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지부(釜山支部)가 조직(組織)되기 까지
박 재 암
비교적 느리고 조용하던 항구 도시 부산은 6.25 전란으로 전율, 초조, 불안 그리고 적개심이 뒤범벅이 되어 극도의 혼란속에 잠기었다. 그러나 하나님이 한국을 사랑하시는 역사(役事)는 이 혼란기(混亂期)에 서서히 시작(始作)되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경륜(經倫)이 오묘하심을 말해 주는 것이라 하겠다. 복음을 들고 온 세상 방방곡곡으로 나가야할 젊은 미국인 말일성도(몰몬)는 성경대신 총을 들고 한국 땅을 밟았으나 “모든 말일성도는 선교사”라는 멕케이 대관장의 말씀을 한시도 잊지 않고 바울의 교훈대로 기회를 얻던지 얻지못하던간에 주의 말씀 전하기에 온 심혈을 기울였다. 호기심반(好奇心半) 영어공부반(英語工夫半)으로 부산역전(釜山驛前) 공회당(公會堂)에 모이는 LDS집회 시간에 미국인들 틈에 한두 사람의 한국 청년들이 미국인들의 강한 간증과 겸손하고 자비로운 태도에 차츰 감화(感化)받기 시작하였다.
한편으로는 제일차(第一次) 정부(政府)파견 장학생으로 미국 코넬 대학교(大學校)에서 영양학(營養學)을 전공하시고 박사(博士) 학위(學位)를 받으신 김호직 박사(金浩稙 博士)께서 학위(學位)뿐만 아니라 참된 하나님의 교회(敎會)의 회원증(會員證)과 아론 신권(神權)을 가지고 한국(韓國)으로 돌아 오셨다. 수산대학장(水産大學長)의 직분을 맡게된 바쁘신 몸에도 불구(不拘)하고 안식일(安息日)에는 미국인(美國人)의 집회(集會)에 그의 가족(家族)을 동반(同伴)하여 참석(參席)하시게 되어, 미국인(美國人)들 틈에 끼어 서툰 영어(英語)로 간신히 신앙(信仰)이 무엇인지 깨달아 알게 된 한국인(韓國人) 청년(靑年)들에게는 문자 그대로 신앙(信仰)의 아버지로 받들게 되었다.
1954년 9월 7일 경마장 미군부대에서 헤롤드 비. 리 사도님의 설교를 듣고
1954년 당시의 말일성도(몰몬) 군종 목사들
김박사님의 귀국으로 많은 한국인 청년이 한국인집회에 참석함으로 한국인을 위한 주일학교 공과반을 따로 만들고 교사로는 얼마후에 남극동 선교부장으로 부름을 받으신 Heaton 형제가 통역으로는 김박사께서 수고해 주셨다. 1954년 이른 봄에 예배를 마치고
1955년 8월 12사도 정원회 회장이며 대관장단 보좌이신 조셉 필딩 스미스 장로께서 방한해 주셨고 초대 남극동 선교부장으로 임명 받고 임지로 부임하기 전 다시 찾아주신 Heaton 형제를 맞아 부산 서면 히부리야 부대에서 환영 대회를 열었고, 몇 형제들이 직석에서 스미스 장로로부터 신권을 수여 받고 안수식이 있었다. 그 중 한 사람의 영광을 누린 필자는 집사의 신권을 부여 받았었고, 이렇게 신앙 생활을 계속하는 가운데 선교사 파견을 갈망하던 우리들은 스미스 사도님에게서 한국에도 머지 않아 선교사가 파견될 것이라는 회답을 받기에 이르렀다.] 1954년 이른 봄 예배를 마치고
부산 동대신동 검정다리옆 이층 집을 전세로 빌려 주일 예배를 보기 시작했다. 지부장으로 Detton 장로가 수고해 주었고 주일학교를 필자가 맡았었다. 얼마 후에 앤더슨 장로가 동반자로 부임됐고 9월에는 이영범 형제가 한국인으로서 처음으로 선교사가 되어 Fletcher 장로와 같이 부임해 왔다. 이렇게 하여 부산의 회원들은 가족적인 분위기 속에서 서로의 우정을 두텁게 하였고 신앙의 간증을 서로 나누어 가졌다. 그 당시 잊을 수 없는 분은 김도필 자매님으로 신앙의 어머니로서 우리를 도와주시고 늘 격려해 주셨다. 필자인 박재암 형제는 초대 서울 영동 스테이크장을 역임함
서울 성전 기공식에서 박재암 형제 [1983.5.9]
목포 지역에서 (1970. 송명화/선교사/박재암/이범태 형제) |







