이후의 전통적인 기독교와 신학을 부인하는 교회에 속한 사람이니까."
          "교수님이 정의하는 "기독교인"이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저의 개인적인 믿음과 관계가 있습니까?"
          "관계가 없지."

   대화가 이런식으로 진행되자 회중들은 이 교수가 기독교인이란 용어를 특수하게 정의하고 있는 것이지 자신들의 처음에 생각했던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님을 알 게 되었다.  강의가 끝난 다음 몇 사람들이 나에게 와 자신들의 정의 방법을 좇으면 분명 후기성도는 기독교인이 될 자격이 있으나 그 교수에 대해서는 더 이상 확신하지 못하겠다고 말하였다.

 역사에 근거하여 다른 교파를 배척하기 위하여 기독교인을 특정하고 비표준적으로 정의할 때 이는 또 다른 형태의 정의에 의한 배제뿐이며 따라서 다른 정의와 똑같은 논리적 허위를 담고 있다(1장을보라) 그러나 여기에선 역사적인 배제를 좀 더 고려해 보아야 한다.

대  배도 

 먼저 후기성도는 신약시대의 사도가 죽고 난 이후의 전통적인 기독교의 권위를 거부한다.  후기성도는 마태복음 16:16에서 베드로에게 약속된 열쇠와 권능은 성격상 사도직분이므로 사도들이 사라졌을 때 그 들의 열쇠와 권능도 함께 사라지게 되었다고 믿는다.  사도시대 이후로는 보편적인 의미로서는 여전히 "기독교인"이라 불리울 수 있었으나 이들은 후기성도의 입장에서 보면 자동적으로 구원에서 제외된다 (죽고난 다음에 복음을 받아들일 수 있는 기회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역사적인 교회는 더 이상 온전한 복음을 소유하지 못하게 되었다. 이것이 신약에서도 가르치는 대 배도에 관한 후기성도의 교리이다.  다음은 사도 바울의 가르침에서 나오는 두가지 예다.       

"형제들아 우리가 너희에게 구하는 것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하심과 우리가 그 앞에 모임에 관하여 혹 영으로나 혹 말로나 혹 우리에게서 받았다 하는 편지로나 주의 날이 이르렀다고 쉬 동심하거나 두려워하거나 하지 아니할 그것이라.  누가 아무렇게 하여도 너희가 미혹하지 말라 먼저 배도하는 일이 있고 저 불법의 사람 곧 멸망의 아들이 나타나기 전에는 이르지 아니하리니 저는 대적하는 자라 범사에 일컫는 하나님이나 숭배함을 받는 자 위에 뛰어나 자존하여 하나님 성전에 앉아 자기를 보여 하나님이라 하느니라.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이 일을 너희에게 말한 것을 기억하지 못하느냐." (데살로니가 후서 2:1-5)

 

"내가 떠난 후에 흉악한 이리가 너희에게 들어와서 그 양떼를 아끼지 아니하며 또한 너희 중에서도 제자들을 끌어 자기를 좇게 하려고 어그러진 말을 하는 사람들이 일어날 줄을 내가 아노니 그러므로 너희가 일깨어 내가 삼 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라." (사도행전 20:29-31)

 

 이 구절과 다른 구절을 살펴 보면 바울은 필연적으로 오게 되는  배도에 대해 우려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힘을 다해 배도에 관하여 교회에 경고하고 있었음을 알 게 된다.  이와 같은 배도가 실제로 일어났으며 사도의 열쇠와 권능이 지상에서 사라졌다는 것이 후기성도의 믿음이다.  이러한 이유로 말일성도는 사도시대 이후에 발전된 역사적이 기독교의 권능을 거부한다.
 

비슷한 견해를 갖는 기독교인들


 후기성도가 배도를 믿고 나중에 발전된 사건을 거부한다는 이유로서 개신교인들이 후기성도를 비난하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왜냐하면 개신교인들도 본질적으로는 후기성도와 똑같이 전통적인 교회의 권위를 부인해왔기 때문이다.  단지 차이점이 있다면 일세기 이후의 전통적인 교회의 권위를 부인한 것이 아니라 오세기 이후의 권위를 부인한 것이다.  신교 개혁자들은 천주교회가 타락했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 그리고 자신들의 종교개혁 시도를 정당화하기 위해 위에서 인용한 똑같은 많은 성구를 이용하였다.  마틴 루터 같은 사람들은 교황을 적그리스도로 보기까지했다.  만약 일부 개신교인들이 몰몬이 니케아 종교회의(서기325년)를 거부하기 때문에 기독교인 아니라고 주장한다면 천주교인들은 개신교인들이 트렌트 종교 회의(서기1545-1947)를 거부하기 때문에 기독교인이 아니라고 주장할 수는 없을까?  여기에서 문제는 종류의 차이점이 아니라 정도나 시간상의 차이점이다. 그러므로 역사의 어느 한 시점에서 역사적인 교회가 배도하여 참된 교회가 사라지게 되었다는 교리면에 있어 대부분의 개신교는 후기성도와 의견을 같이한다.  단지 날짜상에 있어 차이가 날 뿐이다.

 대부분의 개신교인들은 대 종교 회의 중 첫 번째 일곱 종교회의만이 교리상으로 정당하며 구속력이 있다고 받아들인다.  이 일곱 종교회의 중 제일 마지막으로 열린 종교회의는 제 이차 니케아 종교 회의로 서기 787년에 열렸다.  희랍 정교회는 서방 교회와의 차이점이 서기 1054년 보다 훨씬 이전에 있었으나 서기 1054년 부터 서방 교회의 권위를 공식적으로 거부하였다.  이보다 육세기 전에 아르메니아교도, 시리아교도, 콥트교도, 그리고 아비시니아교도들은 모두 다 찰세돈 종교회의(서기451년)에서 "대 교회"를 거부하였으며 이 이후로 줄곧 분리되어 왔다.  따라서 만약 역사적인 배제가 21 종교 회의중 세 가지만 받아들이는 이 "정통" 교회들에게 적용이 된다면 이들은 여전히 기독교인으로 간주될 수 있을까? 그리고 만악 아르메니아교도, 시리아교도 콥트교도, 아비시니아교도들이 5세기 이후의 전통적인 기독교 내에 있는 모든 것을 거부하면서도 여전히 기독교인이라면 얼마만큼을 거부할 수 있는지를 나타내는 기준선은 어디에 있을까?  기준선이 5세기까지 될 수 있다면 왜 2세기는 될 수 없을까?

 그러므로 일부 교파들이 서기 451년을 전통적인 교회로부터 갈라선 연대로 보지만 또 다른 교파들은 787년이나 1054년 혹은 1517년을 갈라선 연대로 본다.  교회의 분열에 있어서 누가 옳고 그르든지 간에, 교회가 분열될 때 마다 누군가가 모교회의 권위를 거부하고 모교회의 전통과 교리를 따르기를 거부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아무도 아르메니아교도, 콥트교도, 시리아교도, 희랍정교도나 개신교도를 이런 이유로 해서 비기독교인으로 비난하지는 않는다.

 천주교인들은 종종 개신교인이 참된 기독교를 거부해왔다고 생각하는 반면 개신교인들은 자신들이 천주교가 타락시킨 참된 기독교를 회복했다고 생각한다.  본인의 주장의 목적상 누가 옳느냐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문제가 되는 것은 서로의 전통과 교리를 거부하면서도 개신교인과 천주교인은 보편적인 의미에서 상대방을 기독교인이라 부를 수 있다. 그 렇다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신약의 증거를 받아들이는 후기성도도 성서 시대 이후의 전통과 교리를 거부하면서도 기독교인으로 남아있을 수 없을까?
 

단일의 기독교 전통

 게다가 개신교는 축적된 기독교 유산을 얼마만큼을 받아들이냐에 있어서 서로 의견을 달리하고 있다.  많은 개신교인은 성인을 숭배하지 않으며 사순절을 지키지 않으며 성 스위딘(Saint Switin)의 날이 7월 15일이라는 것도 모르고 있다.  참된 기독교인이 되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풍습과 비성서적인 전통을 받아 들여야 할까? 성서 이후의 전통이나 풍습 50%를 받아들이면 기독교인이 되는 것인가?  아니면 금요일에 생선을 먹는 것과 같은 사사로운 전통은 무시할 수 있는 반면에 올바른 날짜에 부활절을 지키는 것과 같은 받아들여야하는 어떤 비성서적인 주된 전통이 있단 말인가?  그리고 어떤 풍습은 필요하고 어떤 풍습은 필요없는지를 누가 결정하며 만약 전통이 성서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면 설혹 결정한다 하드래도 무슨 권위로 결정할 수 있는가?  누가 성서 이후의 진짜 "기독교 전통"을 고수하는가?  마 사바 수도원의 희랍 정교회의 수도승인가 아니면 믿음으로 병를 고치는 텍사스의 텔레비젼 설교 목사인가?

 정확히 무엇이 기독교 전통이며 주된 기독교인들이 기독교 전통에 있어서 서로 의견이 다를 때 몰몬들이 이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듀크 대학교의 기독교 역사 데이비드 스타인메츠 컨즈 교수의 말을 빌리자면 "기독교인들은 종종 열광적으로 휘리오케(filioque)에서부터 무염시태에 이르기까지 생각해 낼 수 있는 모든 기독교 교리를 두고 서로 논쟁해 왔으나 의견을 같이 하는 경배, 신학, 윤리와 정치적인 주제는 거의 없다.

 오늘날의 후기성도처럼 청교도들도 신약성서에서 찾아볼 수 없는 기독교 전통에서 나오는예배 형식이나 풍습을 거부했다. 구도자교인 케네스 스캇 라토렛에 따르면 청교도 가운데에는 로져 윌리암스와 죠지 확스가 "적그리스도가 오랫동안 지배해 참된 교회나 합당한 직책을 가진 자가 존재하지 않았으며 하나님이 사도들을 보내 새로운 교회를 세우고 성임하기 전까지는 존재햘 수 없다고 믿었다. 이 견해는 후기성도의 견해와 매우 비슷하다.  이러한 견해를 가졌다고 해서 존경받는 이 개신교도들이 비기독교인이 될 수 있을까?   여기에서 묻고자하는 것은 그들의 믿음의 진실성의 유무가 아니라 만약 청교도와 분리주의자들과 구도자교인들이 신약에 나오지 않는 역사적인 기독교 전통을 완전히 무시하고도 여전히 기독교인으로 간주 된다면 왜 후기성도는 기독교인이 될 수 없느냐는 것이다.
 

순수한 기독교 전통?

 기독교인이 되기 위해서는 역사적인 기독교 유산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주장이 갖는 또다른 문제는 오늘날 행해지는 이 유산에서 나온 많은 전통과 풍습이 실제로는 이교도의 풍습에서 나와 "기독교화"되었다는데 있다. 식민지 미국에서  살았던 청교도들은 크리스마스가 성서에서 지켰다는 증거를 찾을 수 없고 오히려 이교도의 풍습과 천주교에서 나왔다고 믿었기 때문에 크리스마스를 지키는 것을 반대했다. 크리스마스 츄리, 양초 크리스마스 장식용 나무 가지, 겨우살이 식물, 크리스마스 장작등과 같이 대부분의 크리스마스의 관습적인 상징은 북유럽의 이교도로터 받아들인 것이며 크리스마스를 지키는 전통적인 날짜는 원래 이교도였던 로마 사람들의 축제인 나탈리스 솔리스 인빅티(무적의 태양신의 생일)의 날짜였다.

 게다가 많은 이교도의 영향은 성인의 숭배와 맥을 같이하여 기독교에 들어왔다.예를 들어 성 죠지는 정말 용을 죽였을까? 대부분의 학자들은 그의 전설이 발틱과 슬라브족 신인 칼비스와 크레스닉과 같으며 희랍의 퍼세우스와 안드로메다의 신화와 동일하다고 확인하고 있다. 여러 지방에서 열리는 기독교 축제는, 특히 춘분, 하지, 추분, 동지때에 열리는 축제들은 기독교의 옷으로 갈아 입은 기독교 이전의 축제의 연장일 뿐이며 여러 지방의 이교도 신들이 기독교 유산이 되어 버렸다. 참된 기독교인 되기 위해서는 성서 시대 이후의 이교도에서 발생한 기독교 유산을 받아들여야 하는가?

 

교리적인 전통

 받아들여야 할 것은 역사적 교회의 풍습과 전통이 아니라 역사적인 종교회의와 신조에 들어있는 교리일 뿐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만약 종교회의와 신조가 신약성서에 나오지 않는 교리를 가르친다면 무슨 권위에 근거하여 이를 받아들여야 하는가?  그리고 만약 종교 회의와 신조가 신약에 첨가되지 않고 단지 신약의 교리를 되풀이하거나 요약하고 있다면 왜 신약 이외의 이것들을 받아들여야 하는가?종교회의를 핵심적인 기독교 교리로 만들고 신약을 이차적인 교리로 만들므로써만 역사적인 배제가 이론상으로 가능하다. 그리고 만약 후기성도가 기독교인이 되기 위해서는 종교회의를 받아들여야 한다고 다른 기독교가 주장한다면 우리 후기성도들은 다음과 같이 물어볼 수 있다. 어떤 종교회의를 받아들여야 하는가?  왜 어떤 교회들은 21개의 모든 종교회의를 받아들이지 않고 세 개나 네 개  혹은일곱 개만을 받아들이는가?  실제로는 많은 교파들이 말일성도가 모든 종교회의를 거부하는 것과 똑같은 이유로 일부 종교회의를 받아들이자 않는다. 왜냐하면 종교회의가 신약의 교리에 첨가한 것이거나 상반되기 때문이다.

 종교회의와 신조에서 찾아볼 수 있는 신학은 신약 교회의 신학과 크게 차이가 난다는 것을 후기성도는 믿으며 현대 학자들도 이에 동의 한다.  후기성도는 1세기와 4세기 사이의 이러한 큰 차이를 대배도로 본다. 학자들은 이를 기독교의 헬레니즘화라고 부르는데 이는 기독교 메시지가 이방인 그리스 문화가 받아들일 수 있는 형태로 변했다는 뜻 이다.  그러나 변화하고 적응하는 과정에서 기독교 가르침은 희랍의 가르침이 되어 버렸으며 기독교의 신학이 희람의 신학이 되어 버렸다.  후기성도는 복음의 고유한 메시지에 희랍의 요소를 혼합한 것이 복음을 개선시키지 못하고 오히려 희석시켰다고 믿는다. 여기에서 비롯된 역사적인 교회는 보편적으로는 기독교라고 불리울 수는 있으나 더 이상 신약성서 시대의 순수하고 참된 교회는 아니었다.

 종교회의는 광범위하게는 경전의 간단한 교리를 희랍 사상의 철학적인 요구에 맞출려는 시도였으며 이는 기독교가 희랍화되었음을 나타낸다.  마리스 윌리즈에 따르면 "모든 기독교 사상, 특히 신의 존재와 특성에 관한 모든 기독교 사상은 종종 무의식으로 희랍세계의 철학적인 사상에 영향을 받았다.

 기독교의 헬레니즘화에 관하여 1888년 영국 국교회의 위대한 학자였던 에드윈 햇치는 지금까지도 고전으로 남아있  는 자신의 저서에서 "때때로 기독교 교리라 불리우는 많은 교리와 기독교를 지배해왔고 앞으로 계속 지배할 많은 용례들이 실제로는 초기 기도교의 영향력을 받아 형태와 색깔이 변질된 그러면서도 여전히 본질은 희랍의 색채를 띤 희랍의 이론과 희랍의 용례들이다". 라고 지적헀다.
 나중에 기독교 전통 가운데에서 변질된 이 희랍적인 요소들은 교회가 가지고 있었던 종교적인 권위에 의해 갈릴레오를 비난하기에 이른다.  이는 갈릴레오의 이론이 성서와 상반되어서가 아니라 아리스토틀과 상반되었기 때문이며 그 당시에는 희랍 철학과 성서상의 기독교 사이에 구분을 짓고 있지 않았었기 때문이다.  현대에는 전통적인 교회가 과학에 밀려 희랍 우주관을 버릴 수밖에 없었지만 여전히 희랍 신학을 열렬하게 고수하고 있다 햇치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정의하는 습관과 정의로부터 추론하는 습관은 철학자들이 기독교 경계선 안으로 들어감에 따라 논리학자와 형이상학자가 기독교를   감리함에 따라 더욱 더 커지게 되었다.  그 당시에 동의한 추측들이 진리로 인봉되었으며 콘스탄티노플과 찰세돈 종교회의에서 나온 더 깊은 추측들에 있어서 니케아 교부들의 결심은 거의 새로운 계시로 바라보게 되었으며 이를 거부하게 되면 신약성서 자체를 거부하는 것 보다 더 큰 죄로 여기게 되었다.

 바로 이것이 후기성도들에게 일어난 것이다.  역사적인 배제가 그들에게 역으로 사용될 때, 그들이 신약성서를 받아들이는 것보다는 희랍의 철학적인 신학을 거부하는 것이 더 중요한 문제가 된다.  신약성서가 담고 있는 문자 그대로의 진리를 거부하는 것은 많은 현대 기독교파에서는 사사로운 일로 보여지거나 최소한 협상할 수 있는 문제로 보여지는 반면 희랍화된 교회가 만들어낸 철학적인전통을 거부하게되면 후기성도를 기독교 영역 밖을로 내보낸다.  그러므로 역사적인 배제하에서 후기성도들은 그들이 성서상의 그리스도와 그의 교회를 거부해서가 아니라 철학자들을 거부하는 더 심각한 "죄"를 짓기 때문에 비기독교인으로 비난 받든다. 대부분의 현대 기독교는 그리스도의 메시지와 플라톤의 메시지를 실제 분별하지 못한다.

 내가 존경하는 몰몬이 아닌 대학원 교수인 더블휴 디 데이비스는 한 때 몰몬이즘을 기독교가 헬레화 되기 전의 기독교로 돌아갈려는 시도로 묘사하였다. 많은 개신교인들은 교황을 포기함으로써 그리고 화해시기(기원325-787)의 교회로 돌아감으로써 기독교 개혁을 시도하지만 후기성도들은 헬레니즘을 포기하고 신약시대의 교회로 돌아감으로써 초기 교회를 회복하려고 한다.

 

천주교 전통 가운데서

 일부 천주교 비평가들이 개신교인들을 더 이상 역사적으로 배척하지 않으면서 후기성도를 역사적으로 배척해 왔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왜냐하면 몇가지 면에서 후기성도는 대부분의 개신교보다는 천주교의 전통에 더 가깝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후기성도들은 천주교 처럼 그러나 많은 개신교와는 달리 기독교회의 모든 일곱 가지 성서 (sacraments)의 필요성을 받아 들인다. 마틴 루터는 주의 만찬과 세례(또는 침례)만을 기독교의 성사로 받아 들이고 다른 5대 성사를 거부했다.

 게다가 몰몬은 오늘날 대다수의 개신교인들이 거부하는 사도계승의 교리를 받아들인다.  이 교리는 마태복음 16:19에서 그리스도가 베드로에게 준 권능이 "참된"교회에 필요하며 열쇠를 가지고 교회를 이끄는 사람의 손에 의해 전달되어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천주교의 용어를 빌리자면 바로 이 사람이 교황이며 후기성도의 용어를 빌리자면 이사람은 교회의 대관장이자 선지자이다. 천주교는 교황의 권능을 베드로를 통해그리스도 자신에게로 까지 이어지는 끊어지지 않는 권능의 선이라고 믿는다.  후기성도는 그들의 선지자들의 권능을 베드로를 통해 그리스도 자신에게로 까지 이어진다고 본다. 따라서 양 교회에서 베드로는 주된 인물, 즉 "반석"이다.  양 교회의 전통에서 베드로는 현재의 교회와 그리스도의 권능 사이를 연결해 준다. 몰몬이 베드로가 개인적으로 사도직 열쇠를 조셉 스미스와 올리버 카우드리에게 부여했다고 믿는 것(교성27:12)이 사실이냐 아니냐가 문제가 아니다. 문제는 후기성도의 주장이 근거를 둔 이론이 천주교의 견해와 동일하다는 것이다. 즉 사도의 권능의 열쇠가 안수에 의해 베드로를 통해 참된 교회에 전달되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대리인으로 행동할 수 있는 권능, 즉 신권은 이미 그 권능을 가진 사람으로 부터만 받을 수 있다. 비록 후기성도의 권능 선이 천주교가 주장하는 권능선 보다 더 짧기는 하지만 후기성도는 사도 계승의 교리를 받아들인다. 반면 대부분의 개신교는 사도 계승의 필요성을 완전히 부인하며 성임에 의해 부여되는 신성한 권능에 대한 모든 개념을 거부한다.

 대부분의 개신교인은 성서가 개종을 낳으며 개종시 성신이 자동적으로 모든 필요한 신권을 믿는자에게 준다고 믿는다. 이게 바로 "모든 믿는자의 신권"이라는 교리로 기독교의 권능의 궁극적인 원칙으로서 교회나 신권보다는 성경을 의지하며 천주교회를 통해 역사적으로 신권이 이어져 왔음을 부인하나. 이런 이유 때문에 개신교인은 경전상의 권능선을 따른 천주교의 개혁에 만족을 하는 이유다. 이들은 올바른 믿음만 있으면 권능은 자동적으로 생겨난다고 믿는다.

 반면 후기성도나 천주교인처럼 사도 계승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권능선이 끊어지게 되면 단순히 개혁이 아니라 사도직 권능의 회복을 요하게 된다. 천주교는 그러한 단절이 일어났다고 믿지 않고 후기성도는 그러한 단절이 일어났다고  믿지만 양측이 사도 계승의 필요성에 견해를 같이하면 신권과 성임애 대해 유사한 견해를 갖는다. 개신교는 천주교회의 사도 계승으로부터 단절되어 나갔고 권능의 회복을 주장하지 않기 때문에 이들은 다른 근거에 기초한 권능을 주장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모든 믿는자의 신권"이라는 교리가 나오게 된 것이다. 천주교가 수 세기동안 알아왔던 사도 열쇠와 신권, 서품 그리고 성사에 대한 성서적인 개념이 개신교 신학에게는 최대 약점이다.

 그러므로 신권, 성임, 그리고 사도 계승 분야에 있어서 후기성도는 실제적으로 개신교보다 더 "정통적"이며 천주교회와 같은 견해를 가지고 있다. 물론 후기성도가 천주교가 주장하는 사도 계승의 진실서을 거부하듯 천주교도 후기성도가 주장하는 사도 계스의 진실성을 거부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이것 때문에 서로 비기독교인이라 부를 수는 없다. 왜냐하면 이러한 불일치가 천주교와 개신교 사이의 똑같은 분쟁보다 더 심각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사실 천주교와 개신교는 서로를 기독교로 인정하려고 한다. 예를 들면 1896년 교황 레오 십삼세는 교서에서 영국 구교회(성공회)의 서품을 무효라고 선포했으며 이 사건은 성공회 신자를 극도로 자극시켰다. 그러나 천주교는 성공회를 사교로 본다. 본인의 주장으 이렇다. 비록 교황이 성공회를 보편적인 의미로 기독교인으로 간주할 수 있다면, 혹은 천주교가 계승의 교리를 거부하는 개신교를 기독교로 간주할 수 있다면 천주교는 후기성도가 단순히 천주교가 주장하는 사도 계승을 벗어나 있다는 이유만으로 일괄성 없이 후기성도를 기독교로부터 배제할 수 없다.

 

십이사도는 기독교인이었나

 마지막으로 역사적인 배제를 사용하는 것에 대한 단연 가장 심각한 반대는 역사적인 배제는 후기성도 뿐만 아니라 예수님과 그의 사도를 포함한 신약시대의 성도들도 배제하기 때문이다. 만약 기독교인이 되기 위해서 전통적인 기독교를 꾸러미로 받아들여야 한다면 즉 성서의 가르침 뿐만 아니라 후세기에 발전된 종교회의, 신조 및 신학자를 받아들여야 한다면 연대순으로 보아서 예수님과 그의 교회는 기독교인이 될 자격이 없다. 그러나 신약성서는 일 세기 때의 성도들을 기독교인이라 부르기 때문에 이것 하나만 보아도 역사적인 배제가 함당하지 못함을 알 수 있다. (헁11:26  26:28  벧전4:16)

 갈라디아서에서 바울은 모세 율법이 주어지기 사백 년 전의 아브라함이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인하여 의로와졌기 때문에 모세 율법은 기독교에 필요없다고 주장한다. 바울은 더 나아가 아브라함이 율법 없이도 신앙으로 의로와질 수 있었다면 아브라함의 본보기를 따랐던 이방인들도 똑같이 의로와 질 수 있다고 주장했다(갈3:6-18) 이것이 바로 본인이 주장하고자 하는 것이다. 종교회의와 신조와 신약시대의 교회에서 찾아볼 수 없는 전통을 받아들이는 자체가 기독교인이 되는 필요한 조건이 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신약시대의 기독교인들은 찰세돈 종교회의에서 니케아 신경이 만들어지기 4백전에 살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만약 신약시대의 성도들이 성서 이후의 전통 없이도 기독교인이 될 수 있다면 후기성도도 마찬가지다.

 후기성도는 신약의 성도들이 믿었던 것을 믿지 않는다고 주장하고 싶은 사람들이 있겠으나 그렇게 주장하게 되면 주장이 역사적인 배제에서 교리상의 배제로 근거를 바꾼 결과가 되는데 이 역사적인 베제는 다음 장에서 다루게 될 것이다. 신약시대의 성도를 포용하면서 기독교 세계로부터 후기성도를 배척할 수 있는 역사나 전통은 없다.

 

요 약

 요약하자면, 기독교인을 비표준적인 정의, 즉 그리스도를 믿는 개인의 신앙에 기초를 두지 않고 개인의 문화적인 혈통과 신학적인 혈통에 근거한 정의를 제의하기 때문에 역사적인 배제는 쓸모 없는 것이다. 또한 이 배제가 후기성도에게만 선택적으로 이용되고 전통적인 교회를 거부한 다른 교회에 대해서는 이용되지 않기 때무에 쓸모없는 것이다. 많은 교파들이 초기 정통교회의 일부 혹은 모두를 거부해왔으나 여전히 기독교인으로 간주된다. 더 나아가 역사적인 배제는 신약성서를 전달하지 못하기 때문에 쓸모없는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역사적인 배제는 수세기 전에 살았던 신약 시대의 성도들이 물려줄 수 없었던 종교회의, 신조, 풍습을 곁들인 후일의 역사적인 교회를 받아들이는 시험이기 때문에 쓸모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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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전(성서)에 의한 배제

 

 희랍어인 Kanon은 "잣대"또는 "곧은자"를 뜻하며 이차적으로 "표준" 또는 "기준"을 뜻한다. 이 이차적인 뜻으로부터 영어인 canon이 나왔으며 이 단어가 경전을 가리킬 때는 "권위있는 책들"이라는 뜻을 갖는다. 그렇다면 경전(canon)이란 기독교인들이 하나님의 말씀 또는 권위설로 받아들이는 책들이다. 어떤 책을 경전이나 표준 경전("경전"을 뜻하는 말일성도의 용어)으로 부른다면 이 말은 승인된 경전에 나와있다는 뜻이다. 비몰몬들에겐 경전이란 성서를 구성하는 책들을 뜻한다.

 다른 기독교파와 비교해 예수 그리스도 후기성도 교회가 더 많은 경전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기정 사실이다. 성경 이외에도 후기성도는 몰몬경, 교리와 성약, 그리고 값진 진주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인다. 이 영감 받은 4대 경전이 예수 그리스도 후기성도 교회의 표준 경전이다. 후기성도에게 적용되는 경전에 의한 배제란 간략히 표현하자면 몰몬은 기독교 경전과는 다른 경전을 가지고 있는데다 기독교 경전에 다른 경전을 첨가했으므로 몰몬은 기독교인이 될 수 없다는 주장이다.


  경전에 다른 경전을 첨가함
 

 경전에 의한 배제를 지지하기 위한 방편으로 제공되는 주장은 성경 자체가 기독교 경전을 가감하지 못하게 금하고 있다는 주장이다. 이러한 입장을 지지하기 위해 자주 인용되는 구절로 계시록 22:18-19이다. "내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듣는 각인에게 증거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터이요. 만일 누구든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책에 기록된 생명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여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

 위 구절이 성경의 마지막 책 마지막 장 끝에 나오기 때문에 "순진한" 독자는 "이 책의 예언"이라는 구절이 성경 전체를 가리키며 따라서 경전을 가감할 수 없다고 추측할 것이다. 그러나 이 말은 그런 뜻이 아니다. 먼저 계시록이 신약 성서의 책 중 가장 나중에 쓰여졌는지를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계시록이 기록된 서기 94년-95년 경으로 보며 야고보서, 베드로 전후서, 유다서, 요한 1,2,3서와 요한 복음도 이와 똑같은 시기이거나 그 이후에 쓰여졌다고 추정한다. 만일 계시록이 신약 성서중 가장 나중에 쓰여진 책이 아니라면 계시록 22:18-19는 경전을 끝맺는 선포로 이해될 수 없다.

 그러나 계시록이 마지막으로 쓰여졌느냐 쓰여지지 않았느냐"는 별 문제가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요한이 경고하면서 기록했던 "책은 분명히 성경 전체가 아닌 계시록 자체였기 때문이다. 요한이 계시록을 기록했을 당시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성서-한권으로 묶어진 영감 받은 책들-는 아직 존재하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요한이 자신의 책들을 출판한 후 수세기 동안 성경의 개별적인 책들은 개별적으로 배포되었거나 다른 몇권의 책들과 함께 묶여 배포되었지 지금과 같이 전체가 한권으로 묶어 배포한적이 결코 없었다. 10세기 이전에 출판된 것으로 알려진 362사본 가운데서 오직 한 사본만이 완전한 신약성서를 이루고  있었으며 이 사본을 제외한 나머지 어떤 사본도 완전한 성경을 이루지 못했다. 오늘날까지 알겨진 5366 희랍 사본 가운데서 오직 34 사본만이 성서 전체를 담고 있으며 이 34 사본도 전부 서기 1000년 이후에 쓰여진 것이다.(Bruce M. Metzger의 Manuscripts of the Greek Bible: An Introduction to Greek Paleography (new York: 옥스퍼드 대학교 출판국, 1981), 54-55쪽을 보라). 오늘날 기독교 세계가 사용하고 있는 성경은 인쇄시대가 준 축복이다. 구텐버그 이전에는 완전한 성경이란 알려져 있지 않았다. 그러므로 요한이 "이 책의 예언"에 관하여 글을 썼을 때 그는 성경으로 알려진 한권으로 묶어진 책의 모음집을 지칭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쓰고 있었던 책인 계시록을 지칭한 말이었다. 말일성도는 계시록의 내용을 가감하지 않았으므로 계시록 22:18-19의 구절은 후기성도가 성서 이외의 경전을 받아들이는 문제에는 적용되지 않는다.

 바로 이와 똑같은 이유 때문에 기독교인과 유대인들이 신명기 4:1-2에서 발견되는 계명에 대해 걱정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이스라엘아 이제 내가 너희에게 가르치는 규례와 법도를 듣고 준행하라. 그러면 너희가 살 것이요. 너희의 열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시는 땅에 들어가서 그것을 얻게 되리라. 내가 너희에게 명하는 말을 너희는 가감하지 말고 내가 너희에게 명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지키라" 만약 모세의 말이 보편적으로 적용된다면 모세 이후의 선지자와 글을 받아들인 유대인과 시내산에서 받은 계시에 신약성서를 첨가한 기독교인은 분명 하나님의 계명을 어긴 것이 될 것이다. 그러나 분명 모세는 그 당시 기록중이던 특정한 계시를 언급하고 있었지 다른 경전을 첨가할 수 없다는 경고를 뜻하는  건 아니었다. 요한의 말처럼 모세의 말도 자신이 쓴 글을 함부로 고치지 말라는 뜻이었지 하나님으로부터 더 이상의 경전을 받지 못한다는 뜻이 아니었다.

 

  선지자(예언자)는 늘 경전을 첨가해옴
 

 사실 구약의 모든 선지자(예언자)들은 그들 이전의 선지자들과 하나님의 말씀에 다른 말씀을 "첨가"했다. 성서를 연구하는 학생이라면 역대상, 역대하의 저자는 열왕기와 사무엘서에 이미 들어있던 자료를 다시 기록 했으며 종종 말 그대로를 인용하기도 하고 두 책의 내용을 역대기에 첨가하기도 하고 빼기도 하였음을 알고 있을 것이다.

 이미 지적한 바 있듯이 신약 시대의 기독교인들은 유대인의 경전에 다른 경전을 "첨가"했다. 신약성서 내에서도 마태와 누가는 마가의 글에 "첨가" 하기도 하고 "빼기"도 하였던 것 같다. 왜냐하면 최근의 성서 학자들에 따르면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은 마가복음 이후에 쓰여졌으며 마태와 누가가 자신들이 복음서를 쓰는데 기본 원서로 마가복음을 사용하였기 때문이다 (즉 마가복음에다 자신들의 자료를 더하고 필요치 않은 내용들을 제하여 버렸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마태는 마가복음에다 동방박사 이야기와 에굽으로의 피신, 그리고 산상수훈을 첨가했으며 마가복음 1:23-28에 나오는 가보나움의 귀신들린 자를 고친 이야기를 빼 버렸다. 마가복음에 누가가 첨가한 것으로는 침례 요한의 출생, 선한 사마리아인과 탕자의 비유들이있다. 이방인 이였던 누가는 마가복음 7:26-27과 같이 이방인들의 감정을 상하게 할 수도 있는 구절(마태복음 7:26-27과 비교하라)과 정부관리와 충돌하는 기독교인을 보여주는 구절을 삭제하였다. (이런 이유 때문에 예수의 출생에 대해 헤롯 왕이 근심하는 부분을 삭제했었을 수도 있다)

 설혹 성서학자들의 견해가 잘못되어 마가가 최초의 복음서 저자가 아니라 하더라도 세 공관복음이 다르고 이 복음서들이 문자 그대로 상호 의존했다는 사실-어떤 보금서가 먼저 쓰였던 간에-로 미루어 보아 최소한 세명의 저자 중 두명이 다른 한 저자의 글을 가감했다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다.

만약 마태, 누가, 요한이 유대인 경전에 그들 자신의 책을 첨가 할 수 있다면 그리고 그 과정에서 기독교 복음서인 마가복음에 담겨진 이야기에 그들의 기록을 첨가할 수 있다면, 그러면서도 기독교인이 될 수 있다면 최소한 이론상으로는 조셉 스미스도 기독교인이 될 수 있다. 왜냐하면 이 경우에 있어서 문제는 어떤 사람이 경전에 다른 말을 첨가했느냐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모든 성서상의 사도와 선지자들도 기존의 경전에 다른 기록을 첨가해왔다. 문제는 경전에 기록을 첨가한 사람이 하나님으로부터 그러한 권능과 명을 받았느냐에 있다. 조셉 스미스가 받은 경전이 참된 것이나 아니냐를 이곳에서 입증할 필요는 없다. 경전에 의한 배제가 잘못되어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다른 사도와 예언자들이 경전이 다른 말을 첨가하고서도 여전히 기독교인으로 남아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경전을 끝맺는다거나 더 이상의 계시를 금한다는 성경상의 언급이 없기 때문에 그리고 또 과거의 사도와 선지자들이 경전에 다른 말을 첨가해왔으면서도 하나님에 과오를 범하지 않았기 때문에 경전을 근거로 배척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경전에 의한 배제 논리를 표현하면 다음과 같다.

  • 1.기독교 경전에 다른 기록을 첨가하는 사람은 기독교인이 아니다.
    2. 조셉 스미스는 기독교 경전에 다른 기록을 첨가하였다.
    3. 그러므로 조셉 스미스는 기독교인이 아니다. 그러나 한편으론
    4. 마태, 마가, 누가, 요한, 베드로, 바울도 기독교 경전에 다른 기록을 첨가하였다.
    5. 그러나 마태, 마가, 누가, 요한, 베드로, 바울은 기독교인이다.
    6. 그러므로 가정 1은 틀렸다.

문제는 신약의 저자처럼 조셉 스미스가 기독교 경전에 다른 기록을 첨가했느냐는데 있는게 아니라 신약성서의 저자들 처럼 사도적 권능을 가졌느냐는데 있다. 만약 조셉 스미스가 사도적 권능을 가졌다면 그가 성경에 다른 기록을 첨가한 것은 기독교 정신에 위배되지 않는다. 조셉 스미스는 선지자도 아니었으며 사도적 권능도 가지지 않았다고 주장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경전에 의한 배제를 포기하고 다른 논쟁에 의존하는 것에 불과하다.

 경전상의 배제 뒤에 숨어 있는 동기는 더 이상의 사도와 선지자가 결코 있을 수 없다는 대부분의 비몰몬들이 가지고 있는 확고한 확신이다. 만약 이 확신이 사실이라면 더 이상의 경전이 있을 수 없는 것이 당연할 것이다. 왜냐하면 아무도 경전을 쓸 수 있는 사도적 권능을 가질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비몰몬들의 이러한 확신을 입증해 줄 만한 경전 구절이 없으므로 후기성도들은 이 확신이 사실이 아니라고 받아들인다.   

 

후기성도(몰몬)와 성서의 완벽성

 

 경전상의 배제 뒤에 숨어있는 또 다른 동기는 성서 하나만으로 족하며 기존의 경전은 완벽해서 더 이상 손 볼데가 없다는 배제자들의 확신이다. 이것이 바로 성서가 완벽하다는 극단적인 교리로, 성서는 완벽해서 결함이 없으므로 모든 신학적인 질문에 명확한 답을 준다고 주장한다. 성서 완벽주의자들은 성서가 이토록 완벽하므로 더 이상의 경전은 불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종종 말일성도는 다음과 같은 성서 완벽주의 논리에 부딪히게 된다.

  1. 모든 종교적 진리는 성서에서 발견된다.
  2. 조셉 스미스의 계시는 성서에서 발견되지 않는다.
  3. 그러므로 조셉 스미스의 계시는 종교적인 진리가 아니다. 그러나 본인은 여기에다 다음과 같은 말을 덧붙이고 싶다.
  4. 명제 1도 성서에서 발견되지 않는다.
  5. 따라서 명제 1은 종교적인 진리가 아니다.
  6. 만약 명제 1이 종교적인 진리가 아니라면 명제 1에 기초한 결론 3도 종교적인 진리가 아니다.

극단적인 성서 완벽주의자들은 명제 4를 두고 논쟁하겠으나 이는 어쨌든 사실이다. 성경 어는 곳에도 성경(Bible)을 언급하고 있지 않다.  성경은 성서에 나오는 용어가 아니다.

 성경에서 발견되지 않는 명제를 기본 원리로 받아들이는 것이 극단적인 성서 완벽주의자들의 주장이 갖는 가장 큰 결함이다. 예를 들면 "성경은 구원에 충분하다" "성경은 완벽하다"  "성경은 인간이 갖는 모든 종교 문제에 해답을 준다"  "성경은 하나님을 대변해 말하고 행동 할 수 있는 권능을 우리에게 준다" 또는 "성경 이외에 다른 경전이란 있을 수 없다."는 주장들이 그것들이다. 이 명제중 그 어느 것도 성서에서 나온 건 없다. 그러면서도 모든 비성서적인 종교원리를 거부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비성서적인 종교원리를 근본적인 종교 원리로 받아 들인다.

 극단적인 성서 완벽주의자들이 가장 많이 의존하는 경전구절은 디모데 후서 3:16-17이다: 모든 성경(scripture)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 그러나 완벽주의자들이 자신들의 주장을 옹호하기 위해 사용하는 이 구절은 단순히 문제점을 증명하지 않고 이론을 펴 나가는 꼴이다. 왜냐하면 이 구절은 성경(Bible)을 언급하지도 않으며 성경 안에 어떤 책이 포함되어야 하는지도 설명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이 구절은 단지모든 성경(all scripture)은 유익하다고만 말할 뿐이다. 참으로 후기성도는 몰몬경, 교리와 성약, 값진 진주를 포함한 모든 경전이 유익하다는 것에 진심으로 공감할 것이다. 디모데 후서의 이 구절은 어떤 것을 경전으로 포함시킬 것인가를 결정하는 기준을 제공해주지 않는다. 설혹 제공해준다 할지라고 그 경전으로서만 충분하다거나 완벽하다거나 또는 더 이상의 개선이 필요없다거나 하는 것을 보여 주지 못하고 단지 경전이 유익하다고만 언급하고 있을 뿐이다. 차를 운전하고 싶을 때 자동차 열쇠를 가지고 있는 것이 유익하겠으나 탱크에 기름이 없다거나 바퀴에 공기가 없다면 자동차 열쇠를 가지고 있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어떤 사물이 충분하지 않고서도 유익하거나 필요할 수 있다. 바울이 디모데에게 한 진술은 하나님의 사람이 경전없이는 완벽해 질 수 없음을 분명하게 가르치나 경전 하나만으로 완벽하게 된다고 말하지는 않는다. " 모든 종교적 진리는 성서에서 발견된다" 거나 "성경 하나만으로 충분하다" 거나 혹은 "성경 이외에 다른 것이 있을 수 없다"는 식의 중요한 종교적인 명제가 조리에 맞을려면 명확한 용어로 성경에 설명되어 있어야 하는데 실제로는 이런 구절이 성경에 전혀 나와 있지 않다.

 후기성도가 이러한 극단적인 성서 완벽설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정의상 후기성도들은 기독교인이 아니라고 일부 보수적인 개신교인들이 주장할 수 있다. 그러나 세상에는 구원받기에는 성경 하나만으로 족하다거나 성경이 모든 종교적인 문제를 명확하게 답변해 준다고 믿지 않는 기독교인들이 많다 -사실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이 그렇지 않다고 믿는다. 만약  현대의 보수적인 개신교인들을 제외한 모든 기독교인들이 극단적인 형태의 성서 완벽설을 믿지 않기 때문에 기독교에서 배제된다면 이러한 배제는 교파의 종교적인 오만 이외에는 아무것도 아니며 기독교인를 자신들에 맞게 정의하는 것에 불과할 분이다(일장을 보라). 반면 천주교와 정통파와 주된 개신교파들이 이런 형태의 완벽주의를 거부하는데도 기독교에서 제외되지 않는데 후기성도만 제외된다면 우리는 분명 표리부동한 신학을 다루고 있는 것이다.

 

 어떤 것이 "기독교" 성경인가?

 

 경전에 의한 배제가 갖는 최대 약점은 사실 다른데 있다. 이 약점이란 기독교 경전은 단 한 가지밖에 없다는 생각인데 역사적으로 보면 기독교 경전은 하나만 있어온게 아니고 종류가 많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서기 190젼대 후반에 로마 교회의 교인 한 사람이 그 당시 로마 교회가 경전으로 받아들였던 책들의 목록을 열거했다. 이 경전의 목록을 담고 있는 서류를 로도비코 무라토리가 1740년에 밀란의 암브로시안 도서관에서 발견하였으며 이런 사유로 이 경전을 무라토리 경전이라고 부른다. 이 경전에 따르면 이세기 끝 무렵 로마 교회는 히브리서, 야고보서, 베드로 전서, 베드로 후서를 경전으로 간주하지 않았으며 요한의 서신 중 오늘날까지도 이 두 서신이 어떤 두 서신인지도 확실히 모르지만 두 서신만을 경전으로 받아들였다. 그들은 이를 경전으로 받아들였으나 오늘날 이 두 서신은 신약과 베드로의 계시록과 솔로몬의 지혜서에는 들어있지 않다. 분명 그들의 경전은 현대 기독교인들의 경전과는 달랐으나 이 이유 때문에 2세기나 3세기의 로마 교회가 기독교가 아니었다는 뜻일까? 이들이 바로 그리스도를 위해 경기장에 죽어 가는 사람들이었음을  기억하자. 과연 누가 그들의 경전이 달랐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그들이 기독교인 아니었다고 주장 할 수 있을까?

 가이사랴의 유명한 교회 역사가였던 유세비우스는 서기 3백년경쯤에 또 다른 경전을 제안하는 글을 썼다. 유세비우스는 21권의 책만을 "인정받는 책"으로 열거했으며 히브리서, 야고보서, 베드로 후서와 요한 3서, 유다서와 계시록을 의심이 가는 책으로 열거했다. "교회 역
사의 아버지"는 기독교인이 아니었을까? 결국 유세비우스가 믿었던 성서는 현대 "기독교인"이 믿는 성서와는 달랐다. 브루스 엠 멧츠거가 요악한 말에 의하면 "서기 325년 경에 유세비우스가 보고한 바에 의하면 동방 교회는 계시록 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천주교회 서신들의 권위에 대하여 상당한 의심을 품고 있었다.

나자안주스의 성 그레고리는 자신의 4세기 경전에서 계시록을 제거했으나 삼세기가 지난 692년에서야 트룰란 종교회의에서 비준되었다. 그레고리는 계시록을 자신의 경전에 포함시키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여러분은 모든 것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들 외에 다른 것이 있다면 참된 책이 아니오"라고 까지 주장했다. 성 그레고리와 트룰란 종교회의는 "기독교" 성서에서 계시록을 제하였으므로 비기독교인이었을까? D또는 클로몬타누스 사본으로 알려진 희랍 신약 사본 중 가장 중요한 사본에는 구약과 신약 성서의 목록이 담겨져 있다. 이 사본 자체는 6세기의 산물이나 대부분의 학자들은 경전의 목록은 4세기 당시의 알렉산드리아 교회에서 비롯된 것으로 믿는다. 이 경전에는 빌립보서, 데살로니가전, 후서와 히브리서가 빠져있으나 바나바서, 허마스의 목자, (사도행전이 아닌) 바울 행전이 포함되어 있으며 무라토리 경전과 마찬가지로 베드로의 계시록도 포함되어 있다.

 현대 기독교 경전과 같은 경전이 처음 나타난 때는 4세기 중반을 넘어서였다. 이 당시 알렉산드리아의 감독이었던 성 아타나시우스는 자신의 교회에 받아들일 수 있는 책들을 자신의 39번째 축서(39th Festal Letter)에서 추천하였다. 그러나 아타나시우스의 경전은 천년이 지난 후에서야 비로소 공식화되었다.

 5세기 이전의 시리아 기독교 경전에는 고린도 삼서와 타티안의 디아테사론(4복음서를 하나로 묶은 책)이 포함되었으나 사복음서와 빌레몬서, 일곱게의 일반 서신과 계시록이 제외되었다. 5세기 이후의 시리아 기독교는 디아테사론 대신에 4복음서를 포함시키고 고린도 삼서를 제외시킨 시리아의 페쉬타(Syriac Peshitta)성경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시리아 기독교는 22권의 책만을-사복음서와 사도행전 및 바울의 14서신과 야고보서, 베드로 전서, 요한 1서-경전으로 인정했다. 오늘날 까지 시리아 교회는이 22권만을 경전으로 인정하며 베드로 후서, 요한 2서와 3서, 유다서와 계시록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희랍 정교회가 계시록을 공식 성구집(lectionary)에 결코 포함시키지 않았던 사실을 주목해 보는 것도 흥미로운 일일 것이다.

 죠지 교회와 아르메니아 교회는 시리아 교회를 좇아 각각 10세기와 12세기까지 계시록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아비시니아 정교회의 경전에는 현대의 신약성서인 27권의 책과 (로마의 클레멘트가 기록한 것으로 간주되는) 시노도스(Synodos) 와 콸레멘토스(Qulementos), (부활 이후 구세주의 강연을 포함한) 성약의 책과 이디오피아의 디다스칼리아( Didascalia))가 포함되어 있다. 아비시니언 경전은 구약에다 (유다서가 예언서라고 언급한)에녹의 책을 첨가했다.

 지금까지 언급한 이 모든 것의 요지는 신약성서의 어떤 책도 신빙성이 없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말일성도는 신약의 27권 전부를 믿기 때문이다. 요지는 경전 문제에 있어 서로의견이 달라왔고 지금도 다르면서도 여전히 기독교인으로 남아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다. 기독교가 시작할 때부터 한권으로 고정된 경전을 가지고 있었다는 생각은 잘못된 생각이다. 사실 경전으 1546년에 열린 트렌트 종교회의에서 로마 카톨릭에 의해 비로소 최종적으로 확정 되었다. 개신교 경전은 이 보다 훨씬 후에 가서야 공식적으로 확정되었다.

 개신교인 중에서 마틴 루터는 신약의 책들이 서로 가치가 다르므로 세 등급으로 분류해야 한다고 제안하였다. 루터는 자신이 출판한 초기 신약성서의 서문에서 가장 낮은 등급의 책(히브리서, 야고보서, 유다서, 계시록)은 "신약에서 참되고 가장 고상한 책"에 속하지 않는다고 보았으며 더 나아거 야고보서를 밀짚으로 만들러진 편지"라고 부르기까지 하였다. 루터는 히브리서가 침례 이후에는 회개란 없다고 가르치기 때문에 바울의 가르침과 상반되며, 야고보서는 행위에 의한 의로움을 가르치기 때문에 역시 바울의 가르침과 상반되며,, 유다서는 베드로 후서와 외경을 베꼈으며 계시록은 사도 요한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내용을 다루고 있으며 그리스도에 관하여 충분하게 가르치고 있지 않으며 또한 계시록 저자가 자신을 너무 높이 치켜 세우고 있다고 불평했다. 루터ㅡ이 성경판에는 히브리서, 야고보서, 유다서, 그리고 계시록을 나머지 신약으로부터 분리시켰으며 심지어는 이 책들을 "외경"과 "비성서적"이라는 딱지를 붙이기까지 하였다. 브르스 메츠거는 다음과 같이 지적하였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 부분으로 나뉘어진 신약을 가지고 있다. '복음서와 사도행전', '서신과 거룩한 사도들', 그리고 '출처가 의심스러운 신약'이 바로 그것으로 이런 식으로 배열된 성경이 거의 일세기에 걸쳐 6차례나 출판되었다.
 바셀의 개혁 설교가였던 요한 오콜람파디우스는 1536년에 "야고고서와 유다서 및 베드로 후서와 요한 2,3서와 더불어 계시록을 (신약성서)의 나머지 책과 대등하다고 간주하지 않는다"라고 기록했다.

 다시 한번 이 모든 자료를 제시하는 요지는 현대 기독교의 경전을 공격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개신교와 천주교, 고대 기독교와 현대 기독교를 막론하고 많은 기독교인들이 어떤  책이 경전에 속하고 어떤 책이 경전에 속하지 않는지에 대해 서로 의견이 같지 않았음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다. 이들이 단일의  통일된 경전을 가지고 있지 않으면서도 여전히 기도교인으로 간주되는데 후기성도를 똑 같은 이유로 비기독교인이라고 부른다면 논리적으로 일관성이 없으며 표리부동한 신학의 또 다른 예에 불과한 것이다.

 

 천주교 성경 대 개신교 성경


 마지막으로 지금도 여전히 단일의 통일된 기독교 성경이 없음을 이해해야 한다. 왜냐하면 개신교와 천주교는 "(개신교가 외경이라고 부르는) 12권의 책(deutercanonical books)"이 경전인가에 대해서 서로 견해가 다르기 때문이다. 1546년 트렌트 종교회의에서 로마 카톨릭은 외경을 포함한 경전을 영감받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채택하였다. 따라서 이 12권의 책은 현대 천주교 성경판에는 나와있다. 도빗서, 유디트서, 솔로몬의 지혜, 집회의서 즉 벤 시락서, 바룩서, 예레미야의 서신, 마카비 일서, 마카비 이서, 에스더 첨가서,(아사리야의 기도와 세 젊은이의 기도, 수산나와 장로들, 그리고 벨과 용으로 이루어진) 다니엘 첨가서가 바로 그것이다.

 이 책들은 기원전 2세기에 이집트에서 사용한 칠십인역은 초기 기독교회가 사용한 구약성서였으므로 천주교회의 라틴어판인 벌게이트로 이어졌으며 지금도 여전히 희랍 정교회가 사용하고 있다. 1546년 4월 8일에 발표된 종교회의 신조인 De Canonicis Scripturis는 이 12권의 책(외경)을 기독교 경전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누구나 다 저주 받은 자 들이라고 발표했다.

 반면 대부분의 개신교들은 칠십인역과 칠십인역의 모든 내용을 받아들이는 수세기의 전통을 깨고 유대인들이 보존해온 히브리어 구약성서를 선호하였다. 히브리어 구약성서 중세판에는 칠십인역에는 들어있지 않았으므로 개신교인들은 일반적으로 외경들을 경전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므로 천주교와 희랍 정교회 성경은 일반 개신교 성경보다 대략 230쪽에 해당하는 12권의 책을 더 가지고 있으며 천주교와 희랍 정교회 성경보다  더 잛은 경전을 가지고 있는 개신교인들은 트렌트 종교회의의 "저주"를 받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개신교와 천주교는 "기독교" 경전을 감하거나 첨가했음에도 불구하고 서로를 기독교인이라 부른다. 만약 천주교와 희랍정교가 개신교보다 성경에 12권의 책을 더 가지고 있데도 기독교로 간주될 수 있다면 왜 몰몬은 몰몬경과 교리와 성약과 값진 진주를 성경에 첨가할 수 없을까? 한쪽에만 공정할 수 없는 일이다.

 사실 기독교 통합의 관심사 때문에 개신교와 천주교는 경전 문제에 있어서 서로 "동의하지 않기로 동의해온 것"이다. 개신교와 천주교는 서로 자신들이 옳으며 상대방이 그릇되다고 믿으면서도 어떤 측의 경전이 참된 경전이나라는 문제는 상대를 "비기독교"라고 부를 만큼 심각하지 않다고 느낀다. 이것이 바로 똑같은 문제가 후기성도에게 제기 되었을 때 공정치 못한 이유다. 만약 단일의 통일된 기독교 경전이 있다면 그래서 몰몬이 기독교인이 되기 위해 받아들여야 할 기독교 단일의 통일된 성경이 있다면 도대체 어떤 경전일까? "기독교" 경전은 천주교가 발행한 성경일까 아니면 개신교가 발행한 성경일까? 그리고 만약 개신교와 천주교가 이 문제에 대해 서로 의견이 다르면서도 여전히 양측이 기독교로 남아있다면 어떻게 하여 이 똑같은 문제가 몰몬은 기독교 가족으로부터 배제하는데 일관성있게 적용될 수 있단 말인가? 즉 다른 교회들이 그들 가운데서는 적용하지 않는 것을 후기성도를 배제하기 위해서 적용하고 있는 셈이다.

 

 요 약


 후기성도가 보다 많은 경전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기독교 경전은 성경과 사도의 선포로 보아 종결된 것도 아니며 성경의 내용이 사도 시대에 종결되었거나 동의된 것도 아니다. 경전이 종결되었다는 개념은 비록 모든 기독교파들이 동의한 단일의 통일된 경전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훗일에 생겨난 개념이다. 사도들이 죽고 난 다음 계시가 끊어지자 교회는 다음 두 가지 결론 중 하나에 이르게 되었다. 첫 번째 결론은 하나님 자신이 말하고 싶은 모든 것을 다 말했으므로 계시가 끊겨 교회는 더 이상의 계시를 필요로하지 않았다는 것이고, 두 번째 결론은 계시를 받을 사도와 예언자가 더 이상 없게 되자 교회는 필요한 구성요소를 잃게 되었으므로 계시가 끊겼다는 것이다. 후기성도는 두 번째 결론을 받아들인다.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성경은 기독교회의 산물이지 기독교회가 성경의 산물은 아니다. 신약성서가 쓰여지기 이전에도 기독교인이 있었던 것이 분명하므로 성경 때문에 기독교가 생겨났다고 주장할 수 없다. 후기성도는 이러한 개념과 성경에서 찾아볼 수 없는 성경에 관한 다른 모든 광적인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오늘날까지 기독교는 어떤 책이 하나님의 책이냐, 즉, 어떤 책이 "기독교" 성경에 속하느냐를 두고 의견을 달리 해왔다. 기독교 시대에 어떤 책이 신약성서의 일부가 될 수 있는냐를 놓고 의견이 서로 달리 해왔다. 게다가 천주교는 초기 기독교의 고대 희랍어판에서 발견되는 많은 책을 첨가했다(아니면 개신교가 뺏던가). 사실 전통적인 기독교는 경전과 성경 문제에서 결코 의견이 같아 본 적이 없었다. 현대 교회들이 어떤 것이 기독교 경전인가를 놓고 서로 의견이 다른데도 상대를 기독교로 부르고 예수 그리스도 후기성도 교회에게만 똑같은 특권을 거부한다면 논리적으로 모순될 뿐만 아니라 공정치 못하다.
 

6
교리에 의한 배제

 

 후기성도를 비기독교인으로 배척하기 위해 가장 자주 사용되는 것은 교리에 의한 배제다. 이 배제는 여러 가지 형태로 나타나나 실제로는 다음과 같은 하나의 논리적 주장으로 압축해 볼 수 있다. 즉 후기성도는 다른 기독교인들이 믿는 것을 믿지 않으므로 기독교인이 될 수 없다는 주장이다. 이런 부류의 주장이 갖는 보편적인 결함은 다른 모든 기독교인이 "기독교인들이 믿는 것"을 믿는다면 그릇된 가정이다. 사실은 다른 어느 두 교파나 기독교인 개개인도 세부적인 모든 기독교리에 의견이 같지 않다. 대부분의 교파는 어떤 교리가 모든 기독교인들이 받아들여야할 핵심 교리인지 어떤 교리가  토론의 여지가 있는 종속교리인지 의견이 서로 다르다.

 많은 기독교 가운데서 교리의 차이점이 있는게 분명한 사실인데도 후기성도에게만 교리의 차이를 보이지 말라고 요구하는 것이 과연 공정할 수 있을까? 또 이러한 "교리의 차이점"을 측정하는 기준은 무엇인가? 설혹 이러한 요구가 공정하다 할지라도 이러한 요구에 응할 수 없다. 왜냐하면 요구에 응하고 싶더라도 후기성도가 동의할 수 있는 모든 기독교인이 받아들이는 단일의 통일된 교리가 없기 때문이다. 많은 기독교인들이 모든 기독교인들이 받아들이는 보편적인 교리가 있다고 주장해 왔지만 그 어느 누구도 모든 사람을 만족시킬정도의 보편적인 교리를 정의하지 못하였다.

 

무엇이 "기독교" 교리인가?

 모든 면에서 "기독교" 교리를 따르라는 요구를 후기성도가 진지하게 받아들이려 했다고 잠시 가정해 보자. 그렇다면 후기성도의 교리는 개신교의 교리와 일치할까 아니면 천주교의 교리와 일치할까? 후기성도는 사도의 계승을 믿게 될까 아니면 모든 믿는자의 신권을 믿게될까? 말일성도는 지상에 있는 그리스도 교회의 머리로 대주교와, 족장, 교왕, 군주를 믿게될까 아니면 어느 누구도 믿지 않게될까? 자비만으로 구원을 받게된다고 믿게될까 아니면 교회의 성사가 구원에 필요하다고  믿게될까? 자유의지를 믿게될까 이니면 예정설을 믿게될까? 물의 침례를 행하게 될까? 그렇다면 침수로써의 침례를 행하게 될까 아니면 물뿌리는 세례를 행하게 될까? 그리스도의 대속을 문자 그대로 믿어야 할까 아니면 하나의 예나 표본으로 믿어야 할까? "원죄"를 믿어야 할까 아니면 믿지 말아야 할까? 이런 질문은 계속 이어질 것이다.

 기독교인들은 교리의 기준이 무엇인지도 정확히 잘 모르면서 후기성도에게 단일의 통일된 기독교" 교리를 따르라고 요구하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 후기성도에게 단일의 통일된"기독교" 교리를 따르라고 요구하게되면 특정한 교파의 교리는 차이점을 묵인하면서도 다른 교파의 교리는 차이점을 묵인하지 않는 표리부동한 기준을 세우는 것이다. 모든 참된 교회는 핵심적인 기독교 교리가 같다는 자주 듣게되는 주장은 기독교파 간에 존재하는 교리의 차이점이란 순전히 이차적인 것, 즉 시시한 문제,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 되지 않는 문제일 뿐이라는 모호한 명제에 근거를 두고 있다. 기독교 역사적 관점에서 보게 되면 이런 주장은 방어하기가 매우 힘들며 개신교인과 천주교인들이 이 "시시한" 차이점 때문에 한 때 서로를 이단으로 몰아붙여 화형시켰는지 사실 여부를 받아들이기가 오히려 더 쉬울런지 모른다.

 

기독교 교리는 늘 성경의 교리인가?

 교리에 의한 배제를 적용하는 사람들은 기독교 교리와 성경의 교리를 자주 혼동한다. 많은 교파들은 성경에서 찾아볼 수 없는 교리를 맡고  가르친다. 예를 들어 일부 개신교인들은 춤추는 것을 죄로 여긴다. 천주교인들은 마리아의 무염시태 (immaculate conception )를 믿는다. 그리고 개신교와 천주교는 최소한 초교파 종교회의에서 발표한 교리를 믿으나 이런 교리를 성서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니케아 신경은 그리스도에 대한 기독교인들의 믿음을 정의하는데 도움을 주기위해 기독교인들이 작성했다는 점에서 기독교교리로 간주된다. 니케아 신경은 내용에 있어서는 성서의 교리가 아니지만 보편적인 의미에서는 기독교 교리다.

 

기독교 교리는 늘 옳은가?

교리에 의한 배제를 적용하는 사람들은 또한 교리가 참되느냐 그렇지 않느냐 하는 문제와 어떤 특정한 교리를 믿게 되면 그 사람이 필연적으로 비기독교인이 되느냐 그렇지 않느냐 하는 문제와 자주 혼동한다. 이들은 기독교 교리를 곧 옳은 교리로 혼동한다. 종종 이들은 단지 두 부류의 신앙인들, 즉" 내가 믿는 사람들"과 "참된 기독교인이 아닌 사람들" 만을 보게된다. 그러나 어떤 기독교인은 다른 기독교인이 믿지 않는 것을 믿으면서도 여전히 기독교인으로 간주되는 것으로 보아 여러 기독교파가 존재하는 것이다. 따라서 교리에 의한 배제를 적용하는 사람들이 사물을 두 가지로만 보지만 실제로는 세 번째 부류의 신자, 즉 그들과는 믿음이 다른 참된 기독교인들이 있음에 틀림없다.

 후기성도 비평가들은 만약 후기성도의 이러 저러한 믿음이 틀린 것으로 입증될 수 있다면 이는 후기성도는 기독교가 아님을 입증해 준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 두 가지 문재(참된 교리와 기독교 교리)는 논리적으로 별개의 문제다. 많은 교파는 다른 교파가 믿지 않는 것을 믿는다. 예를 들어, 천주교는 마리아가 원죄 없이 예수를 잉태했다는 교리인 무염시태와 마리아가 천국에서 중재자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다는 중재설을 믿지만 개신교는 이런 교리를 믿지 않는다. 일반적으로 개신교는 성경만으로 구원에 충분하다고 믿지만 천주교는 이를 믿지 않는다. 분명 이 문제는 교리상으로 중대하며 이 교리에 있어서 분명 개신교나 천주교 둘 중에 하나가 잘못하고 있는 것임에 틀림없다. 그럼에도 (초보수주의자들을 제외한) 양측은 이러한 믿음의 차이 때문에 상대측을 비기독교로 보지는 않는다. 상대의 교리가 옳은지 그른지를 입증할 수 있는 방법이 없지만 옳든지 그르든지 둘 중에 하나임에는 틀림이 없다. 천주교나 개신교 둘 중에 하나가 틀려야 한다. 양측은 서로 상대방이 틀렸다고 확신한다. 그러나 한편 양측은 견해가 다르다는데 동의했으므로 일반적으로 아량을 보여 상대측의 견해를 기독교적인 견해로 보아 넘긴다.

 그러나 교파간의 교리 차이에도 불구하고 이런 문제에 의견을 달리하는 사람들을 기독교로부터 배제하지 않으면서 다른 교파와 의견을 달리한다는 이유만으로 후기성도를 제외시킬 수 있을까? 만약 기성교파들이 교파간의 교리 차이를 어느정도 참아 넘길 수 있다면 후기성도만을 선택적으로 배제하기 위해 교리 차이를 이용해서는 안될 것이다.

 한편 다른 기독교파들이 아량을 보이는 교리 차이는 광범위한 한계내에서의 유도리의 문제이며 예수 그리스도 후기성도 교회의 일부 교리는 신약이나 전통 기독교에 비추어보아도 너무 이상한데다 심지어는 이 광범위한 한계를 벗어나서 아량을 보일 수 없다고 주장해 왔다. 그러나 이러한 근거로 비평들이 가장 크게 헐뜯는 예수 그리스도 후기성도 교회의 이 개별적인 교리들을 자세히 검토해보면 놀라운 결과를 낳게된다. 가장 최근에 주목을 받고 있는 문제인 후기성도는 "이방 신제조자"라는 비난부터 시작해 보자.

 

 신성에 관한 교리

 하나님(God)은  한때 인간이셨으며 인간도 신(gods)이 될 수 있다고 후기성도가 믿고 있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예수 그리스도 후기성도 교회의 5대 회장 이었던 로렌조 스노우는 자신의 2행 연구에서 다음과 같이 읊고 있다.

     지금 인간이 인간이듯 하나님도 한 때는 인간 이었고
     지금 하나님이 하나님이듯 인간도 언젠가는 하나님이 되리.

일부  사람들은 이것이야 말로 하나님의 위엄을 모독하는 이교도의 교리라고 주장해왔다. 그러나 모든 기독교인들이 그렇게 생각해온건 아니다. 2세기에 가장 저명한 기도교 신학자였던 이레내우스 경은 로렌조 스노우와 비슷한 말을 했다.

    말씀이 인간이 되셨다면,
    인간도 신(gods)이 될 수 있으리.

이레내우스는 신성에 관하여 또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우리가 처음부터 신(gods)으로 창조되지 않고, 처음에는 인간으로 창조되었다가 나중에야 신이 된다고 해서 그분(하나님)을 원망할 수 있을까? 하나님이 순수한 자비로 이러한 과정을 채택하셔서 아무도 하나님이 인간을 차별하신다거나 인간에게 인색하시다고 불평할 수 없다. 하나님은 "내가 말했노니 너희는 신들이라. 너희 모두는 가장 높으신 분의 아들들이라"고 선포하신다. ...왜냐하면 먼저는 필멸의 특성이 보여지고 다음에는 필멸의 것이 정복되어 불멸가운데 삼키울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또한 2세기의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 경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내가 말하노니 여러분이 신이되는 방법을 인간으로부터 배우도록 하기위해 참으로 하나님의 말씀이 인간이 되었습니다." 이 말은 로렌조 스노우의 말과 매우 흡사하다. 또한 클레멘트는 "만약 사람이 자신을 안다고 하나님을 알게될 것이며 하나님을 알게되면 하나님처럼 될 것이다. .. 하나님의 미는 참된 미다. 참된 미는 하나님 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인간이 신(gods)이 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에 인간은 신이 될 것이다. 그래서 헤라클리투스가 '인간은 신이며 신은 인간이다'라는 말을 했을 때 그의 말이 옳았다"

 2세기 성 저스틴 마터는 태초에 인간은 "하나님처럼 창조되어 고통과 죽음으로부터 자유로웠으며" 따라서 "인간은 신이 되고 가장 높으신 분의 자녀가 될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주장했다.

 4세기 초기에 자신의 이름을 따 지어진 아타나시우스 신경으로 유명한 이단의 적이었던 성 아타나시우스도 로렌조 스노우가 사용한 용어와 매우 흡사한 용어로 신성에 대한 자신의 믿음을 피력했다. "우리가 신이 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말씀이 육체가 되었다... 주님이 육체를 입고 인간이 되었듯이 우리 인간도 그의 육체를 통해 신이 되어 영원한 삶을 상속받게 된다. 또 다른 경우에 아타나시우스는 "우리가 신이 되도록 주님은 인간이 되셨다"고 언급했는데 이는 로렌조 스노우의 표현과 똑같다.

 마지막으로 가장 위대한 기독교 교부였던 성 어거스틴도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다. "그러나 인간을 의롭게 만드시는 그분 자신이 인간을 신으로 만드신다. 왜냐하면 인간을 의롭게 만들어 하나님의 자녀로 만들기 때문이다. [요1:12].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면 우리도 역시 신이 된 것이다."

 본인은 이곳에서 이교도나 영지주의자가 아닌 비난할 여지가 없는 권위있는 기독교인들의 말만을 인용하고 있음을 주목하기 바란다. 위에 언급한 다섯 사람은 기독교인일 뿐만 아니라 정통 기독교 성인으로 인정받는 정통 기독교인이었다. 위 다섯 사람중 세 사람의 말은 사도 시대로 부터 백년이 채 못되어서 한말이며 그리고 다섯 사람 모두다 신성에 관한 교리를 믿었다. 이 교리는 비교적 최근까지 역사적인 기독교의 일부였으며 일부 동방 정통 교회에서는 이 교리가 여전히 중요한 교리로 남아있다. 후기성도가 이 교리를 지어냈다고 비난하는 자들은 기독교 교리 역사를 모르는 사람들이다. 천주교에 관한 가장 훌륭한 책을 낸 리차드 피 맥브리엔 신부는 자신의 저서에서 교부 시대의 근본적인 정통 원리는 "우주의 역사를 신성화와 구원의 역사로 보는 것이다"라고 언급하고 있다. 맥브리엔에 따르면 이 결과 "성신은 참된 하나님이기 때문에 성신이 거하게 되면 우리는 참된 신이 될 수 있다"고 교부들은 결론지었다.

         몰몬의 출판물이 안니 웹스터 기독교 신학 사전에는 다음과 같은 부수적인 정보가 "신성화"라는 기사에 나와있다.

     신이 되고자 하는 것(희랍어로 theosis)은 모든 기독교인의 목표다. 성경에 따르면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되었다...
     인간이 하나님처럼 되는 것이, 은혜로 신이 되는 것이 가능한 일이다. 이 신성화 교리는 구약과 신약의 여러 성구에 근거를 두고 있다.      (예: 시82(81).6: 벧후1.4). 그리고 성 바울은 양부모가 양자를 입양할 대 사용하는 언어(cf. 롬8.9-17: 갈4.5-7)와 제 사복음서      (cf.17.21-23)를 사용하는 경향이 있긴 하지만 이 교리는 본질적으로 성 바울의 가르침이다.

     성 이레내우스는 '말씀이 인간이 되었다면 인간이 신이 되도록 하기 위하여 그랬다'는 자신의 유명한 구절에서 베드로 후서의 언어를  사용했으며 따라서 베드로 후서의 언어는 희랍신학의 표준이 되어 버렸다. 4세기에 성 아타나시우스는 이레내우스의 말을 그대로 반복했음 5세기의 알렉산드리아의 성 시릴은 우리는 참여로 '(희랍어로 methesis) 하나님의 자녀가 될 것이다라고 말했다. 신성화는 중성자 성 막시무스의 핵심적인 교리였다. 왜냐하면 막시무스의 신성화 교리는  신이 사람의 몸으로 나타났다는 신학에서 비롯됐기 때문이다. '간략히 말하자면 모든 시대와 세대에 구애받지 않고 신성화가 일어나고 있다... 그래서 10세기 말에 신 신학자였던 성 시므온은 질적으로 하나님이신 분이 은혜로 이 된 자들과 친구가 친구와 대면하여 이야기 하듯이 대화하신다...

    마지막으로 신성화는 하나님에게 흡수된다는 뜻이 아님을 주목해야 한다. 왜냐하면 신이 된 자들은 분명 자신으로 남아있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성신 가운데서 신성한 본질의 화상으로 변모하는 것은 육체와 영을 지닌 인간이다. 따라서 신성화는 모든 기독교인의 목표다.

 신성화 교리가 옳든지 그르든지 간에 역사적 사실을 잘 모르는 일부 현대 기독교들은 이를 잘 모를 수도 있으나 이 교리는 여러세기 동안 주된 기독교 정통교리였다. 만약 이 교리가 "희랍 신학의 표준"이 되었다면 그리고 만약"신이되는 것이 모든 기독교의 목표"라면 말일성도가 이와 똑같은 신학과 목표를 가졌다는 이유로 기독교 가족으로부터 배제될 수는 없다. 만약 성 이레내우스와 성 저스틴 마터와 알렉산드리아의 성 클레멘트와 성 아타나시웃, 알렉산드리아의 성 시릴과 중성자 성 막시무스와 신 신학자인 성 시므온 모두가 인간이 신이 될 수 있다고 믿었다면 그리고도 이 훌륭한 초기 성인들이 여전히 기독인으로 간주 될 수 있다면 후기성도들이 똑같은 것을 믿는다는 이유로 배척될 수 없을 것이다. 사실 이 교리는 이교도의 교리도 이니며 주된 기독교 전통에 비추어 보아도 전혀 이상한 교리도 아니다. 이 교리는 2세기의 저스틴 바터로 부터 11세기의 신 신학자인 시므온에 이르기까지 신학자와 성인들 가운데서 챶아볼 수 있기 때문에 분명 조셉 스미스가 지어낸 것은 아니다.

 사실 후기성도들은 대부분의 이 복음 전도자들이 이해하고 있는 신성화 교리에 동의 하지 않은 것이다. 왜냐하면 후기성도의 견해에 따르면 인간은 그리스도의 속죄를 통해서만 그리고 영광스러운 부활이 있고 난 후에야만 온전한 신의 상속을 받기 때문이다. 논쟁할 여지가 없이 참된 기독교인으로 인정 받는 시 에스 루이스의 견해는 후기성도가 이해하고 있는 교리와 흡사하다: " 가장 재미없고 가장 흥미없는 사람이 언젠가는 강렬하게 숭배하고 싶은 신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기억하면서 신과 여신이 될 가능성이 있는 사람들로 이루어진 사회에 사는 것은 진지한 일입니다"

 또 루이스는 기독교의 가장 큰 약속은 인간이 그리스도의 생활방식(희랍어로 bios가  아닌 zoe)을 공유 할 수 있다는 것이며 따라서 하나님의 아들과 딸들이 될 수 있다고 말한다. 루이스는 "[그리스도]는 자신의 생활 방식을 다른 사람들에게 보급하기 위해, 내가 '좋은 감염'이라고 부르는 방식으로 보급하기 위해 이 세상에 오셔서 인간이 되셨다. 모든 기독교인은 작은 그리스도가 되고자 하는 것이다"고 설명하고 있다. 로렌조 스노우 뿐만 아니라 기독교 교부의 말을 연상시켜주는 말로 루이스는 명료하게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인간이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도록 하나님의 아들이 인간이 되셨다."
 루이스가 자신의 신성화 교리를 다음과 같이 더 자세히 언급할 때 사실은 후기성도의 견해를 되풀이 하고 있다.

      완전하라는 명령은 그림의 떡도 아니며 실현 불가능한 것을 하라는 명령도 아니다. 주님은 우리를 이 명령에 순종할 수 있는 창조물로 만들고자 하신다. 주님은 (성경에셔)우리는 "신이다라고 말씀했으며 그 말씀을 이행하실 것이다. 우리가 주님이 하시도록 허용만 한다면 -왜냐하면 원한다면 우리가 못하도록 막을 수도 있기 때문에- 주님은 가장 약하고 가장 더러운 우리를 신으로 만들어, 눈부시고 발광하는 불멸의 창조물로 만들어 하나님 자신의 무한한 권능과 기쁨과 선을 완전하게(물론 작은 범주기는 하지만) 하나님에게로 반영시키는 밝은 흠없는 거울을 통해 우리가 지금 상상할 수 없는 그러한 에너지와 기쁨과 지혜를 가지고 영원토록 박동하게 하실 수 있을 것이다. 이 과정은 길고 부분적으로는 매우 고통스러울 것이나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우리가 이곳에 있는 것이다. 그 이외의 다른 이유는 없다. 주님은 진심으로 말씀하셨다.

 만약 시 에스 루이스가 인간을- "미래의 가능한 신과 여신"으로 보면서도 그리고 "주님이 가장 약하고 가장 더러운 우리를 신으로 만들 수 있다"고 주장하면서도 여전히 기독교인으로 간주될 수 있다면 어떻게 후기성도가 정확히 똑같은 것을 믿는다는 이유로 기독교에서 제외되고 이교도로 간주될 수 있단 말인가?

 후기성도 비평가들은  초기 기독교 성도들과 후일의 희랍 신학자와 시 에스 루이스 모두가 후기성도가 이해하고 있는 신성화 교리와는 다른 교리를 이해하고 있다고 대답할런지 모른다. 그러나 초기 기독교인과 시 에스 루이스의 경우에는 이것이 사실이 아니다. 신성화 교리가 참된 기독교에게는 완전히 낯선 이교도 교리라는 주장으로 부텨 비겁하게 도망하는 꼴이기 때문에 이러한 대답은 둘러대기에 지나지 않는다. 이들은 신성화 교리를 후기성도가 잘못 이해하고 있는 (본인의 말을 덧붙이자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버린) 기독교 교리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이교리에 근거한 교리에 의한 배제는 더 이상 합당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후기성도가 신성화 교리를 "올바르게"해석하든지 아니든지 간에 신성화 교리는 후기성도들이 전혀 근거없이 꾸며낸 교리도 아니며 고대 이교도로부터 빌려온 교리도 아니기 때문이며 참된 기독교에 완전히 낯설거나 모순되지도 않으며 이 교리가 역사적으로 기독교 교리로 간주되어온 것의 광범위한 한계를 벗어나도 않기 때문이다.

 후기성도의 신성화 교리가 종종 잘못 제시되어왔다는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후기성도 비평가들의 주장에도 불구하고 말일성도는 인간이 결코 하나님(God)과 동일하게 될 거라고 믿지 않는다. 다시 말하자면 인간이 언젠가는 하나님과 대등하게 될 것이라는 것을 믿지 않는다. 후기성도에게 있어서 하나님(gods)이 된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속죄를 통해 세계를 정복하는 것을 뜻한다(요일5:4-5: 계2:7,11). 그러므로 우는 하나님의 상속자가 되며 그리스도와 공동상속자가 되며(롬8:17: 갈4:7) 그리스도가 모든 것을 상속받듯 우리도 무든 것을 상속받게 될 것이다(골전 3:21-23: 계21:7), 이 경전의 선포에는 한계가 없다, 즉 우리는 창조의 힘과 생산의 힘을 포함한 모든 것을 상속 받게 될 것이다. 이러한 찬란한 상태에서 우리는 우리의 구세주처럼 보일 것이다(요일3:2: 골전15:49: 골후3:18) 우리는 주님의 영광릉 받고 주님과 아버지와 함께 있게 될 것이다(요17:21-23: 빌3:21)하나님과 함께 하나님의 보좌에 앉아 우리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될 것이다(눅12:44: 계3:21).

 만일 기독교 경전이 우리가 하나님처럼 되고 하나님의 상속을 받고 하나님의 영광을 받아 하나님과 함께 하는 자가 되고 하나님의 보좌에 앉아 하나님의 권능과 법을 행사한다고 가르친다면 시 에스 루이스와 다른 사람처럼 이와같은 존재를 하나님(gods)이라부를 수 있다고 결론내린다면 하나님(gods)이라는 용어가 어떤 식으로든지 우리 아버지 하난님의 주권을 감소시키거나 제한하지 않는한 분명 비기독교인이 될 수 없다. 이것이 바로 초기 기독교인들이 이 용어를 사용한 방법이며 이것이 바로 시 에스 루이스가 이 용어를 사용한 방법이며 이것이 바로 후기성도들이 이 용어를 사용하고 이 교리를 이해하는 방법이다.

 

하나님의 복수성

  현대 기독교파들이 신성화 교리를 반대하는 진짜 이유는 종종 이 교리가 한 하나님 이상이 존재한다는 것을 뜻하기 때문이다. 만약 인간이 신이 될 수 있다면, 신이 되면서도 하나님과는 별개의 분명한 존재로 남아있을 수 있다면 우주에는 많은 신이 있게 된다. 분명 이 시 에스 루이스와 초기 기독교 성인들도 이 말 뜻을 이해하고 있었다. 그러나 말일성도와는 달리 이들은 이 말이 참된 다신론을 구성한다는 뜻임을 이해하지 못했다.

 신성화 교리와 다신론 교리에 있어 이 두 단어를 반드시 정의하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그래서 후기성도가 믿지 않는 것이 무엇인지 분명히 밝혀두자. 후기성도들은 인간이 하나님과 동일하게 될 것이라거나 하나님으로부터 독립할 것이라고 결코 믿지 않는다. 인간과 관련한 하나님의 지위는 어떤 식을로든지 위협받지 않는다. 우주에는 오직 단 하나의 빛과 지시과 힘의 근원만이 있다. 만약 그리스도의 복음과 하나님의 은혜를 통해 우리가 하나님의 온전함을 받는다면(엡3:19), 그리하여 우리가 신(gods)이리 불리울 수 있다면 인간은 결코 추상적이고 보좌에 앉아 신(gods)의 권능릉 행사할지라도 은혜로 하나님이 된 자들은 영원히 그 은혜의 원천에 종속된 채로 남아있을 것이며 그들이 행사한는 권능은 하나님 아버지의 권능의 연장일 뿐이며 하나님 뜻의 대행자일 뿐이다. 그들은 계속하여 아버지와 아들과 성신을 영원히 경배하고 섬기게 될 것이며 다른 신을 숭배하거나 섬기지 않을 것이다.

 만일 후기성도가 이러한 영예로운 존재를 "신(gods)"이라 부르지 않고 "천사"로 부른다면 후기성도 교회에 속하지 않은 사람들이 특별히 이 교리에 반대할 것 같아보이지는 않는다. 이들이 반대하는 것이 있다면 단지 이 용어에 있는 것 같다. 그러나 경전 자체도 비궁극적인 존재를 가리키는 한정된 의미로 하나님(gods)이라는 용어를 종종 사용한다.

 예를 들어 시편 8장에서 하나님(gods:히브리어로는 elohim)이라는 용어는 천사와 관련하여 사용되고 있다. "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권고하시나이까 저를 천사[elohim]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나이다."4-5절.) 비록 히브리어로는 "하나님"(elohim)으로 읽히지만 신약성서의 히브리서를 포함하여 칠십인역부터 번역가와 주석자들은 위 표현이 천사를 가리킨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히2:7을 보라)> 하나님(gods)이라는 용어는 이곳에서 하나님(Gods)이 아닌 다른 존재에게 적용된다. 신명기 10:17, 여호수아서 22:22, 그리고 시편 136:2는 모두 다 하나님은 "신중의 신"이라고 주장한다. 분명 이 구절은 우주 어디에선가 신들간에 경쟁이 벌어지고 있다는 뜻이 아니라 임영된 신성한 역할을 맡은 천사를 가리킴에 틀림없다. 만약 어떤 의미에서든지 천사가 하나님의 권능을  행사하고 하나님을 바로 "신중의 신"일 것이라고 해석하는 것이 바른 해석일 것이다. 학자들은 예수 시대의 유대인들은 이 비궁국적인 의미로 천사를 "하나님" (히브리어로 elim 또는 elohim)으로 칭하였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며 사해 두루마리와 그 시대의 다른 인쇄물이 이를 입증해 주고 있다. 이는 유대인들이 다신론자들이었기 때문이 아니라 신성한 권능을 행사할 수 있는 특권이 허용된 하나님과 관련된 다른 존재를 가리키기 위해 제한된 의미로 하나님(gods)이라는 용어를 그들이 사용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경전에서는 인간도 역시 천사들과 똑걑은 이유로-천사뿐만 아니라 인간도 하나님의 권능을 행사하고 하나님의 대리인으로 행사할 수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라 불리운다. 그래서 모세는 "바로에게 신"으로 임명되었다(출7:1). 이것은 모세가 승영한 존재나 궁국적인 존재가 되었다는 뜻이 아니라 모세에게 신성한 권능이 주어졌으며 심지어는 하나님의 말씀을 일인칭으로 말할 수 있을 만큼 바로에게 하나님을 대표하도록 권능을 받았음을 뜻한는 것이다. 만약 경전에 모세와 같은 필멸의 인간을 이러한 의미에서 하나님(god)으로 부를 수 있다면 분명 부활하여 하나님의 권능과 권위의 온전함을 상속 받는 불멸의 인간은 똑같은 의미에서 "신"으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출애굽기 21:6와 22:8-9에서 인간 사사도 히브리 경전에서는 엘로힘("gods")으로 불리운다. 시편 45:6에서도 왕도 elohim으로 불리운다. 인간 지도자나 사사도 역시 시편의 다음 구절에서 "신"으로 불리운다. "하나님이 하나님의 회 가운데 서시며 재판장들 중에서 판단하시되... 내가 말하기를 너희는 신들이며 다 지존자들의 아들이라 하였으나 너희는 범인 같이 죽으며 방백의 하나 같이 엎어지리로다."(시82:1, 6-7.) 유대인 성서 학자와 기독교 성서 학자들은 한결같이 이 구절이 하나님이 인간에게 적용하는 구절로 이해하여왔다. 몰몬이 아닌 제임스 에스 액커맨에 따르면 "대다수의 주석가들은 사사들이 하나님의 율법에 따라 정의를 집행하는 막중한 책임을 가졌었기 때문에 이 구절을 '하나님'이라 부리웠던 이스라엘 사사들을 칭하는 것으로 해석하여왔다."

 신약의 요한복음 10:34-36에서 예수님 자신이 시편 82:6을 인용하고 하나님(gods)이라는 용어를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인 인간들을 칭하는 용어로 해석하였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 율법에 기록한 바 내가 너희를 신이라 하였노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성경은 폐하지 못하나니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은 신이라 하셨거든 하물며 아버지께서 거룩하게 하사 세상에 보내신 자가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는 것으로 너희가 어찌 참람하다 하느냐?:"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만약 경전[시82]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필멸의 인간을 "신" (gods)이라 칭할 수 있다면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한다는 이유만으로 나에게 분개 하느냐? 라는 뜻이었다. 경전이 한정된 이 의미로 인간을 칭하기 위해 신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기 때문에 구세주의 주장은 효과적이었다. 또한 몰몬이 아닌 제이 에이 에머토에 따르면 "대부분의 성서 해석가들은 주님의 주장이 인간이 특정한 상황에서는 신이라 불리울 수 있음을 입증 할 의도였으며.... 예수가 근본적인 원리로 되돌아 더 일반적으로 '신'(god)이라는 말이 특정한 상황 하에서는 하나님이 아닌 다른 존재, 즉 하나님이 권능을 위임한 자에게 적용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는데 동의하고 있다.

 간략히 말하자면 이게 바로 후기성도의 믿음이다. 이 생에서든지 다음 세상에서든지간에 그리스도를 통해 인간은 한나님의 권능과 권위를 받을 수 있다. 이 위대한 상속을 받은 자들은 신이라 불리울 수 있다. 이들은 희랍의 철학적 의미인 "궁극적인 존재"로서 신도 아니며 숭배의 대상으로서 이들의 상소의 원천인 하나님과 경쟁하지도 않는다. 이들은 영원히 하나님의 아들과 딸로 남아있게 된다. 따라서 결코 하나님과 동일 할 수 도 없으며 하나님으로부터 독립하지도 않는다. 정통 신학자들은 후기성도는 비궁극적인 존재에 대해 신(gods)이란 용어를 사용해서도 안된다고 주장할 수도 있으나 이것은 후기성도가 이 용어를 사용하는 것이 성서의 정의를 무시해서가 아니라 플라톤의 정의를 무시하기 때문이다. 경전과 초기 기독교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인 초기 기독교인들을 신(gods)이라 불렀다.

 이곳에서 신성화 교리에 관하여 위에서 언급된 초기 기독교 성인과 신학자들의 말을 반복 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후기성도처럼 그들에게도 신성화 교리는 "신"(gods)의 복수성을 뜻했지 하나님(Gods)의 복수성을 뜻하지 않았음을 주목해야 한다. 즉 다신론을 뜻하지 않았다. 알렉산드리아의 성 클레멘트는 분명 단일신을 믿는 기독교인이었다. 그러나 클레멘트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통해 완전해진 자들은 "신(gods)이라 는 명칭으로 불리우며 구세주에 의해서 자리가 먼저 주어진 다른 신들과 더불어 보좌에 앉도록 되어있다"고 믿었다. 이게 바로 후기성도의 교리다. 기독교 성인이자 신학자였던 클레멘트가 인간들이 신(gods )이라 불리울 것이며 예수 그리스도가 신으로 만든 다른 사람들과 보좌에 앉을 것이라고 가르칠 수 있었다면 조셉 스미스가 똑같은 것을 가르친 것으로 하여 다신론자나 비기독교인으로 낙인찍인는 것이 공정할 수 있을까?

 널리 인정받고 있는 경전과 역사적 선례와 조화를 이루는 후기성도들은 하나님의 은혜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통해 부활할 때 하나님의 온전함을 받게될 자들, 즉 하나님의 권능과 특권을 받게될 자들을 신(gods)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여 묘사한다. 그러므로 후기성도에게 있어서 "신(gods)이 한분 이상 있는가?"라는 질문은 "우주에는 힘의 근원이자 경배의 대상이 한분 이상 있는가?"라는 질문과는 다른 질문이다. 후기성도는 성 클레멘트 경우처럼 첫 번째 질문에 대해 긍정적으로  대답하나 두 번째 질문에 대해서는 부정적으로 대답한다. 후기성도에겐 god라는 용어는 경전에서 충실한 자들에게 약속되었듯이 하나님의 권능과 권위를 받는 자에게까지 확대시켜 사용할 수 있는 칭호다. 그러나 이러한 칭호를 이렇게 확장하여 사용한다고 해서 아버지와 아들과 성신의 궁극적이고 절대적인 지위에 도전하거나 제한하거나 침해하지는 않는다.

 적물몬 비평가들이 출애굽기 7:1과 신명기 10:17,(히브리어로된) 시편8:5, 그리고 시편 45:6과 시편 82:6이나 요한복음 10:34-36을 해석할 때는 이 경전 구절들은 제한된 의미에서 god 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으므로 다신론과는 관련이 없다고 즉, 한 god 이상이 있을 수 있으나 오직 한 God만 있다고 장황하게 설명한다. 그러나 비평가들이 똑같은 의미로 god 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후기성도의 글을 토론할때는 좀처럼 똑같은 예의를 보이지 않는다. 대신 이들은 god 라는 용어가 말일성도 글에 나타날 때는 이 용어가 사용될 수 있는 어떤 제한된  의미도 허용하지 않는다. 따라서 후기성도의 교리를 왜곡하고 그릇되게 해석하여 합당한 경전과 역사적인 선례가사용하는 똑같은 의미로 후기성도가 "신" (gods)을 말한다는 이유로 말일성도를 " 다신론자" 라고 비난한다.

 고대 현대를 막론하고 기독교 성인과 신학자와 작가들은 인간이 " 신"(gods)이 될 수 있다고 믿어왔으나 다신론자로 비난받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이 의미에서 사용된 "신"은 성부와 성자, 성신에 영원히 종속된 채로 남아있게 된다고 보기 때문이다. 또한 이것이 후기성도의 교리이기 때문에 말일성도들도 역시 다신론자들이라는 비난으로부터 보호를 받아야 마땅하다. 이 기독교인들과 후기성도들은 똑같은 교리를 공유하므로 이들은 또 같은 운명을 공유해야 한다. 즉 의심스러운 성인과 신학자와 작가들을 다신론을 믿는 이단자로 매도하든지 아니면 후기성도를 유일한 참 하난님 한 분만을 믿는 숭배자들로 간주하든지 해야한다.

 

요 약

 교리에 의한 배제는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기준과 모든 기독교인들이 동의 할 수 없는 "순수한" 기독교 교리를 따를 것을 요구하기 때문에 일반적인 원리에 근거해서 쓸모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교리에 의한 배제는 교파마다 변하는 움직이느 표적이다. 각 교파들은 후기성도가 더 "정통적"이어야 한다고 요구하면서도 각 교파마다 "정통성"을 가긱 달리 해석한다. 교리에 의한 배제는 실제 여러 기독 교파가 기독교의 견해는 통일된 단일의 견해가 아니라는 것을 보면서도  통일된 단일의 견해로 추측한다. 교리에 의한 배제를 적용하는 자들은 종종 두가지 부류만을 , 즉 자신들의 교리와 일치하는 자들과 "기독교인이 아닌" 자들만을 인정한다. 그러나 그들의 교리와는 다르면서도 여전히 기독교인인 세 번째 부류가 없다면 독자적인 기독교 교파로 이루어진 가족이란 개념은 존재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일부 후기성도 교리는 성서시대 기독교나 역사적인기독교에 비추어 보아도 너무 이상하여 후기성도의 교리에 아량을 보일 수 없다는 주장을 하곤한다. 이러한 근거로 가장 자주 비난 받는 후기성도의 신성화 교리와 신성화 교리에서 비롯된 신(gods)의 복수성에 비추어 보아도 이 주장은 역사적인 면민한 검토 앞에 견디지 못한다. 초기 기독교 성인과 신학자, 훗일의 희랍정통주의자들과 현대 개신교 복음 전도자와 심지어 시 에스 루이스까지 신성화 교리를 믿는다고 공언해왔다. 경전 자체도 여러 "신"에 대해 언급하고 있으며 신(gods)을 성부, 성자,성신이 아닌 다른 존재에 대해 제한적인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 경전과 고대 및 현대 정통 기독교인들이 이 용어를 "다신론"의 뜻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아량을 보일 수 있다면 이와 비슷하게 후기성도들에게도 아량을 보여야 할 것이다. 경전이 gods 를 비 궁극적인 존재로 뜻하는 용어로 사용할 수 있다면, 그리고 초기 교회와 그리스도가 그럴 수 있었다면, 후기성도가 똑같은 용어를 똑같은 방법으로 사용한다는 이유  때문에 비기독교인으로 매도될 수 없다.

 다시 한번 본인은 이 교리가 참되다고 확실히 믿지만 이를 주장하지는 않는다. 본인은 단지 비난할 여지가 없는 다른 정통 기독교인들이 후기성도들 보다 훨씬 전에 신성화 교리를 믿어왔으며 이 교리를 참된 기독교리의 일부로 받아들이고 묵인해 왔다는 사실을 주장할 뿐이다. 후기성도에게도 공정한 대접을 해줄 것을 요구한다.
 

7
교리에 의한 배제:
성삼위와 하나님의 본질

 

 기독교 교리인 삼위일체를 후기성도가 믿지 않기 때문에 당연히 기독교인으로 간주될 수 없다는 말이 있어왔다. 다시 한번 논쟁의 핵심은 이 용어를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놓여있다. 특히 이 논쟁이 갖는 논리적 결함은 일반 기독교인들이 보통 상삼위(trinity)라는 용어를 모호하게 정의하는데 있다. 이들은 습관적으로 그리고 종종 무의식적으로 신회의 본질에 대한 성서의 가르침과 서기 451년 찰세돈 종교회의에서 형성된 철학적 진술인 니케아 신경을 같은 것으로 본다. 그러나 성서의 가르침과 니케아 신경은 하나님을 이해하는 방법에 있어 서로 다르다.

 

성삼위(trinity)란 무엇인가?

만약 성삼위 교리가 성부와 성자, 성신, 세분이 존재하며 이 세분 모두가 온전히 성스러운 분이라는 신약의 가르침을 뜻한다면 후기성도는 이 삼위론을 믿는다. 이 만큼 간단한 문제다. 조셉 스미스가 1842년에 작성한 예수그리스도 교회의 신앙개조 1조는 다음과 같이 명시하고 있다. "우리는 영원하신 아버지 하나님과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성신을 믿는다." 교회의 침례는 "아버지와 아들과 성신의 이름으로"행해진다(교성20:73을 보라). 주님의 만찬을 기념하는 성찬식의 축복문은 성찬을 취하는 자들이 하나님의 영이 그들과 함께 하도록 해달라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영원하신 아버지 하나님께 기도한다고 되어있다(교성20:77-79). 후기성도는 신회를 구성하는 삼위의 본질에 관하여 성서가 가르치는 교리와 성부, 성자, 성신의 신성함을 철저하게 믿는다.

 그러나 "성삼위 교리가 니케아 종교 회의와 찰세돈 종교회의에서 형성되어 훗일의 신학자와 종교회의에 의해서 다듬어진 교리를 뜻한다면, 즉 하나님은 하나의 물질 속에 있는 세분의 동등한 분이라는 삼위일체를 뜻한다면 후기성도는 이 삼위일체를 믿지 않는다. 후기성도는 삼위일체가 성서에 나오지 않으므로 믿지 않는다. 정통파가 이해하고 있는 삼위일체의 핵심적인 용어들-예를 들어들어   (coequal동등한) , (consubstantia 동체어),   (circumincession상호관통), 그리고 정작 본장에서 다루고 있는 trinitas   (삼위)-은 경전에서 찾아볼 수 없다. 성삼위(trinity그리고 희랍어로는 trinitas)라는 용어는 서기 3세기 초에 터툴리안이 처음 사용하였다. 티케아 교부와 찰세돈 교부들은 그들이 새로 고안해낸 교리를 설명해주는 용어를 성서에서 찾아내려고 했으나 허사였다.

  경전 자체는 셋과 하나가 어떻게 관련되어있는지 아무런 설명도 하지 않고 있다. 성서 작가들은 이 문제, 즉 하나님의 본질이나 하나님의 실체나 하나님의 특성을 철학적으로 다루는 문제에 한결같이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훗일의 나타난 이 문제에 대한 관심은 신회에 대한 교리를 다듬은 것이며 초기 기독교리에 관한 희랍적 사고에 대한 질문과 이의 철학적으로 대답하기 위해 다듬어져 만들어진 것이다. 4세기와 5세기의 기독교 지성인들은 성서에 나오는 언어는 이 목적에 사용되기에는 너무 단순하고 부적당하다고 생각해 최선의 노력을 다해 이를 보완하고 개선할려고 했다.

 

종교회의에서 경전이 만들어지는가?

후기성도는 하나님이 하나도 되고 셋도 된다고 믿는다. 둘 다 성서에 근거를 두고 있다. 그러나 후기성도는 하나와 셋의 관계를 철학자를 위하여 그리고 철학자의 언어로 정의하려고 했던 성서 이후의 교회의 시도를 거부한다. 만약 어떤 주장이 성서에서 발견되지 않는다면 무슨 권위로 사도와 예언자가 없는 상태에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교회에 강요할 수 있을까?  어떻게 신학자가 사도들의 교리를 늘리고 교정할 수 있을까? 일개 신학자가 경전에 다른 내용을 첨가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후기성도가 분명 성경의 가르침에 추가된 니케아 교리와 찰세돈 교리를 거부할 때 신회에 대한 경전의 교리를 거부한다고 비난 받는다 만약 종교회의에서 나온 말을 보완적인 경전으로 정의하지 않는다면 이것은 허위제시하는 것이다 . 후기성도는 종교회의에서 나온 말이 경전이 된다고 믿지 않으므로 따라서 니케아 종교회의가 성서를 지배하는 하극상을 거부한다.

 후기성도를 비평하는 일부 비평가처럼 한편으로 성서 하나만으로 구원에 충분하다고 믿으면서(sola scriptura 교리) 기독교인이 되기 위해선 또한 성서에 추가된 신조를 믿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절대적으로 모순이다. 어떤 이는 종교회의에서 나온 신조와 가르침이 역사적으로 인정해온 성서 교리를 요약해 놓은 것만큼이나 유용하다고 말할지 모르나 이는 공정한 평가가 아니다. 대학 1학년 국어를 제대로 들은 사람이면 누구나 다 진정한 요약이란 요약하려는 자료에서 찾아불 수 없는 개념이나 정보를 도입할 수 없음을 알고 있을 것이다. 성삼위를 설명할 때 불가지하게, 이해할 수 없게 존재하는 추상적이고 절대적이며, 초절적이며, 동체이며, 영원한 공체의 교리가 공정한 "요약"이라 부를 수 있도록 뒷받침해주는 경전 구절은 없다. 요약은 퇴고와는 크게 다르다.

 현대 학자들은 니케아 종교회의에서 나온 성삼위 교리와 성서의 내용과는 다를 뿐만 아니라 성서에 없는 새로운 개념을 소개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이중 한 학자는 "(만약 역사적인 증거를 적절한 것으로 받아들인다면) 훗일에 형성된 교리가 원래의 명제롤부터 연역적 논리라는 과정을 통해 얻어질 수 없어 새로운 요소를 담고 있어야 한다는 주장을 피할 수 없다"고 언급하였다. 더 나아가 이 학자는 다음과 같이 결론짓고 있다. "앞서 받아들여진 개졈을 상당히수정하지 않고서는 완벽한 삼위일체설이 나올 수 없었다.

 그러므로 후기성도는 종교회의의 "요약"을 받아들이기 보다는 경전 자체를 고수한다. 요약되지 않은 성경은 있는 그대로가 좋다. 왜냐하면 성경은 전적으로 경전 구절로 이루어진 신조만을  담고 있으므로 후기성도들은 경전의 모든 말씀을 진심으로 받아들일 것이기 때문이다.



신약에 나오는 성삼위

 니케아 교리인 삼위일체 교리가 성서시대 이후에 만들어졌다는 것은 기록상의 문제다. 간단히 말해 삼위일체 교리는 신약성서에 나오지 않는다. 주된 기독교파들이 삼위일체 교리를 다루는 방법에 대하여 예수회 학자인 에드먼드 제이 포트만은 신약성서의 여러 부분을 조사한  다음 개인적으로 다음과 같이 말했다. "공관복음서나 사도행정에는 삼위일체 교리가 나오지 않는다." 그는 또한 신약 "어디에서도 똑같은 신회 가운데에서 신의 삶과 활동에 대한 세분의 뚜렷한 주제를 다룬 삼위설을 찾아볼 수 없으며 요한 복음에서도 삼위설이 나오지 않는다.

 바울의 서신에 관하여 포트만은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 이 구절들은 성삼위의 교리를 제공해 주지 않고 바울이 아버지와 아들과 성신을 함께 연관지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 구절들은 삼위의 공식을 제공해 주지 않는다.....그러나 나중에 발전하게된 삼위일체 교리에 자료를 제공한다..... 바울은 공식적인 삼위의 교리도 가지지 않았고 삼위와 관련된 문제를 분명히 깨닫지 못했다. 그러나 바울은 훗일에 발전하게 된 삼위일체 교리에 많은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신약 전체를 검토한 포트만은 고전적인 삼위일체 교리가 성서에서 나온 것이 아니란 결론을 내린다.

  • 만약 성삼위 교리가 한 하나님 가운데 세분의 동등한 신이 있다는 명백한 가르침을 뜻한다면 신약에는 공식적인 삼위일체 교리가 나오지 않는다. 그러나 세분이 계시니 곧 아버지와 아들과 성신이니 삼위의기본 계획과 삼위의 공식은 나온다.... 우리가 보아왔듯이 하나님에 대한 성서의 증거는 삼위에 대한 어떠한 형식적이거나 공식화된 교리즉, 한 하나님 속에 세분의 동등한 신이 존재하고 있다는 명백한 가르침을 담고 있지 않다.

후기성도들은 이 이상 동의 할 수 없다. 후기성도 신학처럼 성서신학은 신회의 새 구성원을 인정하나 니케아 종교회의가 이해하고 있는 대로 이해하지 않는다.  학자들이 이 문제에 동의하고 있음을 하퍼스(Harper's) 성서 사전에서도 다음과 같이 확인해 볼 수 있다. "4세기와 5세기의 종교회의가 정의하는 공식적인 삼위일체 교리는 신약성서에서는 찾아 볼 수 없다.

  바울 신학을 설명하면서 제이 피즈마이어는 성서에 언급된대로 사도 바울의 견해는 불명료하며 니케아 후기 견해로 볼 때 성숙치 못한 견해라고 말한다.  "구약과 신약은 사도 바울이 성신과 그리스도의 관계에 대한 개념을 명료하게 이해하지 못하고 있음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바울은 후일에 발전된 본질과 물질과 인간에 대한 세련된 정의보다는 인격에 대한 보다 유동적인 개념에 있어 구약과 뜻을 같이 한다. 바울이 명료하지 못한 이유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하며 후일에 발전된 교리의 출발점으로 간주되어야 한다.   다시 말하면 정통적인 입장에서 보면 바울은 4세기의 신학자 만큼 명료하게 하나님의 본질을 이해하지 못했다. 만약 바울의 견해가 니케아 종교회의 이후에 처음으로 제안되었더라면 부적당하거나 결함이 있는 견해로 받아들여졌을 것이다. 후기성도들은 하나님의 본질에 대한 바울의 생각이 바울 이후의 모든 신학자와 철학자들의 생각보다 더 명료하며 더 권위가 있다고 생각한다. 결국 부활하신 주님과 대화하고 셋째 하늘에 붙잡혀간 사람은 신학자가 아닌 바울이었다(행3-6: 골후 12:2-4)

  • 더우기 정통 기독교 작가나 신학자들 조차 니케아 후기  견해를 성서의 견해와 동일시 하는데 문제가 있음을 인정하고 있다.  
    다른 교파 뿐만 아니라 천주교의 삼위일체 교리도 다소 불안정한 윤곽을 보여준다.
      두가지가 인식되어 왔다. 천주교의 지속적으로 늘어나는 성서 주석가들과 성서 신학자들을 포함한 일부 성서 주석가들과 성서 신학자들은 진정한 자격을 갖추지 않고서는 신약에 나오는 삼위설을 언급하지 말아야 한다고 인식하고 있다.  또한 일부 교리 역사가와 조직 신학자도 자격없이 삼위일체에 대해 말하게 되면 초기 기독교 시대에서 4세기 후반기로 옮아간 것이라는 것을 거의 비슷하게 인정한다.

 

 

초기 기독교 글에 나타난 성삼위

  후기성도가 아닌 다른 기독교인들도 니케아 용어가 아닌 다른 용어로 하나님의 본질을 이해해왔으면서도 기독교인으로 간주되어 왔다.  위에서 언급한 니케아 교리에 의하면 심지어 사도 바울도 하나님의 본질을 명확하게 이해하지 못하고 있음을 우리는 알게되었다.  여기에다 기독교 성인이었던 사도시대의 많은 교부들과 2세기의 희랍 철학자들도 니케아 후기 정통 기독교의 판단에 따르면 제대로 하나님을 이해하지 못했다. 포트만에 따르면 고전적인 성삼위 교리는 사도시대, 즉 2세기 초기의 기독교 교리가 아니었다.  사도시대의 교부에 대해 말하면서 포트만은 "교부들에게는 물론 삼위의 교리도 없었으며 삼위에 대한 문제를 깨닫지  못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분야에서 가장 저명한 다른 학자들도 거의 똑같은 말로 동의 하고 있다.  제이 엔 디 켈리는 자신의 저서 초기 기독교 교리에서 2세기 사도시대 교부들에 관하어 "비록 교회의 삼위설의 공식이 곳곳에 남겨졌지만 물론 엄격한 의미에서 삼위설의 흔적이 전혀 없다"고 말한다.  같은 책에서 케리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교회는 최종적인 통합을 위해 3백년 이상을 기다려야만 했었다.  왜나하면 콘스탄티노플 종교회의(381)에 이르러서야  삼위일체설이 공식적으로 인정되었기 때문이다.

  많은 변증자들은 성자와 성신의 교리에 있어 종속설을 믿는 자들이었다.  즉 성자와 성신이 동등한 신이 아니라 성부에 종속된 신으로, 심지어는 성자의 성신의 신성이 성부에 달린 성부의 창조물로 보았던 것이다. 비록 조심스럽게 변명조로 인정하기는 하지만 심지어 정통자들도 이를 다음과 같이 인정한다.

  • 변증자들의 글에서 처럼 삼위의 교리가 정밀하게 다듬어 졌던 곳에서 언어는 불명로한 채로 남아 있었으며 후일의 관점에서 볼 때 부분적으로 비정통적이었다.  때때로 이 교리는 특정한 종속설의 영향을 받았다.

  종속설은 첫 3세기의 기독교 가르침에서 두드러진 교리였으며 성 저스틴과 오리겐과 같은 정통 교부의 주된 교리였다.
  요하네스 콰스텐은 그리스도를 "뜻에서가 아니라 숫자상으로 두 번째 하나님"으로 보았던 성 저스틴 마터에 관하여 "저스틴은 로고스(그리스도)와 성부의 관계에 관한한 종속설을 지지했다."  오리겐 때 까지는 변증자들은 니케아의 가르침과는 반대로 성부로부터 자신을 표현하고 나서야 비로서 로고스(그리스도)가 아들이 되었다고 이해 했으며 로고스와 성신을 분명하게 구분하지 않았다. 간략히 말하자면 엄격한 니케아 표준에 비추어 볼 때 초기 기독교 변증자들이 이해한 하나님은 그릇된 하나님이었다. 그러나 현대 학자들과 신학자들은 이 초기 변증자들을 강력하게 옹호하며 후기 니케아신학에 근거 하여 변증자들을 판단하거나 그들의 정통성을 의심하는 것은 "크게 부당하다"고 주장한다. 본인도 동의하나 본인은 또한 사도 시대의 교부와 희랍 변증자들이 비록 니케아 정통성이 결여되어 있기는 하지만 참된 기독교인으로 강력하게 옹호될 수 있다면 동시에 니케아 정통성은 참된 기독교의 필요조건으로 제시될 수 없다고 주장해야 한다.

  게다가 현대 학자들은 니케아 교리는 이 교리를 초안한 감독들 조차 "정통적"인 용어로 이해하기 않았음을 보여주었다. 니케아 교부들의 마음 속에서 언어의 해석과 그 결과로 생긴 신회에 대한 이해는 그 이후의 정통 신학자들의 이해와 정확히 일치하지 않았다. 교회 역사의 아버지인 가이사랴의 유세비유스가 니케아 문서에 서명하기는 했지만 그는 "모든 사람은 성부가 성자보다 앞서며 먼저 선재했다는 것을 받아들여야 하며" 성자의 존재는 선재하신 성부의 미리 의도된 행위에 달려있었다고 주장한 철저한 종속론자였다.  이것은 정통적인 삼위일체 교리가 아니다. 말일성도의 신학이기도한 이 같은 종속설 교리가 정통 비평가들에 의해 "비기독교적"이라는 딱지가 붙었으나 종속론장인 유세비우스는 고대 니케아 종교회의에 참석해 니케아 신경에 서명한 감독이었음을 기억하기 바란다.

  여기서 본인은 영지주의자나 마시오나니트파와 같은 이단 작가들의 말에 의존하고 있지 않음을 주목하기 바란다. 본인은 하나님에 관한 교리가 후기 삼위일체 교리가 아니었던 기독교인들의 예를 제공하기 위해 신약 작가, 사도 시대의 교부, 희랍 변증자와 니케아 교부와 같은 오직 기독교 정통파에 속한 작가들의 말만을 인용하고 있다. 만약 후기성도가 다른 기독교인들과 똑같은 용어로 성서상의하나님을 보지 않는다는 이유로 비난을 받을 수 있다면 많은 초기 기독교 작가와 성인들과 신학자들도 똑같은 이유로 비난을 받아야 할 것이다. 처음부터 모든 참된 기독교인들이 정확히 같은 삼위일체 용어로 하나님을 보아왔다는 것은 역사적으로 맞지 않다.

  이곳에서 삼위에 관한 니케아 교리의 명성을 시혐해 보고자 하는 것이 본인의 목적은 아니다.  후기성도들은 삼위일체를 믿지 않지만 삼위일체를 믿는 사람들을 비기독교인으로 비난하지는 않는다. 니케아 교리는 비록 후기성도들의 동의하지 않는 교리이기는 하지만 성서의 자료가 해석될 수 있는 한가지 방법이다.

  그러나 본인은 본인의 주장을 위해 니케아 교리를 부정하지는 않겠다. 예수님이 니케아 교리인 삼위일체를 가르치지 않았다면, 신약작가들이 삼위일체 교리를 전혀 모르고 있었다면, 사도 시대의 교부들이 이것에 관하여 몰랐거나 이것과 관련된 문제를 올바로 평가하지 못했다면, 그리고 삼위일체 교리가 4세기에 가서야 생겨났다면 삼위일체 교리에 서명한 교부들조차 이 교리를 올바른 정통 용어로 이해하지 못했다면, 현대 삼위일체주의자들이 주장처럼 니케아 교리는 참된 기독교에 필수 교리라고 주장할 수 없다. 물론 예수와 그의 제자들과 신약 시대의 교회를 포함하여 4세기 전에는 참된 기독교인이 전혀 없었다고 말하고 싶지 않으면 말이다.

 

오늘날의 삼위일체

  오늘날에도 니케아 종교회의가 만들어낸 삼위일체 교리를 모든 정통 기독교가 똑같은 방법으로 이해하지는 않는다. 8세기 초부터 그리고 공식적으로는 11세기 이후부터 천주교와 개신교도들은 성신이 성부로부터 나아간다는 문구에서 라틴어 경구인 filioque(그리고 아들로 부터)를 "니케아" 신경 원본에 첨가하였다. 따라서 서방 교회의 정통 교리는 하나의 횃불이 두 개의 다른 횃불에 의해 동시에 점화되듯이 성신이 성부와 성자로 부터(filioque) 나아간다고 가르친다. 그러나 동방교회는 하나의 횃불이 먼저 두 번째 횃불에 불을 붙인 후 세 번째 횃불에 불을 붙이듯이 성신이 성자처럼 성부로부터 나아간다고 주장한다.

  동방 교회는 니케아 교리에 첨가된 filioque가 삼위일체 교리를 허락없이 왜곡시킨 것으로 보고 이를 강력하게 거부한다. 프랭크 가빈은 "동방과 서방의 차이점 중에서 filioque교리만큼 정통성 문제를 놓고 그렇게 실랄함을 일으킨 차이점이 없었다. 동방 교회 신학자들은 filioque 교리가 하나님의 신성에 대한 그릇된 개념-심지어는 거짓 신-을 끌어들인다고 주장한다. "Filioque 교리(서방 교회의 삼위일체 교리)에 의해서 철학자와 학자들이 만든 신이 살아있는 하나님의 자리를 차고 들어온다. ... 성부로부터 성신이 나아간다는 교리(동방 교회의 삼위일체 교리]에 의해서 철학자들이 만든 신이 지성소로부터 영원히 추방된다.

  Filioque 교리 문제 때문에 동방 기독교인들과 서방 기독교인들은 성삼위의 본질에 대해 서로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다. 이것이 비신학자들에게는 작은 문제처럼 보일지 모르나 이것은 하나님의 본질에 관한 논쟁이며 9백년동안 동방 교회와 서방 교회의 신학을 분리해왔을 만큼 심각한 논쟁이다.  

  후기성도들은 성서에 나오는 성부, 성자, 성신을 믿으나 후기성도가 신회의 본질을 다른 기독교인과는 달리 이해한다는 이유 때문에 비기독교인으로 비난받는다.  Filioque 교리 논란은 또한 하나님의 본질에 관한 논란이기도 하다. 만약 후기성도를 배제하기 위하여 사용된 논쟁이 효과가 있다면 그리고 모든 참된 기독교인들이 신회에 대한 똑같은 생각을 가져야 한다면 동방 교회나 서방 교회 둘중의 하나가- 서방교회일 가능성이 더 많지만- 참된 기독교가 아닐 것 같다. 반면 filioque논쟁을 하는 양측이 신회에 대해 서로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서로를 기독교로 인정한다면 이 논쟁은 의심 받을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삼위의 본질에 대해 다른 견해를 가졌다고 해서 비기독교인이 되지는 않기 때문이다.

  궁극적으로 기독인이 되는 것은 다른 기독교인들처럼 똑같은 니케아 용어나 찰세도니언 용어로 하나님을 보는 문제가 아니라 초기 1세기 기독교인들이 보았던 성서상의 용어로 하나님을 보는 문제인 것이다. 1세기의 고린도인과 갈라디아인이 니케아 용어로 하나님을 이해하지 못했으나 그리스도의 속죄로 그들이 구원 받았을까? 물론 그렇다.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그리스도의 속죄가 신약의 증언을 받아들이나 니케아 용어로 하나님을 보지 않는 충실한 후기성도들을 구원할 수 있으며 또 구원하실 것이다.

 

"하나님은 영이라"(God is a Spirit)

  하나님에 대한 후기성도의 생각은 후일에 생긴 삼위일체 교리 이외에 다른 면에서도 니케아 정통 교리의 견해와 다르다. 후기성도들은 하나님 아버지는 인간과 같은 육체, 즉 먼저볼 수 있는 육체를 가지고 있다고 가르친다. "아버지는 인간이 가진 것과 같이 만져볼 수 있는 살과 뼈의 몸을 가졌나니, 아들도 그러하니라, 그러나 성신은 살과 뼈의 몸이 없으시고 다만 영적존재시니라. 만일 그렇지 아니하면 성신이 우리 가운데 거하실 수 없으리라."(교리와 성약 130:22)

  후기성도 비평가들은 요한복음 4:24이 매우 분명하게"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해야 한다"고 가르치기 때문에 인간과 같은 육체를 가진 신은 니케아 교리와도 다르면 성서의 가르침과도 다르다고 주장해왔다. 그러나 후기성도들은 이 성구가 하나님을 단지 하나의 영(a spirit)을 제한 하는 뜻으로 해석되지만 않는다면 이 성구에 대해서는 전혀 논쟁하지 않는다. 심지어 삼위일체론자들도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육체를 설명하는 한가지 방편으로 요한복음 4:24를 해석해야 한다. 신약성서의 가장 근본적인 가르침 두가지는 첫째 그리스도는 참 하나님이며그리스도는 이와 동시에 진실로 육체를 가지고 계시다는 것이다. 육체를 입고 계신 지상생활 뿐만 아니라  육체로 부활하실 때에도 삼위일체설이 주장하는 하나님 가운데는 육체를 가지고 부활한 성자가 포함되기 때문에 "하나님은 영이다(God is a Spirit)"라는 언급은 심지어 니케아 개념으로도 이해될 수 없다. 왜나하면 하나님을 어느 상황에서도 육체를 가지지 않은 존재로 제한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요한복음 4:24는 "하나님은 하나의 영이시다(God is a Spirit)" 보다는 "하나님은 영이시다(God is Spirit)"로 번역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희랍어에는 부정관사(a, an)가 없기 때문에 번역가가 부정관사를 첨가할 것인가 아닌가는 주관적인 문제이기 때문이다. 성서 학자들은 요한복음 4:24에는 부정관사가 없어야 한다는데 동의한다. 시 에이치 다드는 [요한복음 4:24]을 번역할 때 '하나님은 하나의 영이시라'는 번역을 뜻을 크게 왜곡한 번역이라고 주장한다. 레이몬드 이 브라운의 말에 따르면 요한복음 4:24의 구절은

  • 하나님에 대한 본질적인 정의가 아니라 하나님이 인간을 다루는 것을 묘사해준다. 이 구절의 뜻은 하나님은 그들을 새롭게 낳게하실 보혜사(14:6)를 보내시기 때문에 인간에게는 영이라는 뜻이다. 요한의 글에는 이와같은 또 다른 두 구절이 나온다. 하나는 "하나님은 빛이시라"(요한일서1:5)이며 또 하나의 구절은 "하나님은 사랑이시라"(요한일서 4:8)이다. 이 구절들도 역시 행동하시는 하나님을 가리킨다. 하나님은 세상의 빛 (ⅲ 19,  ⅷ 12, ⅸ 5) 이신 그의 아들을 그분의 사랑(ⅲ 16)의 표시로 세상에 주신다.

마치 하나님이 빛으로만 제한되지 않듯이, 요한일서 1:5의 내용 때문에 어떤 것으로도 제한되지 않듯이, 요한일서 4:8의 내용에 사랑이나 다른 어느 것으로도 제한되지 않듯이, 희랍 사람처럼 영과 물질을 상호 배타적이며 대립적인 것으로 추측하지 않는한 하나님은 요한복음 4:24에 의해서 영이나 다른 어떤 존재로도 제한되지 않는다. 하나님을 영으로 예배하는 (요한복음4:24)것이 예배자로 하여금 자신들의 육체를 버리라는 것이 아니듯이 하나님이 영이라고 해서 하나님을 하나의 영(a spirit)으로 제한 하지는 않는다.

  1세기의 유대 기독교인들처럼 말일성도도 "영"과 "원소"가 상호배타적인 것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조셉 스미스에 따르면 "실체가 없는 물질은 존재하지 아니 하느니라. 모든 영은 물질이니, 다만 극히 청결하고 순수하여 보다 청결한 눈으로써만 분별될 수 있느니라"(교리와 성약 131:7). 그래서 후기성도들은 영을 "영이 부여된"다는 뜻으로 이해하나 희랍 기독교는 영을 "육체가 없다"는 뜻으로 이해한다. 말일성도들에게는 영적 혹은 영이라는 말이 육체가 없다는 말을 뜻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교리와 성약  93:33은 비록 인간이 분명 육체를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영이다"라고 가르친다. 영과 원소는 영원한 전체의 상호존립하는 부분이다 . 엄격한 영/육체나 영/원소 이원론은 희랍 사상에 의해 소개되기 전까지는 유대교와 초기 기독교에게는 생소한 것이었다. 말일성도들은 하나님은 영이시나 단순히 하나의 영만은 아니라고 이해한다.

  후기성도들은 하나님 아버지가 "인간과 같은 만져볼 수 있는"육체를 가지고 있다고 믿기 때문에 후기성도들은 제한된 인간의 오감으로 하나님이 육체를 가지고 있다고 믿는다는 그릇된 인상을 주기도 한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하나님은 영이시다. 그러나 하나님은 또한 원소이시다. 두 가지 존재 측면이 하나님의 영예로운 존재 안에 포함되고 둘러싸여있다. 하나님이 둘 중에 하나라고 해서 하나님이 또 다른 하나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제한하지 못한다. 실제 하나님은 무한 대 그 이상이다.

 

하나의 영으로서의 하나님

  게다가 후기성도에게는 하나님은 가장 분명하게 성신 안에 나타날 때 영이시다. -"성신은 살과 뼈의 몸이 없으시고 다만 영적 존재시니라"(교리와성약130:22). 인간이 하나님을 접하거나 경험하는 거의 대부분의 경우에 하나님은 성신의 존재 속에 나타난 하나님이다. 이것은 개종이나 안수 때 기독교인에게 주어지는 "은사"다 (행(2:38: 8:17: 눅11:13). 성신은 보혜사이자 영감의 영이시다. 인간이 하나님을 접하게되는 거의 대부분의 상황에서는 하나님을 영(성신)으로서 체험한다는 사실을 후기성도와 비후기성도 기독교인들도 논쟁없이 받아들인다.

 

육체적 존재로서의 하나님

  그러나 요한복음 4:24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 가운데에서 하나님도 만져볼 수 있는 육체를 가지고 계시다고 가르치는 많은 다른 경전 구절있다. 이 성육의 교리는 몰몬이나 비 몰몬들에게도 흔한 것이다. 예수가 부활하신 후 사도들에게 자신은 영일뿐만 아니라 "내 손과 발을 보고 나인줄 알라. 또 나를 만져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눅24:39)는 말씀으로 사도들에게 확인시키셨다. 이 논리는 그리 어렵지 않다. 예수님은 하나님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살과 뼈를 지닌 육체를 가지고 계신다. 따라서 부활하시신 아들의 존재 가운데서 하나님은 살과 뼈를 지닌 육체를 가지고 계신다. 말일성도와 정통 기독교인 양쪽 다 성자의 존재 가운데서 하나님 성자의 성육과 육체적 부활의 교리를 굳게 믿기 때문에 하나님은 만져볼 수 있는 육체를 가지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후기성도와 삼위일체론자에게 있어서 하나님이나 신회는 세 분으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아버지를 성신처럼 영의 존재로 생각하는 것만큼이나 아들이 육체를 가지고 있듯이 아버지도 육체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도 논리적이며 기독교적인 생각으로 여겨진다. 몰몬과 비몰몬들은 "하나님이 영이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나 신약은 이 뜻이 아버지가 "영으로 채원진 만져볼 수 있는 육체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뜻하는지 아니면"육체가 없다"는 것을 뜻하는지(둘 다 어법적으로 성서에 나오지 않는다)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기 때문에 어느 쪽 하나의 해석도 다른 해석보다 더 성서적이라거나 더 "기독교적인" 해석으로 볼 수 없다.

  또 희랍 신학의 주장처럼 어는 누구도 만져볼 수 있는 육체와 신성은 양립할 수 없다고 주장할 수 없다. 왜냐하면 성경은 이미 만져 볼 수 있는 육체(눅24:39)와 부활하신 아들의 온전한 신성(요1:1)을 확립해 놓았기 때문이다. 만약 하나님 아들이 온전히 신성(요1:1)을 확립해 놓았기 때문이다. 만약 하나님 아들이 온전히 선성하면서도 살과 뼈를 가지고 있다면 하나님 아버지가 육체를 가질 수 없는 중요한 이유가 없는 것이다. 물론 신을 엄격한 플라톤의 말로 정의를 내려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않는다면 말이다.

 

철학자의 하나님

  인간과 같은 육체를 가진 하나님 아버지를 믿는 말일성도의 믿음에 대한 진짜 반대는 초기 기독교의 히브리 세계로부터 온 것도 이니며 예수와 그의 유대인 제자나 그들이 남긴 유대오 기독교 경전에서 나온 것도 아니다. 진짜 반대는 하나님을 절대적인 존재, 즉 추상적이며 궁극적이며 초절적인 존재로서 하나님을 보는 희랍적인 개념 가운데서 철학자들이 만든 하나님으로부터 비롯한다. 말일성도가 믿는 신은 히브리 성서에 나오는 하나님이지 철학자가 믿는 하나님은 아니다. 이 두가지 다른 신에 대한 견헤에 대하여 쉐이 제이 디 쿠렌은 다음과 같이 관측한다.

  • 히브리 성서의 하나님은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의 최고 신과는 크게 다르다. 희브리 성서에 나오는 신은 세계를 창조했고 계속하여 인간사를 관장하시는 분노와 기쁨과 다른 감정을 표현할 수 있는 인간의 형체를 지닌 신이나 철학자의 하나님은 훨씬 더 비 인간적이며 훨씬 더 추상상적인 존재로 감정을 나타내지 못하며 매일의 인간사로부터 크게 동떨어져 있다. 많은 유대인들은 이 두 가지 개념을 융합할려고 노력했었다. 좀 더 자세히 표현하자면 성서의 하나님 을철학자, 특히 플라톤의 개념에 비추어 재해석할려고 노력했었다.... 이러한 성서 접근은 오리겐과 암브로스를 비롯한 다른 교부들에 의해 더 발전된다.

니케아 종교회의의 하나님은 어떤의미에선 변질된 하나님이다. 이 하나님은 비성서적이며 철학적인 용어로 변질된 히브리 성서의 하나님이다. 니케아 종교회의의 하나님은 4세기와 5세기의 희랍 기독교인들이 신약이 "원시적인" 언어로 묘사한 하나님을 보다 지적으로 편안함을 느낄 수 있게 만든 하나님이었으나 이 하나님은 더 이상 1세기의 유대 기독교인들의 하나님은 아니었다. 또한 코렌은 계속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 히브리 성서의 하나님은 대체적으로 인간의 형체를 지니고 인간의 감정을 가진 신이다...  철학자의 하나님은 전체적으로 다른 존재다. 즉 추상적이며 - 주된 원동력, 최초의 원인, 우주의 마음, 영혼들로 불리우는  -불변하며 , 인간사에 상대적으로 무관심한 하나님이다.... 대중적인 하나님은 불변하며 형태없는 주ㅡ된 원동력을 필요로하지 않으며 원하지도 않는다. 대중적인 하나님은 자신을 인간에게 나타내 보이며 기도에 응답하며 인간의 용어로 이해할 수 있는 하나님이다. 이 대중적인 하나님은 쉐마(Shema)의 하나님이며 성서의 하나님이며, 기도문의 하나님이다. 이 하나님은 실절적으로 모든 히브리 하나님이며 아람의 하나님이며 일부 희랍사람들의 하나님이며 고대 유대 문학의 하나님이다. 그러나 이 하나님은 철학자들의 하나님은 아니다.     

  인간과 같은 형체를 지닌 신의 개념은 후기성도를 비기독교인으로 볼만큼 기독교 세계에 이상하지도 않고 생소하지도 않다. 하나의 예만 인용하자면 4세기나 5세기까지 하나님 아버지에 대한 개념을 성서구절에 의존한 이집트의 대부분의 기독교 수도승들은 하나님이 인간과 같은 형체를 가지고 있다고 믿었다. 이러한 이유로 이 수도승들은 "신인동형론자"로 불렀다. 그러나 381년 콘스탄티노플 종교회의에 이어 이러한 견해는 더 자주 억압 받았으며 새로운 정통교리가 상당한 저항을 받으면서 사막의 수도원의 수도승들에게 엄증하게 강요되었다. 얼렉산드리아의 감독이었던 티오필러스는 자신의 서신에서 성서가 묘사하는 하나님은 비유에 불과하므로 수도승들은 하나님을 인간과 같은 형체를 지닌 신으로 보아서도 안된다고 주장하였다. 커다란 명성을 떨쳤던 노승이었던 사라피온은 결국 철학자의 하나님인 새로운 신에게 기도할 수 없음을 알 게 되었다. 땅에 쓰려져 그는 "아아 슬프도다! 저들이 나에게서 나의 하나님을 빼앗아 가 버렸으니 납득해줄 하나님도 없고 숭배하거나 대화할 하나님도 없도다"고 신음헀다. 결국 신인동형론자였던 수도승들은 반동하여 새로운 교리를 받아들이기를 거부했으며 그들의 감독이었던 티오필러스로 하여금 180도 방향전환을 하게 만들었다.

 

감정이 없는 하나님

  실제로 대부분의 현대 기독교인들은 수도승 사라피온 처럼 하나님을 꽤 구체적이며 인간적인 용어로 이해한다. 신학자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기독교인들은 성서의 모델에 따라 인간처럼 간주되는 사랑하는 하나님 아버지에게 "순진하게" 기도하기를 고집한다. 그러나 엄격한 정통 종교회의와 신조에 따르면 하나님은 비유나 양부적인 의미 외에는 진정한 아버지가 아니며 위치상으로 천국에 존재하지도 않으며 어떠한 감정으로도 동요되지 않는 실제적인 감정으로 보게되면 우리를 사랑하지도 않는다. 기독교 신학을 좌지우지하게된 철학자들을 만약 하나님이 어느 한 장소에 위치할 수 있다면 하나님은 위치에 제약을 받게 되므로 절대적이 되지 못하며 따라서 희랍 정의에 의하면 하나님이 될 수 없다고 느꼈다. 희랍 신은 시간이나 공간에 예속되지 않는다. 이와 비슷하게 희랍 사상은 하나님은 열정이나 감정이 없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렇지 않다면 하나님의 의지는 자신의 감정에 예속될 것이기 때문이다. 희랍 사상에 따르면 하나님은 어는 것에도 예속되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철학자들의 하나님이 육체뿐만 아니라 감정이 없어야 하는 이유다.
반 에이 하비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 무감정이란 영향을 받거나 어떤 상황에 따라 행동할 수 없음을 뜻하므로 무감정은 고전적인 신론과 정통 기독교 신조에서 하나님만이 가진 속성이다. 하나님이 감정이 없다고 추정하는 이유는 희랍 사상은 감수성(감정)에는 잠재력이 포함되고 잠재력에는 변화가 포함되어 있다고 가르치기 때문이다.
      성서적인 히브리 사상이 가르치는 하나님은 행동하는 하나님으로 사랑과 연민으로 가득찬 하나님이기 때문에 무감정의 속성은 고전 신학자들에게 늘 문제가 되었다.

  어거스틴을 비롯한 다른 사람들은 성서에 언급된 육체가 비육체적으로 재해석되어야 하듯이 하나님의 감정을 나타내는 모든 성구는 감정이 없다는 의미로 재해석되어야 한다고까지 주장하였다. . 예를 들어 어거스틴은"[성서에서] 하나님이 분노하신다고 말할 때에는 화난 사람의 마음 속에 존재하는 그런 감정이 상한 느낌을 하나님이 가졌음을 뜻하는게 아니라 인간의 감정으로 유추되는 단어인 '분노'라는 용어로 죄에 대한 하나님의 불쾌감을 가리킬 뿐이다"라고 언급했다. 그래서 어거스틴에게 있어서는 하나님은 분노라는 감정을 실제적으로는 느끼지 않는다. 그런데 문제는 사랑도 역시 감정이며 열정일 뿐만 아니라 경전은 하나님의 사랑을 고집한다("하나님은 사랑이라." "하나님이 세상을 그토록 사랑하사," 등등) 철학자들은 사랑이 하나님에게 적용될 때마다 사랑을 다른 말로 정의하여 하나님의 사랑은 감정이 아니라는 말로 이 문제를 회피한다. 어거스틴은 하나님의 사랑을 하나님의 이성과 의지의 한 기능으로 정의했으며 따라서 그의 정의에 따르면 하나님은 아무것도 느끼지 않는다. 그러므로 경전이 하나님은 사랑이라고 언급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고대 신학자의 말에 따르면 인간이 감정으로 알고 있는 그런 사랑은 하나님과 무관한 것이다. 또 하나님이 가진 참된 연민과 감정이입이 재정의되어 감정이라는 요소를 제거하게 되면 인간의 고통에 대해 참된 연민이나 감정이입이 있을 수 없다. 이렇게 되면 경전의 언어는 있는 그대로 보존될지 모르나 뜻은 철학자들의 입맛대로 바꾸어지고 만다.

  물론 가장 위대한 감정은 겟세마네 동산과 십자가에서 예수가 겪은 고통이다. 따라서 기독교 복음의 핵심은 고통을 겪을 수 없는 하나님, 즉 하나님이 감정이 없다는 비성서적인 희랍 사상에 가장 큰 장애물이었다. 이 장애물은 신학자들이 하나의 실체나 본질을 가지는 다른 모든 존재와는 달리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의 실체와 신의 실체인 두 개의 실체를 가지고 있다고 선언한 서기 451년 찰세돈 종교회의에서 제거되었다. 따라서 십자가에서 고통을 겪고 죽었을 수 있으나 신인 하나님 아들은 결코 죽지 않았다는 것이다.
  신이요 하나님이요 선재하신 말씀이었던 아들이 실제로 자신의 본체 가운데서 인간이 되어 인간을 위해 고통을 겪으시고 돌아가셨는가? 이에 대한 후기성도의 대답은 확실하게 긍정이나 찰세돈 종교회의의 대답은 부정이다. 종교회의는 이 부분에 있어 성서를 문자 그대로 받아 들이려 하지 않는다. 종교회의에서 승인된 교왕 레오 대제의 저서 Tome에 따르면

  • 우리가 진 빚을 갚기 위해 신성한 본체가 고통을 겪을 수 있는 본체와 결합하였다.... 각 본체는 줄어듬없이 자신의 특성을 잃지 않고 그대로 유지하므로 종의 형태가 하나님의 형태를 감소시키지는 않는다.... 각각의 본테는 다른 본테와 교제하면서 자신의 독특한 기능를 수행한다. 말씀은 먈씀에 속한 것을 수행하고 육은 육에 속한 것만을 수행한다.

그러므로 찰세돈 종교회의는 신학자들이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두가지 본체 가운데서 육체를 가진 존재 때문에 고통을 겪으셨으며 두가지 본체의 뚜렷한 차이 때문에 하나님은 고통을 겪지 않았다는 상반된 명제를 유지할 수 있는 공식을 제공해 주었다. 이 공식으로 말미암아 정통주의는 신약과 더불어 그리스도가 고통을 겪은 한편 하나님은 감정이 없으시다는 플라톤의 말에 동의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대부분의 현대 기독교인들은 이 교리를 전혀 모르고 있으며 따라서 고통을 겪으신 하나님에 대하여 "순진하게" 이야기한다. 그러나 정통교리의 세세한 부분에 정통한 사람들은 4세기와 5세기 교부에 따르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신의 본체는 우리 인간을 위해 고통을 겪을 수도 없었으며 겪지도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헨리 차드윅은 이를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헌신의 열정 때문에 '하나님이 고통을 겪으시고 돌아가셨다'고 말할 수 있을런지 모르나 신학자들은 하나님은 감정이 없으시며 불멸하다는 것을 알고 있으므로 인간의 나약함이 하나님에게로 전이된다는 것은 실제 뜻하는 바가 아니다.

  그리스도에 내재한 두 가지 본체에 대한 사도시대 교회 이후에 생겨난 신학은 이해하기 힘들고 논란을 야기시키는 것이어서 마침내 잠잠해지는데에만 2백년이 걸렸으며 2백년이 지난 후에도 이집트, 아비시니아, 시리아 그리고 아르메니아 교회는 이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이 교회들은 이 교리가 하나님이 인간을 위해 고통을 겪으시고 돌아가셨다는 신약의 핵심적인 주장을 교묘하게 위장하여 반대한다고 믿었다. 그러나 정통주의자들은 희랍 철학은 감정적으로나 육체적으로 고통을 겪는 하나님에 대한 개념을 받아들일 수 없었기 때문에 두 본체 교리를 기꺼이 받아들이려고 했다. 그리고 그 당시 교회는 성서가 담고 있는 그대로의 언어보다는 철학자의 논리를 더 신뢰하였다.

  오늘날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이 본능적으로 알고 있는 하나님은 형체나 감정면에 있어서 인간과 같은 존재로 남아 있다. 사실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이 알고 있는 하나님에 대한 실체 개념은 종교회의가 가르치는 철학적인 교리보다는 하나님을 실제로 하늘에  살아계시며 우리를 사랑하시는 우리의 실제 아버지로 이해하는 후기성도의 교리에 더 가깝다. 만약 성서가 가르치는 인간과 같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감정이 단순히 비유적인 것이어서 하나님을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선 이를 버려야 한다면 성서 자체가 이 사실을 나타냈어야 되지 않을까?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이 하나님을 신인동형체의 용어로 "순진하게" 이해한다는 사실은 하나님을 인간처럼 바라보는 견해가 옳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을 인간처럼 바라보는 것이 기독교인이 될 수 없는 이유라면 이집트 사막의 수도승처럼 자신들을 기독교인으로 간주하는데 다수의 사람들을 말일성도와 더불어 기독교로부터 배척해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분명 기독교 세계의 대부분의 어린이들, 심지어 정통교파에 속한 어린이들 조차 다른 식으로 배울만큼 충분히 나이가 들 때까지는 하나님을 인간과 같은 분으로 생각한다. 이런 아이들이 기독교인들이 아니라고 주장하거나 이 아이들이 하나님에 대한 생각을 바꾸기 전까지는 구원받을 수 없다고 감히 주장할 수 없을 것이다.

 

마지막 질문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신약의 모든 내용을 믿고도 여전히 비기독교인으로 간주될 수 있을까? 있는 그대로의 성서의 선언은 얼마나 적절하고 얼마나 능력이 있는 것일까? 신약의 모든 말을 다 믿으나 하나님 아버지를 그의 아들처럼 만져볼 수 있는 육체를 가질 수 있다고 믿는 사람에게도 그리스도의 속죄는 효력이 있을까? 비록 신약이 이 문제에 있어서 침묵을 지키고 있지만 이러한 견해 때문에 그리스도의 대속이 그 사람의 생애에는 효력이 없을까? homoousios(희랍어로 똑 같은 물질로 된)와 homoiousios (희랍어로 비슷한 물질로 된)가 예수나 그의 제자의 가르침이나 경전 어는 곳에서도 발견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똑같은 물질로 된(homoousios) 성부, 성자, 성신을 예배하는 자들은 영원한 축복을 받고 비슷한 물질로 된(homoiousios) 성부, 성자, 성신을 예배하는 자들은 이단으로 구원을 받을 수 없다고 믿어야 할까?

  물론 신약성서난 신약의 일부를 거부해했던 영지주의자나 마르시오나이트들과 같은 고대 이단들이 있었음은 사실이다. 그러나 본인은 그들을 이야기 하고 있는게 아니다. 본인은 기독교인들에 관하여, 즉 신약의 글자 하나 하나를 전부 믿었으나 나중에 희랍 철학에 몰두한 신학자들의 해석을 믿지  않았던 1세게 교회와 사도시대의 교부와 희랍 변증자들에 관하여 이야기 하고 있는 것이다. 어쨌든 있는 그대로의 신약성서를 받아들인 기독교인들은 구원을 받을 수 있을까? 말일성도가 종교회의에서 나온 교리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이유로 기독교인이 아니라고 보는 비평가들은 예수와 사도들의 가르침이 "새롭게 개선된" 4세기와 5세기의 기독교의 교부들이 보완하고 새로운 정의를 내리기 이전의 구원이란 불완전하고 부적당한 것이었음을 의미한다. 말일성도는 훗일에  확정된 철학적인 기독교를 지지하여 초기 성서 기독교를 거부하는 것을 "너희의 전한 [철학적인] 유전으로 하나님의 말씀[신약]을 폐하는 것"(막7:13을 보라)

 

요 약

  후기성도는 하나님의 본질에 관한 모든 성서의 가르침을 확고하게 받아들이나 종교회의와 신경이 첨가한 비성서적인 가르침은 거부한다. 삼위일체 교리는  사도시대의 교부나 희랍 변증자들의 가르침에서도 발견되진 않는다. 심지어 오늘날 까지도 동방 교회와 서방 교회는 하나님의 정확한 본질과 기독교의 주된 교리의 정확한 어법(Filioque 논쟁)을 놓고 강력하게 다투고 있다. 만약 참된 기독교인이 되기 위해서는 니케아 교리로 하나님을 정확히 이해햐야 한다면 5세기 이전에 살았던 모든 기독교인들과 8세기 이후로  filioque 논쟁에 가담한 동방교회나 서방교회 중 최소한  한측에 속한 모든 사람들은 말일성도와 더불어 기독교에서 제외되어야 할 것이다. 게다가 개신교인들이 어떤 상황에서는 성경 하나만으로 구원에 충분하다는 sola scriptura를 주장하고 또 다른 상황에서는 돌아서서 종교회의나 신경같은 구원에 요구되는 비성서적인 내용을 첨가하는 것은 모순이다.

  후기성도는 가장 고상한 의미로 하나님 아버지가 영이라는데 동의 한다. 그러나 후기성도는 하나님을 영이라는 이유 때문에  이 하나님이 육체를 가질 수 없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하나님은 성신의 신위 가운데서는 영이나 성자의 신위 가운데서는 영이 아니다. 현대 계시에 근거를 두어 말일성도는 하나님 아버지는 만져볼 수 있는 육체를 가지고 계시며 그리고 이 사실을 성경을 통해서는 입증할 수 없으며 반박할 수도 없음을 인정한다. 그러나 그들의 철학적인 가정을 고려해 볼 때  성서의 승인없이 하나님에게 적용되는 성서의 신인동형동성설을 단순히 비유적인 것으로 여겨 버린 자들은 정통 기독교인들이며 신인동형동성설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인 자들은 말일성도다. 하나님을 인간처럼 보는 견해는 성서의 내용과 일치하나 희랍 철학이 정의하는 하나님과는 상반된다. 만약 후기성도처럼 신인동형동성의 용어로 하나님을 이해하는 이유 때문에 기독교인이 될 수 없다면 고대와 현대의 대부분의 기독교인들도 역시 기독교에서 제외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정도 차이가 있긴 하지만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은 철학적인 신학의 추상적인 용어보다는 신인동형동성의 성서적인 용어로 하나님을 이해하는 "과오"를 저지르기 때문이다. 게다가 성서 자체는 하나님을 신인동형동성의 언어로 하나님을 묘사하고 있기 때문에 그러한 묘사가 단순히 도움을 주는 상징이나 비유로 이해된다 할지라도 하나님을 신이동형동성의 용어로 이해하는 것을 비기독교적인 관례라고 주장할 수 없다.
 

8
교리에 의한 배제:
기타 다른 주장들

 

  복혼은 모든 참된 기독교인들이 혐오하는 것이어서 복혼을 지지하거나  이를 묵인하는 사람들은 참된 기독교인이 될 수 없다는 주장이 때때로 있어 왔다.  이 주장에 따르면 많은 후기성도가 19세기 후반에 일부다처제를 했으므로 예수 그리스도 후기성도 교회가 기독교가 아니라는 것이 여실히 드러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몇가지 난관에 봉착하게 된다. 이 난관들이 어떤 것인지 살펴보기에 앞서 먼저 말일성도의 일부다처 교리에 관하여 몇가지 것을 언급 할 필요가 있다.

 

후기성도의 일부다처제

  첫째, 후기성도들이 복혼을 행했던 시기에도 복혼은 관례라기 보다는 예외였다.  후기성도들 가운데는 복혼을 한 사람보다는 일부일처를 한 사람들이 더 많았다. 그리고 특별한 신의 섭리가 아니고서는 후기성도는 복혼을  할 수 없었다.

  둘째, 후기성도는 복혼이 하나님의 왕국에 들어가기 위한 필수조건이라고 주장하지도 않으며 신약이 복수 결혼을 가르친다고 주장하지도 않는다. 후기성도는 하나님의 명이 있을 때마다 이에 복종해야 한다고 믿지만 복혼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필수 요소라거나 복혼이 일부일처제 보다 더 바람직하다고 믿지 않는다. 그리스도의 속죄는 일부다처주의자 뿐만 아니라 일부일처주의자들에게도 구원과 영생을 가져다 줄 것이다.

  세째, 복혼은복음의 보편적인 원리도 아니며 필수적인 원리도 아니기 때문에 주님은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는 자신의 백성들에게 복혼을 명하기도 하고 묵인하기도 하고 금하기도 하신다. 예를 들어 모세의 율법하에서는 분명히 일부다처제가 일반적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허용되었지만 몰몬경을 보게되면(야곱서 2:27-28) 주님은 니파이인들에게도 복혼을 금하셨다. 이와는 반대로 19세기에는 주님은 후기성도에게 복혼을 행하라고 명하셨다.  따라서 후기성도가 복혼을 행했던 이유는 복혼을지지하는 성구를  경전에서 발견해서도, 교리상으로 선호해서도가 아니라 선지자 조셉 스미스에게 주어진 계시에서 직접적인 하나님의 명령이 이었기 때문이었다. 후기성도가 볼 때에는 복혼 자체는 칭찬 할 만한 것이 아니므로 주님의 명령에 따라 복혼이 옳은 것이며 주님이 금하시는 것이면 그릇된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질문은 복혼이 옳고 그르냐가 아니라 특정한 상황 하에서 복혼이 옳을 수도 있다고 믿는 이유 하나 때문에 비기독교인이 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복혼에 대한 협오

  복혼을 혐오하는 것과 복혼을 실천하지 않는 것은 별개 문제다. 복혼이 허용되는 문화권에서 조차 대다수의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일부일처를 택한다. 대체적으로 서구 문화권에서는 복혼을 혐오한다. 그러나 이 혐오의 근원이 성서에서 나왔다고는 말할 수 없다. 왜냐하면 구약은 명료하게 복혼을 허용하고 있으며 신약도 복혼을 금하지 않기 때문이다. 예수와 일세기 유대 기독교인들도 복혼을 혐오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유대인들의 문화는 서구 문화가 아닌데다가 모세 율법이 복혼을 인정했을 뿐만 아니라 예수가 바울이 모세 율법의 거룩함을지지했기 문이다. 일부 일세기 유대 기독교인이 안식일과 할례 및 그들의 문화나 종교와 관련된 관례를 계속 행했듯이 복혼도 계속 행했었을 것이다. 복혼은 초기 기독교의 환경에서는 관례였기 때문에 유대교와 초기 기독교의 문화적 환경이 서구인들의 복혼에 대한 혐오의 근원이 될 수 없다.

  본인은 서구 문화권과 특히 현대 기독교가 일반적으로 복혼을 혐오하고 있음을 부인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혐오의 근원이 성서에서 나왔다는 것은 받아들일 수 없다. 혐오는 성서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고전-희랍과 로마-에서 비롯된 것이다. 성 어거스틴과 같은 정통 기독교인도 자신의 시대에 복혼이 금지된 이유는 단지 로마 풍습 때문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거듭 이삭의 아들이었던 야곱은 부인을 4명이나 두었기 때문에 중대한 죄를 저질렀다고 비난 받는다. 그러나 비난 받아야할 근거가 하나도 없다. 왜냐하면 일부다처가 풍습일 때 죄가 되지 않기 때문이며 더 이상 풍습과 법이 이를 금하기 때문이다. 비록 이교도 문화권에서는 여러 명의 성행위 대상자를 갖는 것은 용납 하면서도 부인은 한 명만을 허용하였다. 이 점에 있어서 희랍-로마 문화는 현대의 서구 문화와 흡사하다.

  분명 복혼에 대한 혐오는 성서에서 비롯된게 아니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이 안기고 싶어하는 아브라함의 가슴은 일부다처주의자의 가슴이며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이 들어가고 싶어하는 이스라엘의 집은 일부다처주의자의 집이기 때문이다.

 

복혼과 이혼

  복혼을 구약이 승인하는 것은 이혼을 묵인하는 것과 유사한 것으로 이해해야 하며 따라서 복혼과 이혼은 유대인들의 도덕적인 결함 때문에 모세율법 하에서 허용되었으나 나중에 기독교인들에는 금지되었다는 주장이 있어 왔다.  그러나 신약은 이혼에 관하여서는 이러한 언급을 하고 있지만(마19:3-9) 신약 어느 곳에서도 복혼에 관해서는 아무런 언급도 하고 있지 않다. 따라서 복혼과 이혼을 똑같이 취급할 수 있는 성서상의 이유가 없다.

  설혹 그러한 정당한 이유가 있다 하더라도 최소한 이혼과 복혼을 똑같이 취급하는 것이 배제자들의 주장을 도와주지 못하는 두가지 이유가 있다. 사실상 이러한 유추는 내가 주장하고자 하는 것이다. 첫째, 신약은 이혼이 일반적으론 금지되었으나 특별한 상황하에서만 허용되었음을 보여준다(마19:9: 골전7:15, 소위 바울의 특권). 복혼은 일반적으로 금지되나 특수한 상황하에서만 허용된다는 것이 후기성도가 복혼을 주장하는 유일한 이유이다. 둘째, 만약 복혼이 이혼과 유사하다면 오늘날 문자 그대로 수백만명의 기독교인들이 이혼하는데 왜 복혼을 하는 기독교인은 있을 수 없단 말인가? 사실 신약에서는 이혼을 금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혼 때문에 교인이 될 수 없는 건 아니다-대부분의 기독교파가 이혼을 못하게 하거나 찬성하진 않지만. 나는 이혼한 몇몇 개신교 목사들을 개인적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이혼과 복혼이 유사한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면 경전에서 금하지 않는 복혼에 대한 제재는 경전에서 금하고 있는 이혼에 대한 제재보다 논리상 클 수가 없다.  더욱이 현대 교회가 일반적으로 이혼한 사람을 기독교인으로 받아들이고 있으며 또 마땅히 그렇게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혼과 복혼이 정말 유사한 것이라면(복혼을 하지 않고) 복혼의 가능성만을 믿는 사람들이 이혼한 사람과 마찬가지로 기독교인이 되지 못할 이유가 없다.

 

기독교의 선례

거듭 본인은 복혼이 옳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본인이 주장하는 것은 복혼이 특정한 상황에서는 옳을 수도 있다고 믿는 그 자체 때문에 비기독교인이 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뉴기니아에서 개신교 선교사였던 로버트 홀스트는 "침례 교회와 감리 교회 선교사들은 복음을 접하기 전에 이미 복혼을 한 사람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겠다는 결정을 하기 전에 복혼을 한 사람들을 침례한다. 이 선교사들은 복혼을 죄로 간주하지 않으나 하나님의 이상은 아니라고 느낀다.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선교사들은 복혼이 어떠한 상황에서도 기독교인이 된는 것을 막는 장애물이 아니라고 믿었다. 특정한 상황에선 기독교가 복혼을 용인할 수 있다고 믿는 선교사와 개종자들을 교회 명부에서 지워 버려야 할까?

  다른 지역의 개신교인들도 이와 비슷하게 기독교인의 복혼의 가능성을 주장해왔다.  "일부일처가 기독교의 표준이기는 하지만 복혼의 가능성을 주장해왔다. "일부일처가 기독교의 표준이기는 하지만 복혼을 행하는 아프리카 교회는 여전히 기독교회로 분류될 수 있음을, 그리고 복혼 때문에 어떠한 교회도 기독교 종교 회의와 온전한 기독교로부터 배제되지 않을 것을 대중에게 공포합시다.

  어쩌면 위대한 종교 개혁가인 마틴 루터 자신에게서 기독교인들의 복혼의 가능성을 가장 잘 찾아볼 수 있다. 루터가 일반적으로 복혼에 반대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따라서 하나님이 사랑에 의해 조건이 정해진 자유를 넘어서도록 명하지 않는다면 기독교인이 자유로이 복혼을 할 수 없다는 것이 저의 견해입니다. 그러나 루터 신학에서는 복혼에 대한 반대가 결코 절대적인 것이 아니었음이 분명하다.
심지어 루터가 일부일처를 지지하는 글을  썼을 때에도 루터는 복혼이 특정한 상황하에서는 기독교인에게 허용될 수 있다고 말했다.  예를 들어 부인이 문둥병에 걸리거나 기꺼이 결혼 생활에 참여하지 않을 때 혹은 "다른 부득이한 이유"가 있을 때 혹은 위에서언급한 대로 "하나님이 그에게 명한다면" 복혼이 허용될 수 있다는 것이다. 대조적으로 말일성도의 입장에서 보면 후자의 우연성만이, 즉 하나님이 명하는 경우에만 일부다처가 정당화된다.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특정한 계명이 없이는 복혼은 다른 기독교인 뿐만 아니라 후기성도에게도 허용되진 않는다. 이를 어겼을 때는 파문이 뒤따른다.

  그러나 루터가 복혼이 허용될 수 있다고 생각한 다른 상황들이 있었다. 1531년 9월 루터는 아라곤의 케더린과의 이혼을 지지해줄 것을 요청했던 영국왕 헨리 8세의 사절인 로트 반즈에게 편지를 썼다. 편지에서 루터는 이혼은 하나님이 금할 뿐만 아니라 케더린에게 부당한 처우이기 때문에 헨리는 둘째 부인과 결혼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8년 후 루터의 지지자였던 헤스의 백작 필립은 이혼이 경전에서 금지되어 있으므로 첫째 부인과 이혼하지 않고 마가렛 폰 데 쌀과 결혼 하고자 했다. 필립과 신부가 될 마가렛과 신부의 어머니는 루터 신학의 서면 허가 없이 복혼을 행하려고 했다. "복음은 결혼과 관련하여 모세 율법하에서 허용되었던 것을 폐지하거나 금하지 않기 때문에 " 1439년 12월 10일 루터와 부서,멜란치논을 비롯한 성직자들이 문제가 된 복혼을 용납한다고 명시된 문서에 서명했다. 이해할 수 있는 정치적 이유와 문화적 이유 때문에 모든 문제를 비밀로 하라는 강력한 충고를 받고 난 다음에 필립은(서면으로) 자신이 신청한 복혼이 "모든 승인"을 받았다고 확신했다. 따라서 1540년 3월 4일 부서와 멜란치톤이 참석한 가운데 루터 교회의 예배당 목사인 데니스 멜란더의 주례로 결혼식이 거행되었다.

  본인은 여기에서 루터를 복혼의 옹호자로 밝힐려고 하는 것이 아니다. 분명히 루터에게 일부일처제는 법칙이었다. 그러나 복혼은 특정한 상황 하에서는 루터의 법칙에 허용될 수 있는 예외였다. 루터는 이혼보다는 복혼을 훨씬 더 선호했으나 많은 현대 기독교인들이 복혼을 혐오하면서도 기독교 의식이나 되는 것 처럼 이혼하는 사실을 주의 깊게 주목해야 한다.

  이곳에서 본인이 주장하고자 하는 것은 만약 루터가 거의 십년 간격을 두고 일어난 최소한 두가지 사건에서 서면으로 복혼을 지지할 수 있었다면 루터가 서면으로 필립의 복혼을 허용하는 문서에 서명할 수 있었다면 마틴 루터가 특정한 상황 하에서는 복혼을 승인했다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그러면서도 루터가 기독교인으로 간주될 수 있다면(물론 기독교인으로 간주되지만) 특정한 상황 하에서 복혼을지지하는 이유 때문에 기독교인이 비기독교인이 될 수는 없다. 루터와 부서와 멜란치톤이 복혼을 하라고 충고하고 복혼을 승인하면서도 기독교인으로 남아있을 수 있다면 요셉 스미스와 브리감 영도 마찬가지다.

 

비밀 교리 (성전)

  교리를 근거로 배척하는 자들이 이용하는 또 다른 논쟁에는 후기성도의 성전 의식에서 가르치는 비밀 교리가 들어있다. 이 교리를 받아들인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 후기성도 교회의 성전안에서 가르치는 세부적인 의식들을 밝히지 않겠다는 성약을 맺는다. 이런 이유로 보자면 후기성도의 비밀 교리를 공격하는 것은 침묵의 맹세하에 있는 수도승을 공격하는 것과 흡사하다- 이런 공격은 공격자들이 손위운 승리로 끝나나 결코 영웅적인 승리는 아니다. 그러나 여기서 후기성도 성전을 상세히 토론하거나 방어할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비말일성도 비평가들은 후기성도의 비밀 교리가 틀리다고 비난하는게 아니라( 이것은 교파 사이의 사소한 싸움이 될 소지가 있다) 기독교 세계에서는 결코 비밀 교리란 없었으며 따라서 비밀 교리를 믿는 자들은 기독교인이 될 수 없다고 비난하기 때문이다.
  비밀 교리란 일반이나 대중에겐 감추어진 교리로 어느 누구에게나 허용되어 있지 않고 전수 받는 사람에게만 알려지는 교리다. 후기성도에겐 또한 죽은자를 위한 대리 의식도 비밀 교리다. 우리에게 던져지는 질문은 특정한 후기성도의 비밀 교리가 옳느냐 그르냐가 아니라 기독교에는 도대체 비밀 교리가 있었느냐는 것이다. 만약 있었다면-현대의 기독교파가 은밀한 교리를 가지고 있든지 없든지 또 후기성도가 이 비밀 교리를 제대로 이해하고 있든지 아니든지 간에- 비밀 교리는 기독교적인 현상이다.  

 

신약에 나오는 비밀 교리

  고린도 전서의 저자인 사도 바울부터 시작해 보자. "그러나 우리가 온전한 자들 중에서 지혜를 말하노니 이는 이 세상의 지혜가 아니요 또 이 세상의 없어질 관원의 지혜도 아니요 오직 비밀한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지혜를 말하는 것이니 곧 감추었던 것인데 하나님이 우리의 영광을 위하사 만세전에 미리 정하신 것이라"(골전 2:6-7), 6절에서 "온전한"으로 번역된 희랍어는 teleios로 "온전한" 뜻 이외에도 "성숙한""전수받은" 뜻도 들어있다. 따라서 바울은 대중에게는 밝혀지지 않으나 성숙한 사람들에게만 밝혀지는 숨겨진 지혜를 가지고 있다. 단어의 정의에 따르면 이것이 바울이 말하는 "비밀한 가운데" 전달되는 비밀 교리인 것이다. "비밀"로 번역된 희랍어는 musterion으로 "신비""비밀""비밀스러운 의식" 또는 "비밀스러운 가르침"을 뜻한다. 그러므로 성숙하거나 전수 받은 자들에게만 비밀스러운 의식(musterion)을 통해 전달되는 숨겨진 지혜가 신약에 있는 것이다. 심지어 이것 이외에 다른 증거가 없다 하더라도 이 구절만으로도 초기 기독교가 비밀교리를 가지고 있었음을 입증할 수 있다. 몰몬이 아닌 어떤 학자는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다. "바울은 이곳에서 틀림없이 자신은 성숙지 못한 기독교인들로부터 조심스럽게 보호해온 비밀스러운 기독교 계시적 지혜가 담긴 교리를 알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이 구절에 대해 일부 성서 주석가들은 일반 기독교 복음 자체가 숨겨진 비밀이라고 주장해왔으나 이 주장은 두가지 이유로 빈약한 주장이다. 첫째, 기독교 복음은 성숙한 자를 위해서만 숨겨지거나 예비된 것이 아니다. 이 복음은 "온 세상에" 전파되었다. 둘째, 고린도 성도들이 기독교 복음을 이미 듣고 개종하여 침례를 받았지만 바울은 이들이 복음의 "단단한 식물"을 먹을만큼 성숙하지 못했다고 믿었다. 그러므로 두 부류의 다른 교리, 즉 대중을 위한 교리와 숨겨진 교리가 있는 것이다."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 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 내갸 너흐를 젖으로 먹이고 밥으로 아니하였노니 이는 너희가 감당치 못하였음 이거니와 지금도 못하리라."(골전3:1-2) 고린도인들은 이미 기독교인이었으므로 바울이 그들에게 주지 않은 딱딱한 음식이 일반 기독교 복음이었을리 없다. 이 딱딱한 음식이 무엇이었든지 간에 고린도인들이 이를 받을 준비가 되지 않아 보류되었다는 사실 하나만 보더라도 이는 비밀 교리다. 고린도 후서에서 바울은 세 번째 하늘에 이끌려 갔을 떼 계시로 받은 비밀 교리를 언급한다. "그가 몸안에 있었는지 몸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리라"(골후12:4)> 이 때 바울이 배웠던 것은 틀림없는 비밀 교리로 모든 기독교인들이 이 교리를 다 받았다고 추측할 수 없다. 게다가 바울은 " 이것들이 너무 성스러워 글이나 말로 할 수 없어 비밀로 지켜야할 의무감을 느꼈다.

  고린도 전서에서 바울은 또한 초기 기독교의 죽은자를 위한 대리 침례의식을 언급한다. 이 의식은 후기성도 성전 의식중 하나다. 그리스도의 부활과 모든 인류의 부활 없이는 신앙과 회개 심지어는 자신의 가르침 조차 쓸모없다고 주장하면서 바울은 다음과 같이 질문한다. "만일 죽은자들이 도무지 다시 살지 못하면 죽은 자들을 위하여 침례 받는 자들이 무엇을 하겠느냐? 어찌하여 저희를 위하여 침례를 받느냐?"(골전15:29) 학자와 신학자들은 이 구절에 대해 여러 가지 이론을 펴왔다. 그러나 신교든 구교든, 심지어는 말일성도 교리에 적대감을 가졌든 가지지 않았든지간에) 정직한 신학자들은 이 구절이 죽은 자를 위한 침례를 나타내며 이 이외의 다른 이론들은 신학적으로 내포된 의미 때문에 본문의 본명한 뜻을 회피하려는 시도에 불과함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고리도 전서 15:29에 관하여 한 보수 개신교 서적은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본문을 정상적으로 읽으면 일부 고린도인들이 침례를 받고 있으며 분명 죽은 자들을 대신하여 대리로 침례받고 있음을 알 게 된다. 본문은 희랍어로 이해하기가 평이하므로 대리 침례와 관련된 어려움만 없다면 어느 누구도 여러 가지 않을 상상해 보지 않았을 것이다. 뛰어난 천주교 성서 주석서도 다음과 같은 의견을 보이고 있다. "거듭 사도[바울]은 고린도 지역에서 행해지는 의식을 죽은자의 부활을 믿는 기독교인들의 신앙의 증거로 언급하고 있다. 고린도에서 일부 기독교인들이 대리 침례로 말미암아 죽은 친지와 친구들이 그리스도의 구속을 받기를 희망하면서 그들의 이름으로 침례 받았던 것 같다.

  천주교와 개신교 학자들은 고린도 성도들이 죽은자를 위한 침례를 행했다는 동의한다. 그런데 바울은 고린도에서 행해지는"변태적인"의식을 단순히 묵인하고 있었으며 이 대리 침례가 일종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보여주는 것이었으므로 대리 침례를 다른 식으로 이해 했다는 주장이 때때로 나오곤 한다. 이러한 주장은 몰몬이 아닌 사람의 견지에서 보더라도 심각한 문제를 가지고 있다. 설혹 이 주장이 합당한 것이라 할지라도 후기성도는 비평가들에게 다음과 같이 물어볼 자격이 있을 것이다. 만약 사도 바울이고린도 성도들이 행했던 죽은자를 위한 대리 의식을 묵인했다면 왜 말일성도가 행하는 이 똑같은 의식을 묵인하지 않는가? 죽은자을 위한 침례가 옳든 그르든 죽은자를 위한 침례를 행한자들과 사도 바울이 교제했음을 성경이 보여준다면 현대 기독교인들은 이 선례를 어떻게 거부할 수 있을까?

 

초기 기독교의 비밀 교리

  바울 이후 여러 세기에 걸쳐 많은 정통파 작가들도 비밀고리를 언급했다. 사실 한 학자에 따르면 알렉산드리아의 교리문답 학교장이자 자신의 세대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신학자였던 성 클레멘트는 "선택된 사람들이 전수받았던 기독교 신앙에서 가장 심오한 지식에 대한 비밀지식같은 기독교 비밀 교리에 자신의 주석을 기초하였다.
  클레멘트의 글은 어느 종교 회의에서도 결코 비난 받은 적이 없으며 여러 현대 교파들이 지금도 여전히 그를 정통파 성인으로 존경한다. 그러나 가이사랴의 유게비우슨 클레멘트의 말을 인용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의로운 야고보와 요한과 베드로는 주님이 부활하신후 주님으로부터  더 높은 지식을 물려 받았다. 이들은 이 지식을 다른 사도들에게 전달했으며 사도들은 이 지식을 칠십인과 함께 나누었다. 이 "더 높은 지식"은 일반적인 복음 메시지일 수 없다. 왜냐하면 여기서 묘사된 가르침이란 일반적인 가르침과는 달리 그리스도가 자신의 제자들에게 직접 주지 않고 베드로 야고보 요한을 통해서만 개인적으로 준 별개의 계시였기 때문이다. 종종 클레멘트는 일반 기독교 메시지를 "일반 신앙,""기초", 또는 "젖"으로 부른다. 그로 그는 비밀 교리를 "더 높은 교리." " 비밀스러운 것," 또는 "비밀스러운 지식"으로 부른다.

예를 들면 크레멘트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 주님은 안식일을 지키면서도 선한 일을 하셨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에게 그러한 신성한 비밀과 그 성스러운 빛을 받을 능력이 있는 사람들에게 그것들을 전하도록 허용하셨다. 주님은 분명 여러 사람들에게 속하지 않은 비밀을 여러 사람에게 드러내지 않으셨으나 이 비밀을 받을 능력이 있고 이 비밀 교리에 따라 도야할 수 있는 소수에게만 드러내쎴다. 그러나 하나님의 경우처럼 비밀은 글이 아닌 말로 물려진다.

여러 세기 동안 클레멘트의 글을 해석해온 정통파 신학자들은 클레멘트의 신학에는 정말로 비밀 고리가 전혀 없었으며 소위 "비밀 교리"로 불리우는 교리는 신앙자들이 그들의 각기 다른 능력에 따라 이해하였던 대중 메시지에 불과하다고 주장하였다. 성숙한 자들은 대중 복음을 잘 이해했으나 성숙하지 못한 자들은 대중 복음을 성숙한 자 만큼 이해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1973년 이후로는 이러한 발뺌은 더 이상 불가능하게 되었다. 왜냐하면 그 해에 전에는 알려지지 않았던 클레멘트의 편지가 출판되어 문제를 분명하게 밝혀 주었기 때문이다. 다음은 몰톤 스미스가 번역한 편지에서 발췌한 내용이다. (이 인용문에 붙은 부호는 본인이 첨가했으나 각괄호는 원래 있었다.)

  • 베드로가 로마에 머물러 있는 동안 마가는 주님의 행적*<마가복음(the canonical Gospel of Mark)>[에 대한 기사]를 기록하였다. 주님은 [그들] 모두에게 전파하지도 않았고 비밀스러운[것]을 시사하지도 않았으나 가르침을 받고 있었던 사람들의 신앙을 증가시키는데 도움이 된다고 주님이 생각했던 것들을 선택하였다. 그러나 베드로가 순교했을 때 마가는 자신의 기록과 베드로의 기록을 알렉산드리아로 가지고 건너와 이 두 기록으로부터 지식[gnosis]을 향해 발전해 나아갈 수 있는 것이면 무엇이든지 적절한 것을 자신의 책에 옮겼다. [그러므로] 마가는 온전하게 되어가는 자들이 사용 할 수 있도록 더욱 영적인 복음서<비밀 마가 복음(a Secret Gospel of Mark)>를 작성하였다. 그러나 마가는 언급할 수 없는 것을 드러내지도 않았으며 주님의 비밀 교리를 글로 남기지도 않았으며 이미 쓰여진 글에 다른 글들을 첨가하고 비법가로서 청중들을 일곱[자약]에 의해 가려진 그 진실의 가장 내부에 있는 지성소로 이끈다는 뜻으로 해석된다고 그가 알고 있었던 어떤 말을 도입하였다. ..그리고죽어가면서 마가는 자신의 글을 알렉산드리아 교회에 남겼으며 이곳에서 마가의 기록은 가장 엄중한 보호를 받고 있으며 큰 비밀을 전수받는 사람들에게만 읽혀지고 있다

오늘날 대다수의 학자들이 진짜로 받아들이는 이 편지의 내용에 따르면 클레멘트가 후기성도가 알고 있는 똑같은 비밀 교리를 믿지 않았다고는 이상 주장할 수 없다. 오늘날 비밀 마가 복음으로 불리우는 이책을 보면 비밀 교리는 대중 복음이 아니라 마가복음에 추가된 교리였다,. 그러면서도 클레멘트는 너무 성스러워서 비밀 복음에 조차 담을 수 없었던 비밀-"주님의 비밀 교리"라고 부르는 비밀-이 있음을 자신의 독자들에게 알린다.

  클레멘트는 같은 서신에서 카포크라션과 영지주의자들이 희박한 근거에서 비밀 교리를 만들어내서가 아니라 기독교의 진짜 비밀 교리를왜곡함으로써 잘못을 저질렀다고 설명한다.

  물론 클레멘트의 서신이 비밀 마가 복음서의 존재 가능성을 틀림없이 보여주기는 하지만 비밀 마가 복음서가 있었다고 반드시 입증해 주지는 않는다. 그러나 이 서신은 자신의 시대에서 가장 튀어난 정통 신학자이자 알렉산드리아의 교리문답 학교의 교장이었던 클레멘트 경이 정통적인 비밀 교리가 있었다고 절대적으로 믿었으며 자신이 이 복음서를 읽었다고 주장한 것으로 보아 클레멘트 자신이 "위대한 비밀을 전수 받았음"이 틀림없다. 게다가 클레멘트만이 그렇게 믿었거나 그렇게 전수받은 알렉산드리아의 유일한 정통파 기독교인이었을리가 없다. 이세기의 알렉산드리아의 유일한 정통한 기독교인이었을리가 없다. 이세기의 알렉산드리아의 정통 기독교는 최소한 "성숙한" 알렉산드리아의 기독교들은 비밀한 기독교 교리를 믿는 신앙을 가지고 있었다. 이것은 기록상의 문제다.

   4세기에 콘스탄틴 대제는 기독교국 안에서 3곳의 가장 성스로운 장소- 예수님의 탄생장소와 부활한 장소 그리고 승천한 장소-에 교회를 세웠다.  "교회 역사의 아버지"이자 정통 신학자였던 유세비우스는 고대에 엘레오나라고 불리웠던 세 번째 교회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대제의 어머니가 하늘로 승천하신 인류의 구세주를 기념하여 감람산 위에 장엄한 구조물을 세웠고 산 정상에 성스러운 교회와 성전을 세웠다. 그리고 참으로 확실한 역사에 따르면 바로 이 동굴 안에서 구세주가 자신의 비밀 계시를 제자들에게 주었다.
  그 이후 얼마되지 않아 예루살렘의 성 시릴은 비밀 의식으로 밖에 묘사될 수 없는 침례 의식을 묘사하였다. 이 침례 의식의 세부 사항과 시릴의 신비한 해석은 엄격하게 비밀로 지켜져야만 했었다.

그 이후 얼마되지 않아 예루살렘의 성 시릴은 비밀 의식으로 밖에 묘사될 수 없는 침례 의식을 묘사하였다. 이 침례 의식의 세부 사항과 시릴의 신비한 해석은 엄격하게 비밀로 지켜져야만 했었다.

가르침이 끝났을 때 만약 침례 지원자가 당신의 선생이 당신에게 가르쳐준 것을 알고 싶어 하거든 아무것도 말하지 마시오. 왜냐하면 침례 지원자는 우리가 당신에게 앞으로 올 시대를 희망하면서 전달했던 비밀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오. 당신이 보상으로 찾는 비밀을 침례 지원자를 위해 보호하시오. 그 어느 누구도 당신에게 " 내가 안다고 무슨 해가 있겠소?"라는 말로 당신을 설득하지 못하게 하시오. 이미 당신은 최고의 신비를 알고 있소. 나는 당신이 이 비밀을 몰래 드러내지 않기를 간청하오.

시릴은 비밀스러운 행동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였다. 먼저 "마치 사탄이 함께 있는 것처럼 당신은 손을 앞으로 펴 그와의 관계를 끊었습니다." 의식이 완전히 끝날 때까지 남자는 남자와 함께 여자는 여자와 함께 머물러 있어야 했다. 그런 다음 전수자들은 그들의 앞 이마로부터, 귀, 코등을 거쳐 발에 이르기까지 여러 단계에 걸쳐 성별된 기름으로 부름을 받았다. 시릴은 이것을 신약성서 요한 일서 2:20, 27에서 언급된 기름 부음으로 묘사한다. 기름 부음을 받은 다음 전수자들은 세 번 침수로 씻고 다시 기름 부음을 받은 다음 시릴이 성전의 상징인 "지성소"라고 부르는 내성소로 통과하였다."                

  예루살렘의 시릴만이 이 비밀 교리를 가르치지 않았다. 밀란의 성 암브로스(성 어거스틴의 선생), 콘스탄티노플의 성 요한 크리소스톰과 몹스에스타의 씨어도어는 지리적으로 널리 흩어져 사는 기독교인들이었지만 본질적으로 똑같은 것을 가르친 교부들중 일부였다.
  성 바실도 역시 글로 쓰여진 복음과는 명확히 구분되며 사도들로부터 전수되었던 비밀 교리를 글로 남겼다.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졌든지 아니면 대중에게 명령되었든지 간에 글로 쓰여진 가르침으로부터 나온 교회에 보존되어 있는 믿음과 의식의 일부를 우리는 소유하고 있다. 사도들의 전통에 따라  "은밀하게" 우리에게 전달된 다른 믿음과 의식들도 받았다. 그리고 참된 종교와 관련하여 이 두 부류의 믿음과 의식들은 똑같은 힘을 갖는다.... 왜냐하면 잘 알다시피 우리는 사도와 복음이 기록으로 남긴 것에 만족하지 않고 서문과 결론에서 우리는 다른 말들을 성직의 정당성에 매우 중요한 것으로 덧붙였으며 이것들은 글로 남겨지지 않은 가르침으로부터 나오기 때문이다.   아니라.  글로 남겨진 것 중에서 어는 것이 기름 부음을 가르치는가?

..이것은 우리 교부들이 호기심 어린 간섭과 조사가 미치지 않게 침묵속에 보호한 그 출판되지 않은 비밀 교리로부터 오지 않은가? 이들은 이 성스러운 비밀들이 침묵에 의해서 가장 잘 보존된다는 교훈을 잘 배웠다. 비 전수자들이 보도록 허용되진 않았던 비밀이 글로 남긴 문서에 공공연하게 과시될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일부 현대 기독교인들은 지금까지 이야기한 이 모든 의식들이 속임수에 불과한 것으로 여겨 무시할 수도 있으나 이것들은 성스러운 복음의 가르침으로 즉 글로 남긴 신약에 담겨진 것 이상의 것으로 간주되는 가르침으로 이해해온 정통 기독교인들이 여러 세기에 걸쳐 매우 진지하게 이 의식들을 행하였다. 바실과 시릴은 기독교 성인이었다. 바실은 지금도 여전히 정통 교회의 규칙으로 남아있는 수도 생활의 규율을 제정한 기독교인이다. 시릴은 서기 381년 콘스탄디노플 종교회의에 참석해 니케아 신경을 공식화하는데 도왔다. 게다가 시릴은 정통 교회에서 가장 신성한 사당인 예루살렘의 성묘 교회에서 비밀 교리에 관하여 전수자들에게 강의하였다. 이들과 이들이 가르친 비밀 교리가 비 정통적인 교리로 간주될 수 없다.

  본인의 주장은 이렇다. 객관적인 입장의 학자가 신약은 바울의 비밀 교리를 지지한다고 견론을 내릴 수 있다면, 신약이 고린도 성도들이 죽은 자를 위한 대리 침례를 행했다고 분명하게 언급한다면,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가 주님의 비밀 교리가 기독교 교리의 일부였다고 믿고 클레멘트 자신도 비밀 교리를 전수받았다면, 성 바실이 가장 신성한 기독교 가르침은 결코 글로 남기지 않고 사도로부터 전해진 비밀 의식과 가르침에서 발견된다고 단호하게 말할 수 있었다면, 그리고 예루살렘의 성 시릴이 비밀 의식을 행할 수 있었고 성묘 교회에서 그의 저수자들에 이 의식들의 은밀한 뜻을 가르칠 수 있었다면, 말일성도가 비밀 교리를 믿는다는 이유 때문에 말일성도를 비기독교인으로 매도할 이유가 전혀 없는 것이다.

  현대 기독교인들이 종종 이 사실 때문에 무안을 당하지만 이 비밀 교리가 다른 시기와 다른 장소에서 정통 기독교인들이 행해온 의식의 일부였다는 것은 기록상의 문제다. 현대 기독교인들은 클레멘트나, 바실, 시릴, 암브로스, 크리소스톰과 같은 교부들을 거부하고 심지어는 이들을 이교도의 비밀에 영향을 받은 자들이라고 비님할 수 있으나 이들을 이교도로  비난하지는 않는다. 또한 비밀교리가 3,4,5세기 정통 교회에서 묵인될 수 있었다면 현대 후기성도 가운데서 묵인되지 않을 이유가 없다.

 

영혼의 선재

  때때로 공격을 받는 교리이자 후기성도를 기독교 가족으로부터 배제하기 위해 이용되는 후기성도의 또 다른 교리는 영이 이 지상에 오기 전에 존재했다는 교리다.
  영혼에 대한 정통 교리는 기독교 시대 중 최초의 시기, 즉 신약 시대에 확고하게 정립되었다고 생각할런지 모르나 전혀 그렇지 않다. 한 유익한 참고 자료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기독교 세계는 일반적으로 영혼에 관한 어떠한 세밀한 가르침도 중세 시대 전까지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경전은 영혼과 육체의 구분과 하나님이 생기를 코에 불어 넣어 만든 최초 인간의 영혼의 창조와 최초 인간의 영혼이 불멸하다는 것만 명확하게 밝히고 있다. 기독교인들은 영혼의 정확한 본질에 대해 지금도 의견이 구구하며 어떻게 영혼이 창조되는가를 설명하는 여러 가지 다른 이론이 현대 기독교 가운데 공존한다.

  현대 계시에 근거하여 후기성도는 모든 영혼(후기성도들은 영혼을 영으로 부른다) 이 전세에서 조직되었으며 이 영혼들이 지구에 와 육체를 입기 전에 상당한 기간동안 하나님 면전에서 살았다고 믿는다. 후기성도가 아닌 사람들은 때때로 이 견해를 영혼의 윤회나 영혼이 육체의 사후에 타인으로 옮겨진다는 재생으로 잘못 이해하기도 한다. 그러나 말일성도는 이 두 가지 설에 적대감을 보인다. 왜냐하면 후기성도는 영혼이 한번 필멸의 육체를 받게 되면 또 다른 필멸의 육체로 들어 갈 수 없다고 믿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후기성도의 믿음과 다른 기독교인들의 믿음 사이의 유일한 차이점은 영혼이 출생시 개별적으로 창조되느냐 아니면 출생 이전에 창조되었느냐는 것이다. 기독교인들이 후기성도와는 다른 의견을 가질 수 있으나 기독교인들이 이 문제를 두고 몇 안되는 성구를 서로 다르게 해석하기 때문에 그리고 전통적인 견해-전통적인 견해도 추측한다-가 중세 전까지는 보편적으로 받아 들여지지 않았기 때문에 기독교인이 되는 것이 이걸 믿느냐 아니면 저걸 믿느냐에 달려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결함이 큰 주장이다.

 

구원을 받는 방법

  모든 참된 기독교인들은 은혜로 구원을 받는다고 믿으나 몰몬들은 행위로 구원을 받는다고 믿으므로 후기성도는 기독교인이 될 수 없다는 이야기를 때때로 듣는다.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몰몬은 개개인이 자신의 구원을 자신의 노력으로 성취한다"는 뜻일 것이다. 이러한 믿음하에서는 구원이란 개개인이 자신을 위해서 행하는 개인의 성취이며 그리스도의 속죄는 개인이 자신을 구원하는데 사용되는 요긴한 도구에 불구하다. 구원을 이런 식으로 보는  사람들은-분명 이렇게 잘못 할고 있는 후기성도들이 있다. 실제로 "물론 내가 구원을 얻어낼거니 나에게 주님의 영예를 주시오"라고 말하는 거나 다를 바 없다. 이렇게 되면 구원은 하나님의 모든 은사 중 가장 큰 은사(교리와 성약6:13)가 되기를 그치며 단순히 올바른 단계를 좇음으로써 자신이 얻어내는 그 무엇이 되어 버린다. 이런 견해에 따르면 개인이 자신의 구원을 얻어내므로 그리스도는 개인적인 구세주가 되지 못한다. 이렇게 되면 구원은 더 이상 그리스도 중심이 아니라 개인 중심의 활동이 되 되어 버린다.

  행위로 구원을 받는다는 이런 생각은 얼핏 보아도 후기성도 교리와는 전혀 무관하다. 사실 이 내용은 본서 2장(허위제시에 의한 배제)에서 다루어질 수도 있었다. 왜냐하면 후기성도들이 행위에 의한 구원을 믿는다는 비난이 후기성도의 위치를 크게 잘못 해석하고 있기 때문이다. 심지어 일반 기독교인들 가운데에서 조차 하나님의 자비에 대한 교리가 뜨겁게 논쟁될 수 있으므로 본인은 여기서 모든 비후기성도 비평가들을 만족시킬 정도로 이 교리를 정의하지는 않겠다. 그러나 본인은 몰몬경에서 인용한 다음 기본 원리가 후기성도의 견해를 공정하게 대표한다고 믿는다.

  첫째 어떤 의미에서건 개개인이 하나님에게 빚지지 않으면서도 하나님의 축복을 얻거나 받을 자격이 있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몰몬경에서 베냐민 왕은 이를 다음과 같이 말한다.

  • 내가 너희에게 이르거니와, 비록 너희가 태초에 너희를 창조하시고 날마다 너희에게 호흡을 주시어 보존하시며, 너희 뜻대로 살아 움직이게 하시고, 순간 순간 너희를 받들어 주시는 하나님을, 너희가 전심 절력을 다하여 섬긴다 할지라도, 너희는 무익한 종에 불과한 것이니라. ..
    ...너희가 빚을 진 것이요, 현재가 그러하며 장차도 그러하며 영원토록 그러할 것이매, 너희가 무엇을 뽑낼 수 있겠느냐(모사이야2:21,24)

십일조의 법처럼 내가 A를 하면 하나님이 B를 주실 것이라는 성약에서 보듯이 하나님이 그러한 성약을 나에게 제안하였으며 내가 그러한 하찮은 노력으로도 그러한 감당 못할 축복을 받을 수 있다는 바로 그 사실이 본질적으로 하나님의 순수한 사랑의 표현, 즉 은사이자 은혜스러운 행위이다. 구원 자체는 그러한 은혜의 성약, 즉"피로 세운 새 언약[성약]"(눅22:20)의 결과이다. 이 성약이 존재한다는 자체가 자원한 구세주가 제공하는 은사이자 은혜다. 그러한 모든 성약처럼 양측이 지켜야 할 조건이 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 율법에 살려는 최선의 노력이 우리의 훌륭한 신앙의 징표이며 주님이 제안하신 성약을 우리가 받아들인다는 징표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킬려고 노력할 때 우리 자신의 구원에 참여하게 된다. 그러나 우리는 아무리 잘 하더라도 결코 우리 스스로가 구원을 얻어내거나 우리 자신의 공로 때문에 구원을 얻어내는 것이 아니다.
  둘째, 구속이란 개인의 노력의 결과로 결코 올 수 없으며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를 통해서먄 온다. 몰몬경 예언자 리하이는 이를 자신의 아들 야곱에게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 . 그러므로 나는 너의 구속주의 의로우심으로 네가 구속되었음을 아나니....
    인간은 선악을 구별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가르침을 받았고, 또한 인간에게 율법이 주어졌나니, 율법으로 비추어서 의로운 육신이 없으며, 율법으로 인간은 잘리느니라, 진실로 인간은 육의 율법으로 잘려 떨어지며...
      그러므로 구속은 성스러운 메시야의 뜻안에 성스러우신 메시아로 말미암아 오나니, 그는 자비와 진리로 충만하심이라.
      보라, 주는 죄 값으로 자신의 몸을 희생하시어 애통하는 마음과 상한 심령을 지닌 모든 자를 위하여 율법의 뜻을 이루시나니, 주로 말미암지 않고서는 누구에게도 율법의 뜻이 이루어질 수 없느니라.
      그러하매, 거룩하신 메시야의 공덕과 자비와 은혜로 말미암지 않고서는 아무도 육신으로 하나님 면전에 거할 수 없음을 세상 사람들에게 알 게 함이 얼마나 중요한 일이겠느냐. (니파이이서 2:3, 5-8)

주님이자 구세주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개인적으로 우리의 인생에 중재하지 않으시면 우리를 구원해 줄 수 있는 교리나 의식, 원리, 율법, 행위, 교회, 믿음, 프로그램, 천사나 선지자란 없다. 이것이 성경과 몰몬경의 가르침이다.
  셋째, 개개인은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를 통해 거듭 나야하고 그리스도의 영적 자손이 되어야 한다. 자신의 백성들이 하나님에게 순종하겠다는 성약을 하고 난 다음에 베냐민 왕은 백성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 이제 너희가 맺은 이 언약으로 하여 그리스도의 자녀라 일컬음을 받으리니, 곧 그의 아들과 딸이라 이르리라, 보라 이는 그리스도께서 이 시간에 너희를 영으로 낳으셨음이라. 너희는 그의 이름을 믿는 신앙으로 인하여 너희 마음이 변화되었다 말하니라. 그러므로 너희는 그리스도에게서 태어나 그의 아들과 딸이 되었으며,
  •   그를 머리로 하여 너희가 자유롭게 되었으매 너희를 자유롭게 할자가 다시 없느니라. 구원을 주시는 다른 이름이 있지 아니하니, 생애가 끝날 때까지 순종하기로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너희 모두가 그리스도의 이름을 받들기를 내가 원하노라(모사이야5:7-8)

우리를 영적으로 다시 낳은 구세주와 구세주의 속죄를 개인적으로 경험하지 않고서는 그리스도의 교회에 속해 있는 것만으로 구원 받을 수 없다.  몰몬경의 다른 예언자인 앨마는 다음과 같은 신랄한 질문을 통해 이것을 명료하게 밝힌다. "보라 교회의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묻노니 너희는 영적으로 하나님 앞에 거듭 났느냐? 하나님의 모습을 네 얼굴에 지녀 보았느냐? 이 놀라운 변화를 너희가 마음으로 느껴 보았느냐? 너희는 너희를 창조하신 이의 속죄를 믿으며 생활하느냐?"(앨마서5:14-15)

  넷째 우리가 무엇을 가지든 무엇을 하든 우리는 은혜로 구원을 받으며 은혜 없이는 저주 받는다. 은혜는 구원에 없어서는 안될 sine quanon, 즉 필수 조건이다. 리하이의 아들 니파이는 다음과 같이 간증한다. "이는 우리가 부지런히 기록하여, 우리들의 자녀와 형제들에게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을 가까이 하도록 권고하였음이요, 우리가 여하히 노력하더라도 다만 하나님의 자비로 인하여 구원받게 됨을 앎이라"(니파이 이서 25:23) 게다가 만약 개인이 기꺼이 그리스도에게 나아와 끝까지 견딘다면 육체적인 결함에도 불구하고 구세주의 은혜는 그 개인을 구원하기에 충분한 것이다. 몰몬경은 주님의 이 은혜로운 말씀을  기록하고 있다. "만일 사람이 내 앞에 이를진대 내가 저들의 연약함을 보이리라. 내가 사람을 연약하게 하였음은 저들로 겸손해지게 하려 함이라. 그러므로 나의 사랑은 내 앞에 겸손하게 임하는 자 모두에게는 흡족할 지니, 저들이 내 앞에 겸손하여 나를 믿는 신앙을 가질진대 내가 연약한 것들을 강하게 되게 하리로다."(이더서12"27)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우리의 상대적인 의로움이란 우리가 겸손하여 우리의 약점을 받아들이고 복음에 따라 생활할려고 노력하고 구세주를 믿는 신앙을 갖는 것에 비해 중요한 것이 아니다.  사실 몰몬경 마지막 장에서 예언자 모로나이는 최후의 간청을 한다.

  • 참으로 그리스도께로 나아와 그안에서 온전하게 되며, 경건하지 아니한 모든 것을 부인하라. 너희가 경건하지 아니한 모든 것을 부인하고 너희의 마음과 정성과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면 그 자비하심이 너희에게 충만할 것이요 그 자비하심으로 너희가 그리스도 안에서 온전하게 되리라. 또한 너희가 하나님의 은총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온전하게 되면 결단코 하나님의 권세를 부인하지 못하리로다.
      거듭 이르거니와 너희가 하나님의 자비심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온전하게 되고 하나님의 권세를 부인하지 아니하면, 너희의 죄를 대속하사 흠이 없는  성스러운 자가 되게 하시리라. 아버지께서 언약하신 그리스도 보혈을 통하여 너희거 성결하게 되리라(모로나니서10:32-33)

후기성도는 자비만으로 구원받는다고 주장하지도 않으며 저항할 수 없는 자비(예정설)을 받아들이지도 않는다고 일부 비평가들이 주장할지 모르나 이 주제들은 다른 기독교파 사이에서도 서로 의견이 맞지 않는 부분이기도 하다. 특정한 말일성도의 교리가 특정한 후기성도의 교리가 특정한 교파의 입장에서 보면 옳을 수도 있고 그릇될 수도 있으나 은혜와 행위에 대한 근본적인 후기성도 견해는 전통적인 기독교리의 범주 안에 있으며 웨슬리 입장에 가깝다. 모든 기독교인들이 특정한 후기성도의 은혜에 대한 개념에 의견을 같이 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후기성도는 결코 다른 어떤 수단으로도 특히 개인적인 행위로-구원받을 수 있다고 믿지 않았다. 추측컨대 일부 후기성도들이 예수 그리스도 후기성도 교회가 가르치는 이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음은 사실이나 이는 어느 교파에서나 이러한 소수가 있기 마련이다. 후기성도의 경전은 분명하다-우리는 자비로 구원을 받는다.

 

요 약

  서구 문화권이 복혼을 혐오할런지는 모르나 이 혐오의 근원은 성서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다. 설혹 성서에서 비롯된 것이라 하더라도 후기성도는 하니님이 명하실 때를 제외하고는 복혼에 반대한다. 서구 문화권이 보이는 복혼에 대한 혐오는 성서에서 나온 것이 아니며 후기성도가 아닌 다른 기독교 지도자들이 일반적으로 특정한 상황에서 복혼을 허용했으면서도 여전히 기독교인으로 간주되기 때문에(하나님이 명했다는 믿음하에) 소수의 후기성도가 행했던 복혼이 모든 후기성도를 기독교세계로부터 제외시키기 위해 이용될 수 없다.

  현대 계시에 근거하여 후기성도들은 비밀 교리인 예수 그리스도 후기성도 교회의 성전 의식이 온전한 기독교 복음의 일부임을 믿는다. 이것 때문에 모든 참된 기독교 믿음과 의식은 글로 남겨진 경전이 대중메세지 가운데서 찾아줄 수 있어야 한다고 믿는 일부 현대 기독교인들의 감정이 상할 수 있다. 그러나 이 견해는 교회의 견지에서 매우 근시안적인 것이다. 왜냐하면 1세기의 바울로부터 2세기의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와 3-4세기의 교부에 이르기까지 교회의 기록된 문서에서 발견되지 않고 사도들로부터 전수된 비밀 의식과 교리가 5백년 이상 동안 주된 정통 교회들에 의해 인용되었을 뿐만 아니라 완전히 수용되었기 때문이다. 기독교 정통성의 본질을 정의했던 기독교 교부들을 배제하지 않고서는 후기성도를 비밀 교리에 근거하여 기독교 세계로부터 배척할 수 없다.

  성경은 영혼이 창조된 방법에 해서 침묵을 지키고 있기 때문에 현대 기독교인들은 이 문제에 대하여 서로 의견이 다르기를 동의해왔다. 따라서 기독교인마다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다. 성경은 또한 영혼이 창조되는 시기에 대해서도 완전히 침묵을 지키고 있다. 따라서 후기성도들이 한 견해-영혼은 육체에 앞서 창조된다는 견해-를 가지고 다른 기독교인들이 다른 견해-영혼이 육체와 함께 창조된다는 견해-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서로 의견이 다르다. 그러므로 이 문제 때문에 어떤 사람이나 기독교파가 위험에 처해 있을 수는 없다.

  마지막으로 후기성도가 행위로 구원을 받는다는 비난은 사실이 아니다. 인간이 행위로 자신을 구원할 수 있다는 것은 자비로 구원을 받는다는 몰몬경의 가르침과 상반된다. 이 문제에 있어 예수그리스도 후기성도 교회의 교리는 일반적으로 기독교 교리로 간주되는 범주안에 들어있다.
 

9
결 론

 

  분별력 있는 독자라면 분명 지금쯤 후기성도가 기독교인이 아니라는 모든 주장 중 그 어느 하나도 후기성도가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주장이 아님을 깨닭았을 것이다. 이 사실이 내포하고 있는 엄청난 뜻을  생각해 보자. 진짜 중요한 문제는 조심스럽게 회피된 것이다. 두 사람이 경찰관 앞에서 상자의 내용물을 두고 다투고 있다고 잠시 상상해 보자. 한 사람은 다른 한 사람이 훔친 자신의 지갑이 상자 안에 있다고 주장한다. 다른 한 사람은 자신이 들고 있는 상자안에는 아무 것도 없다고 주장하면서 경찰관에게 이를 입증할 수 있는 춘분의 평균 풍속에서부터 사과소스의 비중에 이르는 모든 것에 근거한 여러 가지 이유를 제시한다. 그러나 상자를 열어보라고 요구할 때마다 상자는 철저히 닫힌채로 그는 상자 안이 비어있다는 또 다른 주장으로 주제를 바꾼다.

  "몰몬이 기독교인이 아니다" 라는 비난이 있을 때 마다 보통 사람들의 마음 속에 떠오르는 첫 번째 인상은 후기성도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다는 인상이다. 거의 대부분의 경우에 이 비난을 하는 자들은 후기성도를 모르는 청중이나 독자가 이런 이상을 받도록 의도한다. 그러나 이 주장을 지지하기 위해서 내놓은 주장들 가운데서 정말 문제가 되는 주제는 결코 언급되지 않는다. 후기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가?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며 그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버지에게 나아올 자가 없다고 믿는가? 이런 중요한 질문은 하지 않는걸까? 그것은 바로 후기성도 비평가들은 상자를 열면 논쟁에서 진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후기성도의 믿음을 조금이라도 알고 있는 사람들은, 심지어 후기성도에게 가장 적대감을 갖는 비평가들 조차도 후기성도가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이요 세상의 구세주요 인간이 얻을 수 있는 유일한 구원의 근원이라는 것을 믿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기 때문이다.

  조셉 스미스가 신앙개조 1조에서 언급했듯이 "우리는 영원하신 아버지 하나님과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성신을 믿는다" 복음의 첫째 원리이자 의식인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주장함으로써 신앙개조 1조의 내용을 4조에서 확대한다.

  사실 후기성도들은 매 주일마다 단 하나의 주된 목적을 가지고 교회에 간다.

"교회는 주 예수를 기념하여 떡과 포도주를 취하기 위하여 자주 함께 모일 필요가 있느니라.
그리고 장로나 제사가 이를 베풀어야 하나니, 그는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베풀어야 하느니라 - 그는 교회와 더불어 무릎을 꿇고 엄숙한 기도로 아버지를 부르고 말하기를,
오 하나님, 영원하신 아버지시여, 우리는 당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당신에게 비옵나니, 이 떡을 취하는 모든 사람의 영혼을 위하여 이 떡을 축복하시며 성결하게 하시옵소서. 그리하여 저희가 당신 아들의 몸을 기억하여 먹게 하시옵고, 오 하나님, 영원하신 아버지시여, 또한 저희가 기꺼이 당신 아들의 이름을 받들며, 항상 그를 기억하고 그가 저희에게 주신 계명을 지키고자 함을 당신에게 증거하게 하시오며, 그리하여 저희가 항상 그의 영과 함께 하도록 하시옵소서. 아멘."
(교리와 성약20:75-77)

이 의식은 매주 일요일마다 모든 후기성도 예배당에서 행해진다. 후기성도의 주일 예배의 주된 목적은 하나님의 아들인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우리의 신앙과 결심을 새롭게 하는 것이다. 이것은 가장도 아니며 속임수도 아닌 후기성도가 행하는 핵심 의식이다.

  예수 그리스도 후기성도 교회의 경전은 나머지 기독교 세계가 불쾌하게 생각할 수 있는 그리스도에 관한 그 어느 것도 가르치지 않는다. 본인은 비 후기성도 비평가들에게 그들이 동의할 수 없는 예수그리스도에 관한 몰몬경의 가르침이 정확히 어떤 것인지 묻곤한다. 그러면 이들은 불쾌한 것은 본질적으로 몰몬경이 언급하거나 가르치는 내용이 아니라 몰몬경 그 자체라고 대답한다.

  객관적인 관측자라면 대부분의 경우에 반몰몬들이 후기성도의 경전이 그리스도에 관하여 무엇을 가르치는지 모르거나 관심도 없으면서 후기성도가 몰몬경을 비롯한 책들을 감히 "경전"으로 부르기 때문에 후기성도의 경전을 싫어한다는 것을 알 게 될 것이다. 여러분이 보다시피 그들이 반대하는 것은 그리스도에 대한 후기성도의 교리가 아니라 조셉 스미스가 하나님의 선지자였으며 몰몬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주장이다. 만약 조셉  스미스가 자신을 하나님의 선지자라고 결코 주장 한적이 없었다면, 그리고 몰몬경을 경전으로 주장하지 않고 칼빈이나 루터의 성서 주석처럼 몰몬경을 자신의 성서 주석서로 알렸었더라면 몰몬경이 가르치는 그리스도에 대한 교리는 현대 표준에 비추어 보아도 반대할 만한 내용이 없는 것으로 간주되었을런지도 모른다.

  사실 성서 학자들의 용어를 빌려 표현하자면 후기성도는 고상한 그리스도관을 가지고 있다. 즉 후기성도는 예수는 훌륭한 사람이자 선생이요, 선지자요, 인간이요 나중에 하나님의 아들이 된 요셉과 마리아의 아들이었을 뿐만 아니라 성서만 믿는 다른 기독교인들처럼 예수가 문자 그대로 육체적으로나 유전적으로 하나님의 아들이 된 하나님의 선재하신 말씀이었다고 믿는다. 선재하신 말씀으로서 예수님은 모든 것을 창조하신 하나님 아버지의 대리인이셨다. 영예로운 아들로서 예수는 모든 인류를 구원하는데 있어 아버지의 대리인이시다. 우리는 예수가 성신의 권세에 의해 마리아에 의해 잉태되었음을 믿는다. 우리는 그가 죄없는 인생을 사셨으며  도덕적으로나 윤리적으로 완전하셨으며 병자를 고치고 죽은자를 일으키셨으며 물위를 걸으셨고 빵과 물고기를 여러배로 늘리셨다고 믿는다 우리는 주님이 인간이 따른 수 있는 완벽한 모범을 보이쎳으며 인간은 무엇 보다도 주님의 모범을 따를 의무가 있음을 믿는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대속을 거져오기 위해 주님이 피를 흘리고 인간을 위해 자진하여 희생하시어 십자가에서 고통을 겪으시고 돌아가셨음을 우리는 믿는다. 우리는 주님이 육체를 가지고 부활하셨으며 하늘로 승천하시고 세상의 종말에 하늘에서 내려와 지구에 자신의 왕국을 세우시고 궁극적으로 살아있는자와 죽은자를 심판하실 것을 믿는다.

  마지막으로 몰몬경이 경전으로서 그리고 조셉 스미스가 선지자로서 증거하는 것은 바로 구세주이자 주님인 예수 그리스도다. 몰몬경의 표제에는 몰몬경은 "유대인과 이방인들에게 예수는 그리스도시요, 영원한 하나님으로, 모든 나라의 백성들에게 친히 나타내어 보이신다는 사실을 확신시키기위해" 쓰여졌다고 언급하고 있다. 시드니 리그돈과 더불어 선지자 조셉 스미스는 교리와 성약에 기록되어 있듯이 다음과 같이 증거하였다.

  • 또 이 어린 양에 대하여 여러 가지 건증을 드리더니, 마지막으로 우리가 드리는 어린 양에 대한 간증은 이러하니, 곧 저는 살아계시다 함이니라
      이는 우리가 하나님 우편에 있는 저를 보았고, 또 저는 아버지의 독생자라 간증하는 음성을 들었고,
      또 저로 말미암아, 저를 통하여, 저로 인하여 세상이 창조되어 지금 존재하며 거기 사는 주민은 하나님이 낳으신 아들 딸이라는 간증을 들었음이니라. (교리와 성약(76:22-24)

금세기의 예수 그리스도 후기성도 교회의 12사도였던 브르스 알 멕콩키 장로는 1985년 세상을 뜨기 몇주 전에 예수님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간증을 하였다.

  • 이제 하나님이 피 흘리심으로 가져온 이 완전한 속죄에 관하여 본인은 이 속죄가 겟세마네와 골고다에서 일어났음을 간증합니다. 예수는 살아계신 하나님 아들이며 세상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 돌아가셨음을 간증합니다. 예수는 우리의 주요 우리의 하나님이요 우리의 왕이십니다. 나는 다른 사람과는 독자적으로 이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본인은 주님의 증인의 한 사람으로서 며칠 후에 주님의 손과 발에 난 목자국을 만져보고 눈물로 주님의 발을 적실 것입니다.
      그러나 그분이 하나님의 전능하신 아들이며 우리의 구세주이며 구속주이시며 구원은 주님의 대속의 피 가운데에서 그리고 피를 통해서면 오게 되며 다른 어떤 방법으로도 오지 않음을 지금 알고 있는 것 이상으로 알지는 못할 것입니다.
      약속에 따라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모든 죄로부터 우리를 깨끗이 하실 수 있도록 하나님이 우리 모두가 우리 아버지 하나님이 빛 가운데 계시듯 빛 가운데 걷게 되도록 허용해 주기를 빕니다.
      예수님 이름으로 간증합니다. 아멘
경전과 같은 이 예언적인 증인의 말씀에 본인의 미천한 간증을 덧붙인다. 세상 사람 모두가 후기성도는 예수 그리스도를 모르며,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지도 않으며, 예수 그리스도를 예배하지도 않는다고 말할런지 모르나 나는 우리 후기성도들이 그렇지 않음을 알고 있다. 그리고 만약 이것이 문제의 논쟁이라면 그리고 이것 때문에 후기성도가 기독교인이 될 수 없다면 이 말은 본 뜻을 잃어 버린 것이다.
 

저자에 관하여:

스테반 이 라빈슨(Stephen E. Robinson)은 브리검 영 대학교에서 영문학과 고대 경전학에서 각각 학사와 석사 학위를 받고 듀크 대학교 (Duke University)에서 성서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저자는 장로교회 대학인 Hampden-Sydeny 대학과 감리교회 대학교인 듀크 대학교와 Lycoming 대학에서 종교학을 가르쳤다. Lycoming 대학에서 종신 교수직을 받고 이 학교의 종교 학과장과 펜실 베니아 윌리암포트 예수 그리스도 후기성도 교회의 감독직을 겸임했었다. 어쩌면 저자는 예수 그리스도 후기성도 교회 대학이 아닌 다른 대학 종교학과에서 종신 교수직을 받은 유일한 후기성도일 것이다.

1991년 브리검 영 대학교 고대 경전과 학과장으로 부임한 저자는 대학내의 여러 위원회에 봉사하고 있으며 종교 연구 센터의 값진 진주 분과 과장이기도 하다.

저자의 다른 저서로는 많은 후기성도들이 잘못 이해하고 있는 그리스도의 속죄와 개인의 구원과의 관계를 여러 가지 비유로 명쾌하게 설명한 Believing Christ가 있다. 이 서적은 '몰몬은 기독교인인가?' 와 더불어 후기성도들이 읽는 베스트 셀러로 뽑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